보건의료대책위는 서울역서 하는 민노총의 사전집회에 참가했다.
두시 정각.
사전집회 시작려고 준비 중.
아직 빈 곳이 보인다.
보건 쪽은 계단 쪽에 모여 있었다.
계단에 앉아서 보니, 깃발만 보인다.
어느 노래에 나오는 '깃발만 나부껴'
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시위는 깃발이 유독
많은 것 같다.
파란 우비에 흰 조끼를 쓴 팀이
보건의료팀.
이곳의 인파는 서울역 광장을 꽉 채우고
그 너머의 택시 승강장과 계단까지 꽉 찼다.
대전서 11시에 출발한 팀은 차가 너무 막혀서
중간에 내려서 시청으로 바로 걸어 간다고
연락이 왔다.
사전집회 후에 시청 쪽으로 이동중.
확성기를 어깨에 건 root회원.
시위에 젊은 사람이 안보인다고 했는데,
보건의료 쪽은 학생들이 더 많았다.
(물론, 보건의료 노조를 빼고....)
길이 막힌 기본 원인은
시위대가 차로를 점거했기 때문도 있지만,
시위대가 도로로 나가기 전부터 막힌 것으로 보아
길양측에 전국에서 시위대를 태우고 온 관광버스들이 주차해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일거다.
남대문을 지나 시청 쪽으로...
보이지 않아서 시위대의 수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비가 많이 와서인지, 저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청앞에 모인 시위대.
시위에 참석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정말로 87년 6월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을
본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대열의 거의 끝부분에 따라가던 보건의료부문은 덕수궁 입구 근처에서 더이상 가지 못했다.
이곳에서 시위대가 크게 3 줄기로 나뉘었다. (아래 지도 참조)
따라서 유사시 응급처치 하고 병원으로 이송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보건의료팀도 셋으로 나뉘었다.
나와 최모 선생, 그리고 학생들은
을지로~ 안국역~ 경복궁 쪽으로 가는 쪽에 합류했다.
을지로~ 안국역~ 경복궁 근처까지는 별다른 제지 없이 갈 수 있었다.
전경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광화문, 청와대, 신라호텔 이외의 지역은 지키지 않은 듯 하다.
경복궁 입구에서 경찰의 제지가 있어 방향을 꺾어 종로쪽을 향하다가,
나름대로는 기습적이라고 생각하면서 - 종로구청 쪽으로 골목을 통해 뛰어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미 대사관 건물이다.
이곳에 전경버스들이 있었는데,
처음 도착했을 때는 전경들이 급히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전경 버스와 상가건물 사이의 1미터 폭의 틈새.
이곳을 통해 진출하려고 시위대와 전경이
30여분 실랑이를 했다.
몸싸움으로 부상자가 몇 명 생겼고,
전경들이 최루 스프레이를 살포했다.
시위대의 응급치료팀이
전경 부상자에 대해 응급처치 하고 있다.
타박상.
스프레이로는 안되었는지,
본격적으로 최루 가스 살포.
90년대 이후로 최루 가스를 맡은 건 처음인
것 같다.
최루가스의 강도는 예전보다 훨씬 약했음.
버스 뒤쪽의 본대로부터 격리된 전경들.
식당 입구와 계단에 피해 있다.
시위대는 이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시위대도, 전경들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킨 것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전경들이 마치 밀리는 듯(?), 길이 트였다.
좁은 틈을 통해 이곳을 지나니, 전방에는 더 많은 수의 전경들이 있었다.
종로구청의 전경들은 본진의 준비가 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한 것이었고,
준비가 끝나자 길을 내어 준 것이었다.
미 대사관 근처에서 기다리던 전경은 사뭇 달랐다.
마치 옛날의 '백골단' 처럼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면서, 그리고 큰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위협용'이라고 믿고 싶지만,
저항하려는 사람은 진짜로 곤봉으로 때렸고,
한 전경은 시위자를 겨냥해서 방패로 찍은 것이,
시위자가 몸을피하자, 그 뒤의 자가용 차 옆면이 푹 패였다.
순간적인 반격, 그리고
천 명은 훨씬 넘는 전경의 수에 압도되어서
시위대는 교보 뒷쪽을 통해 종로로 물러나야 했다.
폭력적인 진압을 처음 본 한 여학생은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가 벌써 저녁 8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많이 빠져나갔고,
나도 이때쯤 해서 귀가했다.
후기 1. 족히 6시간은 걸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후기 2. 우비를 쓰고, 방수가 되는 배낭을 맸음에도 불구하고, 옷과 배낭 속의 물건들이 쫄딱 젖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은 넣어가지 않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