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2

추운 겨울을 나고서도 바짝 말라붙은 낙엽으로 가지끝에 매달려 바람을 맞고 있는 느티나무 잎사귀를 본다.

이미 옆 가지에 새싹은 돋고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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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9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7-02-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문득 이 풍경이 눈에 띄인 것은,
내 마음에도 그렇게 놓아버려야 할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둘러보게 됩니다.
그러니 참 많더군요...

프레이야 2007-02-0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12812 숫자가 뭘 의미하는 건지요? 궁금^^

달팽이 2007-02-1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산 날의 수입니다. 혜경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라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눈길을 돌려 밖을 내다보지 마십시오.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모든 보배가 자기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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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새 봄'을 기다리며 그녀를 기억하다
레이첼 카슨 평전 - 시인의 마음으로 자연의 경이를 증언한 과학자
린다 리어 지음, 김홍옥 옮김 / 샨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레이첼 카슨은 무슨 대중 운동에 불을 지필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독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 했다. 조직 활동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녀는 마치 애초부터 증언을 위한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다.”


장장 774페이지에 이르는 레이첼 카슨 평전의 저자 린다 리어가 쓴 ‘머리말’이다. 1962년 남성중심주의 생태환경에 '도전의 불'을 지핀 레이첼 카슨. 그녀는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개인적이고 조용한 성품의 사람이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호들갑 떨지 않고 걷는 사람. 하지만 그 발걸음은 생태계 혼란으로 신음하는 지구의 축을 흔들어 놓았으니 ‘선지자’라는 표현을 헌사한 일은 과장이 아니다.『침묵의 봄』을 두려움으로 읽고나서 나는 그녀의 일생이 알고 싶었다. 당연하다. 인간과 지구의 틀에 경각의 지팡이로 탕 두들긴 거장의 다큐멘터리는 한 편의 불꽃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역경을 견디며 피운 한 여자의 열정 앞에 숙연함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든다. 평전 읽기라는 속성을 분석해 볼 때 이 책은 그 많은 오문과 오역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 한 사람이 남긴 울림을 어색한 문장 몇 개와 엉성한 조합으로 짜 넣은 글자 몇 개로 감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괴롭힌 경제적 가난과 불우한 가족사, 성(性)차별의 장벽과 지병을 통과하며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독자도 긴 여정에 한숨을 쉬고 책을 덮는다. 죽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아름답다고 말하며 그녀는 제왕나비처럼 자연의 순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 개인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레이첼 카슨의 생명사랑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재편성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논의 하나를 던져 놓아보자. 그렇다면 2007년 현재 우리는 자연환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는 정치, 경제적 요소와 더불어 문화와 주거환경 등 인간이 숨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며 유희하고 생계수단으로 삼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포괄적인 질문이다.


질문은 내 글의 특성상 자주 사용하는 버릇으로 이 리뷰의 말미에 그 답변을 제시하겠다. 우선 이 책에 관한 분석, 지극히 주관적인 해체방식을 통하여 레이첼 카슨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어렸을 때 이미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소녀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숲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산책을 나갔다. 함께 놀만한 친구가 없는 외딴집의 고독한 아이는 야생의 새나 동물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늘 품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한다. 인간의 위로는 한계가 있고, 쌍방통행이다. 온전하게 인간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소심한 아이는 자연에서 벗을 구하고 상심을 치료한다. 그러나 평생 레이첼 카슨의 주변에 머물며 그녀를 열렬히 지지해 온 어머니와 출판 대리인 마리 로델, 생물학자인 메리 스콧 스킨커, 도로시 프리먼 같은 친구는 은총이다. 이 특별한 축복의 힘으로 레이첼 카슨은 고단한 항해를 견뎠다. 그 중에서 어머니는 레이첼 카슨의 중심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어린 나이에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학업을 해야 하는 딸에 대한 최대의 배려였을 것이다. 여성에게 과학을 진지하게 가르칠 필요가 없는 시대에 딸의 생물학 공부를 지지했으며 딸에게 결혼제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기를 강조했다. 자녀가 부모의 꿈을 대리만족으로 이어주는 존재라면 이 경우, 그 말은 완벽하다. “나는 글쓰기를 숭상한다. 그렇다. 이게 바로 나의 고민이다”라고 말하는 대학 3학년짜리 딸의 소망을 지지했으며, 결혼과 출산으로 자신의 삶을 진행하는 당시 여성관에 “과학을 전공하게 되어 너무 좋아!”라고 들뜬 모습에도 함께 환호를 해줬다. 자신의 상실한 꿈을 달래기 위해 숲으로 산책을 다닌 어머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굴뚝새와 줄다람쥐와 야생화를 만난 어린 딸. 모든 꿈의 출발은 작은 우연의 것으로부터 준비된다. 레이첼 카슨의 불꽃같은 삶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불을 지피게 해 준 새벽의 신이며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준 대지의 여신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위대할 수 없다.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 낭만적 감성으로 치장할 수 없는 부분도 반드시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중 일부는 훌륭하고 일부는 평범하며 일부는 흉포하다. 레이첼 카슨의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평범함으로 자녀의 비범함을 키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범함이란 단순히 ‘명성’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레이첼 카슨의 비범함은 그녀가 장학생이었으며 정부 공무원 특채과정을 거치고 작가로서 성공한 부분만 조명되어서는 곤란하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레이첼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오던 시를 버리고 현미경이 보여주는 신비한 세계를 택했다. 결단력 있는 선택과 자연환경에 대한 맹목적 무지를 겨냥한 학문의 탐구는 이 후 그녀의 삶을 고통으로 안내한다. 고통의 산물은 현실이다. 때로는 과거의 무게가 현실을 짓누르기도 하지만 유효성에 한계가 있다.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는 길로 묵묵히 나아가는 레이첼의 선택은 그녀가 준비한 비범함의 첫 단계였다. 1940년 첫 번째 책『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출간하면서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에 도발을 건다. 이 책은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좌초한 모험으로 끝났다. 1962년『침묵의 봄』이 캄캄한 인류의 뒤통수를 두들기기 전까진. 다시는 책을 써서 생계를 꾸리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그녀의 좌절은 심각했다. 해양생물학 연구 정부 공무원으로서 1946년 한 달 동안 경험한 미국 서부지역 여행은 레이첼에게 생태의식에 잴 수 없는 깊이를 더해 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콜로라도 댐과 연어의 회귀, 태평양에 대한 조사, 조수관찰, 토지에 미치는 환경인자까지 두 번째 비범함은 한층 깊고 넓어진 영역으로 확장된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가 1951년 7월 2일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간되면서 ‘대중적인 과학 글쓰기’ 작업은 재시도에 성공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은 인기와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제공했다. 여성의 과학접근을 폄하하는 상황에서 이룩한 쾌거다. 86주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그 중 32주는 1위 자리를 지켰다. 엄청난 저작권 수입은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한 여자의 불안한 삶에 안정을 부여했다.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퇴직을 한다. 비로소 어머니와 자신의 꿈이 온전한 모습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집을 이사하고, 서재를 만들었다. 성능 좋은 타자기도 들여놨으며 본격적인 자료수집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레이첼의 비범함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와 종종 오버랩 된다. 다섯 명의 부양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문학의 꿈을 접었던 소녀시절부터 인세 수입에 생계걱정을 덜기까지 가족은 그녀에게 불가사리 같은 존재다. 끊임없이 빨아먹고 붙어 다니며 마음에 흠집을 새겨 넣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현장에 나가 몇 시간 동안 자연 속에 빠져있을 때다. 독자는 그녀의 일생동안 지속된 그 지겨운 가족문제에 냉정한 칼을 휘두르지 못한 부분에 내내 갑갑하다. 1964년 죽음을 맞이할 때 까지 가족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그녀에게 따라붙은 불행한 가족사에 위로수단으로 삼은 자연환경 탐구는 오히려 그녀의 비범함에 윤활유가 되었다. 불행을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꿈을 이루는 일이라니. 살충제 살포를 방사능 낙진으로 비유한『침묵의 봄』은 이런 배경으로 탄생한다. 말할 것도 없이 화학물질 살포 문제에 물음표를 던진 대담한 여자의 도발에 기득권이 태연하게 인정할 리 없다.『침묵의 봄』이 1957년 농무부의 롱섬 불개미 박멸안에 관한 동기관찰로 출발한 후 살충제 논쟁은 불을 피웠다. 논쟁의 끝에는 권력과 비권력으로 나눠지고 개인간, 또는 단체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과 아군으로 다시 나뉜다. 논객이 감춘 칼은 잉크가 묻어있지만 그 펜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독을 묻히고 있다.

레이첼 카슨의 비범함과 성실함의 결정체인『침묵의 봄』은 결국 제목처럼 그녀에게 ‘침묵의 봄’이 되고 말았다. 생명과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은폐시키려는 많은 인간들에게 어둠의 밤을 밝혀주었지만 이 책은 논쟁의 한가운데 칼날을 디뎠다. 의심을 품고 문제 제기에 성공했지만 레이첼에게는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되었다. 지병으로 앓던 유방암이 악화되었고 그녀는 1964년 4월 14일 꽃피고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 새 봄에 세상을 떠났다. 생의 절정에서 맞이한 죽음이다. 그녀에게 마지막 헌사를 받친 이는 ‘나의 흰 히아신스’라고 부른 도로시 프리먼이다. 40년 후 2007년 평전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독자는 처음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긴 서평을 맺는다. 수소폭탄이 있는 한 아무 걱정이 없으며, 몇 마리 작은 곤충의 죽음에 과민반응하지 말자고 하던 1962년 한 독자의 발언을 상기한다. ‘그깟 뒷 문’을 방치한 비잔틴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피의 멸망을 당했으며, 인류사의 학문은 수많은 의문부호를 주렁주렁 달고 나아간다. 깨물지만 말고 물어뜯으라고 토머스 울프는 말한다. 사물을 입체적 조감도로 보는 것과 평면적 단면도로 마주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편집자 E.B.화이트의 편지글로 대신한다.


“저는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너무나 치밀하게 스스로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사코 자연을 자신 앞에 무릎 끓게 만들려고 합니다. 만일 인간이 이 지구에 순응하고, 회의적이고 오만한 눈길이 아니라 겸허하고 감사한 눈길로 이 지구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존 가능성은 한층 더 커질 것입니다.”-(632쪽)


*부기*

평전은 한 인물의 출생부터(혹은 그의 조부모부터) 죽음까지 함께 이동하는 글이다. 그런 점에서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작가의 객관적 자세를 요구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부딪친 시시콜콜한 밑그림에 지겨웠음을 고백한다. 속도위반 벌금으로 낸 5달러 기록까지 들추어낸 작가 린다 리어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옮긴이의 후기처럼 후덕한 관용의 공치사를 늘어놓지는 못하겠다. 평전의 세밀도에는 동의하지만 ‘레이첼은~’과 ‘카슨은~’을 교대로 왕복하며 사용하는 대명사의 오용에 대해선 불만이다. 일관성 없는 호칭문제와 원서를 확인할 수 없는 오문으로 짜증 났다. 논리가 감성에게 자리를 내 준『침묵의 봄』이 무색하다. 다만, 수록된 사진 자료와 레이첼 카슨이라는 한 인물이 인류사에 어떤 울림을 남겼는가에 우선 순위 관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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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허공 속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 미학

허공 속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빛
 
조선 후기의 문호 연암 박지원의 〈답창애(答蒼厓)〉란 글에는 마을의 꼬마가 千字文을 배우는 데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이를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꼬마가 대답하는 말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天`字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천자문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그러고 보니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했다. 꼬마의 생각에는 암만해도 하늘이 검지 않고 푸른데, 책 첫머리부터 당치도 않은 말을 하고 있으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만 것이다.
 
저 까마귀를 보면, 깃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지만, 홀연 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石綠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추면 자주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 하더니 비취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 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연암이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한 말이다. 천자문이 푸른 하늘을 검다고 가르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보았던가? 까마귀의 날개빛 속에 숨겨진 여러 가지 빛깔을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 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또 〈답경지(答京之)〉란 글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쳐 말하기를,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飛去飛來之字)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相鳴相和之書)이로다`하였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말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 푸른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노니는 새들의 날개짓과 지저귀는 소리 속에서, 연암은 글자로 씌여지지 않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살아 숨쉬는 `불자불서지문(不字不書之文)`을 읽고 있다. 푸득이는 새들의 날개짓이 주는 터질듯한 생명력, 조잘대는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주는 약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어떤 언어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일러 `생취(生趣)` 또는 `생의(生意)`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靈動)하는 운치(韻致)인 것이다.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혀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빛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물상 속에 감춰진 비의(秘儀)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言)의 사원(寺)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이다.

 
영양(羚羊)이 뿔을 걸듯
 
대저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 나는 것이 아니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송나라의 유명한 평론가 엄우(嚴羽, 약 1290-1364)는 그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책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으니 이치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으니,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羚羊)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가 없으니,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 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시에는 별재(別才)와 별취(別趣)가 있어, 책 속에서 얻는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으로는 시의 비밀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면 책과 이치를 버려두어도 타고난 재능만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엄우의 이 말은 다소 절충적이다. 이런 어정쩡함을 벗어나기 위해 엄우는 `불섭이로(不涉理路) 불락언전(不落言筌)`, 즉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최상승(最上乘)의 법문이라고 부연한다. 이 말은 시인이 언어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시인이 한번 사변의 늪에 빠져 들게 되면 생취는 간데 없고 진부한 관념의 시체들만 뒹굴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구호이다.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시인의 정신을 본질 아닌 말단으로만 쏠리게 한다. 그 결과, 시인의 정신은 간데 없고 가공된 언어만이 판치게 된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암호이다. 옛 사람은 이를 조충전각(雕蟲篆刻), 즉 벌레를 조각하고 글자의 아로새기는 교묘한 재주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엄우는 시인이 지녀야 할 미덕을 `흥취(興趣)`에서 찾는다. 앞에서 말한 `생취(生趣)`와도 같은 말이다. 영양이 뿔을 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는 본래 선가(禪家)의 비유로, 《전등록(傳燈錄)》에 설봉존자(雪峯尊者)의 말로 전해진다. 영양은 뿔이 앞으로 꼬부라진 염소이다. 그런데 이 영양은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꼬부라진 뿔을 나무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잠을 잔다고 한다. 따라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 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 뿐이다. 발자취가 끝난 곳에서도 영양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시인이 쳐 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 들어서는 안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흥취를 지닌 시란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여, 무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는 이를 다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가시화 한다. 공중지음(空中之音), 상중지색(相中之色), 수중지월(水中之月), 경중지상(鏡中之象)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그리고 물 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 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물 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 맛으로 소금의 성분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흥취 또한 이와 같아서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한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로 하여금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엄우는 `언유진이의무궁(言有盡而意無窮)`란 말로 위 단락을 끝맺었다. 시란 말은 끝났어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비유컨대 종을 치면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는 안되고,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허공 속으로 난 길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옥(李鈺)은 〈이언인(俚言引)〉이란 글에서 "시는 만물이 사람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丹田 위를 맴돌다가 끊임 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갖추고 있어, 단지 시인의 입과 손을 빌어 시가 언어로 형상화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한편 시에서 말하고 있는 표면적 진술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우가 말한대로 영양의 발자취일 뿐이다.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언어와 언어가 만나 부딪치며 속삭이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실제 몇 수의 작품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하자.
 
어제 밤 松堂에 비 내려                             
베개 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                        
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栖
 
고려 때 시인 고조기(高兆基)가 지은 〈산장우야(山莊雨夜)〉란 작품이다. 어찌보면 덤덤하기 짝이 없는 시이다. 간 밤 비가 와서 아침에도 새가 둥지에 틀어 박혀 있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전부인 셈이다. 그러나 독시(讀詩)를 여기서 그치면 영양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다 끝내는 눈 앞에서 놓치고 마는 격이다.

제목으로 보아, 시인의 거처는 속세를 떠난 호젓한 산중이다. 시인은 간 밤에 비가 왔다는 사실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다만 기억 나는 것은 잠결 베개머리 서편으로 들려오던 시냇물 소리 뿐이다. 시냇물 소리를 새삼스럽게 느낀 것으로 보아 계절은 봄이다. 간밤 시냇물 소리에 잠을 설친 시인은 새벽녘 들창을 연다. 여늬 때 같으면 동 트기가 무섭게 조잘대며 시인의 잠을 깨웠을 새들이 오늘 따라 잠잠한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새들은 왜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있을까? 간밤의 비 때문에 숲이 온통 젖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새들의 하는 양을 보다가, 간밤 꿈결에 어렴풋하던 시냇물 소리가 기실은 비 때문에 물이 불어났기 때문임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산이 있고, 그 속에 집이 있다. 방 안에는 시인이 있고, 둥지 안에는 새들이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 정신은 해맑다. 이른 새벽 들창을 열어 가만히 밖을 내다 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 떠돌고 있는 法悅의 生趣. 이것을 더 이상 무슨 언어로 부연할 수 있겠는가.
 
이웃 집 꼬마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걸요."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위 시는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李達, 약1539-1612)이 지은 〈박조요(撲棗謠)〉, 즉 대추 따는 노래이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갛게 대추가 익어가는 村家의 가을 풍경을 소묘한 것이다. 이웃 집 대추가 먹고 싶어 서리를 하러 온 아이가 있고, "네 이놈! 게 섰거라."하며 작대기를 들고 나서는 늙은이가 있다. 서슬에 놀라 달아나던 꼬마 녀석도 약이 올랐다. 달아나다 말고 홱 돌아서더니 소리를 지른다.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4구는 "영감! 내년엔 뒈져라"가 된다. 그래야 내년엔 마음 놓고 대추를 따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늙은이가 아무리 잰 걸음으로 쫓아 온다 해도, 꼬마는 얼마든지 붙잡히지 않고 달아날 자신이 있었던 게다.

이달은 이러한 즉물적 풍경의 섬세한 포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렇다면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일까. 문면에 드러난 것은 대추 서리하다가 들킨 꼬맹이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이다. 그렇다고 이 시의 주제를 "젊은 애들 버릇 없다"쯤으로 설정하는 어리석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파란 가을 하늘과 빨갛게 익은 대추의 색채 대비, 커가는 어린 세대와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늙은 세대의 낙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감 넘치는 시골의 순후한 풍경이,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 하다.

다음은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훈(白光勳)의 <홍경사(弘慶寺)>란 작품이다.
 
가을 풀, 전조(前朝)의 절                                
남은 비, 학사의 글                                
천년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이 작품을 다시 이렇게 배열해 보면 어떨까.
 
가을 풀
고려 때 절.
남은 비 
학사의 글.
천년을
흐르는
물이 있어서,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
 
이미지의 배열이 박목월의 <불국사>를 연상시킨다. 처음 1.2구에서 시인은 돌올하게 가을 풀과 고려 때의 절, 남은 비석과 학사의 글을 제시한다. 각 단어의 사이에는 일체의 서술어가 생략되어 있어, 1구에서 시인이 가을 풀에 묻혀 버린 퇴락한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가을 풀처럼 보잘 것 없이 영락해버린 고려 때의 절을 말하려 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전자라면 `추초(秋草)`는 `전조사(前朝寺)`의 배경을 이루고, 후자라면 등가적 심상이 된다.
 
2구의 `잔비(殘碑)`와 `학사문(學士文)`의 관계도 그렇다. `잔비`는 동강나 굴러다니는 비석인데, 거기에 예전 이름난 학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시인의 의도는 퇴락한 절과 굴러다니는 비석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예전 명문의 허망함을 일깨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그 긴 세월 문장 만은 아직도 빗돌에 남아 전함을 말하려는 것인가? 이 또한 명확치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시시콜콜히 갈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시의 총체적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1.2구의 조응관계를 본다면 `추초`와 `잔비`, `전조사`와 `학사문`이 각각 대응을 이룬다.

다시 여기에 3.4구가 이어진다. 천년을 흘러가는 물이 있고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이 있다. 이번엔 1.2구와는 달리 천년의 긴 세월과 저물녘의 한 때가 나란히 놓여짐으로써 1.2구의 대응관계는 3.4구에서는 대조의 관계로 전이된다. 물은 천년을 한결 같이 그렇게 변함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구름은 어떠한가. 그것은 언제나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닌가. 즉 3.4구는 천년과 하루에서 만이 아니라 물과 구름을 통해서도 대립의 관계가 형성된다. 4구의 `견(見)`의 주체는 누구인가. 시인 자신으로 볼 수도 있고, 천년을 흘러가는 물일 수도 있다. 주체를 시인으로 이해한다면 3.4구는 자연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착잡한 심회를 노래한 것이 된다. 또 주체를 물로 이해한다면, 천년을 의연히 변치 않고 흐르는 물이 온갖 덧 없이 변화해가는 것들을 묵묵히 지켜 보고 있음을 뜻하게 된다.

가을 풀은 여름 날의 번화를 뒤로 하고 시어져 간다. 그 풀과 같이 예전의 영화를 뒤로 하고 퇴락한 절. 예전 학사의 명문을 새긴 비석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만 남았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그래도 글만은 아직 남았다. 천년을 쉬임 없이 흐르는 물, 물은 흘러 갔건만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위에 해는 지고 구름은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간다. 한 해가 가고, 하루도 가고, 구름도 왔던 자리로 돌아가고, 인간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흘러도 흘러도 그 자리에서 넘치는 강물처럼 모든 것은 또 그대로가 아니었던가.

위 시에서 서술관계가 생략됨으로 해서 발생되는 모호성Ambiguity은 일상적 언어에서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양작 택일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결과적으로 시의 함축과 내포를 더욱 유장한 것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20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한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상 세 편의 감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단청(丹靑)의 수식과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天眞)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결여된 시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든다.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이미지의 구성이 이렇게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이렇듯 유장하다 보니,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그 비밀은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도 없고, 아무나 알 수도 없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질뢰(疾雷)>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레 소리에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솟아도 소경은 보지 못한다.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을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며, 왕도와 패도, 의(義)와 리(理)의 구분을 속인은 변별하지 못한다. 아아! 세상의 남아들이여. 눈과 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 영각(靈覺)에 있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 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또 《채근담》에서는 "세상 사람들은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은 뜯을 줄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 다니는데 어찌 琴書의 참 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좀 길지만 이규보(李奎報)가 시로써 시를 논한 <논시(論詩)> 한 수를 읽어 보기로 하자.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 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뜻만 서고 말이 원활치 못하면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나중으로 할 바의 것은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아름다움을 어찌 반드시 배척하랴만                   
또한 자못 곰곰히 생각해 볼 일.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시의 참 뜻을 잃게 되느니.                           
지금껏 시를 쓰는 무리들은                           
풍아(風雅)의 참 뜻은 생각지 않고,                         
밖으로 빌려서 단청을 꾸며                           
한 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고 있다.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갑작스레 이루기는 어려운 법.                        
스스로 헤아려선 얻기 어려워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이로써 여러 사람 현혹하여서                         
뜻의 궁핍한 바를 가리려 한다.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이백과 두보는 다시 나오지 않으니                    
뉘와 더불어 진짜와 가짜 가려낼까.                  
내가 무너진 터를 쌓고자 해도                        
한 삼태기 흙도 돕는 이 없네.                        
시 삼 백 편을 외운다 한들                           
어디에다 풍자함을 보탠단 말가.                      
홀로 걸어감도 또한 괜찮겠지만                       
외로운 노래를 사람들은 비웃겠지.                    
作詩尤所難  語意得雙美
含蓄意苟深  咀嚼味愈粹
意立語不圓  澁莫行其意
就中所可後  彫刻華艶耳
華艶豈必排  頗亦費精思
攬華遺其實  所以失詩眞
爾來作者輩  不思風雅義
外飾假丹靑  求中一時耆
意本得於天  難可率爾致
自천得之難  因之事綺靡 (헤아릴 천)
以此眩諸人  欲掩意所궤(다할 궤) 
此俗寢已成  斯文垂墮地
李杜不復生  誰與辨眞僞
我欲築頹基  無人助一궤(竹 아래 貴) 
誦詩三百篇  何處補諷刺
自行亦云可  孤唱人必戱
 
모두 32구에 달하는 긴 시이다. 詩의 참 뜻을 벗어난, 알맹이 없는 화려한 수식만 일삼는 당대 사단(詞壇)의 통폐를 날카롭게 통매한 내용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 현란한 기교로 대중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시인들, 그들은 눈속임에만 급급하여 함축함양(含蓄涵養)하는 공부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참다운 시정신은 이미 땅에 떨어져 회복의 희망도 찾을 길 없다. 어찌할 것인가. 이규보의 이러한 한탄은 오늘의 시단에도 여전히 유효할듯 싶다.

 
이명(耳鳴)과 코골기
 
다시 연암에게로 돌아가자.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自序)>의 한 도막이다.
 
어린 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에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에 아이가 서로 맞대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하였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듯, 빈 수레가 덜그덕 거리는 듯 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 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하는 것이었다.
 
왜 연암은 난데 없이 이명과 코골기를 들고 나왔을까.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코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 보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자아도취의 이명증(耳鳴症)에 걸린 꼬마이다. 남의 적절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시인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암의 말을 더 흉내내면,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화이니, 만약 그가 병 아닌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 으스대는 양을 어찌 볼 것이며,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하니, 만약 그의 병통을 지적해 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어찌 차마 볼 것이랴.

예전 요동 땅에 정령위(丁令威)란 사람이 있었는데, 신선술을 익혀 신선이 되었다. 그뒤 800년 만에 학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또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초할 적에 뒷날 자신의 저술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장독대의 덮개로나 쓰일 것을 생각하며 탄식하였다. 막상 그가 죽고 나자 《태현경》은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유명한 저술이 되어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다. 그런데 당사자인 양웅 자신은 이를 보지 못하고 불우하게 세상을 떴다.

세상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시는 정령위의 불로장생을 원하는가. 양웅의 기림을 받고 싶은가. 양웅의 성예(聲譽)를, 살아 정령위처럼 누리고 싶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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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2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잘 보내시고 나머지 3개 더 있으니 차례로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달팽이 2007-01-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님의 정성에...
산타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름다운 우리 문장 43
장하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무상(無常)

/이은상


   ‘아니디아!’ 어허 천지가 무상하구나. 과연 무상인고.

   아침 새 창 머리에 와서 노래하는가 하면 석양이 마당에 비껴 저녁 그늘을 누이니 이것이 무상인가.

   뜰 앞에 심은 복숭아 나뭇가지에 향기로운 꽃송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그 나무 아래 어지러이 날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무상인가.

   견우와 직녀 같이 웃으며 손목 잡고 사랑하다가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같이 등지고 헤어져선 원수가 되고, 어느 때는 한자리에 같이 앉지도 아니하다가 다시 보면 어깨 겯고 같이 웃는 시시변전(時時變轉)의 인정 그것이 무상인가.

   저 이릉(李陵)이 하량에서 소무(蘇武)와 이별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일러 아침 이슬이라 하였던 말이 오늘은 뉘게나 상식같이 되었지마는 보라 어찌 인생뿐이랴. “나고 죽는 온갖 것 속에 자연만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하고 소동파는 외쳤지마는 슬프다 그 사람 자연도 무상한 줄 몰랐었구나.

   산도 헐어지고 물길도 돋아나고 고목은 굽어 썩어지고 새솔 나 자라나고, 이라형 왕국도 변하고 역사도 바뀌고 천지도 옮기나니 이것이 무상인가.

   그렇다. 염염찰나(念念刹那)에 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우주가 통히 그대로 무상밖에 다시 또 무엇이랴.

   ‘아니디아!’ 자정이 넘어 깊은 밤. 소리도 없이 오시는 눈이 어깨랑 가슴 위에 내려 쌓이는 밤. 구트나 슬픈 기억을 한 아름 안고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찾아 돌아왔다.

   희미한 등불아래 앉았으나 멀고 멀다! 아득한 마음을 감아 거둘 길 없다.

(ref. 아니디아 : 범어로 Anity. 무상이라는 뜻.)


   .....................

 

 

 

 

   아우야. 이 밤이 지새도록 어디 가 놀며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새벽바람이 차구나. 네 병이 더치리니 어서 왜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빈방이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너라. 지금 이 아름다운 달빛이 너를 찾아왔구나. 돌아오너라.


   .....................


   달이 기운다. 산 넘어 달이 기우네. 너무도 적막하여 미칠 것만 같구나.

   저 지공(指空)이 입멸(入滅)했을 때 나옹선사 생사에 대한 자기의 소견을 말한 그 노래,


   나는 것이란 맑은 바람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맑은 못에 달이 잠기듯

   고요히 서산을 넘어 꺼져 가는 달빛


   이제 내 앞에 ‘만사가 다 그만이라’는 큰 교훈을 내리고 있다.

   한 자, 반 자, 한 치, 반 치, 낮추낮추 꺼져 가는 저 서산의 달은 참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광경이다. 가버린 내 아우는 다시 불러올 수 없는 것같이, 지금 깜박하고 꺼져버린 저 달도 영원히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


   슬프다. 이 영원한 고난을 헤어날 길이 어디메 있나. 내 가슴은 창검으로 찔리고 벤 것 같구나. 능엄경에 저 세존이 친히 아난(阿難)을 불러 이르되 “네 마음이 본시는 묘하고 밝고 깨끗했으나, 스스로 미혹하여 본시를 잃고 윤회를 받아, 생사 중으로 늘 뜨락 잠기락한다” 하였다.

   그러나 여기 무슨 방법으로 이 고난의 경지를 벗어나 밝고 맑은 본심을 도로 찾을지 나는 둔하여 알지 못한다.

   이 인생을 구원할 길이 어디 있는고. 캄캄한 내 눈 앞을 쓸어줄 사람이 없는가. 삼라만상이 고요할 뿐! 다만 적막이 천지에 찼을 뿐이다.

<이은상作, ‘無常’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장하늘著, 다산초당刊 中>



   “배재고보 5학년이던 노산의 아우(正相)가 졸업을 앞두고 20살의 젊음으로 꺾였다. 동경 가서 고학하는 친구와 ‘독립’을 논하던 편지가 발각되어 용산경찰서에 구속, 석 달이나 당한 고초 끝에 병을 얻어 입원했는데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다.

   운명하며 남긴 돈 7원 3전! 모교의 장학금으로 써달라는 유언대로 ‘정상장학회’를 세우고, 많은 기부금과 함께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수필집 ‘무상’의 인세 역시 모두 장학회에 바쳐졌다.”

/장하늘 後記


얼마 전 김성우의 수필집 ‘돌아가는 배’ 中, ‘동백꽃 필 무렵’을 옮겼다.

이은상의 수필 ‘無常’의 일부를 옮긴다.

동생의 죽음에 극도의 슬픔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의 심정이다.

20세기 한국의 名文 중, 수필 부문에 속하는 글들이다.


閑士

                                                                                                                                 H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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