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한국을 떠나 서구에서 오랫동안을 전위예술에 종사했던 두 예술가(차학경, 백남준)가 공통적으로 한국에 대한 체험과 기억을 소재로 하여 작품활동을 한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실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바로 예술의 원형이 민족적 무의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지고, 특수한 개별적 사례가 곧 보편적인 우주법칙을 형성한다는 자명한 진리를드러내는 결과라는 것이다. - P83
차학경은 미술적으로는 개념미술, 영화적으로는 장치이론, 즉 정신분석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관객와 텍스트 주체의 동일시를 해석하는 후기 구조주의 영화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미술사적·영화사적 의의보다도 더욱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한국 출신의 예술가라는 점이다. 백남준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예술은 민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그것이 이산 예술가의 공통적인 특색이기도 하겠지만 그녀에게 있어 현재 거주하는 국가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떠남(to leave)은 곧 거주(to live)가 되는 것이다. - P84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거주(居住)가 된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 P86
불어로 ‘받아쓰기‘라는 의미를 가지는 제목인 ‘딕테 DICTEE’가 지시하는 것은,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배우는 강제적인 반복훈련을말한다. "’받아쓰기‘는 말을 하는 행위도 아니고, 쓰는 행위도 아니며, 읽는 행위도 아니다. 받아쓰기의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대리자, 보조자, 종속자일 뿐이다"(민은경, 차학경의 Dictee, Dictation, 받아쓰기) - P90
"원래 지내오던 땅에서 떨어져 다른 곳에서 그곳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언어의 지배적인 힘으로인해 자신의 무기력함을 체험하게 된다. 이 지배적인 힘을 견디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받아쓰시오‘, ‘해석하시오‘라는 명령어를 듣고 그 언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규칙에 맞게 따라하고 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 P90
『시적 언어의 혁명 Revolution in the Poetic Language』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비언어적인 공백을 말하기 위해 고대의 창조론으로부터 논거를 빌려온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화자인 티마이오스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의문하며, 그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공백으로서의 ‘장소‘를 일컫기 위해 쓴 개념, ‘코라(ch ra)‘가 그 주인공이다.‘ ‘코라‘는 그 자체로서 선험적 기원을 갖는 이름이 아니라, 이미 언술이 이루어진 이후에 소급적으로 추론될 수만 있는, 서출(庶出, nothos)적인 근원이다. - P140
크리스테바는 플라톤의 서술에 발생한 논리적 균열을 언어학에 적용, 기표의 생성 이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백을 논한다. 이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곳에 붙여진 이름이 ‘기호적 코라(semiotic chra)‘이다. 이는 기의가 점유하기 이전의, 지시되지 않는 개념적인 빈자리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기호가 생성된 이후에야 소급되어 이루어진다. 기호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언어 이전의 무정형적인 원형이자, 언어의 균열을 함축하는 구멍이 ‘코라’이다. 서현석이 다른 곳에서 밝혔듯, "언어를 넘어서는 공백은 없다. 코라는 언어에 의해 성립된 공백이다. (중략) 상징계의 질서는 코라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부정한다." 크리스테바에 있어서, 코라는 만물의 언어적 근원이며, 여성적 창의성의 원천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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