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표


[기원전]

4500년 이집트에서 농경목축 생활 시작. 하(下)이집트에서 파이움 A문화. 상(上)이집트에서 타사문화 시작.
3300년 상이집트의 게르제문화기
3100년 나르메르(메네스?) 이집트 통일. 이집트 제1왕조 개시.
2600년 그리스 본토에서 초기 헬라딕시대 시작. 크레타섬에서 초기 미노아시대 시작. 트로이 제1시 건설. 이집트 제4왕조.
2400년 트로이 제2시 건설
2334년 사르곤이 아카드왕조 창시.
2154년 아카드왕조 붕괴
2112년 우르남무가 우르왕조 창시. 우르남무법전 성립.
2050년 이집트 제11왕조에 의한 통일로 중왕국시대 시작.
2004년 우르 제3왕조 붕괴.
2000년 크레타섬의 중기 미노아시대 시작. 인도˙유럽어족이 그리스에 들어와 중기 헬라딕시대 시작.
1700년 크레타섬, 미노아문명 최성기 시작(제2궁전시대).
1600년 크레타섬, 후기 미노아시대 시작. 그리스 본토에 후기 헬라딕시대(미케네시대) 시작.
1567년 이집트 제18왕조의 신왕국시대.
1400년 크레타섬, 제궁전이 파괴되고 미노아문명 쇠퇴.
1352년 이집트의 투탕카멘왕 즉위.
1200년 동지중해 연안 일대에서 해상무역 활발.
1100년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후기 헬라딕시대(미케네시대) 끝나고 암흑시대 돌입.
1000년 이탈리아반도에 인도˙유럽어족이 이주, 라틴인은 타티움평원에 정주하기 시작.
814년 페니키아인,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 식민시 건설.
776년 올림피아경기회 우승자 명단을 기록하기 시작.
753년 전설상으로는‘로마 건국의 해’
750년 그리스인 대식민지 운동 시작(~550). 폴리스 성립. 이집트 제25왕조 흥성.
720년 스파르타가 메세니아 정복.
683년 아테네에서 귀족제 성립.
600년 로마 성립.
594년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
530년 피타고라스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에서 활약.
509년 로마에서 에트루리아계의 타르퀴니우스 수페트부스왕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시작.
508년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개혁 실시(~507).
494년 로마 교외의 성산(聖山)에서 평민이 궐기하여 호민관 및 평민회 성립.
492년 페르시아전쟁 개시.
490년 마라톤의 싸움에서 그리스의 보병이 페르시아군을 격파.
484년 역사가 헤로도토스 탄생(~425경).
480년 테르모필라이의 싸움에서 스파르타군 패배.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 승리. 카르타고군 히메라의 싸움에서 대패.
477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 결성.
461년 페리클레스, 아테네 정계의 지도자로 선출됨.
460년 역사가 투키디데스 탄생.
451년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동판법 제정(~450).
438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거의 완성.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시(~404).
429년 페리클레스 사망.
428년 철학자 플라톤 탄생(~347).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결.
403년 아테네에 민주정 부활.
400년 스파르타,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와 개전.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를 마심.
395년 코린트전쟁 발발(~386). 코린트˙테베˙아테네˙아르고스가 페르시아의 개입 아래 스파르타와 대적.
386년 ‘대왕의 평화조약(안탈키다스의 조약)’으로 그리스는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귀속 승인.
367년 로마에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성립. 집정관의 1인은 평민에서 선출하고, 공유지 점유면적 500유게라로 제한.
338년 카이로네이아의 싸움에서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와 테베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를 장악. 마케도니아를 맹주로 하는 헬라스 연맹 성립.
336년 필리포스 2세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대왕 즉위(~323).
335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의 북동부에 학원 창설.
334년 알렉산드로스대왕 동정(東征) 개시.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 병사. 이후 후계자의 항쟁 격화.
312년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 건설 시작.
298년 로마 제3차 삼니움전쟁으로 이탈리아 중부 정복.
287년 로마 호르텐시우스법을 제정. 평민회의 의결을 그대로 국법으로 인정.
272년 로마, 타렌툼을 점령하여 남부 이탈리아 정복.
264년 제1차 포에니전쟁 시작. 로마와 카르타고의 싸움(~241)으로 시칠리아섬이 로마령으로 됨.
247년 시리아왕국으로부터 파르티아 독립.
218년 제2차 포에니전쟁(~201).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침입.
214년 제1차 마케도니아전쟁(~205). 마케도니아왕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 원조.
212년 아프케메데스(287~), 시라쿠사 포위 때 로마군의 칼에 죽음.
202년 자마의 싸움.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격파.
201년 제2차 포에니전쟁 종결. 카르타고 함락되고, 로마가 서지중해 패권 장악.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197). 로마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싸워 재차 승리.
192년 시리아전쟁 개시(~189). 로마가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191 페르모필라의 싸움, 190 마그네시아의 싸움).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전쟁(~167). 로마가 마케도니아왕 페르세우스를 피드나의 싸움에서 격파 (168),  왕국을 4독립지구로 분할
149년 제3차 포에니전쟁(~146), 제4차 마케도니아전쟁 발발(~146).
146년 로마, 카르타고를 격파.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음. 로마군 아카이아 동맹의 중심도시 코린트를 파괴.
135년 시칠리아섬에서 제1차 노예반란(~132).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호민관이 되어 공유지 점유면적 제한. 빈민의 토지확보를 목표로 하였으나 반대파에 의해 살해됨.
129년 로마, 페르가몬에 속주 아시아를 둠.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 호민관이 되어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유지를 이어 개혁에 착수.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 자살.
112년 유구르타전쟁(~106). 누미디아왕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항하여 반란하였으나 패배.
111년 로마에서, 농지법 성립. 공유지 소유면적 제한이 철폐되고 대토지 소유제 확대됨.
107년 마리우스 집정관이 되고, 병제개혁 시작, 국민군이 사병화됨.
104년 마리우스 집정관 연임(~101). 시칠리아섬에서 제3차 노예반란(~100) 발생.
100년 마리우스 여섯번째의 콘술이 됨. 퇴역병에게 토지 분배.
91년 이탈리아동맹시 간에 전쟁 발발(~88).
88년 로마에서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항쟁 격화됨.
73년 검노(劍奴) 스파르타쿠스의 난 발생(~71).
71년 크라수스,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
60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제1회 3두정치 개시.
58년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 개시(~51).
48년 카이사르, 파르살로스의 싸움에서 폼페이우스 격파, 폼페이우스, 이집트에서 암살됨.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원조로 이집트여왕에 보위(~30).
46년 로마에 율리우스력(曆) 도입.
44년 카이사르, 종신독재관이 됨. 카이사르,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됨.
43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회 3두정치.
42년 필리피의 싸움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루투스, 카시우스 격파.
31년 악티움의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격파.
30년 옥타비아누스, 이집트를 정복.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자살하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멸망.
27년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속주(屬州) 지배의 분장(分掌)을 결정.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음. 원수제(元首制)의 개시.

[기원 후]
9년  로마, 토이토부르크의 싸움에서 게르만에 패하여 게르마니아 진출 포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죽고, 티베리우스 즉위(~37)하여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에 의한 제위세습(帝位世襲)이 고정됨.
37년 티베리우스 죽고, 칼리굴라 즉위(~41).
41년 칼리굴라 살해되고, 클라우디우스 즉위(~54).
43년 브리타니아, 로마의 영토로 됨.
54년 클라우디우스, 왕비 아그리피나에게 살해되고 그녀의 아들 네로가 즉위(~68).
59년 네로, 모후 아그리피나를 살해.
60년 바울, 로마에서 전도.
64년 로마에 대화재 발생. 네로, 방화죄로 그리스도교인 박해 시작. 베드로, 바울 순교.
65년 네로에 의해 철학자 세네카 죽음.
68년 로마에 내란 일어나, 네로 자살.
69년 베스파시아누스,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79). 플라비우스왕조 시작.
79년 베스파시아누스 죽고, 티투스 즉위(~81). 베수비오산의 화산 폭발로 폼페이, 헤로쿨라네움, 스타비아에가 매몰.
81년 티투스 죽고, 도미티아누스 즉위(~96).
96년 도미티아누스 암살되고, 원로원의원 네르바 즉위하여 5현(五賢)시대(~180) 시작.
98년 네르바 죽고, 트라야누스 황제 즉위(~117). 그의 치세에 로마제국의 판도가 최대로 확장.
106년 트라야누스, 데케발루왕을 격파하여 다키아(현 루마니아)를 직할령으로 복속.
114년 트라야누스, 파르티아에 원정하여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를 병합.
115년 트라야누스, 원정의 귀로에 킬리키아에서 죽고, 하드리아누스 즉위(~138).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포기.
124년 로마의 판테온 신전, 공사 완료.
138년 하드리아누스 죽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즉위(~161).
15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리스도교도의 보호령을 반포.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죽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즉위(~180).
162년 아르메니아 문제로 로마와 파르티아가 싸워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 함락.
165년 파르티아에서부터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여 이탈리아, 라인지방의 인구 격감(~167).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죽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 즉위(~192). 오현제(五賢帝)시대 종막.
192년 코모두스, 나르키수스에 암살되고, 4황제가 난립하여 혼란이 계속(~193).
193년 세베루스가 군대의 옹립으로 황제에 즉위. 친위군(親衛軍)을 개혁하고, 지방군단을 중시.
194년 세베루스,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크테시폰을 함락(~197).
211년 세베루스가 죽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가 즉위(~217)하여 동생 게타와 공동통치.
212년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암살. 카라칼라, 안토니누스칙법을 발포. 제국의 전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
217년 카라칼라, 대욕장 완성. 마크리누스, 카라칼라를 암살하고 즉위.
218년 엘라가발루스, 마크리누스를 살해하고 즉위.
222년 엘라가발루스 살해되고, 세베루스 알렉산드르 즉위.
231년 세베루스 알렉산드르와 어머니 마마에아가 살해되어 세베루스왕조 단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제위에 추대되어 군인황제시대 개막.
240년 게르만인의 침입 격화.
249년 테키우스황제, 그리스도교도를 크게 박해(~251).
260년 발레리아누스황제, 사산왕조군의 포로가 됨.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즉위(~305).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즉위(~305).
286년 막시미아누스, 제2정제(正帝:아우구스투스)에 임명.
293년 콘스탄티우스와 칼레리우스가 각각 제1, 제2 부제(副帝:카이사르)에 임명되어 로마제국의 4분통치 시작.
303년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최후의 대박해 시작(~306).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가 정제(正帝)로        즉위.
306년 콘스탄티우스 죽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337).
311년 갈레리우스제(帝),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 중지령 공포.
313년 콘스탄티누스, 동부황제 리키니우스와 회견하고 밀라노의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 공인.
325년 니케아종교회의.
330년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
337년 콘스탄티누스 죽고, 콘스탄티우스 등 세 아들에 의해 공동통치.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단독통치.
363년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 사산왕조와의 싸움에서 전사.
375년 서고트가 로마 영내에 이동,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작.
395년 테오도시우스 죽고, 제국의 동부를 그의 큰아들 아르카디우스(~408)가, 서부를 작은아들 호노리우스(~423)가 계승하여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
410년 서고트의 족장 알라리크가 로마에 침입하여 대약탈을 자행. 알라리크는 아프리카로 진격 중에 급사.
415년 히스파니아에 서고트왕국 성립(~711).
429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건너가 반달왕국을 건설(~534).
443년 론강 상류 유역에 부르군트족이 왕국을 건설(~534)
449년 앵글로족, 색슨족, 주트족이 브리타니아에 침입하여 정착.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부정. 카탈라우눔의 싸움에서 서로마의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훈군을 격파.
452년 아틸라의 훈군이 이탈리아에 침입, 로마 주교 레오 1세가 아틸라와 회견.
453년 아틸라가 죽고, 그의 제국도 급속히 붕괴됨.
471년 테오도리쿠스, 동고트왕이 됨(~526).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481년 프랑크의 클로비스 즉위(~511). 메로빙거왕조의 성립(~751).
493년 테오도리쿠스,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이탈리아에 동고트왕국 건설(~553).
502년 동로마제국이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와 개전(~507).
507년 부이예의 싸움.
511년 클로비스왕이 죽고(481~), 프랑크왕국이 네 아들에 의해 분열.
527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가 즉위(~565). 유스티아누스왕조 시작(~610).
529년 《로마법대전》의 편찬 시작(~534). 유스티아누스 1세 아테네학원(아카데메이아) 폐쇄. 동로마에 사산왕조의 페르시아 침입(~532).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 카시노에 수도원을 건립. 베네딕트 수도회의 시작.
534년 부르군트왕국 멸망(443~), 프랑크왕국에 병합.
540년 동로마제국이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와 싸워,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를 정복.
553년 동고트왕국 멸망(493~), 동로마제국령이 됨.
558년 클로타프 1세 즉위(~561), 프랑크왕국 재통일.
568년 랑고바르트족이 북이탈리아를 정복하여 랑고바르트왕국 성립(~774).
572년 동로마제국이 사산왕조의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아르메니아를 탈환.
580년 프랑크왕국의 3분국(아우스트라시아, 노이스트리아, 부르군트)이 고정되고, 각 분국에서는 궁재(宮宰)의 권력이 강대해짐
590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604), 교황권이 확립됨.
597년 로마인의 전도사 아우구스티누스가 잉글랜드에 파견되어 가톨릭을 포교.
601년 캔터베리 대사제(大司祭)제도 실시.
603년 동로마제국,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음.
610년 동로마의 황제 헤라클리우스, 1세 즉위(~641).
616년 동로마제국, 페르시아에 이집트를 빼앗김.
622년 헤라클리우스 1세, 페르시아를 공격하여(~629)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를 탈환.
625년 잉글랜드에서 노섬브리아왕국이 켄트왕국을 병합.
626년 페르시아와 아바르족이 공격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에서 패퇴.
636년 야르무크의 싸움에서 동로마제국이 사라센군에 패하여 시리아 지방을 상실.
638년 동로마제국, 사라센군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김.
649년 키프로스섬이 사라센군에 점령됨.
673년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센군에 포위되었으나(~678), ‘그리스 불[火]’의 사용으로 이를 격퇴.
679년 불가리아인(人)이 도나우강 남안에 왕국을 건설.
697년 베네치아에서 도제(徒弟)제도 시작.
710년 사라센군이 탄제르를 점령, 이로써 북아프리카의 정복 완료.
711년 타리크가 이끄는 사라센군에 의한 이베리아반도의 정복 시작.
713년 사라센인의 정복에 의하여 서고트왕국 멸망(466~).
717년 동로마의 황제에 레오 3세 즉위(~741). 이사두리우스왕조의 시작(~867).
726년 동로마의 황제 레오 3세가 성화상예배(聖畵像禮拜)를 금지.
732년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싸움.
751년 랑고바르트족(族)이 라벤나를 점령. 피핀이 프랑크 국왕으로 즉위(~768). 카롤링거왕조의 성립(~987).
754년 로마교황 스테파누스 2세(752~757)가 피핀을 승인.
756년 피핀이 랑고바르트족을 격파하여 라벤나와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기증하여 로마교황령이 성립.
768년 피핀이 죽고, 그의 카를(1세)과 카를만이 프랑크왕국을 분할하여 통치.
771년 카를만이 죽고, 카를이 프랑크왕국을 통일.
774년 카를이 랑고바르트왕국(568~)을 정복하고 랑고바르트왕을 겸임.
787년 제2회 니케아공의회. 동로마제국의 섭정 이레네가 성화상숭배 금지를 해제.
788년 모로코에 이도리스왕조 성립(~974).
800년 카를이 교황 레오 3세(795~816)로부터 로마황제의 제관(帝冠)을 받음. 튀니지 지방에 아글라브왕조 일어남(~909).
801년 카를대제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에스파냐 변경백(邊境伯)을 둠.
802년 잉글랜드에 웨식스왕조의 에그버트왕이 즉위(~839).
811년 비르비처의 싸움. 동로마의 황제 니케포루스 2세(802~)가 불가리아인(人)과 싸워 패사함.
814년 카를대제 죽고, 루트비히 1세(敬虔王) 즉위(~840).
820년 노르만인이 아일랜드에 왕국 건설.
827년 아글라브왕조의 사라센군이 시칠리아를 공격. 팔레르모를 점령한(~831) 후 계속하여 정복(~902).
829년 웨식스왕조의 에그버트왕이 7왕국을 통일하여 잉글랜드왕국 성립.
840년 루트비히 1세 죽고, 세 아들 로타르, 루트비히, 카를 사이에 상속분쟁이 시작.
843년 베디 조약. 프랑크왕국이 중부 프랑크(로타르)˙동프랑크(루트비히)˙서프랑크(카를)로 3분됨.
862년 노르만인인 루스족의 족장 류리크가 러시아에서 노브고로트왕국을 건설(전승).
867년 동로마의 황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886)하여 마케도니아왕조 시작됨(~1081).
868년 이집트에 투룬왕조 일어남(~905).
870년 메르센조약. 중부 프랑크왕국이 동서의 양 프랑크왕국에 분할됨(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기원). 세트포드의 싸움. 노르만인이 이스트 앵글리아를 정복.
871년 잉글랜드의 알프레드대왕 즉위(~901).
872년 하랄 1세(~930경)가 노르웨이를 통일.
888년 부르군트왕국 성립(~1032). 옴미아드왕조의 압둘라 즉위.
894년 마자르인(人), 헝가리에 이주.
898년 마자르인이 독일˙이탈리아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
906년 마자족이 모라비아왕국을 멸함.
909년 튀니지아에 아글라브왕조 멸망하고, 우바이드라가 파티마왕조를 창건(~1171).
911년 노르망디공국(公國)의 창립. 서프랑크왕이 노르만인의 수장(首長) 롤로를 노르망디공(公)으로 봉하여 노르망디 지방을 수봉(授封)함. 동프랑크의 카롤링거왕조 단절되고 프랑켄대공(大公) 콘라트 1세가 독일국왕에 즉위(~918).
914년 이베리아반도에 레온왕국 성립(~1230). 이후, 옴미아드왕조와의 항쟁이 격화.
917년 불가리아인(人)이 동로마제국을 공격하여 트라키아와 그리스를 점령(~919).
919년 독일국왕에 하인리히 1세 즉위(~936). 작센왕조 성립(~1024).
937년 마자르인이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공격.
945년 하랄왕 즉위하고(~985), 덴마크 통일.
951~52년 독일왕 오토 1세가 제1회 이탈리아 원정을 하여 이탈리아왕을 겸임.
955년 레히펠트의 싸움에서 오토 1세가 마자르인을 격퇴하고 레크니츠의 싸움에서 슬라브인을 격퇴.
962년 신성로마제국 성립(~1806). 교황 요한 12세(955~964) 오토 1세에게 황제의 제관(帝冠)을 수여.
969년 파티마왕조가 이흐시드왕조를 멸하고 알카히라(현 카이로)를 건설.
987년 서프랑크의 카롤링거왕조 단절되고, 프랑스국왕에 유구 카페가 즉위(~996)하여 카페왕조 성립(~1328).
1014년 데인족이 런던을 점령.
1015년 노르만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
1016년 덴마크왕 쿠누드가 잉글랜드왕이 됨(~1035). 데인족에 의한 잉글랜드 지배 시작(~1042).
1018년 불가리아의 제1왕국 멸망하여(679~) 동로마제국에 병합. 폴란드인이 키예프 점령.
1028년 크누드왕이 노르웨이 정복.
1031년 에스파냐의 옴미아드왕조 멸망. 소국난립시대 시작. 그리스도교 세력에 의한 국토회복 운동이 시작됨.
1034년 부르군트왕국(888~)이 독일제국에 병합.
1042년 잉글랜드왕에 에드워드가 즉위(~1066). 앵글로색슨의 왕족 부활. 세르비아인이 동로마제국에서 독립하여 제1세르비아왕국 성립.
1054년 로마교황이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를 파문. 동서 양 교회가 결정적으로 분열됨.
1059년 로마교황 선거규정 성립. 속권(俗權)의 간섭이 배제되는 추기경회의에 의한 선거.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인이 로마교황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맺음.
1061년 노르만인의 시칠리아섬 정복이 시작. 도시에 길드가 결성되기 시작.
1064년 파티마왕조기에 나일강 범람으로 대기근 발생(~1072). 왕조 쇠퇴 시작.
1066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헤이스팅스의 싸움에서 해럴드왕을 격파하고 잉글랜드왕에 즉위(윌리엄 1세:~1087). 노르만왕조 성립.
1076년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廢位)를 선언.
       그레고리우스 7세도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함. 성직서임권의 투쟁 시작됨.
1077년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4세 교황에게 굴복, 파문에서 해제됨.
1086년 모로코의 무라비트왕조(~1147) 에스파냐의 사라센 영토를 정복, 이베리아반도 지배.
1096년 제1회 십자군 원정 출발, 콘스탄티노플에 진출. 제노바공화국 성립.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 예루살렘왕국 건설(~1291).
1106년 모로코의 무라비트왕조 세비야 점령.
1119년 시리아에서 신전기사단(神殿騎士團) 성립.
1122년 보름스의 협약. 황제가 교황에게 양보하여 성직임명권의 문제해결.
1130년 노르만인에 의한 양 시칠리왕국 성립. 압둘 무민 북아프리카에 무와히드왕조 창건(~1269).
1145년 무와히드왕조의 압둘 무민,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지역 지배.
1147년 제2회 십자군 원정(~1149). 포르투갈왕국이 리스본을 점령. 무와히드왕조의 압둘 무민 모로코의 무라비트왕조를 멸함.
1154년 영국왕 헨리2세 즉위(~1188). 플랜태저넷왕조 시작(~1399).
1157년 프리드리히 1세와 롬바르디아 제도시와의 싸움 시작. 브란덴베르크 변경백(邊境伯)의 영토 성립(후일의 프로이센).
1158년 무와히드왕조 튀니지에서 노르만인 축출,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대세력 형성.
1164년 헨리2세의 클래런던법(法) 제정. 주교에 대한 국왕의 재판권 확립.
1167년 롬바르디아 도시동맹 결성. 옥스퍼드대학 성립.
1171년 이집트의 파티마왕조 멸망. 재상(宰相)이었던 살라딘, 아이유브왕조를 창건(~1250).
1174년 살라딘,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출발하여 다마스쿠스 점령. 이후 시리아˙메소포타미아의 태반을 정복.
1176년 레냐노의 싸움. 롬바르디아 도시동맹군이 프리드리히1세의 황제군을 격파.
1183 콘스탄츠의 화의(和議).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이 프리드리히1세에 승리하여 자치권을 획득.
1189년 제3회 십자군 원정(~1192). 영국왕 리처드1세 즉위(~1199).
1190년 독일왕 하인리히6세 즉위(~1197). 독일기사단 성립.
1191년 십자군, 아콘 점령.
1198년 인노켄티우스 3세 교황에 오름.
1199년 영국의 존왕 즉위(~1216).
1202년 제4회 십자군 원정(~1204).
1204년 동로마제국 멸망. 라틴제국으로서 니케아제국 성립(~1261). 베네치아공화국 동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점령. 프랑스왕 필리프 2세 대륙에 있는 노르망디˙메인˙앙주˙푸아투 등의 영국 봉토를 몰수.
1207년 존왕, 캔터베리 대주교의 선출을 둘러싸고 로마교황과 대립.
1209년 케임브리지대학 설립. 옥스포드대학의 일부 교사˙학생 이주.
1210년 존왕 파문. 프란체스코수도회 성립.
1212년 라즈 나바즈의 싸움. 카스티야왕조군이 이베리아반도의 라즈 나바즈에서 무와히드왕조의 사라센군을 격파(국토회복운동). 소년십자군 성립.
1213년 존왕 인노켄티우스 3세에 굴복. 존왕이 영국의 전국토를 로마교황의 봉토로 받아들임.
1214년 부빈의 싸움. 프랑스왕 필리프2세가 영국의 존왕과 독일의 오토4세(1208~1215) 격파.
1215년 존왕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승인. 존왕이 귀족˙시민의 요구로 서명. 독일의 프리드리히2세 즉위(~1250).
1216년 도미니크 수도회 승인.
1228년 제5회 십자군 원정(~1229).
1230년 카스티야왕국이 레온왕국을 병합.
1235년 무와히드왕조군 이베리아반도에서 철수. 북아프리카에서도 왕조의 쇠운 시작.
1236년 카스티야왕국이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를 점령(국토회복운동).
1238년 에스파냐에서, 사라센인의 나스르왕조가 그라나다왕국을 설립(~1492). 아라곤왕국 발렌시아 점령(국토회복운동).
1241년 발슈타트의 싸움. 네덜란드˙독일의 연합군 몽골군에게 패함. 한자동맹의 성립. 독일의 함부르크와 뤼베크의 양 시가 뤼베크를 맹주로 하는‘상인조합’을 결성. 몽골군 폴란드˙헝가리에 침입.
1243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러시아 지방에 킵차크한국을 건설(~1502).
1248년 제6회 십자군 원정(~1254). 카스티야왕국이 세비야를 정복(국토회복운동). 프리드리히 2세가 롬바르디아 도시동맹과 싸워 패함.
1254년 독일에서 대공위(大空位)시대 시작(~1273). 라인동맹 성립.
1261년 동로마제국의 미카엘 8세(팔라에올로구스)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고 라틴제국을 멸함. 팔라에올로구스왕조의 시작(~1453).
1265년 영국의회 성립. 시몽 드 몽포르 의회 소집. 에스파냐의 아라곤왕 무르시아 점령(국토회복운동).
1269년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무어족)의 말린왕조 무와히드왕조의 수도 말라케시를 점령.
1270년 제7회 십자군 원정(~1272).
1271년 마르코폴로 동방으로 여행(~1295).
1273년 독일왕에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 1세 즉위(~1291). 대공위시대(1254~) 끝남.
1282년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지배 시작. 일한국에서 아흐마드 즉위(~1284), 이슬람교도가 됨.
1284년 아라곤왕국이 시칠리아를 병합. 영국의 에드워드 1세, 웨일스를 병합.
1291년 시리아의 십자군 궤멸, 아콘에서 철수함으로써 십자군전쟁 끝남. 스위스의 연방(聯邦) 성립. 우리˙슈비츠˙운테르발덴 3주(州)의 영구동맹.
1295년 영국, 에드워드 1세의 모범의회 성립.
1296년 프랑스왕 필리프 4세의 국내 교회령(敎會領)에 대한 과세문제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싸움 시작.
1297년 영국의 에드워드 1세, 의회의 과세승인권을 인정.
1302년 프랑스에서 삼부회(三部會) 탄생.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 회칙(回勅) ‘우남 상탐(유일하게 거룩하다)’을 발표.
1303년 아나니사건 발생. 로마교황 보니파티우스8세, 아나니성(城)에서 체포되어 분사(憤死). 이집트 맘루크왕조가 시리아 방면에서 일한국을 쳐부숨.
1304년 단테 《신곡(神曲)》 집필 시작.
1305년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1314), 프랑스 국왕에 의해 프랑스 아비뇽에 연금.
1309년 교황의 아비뇽 유폐(~1377).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지고, 대립교황(對立敎皇)시대로 들어감.
1312년 프랑스에서 신전기사단해산. 국왕이 기사단의 소유재산을 몰수.
1313년 단테 《신곡(神曲)》을 완성. 1321년 사망 직전 퇴고 완료.
1320년 폴란드왕국 성립. 폴란드 제후(諸侯) 통합.
1321년 단테 사망(1265~).
1325년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 세계일주여행 나섬.
1328년 프랑스에서 바로아왕조 시작(~1497). 러시아에서 이반 1세가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 창건.
1330년 루마니아인의 바라비아 공국(公國) 헝가리로부터 독립.
1331년 세르비아왕에 스테반 두샨 즉위(~1355). 발칸반도 전역 패권 장악.
1337년 영국-프랑스 백년전쟁(百年戰爭) 시작(~1453).
1338년 렌제의 선제후(選帝侯) 회의, 독일(신성로마)황제 선거에 있어 교황의 심사˙허가 등이 불필요함을 천명.
1343년 영국 의회가 상˙하 양원으로 분리.
1344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출간.
1346년 크레시의 싸움. 영국의 에드워드 흑태자(黑太子) 프랑스군을 격파(백년전쟁). 페스트(黑死病)가 서아시아˙이집트 지방에 창궐(~1349).
1347년 영국군이 칼레를 점령(백년전쟁). 독일에서 룩셈부르크왕조 성립. 유럽 각지에서 페스트 대유행.
1349년 영국 에드워드 3세가 ‘노동자포고령’발표. 루마니아인의 몰도바 공국(公國) 성립.
1356년 카를4세 ‘금인칙서(金印勅書)’ 발표. 7인의 선제후를 확정. 대제후의 영방군주권(領邦君主權) 확립. 푸아티에의 싸움. 영국군이 프랑스왕을 포로로 삼음(백년전쟁).
1357년 오스만투르크, 가리폴리 점령, 발칸반도 진출을 시작.
1358년 북프랑스에서 에티엔 마르셀의 무장봉기, 자크리의 농민폭동 일어남.
1360년 브레티니의 화약(칼레조약) 성립. 백년전쟁 일시 휴전상태에 들어감.
1361년 한자동맹군이 덴마크왕 바르데마르4세와 전쟁을 시작(~1370).
1369년 백년전쟁 재개됨.
1370년 스토라슨드조약 체결. 한자동맹과 덴마크왕과의 강화 성립으로, 한자동맹의 특권을 인정.
1371년 마리차강(江) 등의 싸움에서, 오스만투르크군이 세르비아에 대승, 마케도니아에 침입.
1376년 존 위클리프의 종교개혁 시작.
1377년 교황의 아비뇽 유폐 끝남(1309~).
1378년 로마교회의 분열(시스마) 시작.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 병립 상태 지속(~1417). 영국에서 위클리프의 로마교회(교황) 비판 시작.
1380년 위클리프가 성서를 영역(英譯)해 냄.
1381년 영국에서 와트 테일러의 농민반란 일어남.
1382년 이집트에서 알 자히르 바루쿠크, 부르디 맘루크왕조를 창건(~1517).
1385년 크라쿠프(크라카우)조약 체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통합.
1389년 코소보의 싸움에서 오스만투르크가 발칸연합군을 대파, 사실상 터키의 발칸 지배가 시작됨. 무라드 1세 죽고, 바야지드1세 즉위(~1403). 덴마크가 스웨덴을 병합.
1393년 오스만투르크 불가리아를 정복, 속령으로 삼음.
1396년 니코폴리스의 싸움. 오스만투르크 헝가리군 무찌르고 발칸 정복완료.
1397년 칼마르연맹 체결. 북유럽 3국이 덴마크에 통합(~1523).
1399년 영국에서 랭커스터왕조 시작됨(~1461).
1404년 후스가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어(~1409) 종교개혁을 제창.
1410년 파문.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公議會:~1417), 교회 대분열(시스마) 종결.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 화형에 처함.
1415년 아쟁쿠르의 싸움.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대파(백년전쟁). 엥리케 항해왕이 카나리아제도에 탐험대를 파견. 교회 대분열 종식(1378~).
1419년 후스전쟁 일어남(~1436:보헤미아전쟁).
1420년 트루아의 화약(和約), 부르고뉴˙파리˙북프랑스 제후들, 영국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함.
1422년 백년전쟁 재개.
1428년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이 오를레앙성(城) 공격(백년전쟁).
1429년 잔 다르크 오를레앙성의 포위망을 해체(백년전쟁).
1431년 잔 다르크, 화형에 처해짐.
1434년 코시모디 메디치의 피렌체 지배 시작(~1464).
1435년 아라곤왕가와 프랑스의 앙주가(家) 나폴리 왕위를 둘러싸고 싸움(~1442).
1436년 후스전쟁 끝남(1419~).
1438년 프랑스왕 샤를7세(재위 1422~61)에 의한 부르주의 정교칙령(政敎勅令) 발표. 갈리카니슴(교황권을 제한시키려 했던 운동)을 주창.
1439년 피렌체에서 동서 양교회 합동 종교회의 열림.
1443년 알바니아인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터키와 대항(~1478).
1445년 포르투갈 탐험대, 아프리카 서안 기니아의 벌데곶(串)까지 도달.
1449년 제2차 코소보의 싸움에서 무라도 2세, 후니야디를 무찌르고 남슬라브에서의 헝가리 패권에 종지부를 찍음.
1450년 포르미니의 전투.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대승(백년전쟁). 독일인 구텐베르크 활자인쇄를 실시.
1453년 동로마(비잔틴)제국 멸망. 오스만투르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백년전쟁 종료(1337~).
1454년 로디의 화약(和約) 성립. 메디치가(家)˙스포르차가(家)˙로마교황 등이 참여.
1455년 장미전쟁 발발(~1485).
1461년 영국에서 요크왕조 시작(~1485).
1462년 이 2세가 모스크바 대공(大公)이 됨(~1505).
1469년 로렌초 디 메디치(마니피코)의 피렌체 지배 시작(~1492).
1474년 이사벨라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됨(~1504).
1475년 크림한국(汗國:크리미아), 터키의 보호하에 들어감.
1477년 난시의 전투로 부르고뉴공(公) 패사(敗死). 합스부르크가(家), 부르고뉴를 영유.
1479년 에스파냐왕국 성립. 아라곤왕에 페르난도가 즉위(~1516),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왕국이 통합.
1480년 모스크바 공국(公國)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
. 이반 3세가 깁차크한국(汗國)을 멸함(1243~).
1481년 에스파냐에서 이단(異端)심문 시작.
1482년 포르투갈인, 콩고강 어귀를 점령. 유럽인의 아프리카 진출 시작.
1485년 장미전쟁 끝나고(1455~), 튜더왕조 시작(~1603).
1486년 인도에서 비자야나가르왕국 제2왕조 시작.
1488년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喜望峰)에 도달(발견).
1492년 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 서인도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신대륙의 발견). 에스파냐가 이베리아반도의 그라나다를 함락, 최후의 이슬람국가 나수르왕조 멸망. 알렉산드르 6세가 교황이 되어(~1503) 그의 일문 보르디아가(家)가 로마 지배권을 장악.
1493년 콜럼버스, 제2차 항해.
1494년 피렌체로부터 메디치가(家) 추방되고, 설교사(說敎師)인 사보나롤라의 지도하에 공화정(共和政) 성립. 프랑스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를 요구하며 이탈리아를 침공. 이후 이탈리아에서 전란 계속됨(~1559).
1495년 보름스 국회 개회. 독일의 영구평화 선포, 제국세(帝國稅)의 결정,  제국대심원(帝國大審院) 설치.
1497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제1차 항해. 존(조반니) 카보트 케이프˙브레튼섬과 뉴펀들랜드 등 발견.
1498년 바스코 다 가마 인도항로 발견. 콜럼버스의 제3차 항해. 프랑스에 바로아 오를레앙왕조 성립(~1589).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완성.
1499년 프랑스왕 루이 12세(재위~1515), 밀라노 정략. 슈바벤전쟁. 오스트리아가 스위스동맹과 싸우고, 바젤화약(和約)에서 스위스의 독립을 승인.
1500년 카브랄이 브라질 발견.
1501년 아메리고 베스푸치 제3차 탐험항해. 브라질 동해안을 탐험 남하.
1502년 바스코 다 가마의 제2차 인도항해. 콜럼버스의 제4차 항해. 온두라스로부터 자메이카에 이름. 아메리카 에스파냐령에서 흑인노예 수입 시작.
1503년 그리스 터키령이 됨.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제4차 항해. 항해 후 《신세계》를 발표.
1505년 포르투갈 초대 인도총독 아르메이다 부임. 비자야나가르 제3왕조 시작.
1508년 캄브레이동맹(~1510) 결성. 신성로마 황제, 로마교황, 프랑스˙에스파냐 왕들에 의한 대(對)베네치아 동맹.
1509년 에스파냐인 데 레온이 푸에르토리코를 정복(~1511). 포르투갈, 맘루크 해군을 격파하고 인도양 일대 제압. 포르투갈의 인도총독으로 알부케르케 취임(~1515).
1510년 포르투갈이 고아를 점령.
1511년 로마교황˙베네치아˙스위스˙영국˙에스파냐 등에 의한 대(對)프랑스동맹 결성. 베라스케스 쿠바를 정복.
1513년 에스파냐인 발보아 파나마 횡단, 태평양 연안에 이름(태평양 발견). 데레온 플로리다 탐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 출간.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출간.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일어남.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시작. 
       셀림 1세, 카이로 점령. 맘루크왕조 멸망, 술탄 칼리프제 성립.
1519년 라이프치히의 토론. 루터와 에크의 논쟁 벌어짐.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에 의한 종교개혁 추진.
       에스파냐왕 카를로스 1세(1516~)가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1556)가 됨.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 시작.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길에 오름(~1522).
1520년 루터 3대논문 발표. 교황의 파문장(破門狀) 불태워 버림. 마젤란이 대륙의 남단 마젤란해협을 통과.
1521년 독일 보름스국회 열려 프로테스탄트를 금지, 루터 추방.
       T.민처 등 재세례파(再洗禮派)의 난(~1522). 뮌처는 결국 처형(1525).
       독일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전쟁(~1526).
       에스파냐인 코르테스 아스테크왕국을 점령.
1522년 독일에서 기사(騎士)전쟁(~1523).
1523년 스웨덴의 독립. 구스타프 바사왕 즉위(~1560).
1524년 독일에서 농민전쟁 일어남(~1525).
1526년 제1회 슈파이어 국회, 교회문제를 제후 및 제국(帝國)도시의 결정에 위임.
1527년 영국왕 헨리 8세(재위 1509~47)가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싸움 벌어짐(~1529).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국회, 전회의 결정(1526)을 철회,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황제에 항거. 제노바공화국 성립.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국회, 멜랑히톤에 의한 루터파의‘아우구스부르크 신조(信條)’성립. 신구교의 제후들 결렬.
1531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슈말카르텐 동맹을 결성. 에스파냐인 피사로가 잉카제국(帝國) 정복을 시작(~1533).
1533년 모스크바 대공(大公) 이반4세(雷帝) 즉위. 피사로,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 잉카제국 완전 정복.
1534년 영국왕 헨리 8세 수장령(首長令)을 공포. 영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분리.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수도회 예수회(會) 창설. 밀라노 공국(公國)이 에스파냐 지배하에 들어감.
1536년 J.칼뱅이 제네바에 머무르며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를 저술, 발표. 영국에서 수도원 해산(~1540).
1538년 칼뱅 제네바에서 추방됨.
1540년 최초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 교황으로부터 공인을 받음.
1541년 칼뱅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킴. 신재정치(神裁政治)의 시작.
       터키군이 헝가리를 완전정복.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발표. 에스파냐가 인도신법(新法)을 공표, 인디언의 노예화를 금지.
1545년 트리엔트 종교회의 열림(~1563).
1547년 러시아의 이반 4세, 차르로 호칭.
1550년 영국에서 케트의 반란 일어남.
1552년 프랑스왕 앙리 2세(재위 1547~59)가 베츠˙툴르˙벨댕의 3개 주교구를 프랑스령으로 삼음으로써, 프랑수아 합스부르크가(家)의 전쟁 시작(~1559).
1554년 영국 여왕 메리(재위 1553~58)가 가톨릭의 에스파냐 왕자와 결혼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킴.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宗敎和議) 성립, 루터파(派)가 공인됨.
1556년 독일황제˙에스파냐왕 카를 5세 퇴위.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에스파냐로 분립, 에스파냐왕에 필리페 2세 즉위(~1598).
1558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 즉위(~1603). 네덜란드에서 대귀족들이 에스파냐 국왕의 전제(專制)에 저항하기 시작.
1559년 엘리자베스여왕‘국가수장령(國家首長令)’을 부활, ‘통일령(統一令)’을 제정. 프랑스˙에스파냐 간에 카토 캄부레시 화약(和約) 성립.
1560년 프랑스 궁정 내에서 신˙구 양교파의 대립 격화. 스코틀랜드의 신교도가 장로교파를 조직, 영국 여왕과 제휴.
1562년 프랑스에서 위그노전쟁 일어남(~1598).
1564년 미켈란젤로 사망. 셰익스피어 탄생.
1565년 러시아 이반 뇌제(雷帝) 황제지배권을 창안(~1572). 네덜란드의 귀족˙상인들이 브뤼셀에서 귀족동맹을 결성, 에스파냐에 대항.
1567년 네덜란드 독립전쟁 시작(~1648). 스코틀랜드여왕 메리 영국으로 망명, 엘리자베스여왕에 의해 체포.
1569년 토스카나 대공국(大公國) 성립. 피렌체의 메디치가(家)가 대공이 됨. 폴란드에 공화정(共和政)왕국 성립.
1570년 생제르맹의 화약(和約) 성립, 위그노전쟁 일시 휴전. 영국인 드레이크 서인도제도로 항해(~1572).
1571년 레판토의 해전.
1572년 성(聖)바르톨로메오의 학살사건
으로 인해 위그노전쟁 재개. 예수회가 신대륙 선교를 시작.
1574년 브라질에서 흑인노예의 수입 시작.
1577년 영국인 탐험가 드레이크, 세계일주 항해길에 나섬(~1580).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
1579년 네덜란드 북부 7개주 유트레히트동맹 결성(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일환).
1580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합병을 단행(~1640).
1581년 네덜란드 독립을 선포. 북부 7개주 연방공화국 형성.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재위 1572~85) 역법(曆法)개정. 그레고리우스력의 성립.
1583년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흔들이의 등시성(等時性) 발견.
1584년 영국인 롤리 북아메리카 버지니아에 식민(植民). 네덜란드 통령(統領) 빌렘 암살당함.
1587년 아일랜드여왕 메리 처형.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 영국 해군에 대패, 해상권 상실.
1589년 프랑스의 발루아 오를레앙왕조(1498~) 단절. 나바르왕 앙리4세(~1610) 부르봉왕조 시작(~1830). 러시아 모스크바에 동방정교회의 총주교좌(總主敎座) 설치.
1593년 프랑스왕 앙리 4세, 가톨릭으로 개종.
1595년 러시아에서 카자크의 대반란(~1596).
1598년 ‘낭트칙령(勅令)’ 발함.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 인정하고 위그노전쟁 종결.
        러시아의 뤼뤼크왕조 단절, 보리스 고두노프 황제에 선출됨(~1605).
1600년 영국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설립.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
1603년 엘리자베스 1세(1558~) 사망.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제임스 1세)으로 즉위(~1625). 스튜어트왕조 시작.
       프랑스인 샹플랭 세인트로렌스강 탐험.
1604년 러시아 동란(動亂)의 시대(~1613). 프랑스의 동인도회사 설립.
1606년 영국 가톨릭교도 탄압 법령 제정.
1607년 영국 버지니아 식민지의 재건 시작(제임스타운 건설).
       네덜란드인, 뉴네저란드(후의 뉴욕) 식민지를 건설.
       프랑스왕 상플랭, 퀘벡시를 건설.
1611년 스웨덴왕에 구스타프 아돌프 즉위(~1632). 왕권을 강화, 각지에서 전쟁을 벌임(~1629).
1613년 러시아황제에 미하일 로마노프 선출(~1645).
1614년 프랑스 삼부회(三部會) 소집(이후, 1789년까지는 소집되지 못함).
       영국인 스미스, 뉴잉글랜드를 탐험.
1616년 셰익스피어 사망.
1618년 독일에서 30년전쟁 시작(~1648).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프로이센공령(公領)을 병합.
1619년 네덜란드인이 버지니아에 흑인노예를 수입. 노예수입의 시작.
1620년 와이센베르크의 싸움. 베멘의 신교도 황제군에 패하고 국외로 도망(30년전쟁의 지속).
       메이플라워호(號)의 ‘필그림파더스’ 플리머스에 상륙.
1621년 네덜란드가 서인도회사 설립. 네덜란드의 대(對)에스파냐 독립전쟁 재개.
1624년 프랑스에서 리슐리외 재상(宰相)이 됨(~1642).
1625년 덴마크왕 크리스티앙4세가 30년전쟁에 참가. 30년전쟁 제2기 돌입(30년전쟁).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 ‘전쟁과 평화의 법’을 공표.
1628년 영국 의회 국왕에게‘권리청원(權利請願)’제출.
       영국의 허베이, 혈액순환의 법칙을 발표.
1629년 영국이 신대륙에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개척. 영국 국왕 찰스 1세, 의회를 해산(~1640).
1630년 스웨덴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30년전쟁에 개입. 보스턴시 건설.
1632년 리첸의 싸움에서 스웨덴군 바렌쉬타인을 크게 이겼으나, 아돌프왕은 전사(30년전쟁).
       퀘벡 프랑스에 반환됨.
1633년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1634년 네르토닝겐의 싸움에서 스웨덴군 참패(30년전쟁). 메릴랜드 식민지 건설.
1635년 프라하의 화약(和約) 성립. 신교측의 중심인물 작센 선제후(選帝侯)가 황제와 휴전(30년전쟁).
       프랑스˙네덜란드, 30년전쟁에 직접 참가.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창설.
1636년 에스파냐군 프랑스에 침입(30년전쟁). 로드아일랜드에 식민지 건설.하버드대학 창립.
1637년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민란 발생. 데카르트의 《방법서설(方法序說)》 출간.
1639년 노르망디에서 농민폭동 일어남(~1641). 코네티컷 식민지 건설.
1640년 영국의 단기의회˙장기의회 열려, 청교도혁명의 기운 일어남. 포르투갈 왕국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 인디언의 노예화 금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대 선제후) 즉위.
1642년 영국에서 의회군(議會軍)과 왕당군(王黨軍)의 내분 시작(~1651). 영국에서 퓨리턴혁명 시작(~1649).
1643년 프랑스 태양왕(太陽王) 루이 14세 즉위(~1715). 총리에 마자랭이 선출됨(~1661).
1644년 머스톤-무어의 싸움(청교도혁명).
1645년 네즈비의 싸움(청교도혁명).
1646년 찰스 1세, 스코틀랜드군에 투항.
1648년 베스트팔리아조약 체결로 30년전쟁 종결. 독일은 영방(領邦)국가로 분열. 스웨덴은 북해˙발트해의 패권잡고, 프랑스는 라인강 좌안 일대 영토를 획득. 프롱드의 난 일어남.
1649년 찰스 1세 처형되고, 영국 공화정(共和政) 선포.
1651년 크롬웰 항해조례(航海條例) 발표.
1652년 제1차 영국-네덜란드전쟁(~1654).
1653년 영국에서 크롬웰 잔부의회(殘部議會)해산, 호국경(護國卿)이 됨(~1658).
1654년 니콘이 종교개혁 단행. 우크라이나가 폴란드로부터 분립, 러시아에 병합.
1655년 영국 중앙아메리카의 자메이카 점령.
1658년 크롬웰 사망. 아들 리처드 호국경이 됨. 레시르트조약 체결로 덴마크가 스웨덴에 스칸디나비아반도 할양.
1660년 영국 왕정(王政) 복고. 국왕 찰스 2세 즉위. 코펜하겐조약과 올리버조약 체결. 스웨덴이 열국과 강화, 발트해의 패권을 재확인, 프러시아에서의 폴란드 종주권 상실.
1661년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친정(親政) 실시. 콜베르 재무총감이 됨.
1662년 영국에서 통일령(統一令) 제정. 청교도(淸敎徒)의 성직자 등 추방. 영국왕립학회 창설.
1663년 남북 캐롤라이나 식민지 건설.
1664년 프랑스 콜베르, 동인도회사의 재건 등, 보호관세 정책 실시. 영국에서의 집회법(集會法) 제정으로 비국교도(非國敎徒)의 집회 금지.  제2차 영국-네덜란드전쟁(~1667). 영국군이 네덜란드령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뉴욕’으로 호칭. 뉴저지 식민지 건설.
1667년 브레타조약 체결로 영국-네덜란드 간 강화. 뉴욕이 정식으로 영국령이 됨.
1668년 아헨조약 체결. 루이 14세 벨기에 일부를 영유, 그 밖의 침략지는 에스파냐에 반환.
1672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침략전쟁(~1674).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략전쟁(~1678).오라니에공(公) 빌렘 3세 네덜란드 통령(統領)이 되어 프랑스군의 침공을 방어.
1673년 영국에서‘심사율(審査律)’제정으로, 비국교도들 중앙 관직에서 추방. 독일과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家), 네덜란드전쟁에 참가, 루이 14세와 대항.
1678년 나이메헨의 화약(和約) 성립. 네덜란드전쟁 종결.
1679년 영국에서‘인신보호법’성립. 영국에서 휘그당˙토리당 활동, 양당제가 정립. 뉴햄프셔에 식민지 건설.
1681년 윌리엄 펜에 의해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건설.
1682년 러시아에서 표트르 1세(대제) 즉위(~1725). 이복 누이 소피아의 섭정(攝政) 지속(~1689).필라델피아 건설. 라살, 미시시피강을 탐사.
1684년 버뮤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됨.
1686년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성립. 독일의 황제, 여러 연방의 군주 및 덴마크 이외의 유럽 제국이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
1687년 영국 국왕 제임스 2세, 신앙자유를 선포.
       오스트리아가 터키로부터 헝가리를 탈환, 헝가리 왕위가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세습.
       뉴턴의 ‘만유인력’.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 성공, 제임스 2세 망명. ‘권리장전’ 발표.
1689년 영국 오라니에공(公) 빌렘(윌리엄 3세:~1702)과 왕후 메리(~1694)가 즉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전쟁인 팔츠 전쟁(~1697) 시작.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의 친정 시작.
1690년 로크의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
1695년 카를로비치의 화약(和約) 성립. 터키가 오스트리아˙폴란드˙베네치아 등과 강화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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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와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고려대 심재우교수

1. 韓非子와의 비교

흔히들 韓非子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비유하기도 하며, 일견 이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韓非子와 마키아벨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거의 흡사하다. 韓非子는 전국시대의 전쟁상태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유럽의 혼전 양상 속에서, 조국 이탈리아를 지켜내고자 했다.

먼저 韓非子의 법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해보자.47) 韓非子는 전국시대 후기에 법가의 제학설을 집대성하여 법가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쟁과 혼란으로 점철된 천하대란의 상태를 안정으로 이끌기 위하여 강력한 군주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 전개된 韓非子의 법사상은 크게 法治, 術治, 勢治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하들과 백성의 일체의 언행을 통제하기 위한 法治, 신하들로부터 군주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술책으로서의 術治, 신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려고 하는 勢治 등은 하나 같이 군주 중심의 권력국가 사상을 대변한다. 韓非子의 최종목적은 군주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지 인민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法治는 권력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術治는 군주를 위한 술책이다. 勢治는 천하를 호령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韓非子의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특히 정치권력)을 법의 지배 하에 두고자했던 서양의 법치주의사상와는 무관하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군주를 구속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인민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한비자를 마키아벨리과 비교해 보자. 흔히 마키아벨리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 정지지침과 한비자의 술치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둘은 그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한비자 : 군주는 그의 의도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그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면 신하는 자신의 표현을 달리 꾸밀 것이다..... 군주는 지략이나 지혜도 감추어야 한다48)

마키아벨리 :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주론, 123쪽)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둘은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한비자는 "군주의 이익"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하여 권력국가사상을 유지하였다. 전국시대의 천하대란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가져오게 한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맞는 것이었으나, 천하통일 후에도 (법치국가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권력국가를 계속 유지한 것은 문제였다. 이를 받아들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긴 했지만 곧 망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49)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경우는 다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는 궁극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공화정"을 꿈꾸었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단 "무법의 자연상태"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도덕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했으며, 다만 위기 상황 속에서는 "비도덕적 정치행위"를 사용해서라도 일단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일견 비슷해 보이는 "정치기술"들도 실은 그 이유가 전혀 다른 것인데, 한비자가 이를 "군주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면, 마키아벨리는 이를 "시민의 자유보호"를 위해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마키아벨리와 韓非子의 정치기술이 유사하다고 해서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마키아벨리는 韓非子 보다는 오히려 홉스와 유사한 점이 더 많다고 하겠다.

2. 홉스와의 비교

홉스가 처한 상황(종교전쟁과 내란)은 마키아벨리와 거의 유사했으며, 그들이 내놓은 대안 역시 거의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먼저, 홉스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급선무라고 본 것과 마키아벨리가 일단 "국가 그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같다. 그리고 홉스가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안전이다"50) (앞서 지적한 바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공화정의 최대가치를 "시민의 자유 보장"(First Book, Chap.16, pp.162~163)에 두었다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국가 그 자체의 존속"을 상당히 강조함으로서, 권력국가사상이 아니냐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두사람은 "전쟁상태"에서 일단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 "권력국가사상"을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홉스나 마키아벨리는 모두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을 자연법적인 법가치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법이 실정법의 우위에 있으며, 실정법이 이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는 못했다. 이점은 그들의 사상이 "실질적 법치국가"를 지향했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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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정치기술

고려대  심재우교수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나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토대, 즉 국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치기술" 또는 "통치술"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악명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유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정치를 기독교 윤리의 틀 속에서만 고려하던 중세적 한계를 벗어나, 군주의 세속적 행위기준을 제시하고 독립적 주권을 옹호함으로써 독립국가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제 군주는 더 이상 신법이나 자연법과 같은 상위법의 제약 없이 오지 국가의 보존과 유지만을 지상목표로 삼으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군주는 종교와 도덕이 명령하는 당위성에 따르기보다는 항상 본심을 감추고 운명과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는, 특히 신생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종종 신의 없이 무자비하게 비인도적으로 행동하고 종교의 계율을 무시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이 그를 제약함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고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마키아벨리가 정치현상을 도덕과 종교와는 분리되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상정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키아벨리를 "근대정치사상의 시조"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다음에 계속되는 항목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1) 이익지향과 폭력의 문제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먼저 철저하게 이익지향적이다. 이익의 개념은 두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마키아벨리 이전의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인 원리나 규범으로부터 정치행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그 원리들은 군주에게 명료하고 건전한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념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32)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특정한 이익(민족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는 정치야말로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는 폭력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라는 식의 견해는 전통적인 도덕원리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폭력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오히려 이로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폭력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감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차이는 잔인한 조치들이 잘 사용되었는가 또는 잘못 사용되었는가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조치들이 단번에 저질러졌다면 ...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치은 권력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며, 연후에는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신민들에게 가능한 유익한 조치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저질러진 조치들이란 처음에는 빈도가 적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감소하기보다는 증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군주론, 65쪽)

2)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핵심을 "외양"과 "상징"으로 파악했다. 다시 말해, 정치는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통치자는 능란한 위선자요 가장자여야 하며 성실함, 자비, 인간애 및 종교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폭력이 횡행하는 정치상황에서 정치적 행위자는 정치적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으로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을 필요한 한다는 의미에서 외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약 정치적 행위자가 한결같이 기존의 도덕률을 채택하게 되면, 그의 행위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고 간파되어 정치적으로 파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는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만과 위장을 통해 외양을 조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는 반면에 당신의 진면모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 인간의 모든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인간은 결과에만 주목한다. ....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받기 때문이다. (군주론, 124쪽)

3) 목적과 수단의 문제

그리고 이렇게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위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던 것이다.33)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목적과 수단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흔히 마키아벨리즘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논증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마키아벨리는 일단 목적은 근본적으로 (가치판단을 해볼 때) 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수단은 언제나 목적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이다.34)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생명과 자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선악여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군주론, 123쪽) 정리하면,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단이 되도록 통산의 도덕(선)에 일치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 또한 마키아벨리의 주문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결과주의적인 사고와도 관련이 깊다. 물론, 비상상황에서만 그러하다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국가의 존립에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즉, 군주의 행위의 결과)가 그 과정보다 훨씬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외양과 상징 같은 기만술이 정당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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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의 생애

고려대  심재우교수

1) 시대적 상황

마키아벨리(1469~1527)가 살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간위주의 화려한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고, 사실은 엄청난 위기와 투쟁이 상존했던 격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는 정치사적으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근대국가 형성기로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침략과 방어가 끊이지 않던 그러한 시대였다.

이제 국가들은 점점 자국의 운명이 그들 자신의 손안에 있으며, 순전히 민족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각성해가고 있었다.4) 그리고, 군주들은 더 이상 신성로마황제와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군주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군주권력의 강화는 신흥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었으며5), 그결과 느슨한 권력분산체제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정이 곳곳에서 성장하게 된다.6)

하지만, 이탈리아만큼은 예외적으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나라였다. 반면, 이탈리아 국경 알프스 이북의 여러나라에서는 프랑스 등 강력한 근대국가가 건설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주변국가들은 이탈리아를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이탈리아는 내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7) 1492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하여 메디치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내적으로도 역시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외부세력이 강력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이탈리아는 본래 무수한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13세기에 들어서 겨우 몇나라로 정리되기 시작한 나라였다. 15세기에도 여전히 4~5개의 왕국(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등)이 혼재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급격한 충돌과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피렌체 같은 경우에는 형식상 공화정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사회 각계층간의 불안정한 연합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각계층간의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요컨대, 이탈리아의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은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를 지켜낼 수 있는가"하는 것을 최대의 화두로 던져주었으며, 마키아벨리의 사상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하겠다.

 

2)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교육적인 분위기에서 순탄하게 자라난 마키아벨리에게 첫 번째로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가 25세일 때 발생한 프랑스 샤를8세의 피렌체 침공이었다. 권력자들의 변동, 왕국의 전복, 농촌의 황폐, 도시의 살육, 잔혹한 살생, 피비린내 나는 전투양식 등 골육상잔의 가혹한 세태 속에서 인심은 나날이 흉악해지고 도의심은 땅에 떨여졌다. 샤를8세의 침공은, 외세의 침입으로 겪어야 하는 약소국의 비침함이 얼마나 큰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던 것이다.8)

다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문제의식을 던져준 것은 사보나롤라였다. 사보나롤라는 본래 피렌체의 수도원장 출신으로 1494년 샤를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계기로 메디치가를 추방하고 인민정부를 수립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神政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神政을 통해 모든 시민이 기독교 신자다운 생활의 재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중요시했고, 실제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로마교황청과의 불화, 피렌체 내부의 반대파 등장,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파탄나게 된다. 결국, 1498년 사보나롤라는 화형대에 오르게 되고, 시민들은 죽은 시체에 돌을 던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는 훌륭한 도덕심(도덕적 이데올로기)과 정신력만으로는 강력한 국가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한가지는 민중의 지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민중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9) 그런데 우연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하던 바로 그날,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드디어 공직(제2정무처장)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프로렌스공화국의 소델리니 정권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주로 외교분야였다. 그는 중요한 외교임무를 띠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주로 외국에 나가 활동하면서 상세하고 정확한 현지보고서를 많이 제출하는 등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적은 봉급에 오랜 외국생활로 가난과 싸우면서,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이때 외교사절로서 겪은 수많은 경험들은 나중에 "군주론" 등의 저작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10)

1512년에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피렌체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에는 소데리니가 축출되고, 18년만에 다시 메디치 가문의 왕정이 복원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고, 설상가상으로 1513년 2월에는 메디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1513년에 특사로 석방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 하여금 자신이 쓸만한 인물이며, 그냥 놔두기에는 아까운 전문가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시키게 위해 "군주론"을 집필한다.11) 마키아벨리는 메디정권 하에서도 공직에 오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론"은 당시 군주인 로렌즈에게 헌정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직에의 꿈은 멀어져간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피렌체 교외에서 침거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저술활동에 돌입한다. "전술론"(1519~1520), "로마사론"(1513~1519) 등의 저작은 이때 집필된 것이다.

1527년에 프랑스군의 로마 약탈, 교황의 도주,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인민봉기 등으로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붕괴되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복원된다.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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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0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키아벨리에 대해 관심 많거든요. 몇 개 올려놓그셨던데 퍼갈께요. 평안하십시오.^^

카를 2004-04-06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뜸했었습니다. 창랑지수 잘 읽었습니다.
 

  "최후의 로마 철학자이자, 최초의 스콜라 신학자"인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 약 475-524)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고, 유명한 원로원 가문의 후예였다.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철학, 수학, 시를 연구하였고, 아테네에서 행한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가지고 나중에 그리스의 철학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는 500년 직후에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릭(455-526)의 궁정에서 일하였다. 보에티우스는 510년에 콘술이자 "Master of Offices"로 임명받았다. 그는 콘술로서 그의 동료 관리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제지하고자 시도하였다. 보에티우스는 522년에, 그리고 종교적인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 패배 당한 편을 선택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유형을 받아 처형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보에티우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보다 강한 세력에 굴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 존경받을 만한 학자는 처형을 기다리면서 『철학의 위안』이라 불리는 간단한 책을 저술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이 책에서 여성으로 등장하는 "철학"과 대화를 나누었다. 달리 말해 그는 신이나 그리스도나 그의 신앙을 향하여 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찍이 받았던 철학 훈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의 전통에 서서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된다면, 당신은 당신이 결코 잃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운명의 여신도 결코 당신을 넘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이것은 고전적인 인문주의에 대한 정의였다.

  『철학의 위안』은 훌륭한 저술로서 소크라테스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 학자가 죽음을 기다리면서 투옥된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에게 용기와 위안을 준 것은 스토아주의였다. 아주 이상하게도 그리스도나 기독교가 한 말은 그의 저술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보에티우스는 서양의 지적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2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안 모든 지식은 사실상 보에티우스를 통해서였다. 그는 심지어 유클라데스의 기하학을 중세에 확산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결합하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둘이 갈등관계에 있지 않고, 서로를 보완해준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원하였다. 그의 영향은 폭넓게 미쳤다. 1600년처럼 늦은 시기에도 잉글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철학의 위안』을 궁정에서 읽도록 하였고, 심지어 영어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 초서는 모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잘 알고 있던 이 책의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고트족 관리에 의하여 곧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테오도릭은 524년에 그의 처형을 추인하였고, 보에티우스는 잔인한 고문을 받은 다음에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그는 소크라테스, 토마스 모어 경, 브루노,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잔인한 권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원칙을 지킨 지성인이었고, 고전 학문이 보존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카시오도루스(약 485-약 580)과 투르의 그레고리(538-약 594), 세빌리아의 이시도르(약 560-636)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고전 학문의 보존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그리스-로마적 전통 속에는 보존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12세기와 13세기에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어떤 일이 생기는지 곧 보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를 결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신앙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두 가지 필요한 길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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