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서른 다섯 살에 접어든 물리학자 앨런 라이트먼이 <뉴욕 타임즈>에 '지나간 기대'라는 에세이에서 이십 대 시절과 달리 자신의 뇌 기능이 점점 퇴보한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이런 글을 기고 했다.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대개 젊을 때 유연하게 움직인다.

아이작 뉴턴은 20대 초반에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스물 여섯 살 때 특수 상대성 이론의 공식을 만들었으며,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서른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전자기 이론을 잘 다듬어 내놓고는 시골로 은퇴해버렸다.

나는 몇 달 전 서른 다섯 살을 맞아 물리학계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요약해보는 불쾌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작업을 해보았다. 지금 이 나이 또는 앞으로 몇 년 후에는  가장 창의적이고 눈에 띄는 작업이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그런 성취를 이룩했거나, 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다.'

-앨런 라이트먼

정규 교육 과정을 다 밟고 사회로 나와 서른 다섯 살 나이에 다다르면 다이아몬드나 금수저 출신을 제외하고 사회 조직에서 과장급과 사무관 정도의 위치에 올라 섰을 나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우수한 지성인 집단인 과학자들의 경우에는 서른 이전에 국제 학술계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학술원의 회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내며 국가나 기타 단체로 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연구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과학을 전공한다 해도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지 못하고 뉴턴처럼 만유 인력의 법칙으로 세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구는 그런 성취를 했고 누구는 그런 성취를 못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인가?

출처: 금강전도(국보). 개인 소장

조선 회화의 전성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70세 무렵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금강전도>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본 선비들 중에서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그림으로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겸재 정선 이전에 그려진 산수화 풍경은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서 그렸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생하는 풀과 나무 꽃의 형태가 아니였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중국의 화풍을 기본으로 상상으로 그렸던 이전의 산수화와 달리 우리나라 산천을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겸재 정선의 금강산 전도는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이 붓과 먹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 이전에도  한반도 풍경을 그린 화가는 있었지만 겸재와 같이 탁월한 수준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화가는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과거에 낙방 해서 가족 모두 무너져 가는 흙집에서 겨우 끼니만 해결 할 정도로 빈궁한 환경 속에서 겸재 정선은 스스로 공부 머리가 뛰어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유명하다는 환쟁이들을 찾아 다니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양반 사회에서 화가는  환쟁이로 손가락질 받았던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겸재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림 공부에 매진한다.

일찌감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양반 가문 친척들이 높은 관직에 올라가 손주 손녀를 볼 나이인 36세가 되던 1711년, 겸재는 금강산 근처의 고을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오랜 친구 이병연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 했고 그 여행길은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운명의 길이 된다.

36세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인 해악전신첩을 편찬하자마자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까지 이름을 알리는 스타 화가가 되었고 41세가 되던 1716년 봄, 마침내  종 6품(18품계 중 12등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관료 자리에서도 맡은 직무를 훌륭하게 해냈던 겸재는 영조 세자 시절부터 그림을 가르쳤고 영조 즉위 후 초 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겸재 정선이 70대에 이르러 필력이 무르익은 필법과 묵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남긴 불멸의 명화 ‘박연폭포'는  층층이 먹을 겹쳐 칠해 폭포 물살 주위 암벽의 거칠고 장대한 물성을 돋우고, 내리 쏟아지는 물살의 결들을 마른 먹붓질로 그어 소리의 울림을 시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으로  ‘인생 역전’을 이룩했지만 84세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겸재 정선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 <의궤>는 21세기 최첨단 시대의 기술을 뛰어넘는 사실적인 묘사와 입체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인 의궤에는  국가의 각종 제사,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 및 봉안, 왕실의 혼인, 왕세자와 왕비 책봉, 궁중 잔치, 왕실 장례, 국왕 행차, 궁궐 건축, 무기 제조, 실록 편찬 등 다양한 왕실 행사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금이 보는 의궤의 어람용(御覽用) 한 부를 포함해 춘추관이나 지방의 사고(史庫), 관련 부서에 보관 했던 분상용(分上用)은 5∼9부 정도 발행했다.

임금이 보는 어람용은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책 등의 양쪽에 대는 길쭉한 철판)을 댄 뒤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했고 박을못 밑에는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 해서 한 눈에 봐도 표지가 화려하고 속지의 종이질 품질이 뛰어나서 글씨와 그림이 분상용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정교하다.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의궤는 1822년 세상을 떠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 내용을 기록한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는 상하권이 전시 되어 있다.

그동안 상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한 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왔고 마지막 하권이 반환됨으로써 전체 분량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반을 점령하며 제국으로 불렸던 페르시아-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러시아 -미국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 한반도를 집어삼켰던 일본 조차도 조선의 실록 같은 기록 문화가 없었다.

의궤는 전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 형식의 역사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546종, 294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87종, 490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림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후대를 위해 국가 경영과 정책을 모두 기록하는데 동원되어 인류 문화의 자산으로 남긴 것과 달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이 있다.

도자기가 완제품에 이르려면 흙을 골라 반죽, 물레 성형, 건조, 무늬 조각, 유약 바르기, 가마 소성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도의 숙련이 필요 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도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고려 시대 남성 평균 수명은 39세로 부유하고 윤택한 환경의 남성들은 40에서 50세까지 살았지만 고려 시대 국민 중에서 60을 넘어서 까지 생존 하는 확률은 드물었다. 특히 흙을 만지는 도공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특수 행정구역에 살면서 공장제 형식으로 도자기를 생산했던 기술자들이였지만 농민보다 신분이 낮았다.

험난한 작업 환경으로 고려 도공들의 평균 수명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아서 도제로 들어 오는 기술자들의 평균 연령은 7세였고 이 도제들은 흙을 고르고 다듬는 기초 작업부터 시작해, 물레를 돌려 형태를 잡는 기술을 익히는 데만 최소 10년이 걸렸다.

도자기를 최종 완성하는 불과 가마를 다루기 까지도 10년이 걸리니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온전한 도공으로 자신의 작품을 제작 할 수 있지만 이 나이 대까지 모진 세월과 고난을 견디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천한 신분 때문에 이름을 새길 수 없었던 고려 도공들은 외세 침략과 환란 그리고 몽골 침입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자기를 빚었다.

외세 세력에 숱하게 짓밟히면서도  우리 문화의 빛을 잃지 않았던 건 이름을 남기지 못한 천재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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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行宮·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시설로 설치했던 왕실 자료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866년 철종 재임당시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귀중 도서 340여 권과 지도 갑옷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 군이 외규장각을 약탈 했을 당시  외규장각에는 당시 조선 역대 왕의 글과 글씨,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도서는 대략  6000여 권 정도 보관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준비 과정과 의례절차, 내용 등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인 의궤에는  국가의 각종 제사,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 및 봉안, 왕실의 혼인, 왕세자와 왕비 책봉, 궁중 잔치, 왕실 장례, 국왕 행차, 궁궐 건축, 무기 제조, 실록 편찬 등 다양한 왕실 행사 내용이 담겨 있다.

 임금이 보는 의궤의 어람용(御覽用) 한 부를 포함해 춘추관이나 지방의 사고(史庫), 관련 부서에 보관 했던 분상용(分上用)은 5∼9부 정도 발행했다.

임금이 보는 어람용은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책 등의 양쪽에 대는 길쭉한 철판)을 댄 뒤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했고 박을못 밑에는 둥근 국화무늬판을 대어 제본 해서 한 눈에 봐도 표지가 화려하고 속지의 종이질 품질이 뛰어나서 글씨와 그림이 분상용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정교하다.

현재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의궤는 1822년 세상을 떠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 내용을 기록한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는 상하권이 전시 되어 있다.

그동안 상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한 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왔고 마지막 하권이 반환됨으로써 전체 분량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의궤는 전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 형식의 역사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546종, 294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87종, 490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1991년 서울대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한국과 프랑스 간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 측에서 지속적인 반환 거부로 협상이 결렬 되었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의궤 대여’(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에 합의해서 현재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


의궤는 전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 형식의 역사서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546종, 294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87종, 490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과 연결 되는 곳에 24시간 상주 하는 개인 비서 같은 AI가 한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정리 해 줄 수 있다 해도 프랑스가 약탈해 간  조선의 의궤가 인류 역사에서 실록이라는 기록 문화를 갖고 있는 한국의 지적 유산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세계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의궤는 프랑스 군에게 약탈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마다 다시 계약하는 대여 방식으로 전시 하고 있다.


K팝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가 전 세계인들의 눈과 마음 그리고 귀를 사로잡으며 국격이 드높아지고 있다며 호들갑을 떠는 언론은 정작 조선 의궤에 대한 밀도 높은 기사나 영상을 보기 힘들다.

서울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는 왕의 서고에 전시된 조선 의궤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는 상하권을 직접 관람 하고 촬영한 영상에  의궤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직접 스크립트를 작성 해서 3분 25초 분량 속에  왕의 비밀 기록의 귀환의 145년간의 여정을 담았다.

 우리 조상이 이룩한 유구한 문화를 담은 영상을 더 넓은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다국어로 번역한 자막을 삽입했다.


유튜브 채널에 중국과 일분 문화에 대한 영상은 무수히 많고 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영상 조회수는 매우 높다.

 왕의 비밀 기록의 귀환을 담은  145년간의 여정 영상 많은 이들이 시청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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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전시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트레이시 에민의 <잠>은 이듬해 터너 상을 수상하며 설치 미술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980년대 후반 런던 왕립 예술 학교를 졸업한 트레이시 에민(1963-)은 지극히 사적이면서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전시 되는 순간 부터 숱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주요 일간지 예술 파트에 문제가 되었던 작품에 대한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명세를 몰고 다녔다.

1990년대 영국의 거부 찰스 사치가 소유한 사치 갤러리 소속 아티스트로 선정  되면서 단독 전시를 열게 된다.

(c)Sleep, Tracey Emin,1998

  방에 있던 침대, 텐트를 전시장으로 옮겨온 트레이시 에민은  지난 시절에 함께 살았던 애인들의 이름, 생일, 전화 번호, 중절 수술 당시 입원했던 병실 호수 그리고 낙태한 아이의 성별까지 낱낱이 새겨 넣어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벗어던진 스타킹, 애완견 물품들, 담배꽁초, 콘돔, 먹다 남긴 음식, 깡통 같은 쓰레기물까지 고스란히 전시된 <잠>은 1999년 터너 상을 수상 하자 과연 이 설치물이 이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이런 걸 과연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여러 전문가들끼리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의 논쟁 틈에  영국의 권위 있는 법의학자들까지  끼여 들어  트레이시 에민이 텐트에서 살던 시절에  발생한 특정 사건을 유추 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터너 상을 수상한 설치물 <잠>은 범죄 과학 수사대원들에게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될 것이라는 의견까지 튀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논란과 분쟁이 서로 충돌하는 사이에 트레이시 에민의 텐트 일명 <잠>이라는 설치물은 옥션에서 80만 파운드(대략 한화로 13억원)에 팔려서 10년 후에 이 작품은 누군가가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80만 파운드에 구입한 익명의 구매자는 텐트 안에 있었던 벗어던진 스타킹, 애완견 물품들, 담배꽁초, 콘돔, 먹다 남긴 음식, 깡통 같은 쓰레기물까지 고스란히 가져가 버리자 마침내 트레이시 에민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과거에 내가 어떤 상태 였는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고 되새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 합니다.

어떤 이들은 손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구상하지만 저는 제 주변의 물건을 통해 과거의 나, 현재의 나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트레이시 에민

숱한 화재를 몰고 다니며 예술계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트레이시 에민처럼 사치 갤러리 소속된  데미언 허스트는 1988년   <프리즈(Freeze)> 전시에서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 yBA) 상을 수상한 이래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For the Love of God), , 포름알데히드용액에 박제한 상어(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등 파격적인 개념미술로 세상을  끊임없이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연일 미디어에 얼굴이 도배 되는 예술가가 된다.

1986년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의 컬러를 원형으로 표현한 회화 '스팟 페인팅 시리즈(Spot Painting)’를 시작으로 데미언 허스트는    ‘비주얼 캔디(Visual Candy)’ ‘베일 페인팅(Veil Painting)’ 작품을 연이어 펼쳐 보이며 본격적으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등장한 예술사조를 깊이 탐구하기 시작하더니 2019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러 전시 일정이 취소되자 그는 두툼한 브러쉬 스트로크를 들고 높이 5.5미터, 너비 7.3미터(18피트 x 24피트)에 물감을 찍어 나갔다.

자극적인 오브제로 섬뜩 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지” 라는 원론적 질문을 하게 만드는 데미언 허스트는   대중과 평단의  비판과 찬사를 몰고 다니며 대중 문화의 흐름을 영리하게 읽어내는 재주를 갖고 있다.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깊이 각인 시키는 뛰어난 데미언 허스트의 상어는 미술 교과서에 등장 하고 심오한 철학을 품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해골은 다양한 상품의 굿즈나 의상 도안으로 도용 될 정도로 공공재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1863년  ‘올랭피아’로 명암이나 원근을 최소화하고, 평면적인 색과 대담한 구도를 통해 회화를 현실의 창이 아닌, '회화 그 자체'로 바라보게 했던 마네는 19세기 프랑스 정통 화단의 주류 세력과 비평가들로 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작품을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며 누구보다 과감하게 기존 예술의 규범을 깨뜨려나갔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데생을 하며  낭만주의 화풍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드가는 마네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며 시류에 편승하거나 기존의 고루한 예술 기법을 모방 하지 않고 스스로 예술의 길을 개척했다.

전 세계인들 중에서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해도 마네와 드가의 이름은 알고 있고 설령 이름은 알지 못해도 광고나 잡지, 여러 매체에서 작품을 마주 할 기회가 아주 많다.

마네와 드가보다 1세기 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겸재 정선의 작품은 교과서와 1000원권 지폐 등 일상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만 거기까지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천원 지폐에 등장하는 수묵 풍경화 외에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 평생 동안 겸재 정선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를 올라가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주요 명승을 둘러보며 산세를 따라 대각선과 원형 구도를 사용해 그렸고, 산봉우리 명칭을 적거나 길을 표시해나갔다.

1751년 76세에 접어든 겸재 정선은 인곡정사 너머로 비 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는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면서 그 붓질은 각도만 달리해서 농묵으로 폭포와 바위에 슬쩍 강약의 리듬을 주어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그리고 음영까지 실감나게 묘사했다. 

겸재 정선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한양(서울)의 풍경과 자신이 부임한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그리며 그림 실력을 끝없이 다듬으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필법과 화풍을 그리는데 주저 하지 않았다.

중국 화풍을 모방하는데 만 몰두 했던 조선의 화가들은 모조리 겸재 정선의 화풍을 교본으로 배워서 한반도의 지형을 펼쳐 보이는 지도에 비로소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나무와 산의 형태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일 평생 동안 금강산을 세 번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겸재 정선은 평생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1000점 넘게 그리며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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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번잡한 거리는 물론이고 극장가나 대형 쇼핑몰마다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건 바로 뽑기 기계들로 가득 찬 ‘가챠’숍이다.

가챠 숍은  무심코 들려서 딱 한 번만 뽑아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 갔다가 뽑고 싶은 귀여운 것을 갖고 싶은 욕망에 불타오르게 만들어서 지갑을 탈탈 털어내는 개미굴과 같은 곳이다.

작고 앙증 맞은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 한끼 식사 가격을 눈 깜짝 할 사이에 날리게 만드는  ‘가챠’숍은  ‘찰캉찰캉’이라는 뜻의 일본어 ‘가챠가챠(ガチャガチャ)’에서 유래 했다.

가챠는  캡슐토이를 뽑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릴 때 철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한 손에 쥐어지는 캡슐 안에 미니피규어·인형문구류 등 다양한 장난감이 담겨 있다.

일본 경제 부흥기인 1965년에 가챠숍이 등장하기 전 뽑기 기계는  1880년대 미국 뉴욕에서 시작되었다.

껌이나 사탕 같은 것을 구입하기 위해 무인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던 뉴욕의  무인판매기는 음료수나 신문,잡지 같은 소비재 상품을 취급하는 기계로 발전했지만  일본으로 건너 오면서  손 안에 쥘 수 있는 장난감을 뽑는 기계로 바뀌었다.

대형 쇼핑몰에 장난감을 납품하던 일본 회사는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샘플 장난감을 작은 플라스틱 모형에 넣어서 뽑는 방법을 시도 했다가 기계 앞에서 떼를 쓰는 아이와 원하는 걸 뽑기 위해 아낌없이 동전을 쏟아 붓는 부모의 심리를 알아차렸다.

폭발적인 소비자들 반응에 중소 규모의 장난감 납품 회사는  장난감 전용  뽑기용 기계를  만들어서  일본 전역에 퍼뜨렸다.

이 뽑기 기계는 1985년 한국 땅으로 건너 와서 구멍가게나 문방구 앞에 설치 되었고 이 기계는  어린이들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21세기 최첨단 시대가 도래하자 아날로그 시절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였던 뽑기 기계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소비자는 귀여운 것에 열광하고, 깜찍함에 지갑을 열고 한시적으로 판매되는 굿즈를 손에 넣기 위해 오픈런을 하거나 웃돈을 주고 구매하는 열성을 보인다.

손 안에 비서 같은 인공지능이 24시간 상주 하는 시대이지만 소비자들의 심리를 빠르게 파악한 기업들은 앞다투어서 작고, 귀엽고  예쁘고 앙증맞은 다양한 상품의 굿즈를 출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본뜬 인형 굿즈나 콘서트에 가서 열광하고 응원하는 스포츠 팀의 굿즈 키링을 가방이나 휴대폰에 매달고 다니면서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작고, 귀엽고, 순수한 것들을 부적처럼 매달고 다니는 인간의 삶에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걷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휴머노이드가 등장 했다.

중국 전기차 기업 샤오펑이 광둥성 광저우에서 열린 2025 AI 데이 행사에서 선보인  휴머노이드 로봇 2세대 아이언이  걷는 모습을 세상에 공개 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미국 로봇 기업 피규어AI가 개발한 휴머노보이드는  물류센터 현장에 투입되어서 인간 노동자들 틈에 끼여서 함께 일하고 있다.

2016년 3월 한국의 바둑 기사 이세돌과 알파고가 세기의 대국을 펼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어느 새 우리 곁에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 단계의 기계 인간이 등장했다.

이 기계 인간은 위험한 작업을 하는 공장부터 인간의 손으로 움직여야 하는 노동 시장에도 투입 될 것이고 스포츠 무대에서는 인간을 대신해서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그리고 무기를 장착 하면 전쟁터로 뛰어들어 터미네이터 같은 괴물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로봇 청소기와 스팀 건조기를 구입하듯 집안의 도우미를 상주 시키듯 로봇 인간을 구입하며 집집 마다 기계 인간과 동거하는 가구 수가 늘어 나게 될 것이다.

로봇이 상주 하는 미래의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숙제를 함께 봐주고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 해 주는 상주 로봇의 옷을  반려 동물의  옷을 구입 하듯 로봇의 옷을 구입할 것이고 아이는 언제나 함께 있어주는 로봇에게 인형 옷을 입히듯 역할 놀이를 하게 될 것이다.

돌봄과 학습 그리고 인간을 대신 하는 노동 현장에서 함께 공존하게 될 미래의 반려 로봇과   여행을 하며 교감을 나누는 모습은 상상 너머의 일이 아닌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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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채널을 빠른 속도로 돌리다 보면 거의 비슷한 주제, 배경, 상황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예능인들, 배우들, 가수들, 스포츠 선수들의 여행-명사 초청 토크쇼-먹방-집 구하기-스포츠 게임-노래와 춤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스토리를 따라 갈 필요도 없고 깊이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고 극적인 재미나 눈물을 쏙 뺄 정도로 감동을 자아 내지 않지만 일단 틀어 놓기만 하면 그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장사하고 운동하고 산 속에서 생활하는 이야기에 중독되어 버린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예능 프로그램들이 한국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 만큼 넘쳐 나지 않는다.

영국은 스릴러, 탐정, 서스펜스 물 드라마 시리즈 물이 큰 인기를 끌 정도로 BBC라디오 채널에선 항상 서스펜스와 스릴러 물의 라디오 드라마들이 매 시즌 청취율 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미국은 좀비와 공포물에 심취한 시청자들이 아주 많은데 서점에서도 공포물 장르 코너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을 정도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영유아를 상대로 한 실험에서  아기를 웃게 만드는 것보다   공포감을 줘서 울리는 게 더 쉽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증명 되었다.

그만큼 인간의 감각과 지각 능력엔 위험과 공포를 감지 하는 능력이 타고났다는 증거 일 것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달콤한 멜로물 보다 스릴이 넘치거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영상물에 시선이 고정된다.

하지만 이따금씩 공포물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조직 생활이 불러 일으킨 소통의 단절의 벽에 부딪쳤을 때 공포물을 찾아 본다.

가령 나는 어제 이런 스토리에 집중했다.

1994년, 18세기부터 사람들을 죽여온 초자연적 존재 블레어 위치에 대한 전설을 취재하러 갔다가 사라진 3명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바로 그 신비의 블레어 위치가 있는 버키츠빌 숲에 들어간 후 실종된다. 그리고 1년 후 그들이 찍은 필름이 발견되고  사라진 젊은이들이 남긴 영상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스토리가 전개 되는 동안 영상은 심장 박동 보다 더 빠르게 흔들리면서 또렷하지 않은 사람의 형체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공포물의 대가 스티븐 킹은 공포의 차원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역겨움

잘린 목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볼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뭔가 끈적거리는 물질이 팔에 닿았을 때.

-무서움

초현실적 상황, 공룡 크기의 거미들이나 죽은 사람들이 주변을 돌아다닐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거대한 집게발 같은 것이 당신 팔을 잡아 당길 때

-두려움

집에 돌아와 보니 물건들이 모두 비슷한 물건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았을 때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누군가 등 뒤에 있는 것 같다.


스티븐 킹이 구분한 세 단계 공포 중에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감은 '두려움'이다.

오늘 출근 길의 두려움, 업무에 대한 두려움, ....

여러 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까지 일일이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내 안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달이 바뀔 때마다 모든 것들이 야금 야금 오르고 있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 할 때면 지난달 보다 몇 백 원 숫자가 더 찍혀 있다.

마트와 편의점에 들어가 늘 상 구입했던 물건의 가격표를 보고 놀란다.

몇 묶음, 몇 덩어리, 몇 상자들이 이제는 몇 개와 몇 알만 구입하게 되었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며 착실하게 세금을 내며 오늘은 무사히 버텨 냈다 해도 내일의 삶은 어떤 두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세계 한 곳에서는 전쟁과 기근, 재난 상황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는 오늘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비하지 못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은 초자연적인 세상에서 발생하는  어떤 공포물보다 더 공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죽어가던 아침 나절 벌떡 일어나

날계란 열 개와 우유 두 홉을 한꺼번에 먹어 댔다.

그리고 들로 나가 우물물을 짐승처럼 먹어 댔다.

얕은 지형지물들을 굽어보면서 천천히 날아갔다.

착하게 살다가 죽은 이의 죽음도 빌려 보자는 

생각도 하면서 천천히

더욱 천천히

-김종삼의 <또 한 번 날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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