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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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혹은 문학이란 장치의 고유한 장점을 잘 살린 작품.
모두의 선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듯이 모두의 악이란 것도 틀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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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04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 예상밖 별넷 ㅋ

다락방 2024-01-04 09:20   좋아요 1 | URL
소설이어야, 다시 말해 책이어야 너무 맞춤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 재미가 극대화되는 거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는 이메일로 교류하는 거라 서로 얼굴을 모르는데, 우리도 그 얼굴을 모르잖아요? 만약 이게 연극이나 영화였으면 책만큼 재미를 줄 수 없었을 텐데, 이 책 <헌치백>도 결말에 이르면 이게 책이어서 좋구나 싶더라고요. 헌치백은 영화나 연극이었으면 정말 아주 잘 만들어야지 자칫 잘못하면 영 망가질 것 같아요. 책으로 만나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어요.
 

두께가 3, 4센티미터나 되는 책을 양손으로 잡고 집중해야 하는 독서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등뼈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일이다.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구부러진 목으로 겨우겨우 지탱하는 무거운 머리가 두통으로 삐거덕거리고, 내장을 짓누르며 휘어진 허리가 앞으로 기운 자세탓에 지구와의 줄다리기에 자꾸만 지고 만다. 종이책을을 때마다 내 등뼈는 부쩍 더 휘어지는 것만 같다. - P37

17) machismo. 남자다움, 남성우월주의. ‘남자다운 남자‘를 뜻하는 스페인어 ‘마초‘에서 유래. - P37

짜증이나 멸시라는 건 너무 멀리 동떨어진 것에는 던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종이책에서 느끼는 증오도 그렇다. 운동 능력이없는 내 몸이 아무리 소외를 당하더라도 공원 철봉이나정글짐에 증오감을 품지는 않는다. - P44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심적인 고뇌를 〈모나리자> 그림에 던졌던 요네즈 도모코의 심정 그 자체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모나리자〉를 더럽히고 싶어지는 이유는 있다. 박물관이든 도서관이든 보존되는 역사적건조물이 나는 싫다.
완성된 모습으로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오래된 것이 싫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낡아가는 데 가치가 있는 것들이 싫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그런 점이 비장애인이 걸리는 위중한 불치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고, 다소의 시간 차가 있을 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파괴되어 가는 비장애인의 노화와도 다르다. - P60

책을 읽을 때마다 등뼈는 구부러져 폐를 짓누르고, 목에는 구멍이 뚫렸고, 걸어다니면 여기저기에 머리를 쿵쿵찧으며 내 몸은 살아가기 위해 파괴되어 왔다.
살아가기 위해 싹트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과연 무슨차이가 있을까.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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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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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익히 알고 있는 그 부끄러움에 관하여.
그 부끄러움은 필연적이었으나 마땅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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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03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니?.....


수요일인데도 진짜 책탑이 없다니...부끄럽지 않니???

다락방 2024-01-03 10:11   좋아요 2 | URL
저 머릿속에 페이퍼 쓸 거 있는데 지금 일이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어요. 할 것만 해놓고 올게요. 후다닥 =3=3
 
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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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마땅한 분노와 그 분노로 인한 성찰이 담긴 글. 읽는 내내 나 역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 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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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1-02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죠.. 그 분노의 성찰과 힘에 저도 눈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읽게 되었던 책

다락방 2024-01-03 12:13   좋아요 1 | URL
달자 님도 이 책 읽으셨군요! 새해 첫 책으로 묵직한 책을 골라 읽었습니다.

얄라알라 2024-01-03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러브드가 다 인줄 알았던 까막눈..

[타인의 기원] 제가 ‘읽고 싶어요‘ 눌러 놓고도 까묵.

˝분노˝ ˝성찰˝ ˝타자화˝ ˝타인˝ 다락방님 올려주신 100자평 보니, 묵직한 메시지겠구나 싶어요^^

다락방 2024-01-03 12:13   좋아요 1 | URL
저는 <재즈> 랑 <러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빌러비드> 는 가지고 있는데 차마 못읽고 있어요. 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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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진짜 너무 좋다. 책장을 넘길수록 아 내가 하루키를 좋아햇던 그 오랜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보면 그는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그 말,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선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선한 이야기이다.


'나'는 열여섯살 에 열다섯살 소녀가 만나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매주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고 만나지 않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며 대화한다. 자연스레 소년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연인이라 생각하며 소녀 역시 온전히 네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소년은 이에 기다린다. 응, 너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내 육체도 뜨겁게 반응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야. 너와 함께라는 게 중요해.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품었던 소녀가 그러나 어느 순간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진다. 한마디 말도 없이. 소녀가 나를 좋아했던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녀는 어디로 간걸까. 우리가 만나는 동안 소녀가 얘기했던 '그 도시'로 간걸까? 나는 소녀의 편지를, 그리고 소녀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동료도 만나고 연인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관계들 중 어느것도 소녀에게 품었던 만큼의 격렬한 애정을 갖게 하진 않았다. 마음 속 저 깊이 누군가를 품고, 그 사람을 계속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의 연애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제 더이상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 되어도 그는 변함없이 마음 속 성소에 소녀를 둔 까닭이다. 그러던 그가 그 소녀가 있는 그 도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인가. 그는 그 도시로 들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곳'에서 소녀가 늘 말해왔던 '꿈을 읽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리고 매일 꿈을 읽는 도서관에서 소녀와 만날 수 있다. 비록 소녀는 자신과 헤어졌던 열여섯 살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러나 눈앞에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있다. 매일 그녀를 만나 꿈을 읽고 그리고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그녀를 집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일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순간을 위해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려야 했다. '나'와 떨어진 나의 그림자는 시름시름 앓는다. 그는 다시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 도시에서 떨어져 사는게 아니라 그들이 원래 함께했던 현실 세계-그것을 현실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림자를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여기에 남겠다고 한다. 여기는 그가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 그토록이나 그리워했던 소녀가 있던 곳이니까. 그렇게 자신의 그림자와 작별을 하고 여기에 남고자 결심했는데, 눈을 떠보니 그는 다시 바깥-현실-으로 돌아와 있다. 그 도시를 떠나서. 그리고 이제 다시 이곳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거기에 남기로 결심했었는데.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의 도서관 관장으로 취직해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된다. 



자, 나는 내 입장에서 이야기속 주인공이 되어본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 속 성소에 누군가를 품고 산다.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면서, 그러나 마음속 성소에 누군가를 품고, 그런채로 직장을 다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책도 읽고 친구들을 만나고 또 연애를 하며 결혼에 이르기도 한다. 내 마음 저기 저 한구석, 저기에 있는 그 사람을 그대로 둔채로. 그런 상태의 나를 누군가는 '어딘가 비어있다'고 눈치챌 지도 모른다. 혹은 '도저히 다가갈 틈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누군가가 분명히 계속 존재하고 있고,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이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함께함, 부재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강한 존재, 그렇다면 내 마음속 성소의 사람과 지금은 함깨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함께할 거라는, 함께하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소년을 결국 싱글 중년이 되게한 것일테다. 그런데 마흔다섯, 그토록이나 바라던 상대를 만나게 됐고 심지어 매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얼마나 꿈같은 일이냐, 얼마나 달콤한 일이냐, 결국 이 순간을 위해 삼십년을 기다린건데. 


그런 상대는 여전히 열여섯살의 소녀다. 게다가 그 도시에서의 소녀는 내가 현실이라 부르는 바깥세계에서 나와 만났었다는 사실을, 나와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내게 '온전히 네 것이 될게'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 그렇다면, 그것을 소녀에게 알려야 할까? 마흔다섯인 내가, 열여섯의 너에게, 너랑 나랑 바깥 세게에서 사랑했어 우린 연인이었어를 말해야 할까?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를 계속 사랑하면서.


사실 내 나이 열일곱에 열여섯 남자를 사랑해본 적은 없어서(여중여고여대..), 그리고 나의 강한 무의식은 미성년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기를 거부해서, 아무리 입장을 바꿔보려고 해도 열여섯 소년을 떠올리게 되진 않는다. 대신, 나는 이 모든 이야기에 실감적으로 나를 넣어보기 위해, 상대의 나이를 스물일곱으로 설정했다. 자, 그와 내가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내가 그에게 반하고, 그리고 그가 온전히 내것이기를 강하게 바랐던, 그 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러나 그가 홀연히 내 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마음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내가 그를 사랑했던 만큼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함께하지 않을까. 그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그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나는 직장 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활동을 하고 연애도 한다. 몇 번의 연애를 거듭해도 나는 정착하지 못한다. 그렇게 마흔 다섯이 되었고, 어느날 갑자기 나는, 그가 있는 곳에 닿게 된다. 눈을 떠보니 내 눈앞에 그가 있다. 그런데 그는 스물 일곱의 모습이다. 아이고야. 나는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지만,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서 나와 사랑했던 기억이 없다. 나를 모른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내가 나타났고 함께 일을 하면서 매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와 나는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에게 무리 없이 잘해주지만, 나는 그를 매일 볼 수 있어서 기쁘지만, 그런데, 그에게 말을 할 것인가? 있지, 저기 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연인이었어, 라고. 그는 여전히 스물일곱 나는 마흔다섯인데? 이 나이 차이가 뭐 감당하지 못할 나이차이도 아니고 상대가 미성년자인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마음에 품은 채로 그를 계속 사랑하면서, 말하지 않고 좋은 동료가 될것이다. 그러다보면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가 아이를 낳고 아이 아버지가 되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하나,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나'는 그림자만 바깥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여기 남기로 결심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는 적막한 도시. 내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출근해서 나와 함께 일하는 그만 있는 도시. 나는 내가 마음 속 성소에 품었던 사람이 이 도시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기에 남기를 선택할 것인가? 역시 '아니' 라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그림자와 함께 바깥으로 돌아갈 것이다. 비록 바깥으로 가면 내 마음 속 성소에 있는 스물읿곱의 그를 만날 수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와 함께할 수 없겠지만, 나라면, '그와 함께 적막한 곳에서 둘이서만 사는 삶' 보다는 '그가 없는 바깥 세상에서 내 그림자와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그를 다시 내 옆이 아닌 내 마음 속에 넣어야겠지만, 나는 그 삶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그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내 그림자 없이는 살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내'가 믿어야 할 건 바로 '나 자신' 이므로. 낙하할 나를 받아줄 이는 결국 나이고, 나에겐 그 누구보다 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에겐 그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필요하다. 그만 있는 세상 보다는 그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나는 선택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줘서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는게 즐거웠다. 게다가 선하기까지 하다. 눈앞에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유령이라고 할 수 있지' 라는 존재가 나타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 나는 섹스를 할 수 없는데 나에게 성애를 품고 있는 너는 그럼에도 나를 만날거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말해줄 수 있는 인간이 하루키의 이야기 속에 있다.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와인을 따라주고, 그리운 사람의 묘지에 매주 방문하는 인간이 여기 있다. 다른 사람의 안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여기 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것 처럼 만들어내는 것이 하루키의 능력인 것 같다. 책속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인용하며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리얼과 비리얼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했'(p.672)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루키가 사는 세계 역시 바깥 세계와 그 도시가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기다림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간다. 선택이 아니라 그것만 주어진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p.681)



자, 나는 떠난다. 나를 받아줄 이가 나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이 도시를 떠난다. 이 도시는 어떤 도시냐, 내가 그토록이나 원하던 바로 그 사람이 있던 도시, 삼십년을 기다렸다 만난 그 사람이 있던 도시, 그런데 그 도시에 그 사람이 있음을 알고도 나는, 나를 찾으러, 나를 믿으며 떠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믿는 것, 나를 찾는 것. 그 사람보다 원하는 건, 바로 나였다.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 P138

누구를 위한 비밀 공간을 확보해둔 채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된다-그런 게 가능할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P192

여성과의 관계로 말하자면 거의 똑같은 문제의 반복이었다. 남들이 그러듯 몇 명을 만나 사귀었고,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절대 반쯤 노는 기분으로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들과 진정한 의미의 신뢰 관계를 쌓진 못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경우도 잘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꼭 무슨 일이 터져서 매번 그르치고 말았다-그르치다라는 표현이 실로 딱 맞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게 항상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가, 너의 이야기가, 너의 모습이 내 마음을 도저히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의식의 깊은 곳에서 너를 생각했다. 짐작건대 그것이 가장 큰 이유다. - P193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선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 P194

"네,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 있어요. 그리고 그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 - P441

다만 당신의 이야기에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사실 그 모두가 당신의 마음이 원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당신 마음이(당신은 모르는 곳에서) 그러기를 원했다-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디조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 P444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났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제법 진지하게 사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소녀만큼 누군가를 열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고, 대낮에 깊은 꿈을 꾸는 것 같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런 순수한 심정을 품은 적은요. - P447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449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 P452

"아무래도 우린 해가 진 뒤에 만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두 마리 부엉이처럼."
"어두운 숲속 깊은 곳, 두 마리 부엉이처럼." - P572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 P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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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31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다락방님의 진심이 담긴 리뷰를 쓸 수 있게 해준 리뷰이벤트 도서 간만에 등장!!👏👏👏👏👏 어떤 지점이 다락방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아요. 소설에 아주 푹 빠져서 읽는 다락방님의 독법도 도드라지고요^^ 즐거운 독서하셨군요~~!

다락방 2024-01-02 08:45   좋아요 0 | URL
어휴 하루키가 하는 이야기가 이야기 자체로 제 마음에 이렇게 훅 들어온적은 또 처음인 것 같아요. 그간 하루키의 유머를 제가 엄청 좋아했거든요? 찰떡같은 비유도 좋아했고요.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 자체가 저를 움직이네요.
ㅋ ㅑ - 역시 독서 만세입니다. 만세!!

단발머리 2023-12-3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다락방님 너무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같은 책을 읽었을 때 겹치는 지점과 다른 지점을 발견하는게 이렇게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네요.
저도 그 사람에게.... 이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너를 사랑했던 그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 못할거 같고, 그리고는 그렇게 그 사람 곁에 남기 보다는 그 사람을 두고 도시를 떠나 나의 또 다른 현실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또 다른 나를 그 사람에게 남겨두고 싶기도 해요.
나의 일부를요.

전 하루키를 많이 안 읽어서요. 인제서야 조금씩 좋아져요. 이 책도 궁금해서 나오자마자 샀는데 이제 막 읽었네요.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죠? 하루키를 읽는 시간이라니.....근사하다!!!

다락방 2024-01-02 08:47   좋아요 0 | URL
게다가 상대가 미성년자인데 내가 성년이라면 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건 말하는 순간 범죄가 되지요. 아무리 내 안에 사랑 있어도.. 그리고 어쨌든 저는 현실로 돌아올 겁니다.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둔 채로 삶은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걸 선택할 것입니다. 크- 어쩐지 마음이 살짝 아프지만, 삶이란 건 결국 모든 걸 다 가지면서 살아갈 순 없는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겠지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야겠고요.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처음에 오글거려서 이걸 어쩌나 했는데, 좋은 독서였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12-3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글거렸지만 결국엔 좋았군요! 저도 언젠가 하루키를 좋아할 날이?!

다락방 2024-01-02 08:48   좋아요 0 | URL
하루키 안좋아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잖아요. 저도 제가 지금 하루키를 알았다면 좋아했을지 모르겠어요. 제 경우에는 <렉싱턴의 유령> 이라는 단편집 읽고 훅 빠졌는데, 어쩌면 책과의 궁합도 필요한 일인것 같습니다!

persona 2023-12-3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읽겠다고 안 읽고 있었는데 끝까지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완독 축하드립니다.

다락방 2024-01-02 08:48   좋아요 1 | URL
저도 초반에 엄청 갈등했어요. 그냥 팔아버릴까, 하고요. 그런데 이렇게나 즐거운 독서를 하였습니다. 페르소나 님, 도전!! ㅎㅎ

루피닷 2024-01-01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24-01-02 09:09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미 2024-01-0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완전 초반 재미없어서 던져두었다가 다락방님의 ‘아오 진짜 너무 좋다‘보고ㅋㅋㅋㅋㅋ
지금 400쪽까지 읽었어요 정말 좋네요. 마저 읽고 리뷰 읽어보렵니다. 다락방님은 한 문장조차 영향력!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24-01-02 09:09   좋아요 0 | URL
저 막 읽다 보니까 ‘아오 좋아‘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지금쯤은 다 읽으셨을까요? 미미 님께도 어느 부분에서든 좋은 독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미미 님, 해피 뉴 이어!!

느긋느긋 2024-01-1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1등 축하드려요!
이게 바로 호텔에서 쓰여졌다는 전설의 리뷰!!
읽고있으니까 책 다시 읽고싶어지는걸요, 읽으면서 무척 좋았던 그 시간을 다시 만들어봐야곘어요,

저도 돌아간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채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 나이간격은 너무한 듯 ㅠㅠ 그걸 떠나서라도
오래 그리워한 사람을 갑자기 볼 수 있게 됐을때는 그냥 매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은 느낌.

마지막 문장도 새롭네요, 그 사람보다 원하는 건 바로 나, 진심으로 원하는 건 바로 나.
역시 외로움지수 0인 락방님다운, ㅎㅎ
그러고보니 다들 궁극적으로는 그럴 것 같아요.
선한 리뷰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