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맛에도 종류와 단계가 있다.

매운 맛의 단계를 표시하는 국제 식품 표준 기준인 '스코빌 지수(Scoville heat unit:SHU)'에 의하면

1단계 순한 맛(GHU 30 미만)-2단계 덜 매운 맛(GHU 30∼45 미만)-3단계 보통 매운 맛(GHU 45∼75 미만)-4단계 매운 맛(GHU 75∼100 미만)-5단계 매우 매운맛(GHU 2000이상)으로 단계별 매운맛 지수로 나눠진다.

1912년 미국의 약사 윌버 스코빌이 세상에서 어떤 고추가 매운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만든 스코빌 지수를 공포 영화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토마토 공포 지수 95%를 기록한 영화 ‘백룸’의 첫 화면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촛점이 흔들리며 카메라 기기를 만지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린다.

친구들과 공포영화를 촬영 중인 순간에서 시작되는 단편 <백룸> 오프닝 장면을 지나면 어떤 공간에 발을 디딤으로써 우연히 백룸이라는 평행 세계에 떨어진다.

어떤 벽을 통과하자  방치된 공간이 나오고  조명도 벽지 색깔도  한없이 으스스해 보인다.

저조도의 형광등 아래 온통 광기 어린 노랑으로 물든 벽과 축축한 카펫.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어두운 통로와 지하 수영장, 용도를 알 수 없는 빈방, 하늘이 막힌 중정을 둘러싸고 실내로 나 있는 빽빽한 창문들…. 

무작위로 분할 된 약 6억 제곱 마일의 빈 방 속을  시간과 공간 개념이 무너진 채로 떠돌게 되는 백룸(backroom)은  텅 빈 공간처럼 보이면서도 ' 들어오면 안되는 곳을 들어온 것 같은’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드는 기이한 공간이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낯선 이 공간에서 서서히 궁금증과 호기심이 증폭 되는 순간  사람의 소리를 흉내 내는 괴이한 생명체가  출몰한다.

2022년 1월, 유튜브 채널 <케인 픽셀즈>에 <백룸>(The Backrooms(Found Footage))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9분 짜리 단편영화는 케인 픽셀즈를 운영하는 17살 감독 케인 파슨스가 고등학교 방학 기간 동안에 제작해서 단숨에 조회수 몇 만 단위 조회수를 기록했다.

9분 짜리 초 단편 영화 <백룸>은 수많은 온라인 방랑객과 게임 유저들이 살고 있는 가상의 세계 거대한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공간으로 급작스러운 모션 혹은 장면이 전환되는  노클리핑(통과할 수 없는 물체와 공간의 표면을 뚫고 진입하는 게임 속 치트 혹은 버그 현상)같은  게임의 문법에 충실하게 맞춰 정교한 계산으로 촬영된 영화다.

호러 명가'로 불리는 제작사 A24가  ‘더 백룸즈(파운드 푸티지)’라는 장편서사로 확장한 이야기의 시작은  할인가구점을 운영하는 남자 클라크와 그의 심리치료사 메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클라크 선장의 오스만 제국'이란 싸구려 가구점을 운영하는 클라크는 떠나버린 아내 때문에 자존감 부족, 자기혐오에 시달라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클라크는 상담사 메리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 동안 조금씩 치유되는 듯 했지만 , 자신이 임대해 운영 중인 가구점 지하에 '통과 가능한 벽'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벽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기형적인 복도를 따라 늘어선  방을 지나면 또 방이 나오는 공간이였다.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공간을  조사하던 클라크는 상담사 메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정체불명의 뭔가에게 쫓기다 결국 실종된다. 

클라크가 사라지자 메리는 클라크를 찾기 위해 그의  매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백룸'의 입구를 발견한다.

미궁 속에서 헤매던 클라크는 미쳐 버리고 그를 찾아 나선 메리는 기이한 그곳 백룸에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영화 백룸에서는 어떤 끔찍한 살인이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노란 벽지로 이어진 백룸 공간은 벽으로 가려져 있지만 제대로 된 문이 없기에, 뒤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고 백룸 뒤엔 또 다른 백룸이 있기에  그 공간을 헤매고 있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가는 동안 내내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기에 뒤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도시 생활은 빠르게 움직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공포들은 아주 많다.

 전세사기, 취업 사기, 피싱 사기 같은 사기범죄일 수도 있고 기껏 이사 간 집에서 창을 열자 따스한 햇빛 대신 신축 건물 현수막을 마주하게 되거나, 잠들 시간마다 윗층에서 울려 대는 층간 소음 그리고 늦은 밤 귀가 길에 내 뒤를 밟고 쫓아오는 낯선 사람까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네*버 전문가 상담 서비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분야 1위는  운세·사주, 2위는 타로다.

대로변마다 즐비한 간판 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부동산-미용실 그리고 타로와 역술집으로 전국 서비스업 사업체 중에서 1인 사업체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 하고 있는 건 점술업이다.

지난해 발간된 국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국내 최대 무속인 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경천신명회)에 정기 회비를 낸 회원 가입 무당이 30만명,전국에 무속과 점술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총 1만 194명에 달한다.

 정식 사업체 등록을 하지 않고 지인들을 상대로  ‘점술 및 유사 서비스업’을 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대략 80만명에 달하고 주역과 점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 수강생까지 합하면 전국에 걸쳐 사주와 점을 치는 숫자는 대략 1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직업으로 무속과 역술을 선택하고 있는 20대 MZ세대들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가 존재 하지 않았던 시절엔 부모나 친척 지인을 따라 점집에 다니거나 호기심에 친구들과 함께 가본 다거나 답답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용한 집을 알고 있다는 소문을 따라 갔다.

 현 시대 무당과 역술인들이 개설한 유튭 알고리즘을 따라 가다 보면 사주‧역술‧명리학 유명인들과 연예인들의 기가 막힌 사주나 현재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점술 뿐만 아니라  대권·국운 예언까지 거침없이 영역을 확장 하고 있다.

최근엔 인공지능(AI)을 통해 신년 운세나 타로점을 보며 현실의 답답함을 토로하거나  미래에 어떤 운이 찾아 오는지 무엇을 피해  대비해야 하는지도 물어보게 되었다.

한국인에게 무속과 점술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치열한 경쟁과 급변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살아 남기 위한 강구책이였고 보이지 않게 믿고 의지 하는 존재였다.

 각종 예능 방송에서 '신'과 연애하고 대화하고 상담하고 수사하고 예측하는 다양한 샤머니즘이 중심인  예능들이 쏟아지고 있는 한국에서 무속과 역술은 일기예보처럼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 듣고 볼 수 있다.

운세, 사주는 굿과 부적 같은 액막이를 벗어나 현대인들의 정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상담하고 해소하는 점술은 마치  매운 음식을 먹으면 일 순간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술인들은 과거의 지나간 것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건 대체로 적중률이 높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지나치게 과장 하거나 자극해서 액땜이나 복을 불러 모으는 부족, 굿판을 벌이는 방향으로 유도 한다.

점술가의 말을 믿고 부적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큰 맘 먹고 굿을 해도 현실의 고통이나 미래의 골치덩어리들이 싹 사라지지 않는다.

무당의 말을 믿고.....

역술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나면 

왠지 사기 당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든 적당히 재미와 흥미로 점을 보는 건 나쁘지 않지만 한 치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운세가 꽉 막힌 상황에 막다른 골목,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고 싶다는 간절함에 점술가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거금을 탈탈 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운세가 막혔을 때나 무언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무서운 영화나 공포 영화를 보거나 맵고 얼큰한 국물에 면발이 쫄깃한 음식을 한 그릇 먹어 치우면 세상 만사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불 맛이 스며든 고기 한 점 입 속에 넣고 나면 공포심, 두려움 갖은 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혀 끝에 살살 녹는 맛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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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 걷고 움직인다.

이런 일련의 자연스런 행동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핵력)이라는 4가지 형태의 힘에 의한 것으로 걷고 움직이는 호모 사피엔스들은 매일 중력과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의 힘에 의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힘인 중력(gravity)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데 필요한 구심력의 원천으로 인간이  발바닥을 땅에 밀착 시켜 주게 만드는 힘이다. 

각종 조명과 컴퓨터, TV, 전화 같은 첨단 기기와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의 근원이 되는 힘인 전자기력(electromagnetic)은 중력의 질량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서로 부딪칠 때 느껴지는 감촉이나 진동, 그리고 온도의 변화로 느끼는 추위, 더위 같은 힘에도 작용을 한다.

강력(strong force)은 양성자와 중성자 내부의 쿼크(quark 하나의 핵자-양성자 또는 중성자는 3개의 소립자 즉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들을 단단하게 결속 시켜 주면서, 동시에 양성자와 중성자를 원자핵 속에서 강하게 결합시켜 주는 힘이다.  

 약력(weak force)은 우라늄이나 코발트 같은 원소에서 방사능 붕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원자 스케일의 근거리에서만 작용하고 거리가 멀어지면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힘이다.

매일 각기 다른 장소와 상황 속에서 힘을 주거나 빼기도 하고 멍을 때리기도 하고 어제처럼 반복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동의 발현이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핵력)에 의한 상호작용에서 발생되는 힘으로 거대한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힘이다.

현대인들은 태양이 보내주는 빛 보다 각종  전자기기, 스마트 폰에서 나오는 빛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다.

눈의 망막에 있는 분자들이 빛 때문에 변형을 일으키고, 그 결과 화학 신호가 발생하고, 그것이 전기 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되는데, 이 모든 것이 전자기력 때문으로 지금  이 글을 눈으로 읽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도 뇌 속의 전기적 작용, 즉 전자기력 때문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시원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난 후 커피 원두를 갈아 내린다.

커피가 완성 될 때까지 두툼하게 자른 빵에 버터나 잼을 바른다.

만일 이 세상에 중력이 없다면 빵을 들고 있다가 손을 놓자마자   빵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정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빵과 커피를 먹고 집을 나서는 동안 한 손에 스마트 폰을 꼭 쥐고는 화면을 응시하는 이 모든 것들이 중력과 전자기력에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중력을 거슬러서 살 수도 없고 전자기력 없이는 어떤 글도 읽지 못하고 빛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태양의 빛은 1초에 약 18만 6000마일 또는 거의 30만 킬로미터를 가는데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약 6조 마일을 간다.

이 빛은 지구 지구까지 8분이면 온다. 그러므로 태양은 지구에서 약 8광분 만큼 떨어져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 빛이 1년 동안 지나간 거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1광년이라 부른다.

인간이 1년 동안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 해도 태양의 빛의 속도를 절대로 따라 잡지 못한다.

우리의 존재가 무한한 우주 공간 속의 한 점이라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밖에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매일 찬란한 빛을 내리쬐게 만드는 태양의 빛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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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넓이 , 길이에 몸을 맞춰 어떤 상황에서도 스르륵 빠져나가는 고양이는 신기한 동물이다.

위협적인 짐승과 맞닥뜨리는 순간이면 옆으로 위로 점프해서 도망치거나 도망 칠 곳이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몸을 한껏 부풀려서 상대를 제압해 버린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얼굴을 쑥 내민 고양이에게 문을 열어 주면 항상 꼬리 끝을 문 안 쪽에 남겨둔다.

이런 습성은 나름 고양이스러운 관계 맺기로 잠시 나갔다 돌아 온다는 의미다.

동네 곳곳을 다니다 보면 빵집 앞을 어슬렁 거리는 고양이, 튀김 가게 앞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떡집 앞에서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들과 자주 마주 친다.

분명 이 고양이들은 한 때는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랑스러운 이름, 귀여운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매일 앞 발로 귀 뒤를 긁고 혀로 온 몸을 핥으며 외모를 각별하게 관리하는 동물계 중에 최고의 나르시즘을 갖고 있는 고양이를 단 한 번이라도 품 속에 안아 본 사람은 알고 있다.포동 포동 폭쉰 폭신한 냥이 발바닥ฅ🐾의 촉감이 주는 따스한 느낌을 ...

 고양이가 불행한 곳엔 인간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들이여, 부디 행복하기를 ฅ🐾


늙은 모그가 들어와서 신문 위에 앉는다.

사람 좋아하는 늙고 뚱뚱한 고양이

쓰다듬어 주면 자기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조은 에이킨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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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드가는 1870년 초반 서른 여섯의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의 왼쪽 시력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여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주변만 보이는 현상을 겪게 되자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

한동안 드가는 자신의 시력 장애를 받아 들이지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자포자기한 상태에 빠졌다.

밝은 빛 아래의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없게 된 드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어지내듯 생활 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포기 하지 않았다.

시력이 악화 되면서 드가는 염료를 섞거나 광택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파스텔로 겹겹이 색의 층을 만들어서 입체적인 회화 효과를 내기 시작한 드가는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동판화, 애쿼틴트 판화,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모노타이프 작업을 하던 드가는 밀랍과 찰흙을 만지면서 자신이 즐겨 그리던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해 나갔다.

1874년 드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에드몽 콩쿠르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력 상실로 모델의 형태만 간신히 볼 수 있었던 드가는 모델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흙을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서서히 그 찰흙은 모델을 닮아 갔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드가는 조각을 통해 대상의 형태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탐구 해 나갔다.

1875년 파리에 대리석 장식과 금박 장식의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에 부유한 특권층이 몰려 갔다. 

온 몸을 완전히 가리는 긴 드레스를 차려 입었던 귀족 여성들과 달리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팔 다리를 드러내고 얇은 재질에 의상을 걸친채 춤을 추니 이들을 보기 위한 남성들이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정기권을 구입한 남성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또는 휴게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용수들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 틈에 화가 드가도 끼여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드가는 공연이 시작 되기 전 무대 뒤와 계단, 관람석에서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을 빠른 손놀림의 파스텔 스케치로 그렸고 늦은 저녁 작업실에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당시 발레단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들은 주로 노동 계층에서 선발 되었는데 일곱살 또는 여덟살 때 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가난한 가정 환경에 부모로 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발레단의 소녀들은 온 종일 공연 연습에 몰두 해야 했다.

발레단의 어린 소녀들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드가는 휴게실이나 무대 위에서 스텝과 군무, 그리고 앙상블까지 단 한 순간도 쉴틈 없이 훈련을 해야 했던 어린 무용수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가게 점원, 세탁부, 하녀, 카페나 경마장등 공공장소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즐겨 그렸던 드가는 돈으로 쾌락을 사는 남성들과 달리 어린 소녀들에게 부성애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무용수들도 드가를 좋아했다.

그들은 드가가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고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에 고마워 하며 진심으로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드가가 작업 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 본 한 무용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가 선생님은 손에 연필을 들고 장옷 밑에 숨겨 둔 스케치북에 자신이 본 것을 재빨리 기록했어요. 오페라 하우스에 불이 꺼지면 그분의 모델이 된 무용수들이 스튜디오에 찾아갔어요. 무대 뒤에서 우리를 지켜 보았던 시선과 달리 드가 선생님은 아주 엄격한 작업태도로 다양한 포즈를 취할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몇 시간씩 포즈를 취하는 동안 드가 선생님 손에 쥐어진 찰흙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가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어요."

1880년 제 5회 인상주의자 전시에서 드가는 일종의 맛보기로 빈 유리장을 전시하더니 그 다음 해에 90센티미터의 실제 머리카락과 리본, 천으로 만든 조끼, 모슬린 무용복에 분홍색 발레화를 신은 황금빛 밀랍의 인간 피부처럼 따뜻하면서 말랑한 질감의 조각상을 공개했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행사장은 술렁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뒷발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녀상은 야생 새끼 짐승처럼 듬성 듬성한 머리카락에 감긴 눈, 조금 경사진 이마, 새의 부리 같은 입술에 툭 내민 턱, 길게 늘어뜨린 노란색 리본, 유난히 두꺼운 목, 핀으로 고정한 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들린 엉덩이, 살짝 나온 아랫배, 단추를 몇 개 풀어 어깨에 살짝 걸친 조끼, 가는 허리, 누더기가 된 치마, 호리호리한 다리, 등 뒤로 마주 잡은 가는 팔과 손을 한 조각상을 마주한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랬다.


실제 피부색과 비슷한 밀랍으로 빚어서 일까?

깔끔한 외모, 탄탄한 몸매 등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조각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의 눈에 드가의 소녀 조각상은 예술은커녕, 이집트 미라나 아프리카의 물신이나 부두교 같은 불길한 상징물처럼 보였다.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작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드가의 조각상을 가리켜 현대적인 시도라며 "조각에 대한 모든 생각, 차갑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순백색, 수 세기 동안 복제되었던 예술의 관습을 뒤흔들어내며 전통을 부숴 버린 작품이라 이례적으로 호평 했다.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예술계는 드가의 조각상을 향해 “타락의 꽃”, “악덕과 혐오”, “흉악한 분위기” “악취미로 빚은 인체 표본”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이 밀어 넣고는 두 번 다시 세상에 공개 하지 않았다.

드가의 작업실 옷장 문이 잠기고 나서 <열네 살의 어린 무희>는 이대로 영영 어둠에 잠겼을까. 

소녀의 이름은 마리 반 괴템 

소녀는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존재 였다.

발레단엔 마리 같은 소녀가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이런 하찮은 발레단의 소품 같은 소녀들은 보잘 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며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다.

마리는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벨기에계 이민자로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마리에게는 큰 언니 앙투아네트가 있었고 한 살 많은 작은 언니도 있었지만, 출생 한지 18일 만에 사망했다. 

마리가 태어나고 5년 후 여동생 샤를로트가 태어났다.

마리 가족의 터전은 파리 9구.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온 가난한 예술가들, 거리의 부랑자들 노동자와 매춘부가 몰려 있는 그 곳은  토끼 굴보다 비좁고 비 위생적인 환경에 일명 파리에서 하수구로 불렸던 곳이다.

 마리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방 값이 몇 달 씩 밀려 쫓겨나듯 자주 이사 갔다.

당시 빈민층 부모의 자녀들 중 소년은 광산과 농장으로 팔려 갔고 소녀는 공장이나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가야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생계가 어려워진 마리의 엄마는 자신의 딸 셋을 모두 발레단에 보냈다.


1878년,  마리는 열세 살이 된 그해 드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너, 9지구에 사는 그 꼬마 맞지?”


드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리예요.” 마리가 답했다. 

“우리 종종 봤지?” 드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 

푸른색 안경을 쓰고 있는 드가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내 모델이 돼줄래?.”


드가는 마리에게 4시간당 6~10프랑 사이 사례비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육점 고기 한 근이 1~2프랑이었다고 하니 하급 계층 생계 기준에서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

드가는 남아 있는 왼쪽 시력으로 멍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든 마리를 3년 동안 지켜 보며 발레리나의 화려한 몸짓이 아니라, 그 몸짓을 만들어낸 수많은 땀방울과 버팀의 시간을  빚어내듯 밀랍이나 찰흙으로 속을 채울 때는 성냥이나 종이, 코르크, 막대기, 헝겊, 밧줄, 목재, 스펀지, 옷감, 담배, 부러진 붓 같은 걸 함께 집어 넣었다.


3년 동안 드가의 작업실에 찾아가 모델을 섰던 마리는 지각과 불복종 등을 이유로 몇 차례 임금 삭감과 같은 징계를 받더니 조각상이 전시 되었던 1881년 오페라단에서 쫓겨났다.

1903년 미국인 루이진 헤브마이어가 뒤랑뤼엘을 통해 열네살의 어린 발레리나 조각상을 사려 했지만 드가는 응하지 않았다.

드가는 자신의 조소 작업이 동작과 균형을 연구하기 위한 습작일 뿐이라며 살아 생전 작업실 밖으로 소녀의 조각상 내보내지 않았다.

훗날 드가는 화상 볼라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청동으로 만들어두면 내가 죽은 뒤로도 영원히 남을 텐데 그런 걸 남긴 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마리가 오페라단에서 퇴출 당하기 몇 달 전, 신문 《레벤느망(L‘Evenement)》은 “(예술가 드가의 모델)마리가 르 라 모르(Le Rat Mort) 주점을 자주 오간다”는 식의 기사가 실렸을 뿐 현재까지  소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없고, 흔적도 없다.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업실 옷장 속에 갇혀 있었던 작은 밀랍상은 조각가 알베르 바르톨로메의 손을 거쳐 청동상으로 주조 되었다.

마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열 네 살의 소녀가 정말로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는  복제폼 28개로 주조 되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예술은 늘 멋진 해답을 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도록 작은 창 하나를 열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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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먹거리 중에서 가격대비 영양가가 높은 것은 닭이 낳은 알 '달걀'이다. 

달걀은 무게에 따라 왕란(68g 이상), 특란(68~60g), 대란(60~52g), 중란(52~44g), 소란(44g 미만)으로 나뉜다. 

알을 낳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닭이 낳은 알은 초란이라고 하는데 계란 크기로는 맛이나 영양의 차이가 거의 없지만  대개 산란 후 2주 정도까지가 가장 신선하고 영양가가 높은 상태다.

우리가 먹는 달걀은 대부분 특란 또는 대란인데 흰색, 갈색 그리고 청색의 계란 알 색깔은 영양학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다.

달걀 1개에 단백질이 6~7g 들어 있어서 하루 2개 정도 섭취 하면 닭가슴살 100g의 단백질 절반 가량을 섭취할 수 있다.

달걀의 단백질은 조리 방식이 달라져도 큰 차이가 없다.

삶은 달걀의 열량은 77칼로리지만 조리 할 때 기름을 사용할 경우 200칼로리를 훌쩍 넘긴다.

삶거나 굽거나 찌거나 중탕으로 수란 상태로 먹어도 맛이 뛰어난 계란은 기름에 조리 할 때 소금과 설탕 약간만 넣어 고소한 맛을 살려서 먹어도 맛있지만 계란요리에 빠지지 않는 소스가 있다.

다양한 요리에 뿌려 먹고 찍어 먹는 만능 소스 케첩은 어느 가정집의 냉장고 문을 열면 한 두 개 정도는 있고 다양한 음식에 두루 사용되는 소스다.

미국을 대표하는 페스트 푸드인 햄버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케첩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 유럽에서 부유한 이들만 먹을 수 있었던 값비싼 소스였다.

17세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아시아 푸젠성, 광둥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 되었던 생선 소스와 베트남 요리에 쓰이는 생선으로 만든 간장 ‘누옥맘(nuoc mam)’을 가져와서 전파 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아시아 생선 소스와 간장에 버섯이나 호두를 갈아 넣어서 케첩 소스를 먹기 시작했지만  비싼 아시아 생선 소스를 수입하면서 값싼 토마토를 섞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케첩의 색깔은 빨간색이 아니라 갈색이였다.

미 대륙에 케첩이 전해졌을 때도  버섯이나 자두 ,복숭아를 섞은 갈색 소스 형태로  수입이 되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농작물을 제때 수확하기 힘들어지자  빠른 시간에  쉽게 키울 수 있는 토마토를 대량으로 재배해 케첩 소스에 섞기 시작했다.

남북 전쟁 당시 토마토를 넣은 빨간색 케첩 맛에 반해 버린 미 대륙인들은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여러 업체에서 마구잡이로 만들며 불량 저질 토마토 케첩을 쏟아냈다. 

계란의 껍질을 갈아 넣거나 나무 껍질을 넣기도 했던 케첩에 부패를 방지 한다며 방부제로 포르말린을 넣고 변색 방지를 위해 아스팔트용 콜타르를 넣기도 했다.

케첩을 먹고 건강을 해치게 되자 소비자들은 외면하고 때마침 이 시기에 사업가  헨리 하인즈는 나쁜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허 받은 투명 용기 케첩 병에 소스를 담아 팔기 시작했다.

토마토를 끓여 걸러낸 뒤 설탕, 소금, 식초, 향신료 등을 첨가해 조린 하인즈 케첩은 계피, 허브 딜오일, 마늘 같은 천연 성분을 넣어 신선도와 맛을 보존 하면서 토마토 케첩은 하인즈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스가 된 하인즈 토마토 케첩이 투명한 유리 용기에 담기 전 1900년 경부터 일본에서는 푹 익은 토마토를 갈아 넣어서 유리 용기에 담아 먹는 소스를 먹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부터 국민 브랜드 소스로 자리 잡았던 가고메 토마토 케첩은 유리병을 열자 마자 소스가 확 쏟아지거나 양 조절이 힘들고 사방으로 소스가 튀어서 그릇에 담아 먹었다.

1950년  바닥까지 깨끗하게 먹을 수 있는 비닐 튜브형 용기가 등장하면서 깔끔하게 쭉 짜서 먹게 되자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어떤 요리에도 맛과 풍미를 돋게 하는 토마토 케첩은 달걀로 만든 음식과 최상의 조합이다.

 달걀과 밥만 있으면 집에서 간편하게 조리 할 수 있는 오무라이스에 케첩만 뿌려도 맛과 풍미가 뛰어난 요리가 된다.

원하는 재료를 넣고  밥을 볶은 후 접시에 담고 난 후 달걀을 두 개를 휘저어서  버터를 넣고 달군  팬 위에 부어서 손목으로 팬을 돌려가며 달걀을 얇고 둥글게 부친다.

가장자리의 얇은 부분은 햐얗게 변할 때 가스 불을 끄면 가운데 부분은 반숙 상태처럼 촉촉하다.

준비해둔 밥을 둥글게 부친 지단 한 가운데 넣고 긴 나무젓가락을 사용해서 양쪽을 접어서 밥을 감싸면  반달 모양이 된다.

스푼으로 가운데 뿌려진 케첩 부분 부터 잘라내면서 비벼 먹다가 부족 할 때마다 케첩을 뿌려 먹는 오무라이스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스를 넣은 오무라이스를 먹을 때면 다음 번엔 반드시 케첩만 뿌리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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