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불안 [04/10/08]
 
6일 개막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한국관. 180평 규모의 전시관 한쪽 면에 우리나라 대표시인 10명(한용운 김수영 정지용 김소월 김영랑 이상 이상화 서정주 박목월 윤동주)의 대형 얼굴사진이 죽 늘어섰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내년 이 도서전의 한국 주빈국 행사를 앞두고 홍보를 위해 마련한 ‘한국의 명시전’이다. 영어로 번역된 한국시 가운데 대표시 10편을 고르고, 감수성이 묻어나는 시인의 흑백 사진을 연보와 함께 보여주는 인상적인 전시회다.

그런데 시인들의 연보를 읽어가던 중 잘못된 곳이 여러군데 눈에 띄었다.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인데 ‘Kim Hae-young’으로 써 놓았고, 요즘으로 치면 단과대학인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공부한 학력을 ‘studied architecture at high school(고등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이라고 적어 놓았다. 서정주의 대표시 ‘화사(花蛇)’도 그냥 ‘The Snake(뱀)’로 옮겼다. 김소월 작품이 모두 250여편(실제는 154편)이라거나, 한용운이 어릴 적부터 승려(17세 출가, 26세 법을 받음)라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내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는 좁게는 독일, 나아가 유럽 전역에 한국을 알릴 소중한 기회이다. 전력투구를 하면 주빈국 행사를 치른 4년 뒤인 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처럼 ‘값진 수확’을 거둘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물론, 그것을 준비하고 홍보하는데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서로 생각과 손발이 맞지않아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는 도서전 조직위원회와 출판계, 아직 한 푼도 확보하지 못한 민간지원금, 여기에 이런 ‘실수’까지. 주빈국 행사를 일년 앞두고 찾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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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레터] ‘번역의 힘’ [04/10/08]
 
올해도 노벨 문학상을 향한 한국인의 소망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매년 그렇듯이 ‘혹시나’ 하면서 힐끗거렸던 시선을 거두며 ‘역시나’라는 탄식을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하도 오랫동안 되풀이해 온 탓인지 무덤덤하기만 하다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러다가 이웃 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라는 2명의 수상자를 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되면, 은근히 ‘질투는 나의 힘’이라며 어금니에 힘을 줍니다. 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번역해서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때마침 사이덴스티커가 쓴 자서전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씨앗을 뿌리는 사람)가 최근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 소년이 전쟁 도중 해병대 통역요원이 돼 일본어를 접한 뒤 일본 문화에 심취해 전후에 외교관으로 도쿄에 부임하고, 일본 문학을 영어권에 전파하는 대변인이 된 과정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덴스티커는 ‘설국’을 번역하면서 원작자를 찾아가 “선생님 이 부분은 좀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작가는 성실하게 열심히 작품을 읽은 후 “그렇군요”라고만 대답했다는 겁니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는 겁니다. 또한 그는 ‘기차가 지방 경계를 통과하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기차의 창문 밖으로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펼쳐져 있다’는 그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을 처음 번역할 때 ‘밤의 밑바닥’을 빼먹은 실수를 저질렀다가 개정판을 내면서 고쳤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가와바타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이 상의 절반은 번역자의 것”이라며 역자에게 최대의 찬사로 보답했습니다. 한국 작가들에게도 이 같은 찬사를 받을, ‘한국 문학의 히딩크’가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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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0. 8


시월에는 지난달에 읽다말다한 책들을 마무리하고 새로 관심을 갖게 된 책들, 그리고 자료실에서 아무거나 집어들고 되는대로 읽는 그림책을 볼 작정이었다. 지난달에 읽다말다한 책 가운데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쫑쳤고, <소설처럼>은 쫑쳐가고 <편집자 분투기>는 계속 그대로 남아 있다. <서재 결혼시키기>를 새로 집어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발라하지가 않아 몇 페이지 읽지 않고 넣어 두었고, 텍스트가 얼마 되지 않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는 후르륵 삼켜버렸다.
이번달엔 읽으려고 작정한 책은 <그림책의 심리학><아빠 보내기><소년시절><살인자의 건강법><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적의 화장법><미쳐야 미친다><어느 날 아침><추억의 학교><우리 동화 이야기><서재 결혼 시키기><다 빈치 코드><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이었는데, 벌써 관심 시효과 다 된 책도 여럿 있다. 다 읽긴 틀렸다. 모 또 땡길 때 읽으면 되니 별 걱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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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0. 8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책이 너무 재미없거나 내겐 너무 낯선 까닭이고 또 하나는 너무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 감동을 감하고야 말 반복을 피하고 싶은 까닭이다. 이 외의 모든 책은 기꺼이 다시 읽을 만하다.
- 다이엘 페이크의 <소설처럼>에 나온 '책을 다시 읽을 권리'를 읽다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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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0. 8

버스 시스템이 개편된 7월 1일 이후부터는 마을버스를 많이 이용하게 됐다. 지하철에서 마을버스로 갈아타는데 돈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세 달 그렇게 지냈나 보다. 오늘은 좀 걷고 싶은 마음에, 아니 추가 비용으로 드는 그 100원을 좀 아껴 보려는 요량으로, 종전에 이용하던 큰 길을 걸었다. 100원, 가치를 떠나서 정말 보잘것없는 그 돈을 생각하며 여유롭게 걸었다. 이렇게 걸은 것도 참 오랜만이란 생각과 100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생각했다.
100원을 시간으로 환상하면 얼마나 될까? 한 시간은 3600초. 하루 일당을 3만원으로 생각하면, 대략 1초에 1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100원의 가치는 100초... 1분하고도 40초간 날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돈이란 생각이 들었다. 1분 40초간의 자유를 위해, 앞으론 돈을 좀 아껴야 겠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이 여유로움도 즐길 겸.
다시 회사 오는 길. 100원의 자유를 얻자는 생각과 함께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clip에 가서 카페 모카나 한 잔 할까 생각했다. 걸어다닐 땐 가끔씩 이용하던 그곳을 찾았다.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음료 자판기가 서 있었다. 두세 달 사이에, 내가 잠시 관심을 거둔 사이에 그곳은 없어졌다. 덕분에 2500초 정도의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런데 참 스산해졌다. 그곳과 그곳에 있는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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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10-0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항상 있을 것 같은 그것이 내가 잠깐 무관심할때 없어져버린 경우가 있지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다가 다시 찾아갔을 때 없음의 허탈함이란..
1분40초의 여유..참 좋은 생각이네요..
찬타님.. 오늘은 많이 걸으셨군요..

찬타 2004-10-0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허탈함... 언젠가 pc통신 시절 즐겨가던 동호회에 참 많은 주절거림을 남겨 놓았다가 인터넷으로 전환되면서 내 글이 날아갔음을 알았을 때 어찌나 허탈하던지.... 내 젊은 날은 다 잃은 것 같은 그런 느낌에 한동에 주절거림을 삼가하기도 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