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기도문 중에서-


인간은 외딴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은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領地)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하여 종(弔鐘)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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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 [ Donne, John , 1572~1631.3.31 ]  
 
영국의 시인 ·성직자.

주요저서 : 《신성 소네트》《노래와 소네트》《안녕》
 
 런던 출생. 가톨릭교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가톨릭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584년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갔으나 중퇴하고, 1591년 법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한 후 1592년 링컨스 인(Limcoln’s Inn) 법학원에 들어가 정계나 법조계에서 입신할 뜻을 굳혔다. 그리하여 1596년과 1597년 2회에 걸쳐 에식스 백작을 따라 에스파냐 원정에 종군하였고, 귀국한 후에 국새상서(國璽尙書) T.에저튼경(卿)의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 A.모어와의 비밀결혼이 발각되어 직위도 잃고, 160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무렵에 에스파냐문학을 비롯한 각국의 문학사상에 흥미를 느껴 풍자시와 서정시를 썼고,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출옥 후 비록 자유의 몸이 되기는 하였으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괴로운 생활이 1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607년에는 뛰어난 종교시 《Divine poems》를 썼고, 1608년 가톨릭으로부터 영국국교로 개종하게 된다. 이어서 애가(哀歌) 《세계의 해부》(1611)와 그 속편 《영혼의 걸음》으로 이루어진 《예제일(例祭日)》을 썼다. 1611년 대륙을 여행하고 돌아와서는 국왕의 조언을 받아들여 1615년에 성직자에 임명되어 국왕 앞에서 설교한 일도 있다. 1617년 아내를 여의고 마지막 대륙의 여행에서 돌아와 1618년에는 대표적 종교시 《Holy sonnets》썼다. 그 후 1621년 성 바오로 대성당의 사제장(司祭長)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르네상스의 변동기에 산 그의 생애에 어울리게 던의 시도 젊은 시절의 연애시와 만년의 종교시로 대별할 수 있다.

《노래와 소네트》로 대표되는 초기 연애시는 상냥함 ·야유 ·자조 ·절망 ·저주 등 사랑의 온갖 심리를 대담하고 정치한 이미지를 구사하여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F.페트라르카류(流)의 상투적인 연애시를 배격하고, 불굴의 정열과 냉철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의 통일을 이룩한 이들 작품으로, 17세기 영국의 형이상적 시인의 제1인자로서 위치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T.S.엘리엇, W.B.예이츠 등 20세기의 현대 시인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종교시 《천부찬가(天父讚歌)》도 본질적 구조에서는 연애시와 비슷하여 죄나 죽음의 의식과 신앙이 복잡하게 서로 갈등하는 긴박한 고백으로, 대담한 이미지에 의한 격렬한 신에의 부르짖음으로 나타나 있다. ‘기지(機智)의 제왕’이라는 말을 듣던 그의 면모는 만년의 설교에도 여실히 나타나 명설교로도 이름이 알려졌다. 연애시 《엑스터시》 《안녕》, 14행시 《자랑이 될 수 없는 죽음》 외에 애가(哀歌) 《주년(周年)의 노래》(1612)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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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1561.1.22 ~ 1626.4.9)

저서 : [학문의 진보](1605) [노붐 오르가눔](1620)[뉴 아틀란티스](1624)

         [수필집](초판1597, 2판1612, 3판1625) 등..

런던 출생.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임스 1세 치하(재위 1603∼1625)에서는 사법장관과 기타 요직을 지내 ‘벨럼의 남작’, 이어서 ‘오르반즈의 자작’이 되었다. 1613년에 검찰총장, 1618년에 대법관 등 날로 권세가 높아갔으나, 수뢰(收賂)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만년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지성을 가진 현실파 인물이었으며, 근세 초기의 사상가답게 그 역시 천동설을 신봉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한 전통적인 구(舊)사상의 영향하에 있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스콜라 철학의 불비 ·결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험론적 방법을 발견 ·제창하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우주 일체의 활동의 원인을, 특히 우리들 인간이 자유롭게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하려고 힘썼으며, 그러기 위해서 인류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지적 재산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거기에 무엇이 결핍되었고 무엇을 보충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저서 《학문의 진보》에서 말하였지만, 처음에 《학문의 대혁신》 전 6부의 집필을 구상하여 그 계획을 대규모로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간행된 것은 3부뿐이었고, 특히 제1부의 《학문의 진보 The Advancement of Learning》(1605)와 제2부의 《노붐 오르가눔 Novum Organum)》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서 《오르가논》에 대항하는 것)(1620)이 중요하다. 그는 기억 ·상상 ·이성이라는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 ·시학 ·철학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최대의 관심과 공헌은 자연철학 분야에 있었고 과학방법론 ·귀납법 등의 논리 제창에 있었다.

그는 우선 인간 지성의 도리의 접근을 방해하는 편견으로서 4종의 이도라(idora:우상 또는 환영)를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① 종족의 우상, ② 동굴의 우상, ③ 시장의 우상, ④ 극장의 우상 등이다. ①은 인류라는 종족에 대한 보편적인 선입관이고, ②는 개인적 편견으로서, 마치 동굴 속에 있듯이 자연의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③은 언어의 부적당한 사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있지도 않은 풍설이 나도는 것과 같은 것이며, ④는 논증의 잘못된 규칙이나 철학의 그릇된 학설과 체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가공의 이야기에 비유되는 것과 같은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편견을 일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삼단논법은 지식의 확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험과 관찰에 기본을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즉, 그것만이 다수의 사례를 모아서 표나 목록을 만들어 사상(事象)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이 말한 본질은 여전히 중세적 ‘형상(形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법칙의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며, 수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수단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이론이 매우 불충분하였지만, 근대과학의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에 있어 ‘형상’의 탐구는 형이상학이었지만, 그 형이상학의 응용부문은 미신적 마술과 구별된 ‘자연적 마술’이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적 마술이 근대과학의 공학적 기술로 전신(轉身)하려 한 전환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새로운 마술, 즉 발명·발견을 뜻하는 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기계공학적 마술의 달성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뉴 아틀란티스 The New Atlantis》(1627)라는 미완성의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항공기·잠수함 ·인공의 비 ·합성금속 등의 과학적 발명을 실현하고 있는 이상국의 꿈을 묘사하여 나타냈다.

이와 같이, 과학의 진보에 장대한 꿈을 싣고 과학연구의 방법을 제창하였지만, 그 방법을 실제로 이루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 중에서 구현된 방법의 정신, 즉 미래를 예견한 광대한 전망적 정신과 그 지적 전망에 의하여 ‘인류의 왕국’을 확대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달성하려고 한 그의 장대한 포부는 그 후에 영국뿐만 아니라 널리 전 유럽의 근대철학에서 그를 선각자 속에 자리잡게 하였다. 베이컨의 실천철학은 그의 문필의 재능을 보인 《수필집》(1597)에서 비체계적으로 논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 충동 외에 사랑이라는 지고(至高)한 덕으로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후자에 의한 실천적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에서 그 후 영국 고유의 사회적 ·실천적 ·공리주의적 윤리의 방향을 시사하였다. 저서에, 《학문의 권위와 진보》(1622) 《숲과 숲》(162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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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1. 로마점령 전

다신교를 믿고, 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으며, 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Lyndyn)에 기인하며, 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로마의 지배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갈리아 지사(知事)로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BC 55년과 BC 5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본국의 정치 때문에 3개월 만에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까지 연기되었다.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河口)에서 솔웨이만(灣)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으며,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에 있는데, 런던 등지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유명하다.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레스터 ·글로스터 ·우스터 등의 지명의 어미는 당시의 병영지(兵營地)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城: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으로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3. 앵글로색슨

영국은 4세기 후반까지 픽트인 ·스코트인 등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대륙에서의 게르만의 민족이동, 특히 고트인의 로마침입에 따라 5세기에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침입한 게르만인은 원주민인 브리튼인과 싸웠으며, 6세기 말에는 현재의 잉글랜드에서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 템스강 이남을 색슨인, 켄트주(州)와 와이트섬을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앵글리어 ·마시어 ·웨식스 ·노섬브리어의 7개 왕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는 게르만적 다신교(多神敎)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7왕국 시대에 성(聖)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북방 데인인의 침입은 9세기 중엽부터 규모를 더하였으며, 웨식스 지배하의 각 왕국 중 동쪽의 여러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은 조직적 ·국민적 침입을 시작하였으며, 11세기에는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망명하고, 데인인 카누트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4. 노르만정복

영국의 카누트가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州法廷)과 교회법정을 분리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켰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諸侯)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傭兵制)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으로 유명한 다음의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카 존왕[失地王]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의 자유시(自由市)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大陸領)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州代表)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으며, 그 밖에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겼으며,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한편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고 했는데,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으나 스코틀랜드는 1313년에 에드워드 2세군(軍)을 대파하여 독립을 확보하였다.

5. 왕위계승시대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며,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 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公)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公)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한 후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家)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 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農奴化)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6,  절대왕정에서 시민혁명으로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鄕紳)과 시민을 추밀원(樞密院)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騰貴)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攝政)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首長令)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 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7. 정치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 비료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 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8. 대영제국의 붕괴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 또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형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실현되어 1906년에 노동당이라 개칭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의 사회정책 입법을 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重稅)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성립시켰다.

독일의 확장정책으로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연합국 이탈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는 본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음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대영제국은 사실상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자유 양대 정당의 대립을 무너뜨렸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성립시켰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패배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으나,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자와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의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증가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대두하여 또 다른 확장정책을 노골화하였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에 영국은 처칠 총리의 거국일치 내각을 만들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후의 전국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戰)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1943년에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1945년에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성공하였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포츠담회담에서 처칠 대신 새 총리 애틀리가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마저 저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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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로서 대표된 북방 휴머니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근대적 방법에 의한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서 보다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종교개혁의 에라스무스의 위치는 루터의 우월한 지위에 압도되어 크게 주목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지향하여 전개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역할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고와 저술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세사회가 가진 모든 특징에 대한 반발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모든 성서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카톨릭교회에 대하여 도전함으로써 그의 개혁사상을 펴 나갔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실천과 타성화된 형식주의를 개혁할 것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사회의 도덕 및 인간성 일반에 관한 검토와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방법에서 루터와 같이 직접적인 교황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일생을 부패한 신앙의 일소에 바쳤다. 찬란한 명예가 주어진 종교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죽을 때까지 학자였던 에라스무스의 중도적인 개혁사상을 살펴봄으로서 당시의 유럽사상의 흐름과 대비하여 그의 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론

1.청년기의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466년 10월 27일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시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서 탄생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어였던 라틴어로 쓴 유명한 「광우신 예찬」을 비롯하여 그 밖의 많은 저작과 헤아릴 수 없는 서한을 남기고 승리의 장년시대와 고독한 노년시대를 거쳤고 결국엔 루터의 위광과 투지의 그늘에 가려서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휴머니스트로서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에라스무스의 인품에는 아주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본래 체질상 투쟁형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안의 물건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근심과 불평을 하였고 그의 허약한 신체는 생리와 위생에 있어 그를 날카롭게 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결벽성에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적으로나 도덕적 의미의 순수성을 스스로에게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순수성과 청결은 그 자신의 섬세한 감각과 허약한 신체와 함께 비공격적인 비판 형식인 풍자와 비유를 선택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부정과 불의, 미신을 향해서 격렬한 비난을 퍼붓게 될 때에 그는 먼저 재빨리 체질적으로 이것을 느꼈으며 날카로운 풍자와 완곡한 조롱을 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을 세련시켰다.

그러므로 중세사회와 교회에 대한 그의 공격은 풍자가 갖는 보호색 때문에 같은 수준의 지성인들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둔한 고위 성직자들을 때때로 즐겁게까지 하였다. 이러한 풍자는 당시 휴머니스트들의 공통된 무기였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히슬로데이를 등장시켜 그가 이상국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묘사하였다. 독일의 스봐비아의 휴머니스트인 브란트는 성직자들을 정신적 바보로 비판하였다. 휴머니스트적인 풍자는 에라스무스의 탁월한 문체, 교묘한 표현, 풍부한 고전지식 등으로 윤색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이런 풍자성이 깔려 있으므로 적당히 여과된 후에야 진지하게 고찰 될 수 있는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 휴머니스트들의 표현방식은 그들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 때문에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여야할 때 풍자는 비판과 공격을 합리화하면서도 동시에 박해와 규탄의 안전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들은 가끔 사물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잃어버리기를 택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적극적 행동보다도 순수객관으로서의 입장을 암시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22세때에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입적하였다. 한 때는 세속에 대한 멸시란 글을 쓰기도 하였으며 수도원에서의 은둔생활에 만족하였으나 그의 자유정신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여행을 동경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불행하고 어두운 청춘을 가진 에라스무스가 식량을 위하여 아부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의 정신적 바탕은 왜곡되고 그 날카로운 지성은 풍자를 찾게 되었다.  1495년(29세) 가을 에라스무스는 그가 생활하던 수도원을 벗어났다. 몽테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얻기 위하여 수도원 당국의 허가아래 파리에 갔었다. 불쾌한 인상과 회상으로 찬 이때의 생활은 그래도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발돋움을 위한 자유였다.

2.휴머니스트로서의 현실비판

에라스무스는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하여 현실의 종교문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개혁을 위한 방법으로서 그는 결코 혁명적 수단인 폭력과 파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화와 재건을 위한 온건한 수단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패한 교회를 고치는데 회초리가 필요하지만 권위를 파괴함이 없이 종교를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세 사람들의 신앙은 거의 미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파괴에 대한 속죄와 게으른 의무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모나 성자에게 기도드리는 것이 일반신앙의 주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대중의 변질된 신앙에 대하여 교회측은 극히 타성적인 관례로써 대하였다. 예를 들면 성서의 중요부분인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교회 미사 때 독통되는 정도로밖에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것도 고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도록 음조를 붙였다. 성서의 필본은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것조차도 수도원 도서실 안에 갇혀 있는 수가 많았으므로 다만 직업적인 신학자들에게 공개되는 실정이었다.

중세의 일반대중의 크리스트교 신앙은 기적 및 성모를 비롯한 특별한 성서에 대한 미신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일반적인 비종교적 풍조에 대하여 진정한 크리스트교도는 세례를 받았다거나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기 보다도 마음속에 깊이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며 경건한 행위로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개혁 내지 보다 위험한 어떤 변화를 바랬으며 이것은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가 희망한 것과 일치하였다. 그의 신약성서 번역이 준 영향은 단 하나의 촛불이 아주 넓은 세계를 비춘 것처럼 큰 것이었다.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과 형식화된 논리를 한층 공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에라스무스의 신약 역본의 주석에서였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 이기듯이 성서를 뜯어 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3. 저작활동과 작품사상

에라스무스는 고전연구에 몰두하여 훗날의 그의 저술을 명쾌하고 우아하게 할 라틴어에 정통한 공부를 하였다. 33세부터 저술을 위한 준비를 마치면서 이후 계속하여 자신의 휴머니즘을 표현하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1503년 처음으로 인쇄된 「크리스트교 군인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에 뒤이어 세 번째 영국 방문시의 큰 수확인 「우신 예찬」Encomium Moriae,1511 은 사회의 퇴폐와 수도성직자의 부패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으로서 대단히 유고한 문체와 간결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크리스트교 세계에의 커다란 도전인 우신예찬에 뒤이어 그의 성서 휴머니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리스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1516년에 많은 부가설명과 주역을 달아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중세를 통하여 확고부동했던 권위적인 종래의 성서판의 부정확성을 폭로하였다는 점에 더욱 중요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로 성서의 원전비판의 시초를 이루어 놓았다. 신학자로서의 에라스무스는 결코 카톨릭교회나 교황의 궁극적인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휴머니스트의 입장에서 당시의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수도성직자들과 무모한 사변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여 그릇 해석된 성서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각별히 크리스트교적 휴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크리스트교를 중세교회의 독단과 형식주의에서 해방하여 소박하고 순수한 원시크리스트교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으로서 일상행활을 지도할 윤리적, 도덕적인 기준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는 성서의 중세이래의 권위인 종래 성서의 오역을 깨닫고 신약성서의 원문 성서가 일부 지식인과 성직자에게만 애독되고 독점될 것이 아니라 널리 일반대중에게도 읽혀져야 함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단순하고 소박한 크리스트교에 대한 그의 의도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종래 성서를 절대시하고 그리스어에 무지하였던 완고한 파리의 신학자들은 그의 신약성서의 번역 출판에 일제히 비난을 가하였다.

4. 휴머니스트로서의 사상

찬반의 양방향의 결정을 회피하고 광신을 싫어한 에라스무스에게는 다만 하나의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휴머니스트적인 훈련과 학문을 구사하여 성서의 진실한 의미를 파악하고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원초적 크리스트교 세계를 찾고자 하는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전유럽적인 분쟁속에서 루터와 카톨릭교회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하게 자기 입장을 지켰다.

후년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진실한 크리스트교인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동시에 카톨릭교회측에서는 루터의 공모자로 의심했을 때 그는 결연히 그의 성서에 대한 신념을 표명하였다. 그는 루터의 성공이 가장 겸손한 사람까지도 망쳐 놓을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이단자를 공격할 때의 성제롬(St. Jerome)처럼 그들의 비난을 들어도 크리스트교 신앙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할 것이라고 확연히 선언하였다. 16세기 초 유럽의 종교계의 모순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장차 커다란 동란 속으로 몰고 갈 사태에 이르렀다. 반란의 기운이 더 돌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노선을 가야하고 또 어느 정도로 배후 지지자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실성을 가지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에 대한 공격과 자신이 받는 공격을 어느 쪽이든 다 같이 싫어하고 용의주도하게 중용의 길을 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펜을 사용하여 유혈을 보지 않게 하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으며 설사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도 노엽게 만들지 않도록 희망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적수들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狂遇의 확인은 휴머니스트 공통의 비행동성을 설명한다. 중세는 몽매의 시대요 광우에 찬 시대였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광우를 철저히 인식하여 계몽하고 인도하여야만 하였다. 권위에 대한 맹종과 형식주의에 의한 광신 이것은 제거되어야 하였다. 휴머니스트들은 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인쇄술의 보급에 힘입어 이러한 광우의 시대는 광명 속으로 이끌려 나가게 되었으며 대중의 비판력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에 의하여 원초적인 크리스트교 세계를 밝히고 각언집성을 하여 고전고대의 현명한 말들을 값싸게 동시대인들에게 전하여 계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시대차체 안에 잠재해 있는 정신적 동경의 심볼이었으며 본질을 개량하려는 각 시대가 모두 그 이상을 우선 한 인물에게 투향하듯이 그를 시대정신의 전위오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세계는 편견도 없고 작당도 없다. 카톨릭교회와 투터의 양측의 진리를 다 같이 인정하고 어느 한 편에만 예속되려고 하지 않았다. 루터에 가담하지 않고 중세교회 정신에 알맞는 코스모폴리탄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그는 종교를 위한 소란, 혁명, 전쟁이란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런 점이 루터파와의 분지점의 하나일 것이다. 정말로 에라스무스의 세계주의는 한편으로 크리스트교에 내재하는 진편성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명석한 지성과 관조적인 휴머니즘은 그로 하여금 이른바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운동의 과중에 휩쓸리지 않게 하였다. 그의 본명은 어디까지나 휴머니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진편적인 조화의 세계에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현재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지향하기를 주장하였으며 크리스트교 본래의 영적 순수성을 부활시키고자 할 따름이었다.

논의나 합의를 거쳐서 합리적인 해결을 바라는 경향은 종교와 사회의 개량에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전체를 종교적인 혼돈으로 몰고 들어갈 폭풍의 전야에 있어서도 고전세계의 이상이던 중용과 조화를 표방하면서 세계주의 이상을 굳건히 지키려는 순수한 학자의 모습이었다.


결 론

중세가 종말을 고하려던 14세기와 15세기는 무한한 중대성을 갖고 있었다. 왜냐면 전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사상이 붕괴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대성은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와의 갈등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그 가운데서 새 시대의 출발점이 확정되어 갔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루터에 앞서서 개혁의 준비를 이룩하여 놓았지만 그는 끝끝내 휴머니스트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진실로 그는 음성이 될 수는 있었으나 선구자는 될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결정을 요청받은 순간에는 언제나 중용을 택하며 조정을 고수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류가 북방에 들어온 이래로 그것을 종교적 개혁운동으로 이끌어 나간 휴머니스트들이 궁극에 가서는 고전 고대가 지향한 조화와 중용, 평화와 타협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은 혁명적 효과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휴머니즘의 본질이며 동시에 자체의 비극의 요인이었다.

에라스무스 자신으로 말하면 그후 1세기 동안의 서구 전체의 분란으로 확대될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사회의 도덕적 혁신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충실히 끝까지 그 자신의 개혁사상을 고수하여 민중의 자유정신에의 각성을 지도하였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교회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임으로서 개척자로서의 극히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대단히 평화적이며 화해적인 성질 때문에 교회와의 공공연한 작별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시기에 서제에 틀어 박혀 확정하게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를 거절하였다.

에라스무스의 평판은 17세기말에 나아지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성서 원문에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종교적 헌신과 교회에 대한 복종을 공언한 것은 기회주의적인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는 정통과 비평가들의 혹평에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가 폭풍이 불어 왔을 때 몸을 빼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에라스무스만큼 대중들을 상대로 종교의 개혁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해 놓은 사람은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인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로서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카톨릭교도로서 자신의 다양한 자기 정체성을 융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여전히 카톨릭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고 유럽 문화의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출 처 : [인터넷] http://myhome.naver.com/sw016/f-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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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3-1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 화요일부터 저희 교회에서 하는 '교회사 탐구'라는 강의를 등록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강의하시는 목사님이 인상도 좋으시고, (인터넷)강의를 워낙에 잘하셔서 직접 들을 기회를 찾은거죠. 그분 전공이 미국사신데, 아마도 이 강의에선 미국교회사를 가르치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미국교회사를 가르치실려면 중세의 종교개혁을 훑으셔야 해서 듣고 있는데, 참 새롭더군요. 카를님 생각도 났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라스무스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는데 올려놓으셨군요. 잘 읽었구요. 카를님 홈페이지도 구경했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전공이 역사셨군요. 암튼 이번 강의 듣는 동안 카를님 덕 좀 볼 것 같습니다. 불가피하게 이거 퍼가야할 것 같아요. 궁금한 거 있으면 여쭤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