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백 니카라과 산타 루실라 #3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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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스팅 온도 차를 크게 벌여 평소보다 길게 로스팅했다는 니카라과 산타 루실라,와인같은 포도의 산미와 흑설탕의 단맛, 밀크초콜릿의 부드러움 맛은 못 느꼈고 마지막 산미맛 느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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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3-12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 이번에 새로 나온 건가요. 산미가 강한 커피라니 조금 더 설명을 읽어봐야겠어요.
커피의 산미를 좋아하는 분께는 좋을 것 같습니다.
scott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scott 2022-03-15 00:02   좋아요 2 | URL
네 이번달 3월에 새로 나온 커피!
첫 주에 품절이 였다가 재 입고 될 정도로 인기!

설명 속에 나온 맛은 못 느꼈고

맨 마지막 산미맛만 느꼈네요

서니데이님 비내리는 한주
따숩게 ^ㅅ^

독서괭 2022-03-12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는 무슨 무슨 맛이 느껴진다는 설명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맛있나 맛없나만ㅋ

scott 2022-03-15 00:03   좋아요 2 | URL
알라딘 커피 맛이 대체적으로 순한 ㅎㅎ
개당 10그램 양이 작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ㅅ^

새파랑 2022-03-12 0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커피에 저런 많은 맛들이 숨겨져 있군요 ㅋ 저는 영영 못느낄거 같아요 😅

scott 2022-03-15 00:05   좋아요 1 | URL
드립백으로는 이토록 다양한 맛은 ㅎㅎ

에스프레소로 맛을 봐야 ^ㅅ^

희선 2022-03-13 0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슨 맛이 있다고 쓰여 있어도 그걸 다 느끼지는 못하네요 그런 거 다 느끼는 사람은 좋을 듯합니다


희선

scott 2022-03-15 00:0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원두를 직접 분쇄 해서
에스프레소로 뽑아 마시면
개봉후 첫 주는 이런 저런 다양한 맛이 느껴집니다 ^ㅅ^

스파피필름 2022-03-13 0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캇님이 말씀하시면 책처럼 커피도 신뢰도가 뽝! 올라간다는...저 중고서점 갈 때마다 알라딘 드립백 종류별로 쟁여오는데 정확히 맛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다른 곳 커피보다 맛있는 느낌이에요 ㅋㅋ

scott 2022-03-15 00:07   좋아요 1 | URL
신뢰도!
전, 쿠폰과 천냥 준다는 커피 위주로 구입을 ㅎㅎㅎ

원두를 쌀 보다 더 많이 쟁여 놓았네요
모든 물가가 전부 치솟고 있으니!ㅎㅎ

드립백 종류별로 쟁여 둬야 든든!!
저도 맛의 차이는 잘 모르지만
저런 설명을 읽으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 끄덕^^

스파피 필름님 나날이 확진자 급증 ㅜ.ㅜ
건강 잘 챙기세요 ^ㅅ^

오거서 2022-03-18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커피 맛이 궁금했는데
scott님이 도움을 주시는군요.
ㅋㅋㅋ 못 느꼈고 반전 맛평에 반해서 ㅋㅋㅋ
저도 시음해보고 싶어집니다.
땡스투 scott님~ ^^

scott 2022-03-19 23:21   좋아요 1 | URL
반전!의
산미 였습니다.

제 기준으로 알라딘 드립백
커피 맛은 비슷 ^ㅅ^

그레이스 2022-03-18 1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립백보다는 직접 드립하는 걸 좋아해요
나름 분위기가 있어서...^^
바쁠땐 드립백이 유용하기는 해요^^

scott 2022-03-19 23:22   좋아요 2 | URL
저도 직접 드립을 하지만(분쇄기에 원두 갈아 버리능 ㅎㅎ)

드립백은 시간에 쫓길때 ㅎㅎㅎ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 한국미술명작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옮김 / 국립현대미술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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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이성자 남관 이응로 권옥연 김흥수 류경채 문신 박생광 천경자 김종영 작품 속에 담긴 파란만장한 인생, 고단한 세월들 한국 근대미술의 르네상스 작품들이 담긴 도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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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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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금요일 새벽 6시 28분 캉티뉴쓰 호텔 뒤 호숫가 산책로에서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시신이 발견 됐다는 신고가 긴급 신고 센터에 접수 되고 39분 뒤 인근 파출소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한다.


발견 된 시신의 등 왼쪽 심장 부위에 지름 0.5센티미터의 총알 구멍이 나 있고 손과 얼굴에도 경미한 찰과상이 있었다.

긴급하게 폴리스 라인을 치고 출입을 차단 한 후 오전 9시경 형사와 법 의학자들이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서 기초적인 감식을 하고 결과를 발표한다.

 피살자는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 웨이둬, 연회색 기능성 소재 운동복 티셔츠와 검은 색 트레이닝 팬츠 차림에 스포츠 양말은 신었지만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잔돈 25위안 외에 다른 소지품은 없었고 온몸이 물에 젖고 머리카락과 옷은 진흙 투성이였다.


'캉티뉴쓰 호텔은 5성급 호텔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락한 객실, 훌륭한 서비스, 고급 스파,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 호텔은 꿈의 결실이다. 타이완 중앙 산맥에 남은 마지막 미 개발지, 그 신비한 호수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60미터 절벽 꼭대기, 바로 그곳에 이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여행 잡지 <크라우디드 선>에 소개 된 캉티뉴쓰 호텔, 호수와 절벽 사이에 절묘하게 서있는 천국 같은 그곳에서 2016년 새해 첫 날 호텔 사장이 피격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 소식을 처음 접한 왕쥔잉 검사로 지방 검찰청에서 12직등급 정도의 서열 3위의 위치에 있지만 화려했던 지난날의 수사 이력과 달리 이제 세월에 맞춰 늙어가는 것만 남겨 두고 있다.

검사 왕쥔링은 2016년 새해 첫날 에 발생한 캉티뉴쓰 호텔 사장 피살 사건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중 시 중구 경찰계의 두목 '차이궈안'에게 넘어 갈 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차이궈안'은 경찰 고위 간부 부터 뒷 골목 조폭 똘마니들까지 탄탄하게 쌓아 둔 인맥으로 그의 직인이 찍힌 서류는 어디를 가도 무사 통과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검사 왕쥔링은 이 피살 사건을 진두 지휘 하며 경찰들을 병풍처럼 세워두고 수사 결과를 발표 해야 겠다고 결심하고 캉티뉴쓰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왕검사 보다 한발짝 앞서 사건 현장에 도착한 차이궈안은 거들먹거리며 차에서 내리려다가 휘청 거리는 왕검사를 부추겨 주며 서로 날카로운 기 싸움을 벌인다.

경찰 측에서 판단한 사인은 총상이였지만 법의학자들의 초기 부검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피살자의 호흡기에서 점액 분비물과 진흙이 대량으로 발견 되었는데 이는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물에 빠졌다는 증거로 총탄이 피살자의 등으로 들어와 좌측 폐를 관통한 뒤 갈비뼈 사이데 꽂혔지만 심장과 동맥은 손상 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법의학자들은 부검 결과 피살자가 총에 맞아 즉사 하지 않고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산책로까지 기어 올라온 후에 과다 출혈 상태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망한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웨이둬는 쉰살 의 나이의 타이중 출신 사업가로 결혼은 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웨이둬 건설을 설립하며 호텔, 실업 개발등의 여러 기업체를 운영했던 촉망 받는 기업가로 2009년 캉티뉴쓰 호텔이 완공 되자마자 그는 자신의 모든 사물실을 호텔 2층으로 이전 하고 자신도 호텔 옆 직원 기숙사로 이사 했다.

아침 8시 부터 밤 9시까지 왕성하게 일했던 바이웨이둬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던 인물은 아니였고 건축 관리법 위반이나 소소한 민사 분쟁 사기죄 고소 사건이 외에 어떤 전과기록도 없었다.

사건 수사가 오리무중으로 빠질 수록 경찰 쪽 간부 차이궈안과 검사 측 우두머리 왕쥔잉은 수사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언론의 관심을 한 껏 받으며 직접 수사를 진두 지휘하고 싶은 왕 검사는 또라이 기질을 가졌지만 비상한 두뇌를 가진 젠돤 대학의 푸얼타이 부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범죄 연구가 인간을 이해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 하며 해결하기 힘든 각종 범죄수사를 돕고 있는 푸얼타이 부교수는 조류 연구 전문가로 그의 추리 실력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캉티뉴쓰 호텔 건물의 'ㅅ'자 형태와 절벽이 만들어낸 삼각형 형태의 야외 테라스에 풀장과 노천 카페가 있는데 이곳의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 놓은 키 작은 나무와 스테인리스 난간을 넘으면 20층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다.

절벽 곳곳에 있는 바위와 나무들 사이 움푹 파인 곳의 새 둥지를 발견한 푸얼타이 부교수는 사람의 발자국과 나뭇잎에 묻은 화약의 흔적을 발견한다.

cctv영상에 찍힌 수상한 차림의 범인을 찾기 위해 호텔 전 직원들에게 탐문을 하자 '황아투'라는 이름의 인물을 지목한다.

호텔 정원 조경을 담당했던 인물 '황아투' 현재 행방이 묘연 한 상태로 그 사람 이름으로 등록된 엽총이 있었다.

경찰 기록에 의하면 '황아투'는 막 노동, 제철소, 식당, 농협, 호텔에서 일하면서 상해죄, 불법 감금죄, 기물 파손 죄로 처벌 받은 전과가 있었다.

10여년 전 이곳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바이웨이둬와 친분을 쌓아서 캉티뉴스 호텔을 건설하는데 주요 역할을 했던 인물이였다.

피살자 바이웨이둬는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주변의 원한을 산 인물이 아니였다. 그의 아내 란니는 42살로 중부 지역 부동산 재벌의 무남독녀로 흙수저 출신인 바이웨이둬와 결혼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란 씨 가문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이민 간 후 이 집안의 사업체를 바이웨이둬가 넘겨 받아 사업 영역을 확장 할 수 있었다.

남편이 피살 당하기 하루 전 란니는 아침 8시에 남편과 함께 사무실로 출근하고 연회장에서 열리는 약혼 파티를 축하해주었고 각자 일을 본 후 새해 전날 밤을 함께 보낼 친구를 데릴러 차를 몰고 나갔다.

송년 파티에 참석한 부부는 새해 카운트다운이 끝난 뒤 귀가 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조깅 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바이웨이둬를 아내 란니가 창가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였다.

부부와 함께 송년 파티에 참석했던 여 비서 장커커는 사건 당일 아침 잠에서 일찍 깨서 호숫가 산책을 나갔다가 녹색 윈드 재킷을 입은 이상한 사람과 마주치고 산책로로 내려갔다가 시신을 발견 했다.

1999년 5월 10일 새벽 1시경에 발생 했던 코야오 연못 옆 가스 공장 가스 폭발 사고로 사망자 6명, 부상자 28명의 인명 피해와 함께 가옥 35채가 전소 되었던 '코야오서 가스 폭발 사고'를 찾아낸 경찰 측은 이 사건으로 캉티뉴쓰 호텔 개발 계획이 통과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우연한 가스 누출 사고 였는지 고의적인 폭발이였는지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으로 사건은 덮어졌다.

차이궈안은 호텔 대연회장에서 수많은 취재 기자들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연다.


'......경찰의 끈질긴 수사 끝에 마침내 중요한 목격자를 찾아 냈습니다. 호텔의 한 경비원이 오늘 새벽 5시경 호텔 바깥쪽 경비 초소에서 황아투(차량번호 XY-3521)가 트럭을 몰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 했습니다.

경찰이 호텔 단지 내 숲에서 그 차량을 발견 했으며, 조사 결과 황아투(본명 황셴)가 차를 그곳에 버려두고 걸어서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야외 테라스로 나간 뒤 로프를 이용해 절벽면의 움푹 파인 곳으로 내려가 숨어 있다가 바이웨이둬가 산책로를 지나갈 때 총을 쏘아 살해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검찰은 황아투에 대한 수배령을 즉각 내리고 용의자 행방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사건의 중요한 핵심 단서가 될 수 있는 일급 보호종 펠리칸 새, 코야오서 가스 폭발 사고, 행방이 묘연 한 호텔 조경 담당자 황아투, 그리고 여비서 장커커....

타이완 중앙 산맥에 자리 잡은 신비한 호수의 절경이 내려다 보이는 60미터 절벽 꼭대기에 자리 잡은 '캉티뉴쓰 호텔'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였을까?

명탐정으로 알려진 조류학 교수 푸얼타이, 전직 경찰 뤄밍싱, 변호사 거레이, 신비의 괴도 인텔 선생 모두 살해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일까?


['1998년 화롄으로 출장을 가다가 산사태로 도로가 끊기는 바람에 산길을 돌아가던 중에 우연히 이 호수를 보았어요. 캉티호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라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죠. 힘들게 코야오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늦은 시간이었어요. 지치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찾아왔다가 구야오원 목사님 때문에 기절할 뻔 했습니다. 목사님이 내게 활을 겨눈 채 성니콜라스 십자가를 찾아온게 아니냐고 묻더군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했더니 나를 교회로 데리고 가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구워 죽통밥과 함께 내어주시더군요. 좁쌀술과 국화차도 함께요. 우린 밤새도록 애기를 나눴습니다. 코야오서의 역사에 대해 듣고 코야오봉에 올라가 일출도 봤죠.

그 일을 계기로 캉티뉴쓰 호텔 건설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어요.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도 맛있고 좁쌀술도 향기롭고 호수 경치는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죠. 수많은 곳을 가봤지만 캉티호와 코야오서 만큼 타이완 고유의 더럽혀지지 않은 신성한 감동을 주는 곳은 없었어요.'

-살아 생전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가 검사 왕쥔링과 나눴던 대화 중에서 p.328-329

이들 네 사람의 서로 다른 내밀 한 사정들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면서 호수와 절벽 사이 자연이 내지른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천상의 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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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0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인줄 알았어요 ㅎㅎ 표지는 예쁜데 내용은 추리소설이군요 ~ 스콧님 관심사는 정말 넓은 듯 ㅎㅎ 대만추리소설은 처음 접하는 듯, 궁금합니다. 스콧님 편한 밤 보내세요 ~

scott 2022-03-10 22:05   좋아요 2 | URL
표지가 그랜드! 떠올리게 만들죠.
설정 분위기도 좀 비슷 합니다
타이완 표 밀실 추리 소설!
찬호께이가 인정한 작품이라고 해서 냉큼!!

미니님 편안한 밤 ! 굿! 밤 ^^

미미 2022-03-10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쌩뚱맞지만 무라카미 배지가 욕심나네요ㅎㅎ 스콧님의 별5개 작품은 저도 찜! 😆

scott 2022-03-11 11:53   좋아요 1 | URL
미미님 박사곰에게 달아주고 싶은 거죠!ㅎㅎㅎ
.   /\__.ヘ/ヽ
   /   (_(⌒厂ヽ
  |      ̄\ノ
∩∩ ミ ⌒ o ● ミ
( ⊂) 乀_____ノ

희선 2022-03-11 0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기 나온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겠지요 어떤 비밀이 있을지... 자연이 내지른 소리라는 말을 보니 그곳에 호텔을 지어서 자연이 안 좋아지고 누군가 피해를 입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면 좋을 텐데, 사람은 좋은 곳이 있으면 거기에 꼭 뭔가를 짓는군요


희선

scott 2022-03-11 11:55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이거 마지막 반전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리뷰에서는 감춰 버렸습니다
사알짝 힌트만 ㅎㅎㅎㅎ

천혜의 자연 속에 자리한 호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요런 설정 하나 만으로 작가가 작품 한권 뚝딱!

밀실 살인 트릭 추리는 흥미진진한데
실제 발생하면 안됌요 ㅎㅎㅎ

psyche 2022-03-11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scott 2022-03-11 11:55   좋아요 2 | URL
잼!ㅎ 납니다 ㅎㅎ
이제 일본판 추리 안봐여 ㅎㅎ
타이완 추리 SF가 대세!^^

새파랑 2022-03-11 0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랜드부다페스트랑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올랐어요 ㅋ 간만에 추리소설이 땡기네요 ^^

scott 2022-03-11 11:56   좋아요 2 | URL
게이고 옹 요즘 필력이 하향세 ㅎㅎㅎ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쏜살 문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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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 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 했거나 존재 할 수도 있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 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고 들어 갈 수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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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0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시구로작가님 이런 책도 있군요 *^^*

scott 2022-03-08 00:06   좋아요 3 | URL
장바구니 가격 맞춰 쿠폰 쓸때 구입했습니돠 😄

새파랑 2022-03-08 07: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자평 이벤트에 등장한 가즈오 이시구로 군요 ^^ 제가 안읽은 이시구로의 책이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scott 2022-03-10 23:14   좋아요 1 | URL
오! 댓글 분명 썼는데 사라졌네요 ㅜ.ㅜ

이시구로 이 책은 인터뷰 입니다! ㅎㅎㅎ
 
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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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로 시작된 독립 전쟁은 이미 10년 전 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거대한 아메리카 땅에 거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유럽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지배 하에서 자신들의 피와 땀방울 스며든 토지와 재산에 대한 안전한 자치권 보호를 받기 원했을 뿐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13개 주 식민지 땅에 넓게 퍼져 살던 대다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군주제 정부로 부터 관대한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였다.

반면 방대한 식민지 영토를 통치 하는데 막대한 군비 자금과 항해 운송비를 감당 하기 힘들었던 영국이 1763년 각종 통치 제도를 바꾸기 시작 하면서 통치국과 식민지국 간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나라의 왕과 의회에 대한 회의와 불신감은 서서히 쌓여 갔고 영국 정부가 식민지의 통치권을 미국인들이 손에서 빼앗아 왕의 하명 아래서 영국 의회의 다수 표결로 결정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혁명의 불씨는 싹트기 시작 했다.

미 대륙에서 벌어졌던 독립 전쟁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대륙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의 전개와 결과 보다 영국의 휘그와 토리 보수파 사이에서 발생했던 분열 상황 부터 살펴 봐야 한다.


영국 측은 미국의 반란이 단순히 "끊임 없이 이어지는 봉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들의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남부 지주와 거부 그리고 정치인들만 포섭 하면 미 대륙의 13개 식민지 주는 단숨에 정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지형과 드넓은 자연 환경의 미 남부 지역은 휘그와 토리 보수파 정치인들이 선발한 국왕파 민병대들의 아둔하면서 느슨한 행동과 전략으로 인해 전투 현장에서 영국군의 고통은 깊어져 만 갔다.

첩보 파발마를 내보내도 단 한번도 목적지에 도착 한 적도 없었고 영국 측 지휘관에게 직접 보고 된 적도 없었다.

오합지졸의 남부 대륙군 민병대들은 살기 위해서 군에서 이탈 해서 먹을 것을 찾아 곳곳을 누비다가 영국 측에서 보낸 첩자들을 습격하거나 포로로 잡아 버렸다.

소소한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해도 승전보가 국왕까지 도달 하기 전에 미대륙 민병대들의 차단으로 미 대륙에서 발생하고 있는 독립 전쟁 전선 소식을 영국 땅에서는 듣기 힘들었다.

영국 귀족들과 의원들은 미 대륙군을 만만치 않은 적이 아닌 그저 악의적인 반란자들이라고만 치부 했다.

전선이 넓게 퍼질 수록 전쟁은 지루 할 정도로 지연 되었고 지연 될 수록 미 대륙군은 오합 지졸에서 질서 정연하게 훈련받는 병사들로 거듭나게 된다.

남부 지주들과 정치인들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를 했지만 막상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자 어떤 정보나 협조를 하지 않았다.

참담한 전투 양상에 빠진 영국에 맞선 미 대륙군은 강을 중심으로 주요 핵심 지역 으로 전선을 넓혀 나가면서 도망치는 전략을 선택했다.

미 대륙군은 맞서 싸우기 보다 치고 빠지는 방어전으로 영국군이 쫓다가 쫓기는 순간에 습격 해 버렸다.


1779년 미국의 본험 리처드호가 영국의 세라피스호에 맞서서 승리하던 순간에도 영국은 그저 기상 조건 때문에 미국이 운이 좋았던 것 뿐이라고 생각 했다.

영국은 단 세 척의 군함으로 미국을 전멸 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공격을 당하기 전 역공으로 영국의 모든 공격을 용감하게 받아냈다.


1781년 1월 18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모건 장군이 지휘하는 아메리카 군은 영국 군의 퇴로를 막는 배수진을 치고 끈질기게 영국 군이 몰려 오기를 기다렸다.

기마병에게 유리 하지 않은 지형이였지만 이를 역으로 이용한 모건 장군은 총과 검으로 무장한 15명의 기병의 진군을 시작으로 진지에서 45미터 떨어져 있었던 영국 군의 공격을 무너뜨렸다.

공격 대열이 허물어지는 순간 뒤이은 병사들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륙군의 보병대들에 의해 전멸 당한 후 소규모 포대 병사들이 뒤이어 몰려오는 다른 진영의 영국군 부대를 향해 포를 날렸다.

17용기병 연대 파견된 영국군은 왕립 포병대와 국왕파 민병대 까지 합쳐서 총 1100명으로 이 전투에서 40여명만 살아 남았고 전멸 직전 영국 군은 목숨을 구걸했다.

미 대륙군은 소규모 부대로 미 대륙 13개주 주요 요충지로 넓게 퍼져서 수로와 해안을 차단 해서 전장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지리멸렬 하게 이어졌던 유토 스프링스 전투에서 대륙군에게 반격을 가했지만 메릴랜드 정규군 대대의 퇴로를 열어주는 실수를 하며 싸움터는 지켰지만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잃고 버지니아로 밀려 난다.


도망치는 영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흩어졌던 대륙군 2200명은 버지니아 주요 진지에서 적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대량의 사상자를 낸 영국군 만큼 미 대륙군들의 사상자들도 높았던 독립전쟁은 1779년에서 178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엄청난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영국군에 의해 모든 재산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자 미국인들은 어떤 고통과 굶주림이 닥쳐 와도 반드시 영국에게 이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들은 서로의 의복을 만들어 주었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습격해 오는 영국군을 향해 총을 들었다.

4년 동안 이어졌던 독립 전쟁 동안 정규 대륙군과 민병대들은 이 전쟁이 추구하는 목적을 자신들의 일이자 우리 모두의 미래,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총 사령관이였던 조지 워싱턴은 전장에서 현란한 연설이나 말 보다 편지를 통해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 하고 추스려 주었다.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대의 덕분에 독립 전쟁이 자유민 대 용병의 싸움이 되었다.'는 점을 줄곧 상기 시켰다.

이들은 자유를 위한 용기, 명예 그리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 할 때 비로소 아메리카인들에게 평화가 찾아 오리라 믿었다.


아메리카인들의 평화 속에 끼지 못했던 흑인 노예들 중 대다수는 군복무를 통해 자유를 얻어 냈다.

다수의 백인들로 구성된 군부대에서는 노예 입대를 반대 했고 군측은 노예들의 주인에게 자유에 대한 비용을 치뤄야 했다.

하지만 남부 주는 북부 주 처럼 노예들이 군에 입대 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복무를 마치면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두려웠지만 결국 길어진 전쟁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들을 수입하는 것을 폐지 하는데 동의 한다.

독립전쟁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던 노예 제도는 결국 연방 의회의 제헌 회의를 통해 차츰 노예제 금지 지역을 넓혀 나가지만 완전한 폐지 흑인 노예 해방은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선언 할 때까지 남부에 지속된다.

독립 전쟁 앞에서 분열보다 통합을 외쳤던 미 대륙 땅의 원래 주인 이였던 인디언들은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전쟁에 합류할 생각이 없었다.

대다수 인디언들은 영국을 지지 했지만 영국을 위해 싸워주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 하던 시기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서쪽 경계를 따라 배치된 영국군이 소수에 불과 했기 때문에 독립 혁명이나 전쟁에 수수 방관 했다.

오랜 세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거래를 통해 영역을 지켰던 인디언들은 때로는 강대국을 피하거나 때로는 부딪치고 있는 강 대국 중 어느 한쪽을 끌어들여 다른 나라로 부터 정치적 피난처를 받아내는 협상 전략을 취했다.

영악했던 영국은 인디언들의 이런 전략을 꿰뚫고 겉으로는 보호자 역할을 하는 척 했다.

1763년 영국은 백인 거주자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을 넘지 못하게 해서 인디언들에게 안전을 보장 해 주었지만 실제로는 모피 무역 항로를 위한 것이였다.

13개 주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미국은 체로키족의 땅을 잠식하며 서서히 압박했고 소규모 인디언 집단들의 분열과 반란을 부추 키는 방식으로 이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았다.

부족이 해체 되고 집과 땅 모두를 잃어 버린 인디언들은 무기를 들고 13개주 곳곳에 출몰해서 미국은 이들을 완전히 통제 하지 못했다.

1780년 5월 찰스턴에서 미 대륙군에 크게 패배한 영국군은 아메리카인을 도운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공격해서 사살 했다.

1782년 11월 30일 파리에서 미 합중국과 영국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 되는 순간에도 미 대륙의 인디언들이 소유한 땅의 소유권은 조약문에 명시 되지 않았다.


조약의 1항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영국 국왕은 상술 한 바와 같이 미합중국이.....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뒤이은 조항에서 미합중국의 북쪽 국경은 오늘날의 미국의 국경에 가까운 경계로 정해졌고 남쪽 국경은 위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 강으로 정해진다.

미합중국(United nations)로 명칭 된 미 대륙은 뉴펀들랜드와 세인트 로렌스에서 기존 어업권은 물론 노바스코샤, 마들렌느 섬, 래브라도 등지에서 무인 항만, 항구 지류에서 물고기를 건조 하고 가공할 자유를 얻는다.

영국과 미 합중국의 채권자들은 영국 화폐 가치에 맞게 전쟁 이전에 계약 된 채권을 전액 회수하는데 아무런 법적 장애를 받지 않는 대신 대륙 회의에서 몰수한 영국인 재산을 돌려주라고 권고 한다.

평화 조약을 통해 미합중국과 영국은 어떤 사람의 재산을 몰수 하거나 고발 하는 일을 더이상 못하게 금지 했다.

영국은 이제 각자의 사정에 맞춰서 미국 땅에서 철수 해야 했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미 합중국은 미시시피 강을 영국측도 자유롭게 지나 다닐 수 있게 허용한다.

1783년 미 합중국은 자신들의 땅을 노리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들도 모든 군사 작전을 중단 하라는 강화 협정에 동의 하게 만든다.

스페인은 여전히 영국과 지브롤터에서 전쟁 중이였기에 미 합중국의 적극 협력과 무역 개방 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 여기고 협력한다.


1783년 9월 3일 최종 평화 조약 항목에 양쪽 국가의 수뇌부들이 동의 서명을 하는 순간 영국군은 미 대륙에 잔류 하고 있던 파견 부대원들을 철수 시켰고 미 13개 주 전역은 독립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열며 승리의 깃발을 세운다.

13개 주 식민지인을 상대로 패배한 영국은 전쟁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문제에 직면한다.

4년동안 이어졌던 미 대륙 전쟁에서 아메리카인들이 하나로 단결해서 짧은 시간 안에 중앙정부와 군대를 조직해서 자신들에게 맞설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영국인들은 별로 없었다.

영국은 기존의 식민지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 하며 제대로 된 작전 수행이나 군사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싸움터로 향했다.

반면 전쟁이란 개념 조차 몰랐던 아메리카인들은 바다 건너 왕을 위한 전쟁이 아닌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전쟁,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싸웠다.

국왕에 복속 되어 충성하는 영국 엘리트 장교들과 돈을 받고 파병한 원정군들과 달리 미 대륙군들은 정규 군을 포함해 자원한 민병대들도 돈을 받고 싸우지 않았다.



총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자신 부터 연공 서열이나 특권 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삶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지켜내는 것이 전쟁의 목표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서는 어느 자리든 명예로운 것이라고 강조 했다.

그의 겸손과 위엄 그리고 모범적인 행동으로 아메리카인들은 국왕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명예로운 전쟁,대의를 위한 싸움으로 임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 세운 영국에 대항해서 수비 위주로 지키는 전쟁을 목표로 한 총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민간인들과 병사들에게 희망을 지속 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유도 했다.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무모할 정도로 용기를 발휘 해서 과감한 행동으로 전투에 맞설 수 있는 지휘관들을 발탁해서 매 진지 마다 훌륭한 기량으로 도망치는 전략을 택했다.

미 대륙군의 강철 같은 모습과 헌신에 감동 받은 아메리카 인들은 영국군에게 협력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1760년 전까지 미국 땅에 거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대영제국의 언어와 혈연으로 이어진 미국 땅에 거주민들에게 서로 간에 주고 받는 이익은 상호적이지 않았고 영국인들의 가치나 국왕의 명은 어떤 식으로 든 공유 되거나 존경 받지 않았다.

이런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 하고 재산을 파손하고 목숨을 빼앗아 간다는 것에 저항하면서 공화주의적 자유를 수호 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총 지휘관이였던 조지 워싱턴은 강철 같은 결연 한 의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채 여러 전투에서 패배 하기도 했지만 결코 전쟁에서 지지 않겠다는 결의로 무장했고 아메리카인들은 워싱턴을 비롯해 군부대를 지지 하고 응원했다.

미 대륙군이 치열한 전투에서 항복하고 평화를 구걸 했다면 미국은 무너졌을 것이다.

영국군은 철수 했고 전쟁은 끝났지만 군사권과 영토권,재정권을 두고 전후의 조정 작업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륙회의는 대륙군의 직접 통제권을 갖고 통일된 군사권을 확보 했지만 13개 주에서 통화 가치를 유지 하고 안정된 재정 정책을 확립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를 해결 하기 위해 대륙 회의는 통화 조정과 관세부과등의 조치를 시도 하지만 각주에서 반발을 하고 혁명을 주도 했던 주요 인사들이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783년 3월 15일 조지 워싱턴은 뉴버그 연설에서 군장교들에게 정부에 어떤 적대적인 군사 행동을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전쟁중에 월급을 받지 못했던 장교들이 쿠테타를 모의 했고 이들과 함께 대륙 회의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세력들을 알아차린 워싱턴은 장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한다.

1783년 12월23일 대륙회의에 나간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대륙군의 지휘권을 조건 없이 반납하며 사령관직을 사직 한다.

조지 워싱턴은 미 합중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기관은 민중의 의견을 대변하는 의회로 군대는 의회에 종속 되어야 미 합중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확립 된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참사와 격변 속에서 미 대륙회의를 존중 하면서 매 전투마다 지혜와 불굴의 정신으로 병사들을 다독이며 4년 동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에 의해 쿠테타 모의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지만 미합중국은 막대한 재정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국가 부채와 부족한 세입으로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군대에 지급할 봉급과 공채 모집소 증권과 외국채의 원금과 이자까지 지불할 비용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전쟁 후 변제 되지 않은 부채의 규모를 산출 하기 불가능한 수준에 올라섰고 영토 구역을 재 정립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 합중국의 대륙회의가 공공 재정을 확립하고 통제 하려면 각 주마다 관세를 부과 할 수 있어야 했다.

1786년까지 9개주가 이에 합의 했지만 나머지 주들은 혹독한 조건을 내세우며 사실상 관세를 거부 했다.


이렇게 혼돈의 재정 상태 시기에 혜성 같이 모습을 드러낸 '로버트 모리스'(1720-1788)으로 전쟁 중 3년 동안 훌륭하게 법안을 처리하고는 홀연히 대륙회의를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거대한 사업을 운영하며 뛰어난 행정 재무 기량을 발휘한 로버트 모리스를 대륙회의는 재무 장관으로 선택하고 재정관리 업무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겨 버린다.

1781년 부터 1784년 11월까지 모리스 재무 장관은 미 합중국의 재정 상대를 크게 확대 시키기 위해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무모하게 추친 해 나갔다.

모든 주가 관세를 승인하도록 주요 핵심 의원들과 육군 장교들을 조종해서 각주의 대표들을 제압하고 위합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대륙회의로 하여금 부채 중 일부를 주 정부가 부담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모리스 재무 장관은 올바른 재정 정책을 수립하는데 대부분 성공했지만 정치적 압박과 싸움에서는 일부 패배 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 하기 위해 입찰 계약 체계를 세우며 연방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영 했지만 이를 뒷 받침 해줄 대륙회의는 무기력했다.

1784년 11월 사임 할 때 까지 모리스 재무장관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드는데 실패했고 1785년 3월 버지니아가 포토맥 강 특권을 얻는 대가로 메릴랜드가 체서피크 만에서 특권을 받아 들인것을 계기로 1786년 1월 주정 부 회의애서 '통상 규제에 관한 단일 체계의 통합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각 주에 회합 초청 연락을 주고 받는다.

1786년 9월 11일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버지니아 주 대표단은 만나 통상 규제에 대해 대략 합의로 보고 1787년 5월 5개 주 만 모인 주 정부 회의 에서 연방에 불어 닥친 긴급 사태에 맞는 연방 정부 구조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책을 고안한다.

메사추세츠주에서 가혹한 재정 정책에 대한 봉기를 들고 일어 난 참전 용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주 의회가 시도 하려는 신용 제도와 조세 구조 개혁에 반대를 한다.

농부들은 이들 세력에 규합해서 지불 능력을 넘어서는 부채와 세금 때문에 재산을 압수 당하지 않기 위해 무장 봉기에 나선다.

여러 달에 걸쳐 반란을 진압 했지만 여론은 봉기를 일으킨 이들을 지지하면서 대륙 회의는 큰 혼란에 빠진다.


1787년 2월 21일에 열린 대륙 회의의 헌법 제정 회의 소집에서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비준이 논의 된다.

1760년대 미 대륙 땅의 엘리트 계층은 대영제국을 상대로 투쟁을 시작하자 아메리카 인들은 순순히 이에 따랐다.

20년 후 피를 흘려서 대영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한 엘리트 계층은 평화 조약 체결에 이어서 헌법 제정을 앞두고 있는 시기에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된 1765년과 제헌 회의가 처음 열렸던 1787년 사이에 미 대륙 땅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1760년대에는 전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다양한 민족들이 미국 땅에 정착 하던 시기로 하나의 국민으로 묶여지지도 않았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1780년대에는 대영제국을 상대로 싸우면서 서서히 하나의 공동체로 뭉치면서 각 주 마다 자체적으로 연방 정부를 구성해서 영국에 대항하는 힘을 키웠고 승리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메리카 인들은 자신들은 신의 섭리에 맞춰 영광스러운 대의를 하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믿으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혁명과 전쟁이 모든 걸 지배했던 1770년대와 1780년대를 지나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된 시대가 도래 하자 미 대륙땅의 아메리카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모든 문제들을 직면해야 했다.

일반 시민들이 전쟁에 적극 참전하고 지휘 하면서 국가와 자신을 위해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774년에 구성된 대륙회의 위원들이 전쟁 기간 동안 각 주의 지도 조직 수내부가 군대를 창설하고 해외로 대사를 보내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작업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통화를 발행하고 자금을 빌려서 각주로 부터 각종 세금과 과세를 징수했지만 통상까지 규제 하지 못했다.

대륙회의는 더 많은 권력과 권한을 갖고 싶었고 주 내부 통치자들은 각주의 시민들이 이들의 권력 남용을 직접 제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붙었다.

1776년 전쟁 당시 대륙 회의는 군대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고 양성하기 위해 각 주마다 땅을 임대 보상으로 지급 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자원과 부의 규모가 큰 메릴랜드 주 부터 자체 주 정부가 헌법을 제정 하면서 강하게 반발한다.

메릴랜드 주의 헌법은 주 정부의 틀을 세워서 권리 장전에 따라 시민을 보호 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고 나머지 주들도 자신들의 인권과 재산을 보호 하기 위해 자체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주 정부들의 이런 움직임에 놀란 대륙 회의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사일러스 딘이 앞장서서 16개월 동안의 토론 끝에 1777년 7월 연합 규약을 채택하고 11월 17일 최종 승인한다.



연합 규약 제2조는 주들을 통제 하는 권력을 얻고자 하는 대륙회의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각 주는 고유의 주권, 자유, 독립, 모든 권력, 사법권을 유지 한다. 이 헌장으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은 권리는 대륙회의의 의원들로 구성된 미합중국에 위임한다.'

이 조항으로 대륙회의는 외교의 권한은 지키며 오로지 그 권한에 의해서 만 전쟁을 수행 할 수 있었고 대륙회의 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은 13개주는 연합 규약을 통과 시켜서 대륙회의를 각 주의 의견을 정취하고 조합하는 연합 회의로 재 탄생 시킨다.

전쟁이 종결 되자 연합 규약 조항에 치명적 결함이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개정작업은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미대륙 13개주의 지역주의는 전쟁 중에 연합 규약을 약화 시켰고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연합 규약 조항에 기반해 통치 하려는 연합회의의 노력을 마비 시켜 버렸다.

영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아메리카인들은 무제한 적인 권력은 언제든지 국민의 자유를 침해 하고 파괴 해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전쟁 후 모든 것이 변해 버린 미국 땅의 주인들은 강력한 군주제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국가들에게 두 번 다시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쪼개진 미 합중국의 주권을 보호 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1787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이미 10년 전에 합의 됐던 연합 규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마련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방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 하면서 본격적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 하게 된다.

이미 국가의 커다란 청사진을 준비해온 버지니아 주 대표단의 주도로 헌법 제정 작업이 시작 되었지만 규모가 큰 주와 작은 주, 동부와 남부 주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겪으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787년 9월 17일 이 회의에 참석한 55명의 대표자들은 치열한 토론을 거쳐서 미국의 뼈대를 이루는 헌법 조항을 만들고 39명이 헌법에 서명하자 이에 완전히 동의 하지 않은 이들도 서명을 하며 서로의 희망을 공유 했다.

9개월에 걸친 헌법 제정 조항에는 1776년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립 혁명의 대 원칙에 기반해 권력을 제한 함으로써 사회와 도덕의 부패를 막아 다수의 폭정 대항을 방지 하기 위함이였다.

헌법 비준을 두고서 연방정부의 강한 권한이 공화국에 필요하다고 본 연방주의자들과 그것이 주와 개인의 권리를 해친다고 본 반 연방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했지만 결국 각 주에서 연방주의자들이 승리 하면서 헌법이 비준됐다.



1789년 6월말 버지나아주가 가장 먼저 비준을 마치자 한 달 뒤 뉴욕도 비준을 승인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는 11월 까지 연방 가입을 보류 하며 헌법 제정 비준 합의를 미루고 로드 아일랜드 주는 다음 해 까지 가입을 보류한다.


1789년 4월 30일 뉴욕 패더럴 홀에서 조지 워싱턴이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혁명 이전에 수면 위로 드러 나지 않았던 것들이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출몰한다.

대영제국은 미 대륙 땅에서 독립 혁명이 발발 하리라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1775년에서 시작된 렉싱턴 전쟁의 불꽃은 쉽게 꺼질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며 혁명의 불을 붙여 버렸고 독립을 향한 열망이 활활 타오르면서 10년동안 극렬 하게 저항하며 싸웠다.

영국은 미국인들과 싸우면서 언젠가 이들이 항복하고 대영제국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침범 당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며 독립을 쟁취 해 버렸다.

독립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 부터 미 대륙의 땅이 앞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 갈지 전혀 관심 조차 없었지만 전쟁이 지속 될 수록 자신들의 재산이 사라지고 가족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혁명은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조국이 지켜야 할 원칙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 나갔다.

혁명과 전쟁의 파고를 지나서 미국인들 스스로 법과 정치 질서와 사상을 수립해나갔고 헌법 제정과 미 합중국을 탄생 시키며 민주주의를 향한 대의의 불씨를 지폈다.

이제 국민이 합의해서 탄생한 미 합중국은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에 표기 된 '자유'가 미국 땅의 모든 인종에게 적용 되는지 살펴 봐야 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평등 하게 태어났다.' 는 조항 속에 흑인 노예들에 자유를 생각한 백인들은 없었다,

권력 계층들은 노예제도 하나 때문에 연방 합의와 비준이 깨져 버리는 게 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연방 수립과 합의의 가치를 우선으로 내세웠다.

대다수의 백인들에게 독립 혁명의 대의는 노예 해방보다 더 중요한 가치 였다.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공표 할 때까지 미국 땅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는 찾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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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3-07 02: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국은 미국이 쉽게 손을 들리라 생각하다니...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야죠 거기에 흑인이 들어가지 않은 건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쟁에 나간 사람은 자유로워지기도 했군요 흑인이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영국과 싸운 뒤 미국이라는 나라를 좋게 하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군요 땅이 넓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이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링컨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더 걸려야 한다니...

scott 님 좋은 소식보다 안 좋은 소식이 많지만 새로운 주말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scott 2022-03-07 23:26   좋아요 3 | URL
이 시기에 흑인은 미대륙땅에서 지주들의 재산 목록 중 하나일뿐이였습니다.
인권이라는 단어 속에 흑인과 인디언은 쉽사리 언급했다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주들이 반대표를 던질지 몰라 100년 후에야 노예 해방을 선언 하게 되죠

희선님 말씀처럼 광활한 땅에 다양한 인종들 하나로 뭉치기 힘든!
링컨의 등장으로 그나마 노예는 해방 되어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울한 일만 가득한 3월!

희선님 한 주 시작 건강하게 ^ㅅ^

미미 2022-03-07 08: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벌써 3권 읽으셨군요!
흑인들에게 총을 쥐어주는것이
그들을 핍박한 만큼이나 두려웠을것 같아요. 링컨이 해방을 시켰음에도 아직까지 완전히 사라지지않은 인종차별을 보면 뿌리깊은 혐오와 갈등이 참 무섭습니다. 끝없는 성찰과 교육이 필요한듯 합니다.
에너지 가득한 월요일 되시길 바래요!🙋‍♀️🍓

scott 2022-03-07 23:30   좋아요 2 | URL
3권! 넘 잼 ㅎ나서
밑 줄! 태그 붙였습니다!(원래 책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읽음, 이 책은 예외)

미 대륙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이 수세기 전 부터 시작 되어서

트럼프 같은 괴물을 우두머리로 올려 놓은 거 같아 이것이 진짜 이들의 속마음인것 같다는 생각이,,,

3권 완독 하고 나니 링컨 등장이 넘 ㅎ 기다려집니다 ㅎㅎㅎ

미미님도 이 책 완독을 향해 🏃‍♂️🏃‍♀️🏃‍♂️🏃‍♀️🏃‍♂️🏃‍♀️

새파랑 2022-03-07 08: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콧님의 엄청난 리뷰를 보니 책을 안 읽어도 읽은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국 역사는 언제나 대단한거 같아요. 저런 어려움속에서 독립도 하고 강대국으로 우뚝선~!! 링컨도 곧 등판하는군요~!!

scott 2022-03-07 23:31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읽고 쓰실 리뷰가 200!ㅎㅎㅎ

링컨 등판 저도 기대 합니다

영화 전기 등으로 줄창 읽었지만
미들코프 교수가 링컨을 어떻게 평가 했는지 넘 ㅎ 궁금!ㅎㅎ

페넬로페 2022-03-07 09: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국 독립전쟁의 스토리가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독립전쟁으로 결국 흑인 노예해방의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고요.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땅이 넓으니 영국이 통제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아요. 힘든 순간에 훌륭한 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 보입니다.
미국인 이야기 완독하신scott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scott 2022-03-07 23:35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 말씀이 맞습니다
독립전쟁으로 인해 지주로 부터 몸값 지불하고 군대에 입대 하게 되었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도망가는 노예들 신체부위 잘라 버리는것 링컨의 노예 해방이후로도 자행 됨 ㅠ.ㅠ

미국이라는 나라(건국 초기)에 현명한 지도자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물론 정치적 이익 계산과 공동체 이익을 앞세운 지극히 현실 주의 자들이였지만..
지리적 지정학적으로 최고의 행운을 가진 땅!ㅎㅎ

이 책 3권이지만 잼 ㅎ나서 완독 하는게 아쉬운 ^ㅅ^

mini74 2022-03-07 0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인들이 느꼈을 자부심, 총에 대한 사랑을 알 것 같아요 스콧님. ~ 진짜 이 두꺼운 책 완독이라니 ! ㅎㅎ 시험기간에 요약이랑 요점정리 잘 한 친구꺼 읽는 기분입니다 ~~ 매점에서 빵이라도 사드려야 되는데 ~ 스콧님 편안한 월요일 보내세요 👍❤️

scott 2022-03-07 23:37   좋아요 3 | URL
그쵸!

총없이는 못 살아갈 민족 같습니다.

이 책 두껍지만 활자가 읽기 편한 크기에 종이질도 쵝오!
도판 지도가 넘 훌륭해서
교과서 였다면
최우등생 될 자신이 ㅎㅎㅎ

미니님 건강 잘 챙기세요
주변 곳곳에 확진자들이 와르륵 ㅠ.ㅠ

그레이스 2022-03-07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짧은 역사에 대한 컴플렉스때문에 영웅주의가 더 부각되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scott님 페이퍼 읽다가 오전 시간을 다 보내겠습니다.
👍👍👍

scott 2022-03-07 23:38   좋아요 3 | URL
슈퍼맨을 창조한 국가 ㅋㅋㅋ

그레이스님 건강 많이 나아지셨나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 가중 되는 3월인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2022-03-07 21: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이퍼가 상당히 긴 편인데, 이 책이 페이지가 많은 책인가봐요.
잘읽었습니다. scott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scott 2022-03-07 23:39   좋아요 3 | URL
3번째가 넘 ㅎ 재밌어서
쓰다보니 이정도 길이가 ㅎㅎㅎ

서니데이님 건강하게 한 주 보내세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