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 걷고 움직인다.

이런 일련의 자연스런 행동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핵력)이라는 4가지 형태의 힘에 의한 것으로 걷고 움직이는 호모 사피엔스들은 매일 중력과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의 힘에 의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힘인 중력(gravity)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데 필요한 구심력의 원천으로 인간이  발바닥을 땅에 밀착 시켜 주게 만드는 힘이다. 

각종 조명과 컴퓨터, TV, 전화 같은 첨단 기기와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의 근원이 되는 힘인 전자기력(electromagnetic)은 중력의 질량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서로 부딪칠 때 느껴지는 감촉이나 진동, 그리고 온도의 변화로 느끼는 추위, 더위 같은 힘에도 작용을 한다.

강력(strong force)은 양성자와 중성자 내부의 쿼크(quark 하나의 핵자-양성자 또는 중성자는 3개의 소립자 즉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들을 단단하게 결속 시켜 주면서, 동시에 양성자와 중성자를 원자핵 속에서 강하게 결합시켜 주는 힘이다.  

 약력(weak force)은 우라늄이나 코발트 같은 원소에서 방사능 붕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원자 스케일의 근거리에서만 작용하고 거리가 멀어지면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힘이다.

매일 각기 다른 장소와 상황 속에서 힘을 주거나 빼기도 하고 멍을 때리기도 하고 어제처럼 반복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동의 발현이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핵력)에 의한 상호작용에서 발생되는 힘으로 거대한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힘이다.

현대인들은 태양이 보내주는 빛 보다 각종  전자기기, 스마트 폰에서 나오는 빛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다.

눈의 망막에 있는 분자들이 빛 때문에 변형을 일으키고, 그 결과 화학 신호가 발생하고, 그것이 전기 신호가 되어 뇌로 전달되는데, 이 모든 것이 전자기력 때문으로 지금  이 글을 눈으로 읽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도 뇌 속의 전기적 작용, 즉 전자기력 때문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시원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난 후 커피 원두를 갈아 내린다.

커피가 완성 될 때까지 두툼하게 자른 빵에 버터나 잼을 바른다.

만일 이 세상에 중력이 없다면 빵을 들고 있다가 손을 놓자마자   빵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정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빵과 커피를 먹고 집을 나서는 동안 한 손에 스마트 폰을 꼭 쥐고는 화면을 응시하는 이 모든 것들이 중력과 전자기력에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중력을 거슬러서 살 수도 없고 전자기력 없이는 어떤 글도 읽지 못하고 빛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태양의 빛은 1초에 약 18만 6000마일 또는 거의 30만 킬로미터를 가는데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약 6조 마일을 간다.

이 빛은 지구 지구까지 8분이면 온다. 그러므로 태양은 지구에서 약 8광분 만큼 떨어져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 빛이 1년 동안 지나간 거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1광년이라 부른다.

인간이 1년 동안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친다 해도 태양의 빛의 속도를 절대로 따라 잡지 못한다.

우리의 존재가 무한한 우주 공간 속의 한 점이라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밖에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매일 찬란한 빛을 내리쬐게 만드는 태양의 빛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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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넓이 , 길이에 몸을 맞춰 어떤 상황에서도 스르륵 빠져나가는 고양이는 신기한 동물이다.

위협적인 짐승과 맞닥뜨리는 순간이면 옆으로 위로 점프해서 도망치거나 도망 칠 곳이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몸을 한껏 부풀려서 상대를 제압해 버린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얼굴을 쑥 내민 고양이에게 문을 열어 주면 항상 꼬리 끝을 문 안 쪽에 남겨둔다.

이런 습성은 나름 고양이스러운 관계 맺기로 잠시 나갔다 돌아 온다는 의미다.

동네 곳곳을 다니다 보면 빵집 앞을 어슬렁 거리는 고양이, 튀김 가게 앞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떡집 앞에서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들과 자주 마주 친다.

분명 이 고양이들은 한 때는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랑스러운 이름, 귀여운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매일 앞 발로 귀 뒤를 긁고 혀로 온 몸을 핥으며 외모를 각별하게 관리하는 동물계 중에 최고의 나르시즘을 갖고 있는 고양이를 단 한 번이라도 품 속에 안아 본 사람은 알고 있다.포동 포동 폭쉰 폭신한 냥이 발바닥ฅ🐾의 촉감이 주는 따스한 느낌을 ...

 고양이가 불행한 곳엔 인간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들이여, 부디 행복하기를 ฅ🐾


늙은 모그가 들어와서 신문 위에 앉는다.

사람 좋아하는 늙고 뚱뚱한 고양이

쓰다듬어 주면 자기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조은 에이킨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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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드가는 1870년 초반 서른 여섯의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의 왼쪽 시력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여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주변만 보이는 현상을 겪게 되자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

한동안 드가는 자신의 시력 장애를 받아 들이지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자포자기한 상태에 빠졌다.

밝은 빛 아래의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없게 된 드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숨어지내듯 생활 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포기 하지 않았다.

시력이 악화 되면서 드가는 염료를 섞거나 광택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파스텔로 겹겹이 색의 층을 만들어서 입체적인 회화 효과를 내기 시작한 드가는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동판화, 애쿼틴트 판화,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모노타이프 작업을 하던 드가는 밀랍과 찰흙을 만지면서 자신이 즐겨 그리던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형해 나갔다.

1874년 드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에드몽 콩쿠르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력 상실로 모델의 형태만 간신히 볼 수 있었던 드가는 모델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흙을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서서히 그 찰흙은 모델을 닮아 갔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드가는 조각을 통해 대상의 형태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탐구 해 나갔다.

1875년 파리에 대리석 장식과 금박 장식의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에 부유한 특권층이 몰려 갔다. 

온 몸을 완전히 가리는 긴 드레스를 차려 입었던 귀족 여성들과 달리 무대 위의 무용수들은 팔 다리를 드러내고 얇은 재질에 의상을 걸친채 춤을 추니 이들을 보기 위한 남성들이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정기권을 구입한 남성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또는 휴게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용수들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 틈에 화가 드가도 끼여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드가는 공연이 시작 되기 전 무대 뒤와 계단, 관람석에서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을 빠른 손놀림의 파스텔 스케치로 그렸고 늦은 저녁 작업실에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당시 발레단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10대 어린 소녀들은 주로 노동 계층에서 선발 되었는데 일곱살 또는 여덟살 때 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가난한 가정 환경에 부모로 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발레단의 소녀들은 온 종일 공연 연습에 몰두 해야 했다.

발레단의 어린 소녀들의 열악한 환경을 잘 알고 있었던 드가는 휴게실이나 무대 위에서 스텝과 군무, 그리고 앙상블까지 단 한 순간도 쉴틈 없이 훈련을 해야 했던 어린 무용수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가게 점원, 세탁부, 하녀, 카페나 경마장등 공공장소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즐겨 그렸던 드가는 돈으로 쾌락을 사는 남성들과 달리 어린 소녀들에게 부성애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무용수들도 드가를 좋아했다.

그들은 드가가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 주고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에 고마워 하며 진심으로 그의 모델이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드가가 작업 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 본 한 무용수는 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가 선생님은 손에 연필을 들고 장옷 밑에 숨겨 둔 스케치북에 자신이 본 것을 재빨리 기록했어요. 오페라 하우스에 불이 꺼지면 그분의 모델이 된 무용수들이 스튜디오에 찾아갔어요. 무대 뒤에서 우리를 지켜 보았던 시선과 달리 드가 선생님은 아주 엄격한 작업태도로 다양한 포즈를 취할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몇 시간씩 포즈를 취하는 동안 드가 선생님 손에 쥐어진 찰흙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가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어요."

1880년 제 5회 인상주의자 전시에서 드가는 일종의 맛보기로 빈 유리장을 전시하더니 그 다음 해에 90센티미터의 실제 머리카락과 리본, 천으로 만든 조끼, 모슬린 무용복에 분홍색 발레화를 신은 황금빛 밀랍의 인간 피부처럼 따뜻하면서 말랑한 질감의 조각상을 공개했다.

1881년 제6회 파리 인상주의 전시에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등장 했을 때 행사장은 술렁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뒷발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녀상은 야생 새끼 짐승처럼 듬성 듬성한 머리카락에 감긴 눈, 조금 경사진 이마, 새의 부리 같은 입술에 툭 내민 턱, 길게 늘어뜨린 노란색 리본, 유난히 두꺼운 목, 핀으로 고정한 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들린 엉덩이, 살짝 나온 아랫배, 단추를 몇 개 풀어 어깨에 살짝 걸친 조끼, 가는 허리, 누더기가 된 치마, 호리호리한 다리, 등 뒤로 마주 잡은 가는 팔과 손을 한 조각상을 마주한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랬다.


실제 피부색과 비슷한 밀랍으로 빚어서 일까?

깔끔한 외모, 탄탄한 몸매 등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조각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의 눈에 드가의 소녀 조각상은 예술은커녕, 이집트 미라나 아프리카의 물신이나 부두교 같은 불길한 상징물처럼 보였다.

평론가들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조각상을 향해 “원숭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장이 아닌)동물원이지 않은가.” 신랄한 악평을 쏟아 부었다.

작가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드가의 조각상을 가리켜 현대적인 시도라며 "조각에 대한 모든 생각, 차갑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순백색, 수 세기 동안 복제되었던 예술의 관습을 뒤흔들어내며 전통을 부숴 버린 작품이라 이례적으로 호평 했다.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예술계는 드가의 조각상을 향해 “타락의 꽃”, “악덕과 혐오”, “흉악한 분위기” “악취미로 빚은 인체 표본”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악평과 비난에 드가는 작업실 구석 옷장 문을 열고, 조각상을 깊숙이 밀어 넣고는 두 번 다시 세상에 공개 하지 않았다.

드가의 작업실 옷장 문이 잠기고 나서 <열네 살의 어린 무희>는 이대로 영영 어둠에 잠겼을까. 

소녀의 이름은 마리 반 괴템 

소녀는 오페라단의 하급 발레 무용수로 무대 뒤 소품 같은 존재 였다.

발레단엔 마리 같은 소녀가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이런 하찮은 발레단의 소품 같은 소녀들은 보잘 것 없고 빈약하고, 하찮다며 ‘작은 쥐’(Petites Rats) 무리라고 불렸다.

마리는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벨기에계 이민자로 아버지는 재봉사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마리에게는 큰 언니 앙투아네트가 있었고 한 살 많은 작은 언니도 있었지만, 출생 한지 18일 만에 사망했다. 

마리가 태어나고 5년 후 여동생 샤를로트가 태어났다.

마리 가족의 터전은 파리 9구.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온 가난한 예술가들, 거리의 부랑자들 노동자와 매춘부가 몰려 있는 그 곳은  토끼 굴보다 비좁고 비 위생적인 환경에 일명 파리에서 하수구로 불렸던 곳이다.

 마리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방 값이 몇 달 씩 밀려 쫓겨나듯 자주 이사 갔다.

당시 빈민층 부모의 자녀들 중 소년은 광산과 농장으로 팔려 갔고 소녀는 공장이나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가야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생계가 어려워진 마리의 엄마는 자신의 딸 셋을 모두 발레단에 보냈다.


1878년,  마리는 열세 살이 된 그해 드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너, 9지구에 사는 그 꼬마 맞지?”


드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리예요.” 마리가 답했다. 

“우리 종종 봤지?” 드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 

푸른색 안경을 쓰고 있는 드가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내 모델이 돼줄래?.”


드가는 마리에게 4시간당 6~10프랑 사이 사례비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육점 고기 한 근이 1~2프랑이었다고 하니 하급 계층 생계 기준에서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다.

드가는 남아 있는 왼쪽 시력으로 멍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든 마리를 3년 동안 지켜 보며 발레리나의 화려한 몸짓이 아니라, 그 몸짓을 만들어낸 수많은 땀방울과 버팀의 시간을  빚어내듯 밀랍이나 찰흙으로 속을 채울 때는 성냥이나 종이, 코르크, 막대기, 헝겊, 밧줄, 목재, 스펀지, 옷감, 담배, 부러진 붓 같은 걸 함께 집어 넣었다.


3년 동안 드가의 작업실에 찾아가 모델을 섰던 마리는 지각과 불복종 등을 이유로 몇 차례 임금 삭감과 같은 징계를 받더니 조각상이 전시 되었던 1881년 오페라단에서 쫓겨났다.

1903년 미국인 루이진 헤브마이어가 뒤랑뤼엘을 통해 열네살의 어린 발레리나 조각상을 사려 했지만 드가는 응하지 않았다.

드가는 자신의 조소 작업이 동작과 균형을 연구하기 위한 습작일 뿐이라며 살아 생전 작업실 밖으로 소녀의 조각상 내보내지 않았다.

훗날 드가는 화상 볼라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청동으로 만들어두면 내가 죽은 뒤로도 영원히 남을 텐데 그런 걸 남긴 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마리가 오페라단에서 퇴출 당하기 몇 달 전, 신문 《레벤느망(L‘Evenement)》은 “(예술가 드가의 모델)마리가 르 라 모르(Le Rat Mort) 주점을 자주 오간다”는 식의 기사가 실렸을 뿐 현재까지  소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도 없고, 흔적도 없다. 

1917년 드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업실 옷장 속에 갇혀 있었던 작은 밀랍상은 조각가 알베르 바르톨로메의 손을 거쳐 청동상으로 주조 되었다.

마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열 네 살의 소녀가 정말로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는  복제폼 28개로 주조 되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수가 되었다.

예술은 늘 멋진 해답을 주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있도록 작은 창 하나를 열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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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먹거리 중에서 가격대비 영양가가 높은 것은 닭이 낳은 알 '달걀'이다. 

달걀은 무게에 따라 왕란(68g 이상), 특란(68~60g), 대란(60~52g), 중란(52~44g), 소란(44g 미만)으로 나뉜다. 

알을 낳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닭이 낳은 알은 초란이라고 하는데 계란 크기로는 맛이나 영양의 차이가 거의 없지만  대개 산란 후 2주 정도까지가 가장 신선하고 영양가가 높은 상태다.

우리가 먹는 달걀은 대부분 특란 또는 대란인데 흰색, 갈색 그리고 청색의 계란 알 색깔은 영양학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다.

달걀 1개에 단백질이 6~7g 들어 있어서 하루 2개 정도 섭취 하면 닭가슴살 100g의 단백질 절반 가량을 섭취할 수 있다.

달걀의 단백질은 조리 방식이 달라져도 큰 차이가 없다.

삶은 달걀의 열량은 77칼로리지만 조리 할 때 기름을 사용할 경우 200칼로리를 훌쩍 넘긴다.

삶거나 굽거나 찌거나 중탕으로 수란 상태로 먹어도 맛이 뛰어난 계란은 기름에 조리 할 때 소금과 설탕 약간만 넣어 고소한 맛을 살려서 먹어도 맛있지만 계란요리에 빠지지 않는 소스가 있다.

다양한 요리에 뿌려 먹고 찍어 먹는 만능 소스 케첩은 어느 가정집의 냉장고 문을 열면 한 두 개 정도는 있고 다양한 음식에 두루 사용되는 소스다.

미국을 대표하는 페스트 푸드인 햄버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케첩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 유럽에서 부유한 이들만 먹을 수 있었던 값비싼 소스였다.

17세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아시아 푸젠성, 광둥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 되었던 생선 소스와 베트남 요리에 쓰이는 생선으로 만든 간장 ‘누옥맘(nuoc mam)’을 가져와서 전파 되기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아시아 생선 소스와 간장에 버섯이나 호두를 갈아 넣어서 케첩 소스를 먹기 시작했지만  비싼 아시아 생선 소스를 수입하면서 값싼 토마토를 섞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케첩의 색깔은 빨간색이 아니라 갈색이였다.

미 대륙에 케첩이 전해졌을 때도  버섯이나 자두 ,복숭아를 섞은 갈색 소스 형태로  수입이 되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농작물을 제때 수확하기 힘들어지자  빠른 시간에  쉽게 키울 수 있는 토마토를 대량으로 재배해 케첩 소스에 섞기 시작했다.

남북 전쟁 당시 토마토를 넣은 빨간색 케첩 맛에 반해 버린 미 대륙인들은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여러 업체에서 마구잡이로 만들며 불량 저질 토마토 케첩을 쏟아냈다. 

계란의 껍질을 갈아 넣거나 나무 껍질을 넣기도 했던 케첩에 부패를 방지 한다며 방부제로 포르말린을 넣고 변색 방지를 위해 아스팔트용 콜타르를 넣기도 했다.

케첩을 먹고 건강을 해치게 되자 소비자들은 외면하고 때마침 이 시기에 사업가  헨리 하인즈는 나쁜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허 받은 투명 용기 케첩 병에 소스를 담아 팔기 시작했다.

토마토를 끓여 걸러낸 뒤 설탕, 소금, 식초, 향신료 등을 첨가해 조린 하인즈 케첩은 계피, 허브 딜오일, 마늘 같은 천연 성분을 넣어 신선도와 맛을 보존 하면서 토마토 케첩은 하인즈라는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스가 된 하인즈 토마토 케첩이 투명한 유리 용기에 담기 전 1900년 경부터 일본에서는 푹 익은 토마토를 갈아 넣어서 유리 용기에 담아 먹는 소스를 먹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부터 국민 브랜드 소스로 자리 잡았던 가고메 토마토 케첩은 유리병을 열자 마자 소스가 확 쏟아지거나 양 조절이 힘들고 사방으로 소스가 튀어서 그릇에 담아 먹었다.

1950년  바닥까지 깨끗하게 먹을 수 있는 비닐 튜브형 용기가 등장하면서 깔끔하게 쭉 짜서 먹게 되자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어떤 요리에도 맛과 풍미를 돋게 하는 토마토 케첩은 달걀로 만든 음식과 최상의 조합이다.

 달걀과 밥만 있으면 집에서 간편하게 조리 할 수 있는 오무라이스에 케첩만 뿌려도 맛과 풍미가 뛰어난 요리가 된다.

원하는 재료를 넣고  밥을 볶은 후 접시에 담고 난 후 달걀을 두 개를 휘저어서  버터를 넣고 달군  팬 위에 부어서 손목으로 팬을 돌려가며 달걀을 얇고 둥글게 부친다.

가장자리의 얇은 부분은 햐얗게 변할 때 가스 불을 끄면 가운데 부분은 반숙 상태처럼 촉촉하다.

준비해둔 밥을 둥글게 부친 지단 한 가운데 넣고 긴 나무젓가락을 사용해서 양쪽을 접어서 밥을 감싸면  반달 모양이 된다.

스푼으로 가운데 뿌려진 케첩 부분 부터 잘라내면서 비벼 먹다가 부족 할 때마다 케첩을 뿌려 먹는 오무라이스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스를 넣은 오무라이스를 먹을 때면 다음 번엔 반드시 케첩만 뿌리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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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접적으로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이야기를 읽거나 듣거나 볼 때 무의식적으로 장소와 인물의 심리, 행동 그리고 주변의 소리와 소음, 색채를 여러 형태의 형상으로 그려 본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주 짧은 단편 <큰 소음>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집안 전체의 소음이 한데 모이는 곳에 있는 내 방에 앉아 있다.

나는 모든 문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문들이 닫히는 소리 때문에 그 문들 사이를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부엌 안에 있는 난로 문이 찰칵 닫히는 소리까지도 듣는다.

아버지는 내 방의 문들을 마구 열어 제치고 질질 끌리는 침실용 가운을 입은 채  내 방을 가로 질러간다.

옆방에서는 난로의 재를 긁어내고 있다. 발리는 앞방을 통해서 아버지의 모자를 닦아 놓았느냐고 한 단어 씩 소리치며 묻는다. 나에게 친근해지려는 쉭쉭 소리가 대답하는 목소리의 외침보다 더 높아진다. 집 안 문들의 손잡이가 돌려지고 카타르성 목에서 나오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서 문은 계속적으로 어떤 여인의 노래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열렸다가 드디어는 남자의 홱 밀치는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닫히는데 그것이 가장 난폭하게 들려 온다. 아버지는 가버린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주 짧은 단편 <큰 소음>에서 화자인 '나'가 머무는 공간 '방'에 등장하는 '문'들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여러 소리들이 들린다.

발자국 소리, 난로문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 그리고 방 안의 사람들 보다 목소리 톤이 더 높은 아버지가 등장하고 서로 밀치고 닫히는 사이 여인의 노래하는 목소리에 뒤섞인 난폭한 소리 , 밀쳐내는 소리가 들린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긴장감이 느껴지고 그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버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읽는 동안 머릿 속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야기의 모양과 형태를  일목 요연하게 논리적인 구조의 틀 속에서    의식과 잠재 의식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읽는 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을 스토리텔링이라 한다.

카프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만 이야기를 구축하지 않았다.

인물의 심리 변화는 일어나지만 주변 상황에 극히 미약하게 반응 할 뿐 명확하지 않게 불가사의하게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넘나들며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읽는 독자들은 카프카의 짧은 단편을 읽고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

독자가 각자의 해석을 끼워 넣을 상상의 공간까지 만들어 놓은 프란츠 카프카는 모더니즘 시대를 도래 하게 만든 탁월한 천재였다.

활자로 서사적 세상을 구축하는 천재적 작가가 있듯이 음악 세계에서도 독특한 연주 해석으로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무언의 형상을 부여 하는 음악가가 있다.

음악을 듣는 동안 그 세계에 누가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 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음의 높낮이가 달라 질 때 마다 서서히 진폭의 강도의 세기가 달라 질 때마다 마음의 울림이 달라 질 뿐이다.

이 세상은 항상 뜻밖의 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 뜻밖의 것들이 날씨 일 수도 있고 어떤 위기나 위험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반면, 변화의 기회나 뜻하지 않는 행운이 찾아 오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사는 동안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것들을 알고 싶어 한다.

이건 무슨 의미 일까? 이런 변화는 좋은 징조 일까? 아니면 불길한 기운일까?

 사주팔자를 점쳐 보며 한 해의 운세를 미리 알아 보고 온갖 방책을 하며 주술의 힘으로  운을 끌어  모아 놓는다 해도 태생적인 것, 타고난 것을 완전하게 바꿀 수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변화의 순간에 시작되듯 인간이 본능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는 순간은 변화를 감지 할 때다.

5월의 꿀맛 같은 황금 연휴가 끝나고 나니 2026년의 한 해의 반이 훌쩍 지나갔다.

새로운 다짐도 작심 삼일이면 흐지 부지 해져 버렸고 새로운 마음으로 기획한 것들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처해 있다. 

 왜 실천 하지 못했는지 오만 가지 예를 들며 끊임없이 자신을 매수 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기대 하지 않은 채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아간다.

늘 해오던 일만 한다면 과거에 멈춰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천부적인 이야기꾼들, 세계적인 거장들 모두 불멸의 작품 속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장치를 심어 놓았다.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꿈을 꾸며 상상을 할 수 있는 종인 인간은 헛된 망상이나 허황된 목표를 추구 하며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과정들이 쌓여서 한 단계씩 도약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추구할 목표도 없거나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 마저 없다면 사는 맛이 없는 우울과 절망만 남는다.

성공은 늘 변화 무쌍한 불확실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빈스 롬바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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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6-05-30 0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오늘 scott님 포스팅 보면서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봤던 ‘불확실성을 환영하라‘는 문장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성들은 과감히 끌어 안고(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