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살라 인디아 - 현직 외교관의 생생한 인도 보고서
김승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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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유명한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이지만 최근에 '아룬다티 로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작품으로 노벨상과 같은 급이라는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신데렐라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끝으로 문학적인 글쓰기와는 결별한다. 이후로 댐 건설에 관한 아주 실무적으로 기술적인 글에 천착하더니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 칼럼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는 공격적인 작업을 한다. 한국에는 《6월이여 오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녹색평론사 펴냄)이 일로 아룬다티 로이는 중산층의 총아에서 공적으로 전락하지만 그의 공격적인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 비크람 세트(Bikram Sett),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i) 등과 같은 영문학 작가들이 영국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 맛살라 인디아 91쪽

인도의 외교관으로서 기업들과 자주 대면하는 저자는 으레 겉할기 정보로 가득 찬 안내서의 내용을 탈피하기 위해서 인도에서의 경험을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풀어내면서도 개인적 경험이 녹아들어가게 썼다. 그래서 신뢰가 갔다.

특히 이 책은 인도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들을 조율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알다시피 인도는 신성장 엔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중국과 같이 양극화의 수렁에 깊게 빠져 있다. 그리고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엄존하는 현실이 있고, 폭탄테러 등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현재진행형'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디라 간디 전 수상은 1984년 소위 ‘푸른별 작전’으로 불리던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강경 진압이 화근이 되어 암살당했다.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국민회의당을 이끌던 라지브 간디 수상에 대한 폭탄 테러는 인도 평화유지군 파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스리랑크 분리독립주의 무장단체 ‘타밀 타이거’의 소행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에서 정치,종교,인종적 갈등으로 인해 테러나 암살은 그 뿌리가 깊다. (맛살라 인디아 본문)

인도 정치 상황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담담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게 읽는 맛을 높여 준다.

그러나 심각한 불협화음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인도의 국정 운영은 실제로는 민주 행정의 기본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연립정부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선거구와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가능한 최선의 공통분모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느림과 인내의 미학은 그래서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인도의 토양에 맞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최근 미국 CNN은 '인도가 중국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특집에서 인도의 손을 들어 주었는데, 그 요지는 민주국가로서 견제와 절충이라는 합리적 틀을 갖춘 인도가 장기적으로는 일방적이고 탄력성이 없는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추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물론 미국 저널리즘이 보도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저자가 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는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팩트를 중심으로 하고 오랜 경험과 인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서 오는 연구를 통해 지면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에 대한 개론서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단, 인도를 여행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인도 여행서가 따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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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대량학살된 팔레스타인들을 위하여, 다른만화시리즈 02 다른만화 시리즈 2
데이비드 폴론스키, 아리 폴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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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번씩 읽었던 <바시르와 왈츠를>

예전에 한문 배우러 다닐 때 강독을 담당했던 선생님은 매일 아침마다 삼국유사를 한 페이지씩 본다고 했다. 매번 들고 다니면서 읽는 게 삼국유사이지만, 아침에 읽을 때마다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논어나 맹자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생각날 때마다 읽곤 했는데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최근에 좋은 기회가 생겨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보았는데 영상미와 음악이 돋보였다. 그래서 책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다를까 하여 보았다. 처음에는 영화의 이미지와 책의 이미지가 같기 때문에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을 더 뒤적거리다 보니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단순히 팔레스타인 학살 사건을 주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폭력과 황폐화, 그리고 전쟁 경험으로부터 훨씬 멀리 도망갔는데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스라엘 퇴역병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전쟁에서 죽는 것과 죽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전쟁 첫 날이었다. 나는 채 열아홉 살도 되지 않았다. 아직 면도조차 시작할 나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호위를 받으며 한편은 과수원이고, 다른 한편은 바다 길을 끊임없이 총을 쏘며 내달렸다.
누구를 향해 쏘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단지 총을 쏘아댔다.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
전차병 : 무엇을 해야 하죠? 당신은 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죠?
장교 : 쏴
전차병 : 네? 
장교 : 나도 몰라. 그냥 쏴.
전차병 : 기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장교 : 그럼, 총을 쏘면서 기도 해.

- <바시르와 왈츠를> 35~37쪽

전쟁의 모티브가 됐던 사브라ㆍ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사건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학살만 기억하기 쉽지만 학살은 맨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할 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학살보다는, 학살로 가기 위한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그 안에 자신의 존재가 갇혀 있기 떄문이다. 책 안의 심리 실험도 흥미로운 주제였다. 전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기 팔다리를 자르듯이 기억의 못된 부분을 잘라버리는 인간의 코나투스(자기생존본능)가 절절히 흐르는 것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120쪽 남짓에 불과한 데다 만화책이기 때문에 10분 정도면 일독이 가능하다. 하지만 10번 정도 읽어야 작가의 메시지가 하나 둘 잡힌다.


광고불매운동과 바시르 사건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내용에만 천착하는 게 아니라 현실과 갈마들며 살펴보게 된다. 그렇게 하는 독서가 나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관련을 짓는다는 느낌이 나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는 것이다.
사브라ㆍ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사건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정부를 실각시키고 수립한 괴뢰정권의 수장 바시르의 암살 사건에서부터 비롯됐다. 바시르를 따르던 팔랑헤당 당원들은 우리나라 현대사로 따지면 '서북청년단원'(서청)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승만에게 서북청년단이 있듯이 바시르에게는 팔랑헤당이 있었다. 팔렝헤당 당원들이 바시르를 따르는 것은 거의 광적인 추종에 가까웠다.

팔랑헤당 민병대들은 항상 바시르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어. 바시르 목걸이나 귀걸이. 바시르 시계 그리고 이러저러한 바시르 등을.
바시르는 그들의 우상이었고, 슈퍼스타였지.
그들이 바시르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에로틱한 것이었어.
그런데 그들의 우상이 왕관을 쓰기 직전에 살해된 거야.
바시르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끔찍할 것이라는 건 너무나 명백했어.
- <바시르와 왈츠>를 94쪽


이스라엘 군대의 비호를 받으며 사브라ㆍ샤틸라에 도착한 민병대원들은 그러나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이 시기에 레바논 주둔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은 베이루트에서 튀니지로의 퇴로를 확보하는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튀니지로 모든 병력이 피신했고 남은 것은 어린이들과 노약자뿐이었다. 그들이 민병대원들의 처참한 희생량이 되었다. 파악된 것으로만 3,000명이다.

'뒷북 학살'이라는 건 시공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패턴이다. 우리 속담에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긴다."라는 말이 있듯 제주 4.3 때도 무장대원들에게 습격을 당한 토벌대들은 무장대 색출을 핑계로 무고한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

조중동도 이에 비유할 수 있다. 2008년 5월 100만 인파가 분노의 촛불을 들었을 때 조중동은 대표적인 심판대상이었다. 시민들은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조중동에 광고하는 기업에 대해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광고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본 조중동은 '희생량'이 필요했고 그것이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이라는 카페다. 사실 그들은 조중동이 받았던 충격과 크게 관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카페 개설자와 도우미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국가기관인 검찰과 공모해 탄압을 가했다.

검찰은 공소사실에 'ㅎㅎㅎ'라는 댓글을 달았다는 사실을 적시했고, 카페 메인화면에 태극기를 그려넣은 넣었다. 참 궁색하다. 검찰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24인 대부분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언론운동을 '살인'(초범)과 같이 보는 검찰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서로 격렬히 싸우다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보다 더 처참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패잔병들에게 학살을 당하는 상황이다. 조중동과 검찰의 뭇매를 맞고 죄인 취급을 당한 언론시민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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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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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듀런트라는 미국 철학자의 <철학 이야기>(문예출판사)를 통해 나는 철학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책을 한 권 집으면 다음 권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말처럼 철학의 매력(사실은 듀런트의 문장)에 이끌린 나는 그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잡고 읽었다. 좋은 구절을 정서하면서 여름방학 두 달을 다 보냈다.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는데, 에티카 5장을 다 읽을 쯤에는 뽕 맞은 것처럼 몸이 붕 뜨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서관 한가운데에서 뽕 맞은 상태가 된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스피노자, 스피노자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철학과의 교수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해준다.

"승주야. 특정 철학자의 저서를 통해 철학 전체를 관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철학사 전체를 통해 흐름을 조망하고 특정 철학자로 다가가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당장 이 말을 시행에 옮겼다. 철학사 중에서 읽을 만한 책을 선배에게 물어서 '러셀'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를 찾아낸다. 러셀은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철학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러셀뿐이 아니다. 베르그송도 철학자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양철학사>는 러셀의 재기발랄한 문장으로 오감을 자극한다. 다만 나는 그때 <스피노자>라는 유럽의 합리론에 귀의해 있었기 때문에, 라이벌인 영국 경험론의 계보를 갖고 있는 러셀의 서술 방식이 유감스러웠다. 특히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철학과는 무관하게 철학자로서의 삶의 자세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말은 사실 철학보다 철학 외적으로 스피노자를 깎아내리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대중적인 책이다. S.P.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는 정리가 무척 잘 돼 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비전공 철학도에게 철학사의 핵심 요소를 가장 깔끔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분량도 한권으로 깔끔하다. 만약 철학의 내부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코플스톤의 철학사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다. 지금은 절판돼 아쉽지만 <그리스 로마 철학사>와 <중세철학사>, <대륙합리론>, <영국경험론>, <현대철학사> 등 시대별로 이루어진 시리즈는 전공 철학도들에게 필수 도서로 추천되곤 했다. 코플스톤처럼 독하게는 아니지만 철학교수들이 사랑하는 철학책은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하)이다. 나도 상권을 읽고 부분 부분 참조하긴 했지만, 철학의 내면과 상황적 필연성을 개연성 있게 잘 연결시킨 점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책들은 서양철학사에 머물러 있으며 <세계철학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철학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상,하)(까치), 인도의 철학은 라다 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1,2,3,4)(한길그레이트북스)를 보면 된다.

이제야 본서를 소개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광고 카피 때문에 조금은 주저했던 것도 사실이다.

철학의 본고장 독일에서 출간되어 60만부 이상이 팔렸고,
전 세계 20개국에서 번역된 세계 최고의 철학사!
1950년 초판 출간 후, 끊임없는 개정과 증보를 거듭해 1999년 17번째로 개정된 최종 결정판의 완역 출간!

이 책은 현재적 가치에 충실하며 사실은 영원한 질문의 다른 표정인 현재적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믿어도 좋은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세 가지 원칙은 책의 어떤 면을 펼치더라도 위배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내게 매우 만족감을 주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1. 처음으로 만난 '세계철학사'다.
2. 강의 방식을 훌륭하게 탈피했다.

철학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철학사'를 한 권에 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대체로 서양철학사, 중국철학사, 인도철학사 이런 식으로 단행본을 나누게 되는데, <세계 철학사>는 인도철학, 중국철학, 서양철학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1,200페이지라는 분량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평생을 놓고 사유하며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똑똑한 선생이 나타나 강의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세계 철학사>는 처음으로 책에서 나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말을 걸어준다는 것은 상황을 교과서처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철학자나 그 상황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따져 준다는 말이다. 1,200쪽을 단숨에 읽을 수는 없지만, 밤에 잠자기 전에 고요한 기분으로 오래 두고 읽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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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8-11-14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쉬르베르거, 렘프레히트 등등의 책들이 책상 앞에서 노려보고 있네요.. 이 책들 언제나 제대로 읽어볼지 졸업 전에는 해야될텐데ㅠ 소개시켜주신 세계철학사도 나중에 한번 펴볼게요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8-11-14 22:14   좋아요 0 | URL
오~ 바라 님~ 이미지가 엄청 길어서 아래가 많이 남네요. 철학도이신가 봐요, 반갑습니다. 힐쉬르베르거와 램프레히트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추천합니다. 후자를 먼저 읽고 전자를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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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에 책 사느라고 차비가 떨어지면 부모님으로부터 '책 타고 학교가라'는 면박을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 있다.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 리뷰어들은 책을 타고 학교에도 가고 별나라에도 가고 못 가는 곳 없지만, 유독 이 책에서만큼은 책을 놓고 떠나고 싶은 욕구를 감추지 못했다.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북하우스)이다. 북하우스와 리더스가이드가 함께 준비한 '서명숙 작가와의 미니간담회'를 앞두고 참석을 신청한 리뷰어들의 리뷰를 분석하여 제주올레를 책으로 걷는 10가지 맛을 뽑아냈다. 책과 글로나마 '제주 올레'를 소개하지만, 그나마 맛보기로 삼았으면 한다. - 리뷰어 주

1. '걷기'와 '제대로 걷기'는 다르다

'걷기'는 두 발이 멀쩡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대로 걷기'를 할 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파란흙) 용기를 내서 가까운 곳부터 걷기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기에,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에 대한 두려움과 소음 그리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는 걷기 여행의 기쁨을 반감"시켰다.(이환) 좀 더 아름답고 안전한 길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라면 제주 올레 서명숙 대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좋겠다.

"(내가 생각한 길은) 실용적 목적을 지닌 길이 아니다. 그저 그곳에서 놀멍, 쉬멍, 걸으멍 하는 길이다. 지친 영혼에게 세상의 짐을 잠시 부려놓도록 위안과 안식을 주는 길이다. 푸른 하늘과 바다, 싱그러운 바람이 함께 하는 길이다."(제주 걷기 여행, 39쪽)


2. 역사가 서려 있는 푸르고 아픈 땅, 제주

제주 올레는 단지 '제주'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날빛에 반짝이는 제주 올레의 묵직한 풍광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옛날의 제주는 유배의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좌절과 아픔도 겪었다. 지금의 제주는 육지 사람들의 관광과 소유의 대상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낙서가) 때문에 현지인의 심정으로 바라보면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역설적'이기 그지 없다. 리뷰어 '낙서가'는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을 제주 올레에 부쳤다.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내가 사랑하는 사람)


3.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

제주에 대해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리라면 '광광지'나 '관광'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이거나(낙서가) 렌트카를 빌려 타고 말 그대로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게(감은빛) 일반적이다. '여행(旅行)'이란 말은 매우 오래된 글자인데, 춘추전국 시절 세 치 혀 하나로 전국을 주유하며 왕을 설득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유세가를 떠올리면 여행이라는 의미가 쉽게 들어온다. 목적지로 가기도 전에 산적을 만나서 빈털터리가 되거나 목숨을 빼앗기기도 하고,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가 보람도 없이 쫓겨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때문에 여행이란 몹시 번거롭고 고단한 일이다. 이 본래의 의미가 '제주 걷기 여행'에는 담겨 있다. 튼튼한 두 발로 힘들게 걷다가 지쳐서 돌출된 바위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을 때 바라본 풍광, 이것이 제주 올레를 가장 잘 표현한 순간일 것이다. 우리가 '산티아고 여행'을 '관광'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4.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었어?

시사IN의 전 편집국장인 문정우 씨는 제주올레를 걷고 나서 아들과 함께 동네 걷기를 하다가 아들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 평소처럼 과속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빠 '간세다리 정신' 벌써 잊은 거야?" 하는 통에 몹시도 민망했다는 후문이다. 리뷰어들도 문정우 씨처럼 '병'을 앓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나는 이미 '빨리, 빨리' 병에 걸려있었다. 무엇이든 빨리해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 가야하며,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조급병에 걸린 것이다.(poison)

'간세다리'란 나무늘보 같은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속도가 주는 오만함과 위협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천연의 '흙길'이다.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걷기에는 안성맞춤인데, <제주 걷기 여행>을 읽을 때도 '간세다리 정신'을 잊지 말라는 리뷰어의 충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책을 천천히 그야말로 놀멍 쉬멍 읽었다. '간세다리'가 되어 읽어야지 이 책이 맛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워 읽다가, 쭈그리고 앉아 읽다가, 엎드려 읽다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읽다가,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이맛살 찌푸려가며 앞뒤 맞춰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순서대로 꼭 읽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편안한 책이다." (파란흙)


5. 제주의 '산티아고'를 그리며

저자 서명숙은 나이 50줄에 800킬로미터 산티아고 도보순례에 도전한다. 물론 주위에서 다 뜯어말렸지만, 막무가내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23년의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홀로 떠난 산티아고 길에서 자주 떠올렸고 돌아오면서 올레 길을 만들고자 마음을 먹었고 실천에 옮기어 현재는 여덞 코스 105킬로미터의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red7370)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을 산티아고 로망, 하지만 직접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은 훨씬 적다. 하지만 산티아고 로망은 더 이상 가슴 속에서만 자맥질하지 않는다. 제주 올레 서명숙 대장의 노력 덕분에 그들은 "이제는 산티아고의 길보다는 제주올레를 먼저 찾게 될" 테니까.(롤러코스터)


▲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른 데다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왼쪽의 아줌마가 바로 서명숙.

6. '서명숙'을 모르고서 '제주 올레'를 논하지 말라.

제주 올레를 기획하고 한땀한땀 일군 올레 대장 서명숙을 알면 제주 올레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인생부터가 드라마틱하다.
<시사저널> 창간멤버 서명숙은 1989년 6월부터 2003년 4월까지 15년 동안 정치부 기자·정치부장·취재1부장·편집장을 거쳐 2005년 오마이뉴스 편집국 국장을 역임하는 등 23년 동안이나 기자 생활을 하면서 광화문에서 '놀았다'. 섬의 정기를 머금고 태어났지만 아스팔트 길게 뻗은 도시에서, 그것도 세상사에 가장 민첩하게 반응하는 기자 생활을 20여 년이나 하다가 이를 단호히 버리고 다시 '느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까칠한 기자들을 호령하는 편집장 역할을 하며 '여성'보다는 '남성'의 삶에 익숙한 그가 '여성'으로 돌아왔다. 50줄에 그가 얻은 두 개의 키워드는 '느림'과 '여성'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수십 년 동안 지나온 '속도'와 '남성'의 여정이다.


7. '속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다

News는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News 간에 경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News의 생산자인 기자는 소비자 보다 항상 빠르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기자는 다른 직업보다 빠름이 생명이다. 그리고 빠름은 바로 자본주의의 생명이 아니던가.
단위 시간당 생산성, 시속 몇 킬로미터 등 빠른 움직임은 이 시대의 복음처럼 우리의 삶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느리다는 것은 어쩌면 죄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환)

걷기와 뛰기의 차이. 뛰면 걷는 것보다 '많은 곳'을 볼 수 있지만, 걸으면 뛰는 것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석기시대의 걷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기에(이환) 빠른 삶은 왠지 낯설고 빠름에서 오는 편리함보다는 빠름을 위해 들이는 비용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서와 여행의 공통점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면 돌아오는 것을 기약할 수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향을 엄마 뱃속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8. '제주어'를 만나는 재미

<제주 걷기 여행>에서는 제주어(사투리)와 표준어가 병기돼 있는데, 덕분에 리뷰어들은 제주어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제주 출신 친구가 엄마나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지는 이유는 제주어가 외국어처럼 매우 생소하기 때문이다. '간세다리'라는 말부터가 그렇다. 리뷰어 오로지 관객은 '무엇보다 제주어로 쓰여진 글과 해석, 제주단어의 풀이가 몹시 인상적'이었다고 썼다.
리뷰어 '롤러코스터'도 어렵게 한 단어를 익혀서 써먹는 데 성공했다.

"겅허민(그러면),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

9. '제주 올레'를 위협하는 인스턴트 관광지

제주 올렛길을 연결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명당자리마다 들어앉은 '관광지'다. 특히 제주 올레의 가장 중요한 길목 중의 하나인 '섭지코지'는 '보광'이라는 회사가 지은 대규모 관광단지가 동강내 버렸다.

제주를 갔을 때, 섭지코지의 불행을 목격했다. 대규모 관광단지를 짓는 듯 온통 공사 중이어서 차도 막히고 경관도 훼손되어 있었다. 거기에 무슨 드라마의 세트장인지가 경관을 훼손하면서 버젓이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영업을 하고 있어서 씁쓸했는데, 뭔가 더 어마어마한 게 지어지는 모양을 보니 다음부터 섭지코지는 절대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감은빛)

이외에도 제주를 위협하는 대형 괴물들은 속속 태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형 괴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어디 제주뿐이랴.

제주는 '여성'의 섬이다. 모든 자연 경관과 사람들의 마음이 섬세하고 온화하다. 하지만 제주를 방문해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기는 매우 힘이 든데, 그것은 남성적인 힘에 지배를 많이 당해서 '보이는 부분'은 이미 남성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탑동 부근에 이마트가 생겨난 이후로 제주 동문시장과 재래시장 등 상권이 거의 붕괴되었는데, 얼마 전 신제주에 이마트 2호점이 생겼고 롯데마트도 생겼다. 성산일출봉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는 신양리 해수욕장에는 삼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보광이라는 회사에서 대규모 호텔단지를 조성해서 순식간에 '인스턴트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제주는 '패키지'라는 치밀한 괴물에 산채로 잡혀 여성성은 아주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승주나무)

제주올레가 제주의 숨은 혈맥을 이어 피가 통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0. '제주 올렛길'이 자꾸 자란다.

<제주 걷기 여행>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명숙의 본문과 무적전설의 별책부록이다. 별책부록에는 제주 올레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세심하게 담겨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책 본문에서는 올레길 6코스까지 밖에 안 나오지만, 무적전설의 별책부록에는 7코스까지 나온다."(감은빛) 본문이 편집 작업에 들어가 있는 동안 7코스가 개발되었고, 편집 막바지에 작업했을 별책부록에는 그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길이도 늘어나고 있다. 현재 7개 코스 101.1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2008년10월30일자 신문에 보니 10코스까지 200 킬로미터로 길이가 추가되었다고 전한다. 거기다 내년 초 12코스까지 만들어질 것이고, 11박12일의 일정으로 전 세계 도보여행자들과 함께 '제주 걷기 축제'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제주 올렛길이 자꾸 자라나는 것이다.
책을 사면 올렛길이 늘어나고, 친구들과 함께 올렛길을 밟거나 올렛길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면 역시 올렛길이 신이 나서 늘어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제주 사람이지만, 올렛길이 더욱 쑥쑥 자라나서 대규모 관광단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길'이 태어나기를 바라고, 산티아고보다 더 아름답고 편안한 제주올레 완결판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은 오랜 세월 감정의 앙금이 쌓인 동생과의 재회 과정과 서명숙의 유년을 살지게 했던 '길'이 주는 성찰적 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림들에 대한 회상이 저널리스트의 대중적인 문체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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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만났던 촛불남매


세계적인 촛불, 세계적인 공간 광화문, 청계천


적절한 동기와 도구가 주어졌을 때 그룹 행동이 갖는 힘은 폭발적이다. 촛불문화제의 적절한 동기는 '쇠고기 협상'이었고, 절적한 도구는 '촛불'이었다. 그리고 이 이면에 흐르는 문맥이 있는데, 그것은 변화이다. 10년 전만 해도 촛불문화제는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서키(Clay shirky)는 택시 뒷자리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에반'의 이야기를 통해 5년이나 10년 전과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한다. 에반의 휴대폰을 주은 인물은 사샤. 그는 에반이 휴대폰을 찾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고, 자신이 경찰에 의해 붙잡힐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에바가 홈페이지를 통해 이에 대한 글을 올리자 유저들은 관심을 제공함으로써 에반이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했고, 에반은 그 관심을 잘 이용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이 사건은 유수의 신문사들에게까지 알려져 보도되었고 한 동안 사회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지역적 사건이 순식간에 국제적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 그리고 옳은 대의를 위해서라 그룹 동원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촛불 이야기에 적용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가녀린 여중생 십여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때만 해도 50만의 촛불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부당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홍수처럼 사람이 늘어났다.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로 인해 청계천과 광화문은 단지 서울의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게 된 세계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 국제적인 촛불이 타오른 사건에도 달라진 시대적 상황과 대중들의 역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새로운 대중은 '조직'이 다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자세히 알수록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이미 할 의향이 있는 일도 더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면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다. 이것이 인센티브의 법칙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 경제학에서 이견이 없는 몇 안 되는 법칙 중 하나가 바라 사람들이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끌다, 27쪽)
기존의 조직과 새로운 조직 사이에는 '관리비용'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기업은 소프트웨어를 만들 그룹이 스스로 형성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노동력을 관리한다. 직원들은 자유와 봉급을 맞바꾸고 직원의 생산물을 감독하고 모니터하는 비용을 부담한다. 조직이 수백, 수천으로 커지면, 그 관리자들까지 관리를 해야 하고, 결국에는 관리자들의 관리자들도 관리해야 한다. 종국에는 그 조직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엄청난 관리비용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시간이 돈'인 까닭이다.
조직의 달라진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저자 클레이 서키가 직접 경험한 AT&T와의 파트너십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사이트 스페시픽(site specific)라는 작은 웹 디자인 회사에서 기술 책임을 맡고 있던 저자는 AT&T라는 거대 기업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저자의 회사는 대부분 20대 청년이었으나 AT&T의 파견직원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이 논쟁하게 된 것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채택 때문이었는데 저자의 회사는 펄(perl)이라는 언어를 쓰는 데 비해, AT&T는 C++을 고수했다. 그들은 '펄'이 '상업적 지원'을 어디에서 받느냐고 물었지만, 펄은 '필 커뮤니티'로부터 지원을 받을 뿐이다. 그것도 무료로.
대기업의 파견 직원들은 이 사고방식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돈을 지불하고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커뮤니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생각해내 comp.lang.perl.misc에 올리자 AT&T와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답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국 실패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펄 커뮤니티는 규모를 더욱 키워간 반면 AT&T는 거듭된 대규모 정리해고와 대체 전략 개발에도 불구하고 회사 몸집이 보잘것 없을 정도로 줄었고, 결국 2005년에는 10년 전에 비해 규모가 1/5의 가격으로 매각되고 말았다. 펄 커뮤니티는 오늘도 펄을 사랑하는 수백만 명이 펄로부터 하루를 시작해 펄로 하루를 마감하기 때문에 건재하다.
이렇게 새로운 조직이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낌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시간을 영속하는 것이다.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두 번째 촛불의 길을 열어라

1989년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는 시민들과 청년들이 동독에 대한 반체제 시위를 시작했다. 500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경찰은 50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매주 시위를 열었다. 처음에는 아주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때문에 정부로서도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사태를 주시하기만 했다. 솔직히 청계천에서 촛불을 든 여중생의 숫자보다 적은 군중들을 탄압해서 무슨 이익을 보겠는가. 그런데 매주 시위를 진행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시위가 떡잎 단계를 지나 만개를 시작한 것이다. '대중적 기반'이란 시위 참가자 수가 아니라 시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잠재적인 사람들의 수로 측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순식간에 시위대는 수십 수백만으로 불어나 베를린장벽은 허물어졌다. 이것을 정보의 폭포현상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시위대의 숫자로 일희일비를 한 셈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시위를 하면서 50회를 넘긴 시점에서 피로도가 발생했다. 이것은 몇 가지 법칙을 위배한 셈이다. 앞서 말했던 '용이성의 법칙'을 어겼다. 내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루 하루 시위에 가세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 직장인은 며칠 동안 시위에 참여하느라 직장에서 졸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두 번째 실수는 너무 자주 시위를 한 것이다. 로테이션이 되면서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라이프치히처럼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적당했던 것 같다.
집단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식의 3단계를 통해야 하는데, 촛불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다.

1단계 : 모두가 무엇인가를 아는 단계
2단계 : 모두가 알고 있음을 모두가 아는 단계
3단계 : 모두가 알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단계

인식의 3단계에 도달해야만 집단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시사인을 창간하는 과정에서 30억원이라는 자본금이 모인 것은 그들이 언론자유를 실천하면서 1년 내내 싸워왔고 독자들이 도왔고, 다른 언론이 지원하면서 인식의 3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시사인의 경우 집단행동은 '지갑을 열기'였다. 촛불 역시 마찬가지다. 쇠고기 협정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주장하면서 인식은 2단계로 넘어갔다. 매일같이 촛불시위가 진행됐고 경찰들이 진압에 나서며 2단계를 넘어 3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는 불이 났다. 아마 가장 짧은 시기에 인식의 3단계로 도달한 것이 촛불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인식의 3단계가 당장 정부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인식의 3단계가 반복되면서 규모가 커지면 정부 역시 자세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곳에서 두 번째 촛불을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다. 두 번째 촛불이 인식의 3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은 성찰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최근의 촛불국면과 광고주압박운동 등 역사적인 대중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서 파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클레이 서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고>를 숙독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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