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수키시리즈의 주연을 '안나 파킨'이 맡는다는 소식을 듣고 안나 파킨이 누구인가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 《트루 블러드》를 1회인가 본 적이 있고. 이 드라마는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고 했는데, 안나 파킨은 그 드라마를 찍으며 '빌' 역을 맡았던 배우와 결혼하여 쌍둥이를 낳았다. 뭐, 내가 하려는 얘기는 그게 아니고.


회사 동료랑 트루 블러드 얘기를 하면서, 그런데 안나 파킨이 앞니 사이가 벌어졌잖아, 하는 얘기도 당연히 나왔는데, 그들이 완전 당당한 게 아니라면, 미국에서는 앞니 벌어진 게 아무렇지도 않거나 혹은 매력의 상징인가봐, 분명 교정할 수 있을텐데도 교정하지 않고 꿋꿋이 앞니 벌어진 채로 나오니까 말이야, 라는 대화를 주고 받았었다. 우리 나라였다면 데뷔전에 이미 교정하고도 남았을텐데. 소속사에서 권유한다거나 말이다. 내 경우엔 스무살 시절, 편의점에서 알바하다가 어떤 '아저씨'를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다 좋은데 웃을때마다 이빨이 벌어진 게 못내 안타까웠던 거다. 대체 저 이빨은 왜 벌어진거람? 하고. 뭐 그렇다고 벌어진 이빨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벌어진 이빨은 뭐랄까 살짝 아쉬운 느낌을 주는, 외모상의 '옥의 티'로 생각됐던 거다.


그런데 안나 파킨은 얼마나 당당하게 웃는가 말이다. 





게다가 최근에 내가 본 영화 《더 로맨스》에서는 그녀가 완전 아름답고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하는거다. 설득력 없어...여튼, 그 예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탄 흑인 남자도 앞니가 심하게 벌어졌던 걸로 기억되는데..그도 이빨을 교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책을 읽다가, 이런 멘붕스러운 문장을 만나게 된다.




헬라나의 살짝 벌어진 치열, 목 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을 때 드러나는 뒷덜미의 자태 때문에 실제도 더욱 힘이 들었다. 그는 드러내놓고 헬레나를 피해버렸다.(p.136)


















읭? '살짝 벌어진 치열'이 '목 선'과 '뒷덜미의 자태'와 함께 놓일 수 있는, 그런 대등한 문장이란 말인가. 이 책의 주인공 '이스마일'은 아름답고 관능미가 넘치는 형수 '헬레나'에게 자꾸만 빠져들게 되는데, 그 요인들 중 하나가 저 '벌어진 치열'인 것이다. 오, 맙소사! 


막연하게 미국에선 벌어진 이빨이 매력의 상징인가보다, 라고 추측했었는데, 알바니아에서도 그건 남성을 유혹하는 필살기로구나. 오, 벌어진 치열!


벌어진 치열

벌어진 치열

벌어진 치열



나의 '덧니 하나 없고 가지런하며 잘생긴 이빨'은 미국이나 알바니아에 가면 절대 어필할 수 없는 치아구조로구나. 아...'벌어진 치열'이 '목 선'과 같은 거로구나, 그런 느낌으로 남자를 유혹하는구나. 유후- 뭔가 어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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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5-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m.blog.naver.com/PostView.nhn;jsessionid=500FAF84A7573A21A6F2FF98FE0F7C71.jvm1?blogId=tigermetal&logNo=130156891547&categoryNo=0&currentPage=1&sortType=recent&isFromSearch=true

모바일에서 올리는 거라 링크 되려나.
암튼 바네사 파라디, 조니뎁 전 와이프인디 이여자도.. 벌어진 치열 ㅎㅎㅎ 근데 몬가 매력적임 ㅠㅠ 우월해 ㅋㅋ

다락방 2014-05-13 13:04   좋아요 0 | URL
두번째 사진 빵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 2014-05-1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다 우월한데 아주 사알짝 벌어진 치열이 그 우월함 사이에 있는게 아닐까요?

다락방 2014-05-13 13:06   좋아요 0 | URL
음 그러니까, 벌어진 치열을 굳이 교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른 모든게 다 우월하다, 뭐 이런 의미란 거죠? 바네사 파라디의 경우라면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미 모든걸 다 가졌는데, 치아를 교정할 필요가 뭐람, 뭐 이런거? ㅎㅎ

단발머리 2014-05-13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어진 치열. 저도 별로예요.
하지만, 전 '덧니'가 있으니 그걸로 어필하렵니.....ㅋㅎㅎㅎㅎㅎ (어필이 안 된다는 결론입니다.)

인용해주신 문장 뒤로 어떻게 됐는지, 완전 궁금해요.
조금 더 써주시면.... 안 될까요? (덧니 웃음^^)

다락방 2014-05-13 15:39   좋아요 0 | URL
결국 그들은 그러니까...서로를 향한 욕망에 무릎 꿇어요 단발머리님. (응?)
그들은 집 맨 꼭대기 방에서 바닥에 천을 깔고....근데 천을 깔고 하면 아플텐데...그쵸? ( ")

무해한모리군 2014-05-1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배우는 참 싱그럽네요... 그러니까 윗분들 말씀대로 예쁘니까 치열이 벌어져도 예쁜거 아닐까 싶습니다.

다락방 2014-05-14 10:30   좋아요 0 | URL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서 더 싱그럽게 보이는걸지도 모르겠어요. 위축되어 있다면 저렇게 예쁘지 않았을거에요. 뭔가 당차보이죠?

마노아 2014-05-1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외국 영화 볼 때 신기한 게 사마귀거든요. 얼굴 한복판에 있어도 아무도 없애지 않고 그냥 당당히 나와요. 한국 같았으면 다 빼고 나왔을 텐데 말이죠.그게 참 놀라웠어요. 근데 사실 저도 사마귀는 좀 뺐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합니다.ㅎㅎㅎ

마노아 2014-05-13 22:10   좋아요 0 | URL
안나 파킨이 피아노의 그 아역 배우인가요?

아무개 2014-05-14 08:16   좋아요 0 | URL
앗! 피아노의 그 꼬마??? 오호~

단발머리 2014-05-14 09:05   좋아요 0 | URL
정말 그 꼬마인가요? 크헉...

다락방 2014-05-14 10:32   좋아요 0 | URL
ㅎㅎ 사마귀라면 로버트 드니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로버트 드니로 말고는 사마귀 배우는 생각이 잘 안나네요. ㅋㅋ 전 벌어진 치아를 보면 자꾸 그 사이에 밥풀이 통째로 낄 것만 같아서... ㅠㅠ

네, 필모그라피를 보니 저 배우가 피아노의 그 아이가 맞긴 한데, 저는 피아노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나왔던 건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성인 여자와 성인 남자, 바다에 빠지는 피아노만 생각나고.. ( ")

기억의집 2014-05-15 11: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안나 파킨 피아노의 그 아역배우~ 전 그 때 안나 파킨 이뻐서 기억 났는데.. 진짜 외국애들은 아이땐 이쁘구나 했어요! 벌써 언제때 영화예요. 90년대 중반인가요? 제인 캠피온 감독은 여전히 활동할까 싶네요.

다락방 2014-05-15 11:11   좋아요 0 | URL
전 아이가 나온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전 역시 그당시의 관심사가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라 그랬던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LAYLA 2014-05-14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이쁘고 치열만 흠이라서 그런건 아닐까요..('' ) ( '')
너무 완벽하면 정 떨어지듯이..ㅎㅎ

다락방 2014-05-14 10:33   좋아요 0 | URL
저는 다 흠인가운데 무엇...이 장점일까요? ( ")
맞아요, 다 이쁘고 치열만 흠이라서 그게 '흠'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드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난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당당해. 근데 내 치열 뭐? 하는 당당함이 아름다움에 크게 한몫했을 것 같고 말입니다.

기억의집 2014-05-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네사 파라디도 치열 벌어졌지만... 진짜 치열 벌어진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은 마돈나죠~ 교정 절대 안 하더군요. 젊은 시절부터 화보마다 치열 벌어져 이상했는데..외국은 치열 벌어지면 돈 많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대요.

다락방 2014-05-15 11:11   좋아요 0 | URL
헐...마돈나가..치열이 벌어졌어요? 전 왜 몰랐죠? 치열 벌어지면 돈 많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사실인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마돈나도 그렇고 바네사 파라디도 그렇고..죄다 유명한 사람들....저는 치열이 붙어있어서 이렇게 매일 출퇴근하며 사나봐요. ㅠㅠ
 

연휴동안 볼거라곤 짜장면집 밖에 없었던 차이나타운을 다녀왔고, 수목원을 다시 찾기 위해 대전엘 갔다. 대전에 도착했을 때, 대전역앞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는 걸 봤다. 나보다 일찍 도착한 친구는 나를 기다리며 알라딘 중고샵에 가있던터라, 나는 친구가 나에게로 오면, 친구와 함께 분향소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어쩌면 친구는 분향소에 가는걸 불편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그러니까 너무 아파서 혹은 슬퍼서 괴로워서 미안해서 등등,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친구에게는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그래, 나때문에 따라가느니 분향소라는 곳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이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서점에 간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혼자 분향소를 찾았다. 입구에 마련된 국화를 한 송이 들고 앞에 놓으며 잠시동안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는데,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다짐해야할까. 그 다짐과 맹세들은 내것일까 남의것일까. 잠깐동안 남들이 다했을법한 다짐들을 속으로 되새기며 분향소를 나왔다. 분향소를 나오니 저 멀리에서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내가 여기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말했다. 분향소에 다녀왔다고, 너 오면 같이갈까 했지만 혹여라도 네가 불편할지도 몰라서 다녀왔다고. 만약 그때 친구가 자신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면 나는 다시한번 같이 가주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나를 기다리며 이미 다녀왔노라고 했다. 친구 역시 나를 기다렸다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나 자신은 그곳에 다녀왔다. 그순간, 나는 이 친구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그전보다 더 좋게 느껴졌다.




연휴동안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대전에 놀러가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리 줄이 길어도 성심당에서 튀김소보로를 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평소의 나는 여러차례 대전에 내려갔어도 성심당에서 빵을 팔든 떡을 팔든 관심없었는데, 튀김소보로가 유명하다는 말에 여동생이 먹어보고 싶다고 했고, 마침 연휴를 이용해 여동생이 우리집에 오기로 되어있었던 거다. 기회는 이때다. 나는 대전에 가있다가 여동생이 왔다는 문자메세지에 기차표를 이십분 뒤로 미뤄 성심당의 그 긴줄에 섰고, 드디어, 득템을 했다. 게다가 어린이날을 맞아 조카에게 '뭐갖고싶니' 라고 물었더니 '리본 머리띠' 라는 답을 들은터라 그래, 직접 리본 머리띠를 선물로 줄 수도 있겠다 싶어, 부랴부랴 조카가 좋아하는 분홍빛의 리본 머리띠를 골랐다. 튀김소보로와 리본 머리띠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만족스러웠다. 이 두 가지를 다했어! 



조카는 감기를 앓고 있었고 기침이 매우 심했다. 전날 초저녁부터 잠이든터라 다음날인 어제 일찍 일어난 조카는 신나게 놀다가 점심무렵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여행과 반복되는 음주, 일찍 일어나 조카와 놀았던 그 모든것들까지 피곤했던 나는 조카 옆에 함께 누워 잠을 청했다. 조카는 자다가도 기침을 했고, 그때마다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자는 조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이가 기침을 하면 등을 두드려줘야 한다고 여동생이 말했었고, 좀전에 조카를 재울때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하는걸 보았던터다. 몇차례, 조카는 기침을 했고 나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조카의 기침 소리가 유독 컸다고 느껴질즈음, 나와 조카가 잠든 방의 방문을 빼꼼 열고 여동생이 들어왔다. 둘째를 재우고 거실에 나왔다가 기침 소리가 들려 들어온건데, 내가 조카를 두들겨주는 걸 보더니 '언니 있었구나' 했다.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그 한마디 말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언니가 있어서 안심이라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뒤로 미루고 미루던 줌파 라히리의 책도 연휴동안 읽자고 다짐했었는데, 낮술과 저녁술까지 빽빽한 일정들 속에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잠깐 까페에 들러 읽으면서 몇 문장을 가슴에 담고, 딸기바나나 스무디와 함께하는 이 온전한 시간에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 부분들을 읽어나갔다. 자정 무렵에야 독서는 끝났고,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잠들면서, 잠이 깬 오늘 아침까지도 나는 슬프고 아프고 외로워서 가슴이 쿡쿡 쑤셔옴을 느꼈다.



















자신의 의도가 옳았으나 자신이 시도한 방법이 잘못된 것을, 죽음이 임박해오던 시점에 깨달았던 우다얀. 동생을 향한 열등감에 시달렸으나 동생을 사랑했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언제 바스라질지 몰라 겁내하던 수바시. 엄마의 불행을 온몸으로 느끼며 결국 버려짐을 감당해야 했던 벨라. 그리고 이 모든 중심에 자리 잡았던 가우리.


가우리가 야속할 때가 있었다. 그 야속할 때는 내 가슴을 탁탁- 치고 싶었다. 가우리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하고 싶었다. 그런 선택을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듯이. 어떤 시절의 나. 그때의 나는 그 잘못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거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채로 저지르고 있었다. 이 선택에 후회는 없을거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이 나를 점점 더 조여왔고, 나는 어느날 악몽을 꾸었고, 반복되는 나쁜 일들에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라는 생각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먼훗날,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런 정도의 일을 저지르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고.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그때는 멋도 모르고 저질렀다고. 


가우리가 그런 나같았다. 그당시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그녀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들이 가져온 결과들은 결코 최선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녀가 사랑했고 또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의 그 선택은 모두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외로웠고, 수바시도 외로웠고, 벨라도 외로웠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묵묵히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찾아 그 길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걸어가면서,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그들은 외로웠다. 그들에게 깊이 박힌 그 외로움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수바시의 유학시절 룸메이트가, 죽어가는 그때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고통을 알렸던 그 장면에서, 나는 이 모두의 외로움이 마치 내것처럼 느껴져서 슬펐고, 어쩌면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것이, 그리하여 내가 혹은 상대가 고통스러울 때 그렇게 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 최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면서 혼자 지내는 것은, 분명 내가 추구해왔던 것이고 결국 내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했다. 결혼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열이 끓어오르면 내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다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내가 늙어 죽어갈 때, 내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대전에 집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다고 말하던 내게 친구가 하던 말도 떠올랐다. 결혼을 하는건 어때? 그렇다면 너의 절반의 부담은 그가 짊어질 수 있잖아, 하던. 나는 그때, 그렇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내 그 절반 때문에 그랑 사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싫어, 라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그때 절반을 늘 내 옆의 상대가 부담해줄 수 있는게 아닐까. 수바시와 우다얀과 가우리와 벨라가 너무 슬퍼서, 나는 이런 생각까지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볕이 좋은 날이었고, 딸기바나나 스무디는 맛있었다. 책속 문장들은 감탄스러웠고, 나는 포스트잇을 붙여나갔다. 마침 그 볕에, 마침 이런 문장이었다. 약속 장소에 약속된 시간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 이미 한참 늦어버린 가우리, 그런 그녀를 기다리던 우다얀이 만나던 이런 문장.



그는 거기 있었다. 영화관 밖, 벌써 영화의 1부를 보고 난 소감을 나누는 몇몇 무리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우다얀은 손을 들고 고개를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울이며 둘의 머리 위에 조그만 손차양을 만들었다. 그 동작에 그녀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그와 단둘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인들과 이 도시의 인파로부터 안전하게 비켜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그의 표정은 짜증이나 조바심이 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게 된 기쁨만 서려 있었다. 그녀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던 듯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일부러 터무니없이 늦게 나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의 영화 내용을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그가 영화표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는 내내 인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갈 대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p.103)



이 책을 읽는 동안 줌파 라히리의 단편 <지옥-천국>도 자꾸 생각난다. 수바시가 홀리를 만날때, 특히 그때 그랬다. 이 시점에 이 책을 읽으니 이런 문장만 눈에 띈다던,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 생각도 났다. 그 친구가 말한 문장은, 아마 이 문장이었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친구가 몇 개의 문장을 눈에 담고 또 내가 그렇게 몇 개의 문장을 눈에 담았다면, 이 문장에서 우리는 겹치지 않았을까. 아프고 조심스러운 문장, 조심스럽고 아픈 문장.



부모님은 장티푸스가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가 홀리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며칠 동안 애를 태웠지요. 그 얼마 전에 동네에 사는 어린아이가 죽은 것처럼 말이에요. 부모님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할 때면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변해요. 아직도 우리 몸에서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 아빠가 되면 일어나는 일이에요, 홀리가 말했다. 자식이 위험에 처할 땐 시간이 멈춘답니다. 의미도 사라지고요. (p.131)






얼마전에, 아주 오래전의 연인을 오만년만에 만나고 후회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당연히 모습이 변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마주 앉아서는 '아, 연애는 역시 타이밍이구나, 만약 지금 이 사람을 만났다면 사귀지 않았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했다. 만나는 내내 대화는 즐거웠고, 분위기도 좋았다. 음식도 맛있었고 술은 술술 넘어갔다. 그래서 즐겁게 웃으며 호기롭게 2년에 한번쯤은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헤어지기전, 내가 타야하는 버스를 기다릴 때, 그때 그가 모든걸 다 망쳐버렸다. 그 순간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생각하는 게 이렇듯 달라져버리고 말았다. 던져버린 돌을 다시 주워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느닷없이 홀리가 떠올랐고, 그녀의 부엌 식탁에서 먹었던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그 짧았던 격정이 지금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열심히 모으다가 그만둔 돌멩이처럼 사소해 보였는데, 잠깐 돌멩이를 움켜쥐었다가 해변을 따라 걸어가면서 바다에 던져버리듯이 그는 그렇게 그녀를 보냈다. (p.160)




일전에 나는 '강도현'의 《착해도 망하지 않아》라는 책의 리뷰를 쓰면서 모두가 낯선 사람들인 까페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을, 인도를 떠나 미국으로 온 가우리가 느낀다. 



가우리는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다얀의 아내가 아니라 수바시의 아내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는 로드아일랜드에서도, 심지어 대학 교정에서도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한 행동을 힐난할 것에 대비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러 테라스에 나가 햇볕을 쬐며 얘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실내나 휴게실이나 오락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거나 당구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pp.213-214)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다시, 손차양을 만드는 우다얀이 있다. 



그는 그녀에 맞추어 몸을 가누었다. 고개를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울였고, 햇볕으로부터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려고 손을 올려 둘 사이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오직 정적뿐. 햇볕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p.538)




아직도, 쿡쿡, 모두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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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14-05-0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 동안 사랑하는(!), 진짜 내 살붙이들과 바쁘게 지내면서... 혼자 산다는 것을 상상했어요. 달콤.

다락방 2014-05-08 10:06   좋아요 0 | URL
아. 정녕 갖지 못했기에 부러워하는 겁니까. 요즘엔 정말 생각이 많아져요, 유부만두님. 휴우-

2014-05-08 0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9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9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9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9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5-08 10:08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댓글을 대체 왜 비밀글로 남기셨습니까!!
건지, 를 끝말 잇기로 할 수 있는 초등학생이라니. 아흑. 너무 낭만적이에요! >.<

blanca 2014-05-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읽고 있어요....지금 이제 수바시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스포일러가 있을까 다락방님의 페이퍼를 조심하며 읽었어요. 저는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할 겁니다. 다락방님의 리뷰로 갈음하지요.

다락방 2014-05-08 10:16   좋아요 0 | URL
스포일러를 적지 않게끔 조심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리뷰를 쓰진 않으시더라도 다 읽고난 후의 감상은 꼭 말씀해주세요, 블랑카님.
저는 블랑카님의 감상이 무척 기다려져요.

dreamout 2014-05-0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저지대. 읽고 연이어 읽었어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The Buried Giant]가 2015.3월에 나온다는데.. 한국에 번역은 더 오래 걸리겠죠. 다락방님이 줌파 라히리의 새책을 기다리셨듯 저도 이시구로의 새소설을 기다릴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 2연타. 편애하는 작가에 추가... ^^

다락방 2014-05-09 09:27   좋아요 0 | URL
저는 [나를 보내지마]와 [녹턴]만 읽었는데, 신작이 또 나온다면 그 역시 읽어보고 싶어요. 저는 아직 가즈오 이시구로를 '편애하는 작가'에 끼워넣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의 책들은 읽어보고 싶어져요. 문체와 분위기가 좋아요. [남아 있는 나날]도 읽어봐야겠네요. 흣
 

















책을 손에 들 수는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는 일은 이전만큼 쉽지 않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평소에도 집에서 책만 집어들면 잠이 쏟아지던 터라, 이 책을 읽는 그 아흐레동안, 나는 책장을 넘기는 대신 잠을 택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달라져있기를 바랐다. 내 정신도, 마음도. 또한 이 세상도. 


모든 것들이 달라져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잠들기 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안정된 내가 잠에서 깬 후에, 거기, 있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ireaditnow 에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면서, 아 무척이나 힘든 독서였다, 라고 생각했다. 이런 때에는 읽지 않는게 더 좋았을것을, 했다. 아흐레나 걸릴 만큼 이 책이 재미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이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두고 나중에, 책장을 넘기는 일이 더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한 번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들을 앞에서부터 읽어보았다. 그 부분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 이 책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좋은 책이었어.




우주 비행사가 아니라 영문과 교수였다.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그것은 어느 책벌레 아동의 당연한 운명이었지만, 어쩐지 그 운명이 요구했을 게 틀림없는 순수한 지식의 축적에 약간 의기소침해져서 그는 8월 말이 될 때까지 대학에서 떨어져 지냈다. (p.81)



이 책의 주인공 샘슨은 머릿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고, 그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에는 12살 이후의 기억을 모조리 잃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건 열두살 이전의 자신인데, 서른 여섯의 그의 현재 직업이 교수인 걸 알고 그는 '내가 비행사가 될 줄 알았는데' 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혼을 했고 '애나' 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애나를, 자신의 아내를 기억하지 못한다. 수술이 끝나고 자신이 애나와 함께 살던 집에 돌아와 늘 그랬던것처럼 함께 있지만, 그것은 샘슨에게 불편함을 줄뿐이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여전히 품고 있는 애나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다.


열두살 까지의 나는 어땠는가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시절 무엇이 되고 싶었던가. 지금도 그렇지만 여전히 그때도 무언가 강력하게 원하는 건 없었다. 그러나 장래희망이란 게 있어야 했고, 그래야 수업시간에도 또 종종 질문해대던 어른들에게도 답할 수 있었다. 열두살 이전, 그러니까 열두살 보다 더 어릴때의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열두살 무렵 그리고 그 후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던 나는 기억하되, 내가 진정으로 피아니스트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약 지금의 내가, 열두살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면, 그 기억을 잃은채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았다면, 그때 나는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아, 나는 내가 평범한 회사원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럴 줄은 몰랐어, 이런 어른일 줄은. 물론 내가 어떤 모습일 거라 추측했냐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말문이 막힌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건데, 나는 대체 어떤 어른이 어울렸을까. 아니, 어떤 직업이 내게 어울렸을까. 


지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내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보다는 역시 처음의 물음이 더 강력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되었는가. 나는 내가 바란 어른이 되었는가.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을 알았을까? 무엇보다, 열두살까지의 기억만을 가진 내가 보는 지금의 나는, 후회하지 않을 모습인가? 실망하지 않을 모습인가?




그는 애나와 떨어져 지내기로 결심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교수였던 그때 자신의 제자였던 '라나'를 만나 친구가 된다.



그는 라나의 선생이었고 그녀는 제자였으니까. 그래도 그가 특별히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수업 후 그녀가 자기 물건들을 챙겨 나갈 때 그 격정적이고 아슬아슬한 모습을 경이로움 같은 감정을 가지고 뒤에서 지켜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해 보였다. 아주 최소한,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만났다면 검처럼 깨끗이 그의 마음을 궤뚫었을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라나는 프랭크 외에 그가 사귄 첫 번째 친구였고, 아무튼 그녀가 자신과 어울려 주었으면 했다. 그녀에 대해 애나에게 바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이 다른 대부분의 것을 공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년의 세월, 결혼, 침대, 욕실, 레코드들, 접시들, 가구, 전화기, 친구들을 말이다. 그는 자신만의 뭔가를, 그러니까 함께하는 그들의 삶 바깥에 그에게만 속해 있는 작은 땅을 원했다. (p.92)




엊그제 친구를 만났다. 곰탕을 먹고 두루치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내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친구에게 나는 내가 도대체 왜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건지 얘기했다. 심리학을 공부중인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내가 왜그런지 얘기해주었다. 그것이 해결방법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아, 내게 이런 기질이 있는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런 나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 하는 기분. 그에 앞서 술잔을 부딪치며 내가 힘들었노라 고백하면서, 심리치료도 생각한다고 했을 때 친구는 내게 말했다. 자기가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그 친구의 '일'의 영역인데, 그걸 내가 '친구'로 만나 그 친구의 '능력'을 내게 보여달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공평치 않은 기분이 들어, 그건 네 일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 힘들다고 너를 불러, 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힘이 들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기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돈을 주고 상담사를 만나고, 의사를 만나는거다. 그러나 네게는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들을 그냥 만나면 되는거다, 하고.



아, 내게는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친구가 있는가. 새삼 감사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들이 내게 베푸는 한없는 애정과 친절과 관심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친구를 만나고난 후의 나는, 그 전의 나에 비해 조금 더 가벼워져 있었다. 다음날 엄마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친구에 대해 말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친구를 사귀었냐며 정말 잘 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나갔고,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던 그 시간. 나는 내 친구들을 떠올렸다. 엊그제 만나 나와 곰탕을 먹었던 친구를, 그전에 만나 내게 스파게티를 사주었던 친구를, 나랑 노가리를 함께 먹는 친구들을, 늘 내 옆에 있진 않지만 부르면 응답해주는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 모두가 내가 만든 친구들이었다. 내가 원해서, 내가 좋아해서 붙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나라는 인간을 보고 내게 응답해주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내 일상의 영역에 가끔씩 끼어드는, 그러나 내 일상 영역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속해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모두 내 스스로 붙잡고 있었다. 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그는 복도 탁자에 전화를 찾아 어둠 속에서 더듬거렸다. 저편에서 전화가 울릴 때 뉴욕이 세 시간 더 빠르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러니 아마 애나는 잠들어 있을 터였다. 그녀를 깨운다는 생각, 심야에 불쑥 끼어드는 친밀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무방비할 터였다. (p.164)




곰탕을 함께 먹은 친구 N 이 나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 새벽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었다. 술을 마신 뒤라 잠을 깼다고, 내 잠을 깨울까봐 문자 대신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고. 나는 엊그제 그 친구를 만나 네가 깨는 새벽이면 언제든 문자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아침과 낮, 깊은 밤에 불쑥 끼어드는 친밀함을 나눠가진 사이었고, 그것이 새벽이라고 금기시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친구들과 그런 친밀함을 나누고 싶다. 심야에 불쑥 끼어들어 나를 깨워도 괜찮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충분히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러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은 아니었으면 한다. 가슴속에 몇몇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끓어오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특히나, 내가 낮을 살고 있을 때 밤을 보내는 친구가 생각난다. 햇볕을 받으며 일자산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잘자요, 라고 건넬 수 있는 곳에 있던 친구. 내 안의 충만한 애정을 그가, 그들 모두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시간을 줘요. 당신에게도 시간을 주고. 상황이 어쨌든 간에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기운을 되찾는지 보면 놀랍지요. 확실해요,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 다 깨닫고 그것을 실감할 거요. 눈을 뜨면, 아마 빛이 어떤 식으로인가 당신들을 비출 것이고, 당신들은 일어서서 자신에 대해 '괜찮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녀에게는 더 어려운 일일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게 당신은 슬픔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거요. 슬프고 혼란스럽고, 그럴 거라고 장담합니다." (p.165)



떠나기로 결정한 사람, 남겨진 사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한 쪽이 더하고 덜한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의 슬픔. 그러나 어떤 이별에 대해서는 기운을 찾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기운을 차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그 이별을 겪기 전의 기운과 같은 강도의 기운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별에 대해서 우리는 괜찮아졌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하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찮은 척 하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은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 감정을 함께 겪으려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감이고, 공감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능력이다.



샘슨도 그걸 깨닫는다. 모두에게 똑같은 기억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세상이 살기에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답. 샘슨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억을 심어준다고 해서 방법이 되는게 아님을 깨닫는다. 우린 모두 각자의 기억을 각자의 몫으로 가지고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같지 않지만, 다른 기억을 가진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감정에 공감하려고 해야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정신이란 그 자신이 아니면 어떤 존재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의 의식에 들어가서 거기에 깃발을 꽂는 것은 그 의식이 기대고 있는 절대적인 고독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자아에 대한 위협이고,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일 것이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p.321)



견디는 건 스스로 해내야 하는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있었다. 거기에는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해받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에는 다른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했다. 다른 사람에게 깊숙이 접촉당한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종양 이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의 옛 인생 이야기를 무슨 비화처럼 혼자 읇조렸다. 옛날에 그가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고 그녀를 품에 안았는데, 그러한 접촉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자 그는 놀랐을 것이다. 침대 옆의 등불을 켜면서, 그녀에게 아무 표시가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이름은 통과할 수 있고 반대편에 똑같은 곳으로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소리였다. 애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 그 속에서는 붙잡을 게 없는 이중의 메아리였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가 충분히 가까이 오도록 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별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p.322)



우리가 상실을 견뎌내는 것, 고통을 극복해내는 것, 괜찮아 지는 것에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같은 기억, 같은 경험을 가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별개의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별개로 존재하며 서로 다른 경험,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뻗고 또 그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찾을 것이다. 내가 부를 때 당신이 응답하고, 당신이 누군가를 찾아 헤맬 때,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길에 샘슨은 마리에타를 지나쳤다. 그녀는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연속극의 연기를 자신의 끝없는 무언극으로 다시 뱉어 내고 있었다. 그 아시아계 남자는 「세이 유, 세이 미」는 부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대신 손짓을 곁들여 불안정한 가성으로 크게 「헬로(Hello)」를 노래했다.

"헬로,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인가요‥‥‥." (p.74)







이 페이퍼의 제목은 이 책의 373 페이지 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페이지의 정확한 문장은 아래와 같다.

그는 그 순간을, 날씨와 장소와 미리 준비한 말들을 주고받는 것을 종종 그려 보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은 흩어지고, 현재 벌어지는 일의 어찌할 수 없는 유일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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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4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 2014-05-04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readitnow! 쓰시는군요!

다락방 2014-05-07 08:53   좋아요 1 | URL
네, 씁니다! ㅎㅎ

2014-05-05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머리카락 색깔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꽤 젊어보이시는 편이다. 머리카락이 숱도 많고 건강하다. 숱도 별로 없고 두피도 건강하지 못한 나로서는 대체 왜 아빠 두피 안닮고 엄마 두피 닮은건가 원망하기도 여러번이었다. 작은아버지 두 분 모두 흰머리가 머리의 절반을 채울 때도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건강해서 형제 자매들도 부러워했는데, 이것은 아버지에게 꽤 큰 자부심을 가져다 주었다. 내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건강하다, 새까맣다 등의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그게 자랑이었으므로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혹여라도 흰머리가 보일라 치면 어김없이 나를 불러 뽑으라 하셨고, 어린 마음에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도 머리 크면 하기 싫어지는 법, 늙으면 머리 쇠는건 당연한 거라며 나는 언젠가부터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명절때 놀러오는 이모의 어린 딸에게 뽑아달라 했고, 그 아이는 한 개에 오십원~ 이라고 외치며 뽑아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던 터라, 머리카락에 대한 자부심을 꺽어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셨다. 그래서 이제는 염색을 선택하신 거다. 한계,      를 인정하셨다고 해야할까. 


아버지의 흰머리를 뽑는 게 그렇게나 싫었으면서도 아버지가 흰머리를 못견뎌하는 그 마음만은 이해했다. 본인의 외모에서 모두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 게 그것인데, 그것이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데, 그렇기에 그것을 얼마나 지키고 싶었을까. 그래서 결국 미장원으로 향해 염색을 해달라고 하는 아버지를, 혹은 어머니께 염색을 해달라 부탁하시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씁쓸했지만, 결국은 한계를 인정했다는 사실이 건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염색을 한다는 것 자체도 언젠가는 포기해야겠지만, '나는 염색할 정도로 흰 머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되는거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인 《대답은 필요없어》에 실린 단편중 <배신하지 마〉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여자가 나온다. 젊음과 그 젊음으로부터 오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으로 삼았던 여자,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자 견디기 힘들어했던 여자, 더욱이 옆집에 사는 여자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분하게 여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 것에서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자격지심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가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느끼고 마는것이다.


"저, 그 여자애가 밉살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크리스마스에 그녀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쓰레기봉투를 뒤진 적도 있어요. 밉살스럽고 샘도 나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그 여자애는 젊으니까!"

당신도 아직 젊다. 취조하는 형사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웃었다.

"전혀 젊지 않아요. 젊음만으로 좋은 일이 생길 정도는 아니에요. 형사님, 지금 회사에서 저는 이미 아줌마예요.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요. 회사에서도 번화가에서도, 길을 걷고 있어도. 이미 길가에 널린 돌멩이 신세지요. 오우라 씨와 똑같은 옷을 입어도, 어떻게 화장을 해도 그녀에겐 이길 수 없어요. 그런 그녀가 옆에 있어요. 옆에서 살고 있어요. 옛날엔 저도 갖고 있었던 걸 그녀가 지금 전부 갖고 있어요. 그것을 제게 보란 듯 과시하죠. 저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구요." (pp.205-206)



자신을 이미 '아줌마'라고 부르며 젊은애에 대한 시기심으로 불타는 이 여자 조차도 나보다 다섯살 이상이나 어리다는 슬픔..은 말하지 않기로 하고.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에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나의 아버지가 생각났던 것.



"긴 머리는 내 마지막 보루예요. 예쁘고, 여자답고,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의 마지막 증표죠. 젊으면-좀더 젊으면 잘라도 끄떡없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머리까지 자르면 여자이기를 포기해야 해요. 그 여자애는 그걸 알고 일부러 짧은 커트를 해서 내게 과시한 거야." (p.207)



커트 머리가 여자가 그녀 앞으로 가 과시한 게 아니어도 그녀는 그것을 과시라 느낀다. 긴 머리가 마지막 보루였는데, 그것조차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그녀. 그녀가 절망한 까닭은 젊은 여자가 자신에게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과시로 보는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늙었는데 머리까지 길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그 절망감, 그것은 외로움으로 부터 왔을것이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가 비단 그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로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전파를 타는 모든 매체들은 젊고 아름다운 것을 칭송하니까. 자신이 그런 주류에 있었다가 밀려났다는 사실, 그걸 그녀는 견뎌내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무너질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털고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며칠전 출근길에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육체가 건강해야 고통을 잘 극복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 나왔다. 정신의 건강은 육체의 건강으로부터, 라는 말이야 불변의 진리이며 아주 오래전부터 누구나 다 알고있는 말이지만, 그 말이  그 순간처럼 내 귀에 쏙- 꽂힌 적은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 슬픈데 그 말을 듣던 상대가 '운동을 하라'고 조언해주는 거였다. 남자는 슬퍼하며 운동이라니 웬말이냐 물었고, 상대는 멘탈이 건강해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멘탈이 건강하려면 육체가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거다. 맞다, 맞구나. 나는 내 정신이 무척 건강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내 건강한 몸으로부터 온 것이겠구나, 했다. 나는 저 단편 <배신하지 마>의 주인공처럼 '마지막 보루'라고 할 만한 신체적 장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치명적인 약점 또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머릿결도 나쁘고 두피도 약하며 피부도 엉망인데다 모델과는 거리가 먼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매스컴에서 온갖 미녀들이 성냥개비 같은 몸매를 가지고 왔다리갔다리해도 '그녀들처럼 되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람이 초라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내가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초라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초라해 보인'다고 해서 내 자신이 초라한 건 아니다. 단편 <배신하지 마>의 주인공은, 머리를 컷트한 예쁜 여자를 마주쳤을 때 자신의 옷차림 때문에 자신을 초라하게 느꼈다.



"그 여자애, 짧은 커트 머리를 했어요. 그러면서 우쭐거리는 얼굴로 가슴을 펴고 걷고 있었죠. 모델 같은 차림새로, 정말 모델이나 탤런트 같이 보였어요. 그런데 나는 평상복에 편의점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고. 주말도 다 됐는데."

마주쳐 지나갔을 때 미치에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고 한다.

"무시당한 걸 그때 알았죠. 나를 깔보고 있었어요. 주말인데 어디 갈 곳도 없고, 아무도 초대해 주지 않는 불쌍한 아줌마. 나같이 짧은 커트를 하고 싶어도 이미 그런 모험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아줌마는 어디 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고 있었어요. 확실히 알았죠." (p.206)




물론 나도 저 느낌을 너무나 잘 안다. 우연히 지하철안에서 아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때 얼마나 아름답던지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던 거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크고 젊었고 예뻤다. 게다가 샤방샤방한 원피스를 입고 반짝거리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내 옷차림이 나를 너무 후지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게 뭐라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블라우스가, 치마가, 구두가 엉망인 것 같았고, 이 모두가 엉망이니 나라는 인간 자체가 구리게 느껴지는 거다. 그녀와 우연히 만난 반가움에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는 매일매일 찬란하고 이쁘게 하고 다닐거야, 라고 거듭 다짐했던 기억조차 선명하다. 물론 그 다짐이 지켜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러나 평상복, 약속 없는 주말, 편의점 봉투. 그것들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사발면을 사들고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질질 끌어신고 감지 않은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동여매도, 그래도 집에 들어가 콕 박혀서 내가 좋아하고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아마, 거기서 갈리는 것 같다. 저 여자와 나는. 나는 '그렇지만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내지' 로 충분히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고 단편 속의 저 여자는 '초라하게 보인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바로 그 차이. 


자신이 만난 화려한 여자가 속이 얼마나 곪아있는 지는 모르는채로 마냥 그녀를 시기했다. 찬란하고 젊은 미모를 과시하듯 뽐내고 다니기 위해서 옆집 여자인 미치에는, 자신이 도무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신용카드를 돌려막기 해가며 빚을 지고 있었고, 부모님 조차도 더이상 그녀의 돈을 갚아주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는데. 미치에도 역시 '화려해 보이는 것'에 더 많은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안으로는 자꾸 빚을 지고 더이상 안되자 친구의 이름으로 또 신용카드를 만들고...남아있는 건 빚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노로 들끓던 여자도, 카드 빚이 어마어마했던 여자도 모두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두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이 내 삶의 주요지표가 된다면, 그들이 행복하기는 힘이 들지 않겠는가. 



머리카락을 최후의 보루로 삼을거라면, 나는 그 외에 손톱과 발톱 손목과 발목 귀의 모양새와 목의 단단함까지 모두 보루로 삼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이든 '단 하나'인건 위험하니까. 나의 사랑이란 감정 자체도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무너지기가 쉽지 않은가. 그 사람이 없어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사랑 역시 여러명의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쌓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신체중 어느 한 곳의 아름다움으로 버텨낸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아슬아슬한가. 엉덩이를, 허벅지를, 종아리를, 겨드랑이를, 심지어는 온 몸의 털까지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으면 어떨까. 편의점 봉투를 들고 오는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했다면, 집에 돌아와 사발면을 후루룩 맛있게 먹는 자신에게 집중하면 어떨까. 아, 조낸 맛있어 눈물이 난다, 라고 그 순간에 행복해하면 어떨까. 초라한 나 자신이 금세 만족을 느끼는 내자신으로 바뀌어있지 않을까.



뭐, 이렇게 써봤자 나 역시도 허벅지가, 종아리가, 겨드랑이가, 온 몸의 털이 자랑은 아니다. 머리카락도 손목도 발목도 마찬가지. 





같이 일하는 동료가 그만뒀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지난 목요일 멘붕이 찾아왔고, 그 일이 당분간 모두 내 일이 된다는 사실에 앞으로의 내 직장생활이 걱정되고 두려워졌다. 그외에도 그 안에 숨은 사정들 때문에 혼자 있을 때마다 힘들어서 눈물이 자꾸 비져나오는 상황. 얼마나 힘들까, 언제까지 힘들어야 하나, 답답해하며 퇴근을 했다. 내 소식을 듣고 아빠는 집에 돌아온 내게 기운내라며 밥을 퍼주셨고 국을 데워 덜어주셨다. 남동생은 회식으로 늦게 돌아오고 엄마는 여동생 집에 가있는터라 밥 먹는 식구는 우리 둘 뿐이었고, 그래,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아빠가 내게 그러셨다.



"설거지는 니가 해."



아놔. 진짜 폭발할 뻔 했다. 설거지는 물론 내가 하려고 했다. 설마 아빠랑 나랑 둘 뿐이데 내가 아빠한테 하라고 할까. 게다가 나를 위로한다며 밥과 국을 퍼준 게 아니라, 저렇게 말하는 순간 '차리는 건 내가 했으니 치우는 건 니가 해' 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아빠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다같이 술상이라도 봐서 놀다가 치울 때가 되면 


"락방이가 치우느라 고생하겠구나"


해버리시는 거다. 당연히 치울건데 저렇게 말해버리는 순간 그 맥빠지는 느낌이라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한 번도 아빠한테 상 치우라고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왜 저럴까. 왜 늘 해왔는데도, 설거지며 빨래며 밥하는 거며 청소하는 것까지, 엄마가 안계실 때는 동생과 내가 다 해왔는데, 물론 아빠도 그중에 어떤 것들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엄마가 며칠 집을 비워도 문제없이 지내오고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서 미리 저렇게 초를 치는 말을 하는걸까. 다 할테니까 미리 말하지 말라고 몇 번 소리 높여 얘기해보기도 했지만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왜 화를 내냐는 식이다. 아..나는 요즘 아빠를 미워하는 시기인가 보다. 



대꾸해봤자 싸움만 될 게 뻔하므로 묵묵히 설거지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운동갔다올게'라고 말한 뒤 집을 나와버렸다. 그길로 헬쓰장에 가서 런닝 머신 위에서 걸었다. 우울하고 짜증날 때는 나는 운동 대신 가만히 있기를 선택하는 사람인데, 그러고 싶었는데, 편해야 할 집이 불편한 장소가 되어버려서 도무지 그 안에서 아빠랑 둘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홉시를 넘기면 아빠는 주무신다. 런닝 머신위에서 좀 걷다가 샤워를 하고 돌아가자, 라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했다. 



나는 설거지를 싫어한다. 아주 많이 싫어한다. 끔찍하게 싫어한다. 할 때마다 우울에 시달린다. 그래서 '설거지는 니가 해' 이 말에 더 폭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위에 말했다시피 아빠를 미워하는 시기인가보다. 그래서인지 요즘 독립에의 생각이 자꾸 치밀어 오른다. 나가살까, 혼자살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거다. 돈이 없다..에서 늘 막히지만 설사 대출을 받아 독립해서 나온다 해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의 독립을 막는데, 그런것들도 어떻게든 다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찰나, 참, 독립하면 매 끼니의 설거지가 내꺼잖아?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씨발설거지..


어떡하지?


오늘 출근길 내내 설거지에 대한 생각에 시달렸다. 지구를 위해 뭔가 한 가지를 더 하기로 하고 독립한 뒤의 내 끼니는 모조리 다 일회용품으로 해결할까? 밥도 반찬도 일회용 접시, 물도 일회용 컵, 술도 안주도 모두 일회용 용기에...하아- 그렇지만 지구를 위해 뭘 한 가지를 더 해야할지 생각도 안날뿐더러, 일회용 그릇들을 써대는 것이 맛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면에서 끔찍하게 느껴진다. 나는 와인이 와인잔에 마셔야 더 맛있다는 걸 안다.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맥주컵에. 스테이크는 넓다란 접시에 담긴 게 맛있다는 걸 안다. 그릇에 욕심이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그릇이 음식의 맛을 한층 업그레이드 해준다는 걸 알고, 그래서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도 굳이 와인잔에 마시는 거다. 그 맛을 설거지 때문에 포기할 수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설거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없.다.



그렇다면 어쩌지?




일전에 타부서 차장님이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이라며 다른 직원들 앞에서 나를 추켜세워 준 적이 있었더랬다. 그런 나는 역시 방법을 찾아냈다. 


결혼. 그래 결혼을 하자. 



결혼해서 설거지는 남편의 몫으로 하자. 대신 설거지로 인해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와 함께사는 게 기분 좋지 않을테니 설거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남자를 골라서 설거지를 하라고 하자. 그리고 이왕 사는거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사는거다. 술도 맛있게 먹고 고기도 맛있게 먹고, 제대로 된 그릇에 제대로 먹고, 그리고 설거지는 남편아, 니가 해. 이렇게 즐겁게 사는 거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물론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대신 나도 뭔가를 해야겠지.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뭐 쇼부를 칠 수도 있는거 아닐까. 아니다. 쇼부고 뭐고 다 떠나서, 나한테 홀라당 빠지면 나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지 않을까. '설거지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없다면 나는 결혼을 생각하지 못하겠는걸?' 이라는 나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그것은 자신의 몫이라며 나설 수 있는 남자랑 결혼을 해야겠다. 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한 채 얻으라고 해야겠다.  한강이 안보인다면 울산 앞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라도..아, 그 아파트는 가급적이면 욕실이 두 개이면 좋겠고, 욕실 하나에는 드레스룸과 연결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꼬박꼬박 고액의 월급이 입금되는 남자면 더 좋겠다. 팔 다리에 적당히 모양 좋은 근육이 자리 잡아 있다면 좋겠다. 설거지를 할 때도 근육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좋으니까. 키도 좀 크면 좋겠다. 웃는 모습이 브래드 피트를 연상시켰으면 좋겠다. 스테이크를 잘 굽는 남자였으면 좋겠다. 잘 굽고 설거지도 잘하는 그런 남자..



음...

그냥 내 성격을 개조하는 게 더 빠른가..Orz



오늘이 아직 반나절 밖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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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4-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저...식기세척기라는 편리한 물건이 있습니다만..
설겆이를 싫어하지 않을 만한 남자를 만나는것 보다
식기 세척기 한대 놓고 편히 사는것이 더 나을듯 ^^::

2.혹시 '그런 남자'라는 노래 들어 보셨나요?
들어보세요...왜 식기 세척기를 사야하는지 알수 있을껍니다....


3.여름같은 봄날입니다.
더워서 사무실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 놓았더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폭풍 미세먼지가 쿨럭쿨럭~


다락방 2014-04-14 13:28   좋아요 0 | URL
1. 저 지금 완전 뒤통수 맞은 것 같아요 아무개님. 식기세척기...왜 생각을 못했죠? 헐. 결혼할 필요가 절대 없네요. 식기세척기의 존재를 저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멘붕오네요. ㅎㅎㅎㅎㅎ

2. 누구의 '그런 남자' 란 말이죠? 설거지를 못하는 바보같은 남자가 나오나요?

3. 여름같은 봄날인지 겨울같은 봄날인지 나가보질 않아 알 수가 없네요. 사무실에 콕 처박혀 있었더니.. ㅠㅠ

아무개 2014-04-14 14:41   좋아요 0 | URL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저렇게 좋은 남자....
그런 남자가 왜.... 널 만나냐? ...이런 가사의 노래였어요.
검색이 안되는 관계로다가 가수가 누군지는 모르겠으요.
우야둥.
식기 세척기가 있으니
기운내요!!!!!! ^0^

Forgettable. 2014-04-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남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지는 노래임.. 하지만 슬픔 ㅠㅠㅠ

아 어제 만난 남자가 자기는 전업주부가 체질에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설거지하고 청소돌리고 요리하는 게 너무 좋다고 하심. 그런거 할 때 자긴 가장 행복하다고 ㅋㅋㅋㅋㅋ 그래서 제가 조언을 해주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일"로 만들면 오히려 힘들 수가 있다고 ㅋㅋㅋ 이렇게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걸 합리화.....;;

여튼 전 더 나이들기 전에 머리를 길러보려고 지금 꾹 참고 있는데, 잘라야 젊은 건가. 싶기도 하고. 혼란스러움..

다락방 2014-04-14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머리가 좀 길어 어깨에 닿고 목이 답답해서 이걸 더 잘라버릴까 아님 웨이브를 넣을까 하다가...걍 질끈 동여매고 있습니다. 역시 머리는 묶는게 진리 -_-

전 남자가 설거지하고 청소기 돌리고 이런거 즐거워하면서 전업주부 하는것도 좋고 그런 남자가 저한테 어울린다고도 생각은 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말이죠, 양복입고 각 잡힌 남자를 보면 반해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래서 한 여자에 두 남자는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0-

blanca 2014-04-1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설거지!!! 저도 진짜 싫어요. 그래서 식기세척기도 고민했었는데 어차피 애벌세척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그래서 저는 커다란 반찬나눔접시를 준비했어요. ㅋ

다락방 2014-04-14 17:22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집에도 식기세척기 있는데 엄마가 그거 몇 번 써보시더니 걍 설거지 직접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당연히 식기 세척기=안쓰는 거 라는 생각이 들었나봐요. 머릿속에서 존재를 지웠음.

아..설거지 너무 싫어요 진짜 싫어요. 전 집에서 제가 밥 차려 먹을때는 설거지를 가급적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답니다. 이를테면 국그릇에 국을 담고 그거 그대로 들고가 거기다 밥 말기...같은걸 실천함으로 해서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밥그릇 하나 세이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조기후 2014-04-1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설거지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ㅎㅎ 더러운 그릇들이 많을수록 얼른 이것들을 깨끗하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의지가 불타 오릅니다. 그래서 친구네 놀러가도 설거지는 제가 해요 ㅎㅎㅎ

다락방 2014-04-14 17:23   좋아요 0 | URL
전 개수대에 설거지 거리가 있고,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요.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오고 우울해져서...하아- 설거지 해야해..라고 울것 같은 기분이 되어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설거지를 좋아하는 건조기후님이라니, 아, 우리는 이렇게나 다르군요! 그래도 싫어하는 제가 있고 좋아하는 건조기후님이 있어 다행이에요. 세상 모두가 싫어해봐요..세상은 지금보다 한층 더 더러워졌을 거에요. ㅠㅠ

레와 2014-04-1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시간 남았어요!!!!!!!!


책상밑에 [658,우연히]가 있는데, 305페이지를 읽었는데, 보스는 오늘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고..
하아.............................................

다락방 2014-04-14 17:24   좋아요 0 | URL
하여간..자리를 지키는 보스들이 문제야. 너무 싫어.. -0-
658,우연히 라면 독서에 다시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될겁니다! >.<

moonnight 2014-04-1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와 결혼해 주세요. ^^; 저는 설거지를 아주아주 좋아하거든요. +_+;;;;; 스폰지에 거품을 풍풍 내서 더러워진 그릇을 쓱싹쓱싹 닦고 깨끗이 헹구어서 그릇 건조대에 착착. 생각만 해도 개운해지는 느낌이에요. +_+;;;;;;;;;;;;;;; 다락방님과 소주 맥주 와인 차례로 마시고(물론 여러가지 맛있는 안주들과! 메뉴의 선택은 다락방님께 맡길께요! ) 설거지는 제가 도맡는 행복한 상상을 해 봅니다. 호호 ^^

다락방 2014-04-14 17:26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우리 함께 살아요!! >.<
멋져, 문나잇님. 잘 먹고 잘 마시고 설거지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근사해요! ♡ 하트뿅뿅뿅이에요~

자작나무 2014-04-14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인지 모르지만 저 역시 설거지를 좋아합니다. 전 밥을 먹자마자 즉시 설거지를 해요.
그런데 밥도 직접 하죠.
스테이크도 직접 굽고.
그러고보니 뭐든지 직접하네요. 월급은 별로 없는데. 킁킁.

다락방 2014-04-14 17:27   좋아요 0 | URL
우연인지 몰라도 니가 눈물 흘릴 때마다 하늘에선 비가 내렸어~

라고 노래를 부르는 저는 뭘까요..순수 또라이인가.. 여튼,

설거지를 좋아하신다니.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월급이 별로 없다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빵터졌네요. ㅋㅋㅋㅋㅋ

네꼬 2014-04-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거지 좋아하고 식기세척기 있는 권위자로서 (응?) 한마디 하겠어요. 식기세척기가 있어도, 넣는 게 일입니다. 그리고 관건은 큰 그릇과 냄비 등이므로 작은 것보단 큰 거 있는 게 좋은데, 큰 식기세척기를 채우려면 혼자 한 끼 먹는 걸론 어림도 없을 거예요. (내 건 작은 세척기.) 그러니까 설거지를... 합시다. 대신 설거지 한 번 할 때마다 보상을 걸어요. 와인 한 잔, 이런 식으로. 또는 다락님은 문나잇님과 결혼합니다.

다락방 2014-04-15 11:55   좋아요 0 | URL
큰 식기세척지를 채우기 위해 혼자 한 끼 먹는 걸로 어림도 없을 것 같진 않은데요, 제 경우엔 말이죠.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와인 한 잔, 이런 식으로 보상하면 또 설거지 거리가 나오잖아요. ㅠㅠ 역시 결론은...문나잇님과 결혼하는 것 뿐이로군요! >.<

관찰자 2014-04-15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을 읽고, 이어 댓글까지 읽으니 이 페이퍼의 논조는 단연컨대 '설거지'인듯 싶네요.낄낄.
자존감이 초특급 울트라로 낮은 저 여자 이야기를 읽으니,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하지만 미미여사의 <솔로몬의 위증>에 나왔던 여선생의 옆집사는 여자가 생각나네요.
암튼,
자존감 낮은 사람들은 상대하기 어려워요.ㅠㅠ

참고로 저는 남이 볼때는 우아(?)한 커피숍을 하고 있지만,
설거지는 정말 백만번. 끙.

그래도 다락방님은 가족을 위한 설거지이니 마음 푸세요.ㅠㅠ

다락방 2014-04-16 18:01   좋아요 0 | URL
자존감 낮은 사람들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계속 해오고 있었는데,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 역시 상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최근 새움의 이방인 논쟁을 보면서 말이지요. '번역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있다', '내가 한 번역만이 옳다'는 데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번역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글은 눈과 귀를 막고 그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을 상식없고 이성 없는 사람으로 몰아부치다니..이 세상에 가장 잘난건 나다! 라는 것 역시 상대하기 무척 어렵네요. 그건그렇고,


저는 오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신 컵을 씻었거든요. 어제도, 엊그제도.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싫다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거에요. 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사무실에서의 청소나 설거지는 스트레스 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런데 왜 집에서는 도무지 못하겠는걸까요? 하아-
관찰자님, 저는 설거지가 용납이 안돼요. (응?) ㅎㅎㅎㅎㅎ

비연 2014-04-1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그런 결론을 내리곤 해요. 결혼을 하자. 결혼을 해서 다 줘버리자..ㅎㅎㅎㅎ

다락방 2014-04-16 18:02   좋아요 1 | URL
역시 결혼이 답인겁니까? 이제부터라도 좀 생각해볼까요?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14-04-16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답은 필요없어> 이야기를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는지, 다락방님 모를거예요.
요즘에.... 부쩍 늙어간다는 생각에 얼마나 우울했던지.
간만에 한 파마는 완전 이상하게 나오고, 살은 찌고, 피부는 울긋불긋, 눈에는 염증...
그래, 늙었어.... 젊음이 부러워. 아하, 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설겆이ㅋㅎㅎ

설겆이 좋아하는지는 결혼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신랑은 설겆이 두번 시키니까(하지도 않더니만), 식기세척기 사왔더라구요. 그 때가 십수년 전이라 식기세척기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때인데, 거금을 들여서.. 키햐..
결혼 전에 물어보세요.

"설겆이를 좋아하세요?"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4-04-16 18:03   좋아요 1 | URL
당연히 결혼전에 물어봐야죠. 그리고 확답을 받아야죠. 설거지를 좋아하며 반드시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는 강한 다짐 말입니다. 그러지 않을거라면 저는 결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요즘에 저도 부쩍이나 '아, 나잇살 이라는 게 이런거구나...'하고 깨닫고 있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자유 2014-04-19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문을...끝까지 다 읽었을 땐 왜 식기세척기를 못 떠올리나...답 달아드릴까...하다가.
이어진 댓글+답글에..하.하.하.
1. 식기세척기 애벌세척은, 흐르는 물에 건더기 쓸려보내면 되는 정도이고
2. 그런남자. 예, 저도 동감~!! ㅎㅎ
3. 설거지를 하겠다는 남자가 아니라, 집안밖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네일내일 쓸데없이 나눌 것들이 아님을 알고 실천하려 '노력하는' 남자를 고르시옵고...
역시 '그런남자'랑 '그런녀자'가 되도록 노력하시면 되시는 것이옵고...
4. 나잇살..허.허.허...그 연세들에 나잇살 운운...

...아줌마한복판...이라고, 로긴 안 하고 댓글 달았다가 <- 알라딘서재관리 안 하니까 ^^
로긴하고 옮겨 달아요~~ <- 로긴안한상태프로필사진칸이...맘에안들어서. ^^

다락방 2014-04-21 09:0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자유님.

흐르는 물에 건더기 쓸려보내면 되는 정도라니, 흐음, 그렇다면 설거지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겠군요. 요즘 독립에의 욕망이 커지는지라 설거지 해결이 정말 중요해요.
그리고 자유님..하하하하하하하하.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는데요 ㅠㅠ 저 나이 아주 많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잇살을 퐉퐉 느끼는, 그런 나이인 겁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주현 2014-04-25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식기세척기는 구조가 간단한 식기는 그나마 잘 닦이는데, 조금만 틈이 있는 반찬통이나, 말라붙은 고추가루, 약간 큰 냄비들, 컵입구에 묻은 립스틱 자국같은 것들은 따로 처리해야돼서...두번 일을 시킵니다. 주부들은 거의 있어도 안 쓴다고 봐야죠. 적은 양도 일단 한번 가동하면 40분에서 한시간은 돌려야 하고, 더운 물 쓰니까 습기잘차고, 여름엔 바퀴벌레도 한번씩 나오고...식기세척기 빌트인 된 아파트, 싫어합니다. 아주 조금의 도움은 받을 수 있겠죠.

다락방 2014-04-24 12:53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저희 엄마도 식기세척기를 안쓰시는가봐요. 역시 식기세척기는 답이 아니네요. 흐음- 무엇보다 바퀴벌레라뇨! 아이쿠야.. ㅠㅠ
 

"나는 딘 쿤츠의 소설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온갖 시름을 싹 잊게 해주거든요. 이 양반 책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들에 비하면 나한테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웬디 웰치, 《빅스톤 갭의 작은책방》 中


'딘 쿤츠'의 책이라면 《남편》한 권을 읽었을 뿐이었는데,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여자가 딘 쿤츠의 소설을 읽고 시름을 잊는다는 말에 딘 쿤츠의 책을 어디 한 번 다시 보자, 하고는 다른 책을 골라 읽었다.
















읽으면서 빅스톤 갭의 책방에 찾아들었던 여자가 굳이 왜 딘 쿤츠의 소설을 읽는지는 이해했다. 이 책, 《벨로시티》에는 평범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온갖 역경을 다 겪으니까. 아휴, 내가 이런 지경이라면 정말 살 수가 없겠다, 싶으니까. 그런 부분이 아마도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녀에게 '나한테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부분이 그녀에게 위로와 위안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아는데, 아는 건 아는 거고, 나는 딘 쿤츠의 책을 두 권 읽은 현재, 이제 딘 쿤츠는 그만 읽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이 재미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얼른 책장을 넘기고 싶은것도 맞고, 대체 누가 주인공을 이토록 괴롭히는지 궁금하고 애가 타는 것도 맞다. 그가 이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그렇지만 약간 억지스러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할까.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한국영화 《뚝방전설》에서 주인공 '박건형'이 내뱉았던 말이 떠올랐다. '범죄 신고는 112' 라고 했던 그 말이. 쉽게 말해, 경찰에 신고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던거다. 이미 자신이 살인의 용의자로 지목받을 것 같아 늦어버린 그 상화에서라면, 진작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게 위험을 자초했다면, 그러면 FBI 를 찾아가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여튼 해결해내는 그 모습을 보고 싶으면서도 근데 왜 혼자 해결하려고 이리 똥줄을 태울까, 경찰에 신고하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든거다. 신고해도 또 신고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죽는다면, 신고해서 그 일을 자신의 문제로 내버려두지 않고 경찰에 넘겨도 됐을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알고있지만, 여튼 저렇게 사는 주인공을 보자니 답답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지..이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나의 경우, 바바리맨을, 술에 취해 쓰러진 아저씨를, 고장난 신호등을, 같은 학교의 교복입은 학생들 사이에 둘러쌓인 한 아이를 보고 죄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은 우리 주변에 있어요!!



《벨로시티》를 시작으로 딘 쿤츠는 평범한 남자가 악몽 같은 현실에 빠져드는 연작을 발표했습니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에서 출간된 《남편》이 두 번째 작품. 그리고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The Good Guy》가 세 번째 작품이죠. 미국에서는 이 세작품을 '평범한 남자 3부작' 이라고도 부르더군요. -모중석 인터뷰 중에서(책 뒤)



난 이 평범한 남자 3부작 중 두 권을 읽은 셈인데, 음, 나는 평범한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킁.




















영화로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데, 100쪽쯤 읽다가 중단했다. 문체가 산만하다고 해야하나.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문체여서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던거다. 그래도 영화는 봐야지 하고 별렀지만 상영관도 시간도 좀처럼 맞출 수가 없어 놓쳤다가 뒤늦게 보게됐다. 그리고 오, 보기를 정말 잘했다!!!!


여자 '엠마 몰리'는 남자 '덱스터'를 학창시절 내내 흠모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졸업식날 밤, 덱스터와 엠마는 사이 좋은 친구가 되고 그렇게 그들은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며 같이 여행을 다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서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가 되어준다.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이 존재한다고. 물론 그 말은 백프로 맞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짝사랑을 혹은 그의 짝사랑을 숨겨서 우리는 이성인 동시에 친구로 존재하는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까. 그리고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의 감정을 계속 숨기게 되고, 그것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을 더 오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말이 맞든 틀리든 어쨌든, 엠마와 덱스터에게는 맞는 말이었다. 엠마는 덱스터에 대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학창 시절부터. 덱스터가 자신의 이름을 외우지도 못했던 그때부터, 엠마는 덱스터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가 되는 것이, 그로부터 간혹 애정을 확인하는 말을 듣는것이 그렇게나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란 무엇인가. 그의 연애를 다 지켜보고 마찬가지로 그 연애에서 오는 헤어짐까지 다 지켜보는 사이가 아닌가. 그가 사귀는 여자들이 나와는 다르다는 것도 알고,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면서, 그렇게 덱스터가 여자들을 바꿔치는 걸 묵묵히 지켜보며, 엠마 역시 다른 남자를 사귀고 동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절망적으로 확인하게 된 건, 자신이 동거하는 남자를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연애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 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연애는 지속되기는 커녕 시작되지도 않겠지만, 어느 한 쪽의 사랑만 있어도 일단 연애는 성립할 수 있다.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랑에 기대어 그 연애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 사랑이 너무 커 남자가 아직 사랑하지도 않는채로 앞으로 사랑할 수 있겠지, 하며 연애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좀처럼 상대에 대한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결국 나도 또 상대도 그걸 알 수밖에 없다. 사랑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숨길 수 없는거니까. 사랑은 거짓으로 말할 수 있을 지언정, 그 거짓은 상대도 알 수밖에 없다. 만약 상대의 사랑한다는 말을 믿었다면, 그건 믿고 싶었던 본인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물론 엠마의 동거남 '이안'도 안다. 엠마가 덱스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하루중의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이 증거는 아니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마음속으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나도 모르게 시선을 그를 향하며 집으로 돌아와 나를 사랑한다는 남자와 살을 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건 나에게도 그리고 나를 한없이 사랑해주는 그에게도 못할 짓이다. 


이안은 덱스터에게 말한다.


당신하고 있을 때는 엠마의 표정이 달라졌어요. 아주 밝았죠.


이 부분을 보다가 문득 어느때의 내가 생각났다. 내 감정을 숨기고 그와 우정을 지속하던 그때, 그때의 내 표정도 누군가에겐 달라 보였을까. 연애를 하면서도 애정은 우정의 상대에게 가있던 그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속마음을 들켰을까.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는, 자신과 함께 있는 내 표정을 유심히 봤을까. 내 표정이 밝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내가 그를 관찰했듯이 그도 나를 관찰했을까. 엠마가 덱스터의 한마디에 표정이 극과 극을 오갔듯이, 나 역시 그랬던 걸 그는 눈치챘을까. 그리고, 


덱스터의 청첩장을 받아든 엠마의 축하한다는 말, 


그것을 덱스터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때. 엠마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도 우는 대신 축하해 준 적이 몇 번 있었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 시절, 노래방에서 서영은의 《그 사람의 결혼식》 부르다가 목구멍 찢어질 뻔했었지.. 피를 토할뻔했어..이제는 그 노래 안부르고 묵묵히 보내지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도 성장하니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행복이란 무얼까, 이 영화를 끝까지 보면서 생각했다. 더이상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테고. 예상치 못한 막판의 진행 때문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만약 극장에서 봤다면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 같더라. 

오래 기다리면 결국 그는 내 사람이 될까? 그러나 내 사람이 꼭 연인으로 존재해야 하나? 그렇게 오래 기다리면 어차피 그 사랑은 더이상 사랑은 아니지 않을까. 내 사랑은 그렇게 길게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그와 행복해지는 길이 지금의 우정이라면, 나는 그 우정을 계속 지켜나가는 방법을 택할 것 같다. 물론 이건, 지금의 내 생각이다. 사람은 앞으로 누구를 만나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엠마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결국 인생은 정해진 방향대로 흘러가는걸까...

엠마의 표정이 바뀔때마다 내 표정도 함께 바뀌었다. 엠마는 마음을 나에게 들켰고, 내 마음 역시 엠마에게 들킨 기분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심규선의 콘서트에 갔었다. 짙은과 함께 공연한다는 건 알았지만, 나는 짙은이 게스트의 형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 2부는 짙은의 무대일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콘서트를 안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오, 이게 뭐야. 짙은이 더 좋은거다! 나는 짙은을 모르고 노래도 몰랐는데, 아니 저사람 뭐야! 팬이 되기로 결심하고, 앨범을 다 사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 으흐흐흐흐.













그래서 사람일은 모르는거다. 지난 토요일까지 존재도 잘 몰랐던 짙은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내게 다가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헐.

나 갑자기 눈 다래끼가 나기 시작하네? 완전 간지러운데 이를 어쩔...이게 뭔일이래 대체 ㅠㅠ

(13:47 추가: 다래끼 아닌가보다. 가라앉았어.. -_-)




덧. 1. 영화《원 데이》는 단 돈 천 원에 굿 다운로더 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꾸벅.

     2. '앤 헤서웨이' 주연의 영화 《레이첼, 결혼하다》도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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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4-04-0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래끼가 나다니! 아직 청춘이시군요. 나이드니까 안나던데. ㅎㅎ 잘 지내셨나요? ^^

다락방 2014-04-09 13:45   좋아요 0 | URL
이게 다래끼가 아닌가봅니다. 가라앉았네요. 뭐지..역시 나도(응?) 늙어버린 것인가....저도 초딩때 나고 다래끼는 처음이라 하하. 여튼 다래끼가 아니었나봐요. 이렇게 금세 사라지는 걸 보니. 밥 먹어서 없어졌나?

저야 잘 지냅니다. 야클님이야말로 잘 지내십니까. 종종 나타나주셔요, 좀!!

야클 2014-04-09 13:58   좋아요 0 | URL
지난 주에야 바쁜 시즌 겨우 끝나고 요즘은 시즌 후유증으로 골골거리고 있어요. ㅎㅎ

다락방 2014-04-09 16:02   좋아요 0 | URL
골골거리지 말고 기운내세욧!! ㅎㅎ

2014-04-09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9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4-04-0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짙은을 모르셨구나.. 화창한 봄날 서럽게 녹아내리는 데는 제격이지 않던가요? ㅜㅜ 저도 아직 신보는 안 샀는데 노래 들어보니 역시 싶더라고요 어흑..

다락방 2014-04-09 15:25   좋아요 0 | URL
'화창한 봄날 서럽게 녹아내리는' 이라뇨, 건조기후님. 아..표현이 너무 시적이야! 건조기후님, 사랑합니다!

아무개 2014-04-0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우정을 빙자한 애정은 비.겁.한.거죠.
하지만 비겁할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은 차고 넘치게 잘알죠 저도..크흑...
분명 이 영화를 봤는데 왜 결말이 기억이 나지 않을까요..

2. 어디 < 그 사람의 결혼식> 한번 들어 볼까요? 으흐흐흐흐흐흐흐

3.아참...사람들은 자신이 힘들때 자신 보다 더 힘든 사람을 찾아요.
그래서 제가 가끔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쿨럭~ =..=


다락방 2014-04-09 15:27   좋아요 0 | URL
1. 아니, 아무개님. 이 영화를 보셨다고요? 정말? 은근 영화 많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 ㅎㅎ
결말은 나중에 만나면 말씀드릴게요. ㅎㅎ

2. 그 사람의 결혼식은 더이상 부르지 않습니다. 다 철없던 때의 얘기에요..이젠 웃으며 보내줍니다. 세이 굿바이- 저거 이 나이에 부르다가 목젖 나가요..

3.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일전에 너무 우울하다고 생각되던 때에, 내 앞에 마주앉았던 회사 동료가 우울해하는 걸 보고 아...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싶어 오히려 생각지도 않게 위로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수이 2021-12-1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두나 전 애인이었네요 영화 속 남자 주인공!

다락방 2021-12-18 18:55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ㅋㅋ 내일 다시 볼거에요. 마침 넷플에 있으니까요.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