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과학 교과서 1 - 과학의 개념과 원리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김태일 외 지음, 통합과학 대안교과서 편찬위원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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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교과서에서 가출했다.


과학*은 내게 물었다.

“왜 너는 자꾸 형이상학적인 질문만 하니?”


나는 과학*이 레고 조각과 조각을 끼워 맞춘 플라스틱 탑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레고 조각 하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조각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나를 강하게 질타했다. 과학*과 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공식 앞에 굴복하지 않을수록 나는 제도권에서 멀어져갔으며, ‘과학*’은 투명한 유리병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과학을 그리워했다.


‘살아있는 과학교과서-1’(이하 과학교과서)은 제도권에서 잠시 나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다. 나무 그늘 아래서는 오붓하게, 기댈 곳 없는 지하철에서는 위태롭게, 야구 경기장에서는 흥미롭게. 만약에 내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다는 태세다.

“과학교과서가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국정 교과서’는 할 말이 얼마나 많은가.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진 분량의 이야기를 전부 전달해야 하므로 찬찬히 일상을 과학적으로 음미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통합교과 패러다임으로 진입하려는 요즘은 이런 제도권 과학이 학생들에게 “과학을 일상의 소재로 적용시켜 이해할 수 없겠느냐”며 타박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평가표를 들고 성적을 매기겠다고 한다.


과학을 쉽고 흥미롭게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과학 교과서의 개념 전체를 일상의 소재와 상상력을 끌어다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도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장면이다. ‘과학교과서 1’에서는 과학의 기본 개념을 그림과 사진, 실험과 역사 이야기 등을 통해 다채롭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각 장마다 간단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몹시 피곤하시다. ”나도 일이 있어 어머니를 따라 시내에 나갔다.“ 등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일’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일은 과학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일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

- 본문 중에서


글쓴이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과연 우리가 배운 지식이 어디에 소용이 되며, 왜 알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과학의 시작’으로 보도록 배려한 점이다. 과학이든 수학이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은 머리와 꼬리가 잘린 ‘무생물 지식’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의 주제를 교과서는 철저히 배제해 왔던 것이다. 글쓴이들의 고민은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넓은 세상 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으며, ‘과학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만 장을 시작하며 던지는 화두 중 틀에 맞춘 듯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던 점과 지식 전달의 대의 아래 이야기를 성급하게 닫아버린 점은 무척 아쉽다. 집필 후기에서 필자 중 한 분은 ‘부족한 글발과 철학’을 통탄하기도 하였지만.


과학자는 두 개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상적 상상력이고 하나는 과학적 상상력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1/10,000의 편린으로 그 대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문학가 못지않은 ‘위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학교과서 1’ 안에서 철학이 빛나는 부분은 아마 아래의 구절이 아니었나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들은 수소ㆍ산소ㆍ탄소ㆍ질소ㆍ칼슘 등으로 천체 및 우주를 구성하는 성분 원소들과 같다. 결국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은 우주로부터 온 것이다. 즉 천체의 물질과 인간의 몸은 같다.”

- 본문 중에서


철학이 과학을 온전하게 감싸고 과학이 그 틀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정렬적인 그림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듯하여 행복했다.



※ 과학*은 ‘과학교과서’를 말한다. 그 당시는 과학교과서가 내가 만날 수 있는 과학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이 글에서 ‘과학’이란 말 자체가 분열과 모순을 보이는 데, 그것은 의도한 바이다. 그리고 263쪽의 '1.6m'는 마땅히 '1.6mm'가 되어야 할 것 같으니, 확인하고 재판에 반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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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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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우리에게 참으로 친근하다.
친근하다는 것은 가까이서 오래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미친다는 점에서 친근하다.

인쇄기가 없었을 때도 책은 있었다. 책의 발달은 인류 의지의 표현이다. 앎에 대한 전일한 의지가 인쇄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어떤 이에게는 굴레이기도 했다. 나도 책을 베껴봐서 안다. 예전에 에티카를 읽을 때 감명깊은 구절을 노트에 정서로 베꼈는데, 덕분에 한 달이 가도록 다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워드 속도가 엄청 빨라진지도 모르겠다. 
베끼는 사람, 채색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틀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개 책의 지면을 이루는 그림과 장식, 쪽표시공간, 글자 장식 등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성스러운 성서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 안에서 장인들은 예술적 혼을 불살랐다. 그리고 책장을 돋보이게 하는 삽화와 이니셜, 장식 등은 중세만의 독특한 정취가 있다. 개구리가 뱀을 삼킨 그림을 누가 'R'로 생각하겠는가.

책이 귀한 만큼 애착도 집착도 심했다. 오죽하면 책주인이 젊은 독자에게 이와 같은 독설을 퍼부었을까.

손톱은 시꺼멓고 향수는커녕 쉬어터진 구린내를 풍기는 손으로 맘에 드는 대목에는 자국까지 내기 일쑤이다! 게다가 자기 기억을 붙들 수 없는 것을 표시한답시고, 여기저기 수북이 지푸라기를 꽂아놓는다. 책으로서는 소화시킬 도리가 없는 이 지푸라기들을 아무도 다시 뽑아버리는 이가 없으니, 그렇게 잔뜩 꽂힌ㅁ 짚북데기가 책의 아귀를 어긋나게 하고 결국에는 썩히기 시작한다.  - 67쪽

정말 경험에서 우러난 '불평'이다.
이 책은 인쇄를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사람들이 책을 읽기 위해, 책을 만들기 위해, 책을 꾸미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이 기록돼 있다. 이 시절의 책은 그래도 행복했을 것 같다. 쌓여서 버려지는 책은 없었을 테니까. 
 전문 필경사가 온종일 책에 매달려 베껴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밖에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 대주교가 부임한 교회 도서관에 책이 달랑 5권밖에 없어서 필사실을 따로 만들고 평생 책을 베꼈지만, 20년이 흘러 퇴임하기까지 66권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오늘날과의 간극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 오랜 옛날 지식이 독점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푸념만 책장 언저리를 오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텍스트와 그림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준 점과 극적 서술이나 유머가 없어서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말 책을 사랑하고 책의 체취를 구석구석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걸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혹시 책을 쓰게 될 책을 위한 교훈을 얻었다.

책은 보고서가 아니다. 어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 읽힐 책이라면 보고서보다는 에세이와 같은 성격이어야 할 것 같다. 책의 제작 과정, 독자들, 필경사들, 채색사 들에 대한 일관된 해설은 백과사전을 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볼 때는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 이 책에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자료뿐만 아니라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그 당시의 이야기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나의 시대와 그 시대를 즐겁게 비교하며 책을 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에 의미를 둔다면 충분히 권장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평생 보지 못할 책이 있다. 지금도 채색가의 혼이 살아숨쉬는 책의 한 페이지는 몇 권의 책보다 가치가 있다. 책을 베끼고 꾸미는 것은 단순노동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은 비록 몇 권의 책으로 압축되지만, 그들은 진정 '세상'이라는 책에 글을 채워넣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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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리하시네요. 처음에 별 셋이라 너무 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이 책에 너무 많이 흥분을 했었나 봅니다. 하나 깍을까요? 흐흐.

승주나무 2006-03-2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세개와 네 개 사이에서 고민했답니다. 끝내 감흥을 얻을 수 없어서.. 네 개는 줄 수 없었죠^^
 
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 하늘연못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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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의 공포를 기억하는가. 검은 고양이의 공포는 연령대에 따라 최소한 두 가지의 장면으로 압축된다.

어린 시절의 공포는 '벽을 허물자' 아내의 시체 위에서 기분나쁜 증오의 눈빛으로 주인공을 대하며 음산한 비명을 지르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다. 그것만으로도 검은 고양이는 추리와 공포의 대명사가 되기 충분하지만, 에드거 앨런 포를 '진정한 공포의 대명사'로 만든 '공포의 장면'은 성인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주인은 불안하고 난폭하며 결여된 듯한 현대인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이 때의 난폭함은 피상적으로 드러난 난폭함이 아니라, 은밀히 감춰진 난폭함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치욕스럽고 고양이가 두렵다. 고양이가 낱낱이 자신의 치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두렵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사정을 알았을 때는 고양이가 아니라 아내를, 그것도 사소한 일인냥 도끼로 베어버린 행동들이 자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포스럽다. 마치 내가 달려오는 지하철을 향해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 화가 단단히 난다면 상대방의 사지를 잘라 '파고'에서와 같이 분쇄기로 갈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현대인은 치욕과 분노 등 전반적인 감정을 다루지 못한다. 스트레스로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도 대개는 그렇다. 포의 시대에도 그랬으며 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보들레르는 환상적인 시를 썼지만, 환상적인 소설을 무엇보다 쓰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 포가 있음을 알고 '소설'을 포기했다. 그 대신 포의 소설을 줄기차게 번역해서 자국 프랑스에 소개했다. 이것이 포와 보들레르가 함께 '뜨게 된' 이유이다. 그렇지만, 포는 시도 잘 쓴다.

포가 공포만 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의 '포 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추리'와 '환상'이다.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즈는 모두 포의 추리소설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황금곤충'은 해적의 암호를 찾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낸 작품이며, 더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 역시 '역발상'을 이용한 추리소설이다.

하늘연못에서 나온 '우울과 몽상'은 포의 소설을 모두 옮겨놓은 역작으로 환상, 풍자, 추리, 공포라는 네 개의 카테고리로 작품은 분류했는데, 비교적 적절한 분류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포의 영어판 문고본 작품집을 조금 본 적이 있었는데, 추리소설을 원서로 읽으면 그 재미와 공포에 취해 영어공부가 훨씬 잘 된다는 속설이 있다.

플라톤은 그의 모든 철학을 '윤리학'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중국의 경서들도 '실천'으로 수렴하고 있다. 포의 환상적인 이야기들도 모두 '현실'로 수렴되기 때문에 '진정한 환상'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도 끊임없이 현실과 현재와 조우할 수 있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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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9
존 워리 지음, 임웅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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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 영웅전,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고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war'자가 들어간 것으로 봐서 이 책과 매우 닮았다)의 ‘서양고대 전쟁사 박물관(이하 ’전쟁사 박물관‘)’이 어떤 특성이 있으며, 어떤 위치에 있어야 어울리는지를 보고자 할 때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비교하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전쟁사 박물관’을 두 단어로 이야기하면 ‘엄밀’과 ‘종합’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학문이라면 가지고 싶어할 만한 미덕이지만, ‘학문’을 넘어 ‘교양’으로까지 가고자 한다면 모자란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은 ‘논문’에 가깝다. 따라서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지루하고, 난해할 수 있다. 내가 이것을 문제삼는 이유는 이 책이 ‘연구자’들을 향해서 작성되었는가에 상관없이 ‘일반 독자들’을 향해서 ‘교양’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자란 감을 약간의 ‘비판’과 함께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자도 후기에 밝혔듯이 이 책은 “전쟁이 일어났던 이유에 대한 정치 사회적 메커니즘이 특별히 고찰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자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다른 미덕들에 의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것”으로 ‘확신’까지 하고 있다. 과연 그 ‘확신’이 우리에게 납득할 만한 ‘확신’이 될까. 연구자들이 아닌 우리 일반 독자들은 전쟁이 일어났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은 물론 ‘극적 전개’에 관심이 많다. 인간이 태어나서 서로 관계를 맺고 다투는 과정 안에 어떤 ‘인생의 묘’를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이런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권하고 싶다. ‘전쟁사 박물관’은 이 점에 대해서는 별로 기여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연구자적 성실성’이 드러나 있다. 이것 또한 한편으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책 안에서 ‘극적 전개를 통한 인생의 묘’를 얻고 싶기도 하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를 특히 듣고 싶다. 당대에 농민이나 일꾼들이 나누던 대화나 생활 양식, 풍습과 같은 일상의 소재가 ‘전쟁’이라는 극적 장치를 만나 아우러지는 ‘향연’이 특히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전쟁’과 관련된 각국의 정치 상황이나 군사력, 작전, 무기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학자적 성실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 역시 ‘연구자’들을 위한 배려이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인정머리 없는’ 모습일 것이다. 이 점이 아쉬운 독자라면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권한다. 이 책은 헤로도토스의 역마살과 ‘여행가 본능’에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내용을 수필처럼 편안하게 서술한 ‘기행문’에 가깝다. 따라서 체계와 엄밀성은 부족하지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고대사에는 이런 모습만 있지는 않다. 당대에는 헤로도토스의 이런 서술 방식에 불만을 품은 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투키디데스로서 ‘페리클레스’의 연적이며,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서술한 역사가이다. 제목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서술방식 자체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의도에 의해 서술되었다. 따라서 ‘학문적 엄밀성’도 갖추고 있다. ‘전쟁사 박물관’은 아마도 이 책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일반 독자가 ‘전쟁사 박물관’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달래기 위해서는 위에 소개한 책들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책을 활용하는 방법을 하나 더 권한다. 처음에는 무기나 전략 등을 세세하게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전체적인 서술을 따라가다가 나중에 고대사를 정리하거나 특정 시대를 보고자 할 때 다른 서적과 함께 그 부분의 항목을 살펴보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한꺼번에 일독하기보다는 한 장 한 장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독서법이라 하겠다. 이 책은 독특한 ‘엄밀성’을 통해 흩어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전쟁’이라는 주제로 종합해낸 역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엄밀’과 ‘종합’은 아무 책에서나 드러나는 미덕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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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1 - 1부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원작, 요코야마 미쯔데루 극화,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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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헌책방에 들락날락거릴 때는 항상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 질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고, 하나는 '대망'이었다. 나는 하나의 '질'을 보고 있었고, 드디어 그것을 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말이다.

대망은 여러 번 들어오던 이야기이다. 그 분량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만화책으로 나왔다니, 보지 않을 수 있나. 서평단을 신청했더니, 1부 1권이 왔다. 아무리 서평을 쓴다는 조건으로 책을 받지만 만화책 한 권 가지고 '대망'의 '대의'를 가늠하기는 힘들지 않나?

그래서 '1권 어치'만 서평을 쓰려고 한다. 애초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을 '만화책'에만 의지해서 '완결성'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택도 없는 일'이니만큼, 내가 애써 '1권 어치'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내게서 나오는 글은 그것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남는 것은 '푸념'밖에 없겠지.

이야기를 꽉 누르는 것은 '난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숙명론자들이다. 물론 이것은 '동트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영웅'이 나타나면 '현실'이 될 것이다.

대개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가장 어려운 난세'가 되기 마련이다. 난세는 대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그 무게감에 '나의 존재'마저 위축된다.

이 책을 읽으면 '난세'를 견디는 두 가지 길을 알게 된다.
하나는 난세의 역풍에 마냥 휩쓸리지 않고, '무게중심'을 찾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얄팍한 계략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아. 참된 진실을 가지고 양가를 결합시켜 신불의 뜻에 부응하는 승리를 거두리라 생각했어."

가리야 성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가 자신의 딸 오다이를 적장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내며 되뇌이는 말이다. 그의 아들과 다른 적들은 다다마사가 오직 정략적인 의도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그것이 의심이 아니라 '정의'였다는 사실은 곧 드러난다.

이것이 난세를 견디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난세를 견디는 두 번째 방식은 아직 책에 아주 조금 드러난다.
'난세' 안으로 뛰어들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러한 인물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복합적인 기술과 운이 필요하다. 첫 번째 미덕인 '무게중심'을 포함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이 되게 하는 법'에 대한 처세술이 닦여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러 꼼수를 멀리 하고 '단순'하고 '신의' 있고 '선 굵은' 행동들이 그의 '영웅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그 차이점은 명백하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한두 명 정도의 영웅을 중심으로 모두 의지하는 형국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여러 영웅이 겨루는 형국이다. 때문에 중국의 전국시대가 볼 거리는 더 많다.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는 담박한 맛보다는 '복잡하고 조잡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반일감정에서 나오는 심사는 아니다. 머리로 하는 수싸움이 너무 잦아 '휴머니즘'의 서사시가 흘러나올 구멍이 없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이 책은 원 저작과 함께 보는 것도 무척 좋겠지만, 사마천의 사기열전이나 종횡가들이 활약했던 시대를 그린 '전국책'과 함께 보면 재미와 깊이가 더할 것 같다. 우리도 지금 '난세'이지 않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13권
제1부
1권 '동트기 전'
2권 '이별'
3권 '주인없는 성'
4권 '발걸음의 조절'
5권 '형제의 술잔'

제2부
6권 '운명의 별자리'
7권 '도리이 스네에몬'
8권 '낙일(落日) 전후'
9권 '정략'

제3부
10권 '인간으로서의 탑'
11권 '돌풍전야'
12권 '반쪽만 남은 오동잎'
13권 '전야(前夜)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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