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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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전혀 가혹하다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돌로레스가 남편 조를 죽인 일이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살인은 나쁜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게 더 나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가 그랬다. 조가 돌로레스를 '패는' 남편이어서가 아니다. 그것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짓을 그는 저질렀고,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내내 두려움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면, 나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렇게 옷의 먼지를 털듯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끔하게 지워낼 수도 잊혀지는 종류의 일도 아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돌로레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 



오래전에 스티븐 킹의 단편선을 한 권 읽고는 우앗, 너무 무서워서 나는 앞으로 스티븐 킹을 읽지 않을 거야, 라고 결심했더랬다. 그때의 그 공포라니! 기억하기로는 <옥수수밭 아이들>이 가장 무서웠다. <트럭>도 무서웠고, <금연 주식회사>도 무서웠고 ㅠㅠ 아아, 이 사람이 쓰는 소설을 나는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사두고 몇 년을 그냥 꽂아두기만 했는데, 하필이면 연휴끝인 어젯밤 집어 들었고, 아아, 스티븐 킹 아저씨가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게 쭉쭉 빨려들어가게 글을 써주셔서 ㅠㅠ, 아니, 그랬기 때문에!! 나는 새벽녘까지 책을 한 순간도 덮지 않고 다 읽어버리고 만것이다. 덕분에 세 시에 잤어요. ㅠㅠ 잠들기전에 이런 책을 읽으면 안되는데.. ㅠㅠ 오늘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 힘들었겠어, 안힘들었겠어.


게다가 세 시에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오지도 않았다. 이 책에서 느꼈던 공포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에. 무서워 ㅠㅠ 그래서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야 했다.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킹 아저씨 작품을 이제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겠다. 공포물은 좀 빼고 ㅜㅜ


곳곳에 명문들이 있다. 이런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자네는 항상 착한 아이였지. 남자 아이치고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얘기야. 게다가 이제는 버젓한 남자가 됐어. 하지만 너무 으스대지는 말라고. 자네도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자랐으니까.빨래를 해 주고, 콧물을 닦아 주고, 자네가 잘못된 쪽을 향하고 있을 때 돌려세워 줄 여자가 항상 옆에 있었다는 얘기야. (p.16-17)

우리 아버지가 벌을 내리면 엄마는 그걸 받아들였어. 하지만 아버지나 엄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어. 어쩌면 엄마는 남편의 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엄마를 벌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으면 항상 같이 일하는 남자들한테 얕잡아 보였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절이 달랐으니까.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가 애당초 얼간이처럼 조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 인간이 그런 짓을 하는 것까지 참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을 하는 거냐, 나무 상자에서 꺼낸 장작개비로 매질을 하는 건 절대 가정 바로잡기가 아냐. 그래서 나도 조 세인트 조지 같은 사람, 아니 그 어떤 남자라도 나한테 그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p.98-99)

내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까 그 여편네가 좀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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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2-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은 대단한 작가이지요. 저도 가끔 그의 작품을 손에 들면 그대로 끝까지 갑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6-02-12 15: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 새벽까지 읽느라 고생했어요. 그리고 내내 감탄하며 읽었답니다. 명문이 가득한 좋은 소설이었어요!

moonnight 2016-02-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예요. ^^

다락방 2016-02-12 15:15   좋아요 0 | URL
저도 기꺼이 엄지를 줄 수 있는 작가에요!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스티븐 킹의 작품이 많아서 좋아요! 꺅 >.<

hnine 2016-02-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옛날, 극장 (영화관이 아니라 극장이라고 부르던 시절)에서 봤어요. 미저리의 여주인공, 누구더라...캐시 베이츠! 그녀가 돌로레스 클레이본으로 나오지요? 미저리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스티븐 킹이 쓰고 재미없는 책이나 영화도 있을까 싶어요.

다락방 2016-02-12 15:16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래전에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을 읽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아 정말 읽기를 잘했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책이었어요.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영화도 좋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저도 기회가 되면 영화를 봐야겠어요. 물론 책으로도 충분했지만요.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clavis 2016-02-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던집니다용♡♡

다락방 2016-02-12 15:17   좋아요 0 |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기꺼이 받습니다용 ♡♡

2016-02-1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2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6-02-1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한다는
소설의 한 구절이 인생의 한 단면을 축소시킨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한번씩 못된 사람이 되어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인 것 같아서... *^^

다락방 2016-02-15 08:27   좋아요 0 | URL
특히나 여자들이라면 못된년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못된 년은 문자 그대로 못된 년 이라기 보다는 남자들이 보기에 못된인거지만요.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 소박한 미식가들의 나라, 베트남 낭만 여행
진유정 지음 / 효형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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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좋을 확률이 적다. 내게는 그렇다.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알아볼까 싶어 찾아봤다가는 지루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과 사진들만 보게 되어서 심드렁해지곤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도무지 여행기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기란

 

1. 가보고 싶게 만들 것

2. 지나치게 자기 감상에 젖어있지 말 것

 

이었는데, 이 두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여행기를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우연히-도무지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모르겠다 ㅎㅎㅎㅎㅎ- 읽게된 이 책은 내가 생각하는 이 두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켜 주었다. 나는 베트남에 대해 그간 관심이 1도 없었는데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는 거다. 게다가 글들이 정갈하고, 저자가 좋아하는 국수에 대해 성심성의껏 적어둔 터라, 아, 나는 면덕후도 아닌데, 심지어 면은 별로 좋아라 하지도 않는데!! 국수 먹으러 베트남 가고 싶어지는 거다. 꺅 >.<

 

책을 읽다 말고 달력을 펼쳐두고서는 언제쯤 가볼까, 가만가만 따져보았다. 비행기 가격이 저렴하다 싶으면 내가 시간이 안되는 때였고, 내가 시간이 되는 때에는 비행기 가격이 높더라. 에헤라디여~ 한 이박삼일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저자는 베트남을 사랑하는데,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수를 찬양한다. 국수 때문에 베트남에 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여행이며,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런 여행기가 아닌가. 이 여행기는 자신이 해야할 몫을 충실히 해냈다.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갈것이다!!

 

먹고 싶은 국수에 대한 글들을 밑줄긋기 해놓고 이 책을 중고샵에 팔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옮겨 적다가 팔 빠질 것 같아 일단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와,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다니. 살면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여행은 결국 먹는 것인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난다.
아무도 내가 당도할 것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는 낯선 정거장에서 버스나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그리운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설사 그런 행운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떠나고 싶은 곳, 닿아야 하는 곳이 있다는 건
틀림없이 멋진 일이다. (p.25)

(분보후에) 살짝 데친 야채를 넣고 맛본 첫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힘줄이 섞여 쫄깃쫄깃한 소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 비워버렸다. 학교에 가기 전이라 땀을 그렇게 쏟으면 안 되는데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 이후로 분보후에를 혼자도 먹고, 학생들과도 먹고, 호찌민에 놀러 온 친구들과도 먹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먹으면서도 질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p.60)

뭐니 뭐니 해도 분짜의 가장 큰 매력은 직화에서 비롯된다. 불 맛을 풍기는 고기에 달콤한 소스가 살짝 스미면 그야말로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동남아시아 음식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 입만 먹어보면 앉은자리에서 두 그릇도 먹게 되는 음식이 바로 분짜다. 하노이를 여행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분짜 냄새와 연기에 꼼짝없이 이끌리게 될 것이다. 숯불에 굽는 맛있는 냄새와 연기에 사로잡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길모퉁이에 작은 선풍기가 놓여 있다면, 탄을 피우고 있다면, 석쇠에 무언가 굽고 있다면 일단 못 이기는 척 들어가라. 한번 맛보면 뿌리칠 수 없는 맛이 거기에 있다. (p.106)

이별 후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헤어진 그날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존재는 간사해서 곧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진짜 배고픔에서 기인하든 마음의 허기에서 비롯되든 말이다. 바로 그때, 아직은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힘은 없지만 어김없이 배가 고파와 당혹스러울 때 국수만큼 어울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p.120)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동네에 모여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적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들이 나를 위해 모여 살아주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겠지만 상상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허무맹랑한 그 바람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내가 사랑하는 나라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행운을 얻었다.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테국이 모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으니 여행자로서 나는 대단한 행운아다. 다정하게 옆에 붙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웃 나라들로 언제라도 훌쩍 넘나들 수 있으니. (p.187)

손님이 그릇을 비우면 가인항은 의자를 한쪽에 걸고 유유히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눈앞에서 바로 요리해주는 따뜻한 음식이 길거리에 넘치는 나라, 베트남. 멋진 시설을 갖추고 빠르게 달리는 푸드트럭 부럽지 않은 수천 개의 `푸드 가인항`이 여기에 있다. 여행에 지쳐 걷기도 힘들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도 싫다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다려보라. 푸드 가인항이 곧 당신에게로 걸어올 것이다. (p.155)

(퍼싸오보) 재빨리 소고기를 볶고, 라우까이라고 불리는 야채를 숨이 죽을 정도로만 살짝 볶고, 거기에 미리 볶아둔 면을 넣어 한 번 더 볶아 수분을 날려준다. 이 과정으로 면발은 더 쫄깃해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삭힌 고추 소스를 더해주면 금상첨화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 매콤한 자극에 야채의 신선함까지.

안 되겠다.
아무래도 맥주 한 병 시켜야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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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L 2016-02-1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베트남 호치민입니다 ㅋㅋ
이렇게 맛있는 국수는 못 먹고 귀국할 것 같지만... 다락방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ㅋㅋㅋ;;

다락방 2016-02-11 12:04   좋아요 0 | URL
아니, 호치민에 계십니까!!
저는 베트남에 다른 음식들은 뭐가 더 있는지 몰라서, 일단 국수 먹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국수를 못 드시고 귀국하신다뇨. ㅎㅎㅎㅎㅎ

반가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힛.

프레이야 2016-02-1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쌀국수 좋아하는데‥훅 당기네요. ^^ 마음 먹으면 가까운 곳인데 말이죠

다락방 2016-02-11 12:0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우리가 간혹 먹는 그 쌀국수 말고 다른 국수들이 지천인가봐요! 어쩐지 신나요! 꺅 >.<
물론 언제갈지는 알 수 없지만 말예요. ㅎㅎ

단발머리 2016-02-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 연휴에 아빠랑 단 둘이 만나 베트남 쌀국수를 후르룩 먹었다지요. ㅎㅎㅎ
역시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한가요?

다락방 2016-02-11 12:07   좋아요 0 | URL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기 보다는... 저는 음식 때문에 여행 가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6-02-1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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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와 또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친구 덕에 윤동주가 죽기 전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머리가 멍해지더라. 뭐라고? 그리고 오늘 알았다. 감옥에 갇힌 동안 윤동주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뭔지 알 수 없는 주사(생리식염수였다)를 맞았고 결국 그렇게 그들처럼 죽어갔다는 것을.

 

 

이 무렵 만주의 일본군은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 등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주사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이 동상에 걸리는 시간과 정도를 본다며 포로를 냉동고에 가두기도 했다. 전방에서 관동군 731부대가 그러한 실험을 하고 있다면, 후방에서는 육군성의 지원을 받은 제국 대학 의학부가 맡아 하고 있었다. 규슈 제국 대학 의학부도 그중 하나였는데, 실험 대상자는 감옥 안의 죄수들이었다. 규슈 제대 의학부의 제1외과장 이시야마 후쿠지로는 혈장 대신 생리적 식염수를 사람의 혈관에 넣어도 되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만약 식염수로 대체해도 된다면 식염수는 전쟁터에서 그 어떤 무기보다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시급하게 수혈해야 할 부상병들은 많았고, 필요한 혈장을 다 감당할 수도, 공급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나 죄수들이 생체 실험 중 사망해도 책임지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실험을 계속해 갈 포로와 죄수는 많았다. 독립운동 관련 조선인 사상범들을 후쿠오카와 구마모투 형무소로 모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시야마 교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실험을 계속했다. 포로가 된 미군 B29기의 조종사와 승무원들도 실험 대상이었는데, 그들은 농도 짙은 식염수 주사를 맞고 생체 해부까지 당하다 결국 죽어 갔다. (p.294-295)

 

 

 

책을 읽다보면 날짜가 자꾸 나오는데, 그래서 초조해졌다. 이미 마지막을 알면서 읽는 책인데도 초조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해방이다, 라고. 그러나 윤동주는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죽었고, 이미 끝을 알고 있던 나였지만, 하염없이 무력함을 느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지난해 말에 나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애수의 소야곡」이었다.계절에 관계없이, 마음을 뜯는 기타 전주가 들려오면 순식간에 가을 저녁의 쓸쓸함에 젖어 들게 되는 노래였다. 삼불이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의 노래인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다는 목소리의 주인공, 바로 그 남인수가 아닌가!"

삼불은 노래를 따라 불렀고, 동주와 벗들도 함께 흥얼거렸다. 유성기 소리는 멀어졌지만, 동주와 벗들의 노래는 광교 거리에서 계속되었다. 젊은이들이 끝까지 부르는 3절 노랫말은 더욱 애틋했다.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거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p.46-47)

하숙방에서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 동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동주의 문학 공부는 그새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 것 같았다. 영어 실력도 크게 늘어 시나 소설은 우너서로도 많이 읽는 모양이었다. 금서가 되어 볼 수 없는 책도 학교 도서관에는 잘 찾아보면 있다 했다. 도서관의 책들을 보며 동주는, 양심적인 지성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며, 사람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보편적인 선함, 정의감, 인류애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고도 삭막한 이 시대를 버텨 갈 힘이 되기도 했다. 동주의 이야기는 당숙 윤영춘에게도 모처럼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전쟁 구호와 총궐기의 함성으로 가득한 수도 도쿄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를 영어 가르치는 일에 맥 빠지고 지치기도 했던 것이다. (p.251)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의 책들을 두루 읽다 보니, 새삼 발견되는 게 있었다.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살마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p.253)

병욱은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고 싶어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자필 원고를 아직도 갖고 있었다. 학병이 되어 전쟁터로 떠나기 전, 광양 망덕리 집의 어머니에게 맡기며 신신당부했다. 일본 순사의 눈에 띄지 않게 동주 형의 원고를 잘 간수해 달라고. 조선이 독립되고 자신이나 동주 형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원고를 꼭 연희 전문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도 했다. 조선 글자를 보기만 해도 벌벌 떨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두려워하면서도 마루 밑 항아리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간 아들의 당부를 끝내 지켰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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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02-11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주>개봉하면 꼭 보러 가려구요.
동주역의 강하늘도 좋지만, 몽규역할의 배우 연기가 정말 좋다고 하더군요.

이책 일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아 진짜 뭔가 되게 서러웠어....ㅜ..ㅜ

다락방 2016-02-11 12:03   좋아요 0 | URL
계속 괜찮다가 다 읽고나니까 가슴이 뻐근하더라고요. 다 읽고 밥먹었는데, 뭔가, 내가 이렇게 밥 먹어도 되나 싶고.... 그래도 다 먹었지만 --;;

분하고 서러웠어요, 아무개님. 영화는 안볼래요. ㅠㅠ
 
당신의 목소리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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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이 책 재미있다. 처음부터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성경을 이미 읽어본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지만, 어릴적에 교회 다니면서 잠깐 들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 또한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도 이미 아는 이야기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유명한 성경속 이야기들에 대해 주제 사라마구는 '깐다'. 성경과 여호와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에 어쩐지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랄까.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을 백쪽쯤인가 읽고 중고샵에 팔아버렸는데, 그 책을 다 읽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히친스'의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와,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까지, 이 책, [카인]과 함께 읽으면 뭔가 풀셋트일 것 같다. 아, '닐 게이먼'의 [멋진 징조들] 도!!




옮긴이는 이 책을 '구약의 재해석' 으로 평가하던데, '재해석'이란 표현은 너무 얌전한 게 아닌가 싶다. 아하하하. 

'신약의 재해석'인 [예수복음]이란 책도 있다던데 찾아보니 2010년에 국내에 나온 책이더라. 이것도 읽어봐야겠다. 아하하하. 밑줄 그을 부분이 너무나 많았어!






만들어진 신 다시 사야겠다. 하하하하.





둘째로, 여호와가 앞날을 보는 데 개탄할 만큼 둔했다는 것인데, 만일 정말로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냥 그 나무를 심지 않거나 다른 곳에 두거나 철조망으로 둘러싸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p.14)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묻자 카인은 질문으로 대답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네가 네 아우를 죽였구나. 네, 죽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주이십니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를 시험하는 문제였다. 주께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 나는 만물의 주권자인 여호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존재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좋지만, 저와 내 자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뭐, 죽이는 자유 말이냐. 주에게 내가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을 자유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p.39)

저곳을 덮은 피는 내가 흐르게 한 것이 아니며, 너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악을 택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망을 봐주려고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포도밭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둑입니다, 카인은 말했다. (p.40)

이삭이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는 저를, 아버지의 독자를 죽이고 싶어 하셨나요.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이삭. 그런데 왜 마치 제가 어린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목을 따고 싶어 하셨나요, 아들이 물었다, 만일 그 사람,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기를, 그 사람이 나타나 아버지의 팔을 잡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지금 시체를 안고 집에 가시는 중일 겁니다. 그건 여호와의 생각이었다, 시험을 해보시려는 거였지. 무엇을 시험하는데요. 나의 믿음과 나의 복종을. 도대체 무슨 하나님이 아버지더러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까. (p.97-98)

사람들은 사전이나 통역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바스크어로 말하고 있었고, 일부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심지어, 누가 생각이냐 했겠냐만, 포르투갈어로 말하고 있었다. 왜 이런 부조화가 일어난 겁니까, 카인이 묻자 남자는 대답했다, 우리는 동쪽에서 이곳에 정착하러 왔지요,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했어요. 그 언어는 뭐라고 불렀나요, 카인이 물었다. 그거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언어였죠. (p.102-103)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벌을 받아야 했는지 그 이후로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호기심을 치명적인 죄로서 벌하고 싶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지능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다. 만일 하와가 아담에게 그 열매를 먹으라고 주지 않았다면, 하와 자신이 그것을 먹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 생활이 얼마나 지루할지 잘 알고 있다. (p.116-117)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우연히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이야기를 했던 곳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고, 그때 카인이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p.117)

모세는 선언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야영장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다. 이런 식으로 거의 삼천 명이 죽었다. 땅에서 솟아 나온 큰물처럼 천막들 사이로 피가 흘러, 마치 땅 자체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에나 목이 베었거나 창자가 밖으로 늘어진 채 둘로 갈라진 몸통이 늘어져 있었으며, 부녀자들의 비명은 너무 커서 여호와가 복수를 기뻐하고 있을 시나이 산 꼭대기에도 이르렀을 것이다. 카인은 눈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여호와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으니, 여기, 시나이 산 아래 그의 사악함을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에, 그런 경쟁자로 여겨지는 존재를 만든 것에 여호와가 분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있었던 것이다. (p.121-122)

카인은 릴리스에게 여호와로부터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 이라는 사람, 또 하늘에 닿기를 바라던 사람들이 지은 거대한 탑과 그것을 여호와가 허리케인으로 땅에 쓰러뜨린 사건, 또 남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동침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도시와 여호와가 미래에 무엇을 바라게 될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들 위에 벌로 불과 유황을 내린 사건, 또 시나이라고 부르는 산의 기슭에 모인 엄청난 사람들과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가 그 죄로 죽임을 당한 사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알려진 군대에 속한 서른여섯 명을 감히 죽인 도시와 마지막 어린아이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 주민, 또 여리고라고 부르는 다른 도시와 그 성벽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몇 개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로 무너지고 안에 있던 모든 것, 남녀, 노소, 심지어 소, 양, 나귀까지 다 죽은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p.153-154)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카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디에서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발견했는지 의아했다. 너는 왜 네가 그런 경험을 할 사람으로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요, 내가 선택받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배웠어요. 그게 뭔데. 우리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 감히 여호와 하나님이 미쳤다고 말하는 거야. 오직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미친 자만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직접적임 책임이라고 이정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겁니다, 물론 진짜, 진정한 광기에 사로잡힌 경우가 아니라 진짜 단순한 악에 불과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하나님은 절대 악할 수가 없어, 악하다면 하나님이 아니지, 악은 악마에게나 해당하는 거야. 하나님이라 해도 단지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식을 죽여 장작 위에 올려놓고 태우라고 명령하는 건 옳을 수가 없어요, 가장 사악한 악마라도 어떤 사람한테 그런 걸 명령하지는 않을 겁니다. (p.154-155)

당신도 내가 본 것을 보았다면 같은 여자일 수가 없을 겁니다, 하늘의 불로 타서 재가 되어버린 소돔의 아이들을 보았다면. 소돔이 어디야. 남자가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도시지요. 그래서 모두 죽임을 당한 거야. 모두, 한 사람도 탈출하지 못했어요, 생존자는 없었어요. 그 남자들이 냉대한 여자들도, 릴리스가 다시 물었다. 여자들도. 여자란 게 그래, 비에 당하지 않으면 바람에 당하지. 어쨌든 이제 죄 없는 사람들은 죄인의 대가를 치르는 데 익숙해졌어요. 여호와는 정의 관념이 아주 이상한 모양이군. 네, 인간의 정의가 어때야 하는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의 관념입니다. (p.155)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여호와와 사탄이 내기를 했는데, 이 욥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두고 하나님과 악마라는 두 도박사가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네요. 그렇지, 두 천사가 목소리를 합하여 소리를 질렀다. 여호와가 그렇게 하는 건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카인이 말했다. 만일 내가 들은 대로 욥이 그 모든 부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맞고 또 신앙도 깊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돈과 소유를 모두 잃는 벌을 받을 참이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가 의롭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이 떠오르는군요,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지요,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p.162-163)

카인은 인간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동지애와 우정의 유대라고 묘사할 수 있는 관계를 확립한 천사 둘에게, 정말로 지금 인류를 멸하고나면, 그다음에 나오는 인류는 똑같은 오류, 똑같은 유혹, 똑같은 어리석음과 범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천사에 불과해, 우리는 네가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는 이 불가해한 그림자극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어떻게 두 번째 실험이 첫 번째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첫 번째 실험은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일련의 긴 참사들로 끝이 났는데 말이야, 간단히 말해서, 천사로서 우리의 솔직한 의견으로는, 모든 증거를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삶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아. 정말로 인간이 살 자격이 없다고 믿나요, 충격을 받은 카인이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한 말은, 반복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행동을 살펴볼 때 그 많은 어두운 면, 그 모든 아름다움, 웅장함, 장엄함이 있는 삶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한 천사가 대답했다.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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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2-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인 읽고 있어요. ^^

다락방 2016-02-02 16:29   좋아요 0 | URL
오, 문나잇님은 어떻게 읽고 있나요? 어때요?

moonnight 2016-02-02 16:32   좋아요 0 | URL
아직 40페이지정도밖에 안 읽었어요.ㅎㅎ 그런데 웃겨서 몇번 ㅋㅋ했어요. 여호와도 아담과 이브도 약간 코미디영화 ^^ 다락방님 재밌다하시니 계속 기대@_@;

다락방 2016-02-03 08:37   좋아요 0 | URL
저는 무척 좋았어요. 신약 재해석이라는 [예수복음]도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아 이런 거 너무 좋아요.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되게 욕먹을 책일 것 같아요. 하핫

유부만두 2016-02-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2복음`을 읽었는데요 웃기기보단 완전 비극으로 (복음이 없으니까요) 틀어서 쓴 이야기라 헉, 하면서 빨려들어 읽었어요. 책 괜찮았어요. 종교가 관련된 책이라 심하게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꽤 멋진 책이에요.

다락방 2016-02-03 08:37   좋아요 0 | URL
제2복음은 절판이고 지금은 [예수복음] 으로 나와있는 것 같아요. 궁금해져서 이것도 읽어보려고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말씀하신것처럼 호불호가 아주 극명하게 갈릴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좋습니다, 이런 책!

무해한모리군 2016-02-0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어서 읽어보고 싶네요 아응!

다락방 2016-02-03 08:37   좋아요 0 | URL
저는 읽으면서 막 신나더라고요! >.<

조 가저리 2016-02-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다락방 2016-02-03 08:38   좋아요 0 | URL
저는 `카인`이란 제목부터 호기심이 생겨서 주제 아저씨 책은 처음 읽게 된건데, 오 좋았어요!

alummii 2016-02-0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싶어지네요ㅎㅎ

다락방 2016-02-03 08:38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히히

징가 2016-02-03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 했습니다

다락방 2016-02-03 08:38   좋아요 0 | URL
네, 다 읽으신 후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transient-guest 2016-02-0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했슴다!

다락방 2016-02-03 09:34   좋아요 0 | URL
저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다시 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백 쪽 읽고 더이상 안읽어서 팔아버렸는데 ㅎㅎ

노란곰 2016-02-0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겠어요! 만들어진 신도 읽어보고! ㅎㅎ

다락방 2016-02-03 10:44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신은 두께가 있으니까 일단 러셀과 히친스를 추천합니다! 꺅 >.<

머큐리 2016-02-0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ㅎㅎ

다락방 2016-02-03 18:00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도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아요. 아, 저는 정말 신났어요. 히히.

건조기후 2016-02-03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때 기독교개론 교필이어서 억지로 듣고 엄청 까는 레포트 냈다가 C 받았던 기억이 ㅋㅋㅋ 까더라도 이렇게 멋지게 깠으면 C는 안 받았을텐데 말입니다 ㅎ 구구절절 완전 재밌네요! 저도 장바구니로 ^^

다락방 2016-02-03 18:00   좋아요 0 | URL
기독교개론.. 이라니. -_- 엄청 까는 레포트에 c 라니, 잘 받으셨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라마구 님의 이 책 읽어보시고 다시 까는 레포트 쓰시면 점수 잘 나올 것 같아요! ㅎㅎ
밑줄 재미있죠? 저도 읽으면서 막 짜릿짜릿 해서 좋았어요. 히힛 이런 거 너무 좋아요! >.<

에이바 2016-02-0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밑줄 꼼꼼하게 읽었어요. 다시 읽으니 재밌습니다. 제가 그은 밑줄이랑은 조금씩 다른데 페이퍼에 한 번 써 봐야겠어요. ㅎㅎ

다락방 2016-02-03 17:59   좋아요 0 | URL
40페이지의 `망을 봐주려고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포도밭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둑입니다` 라는 문장이 너무 좋은 거에요! 여호와한테 한 방 먹인 기분이 들지 뭡니까! ㅎㅎ

에이바 2016-02-03 18:15   좋아요 0 | URL
제가 그은 밑줄은 좀 더 원색적인 디스였네요... 헷

서상권 2016-02-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현학적인 삶을 즐기는 듯 보입니다. ㅎㅎ 글쎄요. 세상 모든 일에 자기 주관을 가지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오지랖 넓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마치 축구장 와서 야구 룰 적용한 해설한다는 느낌??? 적정한 비유는 아닌지 알면서도 설명드릴 능력이 박약하여... 뭐든지 비틀어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바닥 심성이기도 하지만. 종교는 믿는 사람들만 평가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요? 믿지 않으시는 분들은 그들대로의 삶이, 믿는 바보들은 그들대로의 삶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남을 위해서까지도 기도하는 믿는 사람들이 보다 생산적인 구성원이 아닐지... 필요하시면 가지고 있는 ˝The God delusion˝ 보내드릴 수 있어요.

다락방 2016-02-10 18:08   좋아요 0 | URL
뭐든지 비틀어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바닥 심성이기도 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빠가 까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종교는 `믿는 사람들만 평가할 자격이 있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가 없군요. 저의 경우 교회를 다닌 오랜 기간동안에는 그 안에 있어서 오히려 문제를 볼 수 없었거든요. 바깥으로 나오고나서야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었는지 보였습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그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황인규 2016-02-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인간이 감히 알 수 있는걸까?
기독교에서는 신을 매개로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논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 같아서 반감이 많았는데...
주제 사라마구가 아주 신랄하고 해학적으로 까주는군요...
만약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제 생각에는 그 신이라는 존재는 아주 잔인하거나, 아무 생각없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거...
전지전능한 신이라면서 인간에게 왜 시험에 들게 하고 삶에서의 고통을 주고 하는 것인지...
그것도 다 의미가 있는 거라고? 정말 잔인한 존재로군. 꼭 그렇게밖에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없는건가?
신이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함부로 결론내릴 순 없겠지만... 적어도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문화적 부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것!

황인규 2016-02-1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얼마전에 샀는데 얼른 읽어야 겠네요.
아주 기대 됩니다.
다락방님 말씀처럼 관련 서적들 모두 사서 읽을 계획입니다. ^^

다락방 2016-02-10 18:0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칭찬보다는 비판이기 때문에, 비틀어대는 글이기 때문에 더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을 더 잘 알았다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도 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도 관련 책들을 천천히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세요!
 
애가 타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어딘가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보고 읽고 싶었었는데 품절이라 실로 애가 탔었다. 그렇게 중고알림등록을 신청해놓았었고, 드디어 겟! 해서 기쁜 마음으로 봤는데, 제일 처음에 실린 단편 <애가 타다>를 읽고 멘붕.. 이거, 계속 읽어 말어? 처음 실린 단편이 이렇다면 그 뒤의 단편들은.. 읽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하고 고민고민하다가, 아니야,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지마, 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읽었는데, 하하하하, 역시 첫 단편이 이렇다면 그 다음 단편들도 마음에 안들긴 마찬가지일거라는 내 판단은 옳았다. 독서경력이 쌓이면서 이제 척 하면 착 이 되어버렸달까. 제기랄. 내 느낌을 믿을걸.


그러니까 단편에 등장하는 주연,조연 모두가 다 병맛 캐릭터인 거다. 첫번째 단편의 <애가 타다>는 삼십대초반(31이었나 30이었나 그즈음)의 여성이 24살의 젊은 남자랑 연인인지 뭔지 모를 관계로 지내는 이야기인데, 그녀는 남자를 좋아해서 더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면 흉해보이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는 거다. 



결국 깨질 때 깨지더라도 박터지게 부딪혀보자는 일념으로 마호코 씨는 전근 간 뒤 연락 없는 남자를 만나러 훗카이도로 간다. (p.278,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옮긴이라면 책에 대해 반드시 좋은 말만 써줘야 할까? 그렇다면 그도 못할 일이겠다,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저 옮긴이의 말을 보면 뭔가 여자가 과감한 결심을 하고 용기를 낸 것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읽은 본문에서는 그렇다기 보다는 좀 끔찍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근이라 이사를 갔고 그래서 바쁘다고 연락도 잘 안하는 남자를 여자는 무작정 찾아가는 거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의 집이 어디다, 라고 데려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물어물어 찾아가서는, 우편함에 세 차례에 걸쳐 쪽지를 써서 넣는다. 이건 뭐... 내가 이 여자의 상대였다면 너무나 불쾌해지는 일인 것이다. 아, 너무 싫어. 이건 사귀는 사이라도 싫은데 관계가 뭔지 애매모호한 사이에는 더 불쾌한 일 아닌가. 싫다. 아니, 그러니까, 또 이 못난이 젊은 남자는, 왜 또 여자한테 확신을 안줘? 여자가 '아닌가보다' 포기할라치면 남자는 또 '기다려줘요' 이딴 소리를 해대니까 여자는 다시 희망을 갖고 이러는 거다. 애초에 미적지근하게 만났다가 연락없다가 기다리랬다가 같은 개수작 부리지 말고 노선을 확실히 했으면 사실 여자도 이렇게 애가 타서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닌가. 물론 연애는 저마다의 것이지만, 상대에 따라 다른 내 모습이 나오는 거지만, 나 또한 병맛 연애를 해본 적이 있지만, 어쨌든지간에 진짜 병맛 캐릭터들의 병맛 관계였다. 어휴.. 여자가 노선을 확실히하기 위해 움직인 것은 맞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었다.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게 둘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혹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 젊은 놈이 못하니까 전전긍긍하는 여자가 하려던 거였는데, 어쨌든 좀 거시기했다. 짜증..



옮기이는 이 책이 노처녀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되게 구린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중간에 나는 이 작가가 몇년생인가, 다시 작가의 말을 봐야 했다. 왜 대체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하고.



스도 안네는 전업주부다. 남편의 벌이로만 생활하고 있다. 유부초밥인지 즉석식품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만 준비하면 마음대로 놀러다녀도 되는가보다. 아주 팔자 좋네, 하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것은 내 심성이 곱지 않아서일까. (한 걸음 더, p.247)



하아- 한숨이 났다. 이건 심성이 곱지 않아서가 아니다. 심성의 문제가 아니다. '시선'의 문제다. 책 속 노처녀들은 모두 남자를 사귀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게다가 남자를 사귀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인정'받고 싶어한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 받고 싶어하는 걸까? 그러면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꿈꾼다.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해 회사에서도 남자사원들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도맡아하는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고마도리 씨 이야기>는 그중 가장 끔찍하다. 회사의 남자직원들에게 '좋은 신부가 되겠어' 라는 말을 듣고 자기가 정말 좋은 신부가 되겠다고 믿는 여자라니, 그렇게 직원들의 담배를 사다주는 여자라니. 진짜 씨발스럽지 않은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좋은 신부가 되겠다고 칭찬하는 남자들은, 자기 담배심부름 해주는 여자라서 그런 거다. 진짜 개같아서 원 ㅋㅋㅋㅋㅋ 어디 칭찬하면서 사람 부려쳐먹냐 씨발놈들아. 어느 단편에서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1도 나오질 않아..



고마도리 씨는 로맨틱을 믿고 있다. 만남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남은 우연한 것이 좋다. 우연한 기적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친구에게 소개를 부탁할 마음은 없었다. 내 쪽에서 움직여선 안 돼. 고마도리 씨 쪽에서 먼저 기회를 만들면 잘 안 되었다. (고마도리 씨 이야기, p.191)



(위의 박스 이상해... 왜이렇게 된거야 제기랄 ㅠㅠ)



배려를 하지 않는 인물들이 어느 단편에서나 툭툭 튀어나오는 데, <막내 여동생> 에서는 '전남편'이 그렇다. '전아내'가 다니는 회사의 거래처에 근무하는 '전남편'은 그러니 그 회사에 올 일이 많은데, 그 둘이 부부였던 걸 당연히 회사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이러고 다닌다.



나이는 쉰 살 정도로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이다. 활달해서 분위기 메이커로 알려진 다무라 씨는 여복 많기로 유명하다.

결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다 젊은 혈기에 한 짓이었지, 하고 회사에 올 때마다 전처인 구와타 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혈색 좋은 피부로 웃었다. (막내 여동생, p.74)



아니, 전처의 회사에서 전처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랑 결혼한 건 젊은 혈기에 한 짓이지, 이렇게 말하는 개새끼라니, 그러면서 사람좋은 웃음을 웃는 놈이라니..참. 하아- 배려없는 놈들이 지천에 깔렸구나. 아니 이건 진짜 예의 문제지. 



어제 여자1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얼마전 썸남과 헤어진 얘기를 하면서, 그 썸남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해 덧붙였다. 썸남은 '나는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야' 라며 자신이 당당한 캐릭터임을 알린 거다. 그러면서 예로 든게, '나는 못생긴 여자한테 너 못생겼다 라고 얘기해. 할 말 다 하고 살아' 라더란다. 아니 여기에도 씨발놈이... 내가 그 말을 듣고 여자1에게 그 남자랑 안사귀길 정말 잘했다며, 그건 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할 말 안할 말 구분도 못하는 병신이라고 말했다. 더 웃긴건, 그런 얘기 듣는 게 불편해서 여자1이 '오빠도 잘생긴 건 아니야' 라고 했더니 불같이 화를 내더란다. 뭐 이런... 예의가 예의인줄 모르는 개놈들이 사방에 깔려있는건가... 


작가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시선이 불편하다. 예의 없는 사람, 배려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그런 사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다. 예의 없고 배려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시선 조차도 내가 보기엔 구리다. 작정하고 쓴 노처녀(!) 소설인 것 같은데, 노처녀라서 남자를 사귀지 못해 안달하는 것 자체가 지금과는 맞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나이가 많지만, 남자에게 선택받고 싶어서, 남자의 눈에 들고 싶어서 안달하지 않는다. 물론 책 뒷표지에 나와있듯이 



서른한 살이 되었다.

연애중인 그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연애를 하면서 나 역시 상대에게 기대하는 말들이 있고, 상대가 해줬으면 하는 제스쳐들이 있지만,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것이 '내 나이가 벌써 얼마인데..' 해서는 아니다.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그걸 남에게 보여야 한다, 고 이 책 속의 여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못할 경우 위축되는 거다. 그 점이 지금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소설이 쓰여진 시대 탓인지, 작가의 시선 탓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이에 연애 한 번 못해보다니 쪽팔리다' 라든가 '결혼도 못하고 지금까지 뭐한거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과 내가 맞지 않는다. 


나는 결혼을 하게 되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이란 게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연애를 하고 남자를 사귀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애인이 없을 때 존나 우울해서 죽을 것 같거나 하지도 않다. 내 나이는 벌써 이렇게 훌쩍 많아졌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한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하의 남자와 연애하게 되면 간혹 신경 쓰이고 기가 죽기는 하지만(내가 너무 늙었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앞에서 쪼그라들진 않는다. 이런 내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여자들이 잔뜩 나오는 글을 읽으려니 읽는 내내 즐겁지가 않았다. 그냥 당신 혼자 살아, 그런 병신 같은 애인은 걷어차버려, 혼자이면 어때 우동이나 먹으러 가! 같은 말들을 이천번쯤 내뱉고 싶었다. 




음.. 재미없는 책의 리뷰를 참 재미있게 잘도 썼다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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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2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지막에 제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딱 해주시네요^^ 스도 안네 이야기에선 폭발할 뻔 했어요... 나 참!
이렇게 재미없는 소설에도 재미난 리뷰를 달아주시는 대인배 다락방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락방 2016-01-31 15:02   좋아요 1 | URL
네, 소설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 어떤 소설에서도 짜증나는 캐릭터는 등장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소설 자체가 짜증나거나 하진 않는데, 이 소설은 왜 소설 자체가 짜증이 날까.. 어쩌면 작가의 시선이 그 인물들을 그려냄으로써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알수 있게 되고, 그게 나랑 안맞을 때 짜증나는 걸까. 이를테면 짜증나는 캐릭터를 그려놓지만 이야기 자체는 아름다울 수 있잖아요. 연민이 생길 때도 있고요. 그런데 이 책속의 인물들은 그렇질 못하더라고요. 하아-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싶습니다.

302moon 2016-01-2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정말 짜증나서; 읽고 난 뒤의 리뷰도 쓰지 않고, 읽고 싶어 하는 지인에게 건넸습니다.
밑에서 두 번째 문단, 엄청 공감하고 갑니다.
리뷰, 재밌게 잘 쓰셨어요.:) 저는 리뷰쓰기도 팽개쳤는데/

다락방 2016-01-31 15:03   좋아요 1 | URL
아, 302문님도 짜증나셨었군요! 아우 저는 진짜 읽다가 집어 던질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회사 동료 남자 담배심부름에선 어찌나 빡이 치던지. 게다가 왜저렇게 남자남자 .. 남자를 사귀지 않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그런 조급함이 아주 신경질 나더라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