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 기타 한길그레이트북스 18
함석헌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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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나는 오늘 궁극(窮極)에 다녀왔다



궁극(窮極)을 향한 노래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을 향한 노래이다. 이는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옳은 행위에 대한 논증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바가바드기타』가 가지는 유일한 논증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궁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놀라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뇌를 견뎌내야 하며, 전장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혈육이며, 지고의 순례길 중에는 온 형제 가족이 낙오되거나 죽은 끝에 결국 혼자 남은 외로운 수행길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때 귀를 맑게 하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노래는 나를 더 이상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고자가 나를 위해 배려한 과정이며, 그러한 지고지순한 진리가 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자아를 초월한 초자아란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그 상태를 꿈꾸어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갈구했으며, 파스칼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참한 상태'를 체험했다.
궁극에도 시간은 있지만, 이 때의 시간은 '영원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연대순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일인데, 인도인들은 창조의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를 거룩한 어머니 혹은 우주적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주적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단위가 놓여 있는데, 어머니의 시간 개념으로 가장 말단의 단위인 칼리 유가(kali yuga) 하나만 해도 사람의 생애 43만 2천년이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벽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방식이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다.
'궁극'을 경험한 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찾아 올라갔던 정신의 여정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녹아야 하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은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궁극'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은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행하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우주적 생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단맛을 본 사람은 모든 단맛을 다 이기듯이 우주적인 의식을 체험했던 사람은 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한다. '궁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세태의 괴로움은 사소한 추억에 불과하리라.

이 궁극의 노래는 노래의 언어로, 노래의 귀를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운 향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가락과 정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신의 내면 속에서 따라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서술 방식


『바가바드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아르주나의 맏형이 두료다나의 술책에 빠져 도박으로 나라와 형제들을 다 잃고 13년 간 고행을 하게 된다. 시일이 지났을 때 두료다나는 반환을 거절했고, 생활을 꾸려 나갈 약간의 땅조차 수용하지 않아 결국 형제끼리 창을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야기는 비화되었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8)고 말하면서 둘의 토론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서두에 전쟁이 나온 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 주는 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료다나와 아르주나는 같은 전장에 서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이미 같은 종류가 아니다. 두료다나는 다만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자기욕망의 표현인 반면, 아르주나는 자신의 고뇌와 만인의 사명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다. 이 둘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요약되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주장한 요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인도의 경전인 이 책은 어느 경전과 같이 주석가들의 적절한 비유가 돋보인다. 라다크리슈난, 간디, 함석헌 등의 저술가들은 경전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고전들과 인물들을 끌어다 이 책의 '보편화'에 기여했다. 궁극의 초월정신은 어디든 통하며 지고의 경지에서 마주앉아 세상을 논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경전 중 가장 궁극에 가까운 저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 역시 궁극의 입장에서는 한낱 사소한 제도에 불과하다.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
……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사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어떤 경지나 단계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깊이 이해하고, 깨끗이 비우고, 참되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신에게 보다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할 뿐이다.


궁극의 가르침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관계에 현혹되어 있다. 즉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는 자는 반드시 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다는 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가 옅은 감정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아를 우주적 입장에서 사려하기 힘들다. 적과의 갈등과 대립이 2중, 3중고로 다가오는 이유도 물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홀가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의 생에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받는 법이고,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얽어매 지고자와의 대면을 어렵게 한다.
이 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궁극은 '평정한 마음'이다.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어떤 일도 없으며,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이 때 나의 행동은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이끌리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지고자에게 기울여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모든 운명을 지고자에게 맡기고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 있으려면 믿음도 두터워야 하겠지만,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로서 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신과 하나가 될 때 나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으며 나의 행동과 말들은 생기가 돋는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지배도 아니며 신을 위해 일할 뿐이며,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안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해도 차부는 움직이지 않듯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신이 타고 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차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 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궁극의 평정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궁극의 가르침은 '행위'이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실천'의 덕목이다. 평정을 갖춘 행위는 십만 대군보다 의연하며 강력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생하였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無爲)'를 포함한다. 무위는 자신의 행위하되 따로 행위한다고 말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칸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는 없고, 지고자의 '명'을 받고 행할 뿐이다. 마치 차부가 이끌 듯이 움직이는 말과 같다.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위를 이겨낼 때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전장에 나가거나 산을 기어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나는 자신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 『기타』의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을 닮았다. 하나님이 부리는 대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대자연과 나는 하나가 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완성한다. 이 때 나의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오래된 동양의 정신에서 '불성무물不誠無物', 즉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이 아이는 어린이도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세상에 사랑을 나누얼 줄 수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은 지고자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로운 기다림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 준다.



무위는 곧 내버림이다. 아르주나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장자 -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 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 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 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빔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내버림이란 것은 수십년 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성향이나 습관, 이성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아의 저항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림은 행위를 통해 높은 수준(영적인 수준)에 있는 신령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무지하면 수십 년 동안 틀린 지식을 신봉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진리의 빛을 쬔 사람이라면 승복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신 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집 중의 편안한 집이며, 완성된 자아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


『기타』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유연한 신앙에 있다. 궁극의 종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유연성이다. 아직도 중동에서는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윌 듀런트는 종교 등의 미묘한 문제로 생기는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의 역사를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이 없고 반드시 지정된 신만을 섬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가서 똑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강요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 그의 신 둘을 모두 죽이기 때문이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호수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서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시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은 욕망에 의해 그려진 신이기 때문에 『기타』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욕구하는 것만을 취할 뿐이다.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마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정통종교의 이름으로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을 거짓으로 해석한 종교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 처음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이 나오는 현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스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살짝 집어넣은 경우다. 가르침이 천년이고 만년이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온몸을 비우고 맑은 정신으로 그저 지고자의 명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임의의 판단은 불성실과 죄악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뺑끼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든 행위든 성(誠)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변태되기 십상이다.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밖에 없다. 그것도 임의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이미 나의 결정을 초월한 행위이다. 나의 최고의 판단에 의한 행위는 신이 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인(仁)을 생각하고 있으면 인을 행할 수 있지만, 인한 행위가 수천 년에 걸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행위의 지속성을 담보할 바탕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우리가 자유라 부르기는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생 동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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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9-1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를 하려는데 궁금해서 책도 보려고 합니다. 땡스투!
 
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피의 세계
- 잔치



잔치論


소피의 세계는 철학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이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잔치에는 어중이떠중이, 이야기꾼, 훼방꾼 같은 온갖 군상들이 모여 있다.
잔치란 '불러온다'는 의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오면 좋고, 그들과 함께 기쁜 일을 함께 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잔치의 문화는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남몰래 외딴 곳에 가서 함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둘의 관계를 천명하고 거기를 시작점으로 삼음으로써 둘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끌림에 의해서만은 아닌 좀더 정당한 가치를 획득한다. 잔치의 포용성은 엄청나서 철천지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완전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잔치'와 '놀이'를 권해 보라.



20세기의 인간상으로 떠오른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는 놀이를 노동을 위한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속성으로 본 개념이다.(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잔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고조시키며, 힘을 북돋우고, 활력을 준다. '잔치'의 의미를 잊어버린 교육은 이미 죽은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놀이와 잔치가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리라. 누군가 아주 간결하게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잔치란 다양한 사람들이 두서 없이 모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격조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잔치의 한 종류인 '놀이'를 살펴보아도, 명확한 규정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낸다. 아마 우리들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의연하게 가둘 수 있는 것은 '잔치'밖에 없으리라.


소피의 세계는 철학자들을 초대한 잔치에 환상과 추리라는 놀라운 재료를 추가하여, 우리들을 가상과 현실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환기시켰을 뿐이다.


문학과 철학의 협연(協演)


문학과 철학은 사이가 안 좋은 쌍둥이 자매와 같다. 잔치에 함께 초대되어 하나가 춤을 추면, 다른 하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감수자의 말처럼 철학은 개념으로 말하고, 문학은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상충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할 때 절묘한 협연은 물건너 가는 게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하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보였으니, 문학가와 철학자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 철학자이지만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러셀이나 베르그송은 하나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에 충실하였기에 그러한 평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점에 널브러져 있는 '저자세의 철학서', 철학은 뛰어나긴 한데, 어떻게 뛰어난지, 어떻게 인생에 유용한지 이야기할 수 없는 문맹의 철학자들, 철학의 대중화라면 으레 '통속 철학'을 떠올리는 철학의 무지자들. 이들은 잔치판 옆에서 암표상, 사기꾼들을 모아 놓고 또 다른 잔치를 벌인다.
소피의 문학은 철학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절묘한 문학적 가치도 빛나는 작품이다. <소피>는 철학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 때는 꿈처럼 철학의 전체를 어림해 볼 수 있고, 철학에 어느 정도 관여한 후 읽었을 때는 긴 여정 안에 쉬고 있는 두 발과 어깨를 편안하게 주물러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소피>가 문학적 가치를 얻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 때문이리라. 철학의 이야기와 문학의 이야기가 만나는 점은 유기적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철학에 끌려 가지 않고, 독자적인 형식을 발휘한다. 철학은 종종 인물의 엉뚱한 행위와 애매한 단서를 찾는 열쇠가 되기도 하여 문학과 철학의 묘한 협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소피>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성서에서 예수는 여러 번 비유의 효용을 말하던 비유의 천재였다. 비유는 철학의 기본 명제인 '관계'를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으며, 자칫 철학적 논의에 피로한 독자에게 '단비'가 되어주기도 한다. 건강한 비유는 건간한 작품을 낳고, 철학과 문학을 단번에 만나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실 '비유'는 문학가의 긍지만이 아니라, 철학자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철학자에게 이 세계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세계로 비쳐진다. 철학자와 어린이는 이처럼 중요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는 일생 동안 어린 아이마냥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장담해도 좋으리라.
- '본문' 중에서


지고한 시간들의 잔치


철학은 오래된 질문의 전승이다.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물음일텐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수많은 질문으로 나뉘고 각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이 계승하였다. 마치 빅뱅의 현상처럼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고 있던 간단한 사유가 폭발하는 순간 '잔치'는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나 먹을 것은 아직도 많고 할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가지 주제가 잔치를 주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신이 모든 것을 꾸미고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어려운 일이나 궁금한 점은 모두 신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에 잔치의 이야기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꿈꾼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몇몇 사람의 가슴속에 샘솟았다. 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일은 자명한 이유에 의한다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 다음은 인간이었다. 이렇게 신에서 인간, 인간에서 물질, 물질에서 관념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넘나들면서 잔치는 더욱 흥미로워졌고, 이에 따라 여러 이야기꾼들이 자리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괴테는 잔치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대문 왼편에 이렇게 써놓았다.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리


고매한 선각자들의 잔치


오랜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옥같은 시간들을 장식했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야기를 주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광석보다 빠른 신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람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이다. 물질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는 탈레스와 원자론자들이 있었고, 인간의 발견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자신의 뜻을 제자에게 전승하고 제자는 또 다른 제자에게 전승하여 삼천년의 시간을 한줄로 꿰뚫으며 경험과 이성 사이에서 건강한 논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한 논객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고 사람들은 놀라고 즐거워 하였으나, 새롭게 나타나는 강자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사유로 세상을 다 설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맹자도 역시 잔치집 문을 나서며, 잔치를 열 밸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대문 오른편에 써놓았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낯설음, 화합, 화해


당신이 국경 아래쪽에 있었더라면 나의 친구가 되었겠지만, 그 위쪽에 있으니 나의 적이오.
-파스칼, <팡세> 중에서


우리들의 의식과 환경은 거의 완벽히 우리를 가둬놓는다. 아무 문제없이 수많은 세월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의식하고 발견하자마자, 친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와 브루노가 죽은 것 역시 이 위협 때문이다.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세상을 안배한 조화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감성'은 신이 주신 선물이 분명하다. 세상은 경이로 가득 차 있으나, 유년기를 넘으면서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계절이 바뀌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 '생명'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힐데와 소피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존재가 확고하고, 자명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천문학자가 보는 별은 수천년 전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인지 과거의 모습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또한 내 존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철학은 화합과 조화의 예술이다. 국경과 전선을 넘나들며 공평한 이데아의 세계 안에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밝은 혜안만 가진다면 계급이나 격차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한다. 엠페도클레스나 플라톤, 칸트 등이 철학자로 더욱 존경받는 이유는 학설과 사유를 종합하고 화합했기 때문이다. 기발하고 신선한 상상을 하는 것은 누구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을 '세계적 사유'로 발전시키기까지는 고된 과정과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소피의 파티장에 만화와 동화의 주인공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의 유년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가 존재이고 비존재인가 하는 기준을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차라리 수십억 년 동안 타고 있는 거대한 불의 불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실재적일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하고, 가치판단의 세계를 좀더 넓고 깊고 오래된 그것으로 관찰할 때 나의 존재는 드디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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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개정신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김용준 옮김 / 지식산업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부분과 전체
- 학자의 인품



들어가기 전에 - 재독(再讀)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요약하고, 요약한 부분을 다시 정독하는 과정에서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다가가려 했던 이전의 책읽기와 달리 책 전체를 완전히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내게는 초유의 경험이었다. 물론 읽고 난 책이 다시 생각나 꺼내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인상은 묘한 유혹이었다. 저자는 알고 있는 부분을 논리적으로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계를 모험하듯이 저술하고 있으며 저술이 끝난 후에도 이 모험은 끝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를 읽고 요약을 한다는 것도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나는 다만 저자의 동선을 따라서 그의 족적을 그려보는 데 만족할 따름이었다.
인문학을 주로 경험한 내가 과학의 이론에 다가간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다. 비록 저자가 인문학을 위한 배려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정신의 진행과정을 가볍게 따라갈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내가 이 글에서 기록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나의 즐거웠던 기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쓰고 보니 인용문들이 아주 많은 것 같다. 오히려 본문보다 인용문이 글의 전체를 차지하여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글은 책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글보다 저자의 글을 더 소개하는 것이 후기로서의 미덕이라 생각하여 많은 인용문을 담았으니 양해 바란다.


대화


이 글의 기본적인 저술방식은 '대화'이다. 그것은 저자가 플라톤의 저서에 심취했다는 배경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화가 주는 효용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가 '산파술'이라는 이름으로 대화상대를 일정한 목표까지 가기 위한 도구로 삼은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는 그의 시대와 이론과 관계되는 모든 구성원들을 불확실한 세계를 함께 탐험하는 동반자로 본다. 특히 세계란 한정된 사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소신을 바탕으로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누구든 그의 대화상대로서 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살아간 시대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는다. 저자가 평생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긴 보어가 전통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급변하는 대세에 자신의 소신을 끊임없이 되물으며 치열한 생을 걸어왔던 바탕은 그를 좀더 광활하고 현실적인 세계로 안내하였다.

보어가 19세기 시민사회의 전통적 사고, 특히 그리스도교적인 철학의 사고과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커다란 노력을 필요로 했던 시대에 성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신도 그런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고대철학, 특히 신학(神學)의 언어를 아무런 주저 없이 사용하기를 항상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는 동안 어떤 전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데는 노력이라는 것이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된 대화상대자는 보어나 아인슈타인 외에도, 나치 당원의 젊은 지도자와 미국의 실용주의자, 칸트 철학 신봉자, 친구의 어머니, 부인, 당시 독일 수상 등 거의 사회 전구성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주장은 간혹 어설프고 치중된 것이었을지라도 저자는 개의치 않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들이 진지하게 물어오는 물음에 대해서 저자의 각별한 애정과 사명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불확정성의 원리


내가 일주일 내내 끙끙거리면서 독서후기를 완성 짓고자 했으나 끝내 내 품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 책의 신비한 원인를 찾다가 갑자기 불확정성의 원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왜곡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책의 완전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이 책에 대해서 알기란 요원하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란 액체스프의 마지막 내용물을 짜내듯이 우리는 상을 비틀어 값을 구하므로 값은 왜곡성을 갖는다. 하지만 비틀지 않고서는 데이터는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리상으로 우리는 한 세포 내에 있는 모든 원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측정이 살아 있는 세포를 죽이지 않고서도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세포가 아니라 죽은 세포에서의 원자들의 배열이 됩니다. 우리가 그때 양자역학에 따라서 관측한 원자의 배열을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계산하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세포는 붕괴하고 부패하기 시작한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역으로, 세포를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매우 한정된 관찰만이 허락될 것이며,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역시 좋은 정보이기는 하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세포가 살아 있는지 파괴되었는지를 결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응하는 방법이자 내가 제대로 된 독서후기를 쓸 수 있는 방법을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 군에 있을 때 한 달에 두 작품의 후기를 썼다. 그것은 하나의 책을 읽고 보름이라는 기간 동안 충분한 사유의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유로워진 상황에서는 수학적으로 두 배 정도의 후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특히 나의 후기는 후기대로, 책은 책대로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사유를 조금씩 넓히고 좁혀가면서 나는 좀더 능숙하게 후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실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험이란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에서 조건값을 주고 그 결과를 바라는 행위이다. 자연 전체나 모든 시간을 실험실로 쓰면 그만큼 진리에 가까운 발견을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전체적인 조건을 조건값에 대응해서 결과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주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되도록 조건값 하나하나를 설정할 때 전체 자연과 관계지으면서 사려하고 배려한다면 좀더 유연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보다 완숙한 진리값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에 종사하지 않는 인문학도의 의견이다. 좀더 문학에 가깝게 간다면 도스또옙스끼의 회고가 생각난다.

젊은이들은 영감이 떠오르자마자 열정적으로 달려들어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섣불리 작업을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천천히 하나의 그림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이 전체의 상을 찾을 때 비로소 작품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글쓰기로 돌아가 보자. 책이 나타내고자 하는 요지는 한정돼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문단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활성화가 되어 있다는 말은 언제나 적재적소에 넣을 수 있는 준비상태를 말한다. 3단 필터 방식의 그물몰이로 핵심을 잡아서 글을 쓰기 전에 머리 속에 전체 그림의 조각을 다 맞춰야 한다.

두 주인공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서술로 이루어졌는데, 많은 동료, 스승, 토론자, 친지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단연 지면을 장악하는 인물은 역시 저자와 닐스 보어이다. 이 두 사람은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양자역학이라는 체계를 구축해 냈다. 그러나 그 양자역학이 나오기 위한 결정적인 씨앗은 역시 그들이 최초에 지녔던 착상이었다. 험하게 말해 '저자는 대칭성에 보어는 안정성에 미친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 두 사람은 불확정성과 상보성 이론에 도달했으며 그것이 양자역학의 바탕이 된다. 원제를 번역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대칭성을 책 제목으로 설정하였고 책 전반에 걸쳐 대칭성을 탐구하고 몸소 표현하고 있다.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태초에 입자가 있었다」라는 명제보다 더 옳은 명제이다. 소립자는 대칭성을 구체화시킨 가장 단순한 표현이지만 그것은 또 비로소 대칭성이 이루어진 한 결과인 것이다.

역자도 해제에서 대칭성 부분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저자의 생의 대칭성에 해당한다.

어떤 구체성을 띤 일을 하기 시작할 때는 대단히 작은 점까지를 세밀하게 검토해 가면서 몰두하는 저자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다. 거의 초인적인 정력을 쏟으며 산중에서 씨름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부분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해 나가는 태도와, 일단 결과가 얻어지면 이론 전체 또는 실험 전체의 상황 하에서의 총체적인 관련성을 재검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전체성을 재검토하는 일들이 본문에 전개되고 있는 주옥과 같은 대화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후기의 제목도 역시 '대칭성'에서 나온다. 학자는 의식적으로 선을 지향할 수 없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선을 행동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자신의 분야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 '선'을 향한 길인 것이다. 그것이 철학자나 문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기술자나 과학자, 노동자도 역시 그러한 길이 분명히 놓여 있다. 학자가 설익은 선을 의도하려 할 때 과학적으로 많은 오해가 생기며 정치와 불온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나는 적어도 학문만큼은―내가 뮌헨의 시민전쟁에서 아주 싫증이 나도록 들었던―정치적 의견의 싸움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격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나 병적인 인간들을 이용하면 학문의 생활도 악의 있는 정치적 격정에 의하여 오염되고 일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보어의 주제는 안정성이다. 안정성은 돌턴의 혼합물 이론에서 제기된 문제이다. 원자의 모형을 탐구한 보어는 오랫동안 돌턴을 탐구하였을 것이다. 설탕물에서 설탕과 물의 성분비가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세부의 원자들 또한 결정을 어김없이 유지하는 모습이 보어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전에 '인간등정의 발자취'란 책으로 썼던 후기에 나오는 돌턴의 말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기초 입자들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상당수의 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입자들은 절대로 다른 입자로 변형시킬 수 없다."

물질이 화합물인가 혼합물인가를 보기좋게 재단해준 돌턴의 제일보를 이어받아 보어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화합물론의 편린들을 걷어내려고 시도한다.

내 출발점은,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경이(驚異)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물질의 안정성이었습니다. 내가 안정성이라는 말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항상 반복하여 같은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 또 같은 결정(結晶)을 반복 형성한다는 점, 그리고 항상 같은 화학종합(化學綜合)이 생긴다는 점 등등입니다.
통일적인 물질의 존재, 그리고 고체의 현존, 이 모든 것은 원자의 안전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플랑크는 원자계의 에너지는 쉽게 불연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즉 그러한 체계에 의한 에너지의 방출에 있어서는 내가 후에 정상상태(正常狀態)라고 불렀던 특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정류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혼합물이 되고 안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의 물질 안에 모든 것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원자 안에는 어느 한 부분에 핵심적인 요소들이 '불연속적'으로 뭉쳐 있으며 그것은 볼쯔만이 제기했던 통계열역학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조만간 라듐 B원자가 어떤 방향에서 전자 하나를 방출하고 라듐 C라는 원자로 이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꼭 반시간 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원자에 따라서는 어떤 것은 1초가 되기 전에 그런 전이가 일어나고,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평균적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많은 라듐 B원자를 취급하는 경우 30분 후에는 대략 절반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과율의 어떤 파탄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양자택일에 놓였을 때 대칭성과 상보성, 안정성과 불확정성이 모두 나타난다. 우리는 한쪽을 택하면 한쪽은 배척되는 거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물론 결정적인 선택은 돌이킬 수 없으나 선택의 순간에도 선택지는 우리를 향해 그 대칭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를 완벽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이에는 대칭적인 비율이 있어서 자신 있게 한 가지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반대 선택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항상 두 선택지는 서로 대등하게 겨루고 있으며 비율이 반이 넘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목적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장 간단한 것이란 다름 아닌 양자택일입니다. 예스냐 노냐, 존재냐 비존재냐,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양자택일만 생각하고 있는 한 거기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자이론에서는 확실히 양자택일에 있어서도 예스나 노라는 대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밖에 상보적인 대답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 대답 안에서는 예스나 노에 대한 확률이 정해져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예스와 노 사이에 하나의 진술가치(陳述價値)가 있는 어떤 종류의 간섭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대답의 하나의 연속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자들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다. 실제로 선현들은 선택의 강요에도, 딜레마에도 빠지지 않았다. 비록 외양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엄청난 시련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의연하며 거기에 그들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학자의 인품

인생에 커다란 딜레마와 어려운 선택의 강요에 몰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저자도 커다란 시련에 놓이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독일 사회는 무서울 정도로 경직되었고 집단환각증세를 보였다.

내가 독일에서 보냈던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년간은 항상 무한한 고독 안에서 시달리는, 그러한 기간이었다. 국가사회주의 정권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으며 내부로부터의 개선 같은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도 없었다.
……
설상가상으로 독일 내에서는 개개인의 고립화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상호간의 이해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극히 제한된 친구들간에서만 마음놓고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했으며,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알린다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은폐하려는 듯한 매우 조심스런 언사들만이 오가는 것이었다.

이 시절 독일에 남을 것인가 독일을 떠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저자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라이프치히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플랑크와의 대화에서 오고간 말들이 나의 머리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는 내가 이민을 결심해야 할 것인지 여부에 몹시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독일에서 강제적으로 생활기반을 빼앗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조차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지독한 물질적인 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에게는 선택에 대한 결단의 고통은 없었다.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소하고 작은 주위의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자각시키는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딜레마의 위기에서 힘차게 내 손을 잡아줄 수도 있다. 대개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빠지게 된다. 오래된 경전의 한줄 글귀처럼 '자신을 해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나를 해할 수 있고, 나라가 스스로를 멸망시킨 후에야 적국이 그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연로한 플랑크 선생의 진언이 저자의 선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당신들의 계획(정부의 파국적 임용에 저항하여 교수사회가 시위적으로 사직하려는 계획, 저자는 플랑크에게 최종적으로 조언을 얻으러 간 것이었다―인용자주)은 이 파국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에게 반작용만 미칠 것이고―당신들에게 이미 희생에 대한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을 줄은 압니다만―기껏해야 이 재난이 다 지나간 후에나 어떤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표를 그곳에다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만약 사직한다면 최상의 경우에 외국에서 어떤 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행한 경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군요. 그럴 경우 당신은 외국에 이민을 가 정착하게 되겠지만, 당신보다 훨씬 더 곤경에 처할 사람들을 계산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경우는 외국에 가면 이 같은 재난 밖에서 안주하면서 조용하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파국이 종언을 고할 때 당신은 나는 저 무법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았다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귀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경과해야 할 것이며, 당신은 지금의 당신과 많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도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때 과연 당신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이 땅에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한편 사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문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이 파국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불변의 고도(孤島)들을 형성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젊은 사람들을 당신 주위에 모을 수 있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학문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의식 속에 옛날의 올바른 가치척도를 심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재난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고도(孤島)들 중에서 몇 개가 살아남을 것인지는 물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이와 같은 공포시대를 끝까지 헤쳐나갈 수 있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그것은 극히 작은 그룹일지라도―이 있다면, 그들은 파국이 끝난 후 이 나라의 재건에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인종문제로 인하여 이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땅에 머물러 먼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이런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위험이 반드시 수반될 것입니다. 여지없이 강요되는 타협 때문에 후에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며, 때에 따라서는 법의 제재를 받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행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으며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저자의 인품이 흘러나오는 경로였다. 저자는 진지한 탐구자세로 자신의 학문분야는 물론 실생활과 철학적인 문제까지 일관된 인간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대개 명성 따로 인간성 따로인 위인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역사에 '인간적인 생리'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보와 역사에 기여한 성과들을 훌륭히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은 한 인간이 '인생'이라는 단위로 보여주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 반쪽만을 보여주는 영웅들에게 우리는 역시 '반쪽'으로 대면해야 하며, 전체로 보여주고자 하는 드문 사람들은 '전체'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의 정신적 기여도만 가지고 그가 아이들을 모조리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행동을 정당하게 볼 수 없다. 영웅과 선현을 대하는 우리들이 이런 비판정신 없이 그들의 완결되지 않은 성향을 인정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결여 만큼 타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되도록 완전한 가르침을 인생을 통해 보여준 사람들을 발굴하여 그에 맞도록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선택에 앞서 저자와 페르미의 격렬한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후기를 마친다.

(페르미)
<도대체 당신은 독일에서 무엇을 더 바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물론 전쟁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고, 하기를 원치 않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책임지기를 꺼리는 일을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모든 불행을 함께 함으로써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나라는 유럽에서 고향을 등지고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된 나라입니다. 그들은 그곳 유럽의 협소한 환경과 작은 나라들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과 싸움, 억압, 그리고 해방과 혁명들, 이 모든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비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광막하고 자유로운 신천지에서 역사적인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모든 사슬을 풀어버리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존재였지만 이곳에서는 한낱 젊은 물리학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시원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이곳에서 새출발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곳에서 당신은 훌륭한 물리학에 전념할 수 있으며, 이 나라에서의 자연과학의 커다란 비약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왜 이런 행복을 포기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바로 그러한 질문을 천 번이나 스스로에게 반복하였습니다. 저 협소한 유럽에서 이 넓은 나라로 이민을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저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의 씨였습니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이민을 했어야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머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과학에서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 공헌하고, 전쟁 후에 독일에서 훌륭한 과학을 재건코자 하는 뜻 있는 젊은이들을 나의 주위에 모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 젊은이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우리보다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고, 이곳에서 쉽게 직장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이와 같은 나의 이점을 단순히 나를 위해서만 이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전쟁이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의 위기 때 나도 소집을 당했었는데, 그때 나는 이 전쟁을 원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통(總統)이라는 사람의 소위 평화정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때 독일 민중은 자각하여 히틀러와 그의 신봉자들을 추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너무 안이한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페르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독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로서는 아직도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군요. 나는 사람들은 그 결단에 있어서는 시종일관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어떤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매우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생장할 수 있으며 또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경험에서 미루어본다면 어느 나라든 조만간 혁명과 전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마다 미리 이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합리적인 충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이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여야 하며, 도망갈 생각부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파국을 자기들 스스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요청은 모든 파국을 미리 방지해야겠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부당한 것이라는 점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개개인이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민중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자신의 탈출도 단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니까요. 다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결단을 자기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결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아마도 둘 다 옳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에 독일에 남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결심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 결심을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불의와 불행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았으며, 그러한 결정에 대한 전제들이 아직도 전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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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엔트로피
- 엔트로피 카지노, 당신의 지갑을 확인하라



엔트로피 카지노


나는 지금 어둡고 음습한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그보다 더 화려한 여인이 돈 많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나와 같이 전재산을 탕진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한 손에는 술병과 다른 손에는 빈 지갑을 들고 어디로 가는지 기약도 없이 헤매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식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마음껏 즐겼다. 태어나기도 전에 모든 자원과 가능성을 빼앗겨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불쌍한 후손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게 천혜의 자원을 낭비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진다.
개중에는 대박을 터뜨려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카지노 측의 상술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언제나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게임이며, 우리들의 지갑은 점점 줄어드는 게임이다. 의심이 들면 당장 복권 뒷장을 펴 보라. 1등 당첨금 총액은 말단 당첨금 총액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지구의 어디에선가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그 주위 환경에서 그보다 더한 무질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화란 점점 더 큰 무질서의 바다를 만드는 대가로 점점 더 큰 질서의 섬을 창조하는 것이며, 오늘 풀 한 포기가 자라는 것은 미래에 그 곳에서 풀 한 포기가 적게 자람을 의미한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집을 나서면 다 돈이다.


이 말은 '집을 나서면 다 에너지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어도 우리들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우리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고 있다. 음식물은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이면에 활성화 산소를 꾸준히 증가시킴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함수관계를 이루며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1)이다.


엔트로피 법칙



1.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때문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그 형태만이 바뀐다.
2.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며, 오직 한 방향, 즉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할 뿐이다.


즉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인 반면, 엔트로피는 사용해버려서 재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를 말한다. 정밀한 공정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써버린 에너지나, 사후에 감당해야 할 부대 현상(산업쓰레기 처리문제나 산업재해 등의 질환과 환경 문제 등)의 총계를 엔트로피라 한다. 때문에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항상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저장고에서 빼서 쓰는데, 저장고가 무한하다거나 늘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에너지를 짜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의 양은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아져 우리와 열 종말(heat death ;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의 거리가 빠른 속도로 단축된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를 즐겨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켄(Ken)의 에너지가 100인 상태에서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노란 칸은 줄어들고 그 부분이 검붉게 보인다. 에너지 바가 모두 검붉어졌을 때 켄은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다. 바로 검붉은 부분이 엔트로피이며 노란 부분이 에너지이다. 그래서 그 둘의 합은 항상 100이 되며, 그 게임이 끝나지 않는 한, 검붉은 부분이 다시는 노랗게 될 수 없다.


이 법칙이 문명화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직관으로 이해했고, 그 핵심 진리들을 그들의 문명과 세계관에 통합시켰다.
위에서 표현된 어머니의 말씀 이외에 '공짜는 없다' 또는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울어봤자 소용없다' 같은 속담을 통해서도 누구나 이 법칙에 정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엔트로피 이론의 입장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부류로 묶을 수 있다. 이른바 기술적 메시아주의, 수정주의, 생태주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데, 「엔트로피」가 저술된 기본 개념은 생태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의 과학면에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에 많은 과학자가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무한의 자원이 숨어 있으며 우리들은 그것을 찾아서 향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메시아 이론이다. 수정주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개그콘서트 버전)' 하고 말하며 맹목적 메시아 이론에 제동을 걸었지만, 메시아와 취지는 같다는 입장이다. 엔트로피가 말하는 생태주의는 그와는 다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원의 보고는 둘째치고, 과학 문명이 낳고 있는 곳곳의 부작용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생태주의에 입각한 엔트로피를 받아들인다면 과학의 이면성을 긍정하므로 과학의 외연이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조화,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과학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독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도라면 과학이 우리 문명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도 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철학도가 해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엔트로피 패러다임



우리는 17세기 뉴턴주의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world machine paradigm)'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 등은 17세기에 기계적 세계관(the mechanical world view)을 일반 대중에게 크게 보급시켰던 천재들인데 이들이 자연을 대했던 사고방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자연은 무한한 보고이므로 최대한 탐구하고 이용한다면 최대의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구상했던 모든 기술은 자연의 저장고로부터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것들은 엄연히 엔트로피 법칙 내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기계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며, 양(quantity)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질(quality)을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써, 기계적 패러다임의 제작자들은 전부가 죽은 물질로 구성되는 차갑고 무감각한 우주를 만들어 버렸다. 자연에 대한 접근은 있되 자연 자체는 없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오해만큼 엔트로피는 축적되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엔트로피의 역공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이들의 이론이 환경에 대한 문제를 염두해 두었는지 판단해 보라, 이들의 이론이 사회문제나 경제 양극화 문제를 배려했는지 판단해 보라.


로크는 원시 시대에는 자연의 한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돈이라는 교환의 수단이 존재하게 된 이상 자산을 무한정으로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부지런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땅의 개간에 있어서도 입장은 같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의 땅에서 생산하는 양을 개간한 땅 10에이커에서 수확한 사람(자연상태의 100에이커와 가공된 10에이커의 농작물 산출량은 같다는 착상에서 나온 생각이다)은 인류에게 90에이커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경제 이론에서 같은 주장을 펼치는데, 경제 활동에 도덕성을 부과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경제 활동 스스로 자본 투자, 직장, 재원, 생산 등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스미스와 로크 모두 물질의 풍요를 갈구하는 인간의 이기성을 미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양적 도달 이론'2)으로 이들의 이론을 보자. 사실 이들의 미덕이 용인되는 선은 한계가 있다. 그들의 이론은 한계점 전까지 가치를 얻는 것이지만, 한계점이 넘어도 멈출 수가 없기에 위험한 이론이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를 로크의 말에 따라 열심히 개간한 결과를 보라. 표토는 황폐화되었고, 병충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용한 농약은 작은 생태계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농약에는 거뜬한 슈퍼 병충해를 키워왔을 뿐이다.
이웃 나라와의 잦은 전투로 오히려 노예국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리우스가 받은 조롱을 슈퍼 병충해들은 재연하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중에서


이들의 이론을 대할 때 한가지 염두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역동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고, 사회 전체가 가난과 생존의 위협에 괴로움을 당하던 시대이다. 에너지는 바닥이 나고 직면한 엔트로피 분수령을 해결해야 하는 지상과제가 이들 앞에 던져진 시기였다. 그만큼 이들의 필체는 강경하고 무한한 희망을 담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시대적 관점'에 한해서 의미 있게 이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이들의 이론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다. 유통기한이 끝난 우유를 먹으면 복통과 설사가 찾아올 뿐이다.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로크의 철학을 고스란히 새겨 넣은 미국이 '자원의 엄청난 쓰레기장'이자 '막대한 엔트로피 채무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자연의 한계를 생각하고 계획을 짰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눈치 빠른 독자들을 벌써 알아챘겠지만, 엔트로피 이론은 독자들의 관심을 동양으로 환기시킨다. 서양과 동양이 미덕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접점이 바로 엔트로피 패러다임이다.



서양인들은 진리와 지혜에 대한 동양식의 접근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서양인들은 부지런히 행함으로써만 이 세계의 온갖 숨겨진 신비를 벗길 수 있다고 믿었다. 서양인들은 그런 시도가 인간을 더 큰 지혜로 이끌고 궁극적으로 우주의 최상의 설계자와 대면하게 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끊임없이 진리의 단편들을 모아서 잇고, 주위의 세계를 조작하고 정돈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해 왔던 것이다. 동양 종교가들은 서양인의 열광적인 행동이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킬 따름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신성의 현시(現示)로부터 오히려 유리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지혜를 가르친 모든 위대한 설법가들은 저엔트로피3) 생활에 고유한 가치관들을 신봉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성인들은 모두 검소하고, 청빈하고, 재산을 사회와 나누는 모범적인 생을 이끌어 갔으며 누구보다도 자연의 한계와 생태를 잘 이해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기계적 패러다임이 지금도 우리의 신앙이 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전에 겪었던 인류의 엔트로피 분수령에서 찾고 있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걸쳐 서부 유럽은 엔트로피 분수령을 맞고 있었다. 중세식 생활 방식의 기본적인 에너지였던 삼림 자원이 차츰 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이러한 부족 현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새로운 대안의 추구는 결국 나무를 석탄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나무에 기초했던 에너지 환경이 석탄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자, 서부 유럽 사회의 생활 방식은 그 전체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무로부터 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은 중세 시대의 붕괴와 산업 혁명의 출현의 배경이 되는 주요 원인이었다.
……
14세기 중엽쯤에는 드디어 분수령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 때문에 에너지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토양의 척박화와 삼림 고갈의 심화는 서북부 유럽 지역의 인구 문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12세기 풍차를 사용함으로써(수차를 더 많이 사용하여) 이전에는 경작할 수 없었던 땅을 농토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림을 더욱 황폐시키고 인구를 더 증가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
먹여 살려야 할 도시 인구의 증가는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도시는 11세기 잉여 농산물의 교환 장소로서 출발하였다. 이제 농산물보다 인구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자, 거래할 잉여 농산물이 없어졌고 따라서 도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전체 조직이 한꺼번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기초로 하는 시대로의 전환기에 이른 것인데, 그런 전환기는 부분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산업에서의 분수령은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무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어디서 구할 것이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이다. 근대는 이 문제를 '근대적'으로 푸는데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근대의 증기 엔진은 석탄의 채굴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었고 또한 최초로 그렇게 사용되었다. 채탄 과정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땅 밑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광산을 환기시키고 축축한 석탄을 끌어올리는 것이 차츰 문제로 대두되었다. 17세기에는 광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정도까지 깊게 파 들어가자 물이 나왔고, 따라서 공정에서 배수 작업이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 엔진이었다. 최초의 증기 펌프로 1698년 세이버리(Thomas Savery)가 특허를 얻었다.
채탄에 사용되었던 증기 펌프는 새로운 석탄의 환경으로부터 곧바로 출현했던 수많은 기계적, 구조적인 발명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석탄을 캐는 문제가 증기 펌프의 도입으로 해결되자, 곧 마찬가지로 중대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은 무거웠기 때문에 말이 끄는 마차로 장거리를 수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의 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석탄 마차의 무게 때문에 길은 엄청난 바퀴 자국으로 뒤덮여 비가 올 때에는 진흙탕으로 되어 운반이 거의 불가능했다. 동시에 석탄 수송용 말들을 유지하는 것에도 차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경작지가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말먹이와 사람 식량을 다 생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수송 위기는 증기 기관차의 발명과 철도의 부설로 해결 국면에 들어갔다. 증기 펌프와 마찬가지로 증기 기관차도 석탄의 환경에 의해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다. 이와 같은 증기 펌프와 증기 기관차의 협동은 이후의 산업 시대의 기술적인 바탕이 되었다.


중세와 근대의 구분을 에너지원의 전환으로 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근대 이전까지 품고 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베이컨이 과감히 깨뜨려 주었으며, 뉴턴은 수학적으로 해석해 주었다. 우리들의 근대는 보기 좋게 중세를 벗어났으나, 우쭐하는 새에 다시 엔트로피 분수령이 찾아왔다. 영화의 포스터와 같이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놈'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들은 근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현대란 좀더 복잡다단해지고, 인간성의 상실을 통감하게 된 근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것도 근대의 기계적 패러다임에서 나왔으므로, 다음 세기에는 근대를 극복한 패러다임이 요구되는데 저자는 그것을 엔트로피의 시대라고 하였다.


정적이고 절대적인 기계적 물리학은 상대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도전을 받았고, 세계는 진보와 진화의 장이라는 인식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밖에 철학에서의 로크의 세계관에나 경제에 있어서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당연히 엔트로피의 세계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끈 엔트로피 분수령에 다시금 우리에게 찾아왔으며, 이대로 나아간다면 종말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성과 기계적 패러다임에 의존한 산업과 문명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지표에서 우리들의 자원과 환경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전의 패러다임이 포함하지 않은 엔트로피 개념이 시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세계관은 절대적이며 무한하다는 원리를 가진다. 문제는 이들이 자연을 본 시각에 있다. 이들에게 자연은 미지의 보고(寶庫)였으며,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탐험할수록 자연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보물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시켰다. 이러한 믿음이 현재에도 유효할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의해 구축된 사회가 자연을 얼마나 피폐시켰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경제학자의 말처럼 사회 문제는 도시 기구가 확장됨에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밖에 증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도박이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판돈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판돈을 올리면 이제까지 잃었던 돈을 한번에 충당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엔트로피 카지노가 우리들을 죄어 매는 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판돈을 충당하기 위해 우리는 카지노측이 제공한 사채업자들에게까지 손을 건넨다. 그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다. 사채업자는 처음에는 낮은 이자율로 우리들을 꼬득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가면, 이자를 1할에서 2할로, 2할에서 3,4,5할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판돈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이 도박판을 끌고 가면서 망각한 점을 환기시켜 보자. 판돈이 커지면 잃었던 돈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가진 자산을 손쉽게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가족, 친구들, 나아가 미래의 자식들의 재산까지도 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카지노측이 그토록 염원하는 야심찬 노림수이다.



부는 부채와 같은 속도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부와 부채의 1대 1 상관 관계는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즉 부채에 대한 상환 거부나 상환 불능이 생기게 마련이다. 복리에 의한 증가는 인플레이션, 파산, 몰수와 같은 부채 상환의 반작용으로 항상 상쇄된다. 이와 같은 작용은 으레 폭력을 발생시키곤 한다.


경제 발전이란 것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부터 차츰 어려운 자원으로 바꾸어 감에 따라 좀더 복잡한 공정을 사용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며, 생태학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연 환경을 보다 심하게 착취하는 방법의 발전이다.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국민총생산(GNP)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국민총비용(Gross National Cost)이라고 해야 하며, 우리가 발견한 에너지원의 혁신은 자연을 착취해 에너지를 얻는 방법의 혁신이며, 점점 열종말을 부추기는 혁신일 뿐이다.


 


위험한 엔트로피


엔트로피의 위험성은 꾸준히 증가하는 축적량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시간의 예를 든다.



시간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진짜 양은 사용되어 버린 에너지의 양을 그대로 나타낸다. 우주에서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수록 일어나는 사건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것은 '실제'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 종말의 최후 평행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사용 가능한 자원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무한한 시간만 놓여져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보다 위험한 것은 그 폐해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예상할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대부분의 전복은 조치 가능한 사태를 방치한 결과이다. 로마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보라.



"로마의 멸망은 로마의 융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로마는 환경의 자원으로 융성한 것이 아니라 중동 아시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등을 철저히 약탈한 것으로부터 융성되었던 것이다. 로마 대도시를 유지했던 바로 그 과정이 로마를 멸망시켰다."(무정부주의자이자 생태론자인 북친(Murray Bookchin)의 견해)
일단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가 커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 투입이 요구되었고,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수록 무질서가 커졌다. 무질서가 커질수록 여러 종류의 혼란에 대처하는 제도의 하부 구조는 많아졌다. 그 과정이 무한하게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에 의해 유지되었던 에너지 공급이 차츰 줄어들었고, 끝내는 군대가 사용하는 에너지 양이 군대가 얻어오는 양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과도한 경작 때문에 농산물 수확량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노예를 먹이고 재우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도시 기관들이 거대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그것들은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과대하게 팽창했던 도시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고, 군대에 의하여 짓밟혔고, 급기야는 그 에너지 환경과 알맞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 멸망하고 나서의 로마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저자는 현대 도시도 로마와 비슷한 방법으로 식민지화함으로써 지탱되었으며 결국 로마의 길을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서울 거리를 걸으며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작은 우리 마을을 지나다니며 아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주위가 물이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는 셈이다. 백만 이상 사는 도시의 거주자는 5만 정도의 소도시보다 3배나 많은 세금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은 범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비효율성 때문에 뉴욕과 클리블랜드는 거의 파산할 뻔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엔트로피의 입장에서 수도 이전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본래부터 생물의 계에 속하는 인간이 기계와 전문화를 타고 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거인족(타이탄 족)에 다름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과도한 전문화는 한 종을 멸망케 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한 종이 특정한 형태의 생태계에 과도하게 전문화되면 그 종은 환경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전환에 필요한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다 한숨을 쉬었던 교수처럼 '여기를 나가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모진 환경에서 건강히 살아남았던 조상들과 같은 종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가 모아놓은 탄산가스가 우주로 배출되는 복사열을 차단하여 발생하는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증가하면 종은 극심한 시련을 겪게 된다.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 J. 브로노프스키, 인간등정의 발자취 중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가 급변하는 자연과 사회의 엄청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겪는 부작용을 다방면에 걸쳐 체험하게 될 것이다.


벌써 우리들은 기계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지배란 기계가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치밀하게 우리를 조종함을 말한다.



규모가 커지고 중앙 집중적으로 될수록 인간의 역할이 또 하나의 생산 요소 정도로 전락하는 경향이 심화된다. 예를 들면 자동차 조립 과정에서 근로자들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 과정 자체가 개인이 아닌 기계를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은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이 감소된다. 근로자는 필연적으로 생계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일의 생산된 결과만이 평가를 받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정밀하고 전문화된 공정일수록 사람이 하던 일이 세밀한 기계로 옮겨지는 현장을 우리는 많이 목격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명과 기계화의 이로운 점을 나쁘게만 말한다고 반문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목적이 가치를 전도시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기계화는 우리의 정신 뿐만 아니라 생존까지 위협한다. 미국 정부가 치명적인 무기 공정(트라이던트(tirdent) 잠수함 생산)에 10억 달러를 투자했을 때 1만 6천 명의 고용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같은 액수로 다른 분야에 투자한다면(저자는 태양 에너지 수집판 생산의 예를 들었다) 2만명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즉 4천 명이 거리로 나앉았다는 이야기이다.


정보의 과잉 현상도 이에 못지 않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한 번 일정한 분량의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자연히 외면해 버린다. 정보과잉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우리 학생들이다. 어느 교육자의 고백처럼



의사 소통은 내용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받는 것, 즉 말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의 부족과, 정보의 엄청난 쓰레기를 여과 없이 내보내는 무책임한 생산자들, 이런 일방적 흐름이 소통을 모르는 아이들의 정신을 점점 고갈시키고 있다. 결국 엔트로피 카지노는 현재의 우리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들의 재산까지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들의 미래는 우리들의 미래 세대에게 달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의 우리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죄어드는 서민들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게 되면 남은 에너지를 두고 과열 경쟁이 벌어진다. 경쟁의 생리가 그러하듯이 크고 강한 놈이 작고 약한 놈을 잠식시키며 합종과 연횡, 생존과 도태의 국면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경쟁은 점점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비로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질 때,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죄어드는 경제적 환경의 희생물로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정부는 복지 또는 다른 명목에 의해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야만 한다. 실업이란 결국 엔트로피 과정의 이면에 불과하다. 에너지 고갈이 빨라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거나 불완전한 고용 상태에 처한다.


소비자는 높은 물가로 고통받고, 노동자는 낮은 실질 임금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게다가 에너지 흐름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쓰레기를 치우고 없애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몫도 역시 납세자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바로 현대인의 비애이다.



'미국인'은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민인지도 모른다. 그는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제공할 힘이 없는데, 그의 돈은 풍선처럼 인플레를 타고, 역사적 상황과 다른 국가의 힘에 따라 떠나가 버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자기가 만든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휴식과 여흥으로 인하여 늘 지쳐 있고 자꾸만 살이 찌면 건강도 신통치 않다. 그가 마시는 공기, 물, 음식은 모두 독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죽을 때는 기가 막혀 죽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기의 성생활이 다른 사람들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는 좀더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좀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등의 생각을 한다. 그는 도대체 그의 자녀들이 왜 그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실상 별로 상관도 안하고 왜 상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잡지의 광고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원래 못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의 모든 소유물이 모두 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불안해진다. 그는 만약 직장을 잃는다면, 만약 경제가 실패한다면, 만약 전기·수도회사가 망한다면, 만약 경찰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트럭 기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아내가 도망간다면, 만약 아이들이 가출한다면, 만약 죽을 병에 걸린다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걱정들 때문에 자격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 상담한다. 그러나 그 의사들 역시 그들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시 자격이 있는 전문가들과 상담한다.


해결책


방법은 간단하다. 에너지를 덜 쓰면 된다. 에너지를 덜 쓰는 체제로 사회는 점점 변화해야 하며, 그것을 저자의 언어로 표현하면 고엔트로피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어서 전환해야 한다. 즉 지금까지 이루어온 고엔트로피 구조를 하나씩 저엔트로피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한 사람의 체질을 바꾸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스무 여러 해 동안 해오던 방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그만큼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어쩌랴. 점점 엔트로피 분수령은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만일 너무 오래 지체된다면, 치러야 할 액수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는 엔트로피 청구서 한 장이 올려져 있다. 우리는 지독한 채무자이며 연체자이다. 과학과 기술로 이미 써버린 것을 충당할 만큼의 대체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살육과 재해를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될 뿐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없애버릴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대신에 자연을 좀더 안전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를 돌보는 하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오만함'을 꺾어야 하며,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각 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면서 보지 않으려 하고, 감추려고 하고, 안주하려고 하는 게으른 본성을 자극해서, '절망'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는 없다.


다시, 카지노에서


어둡고 음습한 카지노. 바에서는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담배연기 자욱한 천장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술병 깨지는 소리, 환호성 지르는 소리, 이런 소리 저런 소리의 잡탕이다. 그 한 켠에서 당신은 기계 하나를 끌어안고 분주히 동전을 넣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 때 입구 쪽에서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절한 복장의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두려운 표정으로 당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아내(엔트로피)이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녀는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집에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여기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당신은 나의 희망이며, 우리의 가정을 힘차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다고 그녀는 호소한다. 그녀는 하늘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벌써 위쪽에서는 거래가 이뤄졌다. 엔트로피 카지노의 사장은 당신이 아내를 때리고 술병을 부수고, 쫓아내는 데 이미 많은 돈을 건 상태다. 이 똑똑한 사장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행동의 믿을 만한 데이터를 놓고 베팅을 한 것이고, 그 상대자들은 당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순진하며 도의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정의 행복을 믿는다. 그 결과는 대개 예측할 수 있다. (천사를 욕보이지 말라)
찢기고 얻어맞고 상처받고 쫓겨난 아내의 집에는 아이들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빠는 안오고 엄마만 와서 아이들에게 입을 맞춘다. 아이들이 대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그들이 '철이 들어서'이다. 이것이 눈에 안보일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까지 대개 그녀들은 이 불행을 혼자 안고 가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엄마를 불행으로 몰고 간 아버지를 향해 복수를 할 것이다. 이보다 슬픈 가정사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주(註)
1)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의도에 맞게 사용한 사람은 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 ∼ 1888)인데, 그의 논문 <열의 역학적 이론(On the Mechanical Theory of Heat>에서 에너지에 고대 그리스어인 tropy(변형)이라는 단어를 따서 엔트로피라 명명함으로써 에너지와 유비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 확정지었다. 그에 앞서 라부아지에(Antoine L.Lavoisier, 1743 ∼ 1794)는 열은 칼로릭(caloric)이라는 무게 없는(impon derable) 입자라고 보았다. 즉 칼로릭을 많이 함유한 물체는 뜨겁고, 물체의 온도 변화는 칼로릭의 방출 또는 흡수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노(N.L.S.Carnot)는 열 기관과 수력 기관의 원리로부터 '기계적 일을 하기 위해서 회로를 이루어 가동하는 열 기관을 만들려면,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서로 다른 위치의 함수, 서로 다른 온도의 함수를 통해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물질'이 아니기에 '생성'할 수 없고, '변환'만 가능하며, 한 번 떨어진 물이 다시 솟아 올라갈 수 없고, 한 번 늙어버린 육체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듯이 한 번 사용된 에너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거나 활용량이 급격히 감소한다. 즉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환될 때에는 반드시 모종의 불리한 상황이 부과된다는 것을 이 법칙은 천명한다. 그 벌이란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데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손실됨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존재론적으로 에너지와 동등한 것도 아니었고, 측정의 결과로 추론된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를 수 없다는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추론된 임의적 개념이었다.


2) '양적 도달 이론'은 엔트로피 이론의 응용으로 우리들이 현재 향유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채워졌을 때를 기준으로 기준 전후의 차이를 문제삼은 이론이다. 예컨대 로크 이론에 따른 '3억 만들기' 같은 유행어가 그대로 실현되었을 때 발생되는 현상을 어느 경제학자가 짚은 적이 있다. 우리가 현재 보유한 재화를 가지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3억이 아니라 1억씩 줄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이 모두 3억을 가졌을 때 우리가 지금 생각한 3억의 가치와 그 때의 3억의 가치가 같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것은 경제적 효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맹목적 이론임이 밝혀진다. 아울러 어떤 책에 대한 글을 쓸 때 평론에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작에 의존해야 하는지 자신의 판단을 밀고 나가야 하는지의 고민은 '양적 도달 이론'으로 말끔히 풀린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글도 원작의 글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경우다. 만약 평론가의 글을 어느 정도 보았으면 자신의 입장이 정리되었을 테고, 원작을 충실히 살펴보았다면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와의 타협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양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선택의 입장으로 내몰면서 자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만천하에 알린 결과가 될 뿐이다.


3) 저엔트로피와 고엔트로피
에너지는 일반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집중하고 짜내어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효율의 엔트로피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용하기 가장 수월한 에너지가 제일 처음에 사용되게 되어 있다. 다음 단계로 올라갈수록 처음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원으로 넘어간다. 석탄을 채굴하고, 만들고 하는 것은 땅위의 나무를 베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유정을 뚫고 원유를 채굴하는 것은 석탄의 경우보다 더 어렵고, 원자력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원자를 쪼개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적은 힘을 들여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었으나, 점점 뽑는 에너지가 산출된 에너지를 압박하게 되어 결국 적자 상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카지노에서는 결국 많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안 쓸수록 나에게는 그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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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머리 거인 2006-08-2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승주나무 2006-08-2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머리 거인 님// 안녕하세요. 뭘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jeheee 2009-06-1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사보려고 했는데, 나무님의 서평을 먼저 읽어보고 웜업을 좀 한 뒤 사야겠군요..
가끔 들러, 좋은 글들 읽으며 무지로 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히 읽겠습니다.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혁명의 구조
-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패러다임의 스펙트럼


인문학이 고전할 때에도 기술과 과학은 항상 진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가지는 '축적성(蓄積性)'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오히려 비축적성을 가진다고 한다. 비록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자연에 대한 해석도 새로운 해석으로 대체되고 나면 폐기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연과 인간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들은 시대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으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수천 년 동안 고민해왔음에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인간성의 부재와 불균형, 불평등, 불만 등의 인류를 내부에서 위협하는 문제에 항상 위태롭게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과학만 거기서 자유롭단 말인가. 우리가 축적하였다고 하는 기술력은 단지 어느 시점까지만 효용성을 가질 뿐이다. 각국에서는 지금도 가공할 만한 자연재해와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산재해 있으며 우리들의 과학기술력을 비웃는 각종 바이러스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과학에서는 우리가 흔히 사조(思潮)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정신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패러다임(paradigm)1)이라 부른다.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교체되는 특성을 가진다. 돌턴이 있기 전까지 화학계에서는 용액 안에 화합물(化合物)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어서 정량적인 파악이 불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턴은 섞이지 않는 고유한 성질의 원자가 일정한 성분으로 결정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고 단순히 섞여 있으면서, 고유의 특성을 발하는 혼합물(混合物)이 그것이다. 화학은 그에 의해서 드디어 규칙성과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데, 그것을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전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순에 의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아이디어로 전환된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기란 좀처럼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와 철학가들은 '모험가'의 성격을 띤다. 그들이 이해한 것은 아주 자연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발견에 의해 대체될 여지는 언제나 상존해 있는 것이고, 그런 혁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좀더 근사한 자연관을 가질 수 있다.
패러다임을 스펙트럼이라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이 가지는 특성에 연유한다. 패러다임은 규정짓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패러다임은 체계라기보다는 '사고의 다발'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일례로 산소의 발견자가 누구이며 최초로 발견된 때는 언제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에 답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소의 발견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산소라는 최초의 착상을 얻은 이후에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명료한 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와중에 착오도 적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최초의 발견자나 발견일 같은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들이 '최초'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항상 정답만을 나열해온 교과서의 영향이 적지 않다. 패러다임은 과학에 있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뉴턴이 시간과 공간을 '절대성'의 개념으로 파악한 데 대해 라이프니츠는 '상대성'의 입장에서 보고자 하였으나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가 나오기 전까지 라이프니츠의 '이견(異見)'은 방치되었다. 그러나 항상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에 대한 예견을 심어준 것도 패러다임의 요소이다.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는 활동을 '정상과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발견에서부터 새로운 사실의 발견 사이에 격론이 지나가고 나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수습된 형태의 과학이 정상과학이라 할 수 있는데, 정상과학에서 '이상현상'이 발견되고 그것이 점차 증폭되어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을 때 '비상과학'에 의해 대체되고, 그것이 이제 정상과학이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정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설을 던져주는 것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므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이상의 징후를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들을 납득시켰을 때에야 일각에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새 이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시대가 경직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성의 시기는 훨씬 늦춰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은 몇몇의 학설로 대체되기 힘들다. '패러다임으로 패러다임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들이 긴 꼬리를 밝히며 스펙트럼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과정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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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은 기존의 패러다임[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해내지 못하거나 설명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때, 그러한 전조들 즉 이상(anomaly) 현상을 만족시키는 비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 출현하는데, 이 두 패러다임의 대립기간을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이 때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無知)를 대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동일한 토양 위에 진리로 가기 위한 길만 새로 닦이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놓인 시멘트나 기초자재들은 고스란히 활용되기도 한다. 거기에 몇몇 부족했던 기초 자재들과 인물들이나 지식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방향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며, 이전의 건설계획서를 폐기하고 다시 쓴 새로운 계획서 안에 모든 소재들이 개편되어 공사가 진행된다.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일생을 통해 연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정상과학이 도전을 받는다면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들의 저항은 몇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과학자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여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좀더 먼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첫째와 유사한데, 이전 패러다임이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패러다임은 유보된다. 이 때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농후한 예견들과 이상현상의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지구인들에게 오랫동안 세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관측도구의 발달로 구체적 확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체 이론은 18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라이프니츠도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이라는 뉴턴 체계에 대해서 공간과 운동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암시하였으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과학자 사회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견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연구자들을 위해 진리의 비석에 비밀을 새겨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밤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는 별빛이 수만 년 전의 기억이듯이.
셋째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유보 상태이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위치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곧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어야한다. 이 때의 저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 작업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패러다임의 지위에 올라섰을 때 이전 패러다임은 비로소 대체된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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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패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이 되어, 한동안 세계를 읽는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자연의 역동성과 하나씩 벗겨지는 무지의 자각이 서로 호응하여 과학의 계절을 이룬다.



명예의 전당 - 교과서


교과서는 '명예의 전당'과 같이 역사의 화려한 주인공들을 나열한다. 뉴턴 다음에는 아인슈타인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으며 하이젠베르크도 아인슈타인의 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그에 따른 부수적 요청들과 인내의 시간들, 격론의 굴곡들이 저자들에게는 주요한 소재로 선택된다. 교과서에서 우리가 쉽게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역사의 극적 파노라마를 완벽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가지고는 발견자가 자연의 해석에 매달렸을 때 느꼈을 괴로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견을 느낄 수 없다. 그것들은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오로지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교과서에는 가려져 있는데,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되므로, 우리의 눈에 과학은 결실이 차곡차곡 쌓인 풍요로운 곳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숙한 연구자의 눈에 그것은 자연의 역동성을 억측으로 묶어둔 엉성한 '지식의 다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다른 분야의 교과서에 비해서 과학교과서가 유독 경직된 자세로 탐구자들을 묶어놓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서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인문·철학서적을 보면서 우리는 저자들과 직접 대면한다. 그들이 시대적 상식에 사로잡힌 성향이나 글쓰기의 습성, 개인적 취향 등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문학 연구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 연구는 필수적이다. 만약 도스또옙스끼의 생애를 모른 채 그의 문학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진리의 반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과학 탐구자들은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잘 정리된 교과서를 통해서 이들이 가지는 시대적 무게감을 실컷 맛보게 된다. 과학 교과서는 대부분 발견과 영광·의미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연구자들은 아류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도 그 이론이 생성되기까지 전혀 엉뚱한 과정과 맹점을 알지 못하며 나아가 탐구자들에게 교과서의 인물들은 신의 지시를 받고 그런 발견을 이룬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과학 교과서들(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 과학사(科學史)들)은, 명백하게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 교과서를 가리켜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학의 역사를 축적적으로 채색하려는 교과서의 횡포는 자칫 과학을 박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자연과 함께 인간의 정신과정도 생동하는 것인데, 정수를 뽑는다고 요약을 해버리면 독자가 그것에 대해 정당한 판단을 내릴 기회를 박탈하는 셈이다. 
진정한 과학은 패러다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이며 비축적적인 정신의 총화이다.



위대한 착각


패러다임이 일단 출현하면 그를 중심으로 명료화, 검증화 작업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은 대폭 수정되며 전혀 새로운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발견자들의 착상인데 소위 '위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알기에 자연은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착오는 필연적이다. 착오율을 좀더 줄이고 논의를 세련화시키는 것이 연구자들의 역할인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바로 앞의 연구자가 했던 판단, 즉 '위대한 착각'이다. 맥스웰은 뉴턴주의자로서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르(mechanical eth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었는데, 그러한 착상을 명료화시키는 과정에서 '에테르의 끌림'이란 것은 허구가 되어버렸고 그는 본의 아니게 뉴턴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말았다. 이런 전복과정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착각은 두 가지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신앙'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신의 지위를 찾아 완전히 일어서게 되기까지의 시행착오들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착각'도 바로 후자이다.
이런 착각들의 발견은 많은 이상 현상과 비상적 탐구를 자극시키는 원료가 된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패러다임이었다. 다윈 이전에 진화는 목표-지향적 과정(goal-directed process)으로 간주되었으나, 다윈에게 있어 설정된 목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e-what-we-wish-to-know) 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from-what-we-do-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돈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정상과학의 위치에서 탐구를 수행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착오의 표시들은 우리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인도자가 된다.
이미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우리들은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니, 우리 후손들은 우리들의 탐구자세를 우습게 보아 넘기지 않고, 우리들이 착오를 일으킨 부분을 더욱 신경 써서 관찰할 것이다. 그 때는 정상과학의 교과서와 '착오의 교과서'가 서로 호응하여 현재보다 유연한 패러다임의 생산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 중의 하나는 '축적과 결실'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이때까지 쌓아온 정신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믿음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처럼 자리잡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인간은 '축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한다. 세계와 시대는 그에게 좀더 다른 요구를 하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력을 소비하여 시대를 견딘다. '축적과 결실'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허위와 기만이 틈입한다. 인간이 보다 솔직하다면 우리의 학문의 위기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무기를 갖고 무기가 자신을 언제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편승해 있을 뿐이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는 너그러운 것은 경직된 정상과학의 주범이 되며 답보상태를 만든다. 솔직하고 진솔한 탐구는 자신과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유일한 열쇠다. 조금은 자신에게 냉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예전에 이 배를 탔던 사람들의 방향과 계획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방향키를 정반대로 돌릴 용기가 없다. 이 배는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이 전의 선원들이나 그들의 할아버지들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선배 선원들이 가던 방향을 따라 계속 흘러왔을 뿐이다.


정상과학은 닻이다. 세상의 대해(大海)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표시하는 부표이며, 나의 오늘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비망록(備忘錄)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을 전제로 쓰여지므로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패러다임은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다린다.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며, 자연에는 우리가 평생 만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표본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



- 주(註) -


1) 패러다임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란 뜻의 단어에서 차용해온 단어인데, 학생들이 주어진 기초 지식을 통해 예제(例題)를 푸는 방식에서 여러 가지 변형이 유도될 수 있다.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난 연구자가 사례를 접했을 때 각자 다른 방식의 문제풀이가 생길 수 있고, 서로의 대결을 통해서 보다 올바른 형태의 방식이 채택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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