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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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최고의 책
- 상반기 최고의 책
- 손에 꼽을만한 책

이라고 이 책을 완독한 세 명이 각자 저런 평을 들려주었다.
같이읽는 책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뿌듯해.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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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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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이 있다. 하나는 권력자, 착취자, 가해자, 남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희화화하고 즐기면서 진실을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마약에 취한 눈, 초점 잃은 눈이다. 눈의 초점이 불분명할수록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그 성폭력 체제는 흐릿해진다. 그러면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별장과 클럽에서의 성폭력을 지속하면서 축적과 치부 그리고 명령의 오르가슴을 반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다중, 저항자, 피해자, 여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생명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 방지를 열망하는 눈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실사구시적으로 응시하는 부릅뜬 눈, 두려움에 떨면서도 봐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다초점의 눈이다. 초점이 분명해져야만 어디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공격의 화살이 날아오고 어디에 자신을 빠뜨릴 함정이 있으며 어디로 생존의 출구가 열려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P.36)




최근에는 혐오란 단어를 어디서(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혐오자가 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싫어서 혐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이 책의 소개를 읽다보니 윤지오의 증언에 관한 것이었다. 윤지오와 그녀의 증언에 관한 것이라면 지지하면서도 그 흐름과 자세한 사항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던 터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알고자 했던건 매우 좋은 선택이었는데, 장자연의 사망부터 지금 현재 인터폴로 윤지오가 수배 내려진 것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 일어났던 말과 사건들에 있어서도 그리고 본인의 생각까지 논리적으로 알기 쉽게 써있기 때문이었다. 


저자 '조정환'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데, 시종일관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궤뚫고 있어서 놀랐다. 그러니까 윤지오의 증언과 그 안에 담겨져있는 뜻을 날카롭게 짚어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폭력까지도 정확히 인지한 터라 아마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윤지오와 그 증언에 대해서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자라'를 보고 놀란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 것이다. 만약 자라로부터 놀란 경험이 없었다면, 솥뚜껑을 보고 놀랄 까닭이 없다. 경찰과 숱한 언론들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윤지오를 향해, '놀란게 솥뚜껑 때문이었잖아, 자라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라고 몰고 갔다. 그들은 아주 쉽게 윤지오가 놀란 게 솥뚜껑이었기 때문에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솥뚜껑 보고 놀랐던 까닭이 자라를 보았던 경험 때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으려'하는 걸까.



저자 조정환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이유는 그 전에 자라를 보았기 때문을 인지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기술해주고 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거나 혹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내가 아는 모든 남자사람들보다도, 더, 가부장제와 권력 그리고 성폭력에 대한 것을 가장 잘 인지하는 저자임에는 틀림없다.


지독하게 진부한 말이라 나는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박훈이 윤지오가 있지도 않은 신변위협을 과장한다면서 신변위협의 실재성을 부정할 때,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뚜렷이 나타난다. 신변위협이란 긴장, 싫음, 떨림, 두려움, 공포 등으로 나타나는 고통의 감각이다. 이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의를 기울임을 통해 실천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훈은 신변위협을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고자 하는 방향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신변위협을 모르고자 하는 마음이 표현되는 방식이 ‘신변위협은 없었다‘라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P22

윤지오가 개인 방송(인스타라이브)에서 협찬 화장품 파는 것에 경악하신다면 JTBC 방송에서 자동차를 파는 것을 보실 때는 어떤 느낌이신지요?- P66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개월간 지속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 불가능할 만큼 훼손하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윤지오의 향우 있을 수 있는 증언 투쟁을 예방하기 위해 이런 위협적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 투쟁을 미연에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해서 촉구되고 홍보된 인위적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P76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걸면서 할 때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으면 그의 증언이 진실성을 잃는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절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P76

권력과 제도언론이 효과적인 무기로 훔쳐 사용한 것이 바로 윤지오의 저 ˝영리하게˝라는 말의 왜곡이었다. 제도언론에 앞서 김수민이 그것을 계산적 ˝영악함˝으로 굴절시켰고 윤지오의 증언 실천을 ˝가식˝의 프레임 속에 집어넣었다. 그 프레임은 ˝네가 네 욕심 없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해서 증언한다고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나타났다. 순수주의, 순결주의를 척도로 내세우고 ‘당신은 순수하지 못하다, 순결하지 못하다‘고 선동하는 순수주의적 혐오 프레임이었다. ‘증언자는 순결해야 한다. 증언자의 실천은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 순수한 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프레임.


- P109

이 순수주의=순결주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씌어온 굴레이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해온 운동들이 스스로 내면화해 온 거울 이미지다. 국민이 영웅을 기대하고 민중이 지도자를 기대할 때 그 국민과 민중은 그 영웅과 지도자에게서 순수를 기대하는 만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근대의 과정이다. 탈근대화의 과정에서 국민/민중과는 다른 다중이 출현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자기 전화이며 그 마음 깊은 곳에 근대적 백성의 습성은 유전자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순수/순결주의의 정동은 영리함을 견디지 못한다- P110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 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 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증언들은 어떻게 판명되었고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 P184

2019년 6월 검찰은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를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학의의 성범죄 혐의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어떤 마술로 검찰이 그 들끓던 여론을 잠재운 것일까? 김학의에 대한 특수강간 혐의를 ˝무죄˝처분하기 위해 검찰이 사용한 핵심 기술이 바로 ˝성폭력˝(성접대 강요, 성상납 강요)에서 강요를 제거하여 성접대, 성상납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그것을 ˝뇌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P243

2019년 3월 4일 실명 공개와 그것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에서 비롯된 이 지각적 착시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영상자료 등을 보면 윤지오 씨가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들이 많은데, 왜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지?˝ 따져 묻거나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나며 숨어 살았던 것이 가명의 나 혹은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듯이, 윤지오에게도 숨어 살았던 것은 ‘증언자 윤지오‘이지 본명의 윤지오,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이름 없이 기호화된 윤지오가 아니었다. 본명, 가명, 예명, 기호의 윤지오는 ‘증언자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증언자가 된 이후 다양한 위험들과 위협들 때문에 숨직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다양한 이름의 윤지오들의 존재야말로 윤지오가 ˝숨어 살았음˝을 뚜렷이 증명하는 지표가 아닌가?- P274

지각적 착시로 인해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보고도 마치 수십 년 전부터 자신이 윤 씨, 김지연 씨, 이순자 씨, A 씨, Y 씨가 윤지오 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또 그들이 모두 증언자 윤지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튼다. 또 오래전부터 증언자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P277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 살지 않았다‘를 부동의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이름 공개와 어굴 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 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이 끈질김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 집단임을 유추할 수 있다.- P278

장자연은 누가 봐도 증언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 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이상異常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 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 배우였던 자신에게 권력이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P282

시민 사회가 약할 때 가장 먼저 혐오 행동에 나선 것은 경찰과 군대였다. 국가기구가 혐오 행동의 선봉대였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두터워진 후 혐오 행동의 선봉대는 국가기구가 아니다. 시민사회 속에서 일상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성폭력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 대응에는 ˝아내들˝이 앞장선다. 아내는 ‘안 것‘을 의미하는 ‘안 해‘에서 나온 말이다. 경상도 말 ‘니 해라‘가 ‘너의 것으로 하라‘를 의미하듯이, ‘해‘는 ‘물건‘, ‘소유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성 가부장의 시선에서 파악된 여성,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이 ‘아내‘관념을 내면화할 때, 이 여성은 가부장주의의 파수꾼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내 의식이 페미니즘의 옷을 걸칠 때도 있다. 그러한 유사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여성을 위험한 여자, 이상한 여자로 보는 보편적 의심증과 결합된다. - P308

아내-페미니즘은 여성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 노력은 꽃뱀으로 의심되는 모든 여자로부터 자신의 아내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적 투쟁으로 된다. 그 결과 남성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폭력은 위험한 여자들의 꼬임(사기)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겪는 피해로 인식된다. 아내-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사회를 내전의 무대로 만들면서, 자신들이 이상한 여자들이라고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시민사회 내 투쟁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체제와 가부장주의는 아마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서술하고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서술한 마녀사냥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국가기구와 남성 권력자만이 아니라 아내주의-여성, 아내-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도 생생하게 되풀이되는 잔혹사이다.- P309

신변위협의 문제에서 현실성은 행사의 차원이며 잠재성은 존재의 차원이다. 혼자 밤길을 걷는 여성에게 남성으로부터의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을 때도 여성이 신변위협을 느끼는 것은 신변위협이 잠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신변위협이 행사되고 있을 때 신변위협이 실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고 있음이 현실일 때조차 신변위협은 잠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윤지오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경험한 현실적 신변위협과 잠재적 신변위협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해 왔다. - P322

경찰 응답은 언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입증한다. 이것들은 현장조사와 탐문, 그리고 과학수사 후에 나온 것으로, 윤지오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고 윤지오가 제기한 문제점들이 그 상황에서 일상적 지각과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심할 만한 것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물며 윤지오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 신고자˝였고 ˝국민적 공분이 큰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음을 고려하면 반드시 의심될 만한 것이 윤지오에 의해 의심된 것임을 보여준다. - P329

경찰의 실제 발표문이었던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신변위협이 없었다˝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신변위협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후자는 신변위협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는 시도(침범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북한의 위협은 상존한다고 말한다. 칼을 든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신변위협이 있다고 느낀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어두운 밤거리에서 지나가는 남성이 성폭행이나 성추행과 같은 신변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을 때도 여성은 신변위협을 느껴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 『뉴시스』, 『머니투데이』는, 변호사 박훈이 고발장에서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경찰청의 발표를 ˝신변위혐이 없었다˝는 말로 왜곡한다.- P329

대한민국 경찰은,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국민, 국민을 대의하는 대통령, 증언자를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증언자 자신등에 떠밀려 마지못해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에 나섰으나 증언자의 신변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기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만 옳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해권력자들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그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먼저 나서서 보호하는 식으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발적이고 기민한 기관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국민의 생명보호 의무에 속하는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시민사회에 ˝진실을 밝힐 힘˝을 증여하는 증언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답례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윤지오의 신변보호 요청을 증언자를 자처하는 윤지오가 과장으로 꾸며낸 일대 소동처럼 발표함으로써 증인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 P400

윤지오는 2009년에 사법경찰을, 2018년에 검찰을 경험한 후에 2019년에는 행정기관과 입법기관을 경험했다. 언론기관과의 마주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이야기했으므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2009년 사건 직후부터 10년간 지속적으로 윤지오를 추적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국가기관과 친밀한 접촉이 있었던 셈이다. 2019년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청와대가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엄정한 조사를 요구하면서도 결코 엄정할 수 없는 검찰 자신에게 과거사 조사를 맡기고, 국회의원이 표면적으로는 증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증언자가 여론의 공격을 받을 때는 연락을 끊고 침묵하며, 행정경찰이 증인의 신변보호를 책임지겠다고 하고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 즉 국가기관들의 보편적 위선이었다.- P403

국가의 위선과 이중성 때문에 윤지오는 10년 만에 다시 사법경찰과 접속하게 된다. 이번에는 참고인으로서가 아니라 피의자로서다. ˝10년 동안 일관되게 진술한 유일한 증인으로 걸어온 지난날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여태껏 그래왔듯 성실하게 진실만을 증언˝하려고 했지만, 변호사·작가·기자·유튜버·인스타그래머 등의 고소·고발자들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은 고인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제소의 릴레이를 전개했다. 일찍이 ˝조선일보 방사장과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안개 속으로 감추어 최초 증언자 장자연의 증언조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허위 문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한민국 사법경찰은 이제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함으로써 후속 증언자인 윤지오의 증언도 허위라는 고소·고발자들의 제소에 힘을 실어주고 장자연 사건 전체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나라인가? - P404

경찰의 답변과 이호영 변호사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 증언자가 일반적인 적색수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특별히˝윤지오 증언자를 적색수배 요청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요청에 따르는 판단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중요사범˝이라고 본것이다. 나는 여기서 경찰이 오히려 ˝중대한˝범주 혼동, 범주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언과 범죄를 혼동한 것이다.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재계·언론계·연예계·정치계·법조계를 망라한 모든 권력층의 부패와 성폭력 관행에 대한 기록인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이 가지고 온 사회적 파장은 분명히 컸고 증언이 지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P455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는 이 ˝큰 사회적 파장˝이나 ˝높은 수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증언자의 증언으로 기소된 조O천조차 1심에서는 무죄선고되었다. 이러한 사법현실의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돌연 여기서 ˝수사 요구˝를 가해 혐의자가 아니라 증언자에게로 돌리는 불합리함을 계속한다.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다˝는 사실을, 경찰은 윤지오의 ˝범죄˝가 ˝사회적 파장이 크고˝˝윤지오˝의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다˝는 생각으로 바꿔치기 한다. 증언과 범죄, 증언자와 가해자를 순식간에 바꿔치기하는 이 마술을 통해 윤지오에 대해 내려진 적색수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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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3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지오씨는 처음 증언하러 나섰을 때 몇 번 인터뷰를 보았는데 좀 시끄러지고 나서는 저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인용해주신 거 읽어보니까 ‘피해자다움’을 미끼로 윤지오씨의 입을 막으러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03-30 17:03   좋아요 0 | URL
내용적으로는 참 답답한데요 작가가 되게 글을 잘 썼더라고요. 날카롭고 정확한 시선을 가지고 피해자의 편에서 얘기를 하려고 한달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방향이 잘 잡히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 조정환이 글쎄, 실비아 페데리치랑 마리아 미즈의 책을 낸 출판사의 대표더라고요?! 남자이면서 가부장제로 인한 성폭력에 대한걸 인지할 수 있다니 좀 놀랐어요. 단발머리님, 꼭 읽어보세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독서였어요.

단발머리 2020-03-30 17:07   좋아요 0 | URL
게다가 저자가 용감하기까지 하네요. 윤지오를 미워하는 세력의 거대함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다락방 2020-03-30 17:09   좋아요 1 | URL
네, 보통의 남자들이 선택하지 않는 걸 선택했죠. 윤지오의 말을 듣는 것 외에도 이렇게 책으로 써내는거요. 이 책 읽으면서 윤지오도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도 참 명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20-03-3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서민 교수가 윤지오 씨 사태(?)에 대해 책 내지 않았었나요? 그건 어떤 시각이었을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게을러서, 더하기 속터지기 싫어서 찾아읽게 되진 않아요.
요샌 뉴스 보기가 너무 버거워요. 너무 화가 나서 현실의 가족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게 되고 매일 힘들어요.

다락방 2020-03-31 14:17   좋아요 0 | URL
읽어보진 않았지만 서민 교수님은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책에서도 서민 교수님이 언급되면서 비판하고 있고요.
조정환의 책은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희망적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개학 미뤄져서 더 힘드실텐데, 기운내세요 유부만두님 ㅠㅠ
전 마스크 쓰고 오랜만에 스벅가서 화이트초코모카 사가지고 왔어요. 달달하니 맛있네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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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읽어왔던 여성주의 책들이 이 한권안에서 반복된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취급해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 1986년에 나온 책인데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것은 씁쓸하지 않은가. 이미 그 당시에 마리아 미즈가 분석해낸 문제점들이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결국 여성이 처한 상황의 문제다. 가사노동이 보이지 않는 걸 얘기하고, 페미사이드가 세계 곳겟에 만연한 걸 얘기한다. 그 오래전 마녀사냥에서부터 남성은 여성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을 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일들과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 아니, 가부장제랑 자본주의 얘기할 줄 알았는데 왜 페미사이드가 나와? 이 모든 건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다 연결되어 있어.



그간 숱하게 읽어왔던 것들의 반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짜릿하다. 게다가 이미 많은 젊은 여성들이 깨닫고 주장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마리아 미즈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기 위해서 길게 보고 가야한다고 제시한 방법중에 하나가 바로 '소비에 대한 자율권'이다. 여성은 중요한 소비 주체이고 소비의 기둥이니 이 소비를 멈춤으로써 바로 시작할 수 있고 또 자본주의를 작동할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것. 너무 짜릿하지 않은가. 바로 위에도 썼지만 마리아 미즈는 이것이 단시일내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비하고 어떤 것을 소비하지 않을 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상품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제3세계의 여성들을 착취함으로써 내게온 게 아닌가, 내가 잘 살게 됨으로써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더 못살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품의 보이콧을 얘기하면서 그리고 의류나 화장품에 대한 보이콧도 얘기한다. 나는 특히 이 부분이 짜릿했다.


페미니스트들이 탈코르셋을 주장했을 때, 그래서 화장품을 부수면서 그것을 인증했을 때 얼마나 많은 비아냥을 들었는지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화장하는 게 탈코르셋이야'라는 주장 역시 나왔던 것도 알고 있다. 아름답게 보이려는 건 사람의 본능이지, 라는 말과 함께 '아름답게 보일 필요 없으니 꾸미지 말고 탈코르셋하자'는 주장을 얼마나 많이 까내렸는가. 그러나 누군가에겐 화장하지 않는게 탈코르셋이라면 누군가에겐 화장하는 게 탈코르셋이야, 라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음을, 그것이 결국은 여성을 자유롭게 만드는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1986년의 '마리아 미즈'도 얘기하고 있다. 마리아 미즈는 '여성이 화작품과 새로운 섹시한 패션 유행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한다면(p.459)'성차별적인 이미지와 여성을 규격화된 모델에 맞추려는 사회를 성공적으로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자율권은 소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렵겠지만 생산에 대한 자율권을 이내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몸에 대한 자율성을 요구한다. 당연히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못했던것처럼 수많은 방해공작들이 있을 것이고 또 단시일내에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성이 여성의 소비,생산, 삶과 몸에 대한 자율성을 찾는 것이 함께 가야할 길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일.




여성주의책을 그간 계속 읽어온 사람이라면, 다른 책들에서 했던 얘기들이 이 책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부장제에 대해 읽었다면 여기에 그것이 있고, 자본주의에 대해 읽었다면 이 책에 그 내용이 있다. 우리가 강간과 페미사이드에 대해 읽었던 것들이 이 안에 있고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읽었던 것, 여성이 왜그렇게 오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읽었던 것, 우리가 왜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지를 읽었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책 안에 있다. 우리가 그간 읽어왔던 것들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거봐, 이렇게 연결되어 있잖아' 하고 한 권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도 짜릿하게 제시해주고.



결론을 읽는 순간 짜릿해져서 좋았다. 그러나 이 책에 자꾸 튀어나오는 오타는 옥의 티다. 개정판으로 알고 있는데 개정판으로 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보지 않았단 말인가. 갈무리 출판사는 다시 읽으면서 오타들 잡아내기를 바라고, 그리고 최근의 개정판에는 그 누구냐, 《혁명의 영점》, 《캘리번과 마녀》의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의 서문도 추가되었다는데, 그걸 좀 가져와서 번역해주고 개정판 다시 내주길 바란다. 물론 이미 서문 너무 많지만 많은 거에 페데리치 꺼 더해도 나쁘지 않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율권을 갖지 못한 여성은 자신에게 강요된 것을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는 심리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가장 깊은 이유이며, 강간당했을 때,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명예가 침해당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P353

강간은 기존의 계급과 기존의 남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사실 일어나는 투쟁은, 유력한 남성과 무력한 남성 사이의 투쟁이다. 여성은 이 투쟁에서 유력한 남성의 남성다움, 그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용된다.- P358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통해 여성 노동을 갈취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인 셈이다. 폭력은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축적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적 남녀관계를 이용하고, 강화시키고, 심지어 발명해내야 했다. 세계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면, 이윤을 착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부터 제1세계까지 가정주부, 노동자, 농민, 창녀 등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이다.- P363

현대 기술을 통해 주간, 일간 혹은 연간 노동시간이 줄어들어도 남성은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않는다.- P444

이런 해방의 과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남성이 같은 방향으로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가부장적 관계의 울타리를 깨고 나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남성의 운동은 시혜적인 온정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적 존엄과 존중을 되찾으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겠는가?- P454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한 우리의 충성과 공모를 당장 거부하기 시작해야 한다. 여성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희생자일 뿐 아니라, 다양한 수준에서, 질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이 체제의 협력자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 중산층 여성과 산업화된 국가의 백인 여성에게 특히 그러하다. 우리의 몸과 삶 전반에 대한 자율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부장제에 대한 이런 공모를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P457

페미니스트 소비자해방운동은 이런 눈먼 상태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것에서, 상품의 실체를 보는 것에서, 상품 속에 있는 여성, 자연,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재발견하는 것에서, 그리고 우리를 말 그대로 여성,남성,동물,식물,지구 등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시장관계를 진정한 인간적 관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는 추상적인 상품 뒤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품이 우리 식탁이나 우리 몸에 닿기까지 어떤 길을 거치는지를 추적하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저개발 국가에 사는 가난한 남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P462

서구 노동계급이 생산 결정들, 예를 들면 생산의 자동화, 무기생산, 위험한 화학물질과 사치품 생산등을 받아들인 것은 정말 어리석다.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진보라는 추상적 생각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전략으로는 일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고, 파괴적인 생산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는 ‘식구를 먹여 살려야‘하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곤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핑계다. 왜냐하면 여성이 남성만큼 가족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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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3-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록달록 무수한 플래그가 멋집니다.

다락방 2020-03-27 12:14   좋아요 1 | URL
흑백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칼라를 가져다 썼습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반유행열반인 2020-03-27 13:06   좋아요 0 | URL
흑백이 조금 더 책표지에 어울리네요. 전 책에 저런 멋진 걸 붙여본 적이 없는...그러니 읽고 나면 남는 게 없고...

다락방 2020-03-27 15:19   좋아요 1 | URL
정리 잘해서 리뷰 잘 쓰시잖아요. 독후 활동으로는 리뷰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리뷰 쓰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요. 계속 읽고 쓰세요, 반유행열반인님!

수연 2020-03-27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올해 최고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듯 해요, 다락방님. 아직 2020년은 많이 남아있지만요.

다락방 2020-03-28 15: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는 남은 2020년에 더 좋은 책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힘내서 같이 읽어요, 수연님!
같이 읽기로 완독한 첫 책이 수연님께 강한 인상을 주어서 저는 너무나 뿌듯합니다. 하핫.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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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8월에 태어나기를,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기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 선택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자라는동안 여자라서, 내가 태어난 생일이 있어서, 우리 부모님의 딸이어서,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에 맞닥뜨렸다. 어떤 것들을 슬픔이었고 어떤 것들은 기쁨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고통이었고 어떤 것들은 행복이었다. 고통과 행복 혹은 기쁨과 슬픔앞에 놓일 때면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들을 수도없이 해보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고 해서 잠시라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는 없었다. 삶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안줌' 역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다 가지고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모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사람들, 그런 '히즈라'들이 머무르는 장소 '콰브가'에, 안줌 역시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가난하게 태어나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남성이며 동시에 여성으로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고, 인도에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줌은 지금에 와서 다른 곳에 태어날 수도, 다른 모습으로도 태어날 순 없으니까.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2002년,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인 《미들섹스》를 출간했다. 책에서 남,녀의 성기 모두를 가진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다가, 써커스단에 들어가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며 돈을 벌기도 한다.

'아룬다티 로이'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니, 나는 이 책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히즈라로 태어난 고통, 히즈라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고통, 그리고 그 히즈라가 자라면서 받게 되는 차별당하는 삶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며 몇 번의 사랑을 할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자신의 저주받은 몸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최종선택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거다. 《미들섹스》를 읽을 때는 그저 '아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를 생각하며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다면, 지금 이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치면서는,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가 히즈라가 아니면서 히즈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혼자 했다.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해도 되는걸까.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괜찮은것인가, 하는 생각. 그러다가 퍼뜩, 그러나 당사자성이 없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히즈라'인 안줌의 이야기는 백페이지도 되지 않을 때 모두 나온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학교 가기를 포기하는 점, 변성기를 맞고,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건 '여성'으로서의 삶이고, 콰브가에 들어가고, 그리고 마흔한 살이 되어 '엄마'가 되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을 때 마침, '자이나브'라는 아기를 입양하게 되고, 그리고 마흔 여섯에 정든 콰브가에서 떠나기까지. 이 이야기가 백페이기도 되기 전에 모두 나오는거다. 아직 뒤에 무수히 많은 페이지가 남았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안줌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렇게 훅- 지나가버린 거지?




그러니까 이 짧다면 짧은 페이지안에서 안줌은 '개인'을 산다. 히즈라로 태어난 개인, 여성이 되길 선택해 성전환 수술을 받는 개인, 아이를 입양하고 엄마가 되는 개인, 그리고 상처입고 콰브가를 떠나는 개인의 이야기. 그런 안줌 개인의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자, 이제는 안줌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줌은 안줌 개인이되 동시에 인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인도의 흐름 속에서 안줌의 생활 역시 그 흐름과 뒤섞일 수밖에 없다. 안줌은 생각지도 못하게 '구자라트 폭동'의 한가운데에서 친구의 죽음을 맞게된다. 그건 안줌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작별이었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폭력의 현장이었다. 이 일은 안줌의 생각을, 생활을 바꾸게 된다. 안줌은 콰브가에서 나와 무덤가로 간다. 그곳에서 폐인처럼 살면서 자신처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이제는 죽어서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장을 만든다. 살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죽어서 가난한 사람들, 아니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가난하게 죽는 사람들을 위한 파라다이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거다.




이야기는, 결국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이 겪은 삶은 살아서도 고통이었고 죽어서도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정부를 비롯하여, 탄광때문에 밀려나고, 가스누출에 희생된 사람들, 집을 잃고 쫓겨나고, 종교 때문에 박해받고, 일용노동자로 일하다 다치고, 부러지고, 맞고, 묶이고, 납치당하고, 지진의 피해를 입고, 강간당하고, 눈이 멀고, 폭탄이 터지고, 물밑으로 가라앉고, 사생아를 낳고, 시위를 하고 맞서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모님의 죽음을, 아내의 죽음을, 아이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사람들. 울부짖어도 바뀌지 않아 절망하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에게, 경찰에게, 군인에게 희생되어 죽어가는 사람들. 헤어지려는 아내에게는 따귀 몇 대를 날려주라고 충고하는 친구, 친구의 충고대로 아내의 따귀를 때리는 친구. 그들이 사는 인도는 사람들이 죽어야 사는 곳이었고, 때로 두 번 죽어야 하는 곳이었다. 시체를 만들고, 시체를 보고,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거기에서 개인으로 살지만, 그러나 고통받는 개인은 고통받는 나라를 만들고, 고통받는 나라는 고통받는 개인을 만든다. 엉망인 개인과 엉망인 나라. 죽음이 삶이 되는 현장.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에서 거기로 가도 머무를 곳은 없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고, 죽여야했고 아니면 내가 죽었다. 도망쳐야 했고 숨어야 했고 감춰야 했고 속여야 했는데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삶의 의지를 다질까. 무엇이 이들을 살게 할까. 여기에서 폭력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폭발을 만나는데, 여기에서 폭도들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군인들을 만나는데,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분쟁이 없는 곳엔 전쟁이 있었고, 전쟁이 없는 곳엔 테러가 있었고 테러가 없는 곳엔 계급이 있었다. 가난이 있었고 더 큰 가난이 있었고, 더 더 큰 가난이 있었고, 그리고 부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와 고통과 복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난해서 힘들었고, 불가촉천민이어서 힘들었고, 두개의 성을 한꺼번에 가진 몸이라서 힘들었고, 사생아로 태어나서 힘들었는데, 그렇게 나만의 상처만으로는 끝나는 게 아니라고, 살고 싶다면 더한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삶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가 태어나 고통이니? 사는 건 더 고통이야.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게 가능할 수 있을까?



안줌은 18세 생일에 꿈속에서 오르가즘을 겪었던 것이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르가즘이다. 틸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없다. 가슴속에 사랑을 품었으되 그 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삶.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은 포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각자의 상처와 또 복수를 끌어안고 그들은 결국 한 데 모여 버려진 아기 '미스 제빈 2세'의 엄마가 되어주고 또 엄마가 되어주고 그리고 그 아기에게 최상의 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사랑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숱한 폭력과 희생, 무의미한 죽음의 기록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낯선 용어들로 가득차 힘들었다. 처음 보는 단어는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고, 직업이기도 했고, 직함이기도 했고, 장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도에서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 역시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수차례 컴퓨터 앞에 앉아 혹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야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도대체 뭐야, 구자라트 폭동은 또 뭐야. 이 사람들 왜이렇게 많이 싸우고 죽인거야. 이 모든 것들을 나는 기억하며 읽을 수가 없어서 결국 이면지를 반으로 접어 메모하기 시작했다.





반으로 접힌 메모지는 책을 읽어갈수록 꽉 채워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자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달아 등장하는 낯선 단어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은 어떻고.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미스 제빈 2세를 얘기하면서 갑자기 미스 제빈 1세가 언급이 되면, 아 1세가 어디에서 나왔지? 내가 놓쳤나? 앞장을 몇 장 뒤적여야 했다. 그러나 미스 제빈 1세에 대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거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됐냐면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로 과거를 되짚는 식.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번번이 내가 뭘 놓친건 아닌지, 내가 제대로 읽은 게 아닌지, 혹시 내가 메모를 해둔 것에 있는지, 책장을 되넘기거나 메모를 살펴야 했던 거다.


책의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결코 한 번에 다 읽어낼 수 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최대한 집중해야 할것이며 다른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내가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나처럼 메모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읽는 순간에는 '음, 이건 기억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해서 메모해두지 않았던 단어중에 '아자디'가 있다. 이게 뒤로 갈수록 자주 나오는거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자디, 아자디 함께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메모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 단어가 없어. 나는 다시 책장을 되돌린다. 그리고 한참 앞에서 발견한다. 아자디는 '자유 혹은 독립'이란 뜻을 가진 단어였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책읽기었으므로 결코 즐겁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10장 지복의 성자> 시작부분부터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10장에서는 모두가 만나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 펼쳐지니까.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 똑똑한 여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여자, 재회 그리고 사랑까지. 기쁨은 슬픔 뒤에 오고 희망은 절망 뒤에 오는 거라면, 이 책은 1장부터 9장 뒤에 10장이 온다.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든다.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그 사람과 나만의 역사를 함께 만든다.

이런 우리가 모여서 역사속의 일부가 된다.


지복의 성자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P33

안줌은 쾌락을 주는 자로서는 노련한 기교를 발휘하여 큰 인기를 얻었지만, 붉은 디스코 사리를 입었을 때 맛보았던 것이 그녀의 생애 마지막 오르가슴이었다.- P47

안줌은 자신이 ‘학살자들의 행운‘일 뿐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남은 생애 동안, 심지어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녀와 ‘남은 생애‘의 관계는 늘 불안정하고 무모했다.- P96

이런 따분한 소견을 말해도 용서가 된다면, 결국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이 아닐까? 혹은 인생 대부분의 결말이 그런 식이 아닐까?- P202

틸로는 건축학부 3학년 학생이었고, 세트와 조명 디자인을 맡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을 틸로타마라고 소개했다. 그녀를 처음본 순간, 나의 일부가 내 몸에서 걸어나가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P203

이제 과거를 돌아보며, 나가는 자신이 오랜 세월 잠재의식 속에 틸로가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언젠가는 그녀가 분명 자신을 떠날 거라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P310

무사와 비스킷을 든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기 전부터 금속 쟁반에 놓인 찻잔들이 희미하게 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사와 비스킷을 가져온 사람은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그들의 표정은 수동적이고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암리크 싱은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방안의 공기가 동이 났다. 호흡이 불가능해졌다. 호흡을 하는 것처럼 가장해야만 했다.- P447

틸로와 무사는 연인인 동시에 前 연인, 애인인 동시에 전 애인, 남매인 동시에 전 남매, 급우인 동시에 전 급우였기에 제 3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런 기묘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특이한 방식으로 서로를 신뢰했기에, 설령 그것 때문에 자신이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사랑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마음의 문제에서는 사실상 숲처럼 빽빽한 안전망을 갖고 있었다.- P483

여전히 무사는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몇 년동안 품고 다니던 끊임없는 두려움-갑작스레 무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것에 대한-의 무게가 얼마간 가벼워졌다. 그건 그를 덜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불법적으로, 아주 조금만)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삶은 덜 확정적인 것이 되고 죽음 또한 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왠지 모든 게 조금은 견디기가 쉬워졌다.-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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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9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3-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룬다티의 책을 읽고 싶지만 저 역시 부제가 주는 느낌 때문에 아직까지 미루고만 있었어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 로만 예상했거든요. 다락방님 글 읽으니 읽고 싶은데 마지막에 공부 메모 사진 보고 나니... 맘이 복잡해지네요@@

다락방 2020-03-19 17: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이 미루신 이유가 제가 갈등했던 이유와 아마도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또 거기에 있어서 좀 복잡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등장인물이 중심인물 ‘안줌‘이기는 하지만, 안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책에서는 다양한 개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인용문을 옮겨 놓긴 했지만,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이 다크룸 읽다가 저에게 일러주었던 부분이 이 책에서도 나온답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P33

잠자냥 2020-03-1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아프타브, 그러니까 안줌에 대해서 다락방 님은 좀 더 다른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어요. ㅎㅎ

다락방 2020-03-20 08:25   좋아요 1 | URL
저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이 책을 읽는데 엄청 망설인 거였거든요. 그런데 아룬다티 로이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그런 글을 안쓸 수 있도록(?) 중심인물이긴 하되 어쨌든 ‘이런 개인‘에 대해 쓰는 것에서 멈추더라고요. 저에겐 다행한 일이었어요. 하하.

얼음장수 2020-03-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드라마에 나온 유치한 대사였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데 다른 사람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도 떠오르고.
메모를 보니까 와우, 꼭 문학 전공하는 대학원생 같아요.

다락방 2020-03-20 08:28   좋아요 0 | URL
어휴.. 소설 읽는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소설은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이게 외국소설 읽다보면 이름 헷갈릴 때도 엄청 많잖아요. 일본 소설도 엄청 헷갈려서 ‘어, 얘 아까 죽지 않았나? 왜 살아있지?‘ 라고 해서 뒤로 넘겨보면 한글자 다르고.. 러시아 소설은 애칭이 겁나 많고... 그런데 인도 소설은 이름 뿐만이 아니라 직업도 그렇고 호칭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낯선 단어가 많은지 따라가기가 벅차더라고요. 휴... 이젠 메모해가며 읽어야 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블렌드 자기만의 방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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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를 열었을 때 맡게 되는 원두의 향이 참 좋다.
커피메이커에 넣고 내리는데 향에서도 그리고 맛에서도 산미가 약간 느껴진다.
산미 안좋아한다고 그렇게 부르짖어놓고 왜때문에 산미.. 그리운거지?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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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식을수록 신맛이 더 세게 느껴진다..... 커피란 이런 것인가? 신맛이란 이런것인가?

반유행열반인 2020-03-18 11:30   좋아요 0 | URL
혼자 묻고 답하고 계셔요? ㅋㅋ알라딘 커피는 이름이 다 하는 듯...알라딘 커피 영업은 다락방님이 다 하고...전 산수유 한 잔 먹었어요. 내리는 중에 딴짓하다 다 식은 커피 먹으니 시콤시콤 ㅋㅋ즐거운 하루 보내셔요.

다락방 2020-03-18 11: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현철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 혼자서 농담을 하고 나 혼자 웃지. 우습지도 않은 우스개 소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 가사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알라딘에서 책을 엄청 사는걸로도 모자라 이젠 커피까지 엄청 구매하고 있으니, 제 돈은 다 어디로 가고 있나요... 가뜩이나 쪼꼬미 월급이... 하아-

반유행열반인님,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W 2020-03-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미 매력있죠 ㅎㅎㅎ

다락방 2020-03-18 13:57   좋아요 0 | URL
산미.. 제겐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 그리움은 무엇인지.......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