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121번째이자 여성으로는 18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이 출간한 책들은 지난해 10월 부터 최근 까지[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순번을 서로 번갈아 가며 1위 자리를 밀어 내고 올라서기를 반복했다.











한강 작품 열기 속에서 인기 아이돌이 추천하는 책, SNS열풍을 타고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책,영향력 있는 인사가 추천하는 책들이 빠른 속도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으로 진입했다.












이 와중에 세상은 12·3 불법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심판이 열렸고 전국 주요 도심은 탄핵 찬반 시위, 시국 선언,집회 등으로 단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권력의 '별의 순간'을 잡으려는 대권 잠룡들이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동안 아이돌 그룹의 신간 앨범이나 사진집 발매 오픈 런 대기줄 처럼 어느 정치인의 자서전 책을 사려는 이들이 대형 서점 개점 전부터 100m가 넘는 줄을 서는 기 현상이 벌어졌다.

광화문을 지나가는 버스 차창 너머로 눈 앞에 이런 광고 문구가 스쳐 지나간다.


긴박한 순간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역사 다큐멘터리


누구든 책을 낼 자유가 있고 누구든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구매 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역시 내가 읽고 싶은 책,손바닥 크기의 작은 문고본을 꺼내 무심코 펼쳐지는 페이지를 읽는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니 울컥 목이 메었다. 모두가 착하디 착한 이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의 고된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눈매에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인간의 우수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머릿 속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펼쳐 드는 책이 있다.


영혼의 스승’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이 가을의 공기 속에서 그토록 선량한 눈매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이 가을의 공기는 이렇게 숨이 막히는가. 언어가, 인간의 그 언어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다. 요즈음 신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라디오를 들어도 눈물이 난다. 인간의 말이 듣고 싶어서, 우리들 이웃의 나직한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내 귀는 도리어 문을 닫는다.

지형(紙型)까지 떠 놓았지만 언제 책이 되어 햇빛을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 영혼의 모음(母音)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가 아니면 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1972년 입동절 다래헌(茶來軒)에서 저자 합장.”

법정스님을 평가할 때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을 실천한 수행자이자 고등교과와 대학 교과에 수필이 실리는 자연주의자 에세이스트로 인식한다.

하지만 스님이 남기신 글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구 법정’은 반 세기 전 민주화에 앞장섰던 선구자자 였다.

1954년 입산 출가하여 조계산 불일암 시자인 법정(法頂)스님은 1960년부터는 통도사에서 운허스님이 주도했던 <불교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되고 이에 항거한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1971년 법정 스님은 <현대문학> 3월호에 <무소유(無所有)>를 발표했다.

우리는 지금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일부一部 몰지각자者

대한민국大韓民國 주민住民 3천5백만 다들 말짱한 지각知覺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지각知覺을 잃었는가

아, 이가 아린다 어금니가 아린다.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들어줄 귀가 없어 입을 다무니

이가 아리는가

오늘도 부질없이

치과의원齒科病院을 찾아 나선다.

흔들리는 그 계단을 오르내린다.

「1974년 1월-어떤 몰지각자沒知覺者의 노래」(중에서)


1980년 법정스님은 해인사와 서울을 오고 갈 때 뉴스와 신문을 통해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 한 것을 알게 된다.

몇 일 후 선암사의 어느 노스님이 군인이 쏜 실탄을 팔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사회민주화에 대해 발원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를 발표한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법정(法頂)


시국을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어느 날, 법정스님은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닫고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칸 암자에서 혼자서 밭을 매고 밥 지으며 수행한다.

법정 스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 지 17년의 세월 동안 그의 주옥같은 산문집들을 읽는 독자들 마음마다 사색의 깊이가 새겨지고 스님이 활자로 새긴 철학적 언어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밝은 빛이 되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나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스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산 속 암자까지 찾아 가자 법정 스님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92년 법정스님을 찾아온 한 프랑스 철학자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살고 계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님은 다시 붓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내가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얻어 들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야 되겠구나.’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일과를 매일 지키셨던 법정 스님은 세상을 향해 말로 글로 깨우침을 전하고 나서 2010년 3월 13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입적 하셨다.

50년 동안 수행을 했던 법정스님이 다다른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사람의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얼마나 주변 이웃에게 덕(德)을 베풀었는지가 중요해요. 바로 덕이야말로 사람의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덕을 쌓을 줄을 모릅니다. 잘 살고 편리해도 덕이 없으니 외롭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이죠. 무슨 일을 하든 이웃에 덕이 되는 따뜻한 가슴과 포용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을 내세우는 매관매직을 하고 있는 무소불위 공무원들은 국민의 혈세 법카를 긁으며 잘 먹고 잘 사는 풀 소유의 삶을 누리고 있다.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자들은 저마다 국민의 세금으로 현금 살포를 하겠다고 하고 미래 먹거리를 위해 인공 지능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도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법안만 통과 시키며 정치 개혁, 정권 교체를 외치고 있다.

정치가 국민의 삶을 외면하는 동안 사회 곳곳에 시퍼런 칼날들이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찌르고 있고 부실한 사회 안전망은 언제 어디서 어떤식으로든 무너져 버릴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우리 모두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의 역사다.

소유 하려는 열망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남들 보다 더 많이 내 몫을 챙기기 위해 끊임없이 싸울 뿐이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던 법정스님은 빈 손으로 떠나셨다.

“그저 ‘현재의 나’일 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요. 연륜 값을 하고 있는 건지, 수행자 답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요.”

-법정(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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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3-11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하니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울 수록 어서 빨리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scott님의 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2025-03-12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국 하얼빈시 근교에 위치한 핑팡 지구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핑팡'이라는 지명을 무심히 듣고 넘기겠지만, 어떤 이들은 핑팡을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전쟁 기간 동안 일본 제국 육군 제 731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인체 내구력의 한계를 조사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수많은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에게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지 안에서 일본 육군 소속 군의관들은 의학 실험 및 무기 실험, 생체 해부, 신체 절단을 비롯한 조직적인 고문 등을 통해 중국군과 연합군 포로 수천 명을 직접 살해했습니다. 종전이 가까워지자 일본군은 철수 준비를 하면서 남아 있던 포로를 모두 살해 하고 시설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남은 것은 본부 건물의 잔해와 병균의 숙주로 이용된 쥐를 사육하던 구덩이 몇 개 뿐이였습니다.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켄 리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에서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의 단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의 중심 스토리는 일본 731부대로 1940년 중국 하얼빈의 버려진 공장에 차려졌던 일본 군부대의 거대한 생체 실험 현장을 시간여행이라는 상상력으로 펼쳐 보인 작품이다.

여성 물리학자 아케미 기리노는 실험 연구를 수행 하던 중에 '뵘기리노'라는 초미세 입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입자는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입자를 빛의 속도로 관측하면 과거의 일시적인 공간의 시간과 소리 , 냄새를 초음파로 기록 할 수 있는 입자다.

이 입자를 통해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기리노 박사는 1940년 만주 '핑팡' 공장 지대를 선택한다.

기리노 박사는 '입자'로 하는 시간 여행이기 때문에 이를 경험할 피실험자가 필요해서 모집 공고를 낸다.

이 응모자로 선발된 릴리언이라는 여성은 자신의 고모가 731부대 생체 실험장에서 희생되었다는 이유로 자원해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드디어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작가 켄 리우가 철저한 자료와 기록 문건과 문헌을 토대로 완성한 이 단편 속에 일본 731부대가 인간에게 저지른 잔혹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포로의 팔을 지속적으로 강도를 높여서 때려서 팔안의 혈액이 고체가 될 때까지 때리는 실험

-밀폐된 방안으로 포로들을 집어 넣어서 기압을 높여 '터져' 죽을 때까지 관찰하는 실험

-포로이 양팔을 절단해 각각 반대쪽에 접합하는 실험

-매독 감염 경로를 실험 하기 위해 온갖 실험균을 투입한 남녀 포로에게 성교를 자행 시키는 실험

릴리언은 이런 반 인륜적인 실험을 목격하고 마침내 자신의 고모를 발견하게 된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소로 끌려갔던 릴리언의 고모는 임신한 상태로 잔혹하게 희생 당한다.

작가 켄 리우는 이 작품의 릴리언의 시선과 입을 통해 731부대의 거대한 인체 실험장에서 매일 의사들과 군의관들이 여성들을 강간하고 성폭행 하며 집단으로 만행을 저지른 역사적 사실을 폭로 한다.

일본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의 잔혹함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행 되었던 걸 넘어섰고 이 전쟁 범죄자들은 단 한 명도 처벌 받지 않았고 군사재판에 넘겨지지도 않았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731부대가 실험하고 자행했던 잔혹한 실험들이 소련으로 넘어갈 까봐 서둘러 덮어버렸고 자료나 증거는 모두 없애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무능이 인민에게 들통 날까봐 모른 척 했다.

미국에서 출간 된 켄 리우의 2017년 단편집 <종이 동물원>에 수록된 총 14편의 단편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이 단편만 번역되지 않고 13편만 편집 번역 출간되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을 일본어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중국 당국은 작품에서 공산당이 언급된 단어와 문장은 삭제 해 버리고 기이하게 편집해서 번역 출판했다.

켄 리우는 이렇게 역사적 진실을 지워 버린 일본과 중국에 항의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영어 전문을 올려 놓았다.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은 80여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이지만 등장인물들의 회고와 심층인터뷰, 기조 연설 영상과 법정 증언 그리고 TV토론과 길거리 인터뷰가 정교하게 맞물려서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미국 하원외교 위원회 아시아 태평양 지구 환경 소위원회 청문회장 자리에 소환된 전범인 야마가타 시로의 증언, 취재 기자들, 군부대 시설에서 일했던 식당 종업원,생체 실험장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전쟁 중엔 나쁜 일이 벌어지니 잊고 용서해야 한다.

-가해자들이 모두 죽은 상태에서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하나?

-중국이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으니 그 업보가 아닌가?

전쟁 중에 포로들에게 자행 되었던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이를 부정하고 반박하는 세력들이 있다.

이들은 진실을 말하는 자의 입을 틀어 막고, 언론의 눈을 가리고 대중들을 현혹 시키는 선전과 기만 전술을 펼쳐서 범죄 사실을 덮어버린다.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학자도 진실을 온전하게 알 수도 없고 밝혀내지 못한다.

하물며 일개 작가나 감독 기타 다른 예술 작업으로도 결코 진실에 다가 갈 수 없다.

켄 리우는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망자들의 착취자 노릇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발 딛는 곳마다 마치 창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죽은 이들의 고통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을 들으며 유령들 사이를 걷고 있는 겁니다.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귀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말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보고 말해야 합니다.

바로 잡을 기회는 오직 한 번 뿐입니다.'

-켄 리우

일본은 지난 세기 조선과 동아시아 전체에 저지른 극악한 전쟁 범죄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본 국가가 파렴치한 행동과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매년 2월이면 일본 후쿠오카의 '모모치 서쪽 공원'에서 하늘의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추모식이 열린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교 문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윤동주는 1943년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44년 4월 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되자마자 윤동주는 윤봉길 의사가 수감되었던 오사카 위수형무소가 아닌 260km 가까이 떨어진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내진다.

절친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4월 17일에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 된다.

1944년 11월, 첫 연합군(미국과 영국)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군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출혈 다량으로 죽은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일본은 자국민 환자 치료를 위해 혈액을 대체할 용액이 절실하였다.

대부분의 부상자들이 규슈제국대학 병원으로 이송 되고 당시 대학 병원 응급의였던 의학부 이시야마(石山) 교수는 규슈와 인접한 하카타만의 해수를 사용한 대체혈액을 주입하고, 혈압을 높여, 수혈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했다.

하지만 당장 동물 실험을 할 시간이나 여유도 없고 자국민에게 시도 해 볼 수 없게 된 이시야미 교수는 포로 수용소의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를 생체 실험으로 사용 해도 된다는 허가를 의학 박사 출신인 문부대신 하시다 구니히코에세 승인을 받는다.

패전 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일본은 미군 포로에게 이 생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만 인정 했다.


[ 처참한 생활 속에서도 윤동주는 오히려 한 마리 가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귀담아 들었으며 고마워했다. 그래서 그 정결한 문체로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써보냈다. 아아! ˝고마운 일이다˝라니! 읽어내리기에 그저 목이 메인다. 그 간악한 일제 감옥의 인간 이하의 취급도 그의 관유하고 고결한 인품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못했음을 이 구절은 통렬하게 증언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한 그의 정신은, 그가 처한 처참한 상황을 그토록 맑고 지순한 모습으로 견디어내고 있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중에서

한국이 반 세기 넘도록 일본에게 어떤 사과도 받지 못한 채 굴욕적인 외교를 하는 동안 2010년 부터 일본의 한 시민 단체에서 일본 전국에서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 한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생체실험이 있었다는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시인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 측에서 강력히 항의를 하며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 입장이 아닌 우회적으로 생체실험의 대상을 미군포로로 한정하였으며, 당시 의문사를 당한 윤동주와 송몽규의 사인이 생체실험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다.

2019년 2월 10일에 NHK에서 반영된 윤동주 다큐멘터리 <詩人·尹東柱を読み継ぐ人々(시인·윤동주를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에서 윤동주가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어떤 생체 실험을 당해 죽었는지 상세 하게 나왔다.

1944년 5월 27일. 후쿠오카 외과학회에서는 '대체혈액'에 대한 의학 세미나가 진행 된다.

당시 세미나를 주도 하고 발표자로 나선 이시야마 교수는 '대체 혈액'의 시급성과 생체 실험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혈액으로는 일본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물을 희석해 멸균하여 만든 용액이 적합한데 이를 사람의 동맥에 희석하지 않은 해수용액을 직접 주사하면 진통을 가라앉히는데 효과적이다"

1944년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유공자 김헌술씨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교도소 의사가 수감자들에게 간단한 덧셈 뺄셈이 적혀 있는 암산 용지를 2~3장씩 나누어 주면서 일정 시간 내에 암산해서 연필로 답을 적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답안지를 거두고 , 주사기를 꺼내 수감자들 정맥 혈관에 5cc~10cc 정도의 주사액을 주입했다.

수감자들이 교도소 의사에게 무슨 용액을 주사 하냐고 묻자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고 난 후 며칠이 지나자 암산 능력이 거의 반으로 떨어졌고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 암산 능력이 더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간단한 풀이 조차 풀지 못하게 된다.

당시 수감자들은 우리 모두 일본에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1944년 11월 부터 매일 5cc~10cc 정도의 주사액을 주입 당한 윤동주는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아들의 시신을 거두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와 당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송몽규를 면회했다.

뼈만 남은 송몽규는 윤동주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송몽규와의 면회를 마친 아버지와 당숙에게 후쿠오카 교도소 측은 시체 안치실에 누워 있는 아들의 시신을 보여준다.

교도소 측은 윤동주의 병명이 고혈압, 동맥경화증인 '뇌일혈' 이였다며 수감자가 죽기 전에 규슈제대에 해부용으로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겨서 방부제를 시약해 놓았다는 시뻘건 거짓말을 한다.

패전 후, 수감자들에게 대체 혈액을 주사하며 생체 실험을 주도 했던 이시야마 교수를 포함하여 규슈제대의 의학 교수 5명과 제1외과 소속자들은 조교수, 강사, 대원학생, 간호부장까지 모두'규슈제대 생체해부 사건(九大生體解剖事件)'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미군정에 의해 B급 전범 재판을 받게 된 이 악마들은 첫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생체 실험을 주도 했던 이시야마 교수는 자살하고 다른 악마들은 교수형, 종신형, 중노동형 등을 받는다.

재판이 종결 되고 나서 일본 재판부는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인정하는 것만 공식 문서로 남겨 두었다.

2019년 이 다큐가 방영되자 마자 일본측은 비로소 윤동주의 사인을 생체실험으로 인정했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생체실험 여부에 대해서는 공식 문서로 증명되지 않았다.

'윤동주 유고 시집'. 연세대학교


일본 중등 국어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는 국민 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년)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의 생체 실험으로 사망한 윤동주의 시를 자신의 수필집에 인용하면서 일본 전 국민에게 시인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도쿄에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교회(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와 교토의 '시인 윤동주를 추모하는 교토회(詩人尹東柱を偲ぶ京都の会)' 그리고 후쿠오카의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이 생기면서 일본 전역에서 윤동주 시를 읽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힘으로 현재 교토예술대학 캠퍼스로 바뀐 윤동주의 하숙집터에 시비가 세워졌고 시인이 친구들과 송별 소풍 마지막 날 사진을 남긴 교토 우지강 인근에는 2017년 윤동주 시를 읽는 이들과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돼 건립한 기념비 '기억과 화해의 비'가 있다.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를 묻는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낸다는 재주가 없다. 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닭이다. 너무 막연 하다. 사람이란 횟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 보다. 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망하나 보다.

-윤동주

윤동주 시인은 매년 현대 시인 100선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1위에 뽑히는 시인이지만 모교 연세대학교를 제외 하고 전국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시를 읽는 이들을 찾아 보기 힘들다.

심지어 국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은 시인의 추모식이 열리는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을 방문은 커녕 권력 1인자가 되기 위해 '별의 순간'을 잡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어차피 세상의 만물은 모두 죽으면 하늘의 별이 아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序詩>(서시), 194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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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5-02-24 1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cott 님, 잘 지내시지요? 눈물 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좋은 날 보내는 것이 많은 선열들의 희생 덕분임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2025-02-24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5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2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89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는 1972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곤충분류학자, 유전학자, 동물학자였고 때로는 철학자, 역사학자가 되기도 했다.

이중 어느 하나만 떼어내서는 그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류비셰프는 다재다능 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기 힘들 정도로 박식 했지만 그가 연구하고 탐구 한 것들이 인류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뛰어 나다거나 노벨상 후보로 거론 될 정도로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것은 70여권의 학술서적과 1만2천5백여장에 이르는 연구논문, 수천권의 소책자들로 개인 비서나 연구 조교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 이루어 낸 성취였고 연구 결과물이였다.

페테르부르그 대학교에서 물리-재료학부를 전공한 류비셰프는 1911년 스무 살 나이에 학부 과정을 졸업 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 1920년대 페름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고 사마르 연구소 연구원을 거치는 동안 그가 살았던 세상은 혁명과 전쟁으로 왕조 체제가 무너지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가치와 사상이 무너지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

1930년 스탈린 체제에서 류비셰프는 레닌그라드 연방식물보호연구소에서 농촌 곤충학을 연구했고 7년 만에 키예프 생물연구소로 부임해서 생태부장으로 재직하는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류비셰프는 프르제발스크와 프룬제의 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종전후 울리야노프스크 교육대학의 동물학부장으로 부임헤서 1955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 재직했다.

65세 나이로 은퇴 하고 나서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하루 8시간 이상 자고 산책과 운동을 즐기면서 틈틈이 공연.전시를 보며 러시아 땅 어디에서든 열리는 학술세미나와 국책사업에 참가 하며 마지막 남아 있는 17년의 세월 동안 총 70여권의 저서와 1백권 분량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류비셰프가 이루어낸 방대한 성과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의 지치지 않는 체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공평한 시간을 류비셰프처럼 합리적이고 짜임새 있고 활용 했다는 것은 AI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류비셰프는 ‘시간통계 노트’ 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스물 여섯 살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시간 통계 노트>는 82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단 하루도 빼 먹지 않고 기록했다.

류비셰프가 시간을 기록한 형식은 간단했다.

- 1964년 4월7일,-곤충분류학: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2점 그림.

-3시간 15분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20분

-추가업무:슬라브에게 편지-2시간45분

-사교업무:식물보호단체 회의-2시간25분

-휴식:이고르에게 편지-10분

-곤충분류학 연구 2시간 20분

-논문집필 1시간 5분,편지 3시간 20분

-프라우다지 15분/이즈베스티야지 10분/문학신문 20분/톨스토이 책 1시간 30분...

이렇게 류비셰프는 회계장부를 기록하듯 모든 일을 할 때마다 매일 시간을 계산해 넣었고 심지어 자기 서재에 들어와 시시콜콜 질문하는 딸에게 친절하게 답해 주는 시간도 틈틈이 기록했다.

류비셰프는 이동 중에도 시간을 기록 했는데 버스·기차 타는 시간, 회의 시간, 줄 서있는 시간까지 기록 했고 장기 출장을 갈 때는 읽을 책 목록을 정한 뒤 출장지에 해당 서적을 미리 우편으로 부칠 정도로 시간을 아꼈다.

그는 이렇게 24시간 동안 쌓여간 시간기록을 매달 말 합산했고 연말에는 이를 다시 결산해서그래프와 표를 만들었다.

이쯤 되면 류비셰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매달렸고 매 순간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정신 질환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의심이 생기지만 그의 가족들에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절대로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어떤 일을 해도 시간에 쫓기며 우왕좌왕 하지도 않았고 하루 8시간 숙면을 유지 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큰 병치레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찌감치 류비셰프는 24시간 동안 인간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14-15시간 정도라는 것을 깨닫고 주어진 시간 동안 시간을 쪼개 쓰면서 단 1분도 허비 하지 않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강연하며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 했고 야외 활동이나 유흥도 즐기며 주변인들까지 살뜰 하게 챙겼다.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스물 여섯살 때부터 기록했던 시간을 철저하게 계산과 해서 혁명이 발발 해도 전쟁이 터져도 정권이 바뀌는 동안 뛰어난 절제력과 끈기를 갖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하여 후대인들은 그를 향해 <시간을 정복한 남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시간이라는 에너지는 단 한번도 운동을 멈춘 적이 없고 태초의 모습 그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이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것으로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재화다.

19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 중반에 생을 마친 류비셰프에게 시간은 째깍 째깍 움직이는 시계 초침의 존재 반응처럼 항상 감지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으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1분 1초에 의미를 부여해서 시간 쪼개 쓰는 기술과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해서 자신의 생의 시간인 82년을 25억8천5백95만2천초로 미분(微分)해버렸다.

“자유롭게 쓰기는 내가 아는 한 글을 써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며 최고의 만능 연습법이다. 자유롭게 쓰기를 연습하면 그저 십 분간 멈추지 않고 강제로 쓰면 된다. 때로는 좋은 글이 나올 테지만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한 주제에 집중해도 좋고 이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가더라도 좋다. 때로는 의식의 흐름을 잘 기록한 글이 나올 테지만 의식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기는 무리일 것이다. 자유롭게 쓰기를 하면 때때로 가속이 붙겠지만 속도는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피터 엘보의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 중에서 


2023년 1월 12일 부터 매일 하루에 두 편 씩 투비컨티뉴드에 글을 쓰고 있다.


https://tobe.aladin.co.kr/t/scott


글을 쓰던 중에 두려움이 불쑥 불쑥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가장 필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받아 들이고 용기를 그러모아 중단하는 두려움을 날려 버려야 한다.

창작의 열기가 어느 날 갑자기 서서히 불이 붙어 올라 오지 않는다.


2024년 2월 1일 목요일 부터 새로운 창작물을 시작했다.

'굿바이, 부다페스트.'

https://tobe.aladin.co.kr/s/9373




“글은 시상이 떠올랐을 때 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처럼 기계적으로 써야 한다. 소설가 야마다 도모히코는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집필 활동을 했다. 그 역시 기계적인 글쓰기를 강조했다. 휴가를 이용하지 않았다. 휴가 기간 중 여유롭게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쉴 때는 푹 쉬고 일상 중에 집필을 위한 시간을 짜냈다. 훌륭한 소설가들은 대체로 다작을 했고 맹목적이고 기계적으로 글을 썼다. 감흥이 생겨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다 보니 감흥이 생긴다.”

-한근태의 '일상의 한 번은 고수를 만나라.' 중에서

2024년 2월 1일 매주 목요일부터 시작된 생애 두 번째 창작 소설 <굿바이,부다페스트>는 12월 26일 목요일 까지 총 48편의 에피소드를 올렸다.

이 기간을 시간으로 환산 하면 1년 365일 매일 하루에 두 편씩 새글을 쓰면서 동시에 48주 동안 창작 소설을 쓴 것이다.


나의 하루의 시작은 새벽 다섯 시 30분 부터다. 새벽형의 인간으로 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에 입학 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루의 시작을 새벽부터 시작하게 되니 나와 함께 시간을 시작하는 무리들 중에 비해 두 세시간 정도의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계획 했던 공부를 하거나 새로운 학문을 학습했고 때로는 부족한 수면양을 채우기도 했고 전공 과목이 아닌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시간으로도 활용했다. 사회인이 되고나서는 이른 아침에 시작하는 수업을 들었고 관심이 가는 주제를 학습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알라딘에 글을 쓰면서 창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4년은 어느 해 보다 바쁘게 살았다. 2박 3일 일정의 해외 출장을 나간 사이에도 나는 매일 투비컨티뉴드에 글을 썼고 빠짐없이 기획한대로 창작 소설을 써나갔다.

어느 날 불쑥 영감이 찾아 오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 갈 수록 연봉의 숫자가 늘어 날 수록 시간적 여유는 점점 사라져갔고 활자로 된 것들 보다 빠르게 검색하고 손 끝으로 터치 할 수 있는 화면을 응시 하는 시간이 더 많아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동 중에도 책을 펼쳤고 비행기 안에서는 오늘 어떤 글을 쓸지 골몰했다.

언제 어디서든 앉을 의자와 테이블을 발견 하면 노트북을 펼쳐 놓고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에게 허용 되는 시간은 단 몇분 일 때도 있고 길어야 한 시간에서 두 세시간 정도 뿐이다.

2023년 1월 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 새 1년을 지나 2년 차로 접어 드니 1400개가 넘는 글이 쌓여 졌다.

평균적으로 천자 이상을 넘겨 쓰고 있고 어떤 글은 2천자에서 3천자를 쓰고 창작 소설은 한 회당 만자 가까이 쓰고 있다.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단어가 떠오르고 문장이 쏟아지지 않는다.
가장 먼저 <모닝 페이지>를 쓰기 전  어떤 주제를 쓸 것인가 고민하고, 그 주제에 맞는 사례와 근거를 찾아 마지막 나의 의견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매일 모든 과정마다 사색이 필요하기에, 한 편의 글을 쓰는 과정은 단 몇 분 만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1400개의 글이 쌓이도록 매일 글을 쓰는 동안 나라는 사람은 전과 달라 졌을까?

매일 모닝 페이지를 쓰는 동안 사소한 감정이 떠오를 때나 소소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글을 쓰고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쓰고 있는 동안 내 안에 흩어져 있는 상념들이 차곡 차곡 정리 되어 가고 있다.

모닝페이지

https://tobe.aladin.co.kr/s/2724


손 안에 스마트 폰을 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팔목과 귀에 스마트 폰과 연결 된 기기를 장착하고 이전의 세대들이 누려 보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수시로 보고 체크할 수 있는 기술 혁명의 엄청난 수혜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고 스마트 폰의 세상이 보여주는 시간에 갇혀 순간의 영상과 순간의 클릭으로 시간을 허비 하며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는 시간 강박증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든 넘쳐나는 영상과 숏폼 시대에 단 1회 출연으로 억대의 개런티를 받는 이들이 웃고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나의 시간을 허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피 땀 눈물을 흘리며 일해 주지도 않고 대신해서 내 삶을 살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츠바이크


글을 쓰는 데 재능도 영감도 지식도 필요 없다.

쓰는 동안 영감을 떠올리고 쓰면서 지식을 쌓아가다 보면 몰입의 경지에 이르러서 글은 점차 변화하고 진화 해 나간다.

용기란, 두려워하면서도 어쨌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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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28 0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2024년 바쁘게 보내셨군요 저는 게으르게 지냈네요 요새도 게으르게 지내고, 늦게 일어나고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야지 하기를 되풀이합니다 이게 지금만 그런 게 아니기도 하네요 scott 님은 부지런하게 보람있게 하루 하루를 보내시는군요 늘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저도 잘 못하는 거지만... 마음이나 몸이 괜찮으면 괜찮을까 싶지만 그것도 아닌 듯해요 운동을 해야 좀 나을지도... 운동이라고 해봐야 어쩌다 걷기만 하는군요 쓸데없는 말을...

scott 님 주말입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2024-12-28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힐 2024-12-29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제가 처음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면서 scott님께서 제 첫 친구가 되어 주셨어요. 정말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늘 올려주신 글 열심히 읽고 많은 배우고 있어요. 나중에 기회게 되면 모닝 페이지도 들어가 보도록 할 께요. 2024년 scott님이 보낸 시간의 밀도는 더 없이 커 보입니다. 남은 한 해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좋은 글 올려 주세요. 감사 합니다.

2024-12-29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9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1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0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1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1985년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아침, 아일랜드의 제조업 생산기지가 있는 도시 뉴로스로 석탄 배달일을 하며 아내와 딸 다섯을 부양하는 책임감 강한 가장 빌 펄롱은 수녀원 창고에 석탄을 배달 하러 갔던 날, 그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펄롱과 눈이 마주친 수녀원 안의 아이들은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린 채 광택제 통을 놓고 죽어라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끼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펄롱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수녀원 아이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간 수녀원 바로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놓인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다는 사실에 놀란 펄롱은 며칠이 지나 다시 석탄 배달을 하러 찾아간 창고에 갇혀 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그 여자 아이는 뜻밖에도 펄롱에게 14개월 된 자신의 아기의 행방을 묻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뜨거운 차를 내놓으면서도 얼른 돌아 가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한껏 풍긴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는 헌사로 시작되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 인들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막달레나 수용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역 조선소가 문을 닫고 비료 공장은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했던 혹독한 시기에도 하루 하루 일감이 끊이지 않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거래처와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가장의 가장 큰 목표는 다섯 명의 딸들을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학교(세인트마거릿 학교) 졸업생으로 키워 내는 것이다.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고 있던 펄롱이 종교적 위선에 짓밟히고 있는 자신의 딸들과 비슷한 또래를 외면 하지 못한 채 갈등 하는 모습에서 작가 클레어 키건은 ‘자신의 삶도 버텨나가기도 어려운데 소시민으로서 어디까지 사회의 불법과 위선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수녀원의 실상을 마주한 펄롱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50파운드 지폐를 덥석 받아버린다.

펄롱은 수녀원에 감금된 소녀들이 노동과 인권을 착취 당하는 걸 외면 하고 거래처의 일감을 착실하게 챙겨서 가족들과 살뜰하게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수녀원에 감금 된 소녀들을 마주 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 지켜야 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50파운드 지폐는 정육점 외상값을 갚고도 남고 칠면조와 햄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액수 였지만 펄롱은 봉투를 구겨 석탄통에 던져 버린다.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 수녀원장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 것도 아니였고 석탄 광에 갇혀 있는 아이의 모습을 목격 해서도 아니였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남편 펄롱이 자신의 위선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지켜 본 그의 아내는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며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할 뿐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다며 남편에게 외면하면 그만" 이라고 말한다.


펄롱의 이웃들도 상관 하지 말고 조심하는 편이 앞으로 편히 살아 갈 수 있다며 수녀들 눈 밖에 나지 말라고 경고가 섞인 말을 내뱉는다.

하루 하루 노동으로 먹고 사는 서민들은 다수의 횡포에 대해 조용한 침묵을 유지 하는 편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법이라 조언을 들은 펄롱은 안락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펄롱은 다시 수녀원 주변을 배회하다 창고에 갇혀 있던 여자 아이를 찾아 데리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랜드 인들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정부와 함께 몸을 버린 여자들을 재교육 시킨다는 명목으로 미혼모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수용했던 곳으로 실제 이곳을 거쳐간 이들은 강제 노역과 학대, 감금, 폭행을 당하며 수세기 동안 여성과 아이들의 삶이 끔찍하게 짓밟혔던 곳이다.

정확한 조사나 기록조차 없는 이곳을 거쳐간 여성들과 아이들은 약 3만 명에 달하지만 무덤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시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버려졌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1996년에야 문을 닫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아일랜드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다수의 침묵으로 묵인 되어 왔던 인권 유린에 맞선 펄롱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날, 길을 가던 노인에게 묻는다.

“이 길로 가면 어디로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펄롱이라는 걸 그 노인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노인은 펄롱에게 이렇게 답한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매년 출판사에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기에 가장 많은 독자들이 읽은 책들 순위를 발표 한다.

2024년 거의 모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1위를 차지 한 책들은 자기계발 분야의 <세이노의 가르침>과 소설 분야의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다.

인터넷에 올라 온 글이 인쇄 된 책으로 출간 되자 마자 1년 만에 100만부를 찍어낸 <세이노의 가르침>에 가장 큰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삶의 우열은 돈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주식 투자는 쓸 일이 없는 여유 자금으로 하라.

-놀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버려라.

- 부자가 되려면 좁은 문으로 가라


시중의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에는 누구나 노력하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이노는 “성공은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성공을 원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 꿈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며 인생은 자전거와 같아서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나의 발이고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도 나의 손이고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려면 미래 방정식에 지금의 처지를 대입하면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는 일침을 가한다.

이 세상에 누구나 부자로 살고 싶어 하고 부자를 꿈꾼다.

로또 판매의 상승이 단 한 번도 하락 한 적이 없고 미래의 운명과 액운을 비방 하는 법을 알려주는 점집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할 때 우리는 가까운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온라인 오프라인에 떠도는 명언들을 찾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앞날을 밝게 해주거나 현재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점술가에게 인생을 앞날을 미래를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물어봐도 뽀족한 대안이나 비방이 되어 주지 못한다.

상담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지 못한다.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앞 날이 막막해도 내 스스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그러니 주변에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다거나 이웃의 고통에 대해 크게 걱정하거나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어려움을 해결 해 줄 의인이나 위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슬픔에 걱정 하기 보다 내 삶을 살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따끔씩 책을 펼치면 나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 진다.

나처럼 고통에 처하고 나처럼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에 공감 할 때도 있지만 이런 삶과 이런 환경에서도 모든 걸 감당하고 이겨내는 뜻하지 않은 삶의 모습에 감동을 받을 때도 있다.

특히 작가가 창작한 허구의 삶을 그린 소설을 읽는 순간 두 번 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은 채 경의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삶보다 더 생생한 허구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살게 되는 두 번째 삶을 통해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또 다른 이가 안고 있는 운명을 간접 경험 하듯 함께 생각하고 느끼면서 비로소 타인의 삶을 이해 하게 된다.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세상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삶의 본질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철학 그리고 사상이 녹아 들어가서 다른 환경에 처한 이들의 삶을 이해 하고 공감 하며 세상의 어둠을 외면 하지 않게 만드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세상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인생도 내 마음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 먹은 데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현실이 때로는 슬프고 비극적이여서 이 모순된 세상에서 상상의 공간이 없다면 숨조차 마음껏 쉴 여유가 없을 정도로 허구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순간 암흑의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1985년,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 그대로 소설 속에 등장 하는 이야기는 지나쳐 버려도 상관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다.

무려 70여년의 세월 동안 잔혹한 인권 유린을 자행 해 왔던 곳이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행하는 수도원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것들을 짓밟는 모순된 이기적인 집단들이라는 실체를 밝혀 낸 작가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사회고발적이거나 역사고발적인 주제를 펼쳐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종교적 모순과 수녀원의 비리와 악랄함에 집중하지 않고 실상을 목격한 노동 계층의 남자 주인공이 갈등하고 번민 하는 모습에서 그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가 살아온 과거의 시간에서 느낀 비참함이나 가족과 함께 살면서 느꼈던 감격의 순간들을 교차 시켜 보여 주면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버지도 모른 채 태어나 어느 노부인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얹혀 살았던 펄롱은 성실하게 일해서 세 딸을 낳아 건실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사회 밑바닥 계층이다.

삶의 안정과 불안 사이에서 갈등 하던 펄롱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라며 어찌할 수 없이 휘말려 버린 거센 소용돌이 속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도 결국 이 세상을 버텨내고 살아 나갈 수 있는 힘은 사랑이라 믿으며 수도원에 감금된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 온다.

2024년 한 해 동안 모두가 어렵고 힘겨운 시기를 무사히 견뎌 내고 12월 행복한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음이 들뜨는 시기에 뜻하지 않게 비상 계엄이 발발 했다.

단 두 시간 만에 시민들의 힘으로 계엄을 무효화 시켰지만 대한민국의 국격은 단숨에 밑바닥으로 추락 해 버렸고 나라 안 밖으로 비상 경제의 수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사랑' 때문에 비상 계엄을 선포 한 권력자는 법률 책은 읽었서도 소설은 물론이고 활자로 적힌 책은 단 한 줄도 읽어 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문자가 발명 되어 인쇄 기술 혁명으로 책이라는 도구가 생겨난 이후로 수 세기 전 사람들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 하며 책을 읽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수단이자 참된 지혜라는 것을 강조 해왔다.

책을 읽는 것은 낯선 세상과 만나는 것으로 나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책을 통해 대화하고 이해 하고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 책은 누구에게나 한 권 쯤은 있을 것이다.

구글 창을 열면 무엇이든지 검색해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에서 AI인공지능이 대신 읽어주고, 대신 검색 해주고 대신 글을 써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AI인공지능과 대화 하며 친구를 맺을 수 있지만 AI인공지능이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코로 숨을 쉬고 팔 다리를 움직이며 땅 바닥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삶의 지혜와 조언을 줄 수 있는 곳이 숏폼이나 유툽 영상이 되어 주지 못한다.

남들이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보는 데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 해서는 안된다.

태어난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주변 상황을 탓하고 사주를 탓해 봤자 소용이 없다.

점술가도 예언가도 타인의 운명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설령, 로또 당첨 행운의 날벼락을 맞게 된다 해도 현재의 삶과 크게 달라지기 보다 오히려 불운을 떠 않는 경우가 많듯이 삶의 지혜를 얻고 싶으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채워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 그 해답을 알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

어쩌면 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헛된 시간일지 모르고 삶에 그리 큰 교훈이나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인생을 단 한 단어로 줄이면 [이야기] 즉,서로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살아 온 세월은 이야기의 연속이고 인생 자체가 이야기 보따리다.

따라서 책을 읽는 동안 허구의 인물들의 시선으로 두 번의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양서는 처음 읽을 때는 새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전에 정독한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

- 골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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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4-12-24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틈을 낸다면
스스로 속(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루를 쓴다는 뜻이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앞으로 나아갈 길과
오늘까지 걸어온 날을 되새기게 마련이라

책을 읽는 틈을 내는 오늘을 보낼 적에는
스스로 속(마음)부터 차리면서
새롭게 꿈을 그리는 씨앗을
살며시 심는 몸짓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한 해 끝자락에
저마다 마음을 돌아볼 책 한 자락을 그리면서
책집마실을 다닐 분이 늘어날 수 있다면
기쁜 일이겠지요.

2024-12-24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훈드여, 새로운 사상은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되오. 하나는 그 사상이 약할 때: 너는 어떤 존재인가? 타협하고 거래하고 사회에 순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살아남으려 노력하는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에 꼬장꼬장하고 게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산들바람에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쪽을 택하는가?─후자인 경우, 대개는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쯤)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이오. 그러나 백번째에는 세상을 뒤바꿀 수도 있소.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1989년 9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자마자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하 하고 모독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불태우며 극렬한 시위로 들끓어 오른다.


악마의 시는 무슬림 인구 집단이 많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수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태국, 탄자니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에서 출판을 금지 시켜버린다.

1990년 2월 14일 이란 테헤란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89년 6월 사망) 유언으로 남긴 '무슬림을 모독한 자는 처단하라'라는 종교 법령' 파트와'를 발표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들은 살만 루슈디를 발견 하는 즉시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처단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990년 2월 14일 파트와가 발령된 다음날 부터 살만 루슈디는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 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악마의 시>를 불 태우는 시위와 작가 살만 루슈디의 생명을 지키자는 시위로 극렬하게 나눠져 버린다.

이 책을 출간하는 나라의 담당 출판사들은 무슬림으로 부터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고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들은 무슬림 폭도들에게 공격 당하거나 살해를 당했다.

유럽에서 <악마의 시>를 가장 먼저 출간한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그리고 아시아 국가에서는 일본의 번역가와 출판인들이 무슬림의 공격으로 안타까운 생명을 잃자 세계 각국의 출판인들과 작가 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살만 루슈디와 출판인들과 번역가들을 무슬림의 테러 대상에서 보호 받아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 하라는 선언서를 발표 한다.

영국은 살만 루슈디를 24시간 밀착 보호 하며 이란에게 경제적 외교적 제재 조치를 취했다.


살라딘은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그 사건이 다윈의 보복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덤스데이는 저 딱딱한 빅토리아시대에 살았던 불쌍한 찰스에게 미국의 마약문화에 대한 책임을 덮어씌웠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는 자기가 그토록 반대하던 부도덕한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중에서

1981년 <한밤의 아이들> 출간한 살만 루슈디는 전 세계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세계 문단 중심에서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영국 정보부의 보호 아래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세워 보다가 사용했던 침대가 무려 56개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권투 같은 호신술을 배운다.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가 본격적으로 서점에 깔리기 3개월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킨다는 무슬림들이 파트와는 발령한 사람만 취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살만 루슈디를 향한 칼 끝을 저버리지 않았다.

제국 시절에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를 지배해서 무슬림의 이민자들과 난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스는 1993년에서야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 하고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미국 땅으로 번질 것을 우려 했던 미국은 프랑스 출간에 뒤이어 미국판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파트와 법령을 충실하게 시행했던 무슬림 폭도와 테러리스트들은 세계 곳곳에 알라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테러짓을 저지르는 동안 살만 루슈디는 공포심에 떨며 무기력하게 살지 않았다.

그는 매일 각종 호신술을 연마 했고 전 세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언론의자유, 종교적, 관용, 문학의 자유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며 전세계 여론을 움직였다.

1998년 서방 국가의 제재 압력에 버티기 힘들었던 이란은 루슈디의 사형 선고를 철회 한다고 발표 했지만 루슈디를 처단 하는 어떤 무슬림도 처벌하겠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파트와 법령이 발표 되자 마자 이틀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도저히 이런 상태로 살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부를 들키는 것, 그 살 떨리는 벌거벗음의 상태 그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의 모든 비밀이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상황을 -납치,추락,체포 -목격하지 않았던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반세기를 지나서도 무슬림들은 <악마의 시>를 쓴 작가 살만 루슈디를 용서 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살만 루슈디는 뉴욕대에 주최하는 강연장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이슬람 테러리스트 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한쪽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고 한 쪽 눈 시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바닥에 쓰러져 내 몸에서 바깥쪽으로 퍼져가던 피 웅덩이를 바라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피가 많네. 나는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극적이고 특별히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눌렀다. 큰 엄지손가락 같았다. 그 손가락이 가장 큰 상처를 눌러 내 생명이 담긴 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살만 루슈디의 <나이프> 중에서


원형 극장 무대에 살만 루슈디가 올라가는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쓴 24세 무슬림 청년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찌르고 얼굴 위쪽과 입 왼쪽, 가슴, 허벅지를 차례차례 찌른다.

살인마 무슬림 청년이 살만 루슈디를 찌른 시간은 단 27초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과 의사들의 빠른 응급처리를 받은 살만 루슈디는 왼손 힘줄과 대부분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로 응급실로 실려와 죽음을 향해 갔다.


눈을 잃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시신경이 손상되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으나 내 눈을 가져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눈을 잃는다는 건 신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시야의 4분의 1을 아예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마취제를 투여 받은 살만 루슈디는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을 되찾아야 해.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그저 회복만 할 수는 없어.

삶을 되찾아야 해.'

일주일 동안 끔찍한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회복 기간 동안 살만 루슈디는 앉고 일어서고 걷고 움직이는 법을 천천히 시도하고 파트와 법령 선포 당시 아홉 살 나이였던 아들, 이제는 새 하얀 머리카락으로 풍성하게 뒤덮인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지 18일 만에 살만 루슈디는 환자복을 벗고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휠체어에 올라탄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 하는 눈도 귀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갖고 칼이 아닌 펜을 들고 한 글자 씩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언어도 칼이었다.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 언어는 헛소리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가 나의 칼이었다.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들고 달려간 테러리스트 이름은 하디 마타르 24살의 레바논 출신인 그는 ‘악마의 시’를 단 두 페이지만 읽은 뒤 범행을 계획했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그의 집에선 3만개가 넘는 증거물들이 쏟아졌다.

이란과 이슬람 국가는 이 사건과 자국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고 그 테러리스트도 단독범행이라 자백했다.

현재 미국 경찰은 배후 세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트와가 선포 된지 33년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칼에 찔린 살만 루슈디는 강한 의지로 살아 남았다.

그는 회복 기간 동안 자신의 목을 찌른 그 테러리스트에게 범행의 이유를 묻는 일문일답 형식의 상상속 대화를 시도한다.



-살만 루슈디

신의 본성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테러리스트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고 모든 것을 아시지. 그분은 곧 모든 것이야.

-살만 루슈디

너희의 전통에 따르면, 너희의 신과 그 책에 나오는 다른 민족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다른 거지? 그 사람들은 그들의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테러리스트

그들이 틀렸어.

-살만 루슈디

너는 내가 부정직할 뿐 아니라 악마이기도 하다는 거네. 그래서 나를 죽이는 게 옳다는 거야?

-테러리스트

너는 새끼 악마일 뿐이야. 그러니 자만하지 마. 하긴 새끼도 악마도 악마지.

-살만 루슈디

악마는 파멸 시켜야 하고?

-테러리스트

그래, 넌 이십억 명의 미움을 받고 있어. 그것만 알면 돼. 그렇게 까지 미움을 받다니. 어떤 기분일까? 벌레가 된 기분이겠지 잘난 체하며 온갖 말을 떠들어대지만 사실 너는 자신이 벌레 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 발로 밟아 죽여야 할 벌레 말이야. 넌 다른 나라고 여행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 나라의 절반 정도에는 발도 들일 수 없어. 그런 곳들에서는 너에 대한 증오가 너무도 강하니까.

-살만 루슈디

평범한 남자에게 할 만한 평범한 질문이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나?

-테러리스트

난 신을 사랑한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고 나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성을 모독했는지 아닌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졌다.

1989년 ‘악마의 시’는 출간 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돼 수입·유통·출판이 금지되어서 이슬람권에서 책을 읽은 사람이 드물었고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휘두른 테러리스트도 딱 두 페이지만 읽어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신성 모독이 아닌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20세기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은 온건한 사람으로 보이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내가 여기 있는 까닭은 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카리브인, 인도인,파키스탄인,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중에서


봄베이발 여객기가 런던 상공에서 폭발하고 두 남자 살라딘 참차와 지브릴 파리슈타만 살아 남는다.

살아 남은 두 사람의 운명은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탑승 했을 때의 영혼과 자아를 벗어 던져 버린다.

모국어도 잊어 버리고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영혼, 초능력을 갖은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현실에서 소멸 되어 버린 채 지상의 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거야. 자네와 나. 생일 축하하네. 이봐 생일 축하 한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홀수 장에서 비행기에서 추락 하기 전 지상에서 15년 동안 배우의 삶을 살았던 지브릴 파리슈타의 삶을 보여 주고 짝수 장에서는 천사로 변신한 모습으로 교차 시키며 세상을 들끓어 오르게 만드는 온갖 사건들을 끄집어 낸다.


기억할 거야 양탄자 타고 다니는 레카 우리가 추락할 때 봤잖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미친놈 같은 스코틀랜드 복장을 하고 고라(백인, 유럽인) 같던데.

이름은 제대로 못 들었지만

알리도 그 둘을 봤는지 못 봤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리는 그대로 서 있기만 했고

레카가 시킨 일이었어 알리를 위층으로 데려가라고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알리를 겨냥했고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어

나는 알리를 밀지 않았어

레카가 밀었지

나는 절대로 알리를 밀어버릴 수 없었으니까.

스푸노

내 마음을 알아줘 스푸노

빌어먹을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에서 초월적 존재의 진짜 정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고 그의 정체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그 초월적 존재는 시 공간을 오고 가며 현실과 지옥, 그리고 천국 속에서 지상의 온갖 사건 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푸념 하고 변명하며 거짓말 같은 진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파트와 선포 후 33년 6개월 만에 자신의 목을 찌른 테러리스트가 법정에 서게 되는 날 작가 살만 루슈디는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삶에 당신이 침입한 것은 폭력적이고 해로웠지만. 이제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지요. 당신이 감옥에서 보낼 나날이 무엇으로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아마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칠 겁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나날 동안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상관없는 존재가 될 겁니다.

나는 당신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서 기쁩니다. 내 삶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살만 루슈디


루슈디는 자신을 향한 칼에 펜으로 맞서며 언어로 세상을 베고 찌르면서 종교의 관습과 굴레로 겹겹이 쌓여 있는 불평등을 향해 진정한 자유의 힘이 무엇인지 언어의 힘으로 증명해 보였다.

회복 기간 동안 써 내려간 <나이프>에서 루슈디는 이런 말을 한다.


합리주의자의 신앙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해. '사람은 자신의 열정에 어울리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신을 믿고, 자신의 잔인함에 핑계를 대기 위해 믿음을 이용한다. 오직 친절한 사람만이 친절한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친절하게 행동한다.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살해를 지시하는 자는 신의 제자가 아닌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살인 교살자일 뿐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에서도 예술은 논쟁과 비판을 불러 일으키지만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인간성의 본질에 부합되는 자유와 존엄의 권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단,그 예술의 가치가 형편 없다면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 질 것이고 역사에 기록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추방 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오비디우스가 세상에 남긴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살해 당하고 불태워지고 소각 되고 쇠창살에 갇힐 지라도 말을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까지 막아 낼 수 없다.

신의 이름을 외치며 칼을 들고 달려든 자에게 생명을 잃을 뻔 했던 살만 루슈디는 폭력이 아닌 펜을 들고 예술로 이렇게 답했다.


언어는 나의 칼이었다.

만약 내가 뜻밖의 칼 싸움에 휘말렸다면

아마도 ‘언어’라는 칼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만 루슈디(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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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1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작가의 분노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오늘도 눈호강하고 갑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당~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scott 2024-11-19 11:22   좋아요 2 | URL
살만 루슈디 여전히 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눈과 팔의 신경이 끊어져 버렸지만 죽을 때까지 칼 대신 펜을 쥐고 악의 공포를 이겨 내겠다고 합니다
에이 아이 시대에 더 소중해진 펜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