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1월 19일 82세에 접어든 톨스토이는 전날 밤 자신의 일기장에 아내의 잔소리와 폭언에 더 이상 집에 있지 못할 정도로 견딜 수 없다며 죽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다음날 새벽, 가족 모두 깊은 잠이 든 시각에 홀로 침상에서 일어난 톨스토이는 하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살그머니 집을 나선다.

대문호의 발길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자신의 대 저택에서 꼬박 반나절을 걸어야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아스타포포 기차역으로 82세의 톨스토이는 추위에 급격하게 체온이 떨어져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급히 달려온 톨스토이의 주치의 마코비츠키는  사망을 확인하고 마지막 머리맡에 단 한 권의 책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올려 놓았다.

살아 생전 톨스토이는 “세상에 있는 책 모두를 불 질러버리더라도 도스토옙스키는 남겨 놓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흠모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살아 생전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 부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상으로 부터 존경과 대 문호로 추앙 받고 있었던 톨스토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시베리아 유형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박장을 전전하다  간질환으로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 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도스토옙프스키

일평생 족쇄 같은 운명과 맞서 싸웠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 장을 펼치면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자신의 모든 소설에는  신앙에 대한 고뇌를 깊이 깔아 놓은 도스토옙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가 남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밀도 높게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기독교 소설’로 분류하지 않는다. 

종교와 언어, 국적과 사상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세계인이 사랑하는 소설이 된 이유는  ‘죄와 벌’ 즉,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 작풍에는  5명의 문제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탐욕스럽고 방탕한 노인이고 큰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닮아 음탕하면서 한편으로 고결함을 동경하는 순수함을 품고 있다.

 둘째 아들 이반은 대학을 졸업해서 주변에서 인텔리겐챠로 불리는 지식인으로 “천국행 입장권을 반납하겠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수도원에서 신앙의 길을 걷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다.

표도르와 백치 여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스메르자코프는  간질을 앓고 있다. 

스메르자코프는 속마음을 숨기며 말 수가 적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신을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를 품고 있다.

음흉한 아버지 표도르가  장남 드미트리의 연인  그루센카라에게 연정을 품으면서 부자 사이에 증오심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 가던 중   표도르는 죽은 채 발견된다.

"신이 만든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반의 말에 세뇌 된 스메르자코프가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는 간질 발작 때문에 혐의에서 벗어난다.

대신 평소에  아버지와 크게 반목 했던 장남 드미트리가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무신론자인 이반에게 영향을 받은 스메르자코프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고,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증오했던 마음의 죄를 인정하듯 순순히 20년 형을 선고 받는다.

선과 악의 구도가 선명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작품은 단순한 집안 싸움처럼  보이는 줄거리 구도 속에 늙음과 젊음, 사랑과 애욕, 치정과 불륜 그리고  무신론과 유신론 등 서로 대립하는 가치들 간의 갈등이 속속들이 아로 새겨져 있다. 

"지금 이 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 만은 마음 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대 대 문호로 불렸던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는 걸  여러 가정의 서로 다른 삶의 양상을 통해 보여줬지만 도스토옙프스키는 평생 운명과 싸운 작가 답게  작품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내 일평생에 대해 스스로를 응징 하노라. 내 일생을 벌하노라.”

스스로를 응징 하겠다면서도 모순된 삶을 살며 죄를 저지르는 우리 인간

이 세상 누가 욕망과 고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SNS 세상에서는 잘 먹고,잘 놀고, 즐겁게 삶을 영위하는 이들로 넘쳐 나고 한 편으로 나날이 치솟고 있는 물가에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고 있는 서민들의 유리 지갑 속은 텅 비어 가고 있다.

가난한 하급관리와 고아가 된 불쌍한 소녀의 애처로운 정신적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편지 형태로 엮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이자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정수를 담은 <가난한 사람들>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들을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지난날 방탕하고 절제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뉘우치며 스스로 엄격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욕구와 절제를 갖고 끊임없는 반성으로 자기 성찰을 유지했으면서도 가족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했던 톨스토이는 빈손으로 집을 나가   아스타포보 정거장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장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난 내가 조금씩 산을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지고 있었던 거지.”

-1910.11.19 톨스토이(1828-1910)

모순적인 인간의 삶 이것은 곧 모두의 한계이자 우리가 신앙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근거이면서    대 문호가 마지막 곁에 두고 싶었던 그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가 영원한 고전이 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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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의 남산 자락 초가집에 살았던 가난한 선비 허생은 뼈 속에 스며드는  추위와 천장에 고드름이 매달린 방안에서 오로지 글만 읽었다.

바느질로 겨우 굶주림을 참고 견뎌내던  아내는 어느 날 남편에게 글만 읽지 말고 도둑질이라도 해서 배불리 먹자 라며 방안에서 내쫓아 버린다.

결국 아내의 등살에 책을 덮고 거리를 나온 허생은 행인들에게 '한양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묻자 지나가던 행인들 모두 '변승업'이라고 대답한다.

허생은 곧장  한양 제일 거부 변승업에게 찾아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집이 가난한데, 조금 시험해볼 일이 있어서 그대에게 만 냥을 빌리러 왔소.”

거부 변승업은 허생에게  “좋소!” 라는 말을 하며  주저 없이 만 냥(현재가치로 약 36억원정도)을 빌려주었다.

남루한 차림새의 선비에게 거금을 빌려 준 변승업에게 놀란 하인들이 

“어찌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만냥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주십니까?”라고 물으니, 변승업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의지를 거창하게 떠벌리고, 자기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낯빛은 비굴하여 같은 말을 반복하기 일쑤다. 한데 이 손님은 비록 차림새가 남루 하지만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눈빛이 당당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재물이 없어도 만족하는 자임을 뜻하는 것이니, 그가 시도한다는 방법 역시 범상치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부산 왜관에서 일본 담당 역관으로 일했던 변승업(1623-1709)은 당시 중개 무역을 통해 조선 제일 부자 자리에 올라섰던 인물로 집안에 돈만 쌓아 두지 않고 그 돈으로 쓸만한 인재들에게 투자했다.

변승업에게 거액을 빌린 허생은 이를 밑천 삼아 '쩐'의 세상으로 뛰어 들어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변승업에게 10배 가까운 이자를 붙여 돌려 준다.

 
 

변승업이 죽기 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 긍긍하며 앞당겨서 빌려 준 돈을 회수 하려 하자 병환 중에 누워 있던 변승업이 이 사실을 알고  벌떡 일어나  더 많은 돈을 한양 사람들에게 빌려 주며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린다.

변승업은 이렇게 돈을 뿌려야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식들끼리 돈 때문에 다투지 않게 될 것이고 사대문 밖에 주민들이 굶어 죽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보건대, 권세가 있거나 재물을 모은 사람 중 삼대를 넘기는 이가 없었다. "

중인 출신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돈으로 사버린 인맥과 연줄로 상류층 자리에 올라갔던 사돈 집안이 참혹하게 몰락한 모습을 지켜 봤던 변승업이 한양 일대에 서민들에게 뿌린 돈은 50만 냥(현재 가치로 천 오백억원) 정도로 이 돈을 절대로 회수 하지 말라는 유언을 지킨 후손들은 후에 불어 닥칠 가문의 화도 막아 냈다.

돈의 가치와 쓸모를 제대로 알았던 변승업,지금 시대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유리 지갑을 가진 서민들은 숫자 하나에 손을 덜덜 떨며 최저가 상품, 할인 이벤트 행사를 쫓아 다니는 동안  서민들을 상대로 이자 놀이에 빠진 현대 금융산업은 소리 소문 없이  자신들 만의 보너스 잔치를 벌일 것이고 정책과 제도는 눈 가리고 아웅 정도의 세금 혜택을 던져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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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시대 벽화에서 자주 발견 되는 토기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 손에 들고 있는 항아리의 이름은 암포라(amphora), 점토로 빚어낸 이 항아리는 고대 조지아 지역에서 제조 되어 포도를 발효 시킨 와인이 고대 그리스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진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dolia)를  땅속에 일정 높이까지 묻은 후 포도를 넣고 일정 시간 발효 시켜서  발효를 마친 와인을 숙성 시키거나 이동할 때에는 이 항아리(암포라)에 넣었다. 

암포라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이즈로 제작되어 발효 뿐만 아니라 숙성 과정에서도 사용되었다.



발효 시킨 술이나 액체를 보관 하고 운송하기 위해 만든 암포라는  몸통은 기다란 역삼각형 모양으로 아래쪽이 뽀족 하며, 운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양 옆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 나무로 만든 배럴로 대체되기 전까지 고대 유럽인들은 암포라에 와인을 발효 시키고 보관하였다. 

암포라에서 발효된 와인은 풍미와 색이 짙고 타닌의 떫은 맛을 지녀서  과일향 풍미가 강하고 대량 생산 할 수 있는 오크에서 숙성된 와인은  나무의 풍미향을 비롯해 인공적으로  바닐라, 코코넛, 초콜렛, 토스트 등 다양한 향과 맛을 와인에 주입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향과 맛과 풍미가 느껴지는  와인이 시장에서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와인을 판매하려는 와인 메이커들은 오크 사용을 선호하고 있다.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암포라에는  보통 25~30ml의 와인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현대인들의 와인 병은 보통 750ml다.


삼국시대부터  흙을 빚어  상형토기를 만들어왔던 우리 조상들은 주변국과 활발하게 무역 교류를 벌였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예술적인 그릇’을 만드는 기술 장인들이 쏟아져 나기 시작했다.

 술이나 꿀 참기름 같은 액체류의  증발을 막기 위해 입구가 좁고, 어깨가 풍만하면서 아래로 갈수록 날씬해지는 S자 곡선을 가진  고려 청자의  표준적인 크기(높이 약 30~40cm)에 약 9,000ml(9리터) 용량의 액체가 들어갔다.

고려 청자 주전자에는 1.5에서 2 리터 가량의 술을 담을 수 있었다.

고려 전기와 중기 시대 때 널리 소비 되었던  탁주와 청주는 현대의 막걸리나 정종과 유사한 약 5도~15도 사이의 부드러운 술이어서 술 소비량의 폭증으로 양조에 쓰이는 쌀과 곡식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 할 지경에 이른다.
고려시대 왕실은  술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금주령을 내려 소비를 통제할 정도로 알콜 소비량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휘청 거릴 정도였다.




고려 시대 지식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던 화려한 풍류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홍저(唐紅佇) 홍주(紅酒) 녹두주(綠豆酒) 

수라주(水刺酒) 자하주(紫霞酒) 이화주(梨花酒) 

소고(小羔) 타락(駝酪) 섞어 마신 후에 

황금 잔에 가득 부어 손에 들고 권하는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유려한 곡선에 고려만의 독특한 미적 기술과 입체적 기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청자에는 한국인의 독창적인 미적 감각과 알콜을 즐기는 DNA가 모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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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서 빠듯한 월급으로 입에 겨우 풀칠만 하는 하급관리 마카르는 연인에게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돈이 아닌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이라고 고백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 했을 당시 1846년대 러시아 사회는 모두가 ‘절대적 빈곤’만 강조했다.

하지만 지옥의 끝까지 추락해 본 경험을 가졌던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빈궁한 하급 관리 마카르의 모습에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투영 시켜  러시아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청년 빈곤층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옛날에 검소하고 조용하게 사셨을 때는 겪어 보지도 못했을 불행을 이제 제가 당신께 가져다 드리고 말았군요.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한 때 각종 매체마다 표어처럼 실려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불행도 가난도 전염병처럼  대를 이어 물려 받게 되듯 개천에서 용이 나오던 시대는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누구든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 해서 좋은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해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의 연쇄 순환 고리가 사라졌다.

온갖 민원과 항의로 학급 담임을 죽음으로 몰아버리고 같은 반 아이에게 조롱과 협박이 섞인 카톡을 보내는 학부모들,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에게 개근 거지라 부르는 아이들까지 학교는 이미 폭력과 욕설, 조롱과 비아냥으로 서로를 물어 뜯고 싶어 안달 난  야생의 무법 지대가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인공지능(AI)과 공존할 것인가가 이 시대의 화두 아니다.

차라리 인공지능(AI)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학폭에 시달리는 우리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묻지마 칼부림 사건에 대비해 어떤 호신술을 배워야 하나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각종 기능 시험 자격증이 있는데 앞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 해야 하나요?

-매주 추첨으로 뽑는 로또 1등-2등-3등 당첨 번호를 알려주세요.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40년대의 삶과 2026년 현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크게 달라졌다거나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 인류는 진화해 왔고 현재의 삶은 분명 지난 세기 보다 월등히 좋아졌고 나아졌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울분과 증오심, 분노의 크기는 이전 세기보다 더 커졌고 사회적 위치와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기회의 평등의 사다리가  사라져 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고액 연봉과 안정적인 일자리와 사회 존경까지 두루 챙길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5살 유아기 때 부터 학원 문을 두드리고 7살 나이에 의사 고시를 통과 하기 위한  입시 전쟁터에 뛰어들거나 고소득 부모의 두둑한 지원으로 외국인 학교 입학이나  영재 음악원 등록에 매달리고 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들을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폭 주머니에 흉기를 넣고 다니며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행과 묻지마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고 아버지가 아들을 총으로 잔혹하게 살해 하고 빚더미에 앉아 가족 모두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 깊숙한 곳 어딘가 썩고 곪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를 파멸 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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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른 다섯 살에 접어든 물리학자 앨런 라이트먼이 <뉴욕 타임즈>에 '지나간 기대'라는 에세이에서 이십 대 시절과 달리 자신의 뇌 기능이 점점 퇴보한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이런 글을 기고 했다.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대개 젊을 때 유연하게 움직인다.

아이작 뉴턴은 20대 초반에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스물 여섯 살 때 특수 상대성 이론의 공식을 만들었으며,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서른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전자기 이론을 잘 다듬어 내놓고는 시골로 은퇴해버렸다.

나는 몇 달 전 서른 다섯 살을 맞아 물리학계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요약해보는 불쾌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작업을 해보았다. 지금 이 나이 또는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가장 창의적이고 눈에 띄는 작업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그런 성취를 이룩했거나, 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다.'

-앨런 라이트먼

정규 교육 과정을 다 밟고 사회로 나와 서른 다섯 살 나이에 다다르면 다이아몬드나 금수저 출신을 제외하고 사회 조직에서 과장급과 사무관 정도의 위치에 올라 섰을 나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우수한 지성인 집단인 과학자들의 경우에는 서른 이전에 국제 학술계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학술원의 회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내며 국가나 기타 단체로 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연구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과학을 전공한다 해도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뉴턴처럼 만유 인력의 법칙으로 세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구는 그런 성취를 했고 누구는 그런 성취를 못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인가?

출처: 금강전도(국보). 개인 소장

조선 회화의 전성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70세 무렵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금강전도>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본 선비들 중에서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그림으로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겸재 정선 이전에 그려진 산수화 풍경은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서 그렸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생하는 풀과 나무 꽃의 형태가 아니였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중국의 화풍을 기본으로 상상으로 그렸던 이전의 산수화와 달리 우리나라 산천을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겸재 정선의 금강산 전도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이 붓과 먹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 이전에도  한반도 풍경을 그린 화가는 있었지만 겸재와 같이 탁월한 수준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화가는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과거에 낙방 해서 가족 모두 무너져 가는 흙집에서 겨우 끼니만 해결 할 정도로 빈궁한 환경 속에서 겸재 정선은 스스로 공부 머리가 뛰어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유명하다는 환쟁이들을 찾아 다니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양반 사회에서 화가는  환쟁이로 손가락질 받았던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겸재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림 공부에 매진한다.

일찌감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양반 가문 친척들이 높은 관직에 올라가 손주 손녀를 볼 나이인 36세가 되던 1711년, 겸재는 금강산 근처의 고을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오랜 친구 이병연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 했고 그 여행길은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운명의 길이 된다.

36세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인 해악전신첩을 편찬하자마자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까지 이름을 알리는 스타 화가가 되었고 41세가 되던 1716년 봄, 마침내  종 6품(18품계 중 12등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관료 자리에서도 맡은 직무를 훌륭하게 해냈던 겸재는 영조 세자 시절부터 그림을 가르쳤고 영조 즉위 후 초 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겸재 정선이 70대에 이르러 필력이 무르익은 필법과 묵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남긴 불멸의 명화 ‘박연폭포'는  층층이 먹을 겹쳐 칠해 폭포 물살 주위 암벽의 거칠고 장대한 물성을 돋우고, 내리 쏟아지는 물살의 결들을 마른 먹붓질로 그어 소리의 울림을 시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으로  ‘인생 역전’을 이룩했지만 84세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겸재 정선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 <의궤>는 21세기 최첨단 시대의 기술을 뛰어넘는 사실적인 묘사와 입체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인 의궤에는  국가의 각종 제사,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 및 봉안, 왕실의 혼인, 왕세자와 왕비 책봉, 궁중 잔치, 왕실 장례, 국왕 행차, 궁궐 건축, 무기 제조, 실록 편찬 등 다양한 왕실 행사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금이 보는 의궤의 어람용(御覽用) 한 부를 포함해 춘추관이나 지방의 사고(史庫), 관련 부서에 보관 했던 분상용(分上用)은 5∼9부 정도 발행했다.

임금이 보는 어람용은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책 등의 양쪽에 대는 길쭉한 철판)을 댄 뒤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했고 박을못 밑에는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 해서 한 눈에 봐도 표지가 화려하고 속지의 종이질 품질이 뛰어나서 글씨와 그림이 분상용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정교하다.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의궤는 1822년 세상을 떠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 내용을 기록한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는 상하권이 전시 되어 있다.

그동안 상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한 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왔고 마지막 하권이 반환됨으로써 전체 분량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반을 점령하며 제국으로 불렸던 페르시아-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러시아 -미국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 한반도를 집어삼켰던 일본 조차도 조선의 실록 같은 기록 문화가 없었다.

의궤는 전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 형식의 역사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546종, 294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87종, 490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림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후대를 위해 국가 경영과 정책을 모두 기록하는데 동원되어 인류 문화의 자산으로 남긴 것과 달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이 있다.

도자기가 완제품에 이르려면 흙을 골라 반죽, 물레 성형, 건조, 무늬 조각, 유약 바르기, 가마 소성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도의 숙련이 필요 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도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고려 시대 남성 평균 수명은 39세로 부유하고 윤택한 환경의 남성들은 40에서 50세까지 살았지만 고려 시대 국민 중에서 60을 넘어서 까지 생존 하는 확률은 드물었다. 특히 흙을 만지는 도공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특수 행정구역에 살면서 공장제 형식으로 도자기를 생산했던 기술자들이였지만 농민보다 신분이 낮았다.

험난한 작업 환경으로 고려 도공들의 평균 수명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아서 도제로 들어 오는 기술자들의 평균 연령은 7세였고 이 도제들은 흙을 고르고 다듬는 기초 작업부터 시작해, 물레를 돌려 형태를 잡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 최소 10년이 걸렸다.

도자기를 최종 완성하는 불과 가마를 다루기 까지도 10년이 걸리니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온전한 도공으로 자신의 작품을 제작 할 수 있지만 이 나이 대까지 모진 세월과 고난을 견디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천한 신분 때문에 이름을 새길 수 없었던 고려 도공들은 외세 침략과 환란 그리고 몽골 침입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자기를 빚었다.

외세 세력에 숱하게 짓밟히면서도  우리 문화의 빛을 잃지 않았던 건 이름을 남기지 못한 천재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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