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바가바드 기타 한길그레이트북스 18
함석헌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나는 오늘 궁극(窮極)에 다녀왔다



궁극(窮極)을 향한 노래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을 향한 노래이다. 이는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옳은 행위에 대한 논증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바가바드기타』가 가지는 유일한 논증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궁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놀라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뇌를 견뎌내야 하며, 전장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혈육이며, 지고의 순례길 중에는 온 형제 가족이 낙오되거나 죽은 끝에 결국 혼자 남은 외로운 수행길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때 귀를 맑게 하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노래는 나를 더 이상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고자가 나를 위해 배려한 과정이며, 그러한 지고지순한 진리가 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자아를 초월한 초자아란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그 상태를 꿈꾸어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갈구했으며, 파스칼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참한 상태'를 체험했다.
궁극에도 시간은 있지만, 이 때의 시간은 '영원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연대순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일인데, 인도인들은 창조의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를 거룩한 어머니 혹은 우주적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주적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단위가 놓여 있는데, 어머니의 시간 개념으로 가장 말단의 단위인 칼리 유가(kali yuga) 하나만 해도 사람의 생애 43만 2천년이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벽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방식이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다.
'궁극'을 경험한 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찾아 올라갔던 정신의 여정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녹아야 하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은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궁극'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은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행하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우주적 생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단맛을 본 사람은 모든 단맛을 다 이기듯이 우주적인 의식을 체험했던 사람은 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한다. '궁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세태의 괴로움은 사소한 추억에 불과하리라.

이 궁극의 노래는 노래의 언어로, 노래의 귀를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운 향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가락과 정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신의 내면 속에서 따라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서술 방식


『바가바드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아르주나의 맏형이 두료다나의 술책에 빠져 도박으로 나라와 형제들을 다 잃고 13년 간 고행을 하게 된다. 시일이 지났을 때 두료다나는 반환을 거절했고, 생활을 꾸려 나갈 약간의 땅조차 수용하지 않아 결국 형제끼리 창을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야기는 비화되었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8)고 말하면서 둘의 토론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서두에 전쟁이 나온 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 주는 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료다나와 아르주나는 같은 전장에 서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이미 같은 종류가 아니다. 두료다나는 다만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자기욕망의 표현인 반면, 아르주나는 자신의 고뇌와 만인의 사명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다. 이 둘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요약되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주장한 요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인도의 경전인 이 책은 어느 경전과 같이 주석가들의 적절한 비유가 돋보인다. 라다크리슈난, 간디, 함석헌 등의 저술가들은 경전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고전들과 인물들을 끌어다 이 책의 '보편화'에 기여했다. 궁극의 초월정신은 어디든 통하며 지고의 경지에서 마주앉아 세상을 논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경전 중 가장 궁극에 가까운 저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 역시 궁극의 입장에서는 한낱 사소한 제도에 불과하다.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
……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사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어떤 경지나 단계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깊이 이해하고, 깨끗이 비우고, 참되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신에게 보다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할 뿐이다.


궁극의 가르침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관계에 현혹되어 있다. 즉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는 자는 반드시 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다는 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가 옅은 감정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아를 우주적 입장에서 사려하기 힘들다. 적과의 갈등과 대립이 2중, 3중고로 다가오는 이유도 물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홀가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의 생에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받는 법이고,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얽어매 지고자와의 대면을 어렵게 한다.
이 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궁극은 '평정한 마음'이다.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어떤 일도 없으며,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이 때 나의 행동은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이끌리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지고자에게 기울여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모든 운명을 지고자에게 맡기고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 있으려면 믿음도 두터워야 하겠지만,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로서 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신과 하나가 될 때 나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으며 나의 행동과 말들은 생기가 돋는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지배도 아니며 신을 위해 일할 뿐이며,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안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해도 차부는 움직이지 않듯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신이 타고 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차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 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궁극의 평정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궁극의 가르침은 '행위'이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실천'의 덕목이다. 평정을 갖춘 행위는 십만 대군보다 의연하며 강력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생하였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無爲)'를 포함한다. 무위는 자신의 행위하되 따로 행위한다고 말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칸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는 없고, 지고자의 '명'을 받고 행할 뿐이다. 마치 차부가 이끌 듯이 움직이는 말과 같다.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위를 이겨낼 때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전장에 나가거나 산을 기어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나는 자신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 『기타』의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을 닮았다. 하나님이 부리는 대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대자연과 나는 하나가 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완성한다. 이 때 나의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오래된 동양의 정신에서 '불성무물不誠無物', 즉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이 아이는 어린이도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세상에 사랑을 나누얼 줄 수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은 지고자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로운 기다림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 준다.



무위는 곧 내버림이다. 아르주나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장자 -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 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 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 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빔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내버림이란 것은 수십년 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성향이나 습관, 이성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아의 저항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림은 행위를 통해 높은 수준(영적인 수준)에 있는 신령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무지하면 수십 년 동안 틀린 지식을 신봉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진리의 빛을 쬔 사람이라면 승복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신 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집 중의 편안한 집이며, 완성된 자아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


『기타』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유연한 신앙에 있다. 궁극의 종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유연성이다. 아직도 중동에서는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윌 듀런트는 종교 등의 미묘한 문제로 생기는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의 역사를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이 없고 반드시 지정된 신만을 섬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가서 똑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강요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 그의 신 둘을 모두 죽이기 때문이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호수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서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시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은 욕망에 의해 그려진 신이기 때문에 『기타』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욕구하는 것만을 취할 뿐이다.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마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정통종교의 이름으로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을 거짓으로 해석한 종교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 처음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이 나오는 현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스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살짝 집어넣은 경우다. 가르침이 천년이고 만년이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온몸을 비우고 맑은 정신으로 그저 지고자의 명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임의의 판단은 불성실과 죄악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뺑끼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든 행위든 성(誠)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변태되기 십상이다.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밖에 없다. 그것도 임의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이미 나의 결정을 초월한 행위이다. 나의 최고의 판단에 의한 행위는 신이 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인(仁)을 생각하고 있으면 인을 행할 수 있지만, 인한 행위가 수천 년에 걸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행위의 지속성을 담보할 바탕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우리가 자유라 부르기는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생 동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6-09-1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를 하려는데 궁금해서 책도 보려고 합니다. 땡스투!
 
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피의 세계
- 잔치



잔치論


소피의 세계는 철학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이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잔치에는 어중이떠중이, 이야기꾼, 훼방꾼 같은 온갖 군상들이 모여 있다.
잔치란 '불러온다'는 의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오면 좋고, 그들과 함께 기쁜 일을 함께 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잔치의 문화는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남몰래 외딴 곳에 가서 함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둘의 관계를 천명하고 거기를 시작점으로 삼음으로써 둘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끌림에 의해서만은 아닌 좀더 정당한 가치를 획득한다. 잔치의 포용성은 엄청나서 철천지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완전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잔치'와 '놀이'를 권해 보라.



20세기의 인간상으로 떠오른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는 놀이를 노동을 위한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속성으로 본 개념이다.(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잔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고조시키며, 힘을 북돋우고, 활력을 준다. '잔치'의 의미를 잊어버린 교육은 이미 죽은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놀이와 잔치가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리라. 누군가 아주 간결하게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잔치란 다양한 사람들이 두서 없이 모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격조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잔치의 한 종류인 '놀이'를 살펴보아도, 명확한 규정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낸다. 아마 우리들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의연하게 가둘 수 있는 것은 '잔치'밖에 없으리라.


소피의 세계는 철학자들을 초대한 잔치에 환상과 추리라는 놀라운 재료를 추가하여, 우리들을 가상과 현실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환기시켰을 뿐이다.


문학과 철학의 협연(協演)


문학과 철학은 사이가 안 좋은 쌍둥이 자매와 같다. 잔치에 함께 초대되어 하나가 춤을 추면, 다른 하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감수자의 말처럼 철학은 개념으로 말하고, 문학은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상충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할 때 절묘한 협연은 물건너 가는 게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하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보였으니, 문학가와 철학자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 철학자이지만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러셀이나 베르그송은 하나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에 충실하였기에 그러한 평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점에 널브러져 있는 '저자세의 철학서', 철학은 뛰어나긴 한데, 어떻게 뛰어난지, 어떻게 인생에 유용한지 이야기할 수 없는 문맹의 철학자들, 철학의 대중화라면 으레 '통속 철학'을 떠올리는 철학의 무지자들. 이들은 잔치판 옆에서 암표상, 사기꾼들을 모아 놓고 또 다른 잔치를 벌인다.
소피의 문학은 철학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절묘한 문학적 가치도 빛나는 작품이다. <소피>는 철학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 때는 꿈처럼 철학의 전체를 어림해 볼 수 있고, 철학에 어느 정도 관여한 후 읽었을 때는 긴 여정 안에 쉬고 있는 두 발과 어깨를 편안하게 주물러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소피>가 문학적 가치를 얻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 때문이리라. 철학의 이야기와 문학의 이야기가 만나는 점은 유기적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철학에 끌려 가지 않고, 독자적인 형식을 발휘한다. 철학은 종종 인물의 엉뚱한 행위와 애매한 단서를 찾는 열쇠가 되기도 하여 문학과 철학의 묘한 협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소피>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성서에서 예수는 여러 번 비유의 효용을 말하던 비유의 천재였다. 비유는 철학의 기본 명제인 '관계'를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으며, 자칫 철학적 논의에 피로한 독자에게 '단비'가 되어주기도 한다. 건강한 비유는 건간한 작품을 낳고, 철학과 문학을 단번에 만나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실 '비유'는 문학가의 긍지만이 아니라, 철학자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철학자에게 이 세계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세계로 비쳐진다. 철학자와 어린이는 이처럼 중요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는 일생 동안 어린 아이마냥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장담해도 좋으리라.
- '본문' 중에서


지고한 시간들의 잔치


철학은 오래된 질문의 전승이다.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물음일텐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수많은 질문으로 나뉘고 각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이 계승하였다. 마치 빅뱅의 현상처럼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고 있던 간단한 사유가 폭발하는 순간 '잔치'는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나 먹을 것은 아직도 많고 할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가지 주제가 잔치를 주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신이 모든 것을 꾸미고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어려운 일이나 궁금한 점은 모두 신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에 잔치의 이야기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꿈꾼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몇몇 사람의 가슴속에 샘솟았다. 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일은 자명한 이유에 의한다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 다음은 인간이었다. 이렇게 신에서 인간, 인간에서 물질, 물질에서 관념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넘나들면서 잔치는 더욱 흥미로워졌고, 이에 따라 여러 이야기꾼들이 자리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괴테는 잔치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대문 왼편에 이렇게 써놓았다.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리


고매한 선각자들의 잔치


오랜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옥같은 시간들을 장식했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야기를 주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광석보다 빠른 신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람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이다. 물질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는 탈레스와 원자론자들이 있었고, 인간의 발견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자신의 뜻을 제자에게 전승하고 제자는 또 다른 제자에게 전승하여 삼천년의 시간을 한줄로 꿰뚫으며 경험과 이성 사이에서 건강한 논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한 논객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고 사람들은 놀라고 즐거워 하였으나, 새롭게 나타나는 강자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사유로 세상을 다 설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맹자도 역시 잔치집 문을 나서며, 잔치를 열 밸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대문 오른편에 써놓았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낯설음, 화합, 화해


당신이 국경 아래쪽에 있었더라면 나의 친구가 되었겠지만, 그 위쪽에 있으니 나의 적이오.
-파스칼, <팡세> 중에서


우리들의 의식과 환경은 거의 완벽히 우리를 가둬놓는다. 아무 문제없이 수많은 세월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의식하고 발견하자마자, 친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와 브루노가 죽은 것 역시 이 위협 때문이다.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세상을 안배한 조화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감성'은 신이 주신 선물이 분명하다. 세상은 경이로 가득 차 있으나, 유년기를 넘으면서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계절이 바뀌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 '생명'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힐데와 소피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존재가 확고하고, 자명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천문학자가 보는 별은 수천년 전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인지 과거의 모습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또한 내 존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철학은 화합과 조화의 예술이다. 국경과 전선을 넘나들며 공평한 이데아의 세계 안에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밝은 혜안만 가진다면 계급이나 격차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한다. 엠페도클레스나 플라톤, 칸트 등이 철학자로 더욱 존경받는 이유는 학설과 사유를 종합하고 화합했기 때문이다. 기발하고 신선한 상상을 하는 것은 누구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을 '세계적 사유'로 발전시키기까지는 고된 과정과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소피의 파티장에 만화와 동화의 주인공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의 유년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가 존재이고 비존재인가 하는 기준을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차라리 수십억 년 동안 타고 있는 거대한 불의 불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실재적일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하고, 가치판단의 세계를 좀더 넓고 깊고 오래된 그것으로 관찰할 때 나의 존재는 드디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영복 선생의 글에 호감이 가는 것은 글에 감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 정제된 마음의 고요한 울림이다. 뜨거운 여름날 좁은 감방 안에서 여러 명의 죄수들과 생활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를 증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는 감옥으로부터의 토로는 알량한 이성과 뭇 감정들을 걷어낸 간결한 발림이다. 그런 그가 『강의』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은 것이다. 내가 아는 글쓴이는 누군가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다. 맹자도 ‘사람의 가장 큰 병폐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지 않았던가.


반신반의 펼쳐본 『강의』 안에서 귀가 순한[耳順]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부끄러웠다. 아니, 그가 나를 일부러 ‘부끄럽게’ 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의』는 여러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그가 ‘강의’라는 제목을 내세운 것부터 묘한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강의에 대한 반성’이다. 이제까지 고담준론에 머무는 무미건조한 강의를 떠나 함께 울고 웃고 떠들면서 인생의 희노애락과 생생한 세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야 진짜 강의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감방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글쓴이가 고전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세 권으로 정해져 있는 옥방(獄房)의 규정에 ‘단, 경전과 사전은 제외’라는 예외 때문이다. 이보다 강렬하고 필연적인 동기가 어디 있을까?


강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중국 제일의 고전들이다. 왜 그가 중국 고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5천년 동안 한결같이 읽히고 있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샘이란 곧 원류에서 시작해야 옳은 것이다. 그의 서술 방법에는 두 가지 배려가 담겨 있다. 하나는 책 안의 고전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배려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훑어보기는 했지만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글쓴이가 각권의 요지와 관점, 즉 중(中)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각권의 순차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대륙을 관통하는 황하의 흐름, 그 문명의 영토에 갈마든 사람들의 긴 호흡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에 관한 고찰이다. 시대와 민족에 소용이 되기 위해 영웅들은 뼈를 깎아가며 무기를 다듬고 그것은 그의 아들 손자들이 좀더 어려운 적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한 재료가 된다. 이러한 사정 위에서 피를 튀기며 최후까지 아귀다툼한 전국(戰國)의 칠웅은 관계를 가지며, 왜곡된 진시황의 표상과 제국 통합의 역사가 관계를 가지며, 맹자의 성선과 순자의 성악이 근사한 관계를 갖는다.


나는 귀가 고운 이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맹자,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관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나와 세상의 관계가 끊어졌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승주나무 2005-10-3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 1주 우수리뷰 추천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