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기대감소의 시대
폴 크루그먼 지음, 윤태경 옮김 / 황금사자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폴 크루그먼이 대중에게 말을 거는 까닭

폴 크루그먼의 책은 너무 쉽게 읽혀서 경제학과 나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특징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크루그먼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전문적 내용을 담으면서도 비전공자도 읽을 수 있는 얇은 경제서적을 써보지 않겠냐"는 한 출판사의 제의를 받은 것이 서술의 직접적인 동기이다. 경제에 흥미를 갖는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정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대중이 알아야 할 지식과 속지 말아야 할 지식, 경제정책의 기본적 생리, 지향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크루그먼에게 경제학을 쉽게 소개한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처럼 절박한 과제다. 정부관료나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은 경제를 종교화시켜 대중에게 강요하는 방식을 취한다. 종교적 관념으로 포장해 대중을 현혹시키면 경제정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개별적인 이권도 이 틈새에서 나온다. 폴 크루그먼이 보았을 때 이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 크루그먼의 용어를 사용하면 '경제적 복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때문에 그는 경제문제를 상식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대중들이 경제문제를 상식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폴 크루그먼이 <기대감소의 시대>(황금사자)에서 밝힌 명제는 아주 간단하다. 국가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국민 대다수의 생활수준을 결정짓는 요소는 생산성, 소득분배, 고용이다. 그는 이 세 가지만 해결되면 나머지 경제문제는 저절로 풀리고 반대로 이 세 가지를 해결하지 못하면 각종 경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예컨대 인플레이션 자체는 위 세가지 중요 요소가 아니지만 제조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기업경영자가 투자결정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며, 인플레이션 공포가 국민에게 공포감, 불안을 야기하여 저축 동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생산성, 고용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제라는 종교 걷어내기

"국가경쟁력은 미래의 생활수준과 아무 관련이 없다.. 슬프게도 국가경쟁력이란 말은, 이 낱말을 말하는사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벌거벗은 임금님 옷과 같다."

국가가 국민을 현혹하는 데 쓰는 단골 메뉴가 바로 국가경쟁력이다. 무역적자 역시 악용되기 쉬운 소재이다. 크루먼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역적자가 일자리를 없애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은 무역적자가 풍선처럼 부풀었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생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IMF만 생각해 보자. IMF의 가혹한 요구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인정사정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기업은 대규모 순수익을, 국가는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무역적자는 나쁘고 무역흑자는 좋다는 이분법에 빠져 있으면 당국자들이 국민을 속이기가 더욱 쉬워진다.

사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을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국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더라도 전혀 견제를 받지 않는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을 크루그먼은 우려한다. 그는 미국인들을 예로 들며 저조한 정책성과에 안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58쪽) 지금 시대 전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며 그래서 책 제목을 <기대 감소의 시대>로 뽑은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이 기대감소의 시대를 살아갈 때 아주 역설적인 상황들이 생긴다. 일례로 미국의 의료기술이 발달할수록 미국인의 전반적인 의료복지 수준은 오히려 떨어진다.  


기대감소 시대의 빚은 국민과 그 자식들이 뒤집어 써

의료보험료가 어떻게 산정되고 누가 부담하는지를 안다면 회사 의료보험이라고 하더라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료시스템에 대한 관심도 없고 기대도 없기 때문에 최고 기술을 여러 번 남용하고, 그 비용은 본인 부담자들을 위협하고 의료보험 비가입자들을 양산한다.

이것은 경제정책을 몇몇 소수에게만 맡길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몇 년 전 의료보험제도 개혁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골자는 "많이 내고 적게 받는다"였는데, 기대감소 시대의 국민들은 결국 큰 이익이 무엇인지를 보기보다는 당장 내 지갑에서 사라지는 돈이 더 아쉽기 때문에 의료개혁 법안에 반대하고, 개혁을 추진하 정치인들을 외면한다. 마치 기업의 주주들이 한해 수익률을 근거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앞서 언급했던 세 가지 본질적인 경제 이슈에 중점을 두는 것은 정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지만, 기대감소 시대의 정부, 국회에서 논의되는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

이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정부는 국민 입에 단 이야기로 현혹시키고, 부담되는 부분은 말을 하지 않거나 추진을 하지 않게 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국가에 치명적인 정책들을 남발하고 결국 그 빚은 미래의 세대들이 지게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폴 크루그먼이 절박하게 신호를 보내야 하는 대상은 국가관료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고 바로 일반대중이다. 일반대중이 경제 흐름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 없이 정부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몇몇 대기업, 정치권력, 거대언론이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가 고착화된다. 이것이 바로 크루그먼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아닐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31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질병의 잠재력과 가공할 만한 위력


질병이나 고통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자극을 준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공포'의 대상이다. 정치적 선동가들이 '암세포' 같은 병을 비유하고, 히틀러가 전체주의를 강요하면서 대수술 같은 처방을 비유로 든 것은 병이 주는 공포의 은유를 알기 때문이다. 질병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데, 수술이라는 더욱 강력한 고통을 통해서 삶을 유지하느냐, 더 큰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질병이 안내하는 죽음의 길로 가느냐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들 부시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던 앨 고어는 <이성의 위기>(중앙books)에서 공포가 이성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공포와 이성은 모두 인간을 행동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 되지만 권력자는 '공포'에 유혹을 받는다.

한편 질병의 상태는 그 자체로 인간을 고양시킨다. <은유로서의 질병>(이후)이라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내 평생의 의문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의 경우 '열정'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그것은 오랜 질병 상태를 통해서 고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사로 보는 질병(고통)과 열정의 상관관계

비록 신생아라고 할지라도 질병에 오래도록 둘러싸여 있다면 성숙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생아와 유아기 동안에만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맞았다. 부모님은 세 번이나 각서를 썼다. "아기가 죽어도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당시로서는 일상적인 각서라고 한다. 그리고 내 옆에 언제나 '삽'을 준비하셨다. 내일 당장 하늘나라로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명은 급성폐렴, 임파성 결핵, 동맥절단 등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과다한 항생제를 쓴 탓에 신생아 때 머리가 홀랑 다 벗겨졌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땜통'이라는 어감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던지 내 유년시절의 상처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아 있다. 무서운 질병들로 인해 나의 체질과 성격은 스무살이 될 때까지 완전히 주눅들어 있었다.

감기에만 걸려도 꼬박 두 달간 병원에 다녔다. 병원에서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만화잡지를 즐겨 봤는데, 의사 선생님이 부를 때마다 <보물섬>에게 "다음에 병원오면 또 봐야지"하고 말을 걸곤 했다. 병원에 오는 패턴이 5일장처럼 지속되다 보니 연속성이 생긴 것이다.

그 당시 얼마나 민감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그때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만약 지옥에서 누군가 엄마의 목숨과 1,000명의 목숨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왜 이 문제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때로는 엄마의 목숨을, 때로는 1,000명의 목숨을 선택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했다.

"폐병은 자네처럼 멋진 시를 쓰는 사람들을 특히 좋아하는 병이라네..."(시인 셸리가 키츠를 위로하며)
나는 계속 기침을 내뱉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침 때문에 내 모습이 추해지기는커녕, 내게 매우 잘 어울리는 우수 어린 분위기가 생겼다. (마리 바쉬커체프)

도스또옙스끼는 평생 간질에 시달렸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이 질병이나 고통과 직접 관계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연구한 수많은 비평가들은 '간질'이라는 키워드가 도스또옙스끼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서양에서 '벼락'이 치면 엎드려서 하늘에 죄를 비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질병'에 걸리면 역시 엎드려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신에게 용서를 비는 풍습이 있었다. 질병으로 통해서 신이 인간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32년 동안 질병 상태나 고통이 없는 상태가 거의 없었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합친다면 아마 모든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 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매우 이상해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 무척 행복해해하고 괜히 고마워했던 기억이 많이 나아 있다.

오장육부가 다 안 좋고, 왼쪽 팔은 오십견 걸린 것처럼 아프고 치아는 씹는 것을 두려워한다. 눈은 예전부터 안 좋아 안경을 썼다. 왼쪽 다리는 수술 때문에 걸음걸이에서 묘한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오장육부 신체기관 마디마디 중에서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부모에게 받은 건강복도 없을 뿐더러 신생아 때 죽음의 문턱을 넘어오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질병 마디마디, 고통 순간순간마다 내 감정은 고양되었고 내면은 거의 여성에 가까울만큼 섬세해졌다.


질병에 시달리는 고통과 견뎌내는 고통의 어마어마한 차이

그 사망자의 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많고, 별다른 치료도 먹혀들지 않은 주요한 질병일수록 그 질병은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88쪽)

질병과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자극이 엄청나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질병의 비유는 단련되거나 악용될 것이다. 하지만 질병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님은 시민들을 향한 감사 인사에서 "제 남편은 평생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히틀러의 독일 국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고통은 하나의 시험이기도 했다. 불의에 타협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이 주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고통에 처해지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모함과 저주의 고통에 시달렸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런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통'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사실 질병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히틀러의 독일 국민들은 고통에 시달렸고 고통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제시한 허무맹랑하고 위험천만한 수술방식을 지지했다. 애꿎은 독일국민 탓할 것이 아니라 작년의 대한민국 국민만 하더라도 정체모를 고통을 없애주는 만병통치약 '뉴타운 처방약'에 열광해 한나라당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병이 환상이 되고 약장사의 영업 대상이 될 때 불행한 운명과 만난다.

나는 신념적으로 병과 고통은 일종의 메시지를 머금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받기 위해서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고통을 두려워하고, 가능한 한 문제를 피하려고 한다. 때로는 문제를 질질 끌면서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려 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려고 한다. 심지어는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물을 먹고 자신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태도가 바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 스캇 팩 박사,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 일부


고통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에게는 최고의 재앙이 뒤따르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 메시지를 얻으려는 자들은 한 단계 성장한다. 사실 수전 손택이 이 책을 통해서 던지려는 메시지도 이것이다.

손택은 자신의 책이 에이즈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에이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다룬 책-그러니까, 에이즈를 다룬 또 다른 책이 아니라, 그저 에이즈를 주요 사례로 들고 있는 책"이라고 설명해 줬다. - 부록, 수전 손택과의 대화 일부(243)

질병에 관한 주제선별도 그렇고 이를 통해 추구한 메시지도 그렇고, 영감을 주는 작가의 특징은 어떤 주제로 출발하건 간에 인간의 주요한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질병이라는 주제어가 생뚱맞았지만,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 주제가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09-08-2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도 질병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미화되는지를 깨닫고 정말 놀랐어요. 그때부터 생명을 담보한 고통보다도 고통이 주는 실루엣을 그린 문학작품을 경계하게 된것 같아요. 리뷰 잘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9-08-30 20:12   좋아요 0 | URL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은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통을 제대로 그린 책이 많이 나오면 좋겠지만, 대체로 고통은 판매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왜'를 생각하면서 '박쥐'를 보면 재미없다.

박쥐라는 영화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박쥐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다. "너무나 불친절한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의 논리적 개연성이나 극중 인물의 콘텍스트(문맥)을 중시하는 나에게 '박쥐'라는 영화는 너무 뜬금없었다. 주인공이 뱀파이어가 되는 과정이 너무 엉성해 '박찬욱 영화 맞아?'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상현(송강호)가 어떻게 해서 뱀파이어가 되었건 간에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 살아가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다. 하기야 나도 직장 잘 다니다 반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을 보고 "왜 그랬어?"라고 따지듯 묻는 지인들에게 "사연이 복잡해"라는 말 이외에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초반부 스토리에서만 '왜?'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영화 전체에서 '왜'는 마치 금칙어와 같다. 금칙어를 대신해서 차지한 개념은 '바로 지금'이다. 그것은 태주(김옥빈)의 돌변이다. 마치 조용한 연못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상현의 등장에 태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한복집에서 말 잘 들으면서 조용하게 살아온 태주는 상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현을 만나고 나서 인생의 섬광을 느꼈고, 섬광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태주의 돌변이 믿기지 않고 환타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황석영을 보라. 황석영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보다 극적인 변화는 언제든 누구에게서든 일어난다.

인생은 고요한 연못과 같다. 누군가 돌을 던지기 전까지는 다 그렇다. 돌을 맞고 파문이 일다가 다시금 고요히 잠잠해지기는 하지만 '파문'을 만나 파문 속으로 몸을 던지고 아예 해일이 되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을까?




캐릭터를 폭발하게 만드는 힘이 영화에는 있다

영화 <박쥐>를 보고 내내 못마땅하다가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각각 캐릭터들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이다. 소설가든 영화감독이든 가장 어려운 것이 캐릭터의 창조이고, 그 다음이 상황의 설정이다. 나머지는 이것들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박쥐>는 캐릭터가 살아서 날아다닌다. 그것은 단지 연기자들이 연기를 잘 했기 때문이 아니다. 연기력보다는 연기자들이 편안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민 때문에 50명 중에 1명만 살아남는다는 신약 실험에 투신했지만 사실은 상현의 욕망을 숨기기 위한 기제였을 뿐이라는 것이 태주에 의해서 드러난다. 태주 역시 강우에게 학대를 받은 사실이 없지만 상현이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 '학대 받는 여자'가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빛이 날 때가 언제인가? 바로 '욕망'이 작용할 때다.

나는 박쥐의 부제를 <욕망의 저항사>라고 쓰고 싶다. 은폐하려는 자(상현)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망각한 자(태주)로부터 깨어나려는 욕망. 하지만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은 결코 신사적인 결말을 만날 수 없다.

"하나의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의해서 제압될 뿐이다"(스피노자)

욕망의 이데아가 있다면 나는 태주의 욕망이야말로 욕망의 이데아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욕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판타지적 욕망이다. 현실적 욕망은 상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상현의 욕망은 반거충이 욕망이다. 항상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욕망의 편에도 이성의 편에도 설 수 없는 <박쥐> 같은 존재가 바로 상현이다. 내가 제목에 도달한 길은 이와 같다.

상현의 캐릭터를 욕망과 이성의 대결구도로 본다면 상현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상현은 욕망의 이데아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이성도 대표할 수 없다. 상현은 '갈등'과 '고뇌', '방황'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상현의 마지막 결단을 보면 이성이 욕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과연 이성이 승리를 했을까. 이성은 욕망의 엄청난 힘에 눌려 '자폭'을 한 것뿐이다. 고뇌하고 갈등을 한다는 것은 이성이 받쳐줄 때의 일이다. 고뇌와 갈등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성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9-05-1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에서도 호평을 받았나봐요. 기사라 주르륵 떴어요.
-마치 조용한 연못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현상의 등장에 태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앞부분에 모두 '현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상현'으로 고쳐야겠어요.^^

승주나무 2009-05-17 01:17   좋아요 0 | URL
박찬욱 감동의 인지도와 칸의 수상 내역.. 그리고 실제 영화를 접하면서 받는 느낌을 순수학 구획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영화에 대해서 고민을 오랫동안 했지만, 칸의 수상 내역이 호평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지도 모르겠지요. 확실한 것은 판에 박힌 독법으로 <박쥐>에 다가가면 열이면 일곱여덟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란 점입니다. <사이보그는..>필이 조금 나거든요^^

오탈자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어요~~ 현상현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촛불이 다가오고 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는 촛불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하며 촛불에 대한 한계를 '불편하게'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촛불 현장에 머물렀던 눈치 빠르 사람이라면 알만한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촛불이 여중생의 손에서 타오른지 어느덧 1년이 다 돼 간다. 때마침 촛불 주역들도 5개월 만에 보석 석방됐다. 광우병대책회의 박원석·한용진 공동상황실장과 백성균 미친소닷넷 대표, 김동규 한국진보연대 정책국장, 권혜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등 5명은  지난해 10월 29일 조계사에서 나와 11월 6일 강원도 동해시의 한 호텔에서 경찰에  붙잡혀 수감 상태로 있다가 4월 17일 보석 석방됐다. 5월을 앞두고 여러 가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촛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심리가 가장 큰 핵심이다.

그 동안 정부는 '명박산성'을 수도 없이 쌓았다. 촛불에 호의적이거나 관심을 보였던 방송사는 사장을 교체하거나 시사프로그램을 갈아치우거나 담당자를 체포하는 등 '군기잡기'에 나섰다. 종이 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압박을 해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시사주간지 간부는 "기업에서 갑자기 구독을 중단하거나 광고를 끊는 일이 있는데, 자연스러운 절차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슬슬 몸을 풀고 있다. 용산참사나 미디어악법 입법전쟁이나 MBC PD수첩 제작진의 체포 등 떨어지지 않는 소재 덕에 촛불은  단 하루도 꺼진 적은 없었다. 다시 촛불을 들자고 군불을 때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하지만 작년과 똑같은 방식으로 촛불을 들 수는 없을 것이다.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어쩌면 촛불을 드는 '행동'보다 촛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촛불 한가운데서 시를 썼던 이유는

촛불에 대한 낙관론도 점차 사라지고 진지한 분석의 결과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촛불 현장에서 진지한 사유를 펼쳤던 각계의 지식인, 활동가로 구성된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이하 '촛불을 끄셨나요')를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이 책은 촛불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하며 촛불에 대한 한계를 '불편하게'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비판들은 촛불 현장에 머물렀던 눈치 빠르 사람이라면 알 만한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촛불이 비정규직을 비춰주지 못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며 <정치>, <문화>,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촛불>과 연결시키며 중심 키워드에서 주변부로 확대되는 흐름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단지 정치, 문화, 여성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촛불에서 나타난 다양한 문제로 이야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은 소외계층을 상징하며 비정규직, 노숙자, 농부, 실업자, 학생들을 대표한다. 이런 구성은 촛불에 대해서 비교적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촛불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긴밀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촛불 한가운데에서 촛불에 대해 느꼈던 막여한 회의감이 이제야 언어를 찾은 것과 같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 한가운데에서 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취재를 하고 사진을 찍고 블로그질을 했다. 하지만 점점 촛불과 촛불시민, 촛불정신에 관한 추상론이 공허하게 들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취재를 접고 시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 내가 기사나 블로그 포스팅 대신 '시(詩)'를 선택한 것은 촛불이 겉테두리를 비추고 있지 않은지,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무조건반사처럼 타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비추고 세심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등의 회의감이 작동한 결과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중략)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 기형도 시작메모


촛불의 한가운데에서는 적어도 기형도 시인처럼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그어 놓은 불법이라는 허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정이 민주적이었고 토론은 합리적이었고 행동과 말은 상식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상식은 상식의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촛불을 끄셨나요>은 "촛불은 단지 중간계급의 시민운동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촛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촛불시민들은 촛불의 현상을 이해하는 '상식'선에 멈춰 있었지만, 촛불이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일각'이 아니라 '빙산'을 찾아야 한다. 고구마줄기를 계속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만일 10대들의 외침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고통이 우리 사회 전체의 고통을 좀 더 연속적으로 읽어냈더라면, 그리고 그 목소리를 시민 혹은 국민의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성급하게 번역하기 전에 시민이 되지 못한 국민이 되지 못한 그 어떤 주체들의 목소리를 대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면"(125쪽) 향후 촛불의 의미와 성격은 전혀 달려졌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들의 생각이다. 이런 '무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세력의 가벼운 공격에 쉽게 흔들렸다. 이를 통해서 저 집권세력이 시민들을 '배후조종'당한다고 말했을 때,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을 무능력한 아들이라고 폄하했을 때 시민들이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238쪽)

 

질척하지 못한 '사유의 언어'는 아쉬워

<촛불을 끄셨나요>는 이제까지 읽었던 어떤 촛불의 이야기보다 감회를 주고 있다. 한 출판사의 편집자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촛불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도 그의 한 마디 논평 때문이다.
이 책의 모든 논점에 대해서 동의하면서도 책을 덮은 후에 마음속에 남는 아쉬움이 있었다. '상식'을 넘어 깊이 있는 사유를 시도했지만 '상식'을 통과하지 않고 '현장성'이 부족한 점은 이 책의 공감대를 반감시킨다. 정제된 언어만이 아니라 좀 서투르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했더라면 이 책의  비판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냄새'가 잘 안 난다.

이 책이 던지는 비판을 모두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촛불'이 마련해준 '만남의 공간'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친해지는 과정을 지나야만 비로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촛불을 끄셨나요>의 비판점은 성급한 면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예화가 있다. 2008년 ‘촛불’ 이전에는 화물노조가 공적인 가치를 내걸고 파업을 했지만 시민들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민영화 반대, 시민안전, 공공성 확보 등 시민들에게 직결된 사안인데 말이다. 2008년 운수노조는 동일한 명분으로 파업을 했지만, 이번에는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촛불이 가져다준 대화의 힘이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고 미약할 것이다. 촛불은 이제 '1살'밖에 되지 않았다. 촛불이 성년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비판보다는, 촛불이 성년이 될 수 있는 방안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불편함의 미덕'은 매우 중요한 단서다. 촛불은 이제까지 필요 이상의 찬사를 받아 왔다. 촛불이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음에 비해서는 너무 긍정적 평가다. <촛불을 끄셨나요>의 편집주간은 "독자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불편해할 점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불편함'이 촛불을 짚이는 동력이 될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0대 2009-05-03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주주의 외치고 국민소리 자주외치는 자들은 거의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주인장은 아니겠지요?
 
똥파리 - Breathl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상훈(오른쪽)은 사랑하는 애인에게도 한 번 웃어주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깊이 노출돼 있었다.


<똥파리>가 상기시켜준 가정폭력의 기억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영화 카피처럼 온통 욕지거리 투성이 영화를 보고 나는 점집에 가서 무당에게 욕바가지를 한껏 얻어들은 것처럼 후련함을 느꼈다. 

 책이나 영화 중 유독 글로 남기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자기고백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똥파리>를 보았을 때 영화가 보여준 '폭력의 언어'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참 우습다. 결손하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나오는 폭력이 끝에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10초 남짓한 장면이 모든 '폭력'을 설명해 준다. 아들(상훈)이 아버지를 때리는 근친폭력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다.

단지 나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체를 모두 알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날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승주야 너는 커서 아내를 울리지 마라, 아내를 때리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이 평생 남아 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는 공처가가 됐고 아내의 눈물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못난 남자가 됐다. 유년 시절 가정폭력의 경험이 얼마나 생생하냐면 어머니가 들려준 묘사가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금도 남아 있다.

뱃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배삯을 받는 날은 노름방에 직행한다. 그 날도 노름방에 들어가는데 술까지 한잔 해서 뒷주머니에 수표가 반쯤 나와 있었다. 동네 사람이 어머니에게 제보를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표'를 빼내기 위해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도 못할 만큼 폭력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그 매를 다 맞으면서 끝내 수표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한동안 숨어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밀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고, 얼마나 많은 책을 소요한지 모르겠다.

나는 일상의 폭력을 일상의 집요함을 통해 극복한 케이스이지만, <똥파리>의 '상훈'은 그렇지 못하다. 극단적인 폭력과 극단적인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극단적인 사건은 한 사람의 전 인생을 억누르는 경우가 있다. 상훈의 경우가 그렇다. 
 


똥파리의 언어는 바로 '폭력' 그 자체

 <똥파리>는 첫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뉴스나 블로그 등을 보면 첫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흠씬 패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가 남자를 때려눕히고 여자에게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거기다 침까지 뱉는다.

이 장면은 '폭력'을 언어로 이해하지 않으면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다. 즉, 상훈은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도 '폭력'이며, 자신의 사랑표현조차도 '폭력'을 쓴다. 육체폭력이 되지 못하면 '언어폭력'이라도 쓴다. 폭력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것처럼 그의 폭력적인 문자는 영화 전체를 헤집고 다닌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사채빚을 받으러 간 집에서 한 남자가 가족들을 사정없이 패고 있을 때, 동생들에게 '작업'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남자를 때려눕히면서 "밖에서는 X도 아닌 것이 집에서만 김일성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무능력자와 김일성, 폭력을 한 문장에 담아내면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폭력이란 행위 그 자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징후를 드러낸다. 말이 들어갈 수 있다면 폭력이 낄 수 없다. 고립과 무능력만큼 폭력에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영화는 당시 정치상황과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어떠한 장면도 남기지 않았고, 단지 사적인 공간만으로 사회 전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예컨대 가족을 죽인 죄로 15년을 복역한 상훈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한창 때는 가족들에게 허구헌날 폭력을 일삼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후에는 아들에게 밤마다 폭력을 당해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자해를 한 것이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나온 '자기에게로의 폭력'으로 이해한다. 죄책감에 의한 자살시도로 해석될 만한 근거장면을 찾을 수 없다.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를 상훈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다면, 더 이상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주인공 '상훈'이 보여준다.

상훈이 자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연희와 사랑을 쌓아가며 점차 폭력의 언어가 치유되고 폭력 자체를 폐기할 수 있게 된 상황과 폭력의 언어를 버렸을 때 상훈이 감당해야 할 상황은 일종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결말을 봐야 하는 영화의 배열 자체를 가지고 (상훈의 슬픈 결말에 대해서) 한탄을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폭력 언어를 포기했을 때 사회로부터 어떤 단죄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느꼈다는 점을 소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얼리티 <똥파리>의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 고마워

뉴스보도에 따르면 <똥파리>는 <워낭소리>보다 흥행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다. <워낭소리>는 300만이라는 기적적인 숫자를 바라보다가 막을 걷었고, <똥파리>가 새로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보도는 <똥파리>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워낭소리>의 가치를 평가하고 싶다.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등장할 수 있도록 텃밭을 일궈준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연나라의 '곽외'라는 사람이 생각난다.

연나라 소왕(昭王)이 천하의 현자를 구하자 곽외가 "먼저 이 곽외부터 쓰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길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자천했다. 연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삼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는 등 많은 현자들이 몰려들었다.
- 사마천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워낭소리>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타이징으로 훈훈한 감동을 주는 독립영화이지만, <똥파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리얼리티가 살아날 수 있도록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에 대해서 <똥파리>의 관객들은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9-04-2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똥파리가 이런 느낌의 영화였군요. 날 것 그대로의 충격이라니, 심호흡이 필요하겠어요.

승주나무 2009-04-23 21:53   좋아요 0 | URL
한번 기지개 펴시고 보세요^^

프레이야 2009-04-2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말까 망설여지는 영화에요.
독립영화의 활주에 박차를 가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선 끌리지만
보고나면 하루종일 그놈의 욕설과 폭력적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보고싶은쪽으로 더..

승주나무 2009-04-23 21:54   좋아요 0 | URL
요즘 위선을 벗고 까놓고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김앤장의 변호사님들처럼 젠틀하게 웃으며 세상에서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보다 대놓고 폭력쓰고 언어폭력쓰는 이 영화가 더 정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직한 폭력...멋있잖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