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여석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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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문학책을 안 읽은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역사 아니면 철학, 과학에 머물러 있었다. 언어를 빌려 생각 위에 껴입는 것 말고, 언어 자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의 심장이다.

나의 언어가 무미건조해졌다면 순전히 그것은 문학을 멀리한 까닭이다. 다행히 교양 과학과 교양 철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문학적 수준이 빼어나므로, 최악의 '결핍'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문학 리뷰'를 하나 써보려고, 예전에 읽었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하루 종일 뒤적였다.

의식의 흐름, 늘어지는 장문의 문장, 비타협적인 인생, 과작, 마음에 안 맞으면 원고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끈함 같은 키워드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태생은 우리와 흡사한 점이 있다. 영국이라는 나라 주위에는 스코틀랜드도 있고 아일랜드도 있는데,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주위에 조선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단한 문제 의식을 담은 그의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것을 배척한다. 자신의 문학이 독립운동의 일환인 문화운동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역시 자신의 완성된 문학을 위해 절대 고독의 오지 속으로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크랜리는 다시 정색으로 돌아와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말했다.

“고독, 진정한 고독, 자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무슨 의민지 아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친구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난 해."

스티븐은 말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친구 이상이 될, 아니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가장 고귀하고 진실한 친구 이상이 될 그런 사람마저 갖지 않겠다는 말인가.”

크랜리는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본성 깊이 숨어 있던 어떤 마음의 금선(琴線)을 건드린 듯이 느껴졌다. 이 친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현재의 자기나 장차 되었으면 하는 자기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닐까? 스티븐은 잠자코 얼마 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싸늘한 슬픔이 거기 고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못내 두려워하는 자신의 고독을 말한 것이었다.

“자넨 누구 얘기를 하고 있나?”

스티븐은 이윽고 물었다.

크랜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크랜리는 극중 주인공인 스티븐 디달로스의 동료이자 젊은 시인이다.

주인공 스티븐 디달로스는 장인 다이달로스의 정신적 아들이자, 아일랜드의 민족적 아들이며, 가톨릭의 종교적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껴안는다. 그의 아버지들은 각각이 너무나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의에 맞게 아들을 몹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스티븐이 아일랜드의 독립투사였더라면, 오직 가톨릭을 숭앙하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면 이 이야기의 갈등은 1/10로 확 줄었을 것이다.

크랜리는 별안간 솔직하고 분별 있는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얘기해줘. 내가 말한 것에 조금이라도 놀랐나 말이야.”
“약간은.”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왜 놀랐나? 우리네 종교가 가짜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말이야.”
크랜리는 같은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그런 확신은 전혀 없어.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라기보담이야 하느님의 아들 같지.”
스티븐은 말했다.
“그게 성찬을 받지 않는 이유란 말이지. 즉 거기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니까, 면병은 단순한 빵 조각이 아니라 성자의 살이며 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그래. 그런 느낌도 들고 또 거기 대한 두려움도 있어.”
스티븐은 찬찬히 말했다.
“알겠네.”
스티븐은 크랜리가 그만 따지려 하는 기색을 느끼고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난 두려운 게 많아. 개, 말, 총포, 바다, 뇌우, 기계, 밤의 시골길.”
“그렇다면 빵 한 조각이 뭐가 무서워?”
“그건 아마 내가 무서워한다는 그런 것 뒤에 무슨 악의에 찬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그럴 거야.”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공경하지 않는 영성체를 받으면 로마 가톨릭의 신이 자네에게 벼락을 내리고 지옥에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란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로마 가톨릭의 신은 지금이라도 그쯤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배후에 2천 년의 권위와 숭배를 쌓아올린 상징에 대한 거짓 예배를 함으로써 내 영혼 가운데 일어날 화학 반응이야.”
스티븐은 말했다.
……
“나는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지만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말은 안 했어. 논리적이고 전후 일관한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전후가 일관하지 않은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게 해방이 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 학창 시절,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오면서 문체는 그에 걸맞게 변모한다. 환상과 호기심, 경건함으로 이루어진 유년 시절에 보았던 그림들과 들었던 이야기는 미래를 향한 지표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티븐은 그 지표와 다시 맞닥뜨린다.

욕정과 종교적 금기 사이에 짓눌려 압사의 위기에 처했던 학생 시절의 처참한 몸부림은 아직도 독자인 나를 피로하게 한다. 젊은 시절의 우정과 사랑, 자유와 예술, 사상과 자조의 단계들은 누가 설정하는 것인가. 스티븐은 자신에 맞게 하는데 얼마나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가.

이 책은 여러 개의 문장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한 압축을 시도하였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석서'가 또 이 분량으로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문학적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기회로 삼고, 얼른 '율리시스'로 치닫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문학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과 같으며, 거기에 사는 언어들은 뭐가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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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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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내가 첫 번째로 잡은 심리학 책이다. 이 후로 나의 심리학적 지식은 하나도 덧붙여지지 않았다. 꽤 오래 전부터 심리학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정치제도나 광고 등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의미로 내게도 필요한 지식이었다.

빅터 프랭크의 심리학은 '실존 심리학'이기에 더욱 끌리는 바가 있다. 그는 책의 지면 내내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심리학을 '해부학' 또는 '자동차 부품학' 정도로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요즘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는 것 같다. 심리학의 원리는 '실존과 실존' 혹은 '실존과 세상'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어떤 사람의 행동 양상에는 그것을 이끄는 '기제'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의인화시키는 순간부터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부속품'이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수십 년 동안 치료를 받고도 치유되지 못하는 까닭은 심리 치료사가 환자를 '인격'으로 본 것이 아니라 '환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환부와 환부는 부딪칠 수 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자를 수는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치유한다는 근거 위에 있지만, 프로이트 식으로 따지면 그것은 '지독한 모순'이 된다.

이들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심리를 논하게 된 까닭은 그들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빅터 플랭클은 인생의 경험이나 억압에 상처받은 수준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사를 알 길 없는 '수용소'에서 3년을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힌 것은 생사의 갈림길 안에서 목격한 정서적 공황 상태였을 것이다.

1. 수송은 수용소의 일정한 수의 죄수들을 다른 수용소로 이송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그러면 모두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가스실이 될 것이라고 쉽게 추측을 했다. 병자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자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들은 가스실과 화장터가 설치된 중앙의 대수용소로 옮겨지리라는 것이다. 이 선발 과정은 모든 죄수들 상호간, 혹은 떼를 지은 집단끼리의 제약 없는 싸움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
한 번에 몇 명의 포로가 수송되느냐, 하는 것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수송되는 죄수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번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숫자만 채워지면 되었지, 누가 수송되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2. 나는 발진 티푸스 화자로서 얼마간 오두막집 병실에서 보낸 적이 있다. 티푸스 환자들은 높은 열이 올라 혼수상태에 빠져들곤 했으며, 많은 환자들이 산송장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막 죽고 난 후 곧이어 벌어지는 광경에도 나는 전혀 정서적인 좌절감을 맛보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다. 한 환자가 죽고 난 후 벌어지는 광경은 되풀이되었던 것이다……모두 차례로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시체 곁으로 다가간다. 한 사람이 불결한 감자밥의 찌꺼기를 움켜잡았다. 다른 한 사람은 시체의 종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이 자기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바꾸어 신었다. 세 번째의 사내는 죽은 자의 코트를 자기의 것과 바꾸어 입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진짜 노끈을 약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흐뭇하게 여겼다. 상상이나 해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가!
이 모든 광경을 나는 무관심으로 지켜본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도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모습은 마치 영성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로고데라피'라는 용어는 그가 도입하였는데, '로고스'에는 '의미'와 '진리', '심령'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로고데라피 치료법은 환자의 억압 기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장래'에 충족되어야 할 의미와 임무를 각인시키거나, 현재의 상황을 '환기'하도록 만든다. 장애를 가진 아이와 단 둘이 남아 자살하려는 어머니에게 '그 아이의 생명'의 권리를 주지시키거나, 80세의 부유하지만 자식이 없는 노파라는 설정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또는 30년 동안 정부 관료로 지내면서 억업과 스트레스, 상처로 고통받는 사나이(그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권하는 것은 '직관'에 의지하는 바가 크지만, '같잖은 분석'보다는 환자를 위해 유익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가'처럼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안과의사'처럼 그림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즉 그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소통시켜 그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로고데라피의 미덕이다.

로고데라피가 심령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의미있어 하는 실존적 '열망'이나 '좌절' 등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의식의 뿌리와 원천을 더듬어 올라가는 ‘본능적’인 견지에서 다루려 하지 않고 심령적인 견지에서 진지하고도 열의 있게 다룬다'는 것이 심령적 요법의 핵심이다.

인간은 한정된 지적 능력을 초월할 수 있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절대적인 무의미함을, 그의 무능력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기에 '로고스'는 '논리'를 넘어서 있다.

이처럼 나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심리치료사를 만난다면 나는 스스로 '정신치료 희망자' 그러니까 '정신병자'가 될 용의가 있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마다 따로 출판된 적이 있다. 1부는 그의 '로고데라피' 이론의 풍부한 예시가 될 만한 내용이다. 즉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맞닥뜨리고 견뎌냈던 3년간의 일상이 수록되어 있는 보고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2부와 3부의 내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와 3부는 '로고데라피'에 관한 본격적인 견해가 나와 있다. 그가 30분의1도 안 되는 지독한 생존률의 지옥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수용소 생활을 피해의식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분명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살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한 가지 사실은 내가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헛된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이 말은, 강제수용소에서 최후의 내적 자유는 상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써, 고통과 죽음으로써 증언을 해준 순교자들을 알게 된 이후, 빈번하게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받은 고통은 보람찬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방법은 순수한 내적인 성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빼앗길 수 없는 심령적 자유야말로 삶을 의미 있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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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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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적으로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촌구석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으며, 읽은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골을 떠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논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그 녀석이 주는 책들을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그 중에 이 책이 끼어 있었다.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지만, 굉장히 익숙했다. 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드디어 언어의 옷을 입는 순간이었다.

윌 듀런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서만 백 편 가까이 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서는 철학의 주제들과 철학하기의 방법이 비교적 성실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지도 10년이 다 돼 가지만, 나는 '철학' 을 생각하면서, 번번이 이 책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시대의 철학자들의 저서를 독파해서 그들의 언어로 서술했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인문학적 뻥'에 불과하다. 그러면 세상의 번역가들은 모두 원 저자를 뛰어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좋은 '광고 효과'가 되지 못한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사상과 문체를 현대에 가깝게 재구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원저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윌 듀런트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원저자의 생각을 우리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이야기햇듯, 철학사는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현실의 문제와 철학의 기본적인 물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철학사의 커다란 줄기를 비교적 '극적'으로, 혹은 '의미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는 사상보다 인물이 먼저 나온다. 인물의 성격과 시대, 사고방식이 전면에 내세워지며, 인물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몇 사람의 '뻔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를 일별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철학의 사조를 둘로 딱 가르는 선언이 된다. 즉 근대철학에서 극명하게 나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추상적인 정신을 우위에 두느냐, 실재의 세계를 우위에 두느냐는 선택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종합을 위한 시도는 철학의 가장 진지한 과제가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행복에 대한 외부적 보조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우정이다. 사실상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의보다도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벗인 경우에는 정의는 불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공정한 경우에는 우정은 여전히 혜택이고」 「벗은 두 육체에 깃들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은 많은 벗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소수의 벗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벗이 많은 사람은 벗이 없는 것과 같다.」「완전한 우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벗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중에서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역설적인 화법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그의 정의는 어떤 해설보다 우정의 의미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의 철학자가 원천기술을 내놓으면, 다음 철학자가 그것을 도드라지도록 연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발견은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 - 본문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패스를 받아서 수동적 의지론을 펼친다.

자연은 개인의 의지에 이바지하도록 지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성은, 오직 사물이 의지의 동기가 되는 한에서만 사물을 인식하게 되어 있고 사물의 근본을 캐거나 사물의 참된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 본문 중에서

때문에 천재는 의지가 없는 인식의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론을 펼칠 때의 천재는 아마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 중에 '사과나무 이야기' 말고 익숙한 이야기가 있는데, '지복(至福)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 속에 보상이 대부분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오류와 실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위대한 발견의 핵심 속성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 많은 것을 배우듯이 말이다.

악한 일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있다. -하버트 스펜서, 본문 중에서

철학의 이야기가 즐겁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철학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이 많다. 니체가 특히 그렇다. 니체의 열정적인 삶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피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눈가를 축축하게 했던 이 자극적인 멘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너무나 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니체의 인생은 한 편의 슬프고 격정적인 서사시이기도 하다.

「리스베드」하고 그는 물었다.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느냐?」-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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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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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 <온들의 교장 샌더슨의 연설> 중 일부

 

이 책은 내가 읽은 도킨스의 두 번째 책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1교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쉬는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이나 '눈먼 시계공', 혹은 '조상 이야기' 같은 책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소개글에 '대중을 향한 글'이었다는 문구가 '꽂혀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선정했다.

 

도킨스가 그리는 다윈 같은 사람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서, 메모나 서한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킨스는 다윈의 충실한 탐구자로, 시대와 과학수준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니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대중적 과학자의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오래된 경서인 '대학(大學)'에 주자 서문을 보면, 옛 선현들이 학문을 하는 원리가 기록돼 있다. 즉 몸소 행하고 나머지를 학문에 정진하며(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서민들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 그래서 당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얻어듣지 않을 수 없고, 얻어들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화시킨다. 도킨스가 일상으로 파고든 이유는 그가 믿는 과학관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은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볼 때 아직도 세상에는 비과학적 생각이 비과학적 경로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준거틀을 바탕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그가 논쟁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며, 다소 도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즐거운 삶의 비밀은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데 있다 - 니체(본문 중에서)

 

그것은 그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호감도는 '극단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신념은 '경직성 걷어내기'이다. 대중적 글쓰기 자체도 그렇고, 대중과 잦은 대면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그것은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면을 아끼지 않으며,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유머'는 순전히 그의 의도 안에 있는 내용물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자신이 제안한 단어인 '밈'이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다. 거기서 '바이러스 교회'라는 신흥 종교에서 '성 다윈'을 따르는 '성 도킨스'로 우상화되어 있는(사실은 비꼬는) 말을 보고 흠칫했다고 술회한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료'나, '마음 근육', '애정 어린 냉소'와 같은 독특하면서도 와닿는 언어 사용법은 그의 유쾌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유쾌한 문구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자.

 

125년이 지났으므로,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이론이 그가 원래 제시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에 바이스만주의와 피셔주의와 해밀턴주의를 더한 것이다(거기에 기무라주의와 몇몇 다른 주의들을 덧붙인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이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놀란다. 그는 유전학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서는 심하게 잘못된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정답에 도달하는 기이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의 우리는 신 다윈주의자이겠지만, ‘신’이라는 접두어를 아주 약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주지하듯이 신문에 냈던 칼럼, 책에 대한 서평, 추도사, 서한문 등 저술가가 일상에서 '글을 써야 할' 모든 지면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종교와 권위, 전통과 같은 오래된 문제,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춰내 지속적으로 따져 묻는(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분은 가히 '도발적'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배심제'에 대한 불만도 잔뜩 담아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찰스 왕세자에 대한 풍자도 삼가지 않으며, 자신의 라이벌인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글 속에서 아련한 애정과 열정,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진한 믿음을 볼 수 있다. 과학을 체화해낸 이 용감한 대변인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을 설레설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책을 종합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도달한 자신이 즐겁고 자랑스러웠지만, 머리말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무의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모양이다. 이 책을 처음 잡은 사람은 앞의 머리말도 좋지만, 맨 마지막의 편을 머리말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도킨스에 가장 감사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를 맨 처음 읽고 나서부터 지금가지 '종의 기원'이나 '대담'과 같이 나랑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생물학'(또는 사회생물학)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한 그의 '대중적 글쓰기' 덕분이었다. 이 '밈'은 국내외의 학자들을 심히 자극시킨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학' 서적에 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는가.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21세기는 과연 '생물학의 시대'이다.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학 정신의 '핵심과목(?)'은 타당하고 장구한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말과 글'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 수단을 '생물학' 또는 '과학'에 초점을 맞춰, 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매일같이 고심하고 있는 그는 분명 선각자이거나 선각적 지식인이다. 맹자가 그려낸 '선각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의미의 '선각자' 말이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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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09-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함다^^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과 생물학, 두 이산가족의 상봉의 시작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은 인문학자와 과학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큰 장사꾼은 큰 장사를 한다’는 옛 문헌의 금언을 학문적으로 실천한다면 가장 큰 동그라미를 매일같이 그려나가는 학자들이 두 사람이다. 특히 최재천 선생은 유명한 개미 연구가로 수년 동안 논문 한두 편도 나올 수 없는 ‘느리고 큰’ 분야를 맡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빛을 보기 힘들다. 그가 얼마나 큰 학문의 원을 그려내든 우리들의 척도로 보면 ‘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불만과 ‘간극’이 그의 인문학적 출발점이라고 하면 너무나 거창할까?

도정일 선생은 어떠한가. ‘생물학자와 인문학자의 대화’라는 기획은 그 특성상 생물학자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지만 그는 단순 명쾌한 비유와, 평소에 왕성하게 섭렵한 과학적 지식을 인문학적으로 요리하여 최재천 선생의 과학적 견해를 구수하게 풀어낸다. 이 대담에서 생물학과 인문학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도정일 선생 덕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살아있다’는 말과 같이 사유와 생명은 한 몸과 같았다. 불행히 신의 벌을 받고 둘로 가라진 남자와 여자의 존재와 같이 세분화된 지식의 험로에서 두 분야는 단절되고 만다. 둘은 항상 만나야 하는 사명을 타고 났으며, 그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이유이다. ‘죽은 사유’와 ‘무미건조한 과학’의 토양 위에 서서 서로를 향해 가녀린 손짓을 보낸다. 그것이 ‘대담’이 있게 된 연유이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도정일>


사실 과학과 인문학의 출발점은 다르다. 생물학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생물학이 캐낸 진실 역시 ‘진정한 의미의 진실’이 되기는 힘들다. 그 한계가 분명할수록 발견은 더욱 빛난다. ‘객관적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부분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이나, ‘수학의 불완전성’을 입증한 괴델의 공리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엄밀한 관찰을 통해 ‘엄밀한 과학’의 한계성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변수’들을 일깨우는 것은 인문학과 과학이 힘을 모아 해결할 과제이다.

황우석 사건과 이 책의 발간이 묘하게 겹치면서 우리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 고수했던 ‘절대성’은 ‘엄밀한 과학’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과학의 부재와 인문학의 부재가 겹친 ‘맹신’의 결과였다. 따라서 황우석 사건에 대해 분명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책을 펼쳐들었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아주 분명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야 솔직한 대담이 되기 때문이다.


저도 유구라, 그러니까 유홍준 선생님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그분은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게 다 구라야"라고 밝히고 계속 구라의 길을 가더군요.(하하하) 그런데도 옆에 있는 분들이 전혀 반감을 안 가져요. 그분의 이야기는 재미있구 유익한 구라니까요. 그런데 제가 구라를 치면, 그게 조금만 틀려도 저는 낙마하고 맙니다. <최재천>

- 본문 중에서


모든 것은 생명활동이므로 생물학 안에 있다.


이 책을 일독한 독자라면 읽는 내내 지속적인 긴장감과 빛나는 지성의 합연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서평을 쓰려 했는데, 당혹스럽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까닭은 내용을 도식화하지 않고 이야기의 실타래를 잡고 물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한 부분을 읽거나 나중에 관련 분야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된다면 그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대화’라는 방식은 참으로 놀라운 표현 기법이다. 그 옛날 플라톤 할아버지도 그 효과에 반해 모든 저작을 이 방식으로 쓰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옛날의 대화는 일방적 혹은 산파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대담을 ‘반전 대화’라고 명명하고 싶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분야에 천착해온 두 꾼이 생동감 있고 박력 있게 주고받는('치고 받는'이라고 해야 더 적절하리라) 이야기에는 불꽃 같이 강렬하게 뇌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단어로 심오한 견해를 펼쳐내는 추임새는 감동 그 자체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최재천 선생을 칭찬하고 싶다.


섬들이 천천히 연결되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부 하나의 대륙으로 뭉쳐져버린 느낌입니다.

- 본문 중에서


최재천 선생의 말투가 대개 위와 같은데, 위의 말은 거대 경제 권력이 세계의 다양성을 무참히 짓밟는 비생물학적 경제 현상을 빗댄 표현이다. 이보다 더 향 깊은 부분도 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거의 1년 내내 저녁 뉴스 시간을 달군 ‘아버지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젊었을 때는 돈도 없고 장래도 불투명해 낳은 아이를 입양시켰으나 나중에 여유가 되어 아이를 다시 찾겠다고 법정까지 간 그 사건은 결국 ‘생물학적 아버지’인 ‘친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최재천 선생은 그 아버지에게 ‘생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기른 아버지도 충분히 ‘생물학적’이라는 것이다. 낳은 아버지는 ‘유전학적’이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즉 ‘생물학’이라는 것은 ‘유전’ 못지 않게 ‘환경’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사회’나 ‘문화’가 될 수 있다. 만약 책의 내용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너무 쉽게 다가가려는 사람(이런 사람은 없겠지만)이 있다면 쉬운 말 속에 함유하는 뜻 역시 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판사인 ‘휴머니스트’의 교열부 직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적인 일이지만, 논술 강의를 위해서 ‘전문가들의 오탈자 사례’를 채집할 목적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공교롭게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책들을 최근 자주 접하게 된다. 나의 눈은 ‘띄어쓰기, 오탈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대담’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오탈자라고는 단지 503쪽 최재천 선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운명(殞命)을 달리하다’(‘유명(幽冥)을 달리하다’라고 써야 함)가 전부이다. 지난 번 ‘세계사’에도 감탄했지만,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은 ‘완결된 텍스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셍떽쥐베리의 말은 분명 옳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과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인문학과 생물학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학문은 여기저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유한 분야의 향기를 자꾸 퍼뜨리고 색깔을 자꾸 겹쳐야 천의 향기와 아름다운 그림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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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0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정리가 안되더라구요.. 너무나 풍성해서...
꼼꼼히 읽으셨네요..

승주나무 2006-01-0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개발한 독서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손'으로 읽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눈'으로도 읽고 '손'으로도 읽습니다. 아마 그 점이 '꼼꼼하게' 보였던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

라주미힌 2006-01-0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으로 읽는다? 혹시 받아 적기? 어떻게 하시는데요?

승주나무 2006-01-04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워드가 거의 단거리 선수 수준이거든요. 맨 첨 형광펜으로 그은 부분을 워드로 다시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읽었던 부분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고 생각이 정리가 되는 거죠. 시간은 걸리지만, '책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압축독서'라는 콘텐츠도 만들었죠. 히히^^
http://blog.naver.com/dajak97
여기에 제가 만들어 놓은 파일(한글 파일)이 많아요^^

2006-01-07 0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1-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주의 리뷰 되셨네요... 역시!!!
축하합니당. ㅎㅎ

승주나무 2006-01-0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감사합니다. 요즘 사고 싶은 책에 비해 예산이 형편없이 부족했는데, 조금의 도움은 되겠네요. 이로서 2번째 선정입니다. 자꾸 동기가 되어서 계속 읽고 쓰게 돼요. 행복합니다.^^

승주나무 2006-01-1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65쪽의 두 번째 단락 "계몽철학자들이 생각한 '지식과 판단의 주인'로서의"<도정일>도 새롭게 발견된 오탈자네요. "'지식과 판단의 주인'으로서의"라고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