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모에게 '종손'이라는 역할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한다. 자신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인 적 없음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강모를 역시 이해한다. 나였어도 종손의 자리는 거대하게 느껴지고 도망치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했을 것이다. '음악'을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떠나고 싶어서' 음악 공부를 하러 간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고 강모의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부숴 버렸을 때, 그때 강모는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했을지도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강실이를 마음에 품고, 강실이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대는 강모에게 뜻한 바 아닌 여자와의 혼인은 또 얼마나 암담하였을까. 게다가 그 여자 역시 그토록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나는 비겁한 사람. 허깨비. 어느 것 한 가지도 떳떳하게 행하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누군가는 한 사람이 능히 열 가지 일을 하건만, 나는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바는,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 이 무슨 고달픈 운명인가. 그저 나 하나 소리 없이, 내 생긴 대로, 막힌데 없이, 걸린 데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p.179)
시대적 배경이 그러했으므로 그에겐 벅찬 상황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아무리 부르짖어 보아봤자 그의 정해진 자리가 바뀔 리가 없다. 바뀔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렇다고 주어진 역할을 해낼 수도 없으니 그의 마음이 오죽 답답했으랴. 안다. 다 안다. 세상 무엇 하나도 자기 뜻대로 되는 바가 없음을, 그래서 절망의 끝에 서 있음을 다 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제대로 도망도 못 칠거면서,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부수어버리는 바람에 음악에의 꿈을 그렇게 접을 거면서, 종손의 역할을 제대로 저버리지도 못하고, 아내에게 제대로 신랑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음속 사랑을 표현하지도 지키지도 못할거면서, 그런건 하나도 못했으면서,
아내를 겁간하고, 마음속 사랑을 능멸하여 기구한 팔자를 만들어 버리고, 마음에 담았던 울분을 기녀에게 폭력을 휘둘러 표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내가 아무리 강모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행동들이 결코 용서되지는 않는다. 종손이 싫지만 집안의 돈을 쓰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지 맘대로 했으면서, 그 돈을 자기 돈인줄 알고, 자기에게 언제나 갚을 돈은 있으니 그렇게 정신 잃고 개념없이 공금을 써대면서, 그러면서 허깨비인 자신을 탓하는 강모가 지긋지긋했다. 싫었다. 어제 늦은밤까지 《혼불2》 를 읽으면서, 너무 화딱지가 나서 이제 그만 읽을까, 10권까지 다 읽지 말까, 하는 생각을 했다. 3권까지는 준비해두었으니 3권까지만 읽고 그만 읽을까, 하고. 10권에 이르기까지 강모가 새로운 사람이 될지, 강한 인간이 될지, 모두에게 용서를 빌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아무리 새로운 사람이 된다 한들, 그 치욕적이고 폭력적인 과거는 그의 것이다. 그것들을 없앨 수가 없다. 내가 그런 강모를 과연 그대로 보고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싶어지는거다.
내가 그 당시에 살았다면, 내가 강모가 건드린 여자들 중 하나였다면,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며 조용히 살아갔을런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럴수도 있지' 하게 될 순 없는 게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나를 어떻게 대해도 나는 참아낼 수 있는걸까? 조또 파워풀한 사랑에서는 그게 가능한걸까? 아니, 그건 차라리 체념에 가깝겠지? 어차피 이 남자에게 버려진 몸, 내가 더 무얼 할 수 있으랴, 하는. 대체 얻어 터지면서도 피하지 않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도망가지 왜 밤새도록 맞었느냐."
강모는 가까스로 오유끼에게 묻는다. 목이 잠긴 소리다. 그는 몹시도 무안하였다.
"우시길래."
"많이 울더냐?"
오유끼는 대답 대신 누이처럼 강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오히려 밤새도록 맞은 쪽은 강모였던 것같이.
강모는 그네를 와락 끌어안는다. 끌어안은 그의 팔에 눈물이 돈다.
"내가 망령이 씌었던가 보다." (2권, p.186-187)
어쩌면 그럴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나를 때리는 이 남자가 제정신이 아니다, 라는 생각. 이 사람은 지금 마음이 혹은 머리가 몹시 아프다, 이 남자는 자신이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러고 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남자는 지금 약한 상태이므로 내가 감싸줘야 한다. 그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김려령'의 《너를 봤어》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거부당한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있었고, 그에게 맞으면서 여자는 지금 그는 그가 아님을 깨닫는 장면이 있었다. 이것이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나 사랑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순간 망령에 씌었던' 것이라 해도, 그 망령이 다음에 또 찾아온다면..그때마다 번번이 견딜 수는 없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그런 남자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해하며 감쌀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여자의 존재가 말도 안된다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 사랑은, 그렇게까지 깊지 않을 것 같다. 혹여라도 그게 사랑이라면 말이다. 오유끼를 밤새 때린것도 재수없고, 강실이를 그지경으로 만든것도 재수없으며, 아내를 그런 상황으로 밀어 넣었던 것도 재수없다. 한마디로 강모는 재수없는 놈이다. 강할 곳에서 강하지 못하고 참고 참았다가 엉뚱한데서 폭발해버리는 데야 그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종손이라는 그의 역할, 그 시대의 사회적 배경이 그를 억눌렀다한들, 그렇게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그가 벌인 짓은, 내게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혼불 계속 읽기를 주저할 정도로. 그러나 혼불에 강모만 있는 게 아니니까.
춘복이, 춘복이가 있다. 입을 함부로 열어 주위 사람들을 식겁하게 하지만, 지금 처한 상황이 몹시도 부조리하다고 분노하는 옹구네와 춘복이. 예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는 옹구네와 춘복이. 사실 춘복이가 3권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지 조마조마하다. 그저 그의 빗나간 욕망이 시작은 비뚤어지더라도 과정과 결과에서 다른 식의 이야기를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춘복이는 칼을 품은 사람이다. 이 상황이 답답하다고 울고 짜다가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 폭력으로 풀어버리려는 자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바꿔보려고 이를 악 무는 그런 남자.
"아앗따아, 아재는 징그럽도 안허요? 그만치 참고 살았으먼 원 쇠심줄 창사라도 썩어 부리고, 그 창사가 구리라도 녹아 부렀겄소. 무신 노무 한 시상을 참을라고 산다요? 시상으 나왔으먼 머 시름을 허든지 농사를 짓든지 산을 헐든지, 조께 본때 있게 살다가 죽어야제. 이노무 시상은 멋 헐라고 사는 노무 거이간디, 오나가나 참으라는 소리뿐이여어. 참으먼 뱃속에 똥만 차지 무신 삐쭉헌 꼬라지가 있냐고요. 에레서 애비 죽고, 죽은 애비 뒷산마루 묏동에다 파묻어 내비리고는, 자식 새끼도 팽개치고 밤도망 가 부린 에미는 낯바닥도 모리겄고‥‥‥키워 주신 아재한테는 헐 소리 아니지만, 이런 신세가 될지 알었으먼 차라리 내가 동냥아치가 되는 거이 천만번 속시언헐 뻔했오. 이노무 신세는 머 생기는 것도 없이 참을 것만 산데미맹이로 첩첩허니‥‥‥사방팔방 걸리는 거 없이 얻어 먹고 댕기는 신세가 못될 바에는, 내가 헐 수 있는 거이 머엇이겄소? 그저 내 몸뗑이 달린 것 갖고 헐 수 있는 것은 말배끼 더 있냐고요. 낵 속터져 죽는 꼴을 보시는 것보담 말이라도 퍼내고, 이렇게 사는 거이 안낫겄소?" (2권, p.277-278)
나는 춘복이를 응원하고 싶지만, 과연 춘복이는 내가 응원해도 될만한 일을 벌일 것인가. 혹여라도 그 역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고 폭력을 일삼게 되진 않을까. 그것이 두렵구나.
상황이 상황이고 시대적 배경이 시대적 배경이어도, 그러니까 같은 것들을 겪고 있다해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조금 정이 가는 캐릭터가 효원인데, 효원 역시 부모가 정해준 결혼을 했고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심지어 멸시당하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아주 강하게 버티어가고 있다. 지금으로보면 말도 안되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가슴 아파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그녀가 결혼한 개똥같은 남편보다 훨씬 나은 여자다. 물론 그 남편은 아내의 기개에 밀려 더 찌질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어머님. 놉이 누군가요? 놉은 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집 농사를 지어 주는 우리 손이요, 우리 발 아닌가요? 놉을 남이라고 생각하면 놉도 우리를 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일에 제 몸을 부릴 때 누가 성심을 다 허겠어요. 눈치보고 꾀부리고 한눈 파는 게 당연하지요. 우리가 놉한테 주는 밥그릇을 애끼면, 놉도 우리한테 주는 힘을 애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 아닌가요? 아무리 종이라도 신분이 낮아 천한 대접을 받을 뿐, 사지에 오장육부는 똑같이 타고 났고, 그 속에 마음이 있는 것은 양반이나 무에 다르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야 몸이 움직여지는 법인데, 배를 곯리고 마음을 상하게 한 뒤에 무슨 정성을 바랄 수 있을까요? 많이 먹고 즐거워서 힘이 나면 결국은 내 집 일을 그만큼 흥겹게 할 터이니, 한 그릇의 밥을 더 주고 한 섬지기 쌀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낄 것이 따로 있지 밥심으로 일하는 일꾼들한테나 몇 숟가락 밥을 아낀다고, 그것이 쌓여 노적가리가 되어 주겠습니까‥‥‥." (2권, p.76)
아. 정말이지 이 부분 읽는데 효원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 인물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재해서, 우리 회사로 와주었으면. 그리고 회사의 경영진들 불러 모아 이렇게 강의를 좀 해줬으면...뭐, 강의한다고 바뀔 인물들이 아님을 잘 알지만, 답답해서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많이 답답했다. 물론 지금의 내가 사는 현실도 답답한 부분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옛날에 여자들이 살던 삶이 너무나 답답해서 한숨이 다났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며 베틀에 앉는 게 하루일의 전부인 인월댁을 보는것도 답답하고, 오랜만에 만난 부모인데도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효원을 보는 것도 답답했다. '한' 이라는 게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새삼 생각하게 된다. 상황이 빡치게 하고, 남자들이 빡치게 하는구나.
지그시 가슴을 누르고, 가까운 곳에 와 계시는 밧어버이 훈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 일상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는 위선이 아니라 품위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돈댁을 방문한 친정 쪽에서도 출가한 여식을 대하여 지켜야 할 은연중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심정도 그러했으랴.
효원은 돌덩어리를 삼키듯, 복받치는 반가움과 설움을 함께 삼켰다. (2권, p.51)
하아-품위 따위, 송골매에게나 주라지. 이런 부조리한 상황 때문에 으휴 답답해, 하며 읽다가 강모 때문에 분노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독서였다. 3권을 어젯밤과 오늘 출근길에 조금 읽었는데, 3권까지 읽고나면 일단 좀 쉬어야겠다. 강모 이 쉐키...만주로 도망갔어. 쉐키... 아놔..차라리 도망가서 혼자 살아라. 거기서도 이 여자 저 여자 불행하게 만들지 말고.
여자의 순결이 중시되던 시대에 순결을 잃은 여자는 갈 곳이, 설 자리가 없었다. 세상이 미친듯이 욕을 하니까. 그보다 자유로워진 지금 상황이 어찌됐고 또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중요한 건 자신이 자신에게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잘 살 수 있는 길이다. 내가 성경험이 없다면 없는 채로, 있다면 있는 채로, 많다면 많은 채로, 나는 어쨌든 나인 것이다. 세상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이런 나인 것을 당당히 여기고 남자 때문에 불행의 나락으로 빠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연애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저 연애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개새끼들을 만나 엮이게 된다면 거침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당하게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 참는다고 개같은 연애가 천국으로 향하진 않으니까. 돈 없고 능력 없는 남자가 못난 남자인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채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그 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건네는 남자가 못난 남자인 거다. 이런 남자를 피해야 해!! 효원이랑 강실이랑 오유끼는 그럴 수 없었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개같은 연애에서는 빠져나오자!! 유약하고 흔들흔들 하는 남자는 집어치워!!
꿈에 변기 가득 똥이 담긴걸 보고 내렸다. 누가 똥을 쌌는데 변기를 돌리지 않아, 이걸 왜 돌리지 않냐며 내가 돌렸던 것. 꿈에서 깨고는 변기 안에 있던 똥이 눈 앞에 생생해, 오호라, 이건 로또로구나, 했는데, 제기랄, 숫자는 하나도 맞질 않았다. 그냥 똥 꿈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