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서재에는 책이 꽉 찼다. 그렇지만, 내 주위에는 지금의 나와 같은 '책꾼'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 흔하던 '정음사 세계문학 전집'도 없었고, '삼성판 사상전집' 같은 것도 없었다.

뭐 있어도, 나의 유년이 그런 책들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환경이 나의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리운 마을 '성산포'를 빠져나올 수 있었고, 나의 '철학'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반가운 것은 '이원수 선생'의 소년소녀세계동화집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소년소녀백과사전도 있어서, 그 때의 나는 굉장한 박식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별이 빨개질 수록 늙은 것이고 어두우며, 하얗거나 파랄수록 힘이 센 별이라는 사실이나, 1등성에서 5등성인가 7등성까지 별의 밝기가 있는데, 그 밝기는 등성마다 1.5배(2.5배인가 지금은 헛갈린다)라는 지식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소년소녀 사전'으로 통했다.

그리고 국민학교 3학년 때는 '도서반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읽은 동화책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인도 동화집'과 '독일 동화집'이다.

인도 동화집은 굉장한 화타지를 주었다. 신비한 일도 많았을 뿐더러, 명재판관 이야기는 어린 그 시절 나에게 공정함과 이성을 가르쳐준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마녀가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그 어미의 모습으로 변해서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했다. 진짜 엄마는 온몸으로 아이를 지키려고 하였고, 결국 명재판관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명재판관은 이런 제의를 한다.

너희들이 아이의 양쪽을 잡고 잡아당겨 보아라.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사람이 진짜 아이의 어머니이며, 진 사람은 가짜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자, 아이는 고통스러워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울음소리에 배어 있었다. 진짜 어머니는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 없어서, 손을 놓고 말았다. 마녀의 승리였다. 하지만 명재판관은 마녀가 가짜 어머니임을 밝혀내고, 진짜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 주었다. 명재판관의 판결문이다.

진짜 어머니라면 아이가 고통을 받거나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너는 아이에 대한 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아이를 끝까지 잡아당길 수 있었다. 어머니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어머니일 확률은 전혀 없다. 너는 마녀임이 분명하므로 아이는 진짜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너는 사형에 처하겠다.

독일 동화집은 내게 '공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유년 시절 공포의 대명사는 무엇보다 '검은 고양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공포'에 불과했다. '유령선'의 공포는 '공포'와 '인생', '교훈'을 한꺼번에 주는 작품이었다.

난파선의 주인공이 몇날며칠간 바다를 헤매면서 발견한 배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기서 배와 입을 만족시키고, 잠을 청했는데, 밤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소리와 동작이 언제나 똑같은 것이 주인공은 참 이상했다. 그런데 그 사연을 알게 되자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냈고, 육지의 흙을 그 시체의 머리에 뿌렸더니 시체가 살아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죽을 수 있었다.

예전에 한 신부가 그 배에 탔는데, 선원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진심으로 타이르고, 교화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적이 있다. 신부는 '너희의 지은 죄가 진정 사나운 것이므로, 너희는 머리에 흙이 닿기 전에는 정녕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동화집을 100번도 더 읽었던 것 같다. 유년 시절 나의 '정신'은 순전히 이 동화집의 영향이 컸으며, 아마 내가 지금 '철학'을 지향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 근원은 이 동화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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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의 논술 캠프를 '안전하게' 마쳤다.

행정적으로, 혹은 '사업으로서'는 실패했지만, 나의 즐거운 '상상 디자인'을 시험해본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우려하던' 명절이 되었다. 군에 있을 때도 명절은 언제나 '고향'에 있었는데, 전역을 하고 나서 벌써 두 번째 타향살이다. 추석과 설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구경시켜주지 못한 우리 가족들에게(참 '우리'라는 말은 '독특한 한국적 언어 착오'라고 해야 마땅하다) 미안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즐거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작전'을 짜볼 생각이다.

그 동안 '책'을 너무 안 읽었다. 최근의 서평을 돌이켜보니, 거의 정확하게 '1달에 1편'을 이어갔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읽었다는 말인데, 그것 가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을까. 하긴, 좀 특이한 직장이 나를 혹사시킨 탓도 있겠지만 이번 설에는 이 점을 좀 쓰다듬어야 할 것 같다.

일단 '읽기만 하고 쓰지 못했던' 책들을 '서평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싶다. '종의 기원'은 좀 어렵겠지만, '철학 이야기'라든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작품들은 어찌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야근'도 감수해야겠지만..

그리고 나의 '즐겨찾기' 이웃들에게 가서 '시비'를 걸어주는 거다. 알라딘, 드림위즈, 싸이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세배를 드리고 '덕담'이나 '세뱃돈'도 요구할 생각이다.

그리고 아직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악마의 사도' 같은 생물학 관련 책들도 한두 권 정도는 독파해야 하지 싶다.

마지막으로 '소싯적 이야기'의 후속작으로 '책 이야기'를 좀 쓰고 싶다. 그러니까 이번 '방학'은 '글쓰기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가장 커다란 소망이다.

나는 천성상 좀 무리한 계획을 잡고, '똥고생'을 하는 편이다. 그게 좀 많이 남는다고 할까. 어찌 생각해보면 우울하다 할지 모를 타향에서의 명절이 나름대로의 즐거움으로 승화되도록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책임과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미용실에 가서 미용사(미용 컨설턴트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와 상담을 함께 했다. 나의 고민은 머리카락이 두꺼워서(어릴 때 머리카락 싸움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내 머리카락 하나로 다섯 가닥을 꺾어냈던 적도 있다) 항상 뜬다는 말을 했더니, 그 미용 컨설턴트 왈

'뜨면 뜨는 그대로 즐겨요'

그래! 이런 말에 느끼는 바가 없으면, 공자의 서당에는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더군다나 그 말을 들은 곳이 생각지도 못했던 '미용실'이 아니었던가.

명절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므로, 지금부터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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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2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뱃돈은 패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향이라고 하셔서 외국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하늘바람 2006-01-2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화작업 기대됩니다
 

원래 '나와 누나와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은 한 편에 담으려고 했던 에피소드인데, 쓰다 보니 말이 많이 붙어서 3편으로 나누었다. '화장실'이 세번 나오는 것은 당연히 세 가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마지막 세 번째가 하이라이트가 된다는 의미도 된다. 화장실 시리즈 마지막에 오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쓸지 말지 고민이다. 일단 '깍두기' 님이 누나의 명예를 보장해준다고 했으니까 마지막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와 누나와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 - 엉덩이 이야기

그 때는 화장실에 관련된 이런 유머도 있었다.

병팔이는 맨날 화장실에 떨어진다.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화장실에 떨어지려 하면 팔을 벌리라고 했다. 화장실에 간 병팔이는 팔을 벌려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병팔이는 너무 좋아서 '만세!'를 외쳤는데, 그와 동시에 다시 화장실로 빠지고 말았다.

이건 시시한 유머이지만, 그 당시 어린이들이 얼마나 화장실에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도 실제로 화장실 그 구멍에 빠지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화장실에 빠지는 것은 사소한 공포이지만, 나는 화장실 곳곳을 기어다니는 '구더기'가 더 무서웠다. 누나의 손전등으로 화장실 안을 살피면서 구더기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소문에는 구더기가 '사람의 살'을 좋아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어린이에게는 꽤 큰 편이었다.

지금 하는 고백이지만, 살작 엉덩이를 대 본 적도 있다. 그 덕분에 안심해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내 엉덩이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덩이'에 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나와 나는 화장실 안에서 많은 추억을 녹였다. 하루는 서로 급하다고 다투었는데, 결과는 함께 동시에 '하자'였다. 다음은 그와 그의 남동생이 나눈 대화이다.

누나 : 승주(아! 가명을 쓸 걸 그랬다)야, 근 데 둘이 하기에는 구멍이 너무 작은 것 같아.

나 : 아니야, 누나 엉덩이가 대빵 커서 그래. 나는 이렇게 조그맣잖아.

누나 : 구멍에 넣지 못하면 옆으로 샐 텐데, 그러면 또 청소해야 되잖아.

나 : 그럼 누나가 나중에 싸등가!!(짜증 좀 섞임)

누나 :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 엉덩이 두 개를 같이 있으면 함께 쌀 수 없으니까, 내가 엉덩이를 누나 거 위로 해서 쌀게.

누나 : 그러다가 네 똥이 내게 묻으면 어떡해?

나 : 뭐 닦으면 돼지..(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누나 : 아니 그게 아니라, '똥독'이 그렇게 심하다잖아. 나 똥독 오르면 어떡해..

나 : 에잇! 그러면 누나가 엉덩이 올리면 되잖아. 내가 똥독 걸릴게. 빨리 싸기나 해

누나 :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 설사란 말야. 니가 나중에 싸라..응?

나는 씩씩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고, 화장실 밖에서 자꾸 '아직 멀언(멀었어)' '아직 멀언' 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화장실 문도 자꾸 걷어찼던 것 같다.

누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똥이 멈춰서 안 떨어져, 어떡해?'

그날 밤 긴 시간 동안 동생과 누나는 화장실 안팎에서 실갱이를 벌였다는 슬픈 이야기는 이로써 끝을 맺는다. 다음에는 좀 '청결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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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6-01-2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부터 읽으면서 정말 아련한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걸 느껴요.
변소와 구더기에 얽힌 추억....저도 정말 많았는데....페이퍼에 쓴 적도 있죠^^
누님의 명예는....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렸을 때 이 정도 추억이 없는 사람 있겠어요?^^

갑자기 어렸을 때 세 살던 집 주인이 똥간을 안 퍼줘서 똥이 산처럼 싸인 변소에서 어디다 볼일을 봐야할지 난감해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ㅡ..ㅡ;

승주나무 2006-01-2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공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자신을 유난히 '유난히'로 보는 경향이 있어가지구요. 공감을 할 이야기가 맞겠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니죠???
 

나와 누나의 화장실 문화

우리집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뀐 것은 작년이다. 언제나 우리집 화장실은 밑이 뚫려 있었고, 돼지는 없었지만, 똥을 떨어뜨리면 밑에서 '퐁' 하고 똥물이 튀어오르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쉬아'는 밭에다 하거나, 아니면 '싱크대'(아~ 이거까지 밝혀야 되나?), 목욕탕 같은 데다 하는 편이었다.

'검정고무신'에 보면 '기영이'도 그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엉덩이를 손으로 막을까. 그네를 타면서 타이밍에 맞춰 떨어뜨릴까. 참 공감이 가는 만화였다.

먼저 나의 이야기다. 아마 국민학교 2학년쯤의 일일 것 같다. 나는 화장실에서 주로 머리를 잘랐다. 조금씩 조금씩, 어쩌다가 그런 '요망한'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티는 잘 안 났다. 그 때는 뭔가를 자르는 게 참 좋았던 것 같다. 그 해에 내 친구 녀석이 가위를 가지고 품바처럼 '철렁 철렁'하면서 놀았는데, 거기다 손을 댔다가 잘라먹을 뻔한 일도 있다. 암튼 그 때 그 시절은 엉뚱하면서도 참으로 '위험한' 시기이다. 그런데 문제의 그 날은 좀 많이 잘랐다 싶었는데, 학교에 가자 애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내 사촌형도 내 반에 오더니 '완전 원숭이'라며 웃어댔다. 그냥 원숭이도 아니고, 완전 원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둘 것. 어린이가 거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머리를 자르면 '원숭이' 모양이 나온다. 그 별명은 국민학교를 졸업해야 떼어낼 수 있었다.

우리 누나는 참 이상하다. 화장실 갈 때마다 맨날 나를 데리고 간다.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거 하고 있을 때는 더 짜증났다. 그것은 누나가 읍내로 유학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누나는 화장실 갈 때마다 손전등 큰 걸 들고 갔다. 그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손전등을 쓸 일도 없었고, 쓴 적도 없었는데, 순전히 누나 화장실용으로 산 것 같다. 화장실에 맨 처음 가면 손전등을 켜고 화장실 구멍 안을 구석구석 비춘다. 안에서 귀신이 나와서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내가 두 학년 어렸지만, 어린 내가 봐도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암튼 그렇게 한 5분 정도 확인을 한 후, 일을 보는데.. 나는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다. 달도 보고, 쥐새끼 소리도 듣고,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어쩔 땐 파도가 모래를 쓸어담는 소리도 듣는다. 그리고 '승주야', '승주 있니', '승주 안 갔지' 하는 소리를 1~2분 간격으로 듣는다.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어느 날은 못 미더웠는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누나는 완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난 항상 그 좁은 화장실 안에 들어가서 누나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궁금한 것은 내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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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제목을 '누나와 똥 이야기'로 하였다가, 누나와 똥을 함께 쓰는 것은 아니다 싶어 제목을 위와 같이 바꾸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과 '화장실'에 얼킨 이야기이므로, '똥'은 2선으로 내려가야 한다.

미식가 돼지를 돋통(통시,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함께 쓰는 제주도 특유의 양식)에 두지 마라

우리 삼촌네 집에는 돼지를 키웠다. 그런데 화장실은 '없었다'가 아니라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에 돌담으로 구멍을 만들어서 거기 앉을 수 있게 만든 것이 화장실이다. 우리들이 쓰는 수세식 화장실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는데, '고려호텔'이라는 곳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두 곳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좌변기가 차가워져 일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눈치 빠른 한 정치인이 미국 유학 갔다가, 좌변기 커버를 가지고 와서 이승만 대통령한테 바쳤는데, 굉장히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후에 장관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를 '변기통 장관, 좌변기 장관' 하였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문제는 이 놈의 돼지와 나의 신경전이다. 녀석이 '똥맛'을 아는지, 돼지우리에 떨어진 '식은 똥'보다는 '갓 데운' 인분을 또 그렇게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돼지놈이 그 구멍과 좀 떨어져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날도 급했지만, 돼지가 구멍 가까이 있어서, 돌멩이를 던져서 거리를 좀 떨어뜨렸다.

그래서 겨우 구멍 위에 앉을 수 있었는데, 밑이 축축하고 뜨끈뜨근한 것이었다. 이 '느낌'은 상상만 했지, 실제 경험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 이 놈의 돼지가 혀로 넬롬 내 엉덩이를 핥는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거의 비데 수준이었겠지만, 녀석은 이빨로 내 '똥'뿐만 아니라, 엉덩이도 씹어먹을 태세였다. 나는 하마터면 우리로 떨어질 뻔했고,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갔다. 지금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으면 그 때의 공포가 몰려온다.

공교롭게도 '돼지의 공포'는 그 일뿐만이 아니다. 주위가 바다여서 여름이면 가까운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나는 그렇게 헤엄을 잘 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모래사장하고 가까운 바다, 그러니까 내 목 정도 오는 곳에서 놀고 있었다. 가까운 언덕에서는 어른들이 '돼지'를 잡고 있었다. 그 때의 장면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공포'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단 낮은 절벽에서 돼지를 떨어뜨린다. 돼지가 기절을 하면 몽둥이로 살짝 다듬어 주고, 용접공이 쓰는 그 센 불로 돼지를 '그을린다.' 물론 이것은 '돼지 잡기 시나리오'다. 그날은 당연히 '시나리오'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돼지는 낭떠러지가 낮았는지, 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내가 설레설레 헤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헤엄쳐 왔다. 그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끔찍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고, 울었다. 주위의 사람들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다행히 돼지는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웰컴투 동막골'을 보았는데, 멧돼지가 신하균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보고 또 그 '공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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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6-01-2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데....ㅎㅎㅎ 우리 조상들은 현명했다니까요^^

승주나무 2006-01-2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 느낌을 유추해보면, 돼지의 혀는 굉장히 깨끗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휴대폰을 거울삼아 잇바디의 고추가루를 남김없이 제거하듯, 그 놈도 입청소는 깔끔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 느낌을 유추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