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한민국 부모님과 선생님께 드리는 글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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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문 씨의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린이를 피해자의 견지에 가둬놓은 전형적인 어른의 시각입니다.

2. 어린이를 피해자로 봤기 때문에 어른을 가해자로 보는 구도에 익숙한 서술입니다. 어린이를 놓친 것처럼 어른도 놓치고 있습니다. 어른을 잡는 방법으로는 이야기를 나아가게 하기 어렵습니다.

3. 때문에 대한민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저널리즘으로서 충실하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자 한계입니다.

4. 중간에 등장하는 놀이 추억과 놀이 탐험은 비교적 소상합니다. 놀이의 철학적인 부분을 비교적 깊게 보여준다는 점이 이 책을 저널리즘으로만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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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로 중용을 풀다 이한우의 사서삼경 2
이한우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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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해방 - 주자학의 세계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자(朱子, 주희(朱熹 ; 1130~1200)의 존칭)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주희(朱熹)는 중국 남송 시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는데 성리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의 불후의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희가 맹자를 거의 천 년 만에 복권시킨 사실은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맹자는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등 권력자가 불편할 만한 말을 많이 남긴 죄로 왕들에게 금서로 낙인 찍힌 이래 주희에게 복권되기 전까지 1000년 가깐운 세월 동안 묻혀 있었다. 주희가 완성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주석서 사서집주는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이기도 했다.

나는 운 좋게 한학자 선생님을 만나 3년간 사서를 교육받았다. 교재는 주자집주였다. 동양철학 초년에 공자와 맹자를 직접 원문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주희의 집주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주자학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0년 정도 주자의 정신세계에 머물러 있다 보니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 빠져들수록 주자에 대한 내적 저항심이 커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자를 건너 뛰거나 무시하는 전략밖에 없었다. 주자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주자를 넘어서야 한다. 즉, 주자가 펼친 철학 세계를 스스로 깨부수고 그 자리에 나의 철학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러던 차에 이한우 기자의 <논어로 중용을 풀다>(해냄)을 접하게 되었다. 이한우 기자는 학부 때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철학으로 전공했다. 현재는 <조선일보>의 문화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저자는 최근 조선사를 되돌아보며 왕들의 고뇌와 정신을 서술한 '군주열전'과 사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야심차게 실천하며 <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의 사서(四書 :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저자가 사서 중에서도 '논어'를 축으로 삼은 까닭은 사서 전체가 공자에 대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서에는 공자가 들어 있지 않다. 

다만 공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를 열거하면 논어, 중용, 대학, 맹자 순서이다. 공교롭게도 저자의 집필 순서도 <논어로 논어를 풀다>(2012.5), <논어로 중용을 풀다>(2013.2) 순이다. 나머지 두 책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주자는 네 권의 책 다음으로 공자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네 권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서술했으므로 공자와 가장 근접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공자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피비린내 나는 학문과 철학의 전쟁 이야기다. 내가 무려 10년 동안이나 주자의 통치하에 살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애로사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철학에 대한 정신적 자유가 묶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학문은 권력이며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치르는 전쟁이다. 11세기 중국의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주자는 성리학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강력한 '루키'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용어는 '관학(官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생 동안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고 말년에 고위직에서 파문되고 중상모략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학문체계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의 도덕원칙으로 삼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저자는 "주희는 철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다"라고 주장한다. 나를 일깨운 한마디다. 한 대목을 소개한다.

<논어>에 등장하는 지(知/智)는 대부분 사람을 아는 것[知人]으로 풀이해야만 문장의 생생한 의미와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곤 했다. 그런데 주희의 집주는 오히려 지를 지인(知人)으로 해석하는 데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그의 집주에 의존해 <논어>를 읽어갈 경우 <논어>는 한 덩어리의 책이 아니라 듬성듬성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잠언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 <논어로 중용을 풀다>, 259쪽

저자는 주희에 대한 비판의 결론에 "주희의 도움을 받되 끊임없이 그의 집주를 의심해 가며 공자의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말을 듣기 전에 나는 막연하게 주희의 주석을 경계하기 시작해 아예 사서의 원문만 반복해서 보곤 했다. 저자의 말을 통해 비로소 주희에 대한 내 입장이 맑아졌고 나는 해방감을 맛봤다.

두 번째 해방 - 현재성에 대한 치열한 접근

동양철학이나 동양 고전의 번역문을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 '당대성'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당대의 일을 재단하지 말라는 내용이 골자다. 사서뿐 아니라 삼국지 같은 고전문학의 번역문에도 이런 사고방식이 보이는데,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따지고 보면 주자 역시 남송의 사고방식으로 공자를 재단하지 않았는가? 

<논어로 중용을 풀다>를 읽기 시작할 때는 저자가 서양철학을 근거로 동양학을 지나치게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 역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저수지 가운데 이상한 둑을 설치해 서로 흐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동양과 서양의 모든 학문과 철학, 지적 결실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쳐질 제물이자 영양분이다. 이런 관점으로 동양철학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자를 피해 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자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신성시했던 것 같다.

주자가 철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라는 주장은 그 동안 품었던 모든 심증들을 정리해 주는 명쾌한 말이다. 주자뿐만 아니라 공자와 장자를 제외한 중국의 모든 철학자들은 필연적으로 주석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는 스승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금기하는 문화가 있다. 이의제기를 하면 이단으로 치부하여 파문하는데, 파문이란 생계의 끊김, 즉 사실상 '지적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처형'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강경한 압력 속에서 동양의 지성인들 사이에 자동적으로 '아류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현대의 지성인들도 '비판정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서양철학을 주무기로 동양철학을 다시 바라보는 저자의 태도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주자는 <대학>의 서문에서 불교 등을 비판하며 '허무적멸지교'(異端虛無寂滅之敎)라는 용어를 썼다. 하지만 주자가 사용하는 개념은 불교에서 차용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상 불교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타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스승들에게도 적용했어야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주석가이거나 언어학자로 봄이 적당하다.

저자의 책을 읽고 저자를 직접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저자가 한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말은 "동양철학이야말로 심리학 중에서 심리학이다"는 말이다. 동양철학을 대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무척 현대적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공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저자는 자신이 닦은 모든 학문과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서양철학은 아주 중요한 자원이었다.

나는 저자로 인해서 주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결국 저자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해야겠다는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있는 임시 둑이 무너졌다는 것은 앞으로 읽고 공부해야 할 철학의 영역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로부터 받은 두 가지 도움은 어쩌면 거대한 정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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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케스트라 - 리처드 용재 오닐과 함께한 1년의 기적
이보영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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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XX, 다문화 주제에."

'다문화'에 대해서 보통 사람 만큼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 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비속어로 쓰인다고 한다. "이 XX, 다문화 주제에!"라는 말 속에는 사용되는 '다문화'는 조롱과 멸시, 인종차별을 상징한다. 

마치 '민주화'라는 용어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이 언어도 폭력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나의 언어, 그것도 숭고한 가치가 담긴 언어가 폭력의 수단이 되고 상처를 주는 말로 전락한다면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을까? 말을 악용하는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언중들이 말이 병들도록 방치했을 때 언어가 병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다문화'를 욕설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다문화는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된 만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에 따르면 다문화 결혼이 줄고 이혼은 늘었다. 2007년 8294건이던 국제이혼 건수는 지난해 1만887건으로 급증했다. 이미 2011년 우리나라 이혼부부 10쌍 중 1쌍 이상이 다문화 가정이다. 

지인을 통해서 다문화 가족의 현실을 듣게 되었다. 아프리카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피신한 엄마와 아이가 적지 않은데 가족이 위태로울 정도로 소원해졌다고 한다. 아이들은 한국말을 자기 나라 말보다 더 잘 하는데,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부모님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들은 한국말도, 모국어도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국이 외국인에 대해서 썩 성숙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차별을 당하고,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아이들과의 관계도 악화되기 때문에 무척 안타까웠다. 

어떤 변화든 사회적 인식이 성숙했을 때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변화 이전보다 더 상황이 악화된다. '다문화'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혼자 냉가슴을 앓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책이 한 권 도착했다.

<안녕?! 오케스트라>(이담북스)는 2012년 MBC 대기획 프로젝트의 제목인 프로그램과 같은 제목의 책이다. 열 개의 나라에서 찾아온 9~14세의 아이들로 구성한 오케스트라의 좌충우돌 스토리다. 

이 책은 재기발랄하며 성숙하다. 총천연색 아이들의 색깔을 잘 살려내 독자들에게 소개하니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기분 좋아지는 장면은 '릿타'라는 아이가 자연의 박자를 세는 장면이다. "물소리는 제가 들어서 세어 봤는데 네 박자 같아요. 바람이 나뭇잎에 붙어서 나는 소리는 세 박자. 그런 느낌이에요"라는 표현을 아이들에게 듣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기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재기발랄하다. 상처란 위대함의 발판이 되며 상처와 상처가 만나 위로가 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성숙하다. 재기발랄하고 성숙한 이야기가 모여서 조화를 이룬 음악 소리가 나는 책이 <안녕?! 오케스트라>다. 

"넘 감동!을 준 책!"

<안녕?! 오케스트라>를 함께 읽은 네티즌들은 격한 감격을 표현했다. 양희경씨는 "넘 감동!을 준 책! 단숨에 쭈우욱! 여러번 울컥! 울먹! 주루룩 했습니다"라며 느낌표를 무려 다섯 개를 달았다. 격한 감동이 전해졌다. 조향미씨는 책을 받자마자 펼쳤는데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아예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찾아서 다시 듣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마태호씨도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김영헌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따뜻해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민규씨는 '예쁘다'는 말로 이 책을 정리했지만, 그 중에서도 오디션 과정이 가장 예뻤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현악기를 쥘 수 있는 팔 길이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발되었다. 오디션의 탈락 여부가 음악적 재능도 열정도 아닌, 최소한의 신체적 조건이었던 셈이다." - <안녕?! 오케스트라> 31쪽

이민규씨는 "정말 생각만해도 흐믓한 오디션이 저에게 감동을 주고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네요"라는 말로 코멘트를 마무리했다. 나는 특히 <반짝 반짝 작은 별>이라는 자장가를 여러 나라 말로 들려주는 모습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연주회에서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 부모님이 되는 상상을 해봤다. 이 책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인 콩고 출신 다니엘을 직접 가르쳤던 선생님도 댓글 놀이에 참여한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 제가 한글을 가르쳤던 콩고 여성의 아이(다니엘)이 나와서 감회가 새롭더군요!!"(박진숙씨)

<안녕?!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부분은 바로 다니엘이 남긴 말이었다. 다니엘의 말을 접하고 슬펐다. 어른보다 더 조숙한 생각이 담긴 말을 엄숙하게 하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싫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는 것은 욕, 놀림, 차별입니다. 첫째, 욕이 없는 세상. 둘째, 놀림이 없는 세상. 셋째, 차별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다니엘) ㅡ 같은 책, 54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상처 입었을 것

<안녕?! 오케스트라>에 그려진 다문화 아이들의 현실을 처음 접하고 놀란 독자들도 많았다. 권기성씨는 "아이들의 면면을 보면서 아이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소외되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마태호씨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성장과정을 오케스트라의 아이들에 비유해 독특하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케냐 출신의 유학생이 한국 여성과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이후에 케냐 출신의 유학생은 이혼을 하고 케냐로 돌아갔을때, 그 아이가 40대에 한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그 아이는 한국에서 자라면서 인터냇 댓글들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태호 씨)

다니엘의 선생님 박진숙씨는 "욕없는 세상, 놀림없는 세상, 차별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슴에 와 꽂히더군요"라고 말했다. 책의 후반부에는 방송이 나가고 나서의 반응들이 나와 있었는데, 우는 장면을 재차 편집해서 다시 놀림의 도구로 이용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소개돼 있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또 다시 막막해졌다. 

<안녕?! 오케스트라>의 독서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의 강점을 생각해 보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보다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다문화 문제의 중요성도 역설하지 않는다. 차분히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하고 연주를 할 뿐이다. 

아이들이 받았던 폭력과 차별을 비판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긍정이다. 남들과 다르게 태어난 나의 모습을 긍정하고, 내가 받은 상처 또한 긍정한다. 이 모든 것을 긍정의 에너지로 만들어 돌려준다. 용재 오닐의 철학은 놀라웠고, 아이들은 그런 용재 오닐의 모습을 이해했다. 나도 그렇다. 

"제게 일어났던 모든 안 좋은 과거를 지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안 지울 겁니다. 아이들이 겪은 고난을 들여다보면 모두 부정적인 것들이에요. 하지만 부정적인 일들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게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음악의 힘입니다."(용재 오닐) ㅡ 같은 책,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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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삼국지 1 - 도원에서 천하를 꿈꾸다 여류 삼국지 1
양선희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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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쓴 삼국지


삼국지는 누구나 아는 작품이고, 대부분은 읽었던 작품이지만 나이가 들면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전자오락실' 같은 느낌이다. 나도 꽤 많은 삼국지를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언제부턴가 사마천의 사기가 삼국지보다 더 재미 있었다. 유명한 작가의 삼국지가 출간될 때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펼쳐보긴 하지만 역시 마음속에는 '삼국지를 읽기에 난 너무 커버렸어.' 하는 생각이 강해질 뿐이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시 쓴 삼국지'를 읽었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불만'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기자 생활을 23년째 하고 있는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수 년에 걸쳐 '편작'한 <여류 삼국지>를 읽고 삼국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여류(余流)란 편작자가 스스로가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 삶의 방식을 탐구하고 방향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여류 삼국지는 '내 스타일의 삼국지'라는 뜻이다. '여류 삼국지'라는 제목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삼국지를 네 것으로 만들었나?" 나는 삼국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내 방식으로 읽기보다는 정사에 기대고 문학작품에 기대고, 유명 작가에게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나의 유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유비였고, 조조 역시 다른 사람의 해석을 그냥 받아들였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여류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상에 갇혀서 삼국지를 그저 그런 작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삼국지가 나의 것이 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삼국지 속의 등장인물과 편견 없이 만나고 그 인물이 되어보는 것이다. 내가 특히 삼국지를 멀리하게 된 까닭은 '유비' 때문인데, 촉한정통론으로 그려진 유비의 모습은 어릴 적에는 반공사상과 맞물리면서 영웅적인 지도자로 맹신했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치하게 느껴질 즈음 유비는 가식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양선희 작가가 편작한 <여류 삼국지>에서 유비는 처세를 위해서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 명분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다양한 영웅들이 들고 일어섰지만 유비는 브랜드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현덕은 명문호족도 아니고, 도적 떼로 출발하는 군벌도 아닌 그야말로 기성세대에서 찾을 수 없는 충의와 위민이라는 신개념 의군을 창설할 뜻을 내비친다. ㅡ <여류 삼국지> 1권 42쪽


유비는 끊어진 유씨 가문의 뒤를 잇는 의로운 왕족에 머무르지 않고 난세에 세상을 호령할 야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출세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평범한 장부'라는 묘사는 인물의 현실감을 준다. 그리고 '가문의 몰락을 방어하는 왕족'은 유비의 포지셔닝이지만 개인적 야욕과 명분이 분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긴 까닭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유기체로 보지 않고, 신화 내지는 화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건적에 대한 접근 역시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썼다. 장정일은 아예 황건적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서술할 정도로 대중의 분노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황건적(黃巾賊)이 아니라 황건기의(黃巾起義)다. 양선희는 이 장면에서 균형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장각은 군 전체가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한나라 말기 타락한 등용제도 탓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 울분에 찬 인재였다. ㅡ 위의 책 32쪽


<여류 삼국지>를 쓰기 위해 작가는 그 동안의 소개된 모든 삼국지를 검토하고 정사의 기록을 살펴 논리적 모순과 과도한 관념을 벗겨냈다. 이 덕분에 인물과 인물의 행동은 논리적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건의 전개 역시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때문에 '벤처기업'이니 하는 현대식 용어를 편작자는 맘껏 썼지만 삼국지 작품과 인물들을 침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고고학자가 현대의 공법을 이용해 당시의 유물을 재현하고 정확히 설명한 느낌이 들어서 드디어 나도 삼국지를 재평가할 기회를 얻었다. 



다시 읽은 삼국지


삼국지를 다시 읽으며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은 현재의 눈으로 삼국지를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관념이나 문헌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만 잡을 수 있다면 삼국지는 별 볼 일 없던 시절부터 힘을 얻고 세를 불리는 시절까지 한 인물이나 세력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일과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나와 대비시킬 수 있다. 예컨대 절세의 미인 '초선'을 이용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해 겨우 기회를 잡은 사도 왕윤은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끔찍한 불구덩이에 빠뜨린다. 역적 동탁과 개인적인 인연으로 슬픔을 표시한 기재 채옹을 죽인 점과 이각과 곽사가 표문으로 사죄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몰아친 점은 뼈아픈 패착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흥분하기 쉽고 벌써 일이 이뤄진 것처럼 안절부절하다가 기회를 잃곤 한다.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취해야 할 최선의 조치만 취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내 앞에 순식간에 기회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사도 왕윤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 유비가 서주를 단념한 일이 떠오른다. 유비는 서주 자사 도겸이 여러 번 간청해도 취하지 않고 도겸이 임종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임시로 받는둥 하더니 곧바로 여포에게 서주를 넘긴다. 불만이 가득한 형제들을 설득하는 유비의 말 속에는 기회에 대한 바른 자세가 엿보인다. 


"몸을 굽히고, 분수를 지키며, 하늘이 주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 휘말려 헛되이 목숨을 걸고 일을 도모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야만 하늘도 기회를 주실 수 있다. 때를 기다리자꾸나." ㅡ 위의 책, 375쪽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기회가 넘어오는 경우가 있고, 기회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공이 굴절되어 왔을 때 허둥대지 않고 우리 편에게 연결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기회를 잃지 않는다. 유비는 약할 때를 알았으니 강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희노애락은 반복되지만 여기에 임하는 자세는 한결같다. 고대의 영윤(令尹)이라는 인물은 세 번 재상의 벼슬에 올랐는데, 벼슬을 할 때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자기 일을 꿋꿋하게 할 뿐이다. 이런 독해가 가능한 이유는 역시 편작자의 의도에 있다. 인물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일'을 중심에 두며 독자가 하고 있는 일과 삼국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갈마들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도 왕윤이 기회를 얻었을 때의 사례와 유비가 기회를 얻었을 때의 일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인물들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안배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직접적인 편작자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이각과 곽사의 일을 이야기하며 편작자는 동탁과 여포의 일을 직접 거론한다. 


양표는 자신이, 왕윤이 성공한 계책을 실행한다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시는 동탁 한 사람만이 강력했으므로 약자들이 힘을 모아 꼼수로 이길 수 있었다. 하나 이각과 곽사는 엇비슷한 권력과 무력을 가진 자들이다. 둘이 맞붙으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은 엄청나게 터져 나가게 돼 있다. 지금은 바로 황제도 왕새우 정도였다. ㅡ 위의 책 327쪽


하나의 일을 겪은 시점과 상황, 그리고 사람 등만 다를 뿐 이치는 같기 때문에 여류 삼국지의 사건들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읽었던 삼국지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까닭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이고 치열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류 삼국지>를 읽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나는 '삼국지' 읽기에 다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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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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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열등감 고백

시를 읽고 리뷰를 시처럼 쓰고 싶었다. 오랜 독서 여정 끝에 시를 읽고 싶은 욕구가 유독 강한 시기를 만났다. 대학 시절 한 선배가 "너는 운문 스타일이 아니라 산문 스타일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뜻을 알아챘다. '산문 정신'이라는 말처럼 산문은 현실에 대해서 필요한 말은 반드시 한다는 정신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자유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수영 시인이, 외국에서는 조지 오웰이 산문 정신을 대표한다. 이에 대비한 '운문 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자유에 대한 자유'가 아닐까? 객관성, 자유 정신이라는 틀조차도 파괴하고 문법체계도 넘어서는 자유정신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사물을 틀 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나는 시에서 멀어졌다. 시를 쓸 생각도, 시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를 '파괴의 학교' 삼아 듣고 배우지 않으면 내 주변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쓰는 언어들이 현실에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시선 357)을 보면서 내가 시에 접근하지 못했던 또 한 가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어려움'(명함)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달) 같은 추상어와 관념의 언어를 시어에 포함시키지 않는 고정관념을 들켜 버렸다. 마음속에 시에 어울리는 단어를 솎아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 동양의 오래된 시 <대학>(大學)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조상들이 학교를 만들고 운영한 취지는 지도자 된 자가 몸소 행하고 성찰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그 나머지를 학교 과목으로 여기며, 대중들이 저잣거리에서 쓰는 용어를 벗어나지 않는 것에 있다."(<대학> 서문)

한마디로 시에 쓰지 않을 말은 없으며, 중요한 것은 그 모습과 현상에 대한 집중력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함민복의 시는 '참여시'인가

대학 시절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참여시 논쟁'이라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논쟁은 시인 김수영이 '사상계'에 발표한 '난해의 장막'이라는 제목의 1964년 시 연평에서 '시인의 양심을 저버린 채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하는 것은 사기'라 질타하면서 촉발됐지만, 박노해·백무산·김남주 등의 시인들이 작품의 세계를 '직접적인 현실'로 설정하면서 대학생이던 나는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에 순수시에 많이 길들여졌다. 그렇게 잠자던 '참여시'의 영혼이 함민복 시인을 통해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가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대운하 망상> 전문)


나는 최근의 한국문학이 격변기이면서 침체기이면서 동시에 전성기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세 가지 흐름이 보이는데, 함민복 시인의 '참여시'가 한 줄기,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과 <의자놀이>를 쓴 공지영의 '참여'가 한 줄기, 이도 저도 되지 않는 흐름이 또 한 줄기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2008년 촛불이 터졌을 때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져 버렸다. 시대정신을 이끌고 존경을 받는 작가보다는 '글 쓰는 샐러리맨'이라는 실망감이 커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함민복이라는 시인과 한국 작가들이 어떤 문학으로 현실과 대결하고 있는지 깊고 넓게 보지 않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그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가지게 된 오해일 수도 있다. 함민복 시인을 만나서 특히 반가운 까닭은 '시와 현실을 둘 다 잃지 않은 시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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