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의 달이 뜨면 - 1940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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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독일이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가 2년 만에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와 체코 수데텐란트를 차례 차례 점령해 나갈 때도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조차 '독일은 더 이상 다른 국가의 영토를 침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히틀러의 발언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38년 9월 30일,영국,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4개국은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중 독일인의 인구가 많은 수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게 양도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 전역을 집어 삼켜 버리며 뮌헨 협정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1939년 5월 10일 금요일, 히틀러는 유럽 저지대 국가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을 상대로 전격전에 돌입한다.

독일 나치 정부에게 약간의 양보로 평화를 얻었다고 자부했던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영국 땅까지 나치 군이 진격 하지 않으리 라는 희망을 가졌다.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서셔 평안히 주무십시오.'

히틀러의 속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체임벌린을 향해 의원들 중 상당수가 타고난 달변가이자 웅변가인 정치계의 '포악한 코끼리' 처칠을 체임벌린 후임자로 뛰우기 시작한다.

긴급 소집된 의회에서 체임벌린 총리는 전쟁 준비에 대한 어떤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치과에 가야 한다며 서둘러 의장실을 떠난다.

이제 남은 건 국왕의 새로운 총리 임명 결정 뿐이였다.

국왕은 체임벌린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안정적인 성품에 핼리팩스경을 추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체임벌린 총리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갑작스런 국왕의 호출을 받은 처칠은 국왕과 껄끄러운 사이였다.

1936년 처칠은 국왕의 형 에드워드 8세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왕실과 커다란 마찰을 빚었었다.

국왕은 체임벌린 총리의 국가 정책 마다 온갖 비판을 쏟아내는 처칠의 행보를 크게 불신하고 있었다.

'당신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여기 너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어서 물러나세요! 이제 그만 끝내시라고요! 분명히 말하는데 사라지세요.'

젊은 의원들로 부터 '낡아 빠진 우산' 으로 불렸던 71세 총리 체임벌린은 직접 처칠을 찾아가 사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처칠은 국왕과 함께 한 자리에서 자신을 총리로 추천한 체임벌린의 사임을 만류 하며 태연하게 의리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을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었던 의원들이 왕실로 몰려 가고 5월 10일 아침 독일 히틀러가 유럽 저지대를 점령 하는 순간 ,총리로 임명된 처칠은 '몹시 두렵지만 최선을 다해 모든 걸 다 바치겠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안다고 생각하는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잡은 권력은 하나의 축복이다.'


처칠은 다우닝 10번지에 도착 하는 순간 부터 '영국은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 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독일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려면 영국 국민들, 지휘관들, 각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참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없다는 것, 독일에 맞서고 버틴다 해도 히틀러의 막강한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의 병력이 영국으로 몰려 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있는건 오로지 미국의 산업 역량과 군비력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1940년 5월 14일 독일 공군 루프트 바페 폭격기는 로테르담 상공 600미터 높이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독일 기갑부대는 벨기에와 프랑스 연합군을 무력화 시키며 영국 원정군을 포위 해버린다.

이날 오후 프랑스 총리는 처칠에게 전화해 약속한 RAF전투기 4대와 10개 편대를 오늘 내로 보내 달라며 사정 한다.

독일군이 유럽 저지대 지역을 차례 차례 진격 하는 순간 베를린 주둔 미국 특파원은 이미 독일 승전 선언을 반복하는 뉴스를 발송한다.

프랑스 국경 근처 아르덴 숲에 주둔 하고 있던 프랑스 군은 독일의 탱크와 장갑차 부대들이 거세게 몰려 오는 순간 이미 패했다며 도망가버린다.

영국 보다 규모가 큰 군부대와 프랑스 전역 마다 촘촘하게 설계된 전략 요새를 갖고 있었던 프랑스가 한 순간에 독일 나치군에 무너지자 처칠은 즉각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비밀 전보를 친다.


'독일은 곧 영국을 공격 할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없이 혼자서 라도 독일과 전쟁을 계속 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 미국의 목소리와 힘을 너무 오랫동안 눌러두고 있으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 갈지 모른다는 것을 각하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놀라우리 만치 빠른 시간에 나치에게 완전히 예속된 유럽이 자리를 잡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중압감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 이상일 것입니다.'


처칠은 미국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보냈지만 그가 미국에게 실질적으로 원했던 건 물적 지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노후화 된 구축함 50척과 최신형 항공기 수백대 그리고 대공무기와 탄약을 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미국이 군사적 지원을 해준다면 영국은 새로운 함정과 항공기를 제조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틀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에게 의회의 특별 승인 없이는 어떤 구축함도 항공기도 보낼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낸다.


3선 출마를 앞 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원들과 미 국민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급해진 처칠은 프랑스 주요 지도자와 지휘관을 직접 만나 전시 상황을 파악하고 영국 공군기지와 주요 해군기지를 차례 차례 점검한 후 BBC라디오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서서 대국민 연설을 한다.


'이번 전투로 프랑스의 기세가 꺾이고 나면 우리 섬을 노리는 전투가 코앞의 일로 닥칠 것입니다. 영국의 모든 것, 영국이 가진 모든 의미를 노리고 말입니다. 가장 우려했던 비상사태가 닥치는 순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조치도 사양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국민으로 부터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 마지막 한 치의 노력까지 끌어 낼 것입니다.'

1934년 하원 연설에서 처칠은 영국은 독일 나치 세력에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몸집이 크고 살찐 표적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을 유인하기 위해 묶어 놓은 아주 값진 소'라고 말했다.

유럽 전역을 날아 다녔던 독일의 1만 4000대의 항공기는 히틀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 5월 24일 금요일, 히틀러는 신임 하는 어떤 장군의 조언에 따라 영국 원정 군의 뒤를 쫓는 기갑 사단에게 진격을 중지 하라고 명령한다.

히틀러와 주요 군 수뇌부들은 이미 서부 전선에서 2만 칠천 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하고 11만 천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1만 팔 천 명의 군인들이 실종된 전력으로 지금 영국을 침공 하는 순간 독일은 치명적인 패배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5월 26일 처칠은 프랑스 해안에서 영국 원정군을 철수 시키라는 작전 개시(다이나모 작전)를 명령하지 히틀러는 즉각 기갑부대에게 영국 원정군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구도시 덩케르크 해안에 집결한 영국 원정군은 독일군의 기세가 예상보다 더뎌졌고 해상의 악천후 까지 겹쳐 지면서 덩케르크 탈출 작전에 동원 된 선박 887척에 프랑스군 12만 5천명을 포함해 33만 8,226명이 무사히 탈출한다.(3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상공과 지상의 독일 협공을 뚫고 해협을 건넘)


6월 4일 철수 마지막 날 처칠은 하원 연설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며,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싸울수록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며 공중에서 더욱 힘을 키울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킬 것입니다. 우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외친다.


6월5일 수요일 독일은 항공기와 폭격기 몇 대와 수많은 전투기를 몰고 영국 본토 목표 지점을 밤새도록 공습 하며 영국 전역을 지독한 연기로 가득 채워버린다.


6월 12일 영국은 독일 항공기 접근을 사전에 정확하게 알려주는 레이더(체인 홈) 개발에 성공한다.

'체인 홈' 기지를 설치한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몸집이 크고 살찐 표적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을 유인하기 위해 묶어 놓은 아주 값진 소' 처럼 독일 루프트 바페가 몰려 오기를 기다렸다.

처칠은 미국을 끌어들일 사건, 참전 명분이 터지기를 고대 했다.

6월 17일 월요일 독일 나치군에 프랑스가 완전히 함락되지만 처칠은 그다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반가워했다.

6월 18일 영국 항공기 생산부는 매주 245대 항공기를 출고 하며 엔진 생산량을 4배 6배로 급증시켜 나갔다.

6월 22일 토요일 오후 프랑스는 히틀러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제 영국 홀로 독일과 싸워야 했다.

6월 23일 조국 승리의 선봉장에 선 요제프 괴벨스는 프랑스 항복 선언을 공식화 하며 섬 하나 정복을 위해 신중하고 체계적이면서 민첩한 전력을 짜기 시작한다.



'처칠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얼마 남지 않았다.'

7월 2일 화요일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육해공군 지휘관들에게 영국에 대한 전면 공격의 타당성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히틀러는 서부 전선의 마지막 장애물인 영국이 조만간 이 전쟁에서 발을 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꿈꿔 왔던 러시아 땅, 소련 침공에 전념 해야 했다.

노쇠한 영국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니 전쟁 승리를 자신 하며 영국으로 향했던 전력 중 국방군 40개 사단을 해산 시켜버린다.

이 사실을 절대로 놓칠리가 없었던 처칠은 스웨덴 왕실과 바티칸 교황청에게 넌지시 독일과 협상 할 것 처럼 행동하며 포스 H함대를 프랑스 지중해 바다 오랑으로 진격 시켰다.


영국은 프랑스 함대들이 독일 나치군의 지휘를 받아 영국 해협을 향해 달려 오는 걸 막기 위해 프랑스 함대를 향해 포격을 날린다.

영국 함대 포격 10분 만에 프랑스 함대들은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영국은 동맹국 프랑스의 함대에게만 발포 한 것이 아니라 독일을 향해 경고 한것으로 앞으로 어떤 협정도 맺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영국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을 향한 영국의 승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 였고 독일에게는 확실한 전쟁 통고였다.

소련에 막대한 전력을 보내 버린 히틀러는 진정으로 영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주기를 원했지만 노쇠하고 포악한 처칠이 그런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7월 14일 영국은 독일 폭격기가 몰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 했다.

이미 수주 전부터 구체적인 침공 위협에 대한 대비와 방위 대책을 세웠지만 이번 폭격은 1915년 1월 19일 밤에 기습적인 폭격을 맞았던 그 순간과 위력이 다를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방공호로 대피하는 연습을 하던 런던 시민들은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구상 어디에도 거리에서 폭격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폭격기는 언제나 제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피하는 명령을 절대로 흘려 듣지 마십시오 공격이 시작되면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굳건하게 살아 남아 버텨내야 합니다.'


런던 시민들은 공습 경보 소리에 맞춰 달의 위상을 유심히 관찰 하기 시작했다.

달빛에 의지해 목표물을 찾는 폭격기는 분명 밤에 공습 할 것이다.



런던 시민들은 7월 대낮 처럼 밝게 빛나는 달을 향해 '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의 함대를 무참하게 포격한 영국을 향해 독일과 연합해서 침공할지 프랑스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다.

괴벨스가 매일 매일 처칠과 영국 국민을 향해 조롱과 위협을 뒤섞은 연설을 했고 영국은 침착하게 침공에 대비 했다.

런던 곳곳은 모래 주머니를 잔뜩 쌓아서 기관총을 설치 했고 지하철의 모든 역마다 방공호가 설치 되었다.

침공을 대비해서 시민들은 매일 어떤 위험과 경고에 대비 할지 훈련했다.

독일 폭격기들이 수많은 전투기를 이끌고 영국 항공을 날아 다녔다.


영국 시민들은 매일 전쟁의 순간을 목격 했지만 대규모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날에는 일상적으로 출근했고 상점에 갔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젊은이들은 밤마다 댄스 파티가 열리는 곳을 찾아 다녔고 농부들은 밭을 일구며 수확물을 거둬들였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8월 바다 사자 작전 계획 준비를 지시한다.

독일 군 수뇌부는 히틀러에게 몇개의 낡은 함대만 보유하고 있는 영국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루프트바페는 노후화 된 폭격기를 상대하기 위해 전투기를 호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신형 전투기를 보유했던 독일 전투기 부대는 영국 RAF조종사들이 몰고 있는 최신 허리케인과 스핏 파이어의 위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중무장과 기동성이 뛰어난 영국의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와 달리 독일의 메서 슈미트 Me109는 높은 고도에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며 방어용 장갑이 튼튼했지만 8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달리 포탄을 발사하는 기관표가 2문 뿐이였다.

특히 독일의 메서 슈미트는 시속 500킬로미터까지만 속도를 낼 수 있는 단발엔진 항공기종이여서 런던까지 간신히 90분 정도만 떠있을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항공기 종 역시 단발성 연료 탱크로 오로지 조종 능력이 뛰어난 조종사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6세였고 영국 조종사들의 평균 연령은 20살이였다. 전투 경험이 많은 독일 전투기 부대는 영국 전투기를 종이장 처럼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프랑스 해협 비행장에 모든 전투기를 집결 시켰다.

런던 중심부까지 150킬로를 남겨둔 독일군은 샴페인 한 병을 챙기며 승리를 자신했다.

영국 땅의 처칠은 50배 가까이 늘어난 전투기와 두 척의 신형 전함 비스마르크호와 티르피츠호에 큰 불안감을 느끼며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간절한 심경과 상황을 담은 비밀 전보를 보낸다.

처칠은 미국에게는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지금 영국에게 가장 시급한 것들을 조목 조목 나열한다.

그는 전쟁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순간을 바꾸려면 서부 진입로로 들어오는 독일의 U보트 공격을 막야 한다며 구축함 60척을 요구 했다.

미국은 영국령의 뉴펀들랜드와 버뮤다 지역의 여러섬에 퍼져 있는 영국 해군기지를 미군이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8월 11일 독일은 영국의 RAF에 대한 총력전의 시작을 알리는 독수리 날로 공표하고

8월13일 야간 작전 수행에 들어 갈 루프트바페는 새로운 시스템인 빔 항법 기술을 장착했지만 단 한번도 실전에 적용해보지 않아서 성공 여부를 짐작 할 수 없었다.

조종사들은 여전히 달빛이 지상을 환하게 비춰 주는 순간에 공격한다는 태세를 갖췄다.

8월 13일 화요일 200대의 폭격기가 프랑스 셰르부르 북쪽 채널에서 날라 올라 영국을 향했다.

독일군 측 괴링은 영국RAF공격이 시작되면 폭격기 949대 급강하 폭격기 336대 전투기 1002대까지 총 2300대의 공군력을 영국 땅으로 보낸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런 엄청난 전투력을 준비 하는데에 만 30여분을 소요 한 독일을 기다렸던 영국 조종사들은 꿀에 파리를 끌어들이듯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역으로 독일 전투기들을 유인하며 느리게 천천히 활보 하다가 빠른 속도로 공중 속으로 튀어 올라가 벌침을 쏘듯 단 번에 독일 전투기들을 격추 시켜버렸다.

최신형 레이더를 능숙하게 작동 시키며 전투기를 조종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킬 때마다 단 한 명의 영국 국민의 생명을 살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투에 임하며 500대 전투기들이 이 천대가 넘는 독일 전투기들과 맞붙었다.

때마침 미군 해군은 노후화 되어 폐기 처분 하기 일보 직전의 50척 전함을 영국으로 보내며 99년 동안 임대 해 준다는 조건을 단다.

3선을 앞 둔 루스벨트는 까다로운 의회의 승인 없이 우방국 영국에게 선심 쓰듯 50척을 준다는 것에 잔뜩 화가 난 처칠은 '미국이 전함 50척을 영국으로 넘긴 것은 결정적으로 중립조치를 위반한 행위'라며 이는 독일 정부가 미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정당한 사유가 된다고 경고 한다.

영국 전투기에 격추 당하고 80대만 살아 돌아온 독일 전투기는 이제 도버 해협을 노리며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싸울 태세였다.

독일은 휘황찬란한 달, 보름에 뜨는 폭격기 달빛이 비춰준다면 영국 땅을 차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괴벨스는 영국 시민들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외국어 서비스 방송을 시작하고 히틀러는 여전히 런던 중심 폭격을 허락하지 않는다.

8월 24일 토요일 밤 영국 항공에서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 한 대가 런던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린다.

피해는 경미 했고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지만 도시 전체는 공포에 휩싸였다.

절대로 런던은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던 히틀러는 조종사의 실수로 폭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몰랐고 괴링도 폭격기와 어떻게 런던까지 날아 갈 수 있었는지 어떤 보고조차 받지 못했다.

런던 공습에 격분한 처칠은 다음날 밤 폭격기 한 대를 독일 베를린으로 보낸다.

공습 피해는 경미 했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 하지 않았다.

처칠은 독일군이 때로 몰려 오기를 기다리며 히틀러의 보복 공격에 대비 했다.

8월 31일 토요일 집단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나치군은 불같이 화내는 히틀러에게 목숨이 날아 가지 않으려면 처칠을 항복 시켜야 한다며 독일의 모든 전투기를 영국땅으로 몰고 가는 복수의 시나리오를 기획한다.

9월 2일 영국 해군 기지가 있는 뉴편들랜드와 버뮤다 기지에 도착한 미국 함대는 인디언들에게 24달러어치 물품과 술 한 병을 주고 맨해튼 섬을 받아 낸 것 처럼 낡은 구축함과 맞바꾼다.

영국 해군은 처참하게 낡고 해진 미국 구축함을 보고 망연자실 했지만 처칠은 이로 인해 미국은 영국과 독일 전쟁에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공습의 선두에서 대형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과 고폭탄을 혼합한 폭탄을 장착한 루프트 바페는 KGr100특수 기능을 장착하고 런던을 향했다.


9월 8일 루프트바페는 티타임에 왔다.

폭탄은 밤새도록 상공에서 비 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글거리는 불의 고리가 도시 곳곳으로 퍼져 붙어 활활 타올랐다.


이 날 밤 공습으로 400여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망했고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잿더미에서 살아 남은 시민들은 잔해들을 치우고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고 처칠은 불에 타버린 런던을 둘러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흘 안에 영국을 굴복 시킬 수 있다고 장담 했던 괴링은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전투를 끝내고 싶었다.

4주 동안 밤마다 영국 땅을 공격했지만 영국 국민들은 전혀 동요 하지 않았고 처칠은 꿈쩍 하지 않았다.

선전 장관 괴벨스는 영국의 이런 모습에 당혹하며 아무리 두둘겨 때리고 퍼부어도 영국이 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국의 투쟁 의지에 길어지는 전쟁에 골머리를 앓았다.

독일은 영국의 침공에 대한 어떤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했다. 베를린 시 방공호에는 다른 나라에서 밀수 한 식량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시민들이 대피할 곳이 없었다.

처칠을 굴복 시키지 못한 히틀러는 기약 없이 U보트 작전을 내세운 바다 사자 작전을 봄으로 연기 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버티게 되면 결국 미국이 전쟁에 개입 할 것이고 처칠은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을 공격 할 것이다. 영국과 소련 미국이 연합하는 순간 독일은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양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험성에 히틀러는 해협을 건너야 하는 영국 침공보다 광활한 대지의 소련 땅을 침략하는게 훨씬 쉬워 보였다.

독일 나치가 딱 6주 공격을 계획한 레닌그라드 함락 작전은 처칠이 일기장에 '할렐루야! 만세'라는 문장을 적게 만든다.

독일이 거세게 런던 공격을 때리자 런던은 독일 전투기가 목표물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도시 전체를 어둠으로 만드는 등화 관제를 실시한다.


안전한 지역에 살지 않은 시민들은 방공호로 모였고 그곳에서 방독면 마스크를 비롯해 정부의 지침을 라디오에 의지하며 어제와 다름없이 일터로 출근 했다.

상점들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이어갔고 어두워지면 굉음의 독일 전투기가 어둠의 공포를 증폭 시켰다.

음악가들은 내셔널 갤러리에서 콘서트를 열어 죽음의 공포를 시민들과 함께 견뎌 냈다.

폭격으로 파괴된 런던 시 곳곳은 어디 하나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처참한 상황으로 바뀌어 갔다.

집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옆집에 폭탄이 떨어진 광경을 보는 게 런던 시민들의 일상이였다,


폭탄 세례는 더욱 거세졌지만 런던 시민들의 두려움은 점점 줄어 들어 공습 중에도 강아지와 함께 공원 산책을 나갔다. 낯선 이들과 만나면 서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위로 했고 부족한 물품을 교환 했다.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온갖 종류의 잡지와 차들이 시민들의 도움과 협조로 서로 함께 읽고 마셨다.

야간 공습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 런던 영유아 출산율이 급증했고 클럽의 음악은 단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밤마다 런던을 두들겨 때려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처칠 때문에 괴벨스는 무척 당황했다.

영국이 투쟁 의지를 포기 하지 않았고 곧 혹독한 겨울이 다가 오면 소련으로 진출한 군대가 어떤 상황에 부딪칠지 모른다.

동시다발 전을 피하고 싶었던 히틀러에게 괴링은 영국의 강력한 저항을 부셔 버릴 작전인 '월광 소나타'를 계획한다.

작은 도시를 집중 파괴해서 아예 도시 자체를 없애는 목적인 '월광소나타'

처칠은 독일의 침공에 강력하게 저항하라며 프랑스 인들을 향해 용기와 투쟁의 의지를 호소하고 연합 작전으로 독일 도시를 폭격한다.

11월 4일 목요일 오후 5시 18분에 달이 뜨자 런던 도시 전체가 등화 관제에 들어간다.

독일군이 코번트리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영국 무선 대응팀이 비밀 암호를 해독한다.

이날 늦은 저녁에 떠오른 달빛은 신문을 읽을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런던 시민들은 11월에 이토록 밝게 빛나는 달을 본 적이 없었다.

오후 7시 5분 지역 민방위 통제실에 런던 시민에게 '황색 공습 메시지' 사이렌을 울리고 뒤이어 '적색 공습 메시지'를 울린다.

전에도 여러 번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던 코번트리 시민들은 공습 대비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7시 20분 달빛처럼 하늘에서 환한 불꽃들이 낙하산에 매달린 채 땅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우가 내는 소리를 내고는 폭발하면서 발화 물질을 사방에 뿌렸다.

사탄 5발이 뿌린 포탄은 비처럼 쏟아져서 코번트리의 모든 수도관을 파괴했고 대피소 까지 강타 했다.

도시 전체는 불에 탄 시신으로 넘쳐 났고 발화 된 불은 병원과 성당, 교회 소방소 경찰서를 차례 차례 잿더미로 만들었다.

11시간 동안 비처럼 내린 폭탄은 다음날 새벽 6시 까지 쏟아졌다.

121회나 출격한 영국 RAF는 독일 전투기를 단 한 대도 추락 시키지 못했고 코벤트리를 구하지 못했다.

괴링은 509대의 폭격기로 코번트리를 초토화 시켰다.

11월 8일 처칠은 눈물로 얼룩진 전보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다.

루스벨트는 3선 재임 성공으로 미 해군 순양함을 타고 카리브해에서 일광욕과 영화 관람을 하며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처칠은 미국에게 막대한 양의 선박과 항공기 ,총탄, 기계 부품, 식량 원조가 필요 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영국은 막대한 원조를 보상할 재정은 빠르게 고갈 되어 가고 있어서 설사 미국이 원조대금을 후에 청구 한다 해도 갚을 돈이 없었다.

12월 16일 카리브해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요근래 특별한 뉴스 거리가 없다.'는 말로 기자들과 간담회를 나누며 불이 난 이웃집에 정원용 호스를 빌려주듯 불이 난 집에 15달러짜리 호수를 빌려주고 불을 다 끄고 난 후 빌려준 호스만 제자리에 갖다 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루스벨트는 ' 미국의 방위 및 기타 목적을 증진하기 위한 추가 법안'을 상정해서 영국이든 어떤 동맹국이든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고 없고 여부 없이 필요할 경우 모든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일명 '무기대여법'이라는 법안을 제안한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미국 청년들을 땅에 묻어 버려야 하냐는 의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고 처칠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국으로 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다.

12월 29일 일요일 밤 루스벨트는 '노변 담화(fireside chat)에서 영국 지원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미국 국민에게 처음으로 '나치'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그는 미국을 '민주주의 병기창'이라고 지칭하며 '잔인한 상대에겐 어떤 유화 정책도 소용 없습니다. 만약 영국이 패배한다면 우리는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사악한 동맹의 총부리 끝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수 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날 방송을 들었고 동시에 영국인들도 새벽 시간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목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1940년 12월 31일 자정을 기준으로 괴링은 단 한번의 화재 공습으로 런던을 날려 버리겠다고 전투력을 보강한다.

1941년 2월 6일 목요일 히틀러는 러시아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착착 진행될수록 영국의 끈질긴 저항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공군과 해군에 새로운 작전 지시를 발령해서 영국에 보다 더 높은 강도의 공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한다.

2월 8일 토요일 미국 하원에서 무기 대여법이 통과 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항복 했으니 당연히 우리도 항복할 줄 알았겠지만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가스 공격, 낙하산 공격, 글라이더 공격에 항상 대비하고 미리 생각 하고 기량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히틀러가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대영제국을 무너뜨려야 할 것입니다. 계속 항해하라, 오, 조국의 배여.'


영국 국민이 처칠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 괴벨스도 듣고 있었다.

아프리카 전선에 이어서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 영국군은 독일군 세력에 밀렸고 바다와 하늘에서는 U보트와 루프트바페의 위력에 영국 곳곳이 흔적 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괴벨스는 우리가 원했던 적의 모습을 이제서야 볼 수 있다며 활기 넘치게 선전술을 펼쳐나갔다.

4월 28일 월요일 미의회는 전쟁 개입 여부를 놓고 여전히 격론 중이였다. 독일은 몇 주만 집중 공격 하면 영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소련으로 전력을 집결 시킨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독일은 머뭇거리며 영국과의 평화 협정을 위해 서부 전선에서 군대 진격을 멈춰 놓고 전력의 25%에 해당하는 국방군 40개 사단도 해산하자 군 내부는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1941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 둔 12월 어느 일요일 저녁, 얼어붙은 소련 땅에 발이 묶여 버린 독일 기갑부대가 멈춰버린 순간 일본 항공기가 하와이 섬에 있는 미군 해군 기지인 진주만을 급습한다.


다음날 루스벨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12월 11일 히틀러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 한다.

처칠은 이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거센 폭풍을 만날 수도 있지만 뒤집히거나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군은 500여 대의 폭격기와 620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최대 규모의 폭격에 나섰다. 영국 공군은 단 한 대의 예비 기체도 남기지 않고 모든 전투기를 출격 시켜 맞섰다. 체공 시간이 짧은 독일 전투기들은 고전했다.

밤낮으로 계속된 전투에서 영국군은 29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독일군은 80대가 넘는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었다. 귀환 도중 연료가 바닥난 수십 대의 독일 전투기들이 도버 해협에 떨어지고 독일군의 기세는 꺾였다.

이제 독일이 공군력으로 영국을 굴복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제공권을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륙작전은 불가능했다. 피해가 누적되자 독일군은 야간 폭격으로 전환했다. 이듬해 초까지 독일군의 폭격이 이어졌으나 효과는 점차 떨어졌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독일 공군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영국은 끝내 살아남았다.

영국이 본토 항공 전에서 승리하자 독일에 점령 된 국가들은 승리의 희망을 얻었다.

미국 정부도 영국에 지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폭격에 시달리던 영국 항구들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발진 기지가 됐다.


폭격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고, 방독면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방독면에 미키 마우스를 그렸다. 부서진 건물 잔해를 치우며 사람들은 쾌활하게 농담을 내뱉었다.

처칠 총리는 한밤중에 거리로 나가 시민들을 독려했다.


부서진 도서관에서 시민들은 서가에 꽂힌 책을 읽었다. 날마다 누군가 죽어가는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은 연애하고, 산책하며 활기를 이어갔고 지하 대피소 에서는 즉흥적인 공연이 벌어졌다.


영국 국민들은 휘황찬란한 보름달‘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 뜰 때마다 “오늘 밤에 (전투기가) 더 많이 몰려오겠지”라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살아 남았고 이겨냈다.

자신을 간신히 비껴 간 폭탄을 보며 매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극한의 상황을 버텨낸 이들은 ' 침착하라. 하던 일을 계속하라(Keep calm and carry on)’' 라는 구호를 외치며 끊이지 않는 공습 사이렌 소리와 포성 속에서 견뎠고 살아 남았다.


'그날 밤은 구름 한 점 없고 별이 총총 했으며 달은 웨스트민스터 상공에 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도 없을 것이다. 지평선의 어딘가에서 엇갈리는 서치라이트 불빛, 포탄이 터지는 하늘에는 별 같은 섬광, 먼 곳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광채 등, 여러가지가 그 정경에 더해졌다. 웅장하면서도 끔찍했다. 머리 위로는 적기의 웅웅 거리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포성이 멀리 때로는 가까이 들렸다. 평화로운 때 전동열차가 신호하는 조명처럼 대포가 발사될 때마다 빛이 번쩍였다. 하늘에서는 수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진짜 별도 있고 인위적인 별도 있었다. 자연의 찬란함과 인간의 사악함이 이렇게 두드러진 대조를 보인 적은 없었다.'- 처칠 개인비서 '존 콜빌' 일지 중에서

처칠은 영국과 프랑스군 약 34만명을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철수 시키는 데 성공한 후 항공기 생산부를 신설하고, 전투기 생산과 승무원 훈련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임박한 본토 공격에 대비하며 미국이 참전 하기 전까지 버텼다.

암울한 세계 권력 구도 속에 영국이 처한 냉혹한 상황을 영국의 어떤 지도자들 보다 잘 알고 있었던 현실주의자 처칠은 국민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다짐하며 독일에게 굴복 하지 않았다.


1940년 9월 7일 런던 중심부에 대규모 첫 공습 이후 1941년 5월 11일 영국 대 공습이 끝날 때까지 영국 전역에선 4만 4652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5만2370명이 부상 당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소련 침공 전까지 집중적으로 이어진 영국 대 공습은 영국 전 국토와 국민의 심신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45년 5월 8일 전쟁 속에서 살아 남은 영국 국민들은 두 달 후 치루어진 선거에서 처칠을 총리로 선택하지 않는다.


'적의 도발에 평화를 애걸하면 비극을 초래한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찬란한 이들과 사악한 자들(The Splendid and the Vile)’로 처칠이 총리로 취임한 1940년 5월 부터 1941년 5월까지 1년 동안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지도자의 관점과 전략에 따라 전세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처칠 주변의 인물들과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추적하며 생과 사의 순간을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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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2022-03-01 11: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스캇님 글 읽으니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장바구니에 쏙~ ㅎㅎ

scott 2022-03-01 11:59   좋아요 5 | URL
이 책 몰입감 👍👍👍

전 지유님이 읽으신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장바구니 속으로~@@@

휴일 평안하게 ^ㅅ^

새파랑 2022-03-01 12: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방금 <서부 전선 이상없다> 책을 읽었는데 또 스콧님의 이런 전쟁 관련 리뷰를 보니 전쟁은 정말 비극인거 같아요 ㅜㅜ 특히 그 피해는 정치지도자가 아닌 군인들과 시민들만 받고..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ㅜㅜ

scott 2022-03-01 12:11   좋아요 6 | URL
레마르크
사랑할때 죽을 때,,,
강추 합니다 ^^

전쟁에 가장 큰 피해자는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어린이들 ㅠ.ㅠ

대장정 2022-03-01 12: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전쟁관련 책들이 많이 올라오네요. 히틀러의 선동적인 저 얼굴보다 무표정한 푸틴의 얼굴이 더 무섭.

scott 2022-03-01 12:55   좋아요 5 | URL
칠순 푸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미미 2022-03-01 1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서 2차세계대전 다큐로(몇 부작짜리)본 내용들인데 하나의 페이지로 정리하신 스콧님 존경합니다!! 페이지 찜해두고 몇 번 더 읽어야겠어요👍 이당시 물밑에서 암호전쟁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더 치열하게 느껴집니다.

scott 2022-03-01 13:32   좋아요 4 | URL
정리한것이 아닌
이 책 넘 ㅎ
좋아서 몇 달동안
베개 옆에 🙈
암호 전쟁 해독한 영화
강추 합니다

미미 2022-03-01 13:41   좋아요 4 | URL
혹시 <이미테이션 게임>인가요? 이 영화는 봤는데 다른거면 제목을 알려주세요😁

scott 2022-03-01 13:44   좋아요 4 | URL
네^^
베니가 남주🤗

페넬로페 2022-03-01 13: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글을 읽으며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 당시의 긴박했던 스토리가 한 눈에 들어오네요. 아무튼 히틀러, 참 ㅠㅠ
결국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도자도 중요하고 힘도 있어야한다는 것이네요^^

scott 2022-03-01 15:2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푸틴 히틀러 스탈린
이들의 광기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 ㅠ.ㅠ

우크라이나 피투성이 된 아이들 ㅠ.ㅠ

이번 기회에 푸틴 완전히 사라졌으면,,,

coolcat329 2022-03-01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저 어제 이 책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사라는 계시같습니다.

scott 2022-03-01 16:34   좋아요 2 | URL
이 책 매력 여기에 전부 담지 못했습니다😆
쿨켓님 휴일 평안하게 ☺

거리의화가 2022-03-0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 소개 감사합니다. 작년 말에 눈여겨보았던 책인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사진까지 함께 올려주셔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영국 땅을 보니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오버랩이 됩니다.

scott 2022-03-01 17:55   좋아요 3 | URL
소개한것이 아닌
저의 땀과 눈물로 쓴,,,,

우크라이나 국민 극심한 공포 죽음 앞에 놓여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화가님 3월에도 알찬 독서!^^

mini74 2022-03-01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임벌린 동네 이장이나 할 인물이라고 악평이 엄청나더군요. ㅠㅠ팃포텟전략이 필요할 때도 있는거 같아요. 스콧님이 소개하시면 무조건 사고싶어집니다. 정성어린 리뷰에 참 고맙습니다 스콧님 ~~

scott 2022-03-01 22:07   좋아요 2 | URL
동네 이장!ㅎㅎㅎ
이장이 훠얼씬 냉정한 현실주의자!로 동네 주민의 생명과 안전에 만반의 준비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체임벌린,,,,
영화 처칠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 했는데
진인짜 저 사진 속 인물과 똑같이!
연기를 ㅎㅎ

이 책 강추! 합니다
소설도 이보다 더 재밌을 수가 없능!

팃포텐 전략!
전 미니님 소총 리뷰 읽으러
슈우!웅~@@@

그레이스 2022-03-01 2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으
이 길이 뭡니까!
저는 우크라이나 정리하다가 현대사로 오면서 지쳐서 줄였는데...
참 감탄하게 됩니다. ^^

scott 2022-03-01 23:17   좋아요 2 | URL
지도, 사진, 년도 필수 체크!ㅎㅎㅎ
현대사로 넘어가면
더더욱 길이 조절이 힘드러집니다

담주엔
조금 더 기일게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쏜살 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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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울부짖을 태세로 펑펑 눈물을 쏟아낼 태세로 글을 썼던 뒤라스,비록 부서지고 상처에 베일지라도 매순간 고통 속에서 온 몸을 관통 하듯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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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3-01 0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진 백자평이네요 괴롭고 힘들어도 글 쓰기를 멈추지 않다니 대단합니다


희선

scott 2022-03-01 12:57   좋아요 2 | URL
뒤라스의 모든 삶 글쓰기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겁니다

책읽는나무 2022-03-01 0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 멋지네요.
그리고 멋진 뒤라스!!^^

scott 2022-03-01 12:57   좋아요 2 | URL
나무님
휴일
맛점😊

새파랑 2022-03-01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뒤라스의 말들>? 요책을 서점에서 잠깐 읽었는데 이 책은 다른 책인가 보네요. 뒤라스의 인생도 한편의 소설 같아요~!

scott 2022-03-01 12:5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책탑속에 이 책 있을것 같습니다 😊

미미 2022-03-01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쏜살문고에 뒤라스고 스콧님이 별5개 주셨으니 찜입니다~😉

scott 2022-03-01 12:58   좋아요 2 | URL
쏜살문고 가격이 착해서
쿠폰 사용 금액 맞출 때 좋습니다 🤗
 
이별없는 세대 문지 스펙트럼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 김주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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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한 가운데서 삶의 희망을 져버리지 않았던 볼프강 보르헤르트 ‘삶을 믿어,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말이야. 이게 바로 우리야. 우리는 환상이 없는 자들이면서도 머릿속에는 불가능한 큰 꿈을 품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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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2-28 00: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챌린지 시!작!
22주동안 달리자
🏃‍♂️🏃‍♀️🏃‍♂️🏃‍♀️🏃‍♂️🏃‍♀️🏃‍♂️🏃‍♀️

라파엘 2022-02-28 00:25   좋아요 4 | URL
스콧님, 100자평 1등 🏃‍♂️🏃‍♀️🏃‍♂️🏃‍♀️

scott 2022-02-28 00:26   좋아요 5 | URL
라파엘님 2월 28일 오늘 부터 시작입니다
잊지 말고 22주 동안
100자평 올리귀~ㅎㅎㅎ
🏃‍♂️🏃‍♀️🏃‍♂️🏃‍♀️🏃‍♂️🏃‍♀️🏃‍♂️🏃‍♀️

페넬로페 2022-02-28 00:45   좋아요 5 | URL
scott님!
아자아자📖📕

scott 2022-02-28 23:23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도 100자평
22주 동안 함께
챌린지 시작해요!
🏃‍♂️🏃‍♀️🏃‍♂️🏃‍♀️🏃‍♂️🏃‍♀️🏃‍♂️🏃‍♀️

페넬로페 2022-03-01 01:57   좋아요 0 | URL
저는 놓쳤어요, ㅎㅎ
벌써 마감되었더라고요^^

바람돌이 2022-02-28 01: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깜박하고 있었는데 저도 해야지요. ^^

scott 2022-02-28 23:24   좋아요 4 | URL
역쉬!
바람돌이님
바람의 속도로 챌린지 신청 성공!ㅎㅎ

책읽는나무 2022-02-28 06:1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우와...이제부터 시작입니까??
백자평 은근 어렵던데..ㅋㅋㅋ
암튼 응원합니다.
22 주가 지나 있음 스콧님 백자평 달인 우뚝!!!👩‍🎓👩‍🎓 화이팅입니다^^

scott 2022-02-28 23:24   좋아요 6 | URL
제가 백자평만
천여편을 넘게 올려서
어느날
서재의 달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ㅎ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2-28 08: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백자평 레이스 시작! 100자평 저도 어렵더라구요 화이팅입니다!ㅎㅎ

scott 2022-02-28 23:25   좋아요 3 | URL
화가님도
22주 동안 챌린지
함께!🏃‍♂️🏃‍♀️🏃‍♂️🏃‍♀️🏃‍♂️🏃‍♀️🏃‍♂️🏃‍♀️

미미 2022-02-28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백자평인데요?! 책 소개에 넣어도 좋을듯한 느낌!🤭

scott 2022-02-28 23:25   좋아요 3 | URL
볼프강 보르헤르트
고딩때 읽고 감동 받았는데
옛날 책이 사라져서
문고본으로 구입!ㅎㅎ

미미님도 22주동안 100자평 챌린지
함께 !
🏃‍♂️🏃‍♀️🏃‍♂️🏃‍♀️🏃‍♂️🏃‍♀️🏃‍♂️🏃‍♀️

새파랑 2022-02-28 09: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시작일이군요 ㅋ 저도 입력해야겠습니다~!!

scott 2022-02-28 23:26   좋아요 5 | URL
새파랑님 드디어
그동안 구입한
책탑200여권
100자평이
쏟아져 나오는 거죠? ㅎㅎㅎ
🏃‍♂️🏃‍♀️🏃‍♂️🏃‍♀️🏃‍♂️🏃‍♀️🏃‍♂️🏃‍♀️

mini74 2022-02-28 17: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이 시같아요 스콧님 ㅎㅎ 넘 좋은 출발! 파이팅입니다 *^^*

scott 2022-02-28 23:26   좋아요 4 | URL
미니님 함께 100자평
챌린지 22주동안
🏃‍♂️🏃‍♀️🏃‍♂️🏃‍♀️🏃‍♂️🏃‍♀️🏃‍♂️🏃‍♀️

대장정 2022-03-01 0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불가능한 큰 꿈을 품는다. 어디서 많이 본 글귀가 떠오릅니다. 체게바라, 우리 모두 리얼 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챌린지 22주 🏃‍♂️🏃‍♀️🏃🏃‍♂️🏃‍♀️🏃 성공기원! 합니다

scott 2022-03-01 00:23   좋아요 3 | URL
체게바라! 👍 ^^

대장정님 서재방 가득 채운 책들
100자평 22주동안 충분히 꽉 채울 수 있는 데!
대장정님
3월 건강하게 !^^

희선 2022-03-01 0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 한가운데서 삶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다니 대단하네요 죽음이 한가운데가 아니어도 희망은 없어 할 때가 더 많은데...


희선

scott 2022-03-02 10:28   좋아요 1 | URL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삶의 여정이 전쟁,자해,포로 수용소,감금,,,탈주,,로 이어지면서도 글쓰기를 포기 하지 않았네요.
한국에서 독일 작품중 헤세와 릴케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거의 모든 작품들이 번역 되었지만,,
보르헤르트도 굉장한 작가인데,,,
 
드립백 브라질 산토스 디카페인 - 10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8월
평점 :
품절


견과류의 고소함과 부드러운 초콜릿의 단맛, 커피 고유의 맛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카페인 걱정은 없는 브라질 산토스 디카페인 이 가격 그대로 유지 되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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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24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드립백으로도 사봐야겠네요^^

2022-02-25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2-25 0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립백은 오르지 않았더군요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 오를지... 디카페인이어도 괜찮군요


희선

scott 2022-02-25 23:30   좋아요 2 | URL
브라질 원두 생산량이 기후 변화 떄문에 줄었고 운송 문제까지 겹쳐서 3월 부터 전부 다 오를 것 갔습니다
한국 믹스 커피 값부터 확 올라가니 ㅠ.ㅠ
 
미국인 이야기 2 : 전쟁의 서막 1770~1780 -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미국인 이야기 2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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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영국의 노스 행정부는 거대한 식민지 미대륙과의 분쟁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비교적 온순한 성품에 평화적인 분위기로 영국 정계를 이끌었던 노스는 미 대륙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톤젠드 관세를 철폐하면서 표면상으로 미국과 비교적 평온한 기류를 주고 받았다.

식민지를 괴롭혀 왔던 통화법도 수정하니 3년 동안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영국은 마음만 먹으면 거대한 미대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믿었다.

영국의 속내를 알아차린 미국인들은 영국의 온건한 정부 정책에 대해 큰 동요나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기존의 식민지 경영에 대한 낡은 법안을 포기 한다면 어떤 식으로 든 저항이나 봉기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며 영국에서 새로 내놓는 법안에 촉각을 기울였다.

하지만 쉽사리 법령을 뜯어 고치거나 수정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영국 의원들은 <차>에 대한 관세는 여전히 굵은 고딕체로 남겨 두었다.

1771년에는 관세 문제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인 종교적 자유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 교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프로테스탄트들 신자들은 영국 국교회가 미 대륙 전체로 정치 세력화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앞 세워 국교회 반대 종파들을 하나로 집결하기 시작한다.

장로교, 루터교, 네덜란드 개혁교들을 중심으로 종교의 자유는 곧 시민의 목소리, 자유로 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교회 수장들이 차지 하고 있는 주요 대학들의 학장 자리를 차지 하면서 대학의 입학과 졸업식에서 국교회 예배를 없애 버린다.

영국에서 파견된 주교들이 차지 하고 있는 각 주에 퍼져있는 교회당에서 끊임없는 분란이 일어나고 이는 또다시 관세 징수 문제로 불이 붙어가게 된다.

지난 3년 동안 과세를 올리지 않은채 온건한 정책을 펼쳤던 영국은 막대한 양의 밀수 상품들로 뒤덮여 가고 있는 보스턴 항구로 세관 징수관을 파견한다.

1770년대 보스턴 항만에는 네덜란드 상인들과 교류 하는 불법 밀수업자들의 천국이였다.

이들은 무기로 무장해서 밀수 혐의를 포착하고 체포 하려는 세관원들을 납치 하거나 구타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보스턴 항구가 무시 무시한 밀수업자들의 천국 이였다면 로드아일랜드 항구는 어디서 폭약이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으로 현지 보안관과 밀수 업자가 한 팀으로 움직여서 흔적도 없이 영국에서 파견된 세관원들을 폭약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로드 아일랜드에서 영국 세관원들이 밀수 업자들을 단속하려고 탑승한 배 '개스피호'를 불태워버리자.영국 내각은 이 사건을 조사할 위원회를 구성한다.

1773년 여름 로드 아일랜드 주 정부는 자국민은 무죄라는 보고서를 영국으로 보낸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고 목격자들 조차 찾지 못했던 영국은 개스피호 사건을 종결 시키자 뒤이어 보스턴 통신 위원회에서 [식민지에 사는 남녀 노소 크리스천이 영국 신민으로서 누리는 식민지인의 권리를 선언하고 그 권리를 식민지의 여러 지역에 알리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행된 그 권리의 침해와 위배 사안을 온 세상에 퍼트리고 각 지역이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소통하도록 한다.]는 선언을 한다.

이 선언문은 소책자로 인쇄되어 주 전체로 퍼지면서 시민들은 '영국인들은 우리 집과 침실 그리고 키우는 개에게도 관세를 물릴지 몰라. 우리가 먹고 입는 모든 것에 저들이 세금을 붙여서 탈탈 털어가고 있어. 우리는 저들의 하인이 아니야.'


어떤 권력도 민중이 자유를 적법 하지 않은 방법으로 뺏을 수 없었다.

미국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영국 정부에 고스란히 양도 할 생각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보스턴의 선언문이 여러 주로 퍼지자 영국에 절대적으로 충성 했던 매사추세츠 총독 토마스 허친슨은 자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나는 영국 의회의 지고 한 권위와 식민지의 완전 독립 사이에 아무런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메리카인이 누리는 자유는 영국에서 부여한 자유로 우리 모두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 하면서 자유를 제한 할 수 밖에 없다고 항변 했다.

허친슨 총독은 본국에서 4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미 대륙에서 본국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정부, 미국 시민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 해 줄 수 있는 자치 정부가 없다고 믿었다.

본국과의 단절은 또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이어져 결국 미 대룩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허친슨의 예측이 미 대륙인들의 저항 정신에 불을 붙여 버렸다.

1773년 허친슨 총독의 서안을 받기 전 영국 의회는 자신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재정적 위기에 빠진 동인도 회사를 구제하기 위한 <차세법>을 통과 시킨다.

이 법안은 식민지에서 거래 되는 모든 종류의 <차>에 대한 독점권을 영국 정부가 가져 간다는 것이였다.

미대륙인들은 <차세법> 통과는 곧 자신들을 노예로 만든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차세법>이 통과 되기 이전에 미국인들은 합법적으로 <차>를 수입 했었다.

상당량의 <차>들이 네덜란드인에 의해 불법으로 밀수 되었지만 미국인들은 영국에서 들어 온 것만 진품<차>로 믿고 밀수 된 차 보다 배로 비싼 영국산<차>를 마셨다.

하지만 영국 의회에서 <차세법>이 통과 되자 파운드당 3펜스의 관세가 붙어버린 <차>를 수입하는 업자들은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버린다.

영국 의회는 미국인들에게 어떤 이유로 차에 대한 과세를 붙였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마시는 차 까지 관세를 붙이는 영국인들에게 노예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심이 들끓어 오르자 11월에 들어서서 동인도 회사에서 보내는 일부 차에 대한 관세는 붙지 않는 다고 공표 했지만 앞서 몇 해전에 인지세법과 톤젠트 법안을 폐기 시킨 위력을 행사 했던 시민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의회에 로비한 주요 관계자들, 동인도 회사 대리인들의 사퇴를 받아내는 위원회가 출범 되고 부유한 퀘이커 상인들은 단합해서 주요 정치 인사들을 끌어 내린다.

거침없는 행동과 단합으로 똘똘 뭉친 민심의 회오리는 동인도회사 화물선이 도착 하는 항구로 몰려 들게 만들었다. 이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정치인들과 총독은 앞서 발생한 사건들을 잘 알지 못한 채 법을 지키는 수입업자와 밀수 업자들 모두 이익을 본다며 모든 차를 압수 하기 시작한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거센 저항을 하던 시기에 보스턴의 기류는 오히려 차분하게 흘러 갔는데 그 이유는 오랜 세월 다양한 방법으로 유통 되었던 밀수 된 차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보스턴 시민들에게 차에 대한 관세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턴의 주요 신문들이 앞 다퉈 차세법 내용을 요약 게재 해서 식민지에 대한 영국 의회의 폭정을 시민들에게 상세하게 알린다.

차에 대한 관세를 시작으로 설탕-당밀-와인등으로 미국 시민들의 식재료에 서서히 관세가 붙어 나갈 것임을 지적한 미국의 주요 언론을 통해 보스턴 시민 위원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1773년 11월 28일 대량의 차를 싣고 온 첫 배인 '다트머스호'가 항구에 도착한다.

세관에 도착이 기입 되는 순간 이 배는 20일 안에 화물에 대한 관세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에 지불 하지 않으면 이 배의 화물 전체가 압류되기 때문에 다트머스호의 선주 프랜시스 로치는 화물을 하역 하고 고래기름을 배에 싣고 동인도 회사의 지시를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총독도 차후 무슨 일이 발생 하더라도 일단 법규는 지켜서 모든 사람들이 20일 안에 세금을 납부 해야 상인들이 손해를 크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분고분 세금을 내지 않기로 합의한 상인들은 5000여명이 집결해서 화물에 싣고 온 차를 영국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관징수관인 리처드 해린슨은 1768년 대규모 폭동 당시 세관 징수관이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 시민들에게 어떤 보복을 당했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회항 통행을 거부한다.

회항 신청을 거부하는 이들과 회항 해버리려는 이들은 서로 6시간 넘게 대치하다가 전쟁 속으로 뛰어드는 병사들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선창을 따라 달려 다트머스호가 정착된 부두로 모인다.


인디언 복장을 한 50여명의 남자들이 배에 승선해서 차가 든 궤짝을 갑판 위에 올려서 부셔버리고 보스턴 항구 앞 바다로 던져버린다.

배 주변의 바닷물은 온통 차 잎으로 뒤덮였지만 폭도들은 배를 파손하지도 않았고 선장이나 선원들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한 달 후 머나먼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의원들은 보스턴 시민들의 폭정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 상인들의 심정이나 상황을 이해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곳곳에서 저항의 움직임 소식이 들려 오자 이로 인해 미 대륙이 완전히 독립을 울부짖는 다면 사태가 심각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무력을 사용 해서 라도 13개 미 대륙의 식민지 모두를 굴복 시켜야 함을 통감하며 의회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충돌 하며 미 대륙을 엄하게 다스릴 '참을 수 없는 법'인 5대 법 가운데 첫번째로 <보스턴 항구법>을 통과 시킨다.

이후 메사추세츠 규제법등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을 거세게 하는 주에 대한 강력한 처벌법을 차례차례 통과 시키며 자국의 권위와 이익을 앞세운다.

사정이 어떻든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 복속 시키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자들은 구속한다.'는 선언은 미국 시민들에게 도저히 참고 견디기 힘든 모욕이였다.

보스턴 시민들은 <보스턴 항구법>과 비슷한 법이 곧 미국의 13개 주로 퍼져서 자유를 억압 하게 될 것 이라며 기술자들도 함께 저항하고 봉기 하자고 제안 한다.

각자의 기술로 이익을 취했던 기술자들은 수입품으로 먹고 사는 상인들의 단체 행동에 선뜻 나서지 않았지만 주 정부에서 대륙 회의 개최 하지 놀라운 속도로 합의 하고 하나로 뭉친다.

1774년 9월 부터 10월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된 1차 대륙회의에서 아메리카 권리의 바탕은 무엇인지, 그 권리를 어떻게 옹호 할 것인가?

이 두 가지 사항이 핵심 논의 주제였다.

1차 대륙회의 에서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지만 쉽게 합의를 도출 하지 못한다.

13개 주의 각기 다른 이해 충돌과 이견이 있기에 '영국과 아메리카의 상호이익'은 서로 존중 되어야 한다는 포괄적 대의 제시를 하고 선언문 속에 수입 거부, 소비 거부 , 수출 거부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포함 시키기로 합의 한다.

청교도와 침례교를 믿는 주들은 서로 다른 종교에도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13개주의 주민들의 공동적 이해 관계를 함께 묶어 '검소, 절약, 근면,투계 과시적 행사 ,연극, 기타 값비싼 여흥과 오락을 억제하고 불용한다.'는 가치관으로 합심해서 아메리카인은 공공의 복지에 관한 헌신은 오로지 정치적 자유에서 나온다는 점을 선언문을 통해 드러냈다.

평화적이면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영국 의회의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항한 제 1차 대륙회의의 선언문을 받은 영국측은 표면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미 대륙의 13개주 주요 정치 인사들 중 영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포섭해서 분란과 분열을 조장시킨다.

대륙회의 의원들은 미국인의 과반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13개 주 전체 인구 중에 약 15퍼센트 인구가 거주 하고 있던 메사추세츠 서부 지역의 인사들이 선언문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고 뒤이어 가장 부유했던 버지니아주에서 소규모 정치 혁명이 시작되었다.

민병대를 조직 하고 무기를 모으는 시민들 항구 곳곳에 도착하는 동인도 회사 배를 불태우며 항거 하자 영국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세금은 부과 해야 한다. 절대로 식민지의 저항에 굴복 하지 말고 냉정한 태도로 채택된 주요 법안을 철저하게 이행 하면 결국 저들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영국은 보스턴처럼 각 주의 항구에 몰려든 분노한 시민들은 상인과 농부들로 일시적으로 분노하고 집결해서 투쟁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치부 했다.

하지만 현지에 파견된 동인도 회사 보안관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며 본국에 증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인들의 저항에 대한 상세한 보고는 영국 의회에 매일 전달 되었지만 의원들은 <참을수 없는 법>의 이행만 밀어 붙이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점점 거세져서 '전쟁으로 영국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 할것인지.' 결정하라며 주 정부에 대답을 요구 했다.

미국은 보스턴에 주둔 하고 있는 영국군을 철수 하고 식민지인의 동의 없이 식민지에 과세 하지 않는다는 법률 제정을 추진하며 영국에 지배나 종속 되지 않는 미 의회의 주권을 재 확인하겠다고 영국 측에 통보 한다.

영국은 겉으로 평화의 제스처로 응답 했지만 상하원은 반란 상태의 식민지를 영국의 법률과 주권에 복종 시키려면 무력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건의를 국왕에게 제출하고 국왕은 이를 승인한다.

영국은 즉각적으로 보스턴의 찰스 타운의 화약과 케임브리지의 대포를 압수 하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실패로 돌아 간다.

순식간에 4천명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인 영국군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보스턴 시민 민병대에 투쟁에 벌벌 떨고 어떤 화약도 대포도 압수 하지 못한다.

영국측은 미 대륙에 시민 복장으로 위장한 정찰 군인들을 파견 하지만 시민들의 예리함에 신분이 금새 탈로 나버린다.

영국은 시민 민병대의 우두머리와 각 주에 흩어진 민병대원들의 주요 인물들을 납치 하거나 체포 할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밀수꾼들은 과감하게 유럽에서 총기를 밀수해서 미 대륙 곳곳으로 보낸다.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은 애초 부터 구체적인 항거 계획이나 협동 단결 없이 어느날 불쑥 모여든 이들로 구성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장교 출신,해병출신, 정보병 출신 시민들이 합류 하면서 400여명의 병력이 집결하는 특공대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병력을 수송할 소형배들이 속속 강에서 부두로 이동했고 보스턴 일대를 가로 질러 흐르는 찰스 강에 떠 있는 영국 군함으로 향했다.

영국 군함은 즉각 경고를 날리며 소규모 정찰 장교단을 파견 했지만 현지인들만 파악 하고 있는 지형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떤 정보도 수집하지 못한다.

1775년 4월 18일 영국군은 대포를 보유 하고 있는 콩코드 민병 부대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위해 새벽부터 보스턴을 출발했지만 이미 다양한 첩보 경로로 이 상황을 알아차린 콩코드 민병 부대는 영국군이 도착하기만 기다리며 정확한 위치에서 공격할 대포를 설치한다.

콩코드 민병 부대를 지원 할 세력들이 도착하자 콩코드 민병대는 북소리를 울리며 위치를 알려준다. 영국군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통해 민병대원 부대의 규모를 짐작하며 총 6개 중대를 분산 시킨다.

400여명의 민병대원들은 6개 중대 영국군에 맞서서 울창한 삼림 속 50미터 폭의 강을 하나 두고 종대를 유지 해서 대응 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맞붙었다.

서로 사정 없이 쏘아 대는 교전 중에 천 여명의 렉싱턴 민병 부대가 합류 하면서 대포를 쏙 시작했다.

전투는 점점 살벌한 양상으로 이어져 농민 출신 부대원들이 휘두르는 손도끼와 몽둥이로 영국군에 달려 드는 동안 영국군의 또다른 중대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급습해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총 273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 측 사상자는 총 95명이였다.

군인들과 맞서 싸운 것이 아닌 반란을 일으킨 민중과 맞붙은 전투는 빠른 속도로 13개주 식민지로 퍼져 나가면서 미국 시민들의 가슴에 복수의 열망을 피어 오르게 만들었다.

이 전투는 모든 인종과 계급을 막론하고 오로지 무력 사용 만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게 되고 제2차 대륙회의 소집 일정을 앞당긴다.

1775년 6월 14일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군대를 결성하고 다음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영국 군과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미국에서 생산된 자원이 필요했던 영국은 해군함을 보내 주요 항구 지역에 주둔하며 강력하게 대응 했지만 무장한 시민들이 불시에 출몰해서 던지는 수류탄과 언제 어디서든지 날아 오는 총알 세례와 대포에 포위 된다.

대규모로 발발한 벙커힐 전투에서 촘촘하게 전선을 구축하고 대항한 아메리카군 민병대에 무참하게 무너진 영국군이 대패 하며 찰스 타운 넥으로 피신해서 그곳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다.

오합지졸의 민병대원들이 자잘한 전투에서 승리 하는 동안 영국군은 잘 훈련된 장교와 군 장비로 무장한 군인 오천명을 미 대륙으로 보내고 드디어 보스턴 캠브리지에 도착한 지휘관 워싱턴은 부실하게 운영되고 조직된 군대를 재정비해서 전선 상태를 점검한다.

워싱턴은 보스턴을 공격하는 영국군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영국군부대의 주요 전선 지역인 캐나다 공략을 계획한다.

1775년 1년 동안 보스턴과 캐나다 퀘벡에서 동시 다발로 전투가 이어지자 보급 물자가 끊어진 영국군이 1776년 3월 황급히 영국군으로 돌아간다.

보스턴에는 더이상 영국군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지만 다른 주들은 절반의 승리로만 보고 독립 혁명의 시기로 넘어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다.

1776년 외국 세력의 지원을 모색했던 대륙회의 의원들은 타협보다 오로지 독립만이 미국이 살아갈 길이라고 동의 한다.

'모든 식민지가 연합을 하면서 대륙헌법의 범위를 규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식민지를 각각 주권 국가 또는 다수의 연합 주권국가들로 선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외국과 조약을 맺어야 한다.'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 다양한 이견이 오고 갔지만 결국 1776년 5월 15일 독립 선언문 서문의 초안이 완성된다.

'외국 용병의 도움을 받는 영국 군대가 식민지의 선량한 거주민을 살해 하기 위해 파견됐다. 따라서 식민지 거주민이 영국 왕실의 통치를 받는 정부에 충성 맹세를 바치는 것은 이성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다.

왕실이 내세우는 권위를 기반으로 한 모든 활동은 불필요하며 제압돼야 한다. 식민지 인민의 권위 아래에서 행사되는 모든 정부 권력은 적들의 적대적인 침략과 잔인한 파괴에 맞서서 거주민의 목숨,자유, 재산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부적 평화,미덕, 질서 등을 보존 하는데 적용돼야 한다.'

이 선언문 초안은 프랭클린,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이 기틀을 잡았다.

독립 선언서에는 그동안 영국과 벌여온 갈등의 역사를 상세히 거론하면서 오로지 영국과의 결별만이 모든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각주의 시, 읍, 촌에 사는 이들에게 알려졌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로 부터 양도 불가한 권리를 부여 받았는데,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등이 그러한 권리'라는 문구가 명시된 문장에서 대다수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에 종속되지 않은 미 대륙의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이해 하지 못했다.

당시 각주의 부유한 농장주들과 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서 재산 처럼 소유하고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주장한 독립 선언서 안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 했다.]는 문장은 흑인 노예도 백인 주인도 동등한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당시 노예 소유주였던 제퍼슨은 어느 면에서 흑인도 백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했지만 17세기 부터 미 대륙으로 끌려온 노예들이 현재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백인 주류들과 함께 평등한 지위를 누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인이 강력하게 구별 지은 피부색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깊은 불신과 악 감정을 쌓아 올려서 어떤 도덕적 기준으로도 용납 되기 힘든 노예 제도가 미대륙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기 힘들다는 것을 <버지니아주에 대한 노트>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 초안에는 영국의 국왕을 아메리카 노예제를 영속 시키고 인종간의 갈등과 폭동을 사주 한 자로 지목했지만 대륙회의 에서 이런 갈등의 소지를 유발하는 문구는 삭제 되고 제퍼슨이 주창한 아메리카인의 정서적 유대 관계 자선, 상호 배려, 상호 사랑만이 앞으로 태어날 세대에게 물려줄 자산이라는 것을 상기 시킨다.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제 2차 대륙회의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다.


당시 미 대륙의 백인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오로지 영국으로 부터의 자유와 부당한 세금 부과에서 벗어나는 것만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적으로 규정했고 대다수 백인들은 자신의 재산은 목숨처럼 지킨다는 기준을 수립했다.

그들은 기꺼이 영국군에 대항했고 노예제를 지키며 재산을 축적하며 영국의 어떤 불의와 피박에도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정도로 투쟁했고 항거 했다.

하느님의 눈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해도 미국 백인들에게 흑인 노예의 자산은 영국에게 조차 양도 할 수 없는 권리 였다.

따라서 미대륙의 백인들의 독립은 곧 영광스러운 대의로 영국에 대항하는 전쟁은 운명이였다.


1776년 9월 부터 영국군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인 미국은 워싱턴이 이끄는 진지전과 방어적인 전략으로 롱아일랜드-뉴욕 브루클린 하이츠-맨해튼-뉴저지-펜실베니아에서 치열한 전투끝에 결국 허든슨 강에서 대격전을 펼친다.


오합지졸의 부대원들과 취약한 군장비로 힘겹게 전투를 치뤘던 워싱턴은 행군 능력과 행운의 날씨덕분에 델라웨어 강에서 벌어졌던 트렌턴 전투에서 승리한다.

4000여명의 영국군 중 단 오백명의 헤센인과 소수의 용병들만이 강을 건너 도망쳤지만 불어난 강물 속에 갖혀 버린다.

새벽에 프린스턴 으로 치고 올라간 워싱턴 대륙군 은 뉴저지와 뉴브런즈윅 진지에서 도망친 영국 용병 200여명을 생포하고 보급로를 차단해버린다.

1777년 1월 전쟁이 시작된지 오개월 만에 영국군 용병들은 서서히 해체 되어 탈영을 한다. 승리의 깃발을 꽂은 워싱턴 대륙군은 급속하게 퍼지는 천연두로 인해 뉴욕에 발이 묶이지만 예방접종을 하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5월에 대규모 용병군을 대륙으로 파견한 영국, 막대한 군비용으로 인해 상인과 농장주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는 미국은 프랑스에 지원 요청을 보낸다.

전쟁의 형세를 조용히 관망했던 프랑스는 머스킷 소총과 탄약, 의약품을 지원하며 영국군의 추이를 살피며 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용병들을 미 대륙군들이 밀어버리기를 바랬다.

영국군 용병으로 캐나다에 주둔 하고 있던 독일 용병들은 총 600여명으로 진지를 움직일 때마다 영어를 몰라 지나가는 캐나다 시민의 도움을 받아 가며 지형을 익혀 나갔다.

한달 분의 식량과 보급품만 보낸 영국과 달리 미 대륙군은 6000명에서 7000명까지 병력을 늘려서 캐나다 협곡을 중심으로 전선을 확대 시켜나간다.

독일 용병들에게 미 대륙군이 날리는 대포와 총알 보다 더 무서운 건 캐나다의 울창한 산림에 살고 있는 야생 동물들로 이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600여명의 독일 용병 중에 미 대륙군에게 사살된 이는 60여명정도로 나머지는 야생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영국은 미국 버지니아주를 정복하기 위해 잘 훈련된 5800여명의 장교와 병사 27문의 대포 5000점의 무기, 탄약 기타 군수품으로 무장하고 방어가 없는 전선을 향해 돌진한다.

위싱턴과 설리번이 이끄는 부대의 지역에서 벗어난 빈 곳을 노렸던 영국군은 기습 공격과 퇴각을 반복하며 미대륙 부대를 밀어 붙이며 미 대륙군에 심각한 손실을 입힌다.

영국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미대륙군 부대원은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대응하다가 빠르게 퇴각하며 패배 당한다.


하지만 워싱턴을 비롯해 미대륙 군대를 이끌었던 지휘관들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 하고 싸운 경험이 '위대한 대의'를 향한 소중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엄청난 저력을 지켜 본 프랑스는 서서히 와해 되고 분산되고 있는 영국 해군의 무기력함을 간파하고 미국에게 손을 내민다.

반면, 영국 측에서 가장 두려워 했던 시나리오는 프랑스가 아메리카 식민지 편에 서서 전쟁을 지원 하거나 참전하게 된다면 대영제국에 대항하는 다른 지역 식민지들의 반란으로 이어져 세계 전쟁으로 불이 붙어 버릴지 모른다는 것이였다.

1763년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측 전략은 전쟁의 규모를 키워서 영국의 군사 힘을 분산 시킨다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의 국력은 식민지에서 생산된 물품을 전 세계를 상대로 교역해서 챙기는 막대한 수입에서 나왔기에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반란을 일으킨다면 거대한 대영제국의 함대는 침몰하는 순간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깃발을 꽂아 유럽의 종주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꿈꿨다.

미국 대륙 회의 측에서는 거대한 영국과 전쟁에 맞붙기 전 해외 군사 원조 세력을 염두 해 두었지만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그리고 벙커힐 전투를 치르면서 승기를 잡게 되자 협상 상대자는 오로지 영국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일 전쟁 중에 외국 군대에 항구를 열어 미국 땅에서 여러 국가들의 전투가 일어 날 경우 아메리카 땅은 또다시 다른 세력에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며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해리슨, 토머스 제퍼슨, 존 디킨슨 ,존 제이, 로버트 모리스 위원회들이 아메리카의 독립 원조를 지원 하고 싶어하는 유럽 열강 세력의 추이를 예의 주시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오래전 부터 유럽 열강을 외교적으로 이용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비밀 교신 위원회를 가동 시켜서 영국에 대항 하는 세력과 어떤 동맹을 맺을지 고심한다.

영국의 세금 수탈로 골병이 든 미 대륙은 유럽의 어떤 열강 세력에 흔들리거나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무역 관계를 어떤 정책으로 추진 해야 할지 유럽 열강과 동등하면서 안전한 관계를 통해 독립의 길로 갈 수 있는 터전을 다져 나간다.

1776년 12월 프랑스 정부와 동맹 교섭을 시도한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은 다음 해 2월까지 프랑스 측 주요 인사들과 접촉하며 평화 조약과 동맹을 맺는 기나긴 설득 작업에 들어 간다.

프랑스는 미국의 뜻에 동의를 하게 된다면 결국 독립 국가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 하며 완강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영국과 7년 동안의 전쟁으로 국고 재정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자원이 풍부한 미국과 우호와 통상 조약을 맺어야만 국가가 회생 할 수 있기에 1778년 2월 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최혜국 대우를 포함한 상업 조약을 비롯해 프랑스는 서인도제도 식민지의 여러 항구를 개방해서 미국 측 선박에 무제한 통행을 승인한다.

만일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 미국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운다는 동맹 조약의 8조에 명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국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영국과 휴전이나 평화 협정을 체결 하지 않는다. 또한 양국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이 전쟁을 끝내는 공시적 조약에 의해 확실하게 되기 전까지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기로 합의 한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 영국 영토에 대해서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전쟁 중에 점령된 영토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소유라는 점에도 동의 했다.

결국 이 동맹 조약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유와 독립을 인정한다는 의미 였다.

1778년 2월에 체결된 조약은 영국의 평화 타협 제안 보다 한 발 앞서 5월 2일 발효 되어 5월 4일 대륙 회의의 승인을 받았다.

절대로 영국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인정 할 수 없었고 6월 14일 영국과 프랑스는 교전 상태에 들어간다.

대륙이 아닌 해양에서 맞붙는 다면 영국은 프랑스에 커다란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 하고 별다른 전략을 세우지 않고 무작정 프랑스 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서인도제도로 군함을 보낸다.

영국 내각의 모든 관료들은 이 계획에 대 찬성했지만 프랑스 함대와 어선이 정확이 몇 척이 주둔 하고 있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국왕과 영국 해군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지브롤타 해협 근처에서 순찰하던 프랑스 해군은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다가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회향 한다.

서인도 제도를 사수 하기 위해 8천명의 프랑스 해군은 미 대륙이 아닌 영국측 함대를 목표물로 정했다.

프랑스 군의 지원을 기다렸던 미 대륙의 워싱턴 장군은 군부대를 이탈하는 탈영병들과 추운 겨울의 날씨 속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군용과 마차가 부족한 시대에 지원 물자를 수송하고 보급 받는 것 조차 힘들었다.

식량과 의복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워싱턴은 주둔 지역 농장주들이 소유 하고 있는 식재료들이 영국군 손에 넘어 가는 것보다 이 땅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보급해 달라며 식량을 제공한 이들에게 영수증을 끊어 준다.

영수증 발급을 통해 군인들의 식량과 말의 사료를 얻으며 겨울을 이겨내는 동안 벤저민 프랭클린의 지략으로 독일 프로이센에서 훈련 교관인 슈토이벤 남작을 데리고

온다.

슈토이벤 남작은 아메리카 대륙군에게 사격과 제식 및 기동 훈련법을 가르치며 대형 교전 전투의 밀집 훈련까지 전수 했다.

체계적인 훈련과 풍부한 식단으로 군부대원은 활기를 띄었고 영국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전 하는 건 곧 '영광스러운 대의'라는 점을 상기 한다.

5월 드디어 프랑스에서 보낸 라파예트 후작은 정찰 부대원들과 함께 도착해서 필라델피아에서 신속하게 이동 중이였던 영국군을 대파 한다.

프랑스 군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군부대와 함께 포지 계곡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델라웨어 강을 건너 몬머스 법원 청사에서 영국군과 맞붙는다.

왼쪽에는 울창한 숲이 오른쪽에는 거대한 언덕이 자리한 지형에 다다른 아메리카 군의 전선 앞에는 늪 지가 펼쳐져 있었다.

늪 지에서 공격을 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 점멸 할 수 있기에 화력에 집중해 일격을 가하는 총공세만이 살아 남을 길이 였다.

계곡을 지나 협곡까지 올라간 영국군은 오후 6시 쯤 되자 기력이 떨어져서 협곡 아래로 내려 가지 못한 채 멀리서 워싱턴 군부대의 대포만 바라 본다.

워싱턴 군부대원들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양측은 이날 모두 무기를 무장 한 채 협곡과 늪 지대 바로 앞에서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 영국이 워싱턴 군을 추격하지 않고 회군 한다.

불필요한 전투를 치르지 않은 워싱턴은 프랑스 군과 함께 영국의 지뢰밭이 될 로드아일랜드 뉴포트로 향한다.

이곳의 전략적 위치를 간파 했던 영국은 1776년 12월 이곳 항구를 점령했다.

로드아일랜드 주민인 민병대원들까지 합세한 전투는 거주 지역 파괴는 물론 거주민의 3분의 2가 사라질 정도로 격전이였다.

서인도 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 8000명까지 합세한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영국군은 미 대륙 전선으로 인해 텅빈 서인도 제도로 함대를 돌려 항구를 급습한다.

대포 몇발로 단 하루 만에 승기를 잡은 영국 해군은 프랑스 군이 회생 하지 못하게 부셔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 가고 프랑스 군은 영국이 또 한번 공격 하더라도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1779년 1년의 휴전 기간 동안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아메리카 대륙에 분열을 조장 하기 위해 남부 지역을 공략한다. 영국은 거대한 농장과 흑인 노예를 소유 하고 있던 남부의 대지주들은 영국 국왕에 충성스러운 이들이라고 믿고 아메리카 독립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힌다.

남부 지역에는 다수의 영국인 후손들이 살고 있었지만 프랑스 신교도들과 흑인 노예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앞섰고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 그리고 독일계들로 분포 되어 그다지 영국에 대한 충성심이 깊지 않았다.

앞선 교전에서 영국 용병들의 잔혹한 실상과 마을 곳곳에 불을 질렀던 만행을 목격했던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싸울 태세를 갖추고 견고한 요새를 구축한다.

시민 민병대들은 참호를 파서 사격 연습을 했다.

서로의 필사적인 생사를 건 찰스턴 공성전 에서 영국군 포병대는 100개의 산탄과 226그램 짜리 중포탄과 파열성 포탄의 정확한 목표물 조준 파괴로 지역을 함락하고 포위한다.

목조 가옥들이 불에 타지 시민들은 칼을 빼들고 영국군에게 달려 들었다.

영국군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의 사상자를 내며 대륙군의 다양한 무기와 식량을 차지 하지만 3일 뒤 의문의 폭발 사고로 영국과 대륙군, 용병군, 주민들의 목숨을 빼았아 갔다.

영국측 편에 선 사우스 캐롤라이나 백인 대지주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 소규모 공격이 발생 하면서 대륙에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영국이 남부를 지배할 병력 수를 늘려서 총 2043명의 정예병을 투입 시킨다.

남부를 사수 하기 위해 버지니아 민병대가 영국군을 향해 진격했지만 고도로 훈련된 영국측의 명 사격수 공격에 겁을 먹고 총과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쳤다.

캠던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이제 남부 지역을 거점으로 대륙군을 기다리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식민지 독립을 위해 아메리카 인들은 기꺼이 피를 흘리며 영국에 저항했다.

미 대륙에서 활 활 타오르던 혁명의 불길을 구경하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 해군의 힘을 뒤 흔들 기회라 생각하고 비밀리에 미 대륙을 지원한다.

1770년대 영국의 힘은 막강했고 이들이 쥐고 있던 해상 무역 항로는 견고 했지만 이를 유지 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줄인 식민지 미 대륙의 독립 열기로 인해 영국 전력은 분산 되고 있었다.

미 대륙이 유럽의 종주국으로 다시 부상하고 싶어하는 프랑스와 손을 잡는 순간 미 대륙의 독립 열망의 불꽃은 대륙과 대륙간의 거대한 전쟁으로 번져서 권력의 중심축을 뒤흔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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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2-21 23: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국을 도왔던 프랑스군의 가슴에도 혁명의 불꽃이 탁🔥
켜졌겠죠?🤭

scott 2022-02-21 23:20   좋아요 5 | URL
프랑스는 영국의 독주(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를 막고 싶어 했고 미대륙을 다시 차지 하고 싶어 했습니다

내부에서 터진 혁명의 불꽃이 아메리카인들 끼리도 치열하게 싸웠던 야만의 시대 ㅎㅎㅎ

mini74 2022-02-21 23: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2권에 보스턴 차사건이 나오는군요. 전 프랑스가 군사적 도움뿐만 아니라 후에 자유의 여신상 선물한거 보고 정말 영국을 엄청 싫어하는구나 했어요 ㅎㅎ 너무 알차고 재미있어요 *^^*

scott 2022-02-21 23:21   좋아요 5 | URL
영국 엄청 싫어 하면서도
프랑스 인들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오합지졸 ㅎㅎ
두나라 모두
서인도 제도에서 노예와 자원들 무한으로 착취하는 걸로 배불리 살았네요!

미니님 꿀잠! 굿 나잇 ^ㅅ^

희선 2022-02-22 01: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했는데 거기에 노예는 있어야 한다고 하다니... 나라에 내야 하는 세금도 있고 영국에도 세금을 내야 한다면 내기 싫겠습니다 그러니 독립을 해야죠 프랑스는 영국 힘을 줄이려고 미국을 도와주는군요 그러면서 다른 뜻도 갖고 있다니... 본래 그런 거기는 하네요 오래전 삼국시대 때 다른 나라 힘을 빌렸을 때 그 나라에서 뭔가 바라기도 했으니...


희선

scott 2022-02-22 15:56   좋아요 1 | URL
노예를 자산으로 생각한 남부와 기술과 산업 혁명 금융으로 부를 일으킨 북부와 개인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시각차가 너무나도 컸습니다
이런 시각차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이제는 제3세계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자 저개발국 노동층)
희선님 말씀처럼 세금을 양쪽에서 뜯어가면서 영국은 미 대륙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자원만 야금 야금 수탈 하려다가
민중의 힘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가
엄청난 유혈 전쟁을 벌인!
프랑스를 끌어 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서로의 이익 다툼이죠...


페넬로페 2022-02-22 01: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스턴 차사건은 워낙 유명해 기억이 나네요. 영국은 정말 야심과 그 야욕을 전 세계에 뻗은 악명높은 나라예요^^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자유를 지향하지만 그들이 흑인노예에게 자행한 폭력은 정말 끔찍합니다^^

scott 2022-02-22 15:59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영국의 야욕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전세계 곳곳을 자신들의 이권 다툼으로 국경 선도 맘대로 긋고
전쟁 약탈 수탈은 해적질로 제국을 일으킨 이들이 뻔뻔하게 전쟁으로 세계패권을 쥐락 펴락!

인권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남녀 평등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하인과 하나의 테이블에세 식사를 하지 않은 상류 계층이 나라 전체를 움직여서
남부인들의 시각과 놀랍고
가축 처럼 대해서 충격 받았습니다 ㅜ.ㅜ

거리의화가 2022-02-22 09: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스턴 차사건이 주요 사건으로 다뤄지는 이유가있었네요 사건을 둘러싼 전후과정을 상세히 전달해주니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인이야기 읽을 이유가 충분한 책인 듯해요 스콧님 리뷰 읽으니 구매욕이 더 뿜뿜합니다ㅋㅋ

scott 2022-02-22 16:01   좋아요 2 | URL
2번째가 1권보다 분량도 많고 전쟁의 양상(내전까지 번지다가 유럽 으로 불이 붙는)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앞 뒤 전후 맥락을 잘 살펴서 읽고 있습니다
3권까지 현재 출간 되었는데 매달 출간 해서 12권 뚝딱 완간 되길 바랄 뿐입니다. ^ㅅ^

새파랑 2022-02-22 09: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돈보다는 자유가 더 중요한 거겠죠? 자유를 찾아 떠난 미국인들에게 자유의 억압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역사 전문가 스콧님~!! 클래식은 저리가라 입니다 ^^

scott 2022-02-22 16:08   좋아요 2 | URL
자유 보다 돈!
자유를 찾아 떠나서 넓은 땅 일궈 번 돈!
배타고 건너온 이들에게 기냥 줄수 없음!ㅎㅎ

클래식!
요즘은 듣기만 하고 있습니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