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별칭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로서 이는 '위대한 로렌초'라는 뜻이다.

피렌체의 통치자로서 로마 시대 이래 유일하게 '국부'라는 존칭을 들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이기도 하다. 1449년 1월 1일 피렌체에서 출생한 그는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렌초에 대해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로렌초가 물려받은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1. 증조부, 조부, 부친 3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 집안의 강대한 경제력.
2.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피렌체 시민의 좋은 감정.
3.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경의에 입각한 신뢰감.
4. 조부와 부친의, 특히 조부 코시모의 주도면밀한 배려로 받게 된 당시 최고의 교육.
5. 어릴 때부터 완벽한 제왕 교육을 받았다.

로렌초의 조부나 부친 모두 공식적으로는 피렌체의 한 시민일 뿐이었지만 대외 관계에 있어서 메디치의 명성과 경제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타국의 왕후들이 방문하게 되면 으레 메디치의 저택에서 유숙하였고 연회 또한 메디치 궁에서 열렸다.
대외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로렌초가 권좌에 오르고 난 후 로렌초는 피렌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사육제, 무도회, 마상창 시합 등 화려한 축제를 여러번 개최함으로서 자신의 독재 정치의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478년까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는데 바로 1478년에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파치 가문의 음모이다.
파치 가는 메디치 가문과 같은 피렌체의 은행가 가문으로서 이전까지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교황청과의 사업 거래권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치가의 음모가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는

1. 파치가의 일원이 주장한 유산 상속권을 로렌초 데 메디치가 특별법을 만들어서 기각해버렸기 때문이다.
2. 피렌체 공화국에 사실상 군주로서 군림하는 메디치의 전제에 파치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3. 메디치가 오랫동안 차지해온 교황청의 재무 담당권을 파치가 가로챘기 때문이다.
4. 반메디치파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하필이면 피렌체공화국이 병합을 노리는 피사의 대주교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5. 동생 줄리아노를 추기경에 임명해 달라는 로렌초의 부탁을 교황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인이었다.

하지만 교황과 로렌초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통치에 있어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로렌초는 군사적으로 약체인 피렌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이탈리아 내 각국의 분쟁은 제거되어야 했다.
로렌초는 현상유지를 위해서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 존재하던 소국들을 지원해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못 가진 자로서 태어나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가톨릭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소재하는 이탈리아와 이해가 상반될 때에는 서슴치 않고 이탈리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식스투스 4세는 빈곤속에서 입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수입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친족들이 많이 있었다.
친족들을 추기경에 임명하는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밖의 사람에게는 땅이라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교황의 그 계획은 로렌초에 의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파치 가문과 함께 로렌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파치가문의 대표격인 인물은 반메디치의 선봉이기도 한 프란체스코 파치였다.
여기에 교황청의 용병대장인 몬테세코와 피사의 대주교인 살비아티가 참여했다.
4월 26일 부활절 미사에서 로렌초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를 암살하고 그 사이에 살비아티 대주교가 시뇨리아(정부회의)를 장악하기로 했다.
이윽고 계획이 실행되어 줄리아노는 살해당했지만 로렌초는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시뇨리아를 장악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암살의 공모자들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참살 당하거나 사로잡혀서 고문을 받고 결국 처형되었다.
줄리아노가 살해되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던 줄리아노가 애인에게서 난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안 로렌초는 그 아들을 정식으로 메디치 가문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가 훗날의 클레멘스 7세 이다.

로렌초에 대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참살당하자 교황은 고위성직자인 살비아티 대주교가 죽은 것을 빌미 삼아 로렌초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국은 이에 대해 로렌초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각국의 열강들은 로렌초의 세력균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페라라 공국, 만토바 후국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11세까지 줄리아노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렌초의 생존을 기뻐하며 피렌체 공화국과의 종래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 페란테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것은 피렌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결심을 한 교황이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력이 없으므로 나폴리 왕의 힘을 업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가 교황의 요구를 거부하자 교황은 자신을 지지하는 나폴리 왕 페란테와 함께 피렌체를 침공한다.
전쟁은 한참을 끌었고 피렌체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이윽고 로렌초는 도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나폴리왕 페란테를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향한다.
결국 이 도박은 성공해서 페란테는 로렌초와 평화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다.
이 때 나폴리군을 이끌고 있던 페란테 왕의 장남 칼라브리아 공 알폰소는 철수를 주저했으나 이때 로렌초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스만 투르크 군이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오틀란토에 상륙해 주민을 살육하고 이탈리아 공략을 위한 교두보를 건설하게 된다.
이에 칼라브리아 공은 황급히 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된다.
교황도 피렌체에 대한 적대 행위를 계속 할 때가 아니었다.
이후 투르크 술탄 메메트 2세의 죽음으로 투르크 군의 재침은 없게 되었지만 이 일은 이탈리아 각국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게 된다.
결국 피렌체 공화국은 교황에게 한 무례한 행위를 사죄하고 사면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그의 위신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피렌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로렌초는 70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대부분은 메디치 지지 세력들로 채워졌다.
로렌초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와 마찬가지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메디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지식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확실히 그는 전제 군주였다. 그러나 쾌적한 전제 군주였다."

1484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죽고 인노켄티우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로렌초는 새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케토 치보를 사위로 삼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이로서 교황청에 대한 메디치의 영향력도 지대해지게 된다.

모든 면에서 로렌초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메디치 재벌의 경제 상태와 더불어 그 자신의 건강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다.
로렌초의 은행 경영 능력은 결여 되어 있었으나 그 자신은 엄청난 금액을 여기저기에 쓰거나 투자했다.
결국 로렌초 사후 메디치 가문은 7천500피오리노에 이르는 채무를 지게 되고 로렌초가 죽은지 2년 뒤인 1494년 파산하게 된다.
그의 건강 상태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위가 좋지 않았던 로렌초는 죽기 전 몇 해 동안 병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492년 4월 8일 43의 나이로 죽게 된다.

로렌초의 소비는 문화에 있어서 피렌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지적 관심을 가진 유럽인들이라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동경하는 도시였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젊을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성장을 도와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소개장을 써서 밀라노 공작에게 보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주문하는데 있어서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 사재를 털어서 마련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던 고대 조각을 모은 정원이나, 고대 서적과 문서를 일반에 공개한 도서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로렌초 스스로도 이탈리아 문학사에 있어서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 그의 전집이 시문, 산문, 평론을 합쳐 세권이나 된다.

로렌초 사후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에는 신정이 성립되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훗날 로렌초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가 레오 10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공작 가문으로서 피렌체를 수도로 하고 토스카나 지방을 영유하는 전제 군주로서 변모하게 된다.

from  http://blog.naver.com/ellul/20002134416

[image of Lorenzo de' Medici]

워싱턴 D.C national gallery of art에 있는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

Lorenzo de' Medici 의 흉상

 

: 르네상스의 수호가문인 메디치 가(家).

  그 중점에 우뚝 서 있는 인물, 로렌초 데 메디치.

  아이러니하게도 가문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가문이 쇠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역시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했던 것일까.

  정치가로서의 로렌초는 초일류급이라 들었건만.

  어쩐히 씁씁한 기분을 안겨주는 인물이다. 

 

    [image of Giuliano de' Medici]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Giuliano de' Medici 의 흉상

Lorenzo de' Medici 흉상과 같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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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일반적으로 단테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인간이 기적적으로 저승세계로 여행 할 수 있게 되어 지옥·연옥·천국에 사는 영혼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에게는 안내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이고 또 하나는 '천국'을 소개하는 베아트리체이다. 1300년 부활제인 성(聖)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일요일)을 약간 넘긴 시간에 일어난 이 허구의 만남을 통하여 단테는 추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물론 실제로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추방된 몸이었음). 이런 식의 구상을 통해 단테는 망명 중에 겪게 될 이야기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재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를 설명하고 이탈리아가 처한 난관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유랑은 한 나라의 제반문제를 포괄하는 소(小)우주가 되면서 아울러 인간의 타락상을 나타내게 된다. 단테의 이야기는 이처럼 역사적 특수성과 전형성을 지닌다. 〈신곡〉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는 곡(曲 canto)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크게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편으로 나뉘어져 기법상 각 부마다 33개의 곡이 있다. 그러나 〈지옥편〉에는 시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곡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의 곡은 136~151행 정도의 길이이며, 시의 운율체계는 3운구법(韻句法:aba bcb cdc 등)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신성한 숫자인 3이라는 숫자가 이 작품의 어디서나 나타난다.
 
단테의 〈지옥편〉은 위치상으로나 목적상으로 볼 때 그보다 앞선 위대한 고전들과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7권)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6권)에서는 저승세계의 방문이 이 중간에 나온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는 전통을 따르되 실제로는 저승세계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함으로써 전통을 변형시켰다. 그 이유는 그의 시의 정신적 유형이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으로의 여행은 세상을 떠나는 영혼의 행동을 나타내며, 또한 이것은 우연히도 그리스도 자신이 죽은 계절과 일치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단테의 방법은, 찬란하나 결함있는 반역 천사장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의 타락한 천사들이 맨 먼저 모습을 나타내는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유사함). 〈지옥편〉은 잘못된 출발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주인공 단테는 타락한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던 해로운 가치들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지옥편〉의 복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단테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의 명부를 보는 것이 이 시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필리포 아르젠티,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피에로 델레 비녜, 브루네토 라티니, 성직 매매 교황들,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등은 엄청난 힘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옥의 방문은, 베르길리우스와 후에 베아트리체가 설명하듯이, 진정한 회개를 시작할 수 있기 전에 거쳐야 할 극단적인 방법, 즉 고통스럽지만 꼭 겪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은 〈지옥편〉이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왜 불완전한지를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흔히 34곡에서 마지막으로 사탄과 만나는 장면이 극적 혹은 감정적 힘이 부족하여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옥으로의 여행은 주로 이별의 과정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욱 완전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반(反)클라이맥스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끝맺음이 불가피한 이유는 사탄의 마지막 등장이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탄이 인간 역사에 존재함으로써 생긴 슬픈 결과들은 이미 지옥을 통과하면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연옥편〉에서는 주인공의 영혼이 갱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시작된다. 사실상 이 부분의 여행을 이 시가 제시하는 진실한 도덕적 출발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순례자 단테는 연옥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자신의 개성을 억누른다. 단테가 물리칠 필요가 있는 본보기들과 대면하게 되는 〈지옥편〉과는 대조적으로 〈연옥편〉에서는 본보기로 나타나는 인물이 거의 없다. 회개자들 모두가 인생의 길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다. 단테는 소외된 관찰자로서 공포감을 느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가담한다. 〈지옥편〉에서 본의 아닌 소외감에 대한 시가(詩歌)로서 거기서 단테가 자신이 예전 주장했던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연옥편〉에서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심상의 생활을 순례행각과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당한 모습으로 지상의 낙원에 다시 찾아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현세의 기만적인 약속들을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엄격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연옥은 영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곳으로 좀더 넓은 시각으로 즐길수 있다. 〈지옥편〉(7곡)에서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 관한 토론이 나오는 한 곡(曲)에서만 철학을 암시하지만, 〈연옥편〉에서는 역사·정치·도덕 분야의 모든 관점들이 개방되어 있다. 더욱이 〈연옥편〉은 시와 예술의 곡(曲)이기도 하다. 단테가 황량한 지옥세계를 지난 뒤에 "여기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시가 되살아나리니"하고 외쳤을 때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진의(眞意)였다. 지옥에 배정된 시인은 하나뿐이며 천국에 마땅한 시인은 둘을 넘지 않지만, 연옥에서는 독자들이 음악가 카셀라와 벨라쿠아, 시인 소르델로를 만나고 2명의 구이도, 즉 구이니첼리와 카발칸티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비롯하여 여러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연옥의 상단부분에서 독자들은 단테가 그의 고전적 전통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며, 다음으로 그가 포레세 도나티를 만났을 때 고전적 전통보다 더 고양된, 조국의 위대한 전통에 훨씬 가까이 가게 된다. 보나준타 다 루카와 만나면서 '청신체'의 진정한 원천에 관한 설명을 듣고, 구이도 구이니첼리를 만나서는 기교라든가 시적 제어력 등의 부분에서 그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지방 시인 구이토네 다레초를 어떻게 능가했는지를 듣는다. 이 곡(曲)들은 〈지옥편〉(4곡)에 나타난 생각, 즉 단테가 지체높은 이단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서사시에 관한 계획을 알려주며 자기의 위치가 고전작가들과 나란히 "6번째"에 속함을 다시 알리는 내용이다. 〈연옥편〉에서 단테는 그 전통을 확장하여 스타티우스(그의 〈테바이드 Thebaid〉는 사실 지옥 밑바닥에 있는 더 음산한 현상들을 제공함)까지 포함시키지만 또한 그의 더 근대적인 전통이 구이니첼리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구이니첼리와 만난 다음 단테는 바로 지상 낙원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단테는 고전에서 그의 도덕적·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서사시의 개념, 즉 당대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충분히 포함할 만큼 큰 범위를 지닌 이야기라는 개념을 끌어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그리스도교적 소재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철학을 배운 것은 바로 조국의 전통에서였다.
 
이것은 물론 단테의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가 다른 안내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극(劇)이 존재하지 않는 노래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함으로써 유일한 극적 사건이 이루어진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등장시킨 것은 문학사상 가장 풍부한 문화적 전유(專有)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단테의 시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적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지옥편〉(1곡)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사람은 아니나 옛날엔 사람이었다. 나의 어버이는 둘다 만토바 출생의 롬바르디아 사람들이었고 나는 뒤늦게나마 율리오 치하에서 태어나 그릇되고 거짓투성이인 제신들의 로마에서 살았다." 더욱이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고향 (당대의 이탈리아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의 배경은 전부 로마제국이다(베르길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에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대제를 찬양했음). 그는 시인으로 나타나며 그의 위대한 서사시의 주제는 단테의 시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나는 시인이었고 자랑스런 일리온이 타버린 뒤 트로이에서 온 안키세스의 정의로운 아들에 대해 노래했었다." 단테 역시 부당하게 쫓겨난 피렌체의 정의로운 아들을 노래했는데, 아이네아스가 더 나은 도시를 찾아야 했듯이 그의 경우는 천상의 도시를 찾아야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주의깊게 연구한 시인이며 그로부터 얻어낸 시적 양식은 그 아름다움으로 단테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단테는 수년간 베르길리우스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베르길리우스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오랫동안 침묵한 나머지 미약해보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한 사람의 명문가를 넘어선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단테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며 현자(saggio), 혹은 도덕적 스승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나 신의 은총을 받은 특사로서, 그가 돌아온 것은 일찍이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 더 소박했던 신앙들이 소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물론 베르길리우스 혼자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러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슬프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즉 그의 의식 어디에서도 역사의 지배 과정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추방객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도덕적 교훈을 베풀어주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시의 주제이자 단테의 시의 주제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역사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으며 로마제국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역사의 과정은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다. 반면 단테는 역사를 초월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사가 그에게는 악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천국편〉에서는 진정한 영웅적 실현이 이루어진다. 단테의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들의 역사적 영향은 계속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추종자들에게 경이감과 동화(同化)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고조부 카차구이다, 성 프란키스쿠스, 성 도미니쿠스, 성 베르나르두스 같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단테는 자신을 승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천국편〉은 실현과 완성의 시이다. 그것은 앞의 2편에 이미 묘사되었던 것을 실현하고 있으며, 미학적으로는 기대와 회고로 이루어진 정교한 시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평가와 영향
 
단테의 〈신곡〉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영예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400년까지 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2개 이상의 주석이 나왔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 시인의 일생에 대해 글을 쓴 뒤 1373~74년에 〈신곡〉에 관해 처음으로 공개강연을 했다(이것은 단테가 고대고전들과 함께 대학교과과정에서 채택된 첫번째 근대작가였음을 뜻함). 단테는 '시성'(詩聖 divino poet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555년 베네치아에서 그의 위대한 시의 제목에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훌륭한 책이 출판됨으로써 그의 시는 단순한 〈희극〉이 아닌 〈신곡〉이 되었다.
 
서사시가 호소력을 잃고 다른 예술 형식(주로 소설과 드라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도 단테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사실 그의 위대한 시에서 독자들은 고전작품 특유의 힘을 즐길 수 있다. 후세대도 자신의 지적인 관심사가 단테의 시에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어 19세기에도 독자들은 〈지옥편〉에 등장하는, 힘세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불운한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20세기초의 독자들도 이 시가, 그 구조와 논지와는 무관하며 때로는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기조차 하는 미학적인 언어표현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후대의 독자들은 이 시가 강한 건축물처럼 각각의 여러 부분들이 반영되고 조화되기도 하면서 잘 통합되어, 아주 복합적인 음향을 지닌 걸작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했다. 단테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뛰어난 전형들의 작품목록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시(豫示)와 대응면에서 위대한 문장가적 재능을 갖춘 시를 창조했다. 더욱이 그는 중요한 정치적·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모두 조화시켜 작품을 쓰는 한편 도덕적 지혜와 고양된 윤리적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은 650여 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시이다. 놀랍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착상이 주는 소박한 힘으로 끊임없이 여러 세대에 걸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에서 주요 교과목으로 쓰였으며 계속하여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시인들에게 지침이 되었고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단테를 "그리스도교적인 최고의 상상력"이라 불렀으며 T.S. 엘리엇은 "근대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근대에서 단테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발군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근대사상과 관련을 맺으며 세계에 등장시킨 전형들을 창조하는 데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룬다. 단테는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보편적 전형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신화의 보고(寶庫)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R.J. Quinone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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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13세기는 황제파(기벨린 당)과 교황파(겔프당)사이의 오랜 대립의 역사였다.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겔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1265년 태어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 피렌체에서 성장했다. 당시 피렌체는 정치력 뿐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e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 잠언을 인용했는데,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1289년, 교황파(겔프)와 황제파(기벨린)가 싸울 때 24세의 단테는 기병대의 일원으로 캄파르디노전투에 참가했다. 이윽고 피렌체의 시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295년 11월에 귀족출신인 단테는 정치활동 필요상 의약업종조합(醫藥業種組合)에 가입하였으며, 포폴로(popolo)선출위원으로 가담, 12월에는 사비(원로)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듬해인 96년에는 시뇨리아 직속의 100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무렵 피렌체시의 행정은 교황파중에서도 공화국의 자립정책을 내세우는 백당(白黨)과 상업상 이익에서 교황과 강하게 결탁한 흑당(黑黨)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단테는 35세인 1300년에 교황파의 동맹을 위해 사자(使者)로 산지미냐노에 갔으며 그해 여름에는 프리오레(통령)가 되었다. 그러나 흑백 양당의 싸움이 격화하였으므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조정사절을 파견하여 피렌체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권을 쥐고 있었던 백당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1301년 10월, 단테를 포함한 세 사람을 로마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교황의 사절은 피렌체에 들어갔고, 정변이 일어나 흑당의 천하가 되었기 때문에 1302년 1월, 단테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채 공금횡령죄로 시외추방과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3월에는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구추방의 선고와 함께 체포되면 화형에 처하도록 결정했다. 이때부터 그의 19년의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초기 망명생활에 단테는 추방된 겔프 백당에 들어가 군사적 탈환을 모색하려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 단테는 피렌체의 또다른 추방자인 기벨린당원들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귀환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향연](1304~07경)이다.

 

[향연] 제1권은 많은 부분이 감동적이며 체계적으로 속어를 옹호하는 데 씌어졌다. 단테는여기서 당시 지배계층이던 성직자들의 라틴 문화가 황혼기로 접어들고 지방 도시문학의 출현을 예고했다. 단테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 있으며, 새롭게 참정권을 얻은 민중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철학자이자 중개자라고 생각했다. 단테가 공표했던 이탈리아 문학은 곧 주도적인 문학이 되었고 이탈리아어는 유럽의 주도적인 문학어가 되었으며 이러한 위치는 3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국의 전통, 특히 로마 제국의 전통을 옹호하는 감동적인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영혼이 신에게 귀의하게끔 도와주는 인간 고유의 욕구, 즉 '오르메'(horm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본보기와 교리를 통한 적절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잘못 인도되어 파괴력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여기에 단테는 정치 사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결부시켰다. 즉,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그때는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신적 본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다면 그때는 사람의 의지에 물리적 제한을 가할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테는 이와 같은 요인이 이탈리아가 빠져들었던 혼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런 상황을 치유하려는 바램을 품고 [신곡]이라는 서사적 과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처음에는 엄청난 희망을 품게하다 나중에는 더 큰 실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1308년 11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공(公)이 독일 왕으로 뽑혔고, 보니파키우스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7월 하인리히를 로마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의 성(聖)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탈리아를 흥분시켰으며 단테도 황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출현으로 평화가 회복되면서도 황제가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권위에 예속할 것을 선언케 되리라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1310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7세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북방에서 허비한 나머지 적들에게 세력을 규합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결국 클레멘스도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이런 행동은 단테가 가장 위대한 논쟁서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1313경)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연]에서 다루었던 정치적 논쟁을 확장시켰다. 클레멘스의 속임수에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테는 그가 지닌 논쟁의 힘을 교황이 정치적 통치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다시 말해 황권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반대하는데 쏟았다. 단테가 지녔던 문제는 그가 비유적인 언어와 역사적 예를 들어 이야기했더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었을 미묘한 관계를 이론적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인리히 7세의 임무 실패에 대해 단테가 실망한 이유는 하인리히의 초기 후원자가 외관상 클레멘스 교황으로 보였고 또 그 같은 상황이 두 최고 권력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재수립하는 데 이상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단테의 망명시절은 그 자신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렵게 편력하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단테는 추방기간 동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위대한 서사시 [신곡]은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된 듯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끝을 맺었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몇 년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라벤나에서 유명한 프란체스카의 조카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환대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단테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당시 최고의 문필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이도 자신이 추도사를 진행한 훌륭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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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ethius의 섭리와 자유의지문제

 「철학의 위안(Consolatio philosophiae)」제 5 장

 박상욱 (서양철학 석사과정)

  우리가 말하는 우연이라는 단어의 정의(definition)는 그 지위가 애매모호하다. 우연의 정의는 일상어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므로, 그 뜻이 부정될 수도 있고 긍정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연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연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따라서 우연이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해답을 찾을려고 노력한다. 

 만약 어떤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무(無)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연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설명을 따르면 우연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행할 때,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목적하였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 우연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사물들에 있어서 여러 원인들이 합치되는 데서 생겨나는 뜻하지 않았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원인들에 대해서 불가피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인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의 올바른 정의를 통해서, 신의 섭리의 세계에서 우연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려고 한다.  

  세계는 인과계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신의 섭리에 따라서 만들어 졌고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인과계열 속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보에티우스는 답해야만 한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보에티우스 또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는 이성적 본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1)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판단능력을 통하여 행동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있는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는 신의 섭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앞의 Ⅰ·Ⅱ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라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보에티우스는 이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 문제는 바로 '섭리와 자유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가이다. 섭리와 자유는 조화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섭리의 입장에서 볼 때, 섭리는 불확실할 수 없고 또, 자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 5 장의 Ⅲ에서 언급될 문제는 앞의 Agustinus의 "자유의지론" 제 3권에서 어거스틴이 답할려고 했던 문제, "신의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이라는 문제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자유와 섭리의 양립가능성에 대해 답해야만 한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모든 것을 미리 보시며, 또한 신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면, 신의 섭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원인을 다 알고 계시니 결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들에 대해서 앞선 이론가들이 말한 것은 "신의 섭리가 미리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필연성은 신의 섭리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다. 즉 예견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 필연적으로 예견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에티우스에게 이러한 이론들은 "예지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의 원인인지, 혹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이 섭리의 원인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예견되는 것이고 예견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미래에 있을 것으로서 신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예견되거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양립가능하게 하는 논거로써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앞선 이론가들의 생각은 완전한 지식이라 할 수 없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신의 예견은 인간의 인식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신이 장차 이루어질 것으로 미리 확고하게 알고 있는 그 사물의 생성은 확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는 아무런 자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면, 악(惡)2)의 원인이 신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섭리에 따라 질서정연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한 악은 신이 이미 정해놓은 질서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과오는 완전한 선(善)인 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것이 되고만다.  

  보에티우스는 앞에서 발생한 두 가지의 난점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첫 번째는 앞선 이론가들의 이론상의 결점을 보완해야 하며, 두 번째로는 악(惡)의 책임이 신에게로 전가되지 않도록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두 문제는 바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어떻게 양립가능한가?"라는 끊임없이 되풀이 된 물음이였다.   

 

 신의 예지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의 섭리를 다 알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조화'는 보에티우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신론자들도 대답해야하는 중요한 의무가 된 것이다. 이에 보에티우스는 인간의 추리작용이 신의 예지의 능력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부 논의를 시작해 나간다.

 보에티우스에게 "예견된 것들에는 필연성이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만일 필연성이 없으면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다"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이런 질문에 대하여 보에티우스는 '당신의 견해는 잘 못되었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에티우스는 "인식되는 모든 것은, 사물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들의 정신적 기능을 따라 인식되는 것"라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의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의 인식능력은 아래 단계의 인식능력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아래 단계의 것은 윗 단계의 인식능력에 동등하게 자기를 높일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식의 사유 능력면에서 본능을 소유한 동물보다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사유한 인간보다는 직관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 좀더 완전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식상에서도 감각보다는 표상, 표상보다는 추리, 추리보다는 이성, 이성보다는 직관이라는 보에티우스의 인식론적 구도가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가 예지와 필연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성이다.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되는 사물 자체의 기능에 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가 자기 인식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의 예지와 필연성에 대해서 올바른 정답을 찾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성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능력 한계안에서 정의내려지기 때문에 신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어떻게 인간이 신의 섭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답해야만 한다. 우리는 인식을 할 때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감각을 이용할 수 있다. 감각은 인간보다 하등에 있는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인식의 도구이다. 다음으로 표상을 들 수 있다. 표상은 동물들에서도 좀더 높은 단계의 종(種)들만이 가지고 있다. 이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감각과 표상의 능력은 있지만 결코 이성은 없다. 인식의 최고단계인 직관인식능력은 오직 신에게만 있다. 인식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등의 것보다 인식능력은 더 우월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 도식을 통하여 만약 인간이 신의 최고 인식의 높이인 직관인식능력까지 도달 할 수 있다면, Ⅳ에서 우리가 답할려고 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영원한 신의 인식은 그 전체가 동시적인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래서 현존하는 사물들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미래 사정들에 대한 신의 예지도 인간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신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설명해 내야만 한다. 앞의 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식되는 사물은 그 본질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을 따라 인식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의 지식을 먼저 파악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영원성을 알기 위한 시도가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에게 '신이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성을 시간적인 사물과 비교해보자3). 시간안에 살고 있는 현재적 존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재적 존재에게 과거는 이미 잃어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오늘도 시간의 연속성에서는 지나가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제약을 받는 인간은 영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원은 무한한 생명의 전(全)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소유하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이런 영원이란 필연적으로 자주적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에게 대하여 현존으로 존재하며, 또 필연적으로 그것에는 지나가는 시간의 무한성도 현재인 것이다.

 "모든 판단은 정신의 본성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존재 상태이며, 그의 지식도 모든 시간적 운동을 초월하고 현재 자기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며, 미래와 과거의 무한한 영역을 동시에 내포하며 모든 것이 마치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단순한 인식 안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적 한계성 안에서 사물을 바라보지만, 신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 신은 사물의 본성이나 고유성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루어질 사건들을 자기의 현재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인식은 직관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만물을 보기는 하나 절대로 사물의 성질을 혼란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신에게 있어서는 그 사물들은 현재의 것들이지만 시간적 조건하에서는 미래의 것들이다."

  "신의 직관은 어떠한 미래 사정보다는 선행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자기 고유한 인식의 현재에다 환기시키는 것이다. 신의 직관은 예지를 어떤 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변화없이 머무르면서 네 변화를 선행하여 일별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하고 또 관조하는 현재성을 미래 사물들의 실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단순성에서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유의지 결과물에 대해 상과 벌을 제시하는 것이 정당화 될 것이다. 

 

  제 5 장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생각을 집약하여 말한다면,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행위들을 미리 보신다. 하지만 신이 인간의 행위들을 미리 예견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행위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신은 영원하시며, 영원성은 끝없는 생활에 대한 완전한 소유, 즉 완전하고 동시적인 소유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적 제약 속에서 볼 때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가 있지만, 신은 사건에 대하여 가지는 총체적인 시각(視覺) 안에서는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가 없는 것이다. 신은 세계내의 창조된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신께서는 필연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자유로운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영원히 보신다. 내가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내가 태양을 본다는 사실은 태양이 떠오는 것의 원인이 아니다. 내가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사실이 그 사람으로 걷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신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하여 가지시는 부동(不動)의 영원한 시각은 인간 행위의 자유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는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양립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유신론자들이 꼭 풀어내야만 할 숙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중에서 어떠한 것도 포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신의 예지능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분명히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지와 자유는 동시에 성립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위의 질문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위의 질문은 필연성이라는 논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면 '예지와 자유'라는 논리학의 문제를 어거스틴, 보에티우스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형이상학적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더욱더 애매한 상황으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1)  이성적 존재, 즉 인간의 영혼을 계층을 이루고 있다. 영혼의 계층에 의해 자유를 누릴수 있는 권한 또한 차등적으로 적용된다. 최고의 영혼은 신을 인식(혹은 직관)할 수 있으무로 가장 자유스럽다.

2)  유신론자들도 세상에서 악(惡)이 없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인간은 악한 행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살인, 강간, 도둑질, 거짓말등은 분명히 인간이 저지른 결과물이다.

3)  영원성을 신의 속성으로 시간성을 가진 현재적 존재를 인간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논의가 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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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북방전쟁 시작(~1721). 나르바싸움에서 러시아군이 스웨덴군에게 패퇴.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 단절. 부르봉가(家)가 왕위 계승.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 즉위.
1701년 영국에서‘왕위계승법’성립, 국왕은 프로테스탄트로 한정. 프로이센 왕국 성립.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1세:~1713)가 황제로부터 왕호(王號)를 받음.
       호엔촐레른왕조(~1918) 시작. 에스파냐 계승전쟁(~1714).
       부르봉왕가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에 반대,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가 하그동맹 (對프랑스동맹)을 맺고 싸움.
       미국에서 예일대학 창립.
1702년 북아메리카에서 앤여왕(女王)전쟁(~1713) 벌어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
1703년 미쉬엔조약 성립. 영국이 포르투갈 시장을 독점.
       포르투갈이 대(對)프랑스동맹(하그동맹)에 참가.
1704년 브렌하임의 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이김.헝가리에서 라코치의 독립운동 일어남(~1711).
1706년 러시아가 캄차카반도의 완전 점유권 획득.
1707년 대(大)브리튼왕국 성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병합.
1708년 러시아 표트르 1세의 개혁 시작.
1709년 볼다바의 싸움 벌어짐. 러시아 표트르 1세가 스웨덴왕 칼 12세와 싸워 이기고, 칼은 터키로 망명(북방전쟁).
1711년 러시아에서 최고통치기관인 세나토(원로원) 창설됨. 귀족회의는 폐지.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 체결.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승인.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 등을 얻어냄.
       독일 황제카를 6세의‘국본조칙(國本詔勅) 나와, 오스트리아 영토의 불분할˙여자상속권 등을 규정.
1714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라슈타드조약 체결. 에스파냐 계승전쟁 끝남.
       영국에서 하노버왕조 성립(1917년 이후 윈저家).
       러시아 표트르 1세 핀란드 침입, 발트해 제해권 장악(북방전쟁).
1715년 프랑스왕 루이 14세 사망(재위, 1643~).
1718년 파사로비츠조약 체결. 터키가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 및 세르비아˙왈라키아를 오스트리아 에 할양.
       동 프로이센 왕의 영지에서 농노제를 폐지.
1720년 사르데냐왕국 성립.
       사보이공(公)이 시칠리아와 교환 조건으로 사르데냐를 획득, 왕국을 성립하고 왕이 됨.
       에스파냐 식민지의 엥코미엔다제(制) 폐지되고, 아시엔다제 성립되기 시작.
1721년 니스타트조약. 북방전쟁(1700~) 종결.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출.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좌제 폐지하고 시노드(宗務廳)를 설치.
1722년 러시아 표트르 1세가 관등제(官等制)를 제정하고, 제위계승법을 공포.
1725년 표트르 1세 사망(재위 1682~). 베링, 베링해협 발견(~1730).
1726년 러시아에서 최고추밀원 창설되어 귀족의 과두정치 시작(~1730).
1727년 캬흐타조약에 의해 러시아와 청(淸)나라의 경계가 정해짐.
1730년 러시아의 최고추밀원 폐지됨.
1732년 북아메리카에서 조지아 식민지 건설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13개주로 됨.
1733년 폴란드 계승전쟁(~1738).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프랑스˙에스파냐˙사르데냐가 유럽 각지에서 싸움.
1735년 빈조약(가조약) 체결. 폴란드 계승전쟁 실질적 종결됨.
       오스트리아는 나폴리˙시칠리아를 포기하고 파르마˙토스카나를 획득.
       나폴리˙시칠리아는 에스파냐령이 되었으며, 에스파냐 왕자 돈 카를로스가 시칠리아 왕이 됨.
1736년 러시아-터키전쟁 시작(~1739).
1737년 오스트리아-투르크전쟁(~1739). 메디치 왕가 단절.
       오스트리아 왕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토스카나공(公) 계승.
1738년 빈조약(본조약) 체결로 폴란드 계승전쟁 종결.
1739년 베오그라드조약. 오스트리아가 바사로비츠조약(1718)으로 획득한 영토를 투르크에 반환, 발칸 정책 포기.
       콘스탄티노플조약에 의해 러시아가 터키로부터 드네프르강 하류 지역을 획득.
       영국과 에스파냐의 식민지전쟁(~1748) 시작.
1740년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2세(대왕) 즉위(~1786).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를 계승.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시작(~1748).
       프리드리히대왕이 슐레지엔을 침공, 제1차 슐레지엔전쟁.
1742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7세)이, 프랑스˙에스파냐의 지지를 받아 신성로마 황제에 즉위.
1743년 오보조약. 러시아와 스웨덴의 강화 성립. 핀란드에서의 러시아령 확대.
       북아메리카에서 조지왕(王)전쟁(~1748).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전쟁(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일환).
1744년 제2차 슐레지엔전쟁(~1745). 프리드리히대왕이 브레멘에 침입(오스트리아 계승전쟁).
1745년 카를 7세 사망.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1세)가 황제에 즉위(~1765: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드레스덴조약 체결.
1746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참가.
       미국에서 프린스턴대학 창립.
1747년 아프리카에서 두츠라니 왕조 창건(~1818).
1748년 아헨조약 성립. 조지왕(王)전쟁(오스트리아 계승전쟁) 종결.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출간.
1750년 포르투갈에서 총리 퐁바르의 전제정치 시작(~1777).
1751년 프랑스에서 《백과전서》 간행 시작(~1772).
1754년 에스파냐에서 종교협약(宗敎協約) 성립, 교회가 정부 관할하에 들어감.
1755년 북아메리카에서 프렌치-인디언전쟁 발생.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전쟁(~1763) 발생.
       모스크바대학 창립.
1756년 7년전쟁 시작(~1763). 마리아 테레지아가 슐레지엔 탈환을 기도, 프랑스˙에스파냐˙
       스웨덴˙러시아가 동맹 프로이센˙영국과 대전.
      ‘산업혁명’ 시작.
1758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군이 프랑스령 퀘벡을 점령.
       모로코에서 시디 모하메드가 술탄으로 즉위(~1789).
1760년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베를린 점령(7년전쟁의 연속).
1762년 프로이센과 러시아 단독강화(7년전쟁). 프랑스에서 칼라스 처형, 볼테르 등이 강력 항의.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 즉위(~1796).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파리조약 체결로 식민지전쟁 종결.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에스파냐령 플로리다가 영국 영토가 됨.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和約) 성립으로 7년전쟁 끝남.
       영국에서 윌크스 사건 발생.
1764년 프랑스에서 예수회 해산당함.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발명.
       영국의회에서 설탕조례와 통화조례가 통과. 북아메리카에서 영국 산품 불매운동 전개.
1765년 영국 의회가 인지조례(印紙條例)˙군대숙영(宿營)조례를 통과.
       뉴욕에서 농민반란(~1766년 9월) 일어남.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 완성.
1767년 영국에서 타운센트 조례 성립.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국 산품 수입반대운동 시작.
       에스파냐 및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예수회 해산˙추방.
176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시작(~1774).
       프랑스가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섬을 매수.
       쿡의 제1차 남태평양 항해, 오스트레일리아를 탐험(~1771).
       아크라이트, 수력(水力) 방적기를 발명.
1770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보스턴 학살사건 발생.
       차세(茶稅) 이외의 타운센트 관세 철폐.
1772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에 의한 제1차 폴란드의 분할.
       쿡의 제2차 항해 탐험(~1775).
1773년 러시아에서 푸카초프의 농민반란(~1775). 로마교황이 예수회를 해산.
       영국의회에서 차조례(茶條例)가 통과되고, 12월, 북아메리카 보스턴 차(茶)사건 발생.
1774년 크추크 카이나르디조약 체결. 러시아와 투르크 강화 성립으로 투르크가 흑해연안을 할양.  보스턴항 폐쇄조례가 영국의회를 통과.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대륙회의 개최.‘대륙회의의 선언 및 결의와 통상단절동맹을 결의.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 시작. 렉싱턴에서 식민지군과 영국군의 무력충돌.
       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에 선임.
1776년 뉴햄프셔의 헌법 제정.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가 독립결의문을 제출, 독립선언서 기초위원회 성립.
       독립선언서가 채택되고 선언서 확정.
       A.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 출간.

1778년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을 인정, 영국과 싸움. 바이에른 계승전쟁(~1779).
       미국이 프랑스와 동맹 체결.
1781년 오스트리아령에서 신앙관용령˙농노폐지령 공포됨.
       요크타운에서의 전쟁을 끝으로 사실상 미국 독립전쟁 종료.
1782년 영국˙미국 가조약에 조인.
1783년 베르사유조약과 파리조약 체결. 미국 독립전쟁에 종지부.
       크림 한국(汗國:크리미아), 러시아에 병합.
       영국에서 제1차 소(小)피트 내각 성립(~1801).
1784년 카트라이트가 역직기를 발명.
1785년 마리 앙투아네트 사건(~1786).
1786년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즉위(~1798). 북아메리카에서 시에즈의 반란.
1787년 프랑스 명사회(名士會) 열림.
       러시아가 투르크와 개전(~1792). 오스트리아가 투르크와 개전(~1791).
1788년 미합중국 헌법 발효.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시드니 식민지 건설.
1789년 프랑스혁명 일어남. 3부회 열림. 제3신분에 의한 국민의회 성립(~1791) 선언.
       테니스코트의 서약. 바스티유감옥 공격. 국민의회에 의해 ‘인권선언’ 발표.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혁명. 튀르누의 싸움에서 벨기에 반란의용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브라반트 혁명).
       미합중국 제1회 국회 개최.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1797).
1790년 벨기에 합주(合州)공화국 성립(브라반트 혁명의 결과). 
       12월에 오스트리아군이 브뤼셀 점령, 브라반트 혁명정부를 해체.
1791년 벨기에의 리에주 혁명(1789~)이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완전진압.
       폴란드에서 신헌법 제정. 국내개혁 실시.
       프랑스 국민의회가 해산되고 입법의회 소집(~1792).
       미국에서 합중국 헌법 제1~10조가 수정되고 권리선언 조항들을 부가.
       캐나다 법이 영국의회를 통과, 상˙하 캐나다로 분리.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對)프랑스 동맹 결성.
       발미의 싸움에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
      투르크˙러시아, 야시조약 체결.
1793년 루이 16세 처형되고 공포정치 시작. ‘93년 헌법’ 제정.
       폴란드 제1차 분할.
       제1차 대(對)프랑스 대동맹 결성되기 시작. 미국의 대프랑스 중립 선언.
1794년 프랑스에서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 의해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됨.
1795년 프랑스 ‘95년 헌법’ 성립. 국민공회 해산되고 총재(總裁)정부 성립.
       제3차 폴란드 분할(분할완료).
       영국, 네덜란드로 부터 케이프지방을 획득.
1796년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전쟁(~1797).
       영국 의사 제너가 종두법 발견.
1797년 캄포 포르미오조약 성립.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즉위(~1840).
       미국 대통령 워싱턴이 은퇴.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나폴레옹군이 이집트에서 로제타석(石) 발견.
1799년 프랑스에서 쿠데타. 집정(執政)정부 성립. 나폴레옹이 제1대 집정이 됨.
1800년 영국˙터키 연합군, 프랑스의 이집트잔류부대를 공략, 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군 격퇴.
       알바니아 독립후국(獨立侯國) 성립.
       프랑스가 에스파냐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획득.
       워싱턴이 미합중국의 수도가 됨.
1801년 영국이 아일랜드를 병합.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에 취임(~1809).
       프랑스(나폴레옹)와 오스트리아 간 강화(講和) 성립.
       나폴레옹과 교황 피우스 7세의 종교협약(宗敎協約) 설립. 영국이 카나티크를 병합.
1802년 프랑스 나폴레옹과 영국 간에 아미앵 화약(和約) 성립.
       나폴레옹이 종신 제1집정(執政)이 됨.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완성.
1803년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
       뢰겐스부르크의 제국(帝國)대표자회의, 독일 제후령(諸侯領) 재분배.
1804년 나폴레옹 법전(法典) 공포. 나폴레옹 황제가 됨(~1805).
       영국에 제2차 피트 내각 성립(~1806).
       아이티 독립.
1805년 메흐메트 알리, 이집트 태수(파샤)가 됨.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
1806년 신성 로마제국(962~) 멸망. 나폴레옹의 ‘베를린 칙령’.
       러시아, 투르크 영토를 침공, 전쟁(~1812) 시작.
       무굴왕조 악바르 2세 즉위(~1837).
1807년 틸지트조약에 의해 프랑스와 러시아˙프로이센의 강화 성립.
       프로이센에서‘슈타인의 개혁’실시.
       피히테 ;독일국민에게 고함;(~1808).
       프랑스군 에스파냐를 침공, 나폴레옹전쟁(~1814) 시작됨.
       포르투갈 정부, 프랑스군의 침공을 피해 브라질로 망명.
       풀턴의 증기선 시험운전.
1808년 나폴레옹과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로 1세의 에어푸르트회담 열림. 러시아가 핀란드를 병탄.
1809년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몰수. 오스트리아 재상에 메테르니히 취임(~1842). 멕시코˙에콰도르 독립운동 시작.
1810년 러시아, 국가회의 창설.
       프로이센에서의 슈타인의 개혁사업을 할데베르크가 계승.
       에스파냐령 식민지에서 독립운동 왕성.
1811년 영국에서 러다이트운동(~1812).
       베네수엘라˙파라과이˙에콰도르가 독립을 선언.
       모롤로스의 지도하에 멕시코 독립운동 시작(~1815).
       메흐메트 알리, 이집트 내 독재권 획득.
1812년 나폴레옹군, 러시아 원정.
       미국, 독립전쟁 시작(~1814).
       볼리바르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 실패. 산 마르틴이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참가.
1813년 유럽에서 제국민해방전쟁 시작됨(~1814).
       라이프치히 싸움에서 연합군이 나폴레옹군을 격파.
       멕시코 모렐로스의 혁명의회 멕시코의 독립을 선포.
       누에바그라나다도 독립을 선포.
1814년 나폴레옹 퇴위. 루이 18세 국왕 즉위. 빈회의(~1815) 시작.
       그리스에서 비밀 독립운동단체 필리케 헤타에리아 결성, 대(對)터키 전쟁 시작.
       미국 독립전쟁 종식, 강조약 성립.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 시운전.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신성동맹(神聖同盟) 결성.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4국동맹 성립.
       세르비아의 반(反)투르크 독립운동 시작. 모렐로스 처형되고, 멕시코 독립운동 실패.
       마라타에서도 반영(反英)운동.
       이집트에서 메흐메트 알리, 와하프 세력을 완전 제압.
1816년 라 플라타(후의 아르헨티나), 독립을 선포.
1817년 미국 제5대 대통령 먼로 취임(~1825).
       제3차 마라타전쟁(~1819)으로 영국이 마라타를 완전 제압.
1818년 4국동맹에 프랑스가 참여. 프로이센 관세법 제정 공포, 관세동맹 정책 시작.
       영국 랭커셔˙요크셔 등지에서 대스트라이크.
       러시아 돈 지방에서 농민반란(~1820).
       칠레, 독립 선포.
1819년 영국, 싱가포르를 영토로 삼음.
       칼스바트 회의 개최. 영국에서 피털루의 민중운동 탄압사건 발생.
       미국이 플로리다를 매수.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독립.
1820년 에스파냐에서 리에고의 혁명. 나폴리에서 카르보나리당(黨)의 혁명.
         멕시코에서 이투르비데에 의한 독립운동 전개됨. 미국에서 미주리협정 성립. 메흐메트 알리, 수단정복전쟁 개시(~1823).
1821년 그리스 대(對)투르크 독립전쟁 시작(~1829). 포르투갈 의회, 헌법 제정 공포.
       베네수엘라 독립. 페루˙멕시코˙도미니카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 독립 선포.
       헤겔의 《법철학(法哲學)》 간행.
1822년 그리스 독립 선포.
       유럽 5국동맹으로부터 영국 탈퇴로, 동맹이 와해.
       이투르비데, 멕시코 황제(아구스틴 1세) 즉위(~1823).
       브라질 독립을 선포, 페드루 1세가 황제 즉위.
1823년 프랑스군, 에스파냐에 침입, 리에고의 혁명 진압. 에스파냐에 왕정 부활.
       미국 대통령 먼로, ‘먼로선언’ 발표.
       멕시코에서 산타아나 등 공화파 일당의 반란으로 이투르비데가 추방됨.
       멕시코로부터 중앙아메리카 연방 분립.
1824년 영국, 노동조합 결성을 공인.
       프랑스 샤를왕 즉위(~1830).
       멕시코 공화정(共和政)헌법 제정.
182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즉위(~1855). 페테르부르크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난.
       세계 최초의 철도(스톡턴~달링턴 간) 영국에서 개통.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포.
       러시아군, 이란˙카자흐를 재침공(~1828).
1826년 파나마회의 개최. 아메리카주 최초의 국제회의.
       얀다부조약 체결로 제1차 버마전쟁 종료.
1827년 런던협정 성립,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이 그리스 문제에 관한 조정안 합의. 투르크는 거부.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함대가 투르크˙이집트 해군을 격파.
1828년 포르투갈의 돈 미겔이 쿠데타에 성공, 왕이 됨(~1834).
       우루과이 독립.
       네덜란드 뉴기니에 식민을 시작.
1829년 영국에서 가톨릭교도 해산령 발효.
       프랑스에서 볼리냐크 내각 성립.
       아드리아노플화약(和約) 성립, 그리스˙세르비아의 투르크령 내에서의 자치권을 인정.
       몰도아˙바라키아 두 공국(公國)은 러시아가 지배.
       미국 제7대 대통령 잭슨 취임(~1837).
1830년 7월혁명으로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 물러나고, 루이 필리프 즉위.
       벨기에 독립을 선포. 리옹에서 견직공들의 폭동 일어남.
       미국 최초의 철도(볼티모어~오하이오 간) 개통.
       개리슨,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
       콜롬비아가 콜럼비아(小)˙에콰도르˙베네수엘라 3국으로 분립.
       프랑스, 알제리를 점령.

1831년 런던열국회의(列國會議)에서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 승인.
       미국 버지니아에서 노예들의 대폭동.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 터키와 충돌하고, 아들 이브라힘은 시리아 정복(~1832).
1832년 영국˙프랑스˙러시아,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
       바이에른 왕자 오토를 국왕(~1861)으로 삼음.
       폴란드가 러시아에 병합됨.
       상크 아나, 멕시코 대통령이 되어 독재정치를 시작(~1855).
       영국에서 제1차 선거법 개정.
1833년 독일관세동맹 성립.
       러시아와 터키, 웅키야르 스켈레시조약 체결로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에 외국 군함  통행 금지.
1834년 프랑스 리옹˙파리 등지에서 폭동.
       포르투갈 돈 미겔, 이탈리아로 망명.
1835년 미국에서 모르스 전신기 발명.
       리비아의 카라만리왕조 무너지고 터키의 1주(州)가 됨.
       남아프리카, 보어인(人)의 이동 이루어짐.
1836년 런던 노동자협회 결성. 스트라스부르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반란,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 텍사스,멕시코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이 됨.
1837년 런던 노동자협회,‘인민헌장(人民憲章)’을기초. 노동자들의 차티스트 운동 시작됨(~1848).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1901).
       캐나다에서 자치를 요구하는 반란 일어남.
       이집트 무굴왕조 최후의 황제 바하둘 샤 2세 즉위(~1858).

1838년 영국에서 콥덴, 브라이트 등에 의한 반곡물법(反穀物法)동맹 결성.
       온두라스˙니카라과가 중앙아메리카연방으로부터 독립.
1839년 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
       과테말라 독립. 중앙아메리카연방 해체되고 각 주가 독립.
1840년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즉위(~1861).
       터키와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등 런던조약 체결,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에 외국 군함의 운행 금지.
       루이 나폴레옹 볼로냐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 종신금고형에 처해짐.
       에스파냐에서 에스파르테로의 섭정˙독재정치 시작(~1843).
       영국에서 캐나다연방 법안 통과, 상˙하 캐나다가 통일.
1841년 엘살바도르 독립.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소년공(少年工) 보호법’입법.
       런던조약에 의한 해협협정(海峽協定) 조인.
1842년 파라과이 독립.
       보어인(人)이 오렌지 공화국 세움.
       영국군 카불에서 철수 도중 전멸, 영국-아프가니스탄전쟁 종식.
       마이어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
1843년 멕시코에서 산타아나의 독재적 헌법 제정됨.
       영국, 남아프리카 나탈 식민지를 설립.
1844년 프랑스, 모로코의 탕헤르를 공격, 전쟁 벌어짐.
       아일랜드에 대기근(~1845). 에스파냐에서 나르바에스가 독재정치를 시작(~1851). 도미니카 공화국 성립.
1845년 미합중국 텍사스를 합병. 멕시코에서 자유주의자의 반란 일어나, 산타아나가 추방됨.
1846년 영국에서 곡물법 폐지. 교황 피우스 9세 즉위(~1878).
       이탈리아 전역에서 민족해방운동 고조.
       미국-멕시코전쟁 시작(~1848).
1847년 독일에서 노동자교육협회가 발전.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리마회의 열림.
       아프리카 곡물해안에서 라이베리아 공화국 성립.
1848년 프랑스에서‘2월혁명’일어나 공화정 선포.
       빈 시민봉기로 시작된‘3월 혁명’으로 로마에 의회제 성립됨.
       오스트리아, 흠정헌법(欽定憲法) 공포,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소집.
       프랑스 국민헌법 성립으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취임.
       미국-멕시코전쟁 종식.
       뉴욕주에서 세계 최초의 여권(女權)회의 개최.  캘리포니아에서‘골드러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이집트에서 아바스 히르미 섭정 계승(~1854).
1849년 피렌체 공화국 성립.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프로이센왕을 황제로 추대했으나 왕이 거절, 국민의회 해산.
       프랑스 국민의회의 선거에서 보수파 승리.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 사망.
1850년 미국에서 도망노예 단속법 제정.
       클레이턴-불워조약으로 파나마 지협(地峽)을 둘러싼 미˙영간 대립 해소.

1851년 런던 의정서에 합의, 영국˙프랑스˙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이 조인.
       프랑스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일어남.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금광 발견.
1852년 프랑스 새 헌법 성립. 나폴레옹 10년 임기 대통령이 됨.
       국민투표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지지. 나폴레옹 3세 즉위, 제2제정(帝政) 시작.
       카블이 사르데냐 총리에 취임.
       아르헨티나에서 내란(~1858) 발생.
       영국,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 승인.
       영국인 리빙스턴,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 빅토리아호(湖) 발견.
       H.E.B.스토우 부인 《엉클 톰스 캐빈》 출간.
1853년 크림전쟁(~1856) 발발.
       미국, 멕시코로부터 애리조나 남부를 매수.
1854년 영국˙프랑스가 터키와 동맹, 크림전쟁에 개입.
       미국, 공화당 창당.
       베네수엘라 노예제도 폐지.
       멕시코의 산타아나 실각.
1855년 사르데냐도 크림전쟁에 참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즉위(~1881).
       멕시코, 팔레스법 제정으로 군대와 교회의 재판권을 제한.
       페루에서 노예제도 폐지.
1856년 크림전쟁 종식, 파리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 억제.
       멕시코, 예수회(會) 폐지, 교회의 토지소유 금지. 멕시코 내전 시작(~1860).
1857년 이탈리아 국민협회 창립, 통일운동을 사르데냐 왕국에 결집시킴.
       드레드 스코트사건 및 최고재판소 판사장 토네가 흑인 노예의 소송권을 묵살.
1858년 몰도바˙발라흐나가 연합공국(公國)이 됨.
       수에즈운하회사 설립.
       동인도회사 해산으로 인도 통치권이 영국 정부에 이관.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시작.
       프랑스가 사르데냐를 도와 오스트리아와 싸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빌라브랑카 가조약(假條約) 체결, 강화.
       미국 펜실베아니아에서 대유전 발견.
       다윈의 《종(種)의 기원》 출간.
1860년 토스카나˙파르마˙모데나˙로마냐가 주민투표에 의해 사르데냐에 병합.
       프랑스와 영국이 통상조약 체결.
       미국에서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성립. 첫 국회개회(밀라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국왕 칭호.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 즉위(~1888). 러시아, 농노(農奴)해방령 선포.
       그리스에서 혁명 일어나, 국왕 오토 추방됨.
       루마니아 왕국 창설 선언.
       미국 남북전쟁 시작(~1865).
       산토도밍고 에스파냐령이 됨.
1862년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총리가 됨.
       미국 대통령 링컨 노예해방 선언.
1863년 폴란드에서 반란 일어남(~1864).
       그리스 왕에 덴마크 왕자 게오르기오스 즉위(1세,~1913).
       미국 대통령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행함.
       이집트에서 이스마일 파샤 즉위(~1879).
1864년 제1인터내셔널 결성(~1876).
       적십자사 창설.
       프랑스에서‘60인선언’ 발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평등을 요구.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 재선.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막시밀리안이 멕시코 황제에 즉위(~1867).
      파라과이전쟁 시작(~1870).
1865년 가슈타인조약에 의해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가 홀슈타인을 각각 통치.
       미국 남북전쟁 끝나고, 링컨 암살당함.
       도미니카 공화국 성립.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출간.
1866년 프로이센과 이탈리아가 대(對)오스트리아 동맹 결성.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발발, 프라하조약 체결로 강화 성립.
       미국에서 시민권법(市民權法) 성립(수정헌법 제14조).
       미국전국노동조합연맹 결성(~1873).
1867년 런던 열국회의, 룩셈부르크 공국(公國)의 영세중립화 결정.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제국(二重帝國) 성립.
       헝가리가 왕국이 되어 황제가 왕위를 겸함.
       멕시코의 황제 막시말리안 처형.
       캐나다연방 성립.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수.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 출간.
1868년 에스파냐에서 혁명 일어나, 이사벨 2세 폐위, 망명.
       영국에서 제1차 디즈레일리 내각에 이어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 성립(~1874).
       러시아가 부하라 한국[汗國]을 보호령으로 삼음.
1869년 아일랜드 국교회 폐지안 성립.
       에스파냐의 동부 대도시에서 공화주의자들 봉기.
       미국 제18대 대통령 그란트 취임(~1877). 미국 대륙횡단철도 개통.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일어남. 세당 싸움에 대패한 나폴레옹 3세 항복.
       파리에서 폭동 일어나 임시정부를 수립, 공화정 선언(제3공화정).
       이탈리아의 통일 완성.
       미국 록펠러에 의한 스탠더드 석유회사 창설.
1871년 독일제국(帝國) 성립, 빌헬름 1세 황제에 즉위(~1888).
       3월, 파리코뮌 성립, 베르사유 정부 코뮌 탄압을 시작. 파리시가전 전개로 ‘피의 1주일’ 계속.
       독일˙프랑스 강화조약 체결, 알자와 로렌 북부를 할양.
       영국에서 노동조합법 제정.
       비스마르크‘교단(敎壇)조항’에 의해 문화투쟁 시작(~1879).
       인디언 최후의 저항투쟁인 아파치족의 반란(~1886) 야기.
1872년 베를린에서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3제(帝)회담 열림.
       에스파냐에서 카를로스당(黨)의 반란(~1876) 일어남.
       인터내셔널 본부가 뉴욕으로 옮겨짐.

1873년 전년의 베를린 3제회담 결과 3제동맹 성립.
       비스마르크의‘5월법’으로, 교회 성직자의 임면˙감독권을 국가가 장악(문화투쟁).
       에스파냐 연방공화국 성립.
       유럽에 경제대공황 발생.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경제공황 발생.
1874년 독일 노동자동맹 해산.
       에스파냐의 왕정복고.
       러시아˙프랑스 통상조약 체결.
       독일에서 철강 카르텔 성립.
1875년 프랑스 제3공화정 헌법 성립.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 결성, ‘고타강령’ 채택.
       불가리아에서 대(對)터키 무장봉기.
       러시아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 수에즈운하회사의 주식 대부분을 영국에 매각.
1876년 불가리아인 대학살사건에 항의, 대(對)터키 폭동 일어남.
       이스탄불 열국회의에서 유럽 여러 나라가 양국의 관계개선안을 내놓았으나 터키가 거부. 벨기에, 중앙아프리카국제협회 설립.
       미국에서 벨이 전화 발명.
1877년 러시아-투르크전쟁 개시(~1878).
       루마니아 독립선언.
       영국 여왕 빅토리아가 인도황제를 겸직.
       멕시코에서 디아스의 독재정치 시작(~1911).
1878년 산 스테파노조약에 따라 러시아˙터키간 전쟁 끝남.
대(大) 불가리아국 건설 베를린회의 결과, 산 스테파노조약 폐기되고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 좌절.
프리즈렌연맹(알바니아연맹) 성립. 베를린회의에서의 알바니아 지역분할에 반대, 점차 독립운동으로 발전.
       토머스 제강법(製鋼法) 발명.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
1879년 독일의 보호관세법 성립.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칠레˙페루˙볼리비아와 질산칼륨 산지 둘러싸고 전쟁(~1884).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 파면.
1880년 영국에서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1885) 성립.
       프랑스에서 주르 페리 내각(~1881) 성립.
       아일랜드에서 폭동 일어남.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되고 3세 즉위(~1894).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제동맹 새로이 체결(~1887).
       세르비아˙오스트리아 간 비밀 동맹조약 체결.
       프랑스, 튀니지 획득.
       이집트에서 아라비 파샤의 민족운동.
1882년 세르비아 제후국이 왕국이 됨.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 체결.
       이탈리아, 에리트레아를 획득.
       이집트 문제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국회의 개최.
       다임러가 자동차를 발명. 미국에서 록펠러에 의해 석유 트러스트 성립.
1883년 독일과 루마니아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는 비밀동맹을 체결.      

수단에서 인후디의 반란 고조.
       제네바에서 러시아인에 의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해방단 결성.
       아후가니 등 파리에서 회교개혁연맹 결성.
       프랑스, 베트남전쟁 끝내고 안남(安南)을 보호국으로 삼음.
1884년 베를린회의, 열강이 아프리카분할을 협의(~1885).
       청불(淸佛)전쟁(~1885), 프랑스군이 10월 타이완을 봉쇄.
1885년 영국의 제1차 솔즈베리 내각(~1886) 탄생.
       벨기에 콩고 자유국을 설립.
1886년 영국에서 제3차 글래드스턴 내각 탄생했으나, 의회에서 아일랜드 자치법이 부결되자
       글래드스턴은 사임. 제2차 솔즈베리 내각 성립(~1892).
       미국 노동자총동맹(AFL) 성립.
       쿠바에서 노예제도 폐지.
1887년 독일이 군비확장 시작. 독일˙러시아 재보장조약(~1890) 체결.
       영국˙이탈리아 지중해협상 체결.
1888년 독일 황제에 빌헬름 2세 즉위(~1918).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브라질에서 노예제도 폐지로 라틴아메리카의 노예제도 끝남.
1889년 제2인터내셔널 결성(~1914).
       워싱턴에서 제1회 범(汎)아메리카회의 개최(~1890).
       브라질에서 반란 일어나, 왕제(王制) 폐지되고 공화정 성립.
1890년 비스마르크 정계 은퇴.
       제1회 국제 메이데이.
       러시아에서 지방자치법 개정, 농민이 지방의회 의원의 선거권 상실.
1891년 유럽 3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차 갱신 성립.
       러시아, 테헤란에 세계 최초의 어음할인은행 설립.
1892년 프랑스에서 파나마운하회사 의혹 사건 발생.
       영국의 제4차 글래드스턴 내각 성립(~1894).
       프랑스와 러시아 군사협정 성립.
       미국 홈스테드 파업 돌입. 철강노동조합과 카네기제강(製鋼) 쟁의.
       이집트에서 아바스2세 즉위.
1893년 독일에서 군비확장법안 성립.
       영국의 독립노동당 발족.
       하와이 왕제(王制) 붕괴.
       미국에서 경제공황 발생.
       퀴리 부부의 라듐 발견. 디젤 엔진 발명.
1894년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체결.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 발생(~1899).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즉위(~1917).
       하와이 공화국 성립.
       오타와회의 개최.
       영국의 제2차 식민지 회의.
       이집트에서 ‘조국부흥협회’ 발족.
1895년 이탈리아-에티오피아전쟁 시작(~1896).
       터키인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 발생.
       키르운하 개통.
       쿠바에서 대(對)에스파냐 반란 일어남.
       뢴트겐의 X선 발견.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발명.
1896년 크레타섬에서 반란이 확대되어 그리스군이 출동, 진압에 나섬.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 개최.
1897년 크레타섬 영유권 둘러싼 그리스-터키전쟁 발발(~1899).
       크레타섬이 영˙불˙러˙이 공동 보호관리로 터키 종주권하에서 자치령이 됨.
       미국 제25대 대통령 매킨리 취임.
       영국, 아프리카의 황금해안을 획득.
       이탈리아, 아두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에티오피아 완전 독립.
1898년 미국-에스파냐전쟁 일어났으나, 파리조약 성립으로 종결. 이 조약 체결로 쿠바는 독립,
       미국이 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를 획득. 미국, 하와이 병합.
       아프리카 분할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대립한 파쇼다 사건 발생.
       에밀 졸라,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 《나는 탄핵한다》를 발표.
1899년 제1회 헤이그 국제평화회의 개최. 한국 이준(李儁) 비밀특사 분사.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 중국의 영토보전˙기회균등˙문호개방을 선언.
       독일, 바그다드 철도 부설권 획득.
       드레퓌스 사건 재심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판결(8월)하고 9월 대통령이 특사함.
       보어전쟁 시작(~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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