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에서 액체 저장용기로 제작되어 고급 소비재로만 판매 되었던 유리병은 1783년 영국의 슈웹스(Schweppes)가 세계 최초로 유리병에 담긴 탄산수를 대량 생산하며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1858년 영국 런던에서  위생적인 관리를 위해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처음 판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용도로 유리병이 제작 되기 시작했다.

1899년 미국에서  콜라는 유리병에 판매 하면서 다양한 용도의 유리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1915년 미국 코카콜라 회사는 시장에 넘쳐 나는 코카콜라 유사품과 차별화 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도 모양이 느껴질 뿐 아니라 깨지더라도 그 원형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디자인의  유리병을 세상에 등장 시켰다.

 1915년 인디애나 루트 유리 공장의 알렉산더 사무엘슨과 얼 알 딘이 코코아 열매의 울퉁불퉁한 세로 선과 독특한 윤곽(Contour)을 참고하여 제작한  유리병은 1950년 소비재로서는 처음으로 TIME지 커버에 등장한 최초의 상품으로 낙점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960년 미 특허청에 상표가 정식 등록되면서 코카-콜라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상징이된 코카콜라 유리병은 특유의 아이코닉함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뮤즈로  널리 사랑 받으며 소비자 상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유리병의 상징이 되었다.

코카콜라의 유리병이 소비자 상품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칭송 받고 있지만 이보다 몇 세기 전인 12세기  세계인들을 매료 시켰던 병은 한반도에서 생산되고 있던  고려 청자였다.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도자기 제작 기술이 도입 되기 전인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흙으로 모양을 빚어 냈던 시절 부터 불투명하고 투박하면서 화려한 색감에만 치중한 중국 도자기와 차별화된 디자인의 그릇을 빚어 왔다.

나팔처럼 벌어진 입, 긴 목, 골이 파이고 양감이 있는 몸체, 주름치마 같은 굽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에 고려만의 독특한 미적 기술과 입체적 기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청자 병은  현대인들이 대량 생산하는 공장형 유리병과 비교 할 수 없는 예술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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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유물을 재치 넘치는 감수성과 미적 감각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는  뮤지엄 굿즈라는 의미의 뮷즈로 불리며 시즌 별 한정 출시라는 희소성과 함께 SNS를 통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민화에 등장하는 까치는  마그넷으로 사용할 수 있고 와인마개에는  호작도가 그려져 있고 조선 달항아리는 양초로 만들어져서 불이 켜질 때마다 유물멍에 빠져 들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문화적 자부심’과 ‘일상 활용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국중박 뮷즈는 현 시대에만 제작 되었던 것은 아니였다.

일찌감치 우리 조상들은 일상의 소소한 물건에 한국적인 美와 기능성을 두루 갖춘 굿즈를 만들어 왔다.

고려청자 제작 기술이 결집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국보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향을 피웠을 때 연기가 이 구멍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질 수 있게 정교하게 공 모양의 원형으로 제작했는데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칠보 문양'을  음각 기법으로 뚫어서 새겼다.

고려 도공들은 단순히 동그란 모양이 아닌  여러 개의 연꽃잎을 첩화 기법(따로 붙이는 기법)으로 겹겹이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향로의 받침은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세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치고 있게 만들어서 이 향로를 제작 할 당시 어떤 국가의 도공들도 시도하지 못했던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향로를 고려 도공들은 세계 최초로 생산 제작했다.


국보 청자 사자모양 향로를 자세히 관찰하면 어딘지 모르게 사자의 얼굴이 좌우 완벽한 대칭이 아니고 눈도 짝짝이다. 자칫 실패작으로 보이는 사자모양의 향로는 여러 번 볼 수록 다양한 표정의 사자의 얼굴이 보이는 신기한 매력을 갖고 있다.

고려 장인들은  완벽한 사자의 조형이 아닌 사자의 갈기나 발등의 주름과 같은 선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서 사자 본연의 모습을 살림으로써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오래도록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은 우리 유물들의 진정한 가치는  다양한 뮷즈로 만들어져서 전 세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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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에 아들 히데요리를 얻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갓난쟁이 재롱에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양아들을 자결하게 만든 것 조차도 불안해서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 모두 죽여버렸다. 

히데요시는 이런 살육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누군가 오사카 성에 불을 질러 자신의 아들이 죽을 까봐 노심초사 하며 성 주변에 보초병들을 순찰 시키며 밤 낮으로 어린 아들의 안위만 걱정한다.

1590년 자신이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할 체제를 구축하는데 그동안  1인 독재 체제에서 5대로(돈과 정치력이  있는 5명의 다이묘), 5봉행(중앙 행정 처리) 체제를 도입해서 이들이 어린 히데요리에게 충성하겠다는 각서를 쓰게한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가 애지 중지 했던 후계자인 4살 짜리 아들이 다이묘(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지위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아래) 자리에 오르고 어린 히데요리의 후견인인 마에다 토시마저 죽자 후견인 중에서 가장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순식간에 군사조직을 장악해버린다.

이에 크게 반발한 5인 체제의 우두머리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집을 비운 사이 다른 이들과 규합해서 폭동을 일으킨다.

폭동은 세키가하라 대전투로 이어져서 1600년 전투가 벌어 질 당시  7살짜리 히데요리는 자신의 방안 이불 속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침내 이에야스가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7살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호위무사처럼 행동한다.

3년 후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에 새로운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고 1614년 겨울, 때를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동안 난공 불락이였던 오사카 성에 여자 사무라이들을 잠입 시켜서  히데요리의 어머니 차차(요도노노)를 설득해  휴전을 맺게 한다.

이 휴전은 교묘한 속임수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의 모든 해자를 메워버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대 학살극을 벌인다.

목이 없는 10만 명의 시신들이 성 안에 가득 쌓이자 이에야스는 불을 지르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22살의 히데요리는 자신의 엄마를 원망하며  불길 속에서 할복 자결한다.

육손이로 태어나  일본 남자 평균 신장 150센티보다 10센티 작은 140센티에 원숭이처럼 생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원한 권력을 쥐고 천하를 뒤 흔들 욕망으로 조선 땅을 침략해서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납치했다.

최고 권력 자리에 올라 자자손손 영원한 권력을 유지 하기 위해 세운 오사카 성은 납치된 조선인들의 피 땀 눈물로 세워졌고 성이 완공 되자 마자 코와 귀가 난도질 당한 채 생 매장을 당했다.

잔혹한 방법으로 납치 당한   조선의 기술자와 도공들이 일본 땅에 이룩한 문화와 예술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러서 이 문화적 융숭함을 유럽 전역으로 퍼져서 19세기 유럽 예술계에 일본 문화를 퍼뜨리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 영향력은 몇 세기를 지나도 퇴색 되지 않아서 유튜브에 일본 전통 예술에 관한 영상들은 수 천에서 수 십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에서 일본의 도자기에 관한 영상 해시태그는 수천개에 달하지만 한국 도자기에 관한 영상은 100개가 채 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 유튜브 채널을 처음 시작 할 때 부터 모든 영상의 언어를 영어로 제작하고 있다.

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行宮·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설치했던 왕실 자료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866년 철종 재임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귀중 도서 340여 권과 지도 갑옷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을 약탈 했을 당시  외규장각에는 당시 조선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서는 대략  6000여 권 정도 보관 하고 있었지만 귀중한 보물의 상당수가 파괴되어 사라졌다.

1991년 서울대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간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지속적인 반환 거부로 협상이 결렬 되었지만 경제적 실무 협약을 맺으면서 협상을 이어가다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의궤 대여’(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에 합의해서 현재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세계인들은 중국의 회화 작품에 대해 알고 있어도 정작 산수화의 대가는 조선의  겸재 정선이라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이 이룩한 눈부신 문화 예술이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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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든, 어디에서든 배달 된 것들을 먹어 치우고 비우고 나면 일주일 동안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그릇들과 용기들이 한 가득 쌓이고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즉시 폐기물 박스에 담아 재활용 버리는 날짜에 맞춰 망설이지 않고 전부 버려 버린다.

모든 것이 넘치고 넘쳐 나는 현대 자본 주의 세상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워주는 것들의 가치는 돈을 주고 지불하는 비용에 비해 하찮다.

일정 금액 이상의 물건을 구입하거나  이벤트 기간에 구입 할 때마다 한 두 개씩 쌓이고 있는 텀블러는 주방 찬장을 비롯해서 집안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 차곡 차곡 쌓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별로 갖고 있는 텀블러들을 집집마다 모두 꺼내서 수거 하게 될 경우 열을 차단할 목적으로 제작된  보온·보냉용 텀블러를 제작하는데 사용된 스테인리스 스틸을 전부 녹여 산업용  탱크를  제작 할 수 있는 양이 될 것이다.

일회용 소비를 줄이기 위해 에코백을 메고 폐 비닐과 폐 휴지 상자로 만든 제품을 소비하고 종이 빨대를 사용해도 이 모든 걸 생산하는데 막대한 석유자원이 쓰이고 있다.

개인 당 소비하고 버리는 쓰레기 양을 줄인다 해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에너지와 플라스틱 제품 그리고 이산화탄소의 사용과 배출량을 감소 시키는데 역부족이다.

또한 이를 대체 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개발된다 하더라도 친환경으로 생산한 제품 포장과 용기 역시 버리고 처리할 때도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지구촌 곳곳에서 매일 다량으로 생산 되고 있는  텀블러는 각양 각색의 디자인과 색감이나 기능을 갖췄다 해도 수 세기전 한반도 고려의 도자기 장인들이 제작하고 생산했던 품질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다.

청자는 반도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었다. 

당대 세계 최고 부국(富國)이자 문화 강국으로 콧대 높은 북송(960~1127) 사람들도 고려 청자만큼은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일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건을 살 수 있는 천원샵에서 구입하는 물건들은  몇 번 사용하고 나서 쓰레기 분리 수거와  폐기하는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까마득히 먼 시공간의 사람들이 빚고 굽고 칠해 만들어 사용했던 청자들을 볼 때면  현재 내 삶을 잠식하고 있는  수많은 일상적 사물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나무를 베니 남산이 붉게 물들었고

불을 피워 연기가 해를 가렸네

 청자 잔을 빚어 내고 열 가운데 하나, 빼어난 것을 골랐구나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반짝이니  몇 번이나 매연 속에 묻혔던가

 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  단단하기는 바위와 견줄 만하네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려 왔나 보구나 

가늘게 새긴 꽃무늬는 묘하게 정성스러운 그림 같구나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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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6-05-25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나라가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은 고려 청자에서 기인 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원래 고려 청자도 이웃 나라에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배워와 아주 극적으로 예술로 승화 시켰으니 말이죠. 우리 선조님들의 그러한 DNA 가 반도체 만드는 정신에도 이어져 온 것 같아요.
열에 굽고, 세밀하게 가공하고, 그리고 장인의 혼이 매 순간 담겨지는 그 DNA가 전해져 과거
고려청자에서 현재 반도체까지 이어져 왔고 미래에는 뭔 가로 이어질 것인지 기대가 되네요.
오늘은 비도 오는데 국뽕 차를 고려청자에 담아 한 잔 마시고 싶네요. ^^

scott 2026-05-26 15:38   좋아요 1 | URL
통일 신라 시대 부터 일치감치 중국과 차별화된 고도의 세공과 공예 기술을 갖췄다고 하니 한국인의 DNA에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기술력이 스며 있는 것이 분명 합니다.현재 기술로 고려 도공들의 청자를 백퍼센트 재현 하기 힘들 다고 하네요. 수 세기를 지나도 옥빛의 색과 형태가 변하지 않는 청자는 한국의 미美 !

거리의화가 2026-05-26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은품으로 주는 에코백이나 텀블러를 이젠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집에 쌓인 것만 해도 그걸 다 쓸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청자의 그 은은함은 따라올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scott 2026-05-26 15:40   좋아요 0 | URL
텀블러 너무 많습니다. 집집마다 쟁여둔 텀블러 전부 수거해서 녹여 내면 탱크나 인공 위성 제조하는 기기에 넣을 수 있는 양이 될정도! ㅎㅎ
환경을 생각해서 도자형 텀블러를 넣고 다닐 수도 없고 ^^
 

삼국시대 중국에서 무역을 통해서 자기와 유약이 들어온 이후 한반도에서 9세기 후반부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을 비롯한 서남 해안지역에서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1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도자기 기법을  모방했던 고려의  도공들은   12세기부터 유약의 배합과 굽는 온도를 정교하게 조절하여, 마치 비취옥처럼 맑고 깊은 청록색인 '비색'을 탄생시켰다.

 여기에 더 나아가 고려 도공들은 금속 공예 기법을 도자기 기술에 접목해서 도자기 표면을 파내고 그 안에 다른 색의 흙을 채워 넣어 무늬를 만드는 상감 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당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려만의 혁신적인 예술 기법으로  중국 청자와는 확연히 다른, 고려 청자만의 독보적인 색감과 기술력으로 고려청자의 우수성은 제작 당시인 고려 시대부터 천하 제일이였다.

고려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아름다운 비취색, 그 비결은 뭘까? 

도자기를 굽는 불은 두 가지가 있는데 가장 먼저  산소가 충분히 있어 완전 연소 되는 불은 산화염과 산소가 부족해서 연료가 덜 타게 되어 연기가 나는 불인 환원염이 있다. 

산화염에서 도자기를 구우면 필요한 양보다 산소가 많아서 남은 산소들이 도자기의 태토와 결합한다. 그리하여 색이 붉은 산화제2철을 만들면서 도자기의 색이 붉어지게 된다. 반면에 밀폐된 가마 속의 환원염은 산소가 부족하다. 때문에 가마 안은 불완전연소 상태다. 땔감이 완전히 타서 재가 되기 전에 계속 땔감을 공급해서, 시커먼 연기와 그을음이 생기고, 일산화탄소도 발생하게 된다.

이 일산화탄소는 청자 표면에서 산소를 빼앗아 결합하여 보다 안정적인 이산화탄소가 되려고 한다. 이제 청자 표면에는 산소가 부족한 상태가 된다. 이로 인하여 청자의 유약이나 태토에서 산소와 결합해 있던 산화제이철은 산소를 빼앗기게 되는데 이것을 환원이라고 한다.

후대의 학자들은 고려 도공들이 개발한 비취색 제작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밝혀 내기 위해 여러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결과   고려청자는  산화제이철이 산화제일철로 환원되면서  푸른빛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비취색의 비밀은 산화와 환원 반응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너울 너울 푸른 하늘을 떠도는 흰 구름 사이를 날개짓을 하며 날아다니는 고고한 학이 품고 있는  영롱한 빛은 수천년의 세월의 시간이 뿜어내는 영원 불멸한 푸른 하늘의 빛이다.

어른거림은 푸른 옥의 빛이요


영롱함은 수정의 모습이라.


치밀한 옥은 살결과 같아


손을 대면 옥 살갗을 만지는 것과 같다.


고려시대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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