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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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선비들에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명소가 있었다.

그 명소는 한반도 땅에서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금강산으로 이 산에 올라갔다는 것 만으로도 사대부 가문 족보에 새겨 놓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금강산을 간다는 건 단순히 시간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던 것이 아니였다.

한양(서울)에서 출발 해서 금강산까지 가려면 몇 달이 걸리는 여정마다 머물러야 하는 숙박비용과 목적지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인도하는 짐꾼과 말이 필요했다.

여러 달이 소요 되는  한양에서 금강산까지의 여정은 험준한 길목마다 수시로 출몰하는 짐승과 도적 무리들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을 피해 가려면 곳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거쳐 가야 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금강산 여행을 가려면 쌀 몇 마지기 비용 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귀중품을 모조리 팔거나 밭을 팔아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탈탈 털어서 생애 마지막 여정을 하듯 조선 시대 선비들은 한양에서 벼슬 자리에 올라갔다면 반드시 금강산에 올라가야만  사대부 가문을 빛내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성지 순례를 하듯 재산을 탈탈 털어 금강산으로 향했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금강산의 전경을 그린 그림을 보고 난 후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굳이 금강산을 가보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에 동요 되기 시작한다 


출처: 금강전도(국보). 개인 소장

조선 회화의 전성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70세 무렵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금강전도>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본 선비들 중에서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그림으로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금강산을 다녀온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실물에 가깝다는 소문이 나자  성지를 순례하듯 재산을 털어 금강산으로 향했던 사대부들이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수집하는데 혈안이 되기 시작한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붓과 먹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진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몇 대에 걸쳐 풍비 박산된 몰락한 양반 집안을 금강산 그림으로 일으켜 세웠다.

조선 숙종이 집권 한지 2년에 접어 들었던 1676년 한성부 순화방(현재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난 겸재 정선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과거에 낙방 해서 가족 모두 무너져 가는 흙집에서 겨우 끼니만 해결 할 정도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모든 것이 과거 시험제도 중심으로 돌아갔던 조선시대에 과거 시험에 3대 째 낙방 했던 겸재 정선 집안에서 생계를 책임졌던 이들은 여자들이였다.

겸재 정선의 아버지는 7살 때부터 과거 시험을 공부 했지만 연달아 떨어지고 막내인 겸재가 열 네 살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간신히 비 바람을 막아 주었던 흙집이 빚쟁이들에게 넘어가고 겸재는 어머니의 친정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며 살게 된다.

겸재의 어머니는 아들의 과거 합격을 위해 부유한 친척들이 맡긴 옷들을 수선하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공부 머리가 뛰어나지 않았던 겸재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유명하다는 환쟁이들을 찾아 다니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양반 사회에서 화가는  환쟁이로 손가락질 받았던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자신이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겸재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림 공부에 매진한다.

일찌감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양반 가문 친척들이 높은 관직에 올라가 손주 손녀를 볼 나이인 36세가 되던 1711년, 겸재는 금강산 근처의 고을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오랜 친구 이병연이 금강산 여행길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는다.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친구 이병연을 찾아간 겸재는  때마침 같은 고을에 살고 있던 부유한 양반 신태동을 만나고 마음씨가 후한 그가 겸재의 여행 경비를 적극 지원해 주었다.

드디어 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그곳, 금강산을 올라가게 된 겸재는 금강산 인근 지역의 풍광을 틈틈이 그려서 화첩으로 묶어서 금강산 여정길에 나서려는 양반들을 상대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게 된다.

출처: 금강내산(해악전신첩, 보물).간송미술문화재단 

단순히 산봉우리만 그리지 않고 전체를 조망 하듯 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구름막과 바다까지 볼 수 있었던 겸재의 그림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져서 거액에 거래되는 귀한 그림이 된다.

겸재 정선이 70대에 이르러 필력이 무르익은 필법과 묵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남긴 불멸의 명화 ‘박연폭포'는  층층이 먹을 겹쳐 칠해 폭포 물살 주위 암벽의 거칠고 장대한 물성을 돋우고, 내리 쏟아지는 물살의 결들을 마른 먹붓질로 그어 소리의 울림을 시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일 평생 동안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1751년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 이전에도  한반도 풍경을 그린 화가는 있었지만 겸재와 같이 탁월한 수준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화가는 없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연대순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점에 도달한 뒤에는 선과 색 그리고 빛과 어둠 만으로 피사체의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하는 경지에  달하는데 겸재 정선은 조선 회화의 황금기인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고차원의 그림 세계를 펼쳐 보인 불멸의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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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3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4-14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6-04-13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구입해뒀는데 말이죠.
언제 읽을지는….^^

scott 2026-04-14 21:44   좋아요 1 | URL
책은 쟁여 두지 마세요 ㅋㅋㅋ

호시우행 2026-04-14 0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도서 저도 읽고 읽는 중인데, 리뷰글 멋집니다.

2026-04-14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시우행 2026-04-15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

scott 2026-04-16 00:19   좋아요 0 | URL
^.~
 
Banksy (Hardcover)
Stefano Antonelli / Rizzoli Electa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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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정치적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를 담벼락에 하고 있는 뱅크시(Banksy)는 얼굴과 본명 모두 베일에 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수집가가 앞다투어 작품을 구입하고,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에 관한 작품을 그릴지 예고 없이 낙서처럼 그리는 뱅크시는 공공장소의 공공시설에서  쓰다 남은 철근으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담벼락,이나 전봇대 스텐실 기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길거리에서 많이 보는 화려한 그래피티와는 조금 다른 뱅크시가 사용하는 이 스텐실 기법은 글자나 무늬 모양을 오려내고 뚫린 부분에 물감이나 스프레이 라커를 뿌리는 기법으로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뱅크시가 2025년  5월 2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은 거리의 전봇대처럼 서 있는 등대였다.

 뱅크시가 그린 이  담벼락 그림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할 권한을 가진 디지털 빅브라더들이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고, 특정한 행동을 유도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해킹하는 시대를 향한 경고 하는 디지털 감시 전봇대 그래피티다.

이 작품도 현재 사라져서 사진 상으로만 존재 할 뿐이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볼 수 있는 뱅크시의 작품은 수집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의 가장 갖고 싶은 작품이면서도  가장 많이 훼손되는 작품이다.

누군가 훼손하기 전에 뱅크시의 그림이 그려진 구역 담당 직원들이   공공 장소 외관 질서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보존 하지 않고  곧바로 지워버린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작품에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뱅크시가  담벼락에 그래피티를 새기듯 일상의 오브제를 이용해서  뱅크시 작품을 영상으로  변주 하고 있다.

국가에 소속된 미술관이나 고급 갤러리에 갇혀 있는 ' 영구 보존 예술'의 권위와 큐레이터들의 작위적인 설정과 설명을 거부한 뱅크시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거리로 뛰쳐나가 그래피티 아트를 새기듯 매일 마시는 라테 아트에 소녀와 빨간 풍선을 그리는 영상을 제작 했다.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뱅크시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판매되자마자 갑자기 파괴된 사건과 영국 런던의 '카펫 아래 쓸기'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미술관 바닥에 M&S초콜렛이 와르륵 떨어졌다면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 담는 행위도 예술 작업의 연장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초콜렛을 쓸어 담듯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나 흔적을 남기는 뱅크시 처럼 고양이 발도장이라도 찍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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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1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4-01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리를 한다는 것
최강록 지음 / 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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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즌 마다 쏟아져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들 모두 "서바이벌' 장르다.

몸 근육을 쓰는 것 부터 노래를 부르는 오디션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다 경쟁하는 한국인들에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마치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생존 경쟁을 담은 서바이벌 서사에 열광한다.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왔던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에 이어서 시작된 시즌 2는 특이하게도 결승에서 만난 백수저 최강록과 흑수저 이하성의  수저 색깔이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대학을 중퇴한 최강록 셰프는  군 제대 후 음식점 알바를 하다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요리 만화에 빠져  요리를 시작했지만  창업과 실패를 반복하다 서른이 다 돼 가게를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리사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귀국해서 시작한 가게 적자로 폐업하고 생계를 위해 참치 무역 회사에 들어가 회사원으로 일하다 술김에 지원서를 낸 ‘마스터 셰프 코리아2’에서 우승을 차지 하면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자신의 요리 인생을 '척하며 살아온 세월'이라고 말하는 최강록 셰프는 술김에 던진 지원서 한 장으로<마스터셰프 코리아 2> 우승자가 되었고 13년의 세월이 흘러  흐른 2026년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의 '히든 백수저'로 돌아와 최종 우승자 자리에 올라섰다.

 온갖 양념과 현란한 조리 기술 대신 "사실은 잘하는 척하며 살아왔다"라고 말하는 겸손함에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최강록 셰프는 우승의 환호성 열차에 올라타서 온갖 예능 무대에 얼굴을 내밀거나 재간 넘치는 말솜씨와 개그가 섞인 요리 솜씨를 뽐내지 않는다.

우승의 기쁨을 맘껏 누리며 초고속도로 올라가는 인기 코인에 올라타지 않은 최강록 셰프는 인터뷰 자리마다  요리를 하는 매 순간 마다  무섭고 떨린다고 토로 한다.

음식을 향한 고집스러운 순정이 배어 나오는 그의 느릿한 말투에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다 태우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경연에서 최종 우승자로 대중의 엄청난 주목과 관심을 받아도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가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음식을 완성하고 탈락을 피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요리 서바이벌의 살벌한 전쟁터에서 맷돌에 재료를 넣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곱게 갈아내듯 조리한 최강록 셰프의 요리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면서도 조리고 조려서 국물을 다 날려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은 재료에 깊은 맛을 더해  끝내 살아남은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해준 음식으로 완성 시켰다.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화려한 스펙을 쌓기 위해 미친듯이 몰두 하고 질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아는 척, 있는 척, 잘 하는 척하며 사는 이들이 많다.

모두가 질주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경쟁 속에서  마음을 조리면서도 책망하거나 안달 복달 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 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경쟁이 아닌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한 최강록 셰프는 단 하나의 요리에 3시간의 정성을 다 쏟아부어 자신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인생 요리를 완성 했다.

인간에게 먹는 행위는 단순하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입안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그 시간은 하루 중 최고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한번 칼이 지나간 자리는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건 생선회를 조리 하는 데도 필요한 말이지만,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좋은 말인 것 같다. 진지하되 두려워하지 말 것. 장난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될 테니까.

-최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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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6-02-05 0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자기 속도대로 살기 어려운 시대기는 해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게 좋을 듯해요 요리도 경쟁하는 시대군요 예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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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한가운데 세상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외딴섬 와요와요 섬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 한 그루를 골라 달이 죽었다 되살아날 때 마다 나무에 금을 하나씩 긋는 풍습이 있다.

나무에 금이 백개가 되면 아이는 자기만의 나무 쪽배인 '타라와카'를 만들어서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와요와요 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날 경우 맏아들이 일찍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 백팔십 번째 보름달이 뜰 때 섬을 떠나 돌아 올 수 없는 항해길을 나서야 한다.

물 한 병만 쪽배에 싣고 와요와요 섬을 떠나는 둘째의 운명은 영원히 사람과 인연이 닿지 않는 바다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한다.

이런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 아트리에는 우르슐라에게 말하는 피리를 받고 자신이 만든 쪽배 타라와카의 노를 저어 와요와요 섬을 떠난다.

섬을 떠나 바다를 항해 한지 7일 째 되던날 쪽배 타라와카에 물이 새기 시작하고 배가 서서히 바다 속으로 침식해 갈 때 아트리에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아트리에는 자신이 여전히 바다에 떠 있는 걸 알았다.

섬 가장 자리에 소년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암울한 눈빛에 손이 있어야 할 곳에 지느러미가 있었으며 한 평생 산호초 위에서 뒹군 것처럼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아트리에가 도달 한 곳은 온갖것들이 뒤섞여서 지독한 냄새로 진동하는 거대한 쓰레기 섬이였다.

죽은 생물과 악취로 가득찬 그 섬은 끊임없이 회전하듯 매일 다른 방향에서 해가 뜨고 져서 아트리에는 그 섬이 사후세계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인간들이 버린 다양한 물건들은 바다 거북의 뱃속에서도 나왔고 조개 껍질 속에서도 나왔다.

불 같이 뜨겁다가 참을 수 없는 혹독한 추위가 닥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가 거센 폭풍이 불다가 별안간 밤이 찾아오는 그 쓰레기 섬에서 아트리에는 차남들의 영혼이 잠든 곳이라 여기고 손에 잡히는 것들로 집을 짓기 시작한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섬인지 조차 불분명한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는 얼마 후 아트리에를 실은 채 대만 동부의 바닷가를 덮친다.

거대한 파도가 눈앞에서 해변을 통째로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되고 이를 지켜 보던 시민들은 기괴한 자연 현상에 한발자국도 밖을 나가지 않는다.

등산에 갔던 남편과 아들이 실종된 후 충격으로 교수 자리에서 물러난 앨리스는 병상을 박차고 나가 해변가를 덮친 화면에 얼핏 비추었던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직접 현장에 나간다.

[산길을 걸으며 앨리스는 계속 어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무슨 냄새지? 태양의 열기, 바닷물의 공격성, 물고기의 비린내와 야생의 사향냄새... 결코 섞일 수 없는 상반된 냄새가 뒤섞여 만들어진 냄새 같았다.]

쓰레기 섬을 뒤지던 앨리스는 문득 지난 시절 외할머니와 함께 갯벌에 굴을 따러 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생계를 위해 굴을 땄던 외할머니와 동네 주민들은 인근에 있는 정유소 공장에서 버리는 폐 기름에 신장과 폐기관이 망가져서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듯이 해일처럼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에서 아트리에를 발견한 앨리스는 대만의 원주민인 하파이와 다허, 터널 개발 공사 자문으로 대만에 방문한 독일인 볼트와 환경운동가 사라의 도움을 받아 미지의 섬 주민인 아트리에와 소통 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섬은 용사의 섬이고, 꿈이 모이는 곳이에요. 물고기 떼가 이동할 때 쉬었다 가는 곳이고 해가 뜨고 지는 좌표고 희망과 물의 휴식처예요. 우리 땅은 산호를 엮고 바닷새의 똥을 덮어서 만들었어요. 우리 카방이 눈물을 모아서 만든 작은 호수에 의지해 살아요.]

섬을 떠나 쪽배에 의지한 채 바다에서 홀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와요 와요의 원주민 소년 아트리에는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은 대학 교수 앨리스에게 차츰 마음의 문을 연다.

남편과 아들이 추락한 지점을 찾아 나서는 앨리스를 따라간 아트리에는 암벽 정상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수많은 자연의 비밀을 품고 있는 생명체와 마주하게 된다.

바다 밑에 흐르는 암류처럼 사람을 끌어 당기고 휩쓸어 가고 파묻어 버릴 것 같은 눈빛을 한 복안인이 앨리스와 아트리에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겹눈 속 수 많은 홑눈이 바늘 끝보다 가늘고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복안인은 그저 세상을 지켜 볼 수만 있을 뿐이다.

앨리스와 아트리에 일행이 암벽을 내려 오던 날 와요와요 차남들의 화신인 향유고래 떼가 파도를 가로질러 헤엄쳐 갔다.

일주일 뒤 새벽 시간에 칠레 남부의 발파라이소 해변에 향유 고래 수백 마리가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 상태로 발견된다.

[먼저 숨이 끊어진 고래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차츰 부풀어 오르고 부패하다가 갑자기 차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무겁고 축축한 하늘로 솟구쳤던 내장이 고래 연구자, 어민 고래 뼈를 주으러 온 아이들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썩은 내에 기절하거나 바닥에 엎드려 구토했다.]

앨리스는 고래가 죽은 그 해안가에서 오래 전 남편이 들려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리고 소년은 바다로 떠난다.

가상의 섬 '와요와요'에서 시작된 설화 같은 존재인 소년 아트리에가 바다를 떠돌다 문명의 해변에 맞닺는 순간 만나는 앨리스 그리고 겹눈을 가진 수수께끼의 존재 '복안인'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 세계 모두 파괴되고 오염된 곳이다.

구술로 내려오는 설화와 현실의 암울한 모습이 절묘하게 뒤섞인 소설 <복안인>은 인간이 만들어온 오염의 파고의 영향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신화와 현실, 환상과 재난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 보인다.

작가 우밍이는 인간의 시야가 닿지 않는 영역을 볼 수 있는 복안인의 시선으로 세상의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소설 <복안인>에 등장하는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c) 2024, 방글라데시 다카 바다의 인공 쓰레기 섬, 로이터 통신

2017년 부터 방글라데시 다카 바다에는 전에는 존재 한 적 없는 거대한 인공 쓰레기 섬이 드넓은 크기로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진귀한 현상이 발생했다.

쌓여가는 쓰레기를 처분하지 못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무능한 행정 정책과 무분별하게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린 실종된 시민 정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다카 바다의 인공 쓰레기 섬은 사람들이 가로 질러가는 구역 마저도 쓰레기로 버린 택배 상자와 플라스틱 쓰레기들의 부유물 위에 세워졌다.

6천 500만 년 전 지구 상 곳곳에서 시작된 화산폭발과 운석 충돌로 인해 지구 전체에 기온 변화가 발생하고 이 변화된 환경에 공룡은 적응하지 못해 멸종되었고 공룡이 사라진 자리에 포유류가 최종 포식자로 등장했다.

곧이어 등장한 영장류과인 침팬지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류 조상인 호모(Homo) 족이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석기를 사용 했던 호모족은 기후 변화로 식량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으로 진화하고 불을 발견하면서 식습관의 변화로 외모와 체격에 큰 변화가 생긴다.

생명체가 살기 좋은 환경인 동아프리카에서 드디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가 등장했고 이들은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가 농업과 유목 생활을 하면서 문명의 씨앗이 되는 글자와 화폐를 발명해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인류가 현 시대의 도시화 문명 아래서 살아 간 것은 고작 몇 세기 전으로 5천 년 전에 최초의 왕국을 이루기 전까지 인류는 한 손에 돌과 다른 손엔 불을 들고 동굴과 들판을 오고 가는 야생적인 삶을 살았다.

점심 한 끼를 먹고 나서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이 한 가득이고 매일 집으로 배달 되는 주문 상품을 포장한 상자와 뽁뽁이들이 한 가득이다.

일회용 소비를 줄이기 위해 에코백을 메고 폐 비닐과 폐 휴지 상자로 만든 제품을 소비하고 종이 빨대를 사용해도 이 모든 걸 생산하는데 막대한 석유자원이 쓰이고 있다.

개인 당 소비하고 버리는 쓰레기 양을 줄인다 해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에너지와 플라스틱 제품 그리고 이산화탄소의 사용과 배출량을 감소 시키는데 역부족이다.

또한 이를 대체 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개발된다 하더라도 친환경으로 생산한 제품 포장과 용기 역시 버리고 처리할 때도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인간이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배출하는 걸 멈추지 않은 이상 지구의 생명을 단축 시키는 온난화 현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누군가 마시고 버린 플라스틱 병을 지구 반대 편 물개가 물고 있다.

버려진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섬의 면적은 한반도의 7배, 가까운 미래에 이 쓰레기 섬은 공식적인 국가 되어 이곳으로 사람과 동물들이 이주하는 세상이 도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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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10-20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앞부분을 보고는 판타지 같다 생각했는데, 신화였군요 그것뿐 아니라 현실도 담긴... 복안인이 뭔가 했습니다 어딘가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생물체 같은 느낌도 듭니다 쓰레기 섬은 한반도 일곱배라니... 엄청나네요 한사람은 적어도 세계 모두는 아주 많군요 빨리 안 좋아지기도 하네요 쓰레기는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희선

2025-11-01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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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작가 클레어 키건은 자신이 가르치는 창작 워크숍에서 한 학생이 이야기 서사에서 드라마적인 구조가 없거나 극적인 긴장감 없이도 이야기가 성립 된 작품이 있다면 예를 들어서 설명 해달라는 질문을 받는다.

당시 클레어 키건은 학생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휴식 시간에 자료를 찾아 사무실로 가는 동안 머릿 속에서 하나의 심상이 떠오른다.

사무실에서 빈 손으로 돌아 온 클레어 키건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매일 직장 사무실로 출근한 남자는 퇴근 시간에 회사를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텔레비전 리모콘을 누르니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다큐멘터리가 흘러 나왔다.

맨 처음 키건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야기는 어떤 드라마적인 구조나 극적인 긴장감 없이 어느 한 남자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 되었다.

창작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간 키건은 수업 중에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야기 속의 그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날 키건은 그 남자의 삶의 한 단면을 쓰기 시작했고 5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로 완성했다.

2023년 겨울 미국 문예지 뉴요커의 픽션 팟 캐스트 섹션에서 퓰리처 수상 작가이자 매년 뛰어난 창작 수업으로 학생들에게 최고의 교수상을 받고 있는 조지 손더스가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 작품이 '그해 최고의 단편'이라며 극찬을 했다.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한국어판 너무 늦은 시간)' 라는 작품을 작가 클레어 키건이 직접 낭독 하는 목소리로 공개 되던 날부터 매일 아침 출퇴근 시간에 소리로만 듣다가 페이퍼백으로 구입해서 읽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소리로 들었을 때 알지 못했던 인물들의 심리와 의도를 활자로 읽고 재차 앞 장으로 돌아가 곱씹어 보니 키건 특유의 간결하면서 건조한 문장에 내포된 인간의 섬뜻함이 느껴졌다.

클레어 키건이 학생의 질문에 즉흥적으로 쓰기 시작한 <너무 늦은 시간>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7월 29일 금요일에 더블린의 날씨는 예보와 같았다. 오전 내내 뻔뻔한 햇볕이 메리온 광장에 내리쬐면서 카헐이 지키고 있는 열린 창가의 책상에까지 들어왔다. 잘린 풀의 맛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고 이따금 후텁지근한 바람이 창틀의 담쟁이덩굴을 흔들었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지극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공무원 카헐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한 때 결혼까지 약속 했던 약혼자 사빈에게 파혼 당한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남자의 일상적인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서 카헐의 입에서 "씹년"이라는 여성 비하 욕이 튀어나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어 보니 카헐이라는 남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 키건은 프랑스인 엄마와 영국 태생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빈이라는 여성의 시점이 아닌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남자 카헐의 시점으로 남자들 스스로 지각하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 여성 혐오 대한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시간을 교차 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 시켜 나간다.

무의식적으로 대화 중에 여성을 암캐, 창녀,씹년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카헐은 갤러리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 사빈이 좋아하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여자들이 그저 게을러터진 여자라 생각한다.

그는 요리를 잘하는 여자 친구 사빈의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서 매 끼니 차려진 음식 재료 값을 아까워 하고 설거짓 감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우연히 지갑을 놓고 온 여자 친구를 대신해서 계산 한 것을 두고 두고 잊지 않는 카헐은 매번 자신이 음식 재료 값에 얼마를 지불했는지 생색을 낸다.

결혼 반지 사이즈를 조정할 때 지불해야 하는 돈이 아깝다며 여자 친구 사빈에게 자신이 돈을 찍어내는 기계냐고 화를 내는 순간 카헐은 어머니를 무시했던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사과 한다.

파혼을 당한 후 카헐은 대학 시절 주말에 집으로 돌아왔던 날 모처럼 모인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음식 준비를 했던 어머니가 맨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려고 의자에 앉는 순간 동생과 의자를 빼서 어머니를 넘어뜨렸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그 때 집안 남자들과 함께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를 한다.

작가 클레어 키건은 50페이지 분량 속에 카헐이 회사에서 청소부 여성 부터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여성 그리고 우연히 광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사비나라는 여성을 대하는 모습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교차 시키며 아버지로부터 학습된 남성성이 성장하는 동안 어떻게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는지 뒤틀린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

이야기 초반부 작가 키건은 '얽히고 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라는 문장으로 이 짧은 이야기 전체의 구조를 단 한 문장 속에 내포 해서 드라마적인 요소 없이 극적인 긴장감 없이 완벽한 서사를 갖춘 이야기를 완성했다.

한국어판 제목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번역 되었지만 실제 이야기는 늦은 시간이 아닌 '너무 늦은 날에(So Late in the Day)'이라는 제목에 작가가 의도한 응축된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카헐의 인생에 너무 늦지 않게 몇 번의 시간을 되돌릴 기회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전혀 특이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 카헐이 누군가 만나고 통화 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 모습에 배어 있는 여성 혐오의 짙은 그림자를 작가 키건은 우리 일상 주변에 지나치는 모든 것에 응축된 의미를 담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작품 분량의 크기는 손바닥만 한 판형에 위 아래로 충분한 여백을 둔 페이지가 100페이지 조금 넘는다. 작정하고 읽는다면 1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휘리릭 책장을 넘길 수 있지만 작가는 독자들에게 맨 앞 장으로 되돌아가서 읽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2024년에 출간 된 너무 늦은 시간(So Late in the Day)’은 25년 전 출간한 데뷔작에 수록된 단편 ‘남극’(1999년 작),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2007)을 비롯해 가장 최근 단편인 ‘너무 늦은 시간’(2022) 등이 실렸다.

2007년의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에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에게 갑자기 찾아온 독문학과 교수라는 남성과 겪는 미묘한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여성 작가가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독문학과 교수는 수많은 남성 작가를 제치고 선정 된 여성작가가 한가롭게 케이크나 만들며 주변 풍광이나 즐기는 한량이라며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힐난하며 가르치려 든다.

여성 작가는 처음 만난 여성에게 세상의 이치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듯 무시하며 가르치려 드는 남자에게 복수 하기 위해 습작하고 있는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둔 주인공으로 그 남자를 선택하고, 소소한 복수를 단행한다.

1999년 발표작이자 이 책의 마지막 작품으로 수록된 <남극>은 첫 문장부터 충격을 예고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12월이었고, 또 한 해의 막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하고 싶었다.

-남극 중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도시로 나가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를 다룬 <남극>은 평소 남편과 아이들 뒤치닥 거리만 했던 ‘여자’가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어봐 주고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직접 장을 봐서 요리 해주고 설거지를 해주고 씻겨주기까지 하는 남자에게 마음을 뺏긴다.

독자는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 여성의 시선을 따라 영국의 유서 깊은 도시 구석 구석을 따라 가다 예상치 못한 끔찍한 일을 당하는 그 여자의 마지막 여정의 끝, 눈과 얼음의 땅에 도달하게 된다.

단편 <남극>의 마지막 문단에 작가는 독자들에게 섬뜻한 돌직구를 날린다.


어둑함 속에서 그녀의 입김이 보이고 머리를 덮는 냉기가 느껴졌다. 차갑고 느린 태양이 동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의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창 유리 너머에 내리는 눈이었을까? 그녀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시계를 자꾸 바뀌는 빨간 숫자를 보았다. 고양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사과 씨처럼 새까맸다. 그녀는 남극을 ,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클레어 키건의 <남극> 중에서


키건이 쓴 세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아일랜드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 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는 모습이 아일랜드 전체 남성의 모습이라 단정 할 수 없지만 시간과 세대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심리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무엇을 작가가 단단하게 문장 마다 심어 놓았다.

120쪽 분량의 10년의 시간 차를 둔 단편 세 편이 실린 이 작품의 미국판 제목은 ‘여자와 남자들의 이야기(Stories of Women and Men)’이고 프랑스어판 제목은 ‘Misogyny(여성 혐오)’다.

미국판과 프랑스어 판 제목에 잘 드러나 있듯이 하나같이 잔잔해 보이는 일상에 숨겨진 폭력과 남성 우월주의, 여성 혐오가 담겨 있다.

서로 다른 시기와 시차를 갖고 있는 세 편의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적 연민이나 따뜻한 손길은 철저히 배제한 채, 차가운 시선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 구조를 서늘하면서 건조한 문장으로 해부한다.

웬만해서 100페이지를 넘겨 쓰지 않는 작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은 한 번 읽는 것으론 부족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을 때는 밋밋하면서 평이한 문장이지만 다시 한 번 문장을 곱씹으며 등장 인물이 나누는 대화와 그들의 심리와 사소한 행동을 따라 음미 하며 읽는 동안 앞서 등장한 인물에게 포착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면을 알게 된다.

작가 클레어 키건은 1999년부터 2022년까지 발표한 작품은 5권 뿐이다.

단편 소설집 《남극(Antarctica)》과 《푸른 들판을 걷다(Walk the Blue Fields)>>를 출간하자 마자 아일랜드에서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중편 분량의 장편 소설 《맡겨진 소녀(Foster)》는 미국 타임지에서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 되었다.

영화로도 제작 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웰상 소설 부문에 수상하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가장 분량이 작은 작품으로 올랐다.

클레어 키건은 2023년 너무 늦은 시간(So Late in the Day) 원고를 완성한 이후 신간 소식이 없다.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 만든 영화들이 개봉 할 때마다 인터뷰에서 문예 담당 기자들은 새 작품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던지며 신간을 기다리고 있다.

영미 문학계에서 너무 많이 화자되고 있는 클레이 키건의 작품은 모든 작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25년 동안 발표한 다섯 권의 책을 쓴 클레어 키건을 가리켜 '탄광 속에 보석' 같은 작가라 칭송하고 미국 문학계는 그녀를 21세기 체홉이라 칭송한다.

작가들에게 극찬과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인 문학상을 휩쓴다 해도 내가 읽고 나서 감흥이 없다면 나에게 대단한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첫번째, 두 번째 세번째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연달아 클레어 키건의 책을 읽으면서 조지 샌더스 작가가 21세기 체홉이라고 극찬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제되고 지적인 암시를 담담하면서 서늘한 공포로 차오르는 슬픔을 흘러 넘치지 않게 서서히 새어 나오게 사용하는 작가 클레어 키건은 오로지 세상에 자신의 언어로만 쓸 법한 문장으로, 저만이 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낸다.

형제 많은 집안에서 양육과 생계에 지친 부모에 의해 친척 집에 잠시 위탁 되어 처음으로 보살핌과 사랑을 느끼는 9살 소녀의 이야기부터 가부장, 종교, 이웃, 빈부, 남녀, 욕망, 소문, 평판, 술, 비겁함, 두려움 같은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함'을 작가 키건은 응축된 문장에 담아 바로 옆에서 살아 숨쉬는 공기처럼 펼쳐 보인다.

단순하고 감각적인 어휘로 서정적이고 정교한 문장을 조각 하는 작가 키건의 언어는 소리 내어 읽어야 단 몇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진실과 진의가 숨어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을 한다. 자기의 말에 자기가 슬퍼한다. 왜 말을 멈추고 서로 안아주지 않을까? 여자가 울고 있다.”

-클레어 키건 단편 <굴복> 중에서


나는 단편 <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등장한 여자 작가의 모습이 작가 클레어 키건의 모습이라 상상하며 읽는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 조각들을 보고 거기 적힌 메모를 읽은 뒤 한쪽으로 치웠다. 만년필 뚜껑이 빡빡 했지만 결국 열고서 공책을 펼쳤다.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그녀는 그 갈망과 싸우면서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집중한 채 계속 써 내려갔다.


다섯 권의 키건의 책을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두고 대 작가 체홉 작품을 읽으면서 스산하게 그려낸 아일랜드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 삶의 흔적과 상처를 발견 하게 되는 것도 신기하고 새삼 작가의 역량이 대가에 버금가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사소한 것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오늘 우연히 본 영상 속에 그 무엇에 끌려서 충동 구매를 하거나 먹어 본 적 없는 것을 먹거나 가본 적 없는 곳을 찾아 가기도 한다.

영상과 달리 내가 구사하는 언어로 적힌 글을 읽을 때 어느 순간 마음 안의 썰물과 밀물이 밀고 당기듯 파문의 파도를 일으키는 구절을 만날 때가 있다.

명료한 묘사보다 암시와 은유로 사람 사는 풍경을 그린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읽을 때면 그녀가 그린 인물들의 심상들이 내 마음의 파고를 따라 움직이며 마음 속에 꾹꾹 담아 놓았지만 쉽사리 말로 표현 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는 동안에 읽을 정도로 얇고 가벼운 클레어 키건의 책은 다 읽고 나면 다시 펼치게 만든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에 도파민에 중독되어 웬만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이나 감흥이 사라진 시대에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 일 뿐이라 생각 할 것이다.

만 오천원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고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기에 페이지 분량에 비해 책 가격이 비싸서 외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만 오천 원으로 120페이지 분량의 세 편의 단편을 읽고 나면 대단한 사건 하나 없는 며칠의 일상이 어쩌면 삶 전체를 바꾸는 소중한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옥토가 아닌 땅에도 씨를 뿌리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듯이 클레어 키건이 지어낸 이야기에는 지극히 평탄해 보이는 삶에서 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선이 깨어지고 피어나지 않을 듯 했던 꽃이 피어나는 기적의 순간이 찾아 온다.

그러니 더 늦지 않은 시간에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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