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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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유한하고, 우리의 생에 일어나는 일들은 무작위적인 우연으로 인한 부조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 삶이란 없다."는 자명하지만 암울한 명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일 방법이 있다. 그것은 더욱 거시적인 관점에서 개별자의 이 삶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신화가 될 수도 있고 우주가 될 수도 있다. 광대한 시간, 공간의 기원을 탐구하며 개개의 삶의 내면으로 돌아오는 여정의 안내자로 이 책의 저자로 물리학자인 브라이언 그린을 강력 추천한다. 그는 자신의 표현처럼 "환원주의적 관점"을 고수하며 "인본주의자의 감수성으로 생명과 마음을 탐구"하는 어렵지만 가치 있는 경로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여기 이 지상에서 지엽적인 문제들로 마음이 산란한 우리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하고 시의적절한 관점의 전환으로 유도할 수 있는 환상적인 책이다.


우주의 탄생과 별의 기원과 우주 공간으로 뿌려진 원소가 우리의 몸이 되기까지의 경로를 브라이언 그린은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임을 하나로 통일하는 통일장 이론을 연구해 온 터라 끊임없이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그 진화와 엔트로피의 지침에 집중한다. 종교적인 서사나 신의 불가항력에 대한 이야기는 논외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형이 종교인이고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유대교적 의례가 위로를 주었다는 개인적인 고백이다. 이론 물리학자로서 환원론적 관점을 고수하며 모든 생명체를 입자의 배열로 설명하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에피소드들의 틈새로 인간적인 모순을 고백하는 대목은 오히려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생명이 물리법칙에 의거하여 분자의 배열로 설명되지만 그 생명 중 우리 인간이 가지는 각자의 서사를 양립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그가 약속했던 초반의 환원주의자적 관점을 고수하며 인본주의자의 감수성으로 탐구하겠다던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머리를 맑게 하면서 가슴에 감동을 준다. 완전하고 완벽하고 딱 떨어지는 이론의 정립만을 향해 나아갔더라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성취다.


물리학의 기본 원리를 이용하여 빅뱅과 별, 행성의 탄생 과정, 마침내 인간의 출현까지로 이 장구한 이야기가 끝을 맺는 것은 아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비유를 통한 우주의 광대한 미래의 예견으로 마침내 '시간의 끝'으로 우주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머나먼 미래까지 브라이언 그린의 이야기는 확장된다. 영원의 시간에도 결국 마침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개별자적 한계 너머로 희구하는 영원의 끝에 방점을 찍으며 그는 이야기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태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바깥이 아닌 내면이다. 이미 제시된 답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과학은 바깥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러나 과학을 제외한 모든 것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짙은 어둠을 뚫고 소리와 침묵에 각인되어 끊임없이 영혼을 자극할 것이다.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흔히 과학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천상 스토리텔러인 과학자의 아름답고 평이하고 적확한 문장들이 그런 우려를 일거에 씻어버린다. 같은 물리학을 공부한 번역가의 번역도 훌륭하다. 양자역학이론을 비롯한 몇몇 어려운 분야의 이야기들의 완급과 깊이 조절도 대중들의 이해도를 감안한 배려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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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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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준 감동의 여운이 길었다. 지금도 작가가 묘사한 건축 사무소의 아침에 모두가 연필을 깎는 정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그가 그려낸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한 사람의 성장과 노쇠의 여정은 마쓰이에 마사시만 표현할 수 있는 유려한 흐름으로 각인된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색깔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동안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제 인생의 능선을 하나 넘는 중년의 길에서 소에지마 하지메가 귀향하는 삶의 이야기에 날것의 감정이 덮쳐와 거리두기가 쉽지 않아 때로 멈추어야 했다. 특히 누나 아유미의 죽음의 대목에선 작년의 죽음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러나 삶처럼 읽는 일도 결국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고 넘어서야 하는 과제다. 


이야기는 훗카이도 섬의 에다루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소에지마 가족의 삼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중심 화자는 하지메와 누나 아유미, 고모 가즈에, 도모요, 에미코, 할머니 요네 등 수시로 변동하며 똑같은 일도 각자의 시점에서 재해석되어 서술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의 반려견 에스, 지로, 하루의 이야기가 있다. 동물은 생과 사와 멸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의 곁에서 충직하게 그 순환의 주기에 복종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위로와 교감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깊다.


서두의 하지메를 따라다니는 '소실점'은 중요한 상징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 돌아가는 그 죽음의 은유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메는 누나 아유미와 소년 시절 친한 남매가 아니었다. 관심사도 성향도 판이하게 달라 공감대가 없었다. 그러나 천문학을 공부했던 누나가 삼십 대에 급작스럽게 암투병을 하게 되고 죽기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누나의 죽음으로 향한 여정에 동행하게 된다. 그것은 하지메도 결국 따라갈 길이라는 강한 인식과 맞물려 있다. 


작가는 하지메의 할머니 요네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돕는 조산사로서 일했던 과거를 결말부에 배치함으로써 결국 우리 인간이 나이들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소실점으로 축소되는 여정을 또 다른 의미에서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차원에서의 순환이 아닐까. 누군가는 죽고 다시 누군가는 또 태어나며 다시 저마다의 소실점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각자 유한한 삶과 그 삶의 종결부를 함께 선사 받는다. 그것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결혼하지 않은 고모들, 그 시누이들과 옆집에 살며 개인적인 행복이라곤 누릴 수 없었던 어머니,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어버린 누나, 그 자신도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삶이다. 마침내 돌아온 고향에는 치매에 걸린 고모들, 그런 주변 상황에 무관심한 늙은 아버지, 무기력한 어머니만 남아 있다. 그러나 마쓰이에 마사시는 하지메가 절망하거나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만의 미덕이 있다. 소에지마 가는 어떤 의미에서 세속적인 의미의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의 이야기다. 소에지마 가의 할머니 요네는 수많은 생의 탄생의 광장에서 잊지 못할 역할을 했다.


"자, 잘 왔어. 넌, 잘 온 거야. 봐, 자, 그래 편하게 있어. 자, 보라고. 봐, 태어난 거야. 여자아이구나, 축하해. 수고했어. 아주 잘 왔어."

-마쓰이에 마사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이 얘기는 할머니 요네가 손수 받은 손녀 아유미가 태어나자 한 환영의 인사다. 아유미가 채 사십 년을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도 생이 세상으로 분출되는 것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믿음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아유미의 죽음 전이 아니라 아유미의 죽음 뒤에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동생 하지메는 그것을 온몸으로 수긍한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집에서 가족에게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생의 경로는 애닯도록 아름답다. 이제는 노년에 접어들었을 작가가 깨달은 삶의 비의는 소에지마의 이야기로 형형하게 형상화됐다. 그가 이야기하는 삶에 새기는 시간의 각인의 지형도는 여전히 이토록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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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2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드디어 이책 읽으셨군요, 책의 원제는 ‘태양의 개(光 の 犬)빛의 개)‘인데 한국어 제목이 훨씬 더 잘 와닿는것 갔습니다.

blanca 2021-04-12 11:02   좋아요 0 | URL
제목을 잘 지은 것 같아요. 그래도 원제목 일본어가 예뻐서 궁금했는데 그런 뜻이었군요!

2021-04-12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3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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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을 서사화하는 일은 도발적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명시적일 때 아이러니하게 실패한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욕이 이야기를 펼치는 일에 앞설 때 독자들은 물러선다. 제일 좋은 지점은 그 두 개가 우연인 것처럼 조우할 때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읽으며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절로 다가갈 수 있을 때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런 면에서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비교적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일곱 명의 여성 작가는 공통적으로 주류 문화, 지배 담론에 저항한다. 거기에서 소외되고 배척된 여성 퀴어들, 장애인, 독립영화 종사자들, 계약직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리멸렬하지 않다. 어떤 예상이나 기대를 배반하는 지점에서 생동하는 결기가 빛난다. 


대상작인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첫문장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세상은 자명하게 반으로 나뉜다. 혼자 먹는 사람과 같이 먹는 사람.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혼자 먹는 둘은 만난다. 담배를 피면서. 연구소에서 나는 젊은 여자 사무보조 계약직이고 그는 연구자다. 그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나뉘고 둘은 그것을 기민하게 인식하지면 교묘하게 서로에게 은폐한다. 언뜻 나와 그의 이야기로 전개될 것 같았던 예상은 그가 연상시키는 대학시절의 강사 장 피에르와 그가 훈장처럼 달고 다녔던 나의 친구 연수의 그것으로 보기좋게 빗나간다. 장 피에르는 운동권이었지만 집안의 지원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학생들은 그를 숭배했다. 어리고 천진한 우리들은 그에게 보기좋게 이용당한다. 그것은 그립지만 역겨운 시절이었다. 이 시절의 기억의 포말은 모두를 뒤덮는다. 우리 모두 지금 돌이켜보면 도무지 아닌 것들을 동경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럴듯한 가짜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신분의 장점과 아우라를 영리하게 이용해서 그렇게나 스스로가 비판했던 기득권으로 들어가 연수 같은 수많은 젊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서른일곱의 나는 그의 서른일곱의 모습을 회고하며 그것이 유린한 스무 살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그 환멸이 그저 무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의식하는 행위를 다짐한다. 결말은 상투적일 수 있지만 여운은 길다. 


김멜라의 <나뭇잎이 마르고>는 놀라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체가 그랬다. 체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심지어 자음 발음이 뭉개져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금방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뒤틀리고 뭉개진 발음과 몸을 가진 체는 우리가 예상하는 수동성이나 주눅든 모습이 아니다. 학교에서 제안한 홍보모델 일에 대고 큰 소리로 "옹사오 영예고 옹짜오 우여역을 행악 하이 마고 제애오 온을 지불해어!"(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우려먹을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해요!")라고 외칠 수 있는 여성이다. 김멜라는 체의 대사를 발음이 뭉개지면 뭉개지는 대로 그대로 쓰는데 이게 또 묘한 게 점점 이야기에 몰입할 수록 마치 그 얘기들이 모두 정상인이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장애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성정체성도 당당하게 오픈하는 체의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이런 모습이 결국 우리가 우리와 서로 다르다고 의식하게 되는 성적 소수자들이나 장애인들과 소통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 익숙해지는 것, 가치 판단이나 위계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것.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박서련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열두 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당신'으로 하는 이야기는 게임을 잘 못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당신이 직접 게임 과외를 받아 아이에게 가르치려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신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당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는 보상받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의식하며 아이를 사랑한다.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찔린다. 많이. 열다섯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한 것. 그것을 혹시 지금 여기 아이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박서련의 '당신'처럼 반드시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깨달음은 거칠다. 아이들은 '엄마'를 욕처럼 금칙어로 사용한다. 나는 아이를 플레이어로 게임하지만 그 캐릭터마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설정은 도발적이고 과감하게 우리가 아이를 키우며 놓치는 부분을 가격한다. 아이를 키우는 많은 엄마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는 영화를 꿈꾸는 영화를 만드는 언젠가는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건 영화를 상영하고 싶어했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시네필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송가다. 생존과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꿈을 유예하고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우리들이 노인이 되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한 할머니의 모습과 만나 어떤 흐릿하지만 아름다운 전망을 만날 때 이야기의 마침표는 빛난다. 대단한 서사나 드라마틱한 반전 없이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모든 이야기가 나름의 색깔과 결을 가지고 저마다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잘 읽히고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다만 남성 작가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균형감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여성의 시선, 여성의 서사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한 결로 결속될 때 의도치 않게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우리의 세계는 반드시 남성, 여성으로 양분되어 이야기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의 이야기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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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08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1-05-09 09: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오늘 모처럼 맑은 하늘에 기분이 참 좋네요.
 

'의식의 흐름' 기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조이스의 <율리시즈>이지만 흔히 난삽하고 어떤 체계나 구조가 없는 표현기법에 자주 차용된다. 무엇보다 청자나 독자가 화자와 작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 방패막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작가가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고 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불친절하고 난해한 글쓰기를 연상하게 된다. 

















솔직히 버지니아 울프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파도>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불친절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은 해체되어 있다. 뚜렷한 서사 대신 여섯 명의 화자가 독백처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마저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가 아니라 불투병한 휘장이 드리워진 듯 각각의 구역 안에서 독립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중심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가 버나드의 관찰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결국 이 어린 시절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여섯 명은 독립 분리된 개별자들이 아니라 버나드의 내면이 다 포괄하는 하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그 경계는 모호하다.


아홉 개로 나뉘어진 섹션은 자연, 특히 파도를 중심으로 한 간주 형식의 묘사와 삶의 유년, 청춘, 중년, 노년, 죽음의 모습과 맞물려 이루어져 있다. 우리 인간들이 시간과 사회,외면에서 부여한 삶의 경로에서 기대되는 역할의 페르소나를 입은 채 소멸로 걸어가는 여정의 묘사는 태양이 떠오르고 지고 마침내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로 종결될 때까지 각종 부조리와 무의미와 충돌하지만 무의미와 절망의 종결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울프의 진가가 있다. 울프는 어떤 섭리와 초극을 향해 죽음이 가지는 한계와 동시에 확장에 가닿은 시선을 언어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는 창조자이다. 과거의 수많은 집단들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도 무언가를 창조했다. 혼돈 속으로가 아니라 세계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 정복하고, 빛을 발하고, 영원한 길의 일부를 만드는 세계 속으로."

-버지니아 울프 <파도> pp.153


그것은 역사 의식이자 타인과의 합일이다. 나와 너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고 심원하고 영원한 회귀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 더 큰 의미의 일부가 되는 삶과 생명으로서의 자각이 이 생의 한계를 허물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울프는 믿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고 몇 달 후 죽음으로 걸어들어간 행로를 그래서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녀 나름의 마침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생에 부과 받은 언어화의 작업을 완수했다고 여겼을 때 그녀는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라는 <파도>의 마지막 문장과 만났다.


<파도>는 읽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살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의 이야기다. 아직도 제대로 다 읽은 것인지 제대로 작가의 의도를 읽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시간의 방울, 하루 하루의 경계를 넘어가며 사는 우리들이 각자의 외피를 입고 견디는 나날들의 심연에 가닿은 울프의 언어로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착각이 유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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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01 19: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읽다가 점점 오리무중의 늪에 빠지는 거 같아서 일단 멈추고, 해설을 읽고 다시 읽으니 그제야 진도를 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은 한 달에 한 권 이상 읽으면 머리통 지퍼 열릴 거 같아요.

blanca 2021-04-01 20:50   좋아요 2 | URL
이게 참 묘했던 게 사실 초반부 읽으니 뭔 말인지 도통 헷갈려서 집어치우려 했거든요. 그런데 손에서 놓을 수가... 진짜 이게 버지니아 울프의 힘인가 싶더라고요. 정말 재미 자체는 없었는데 이건 진짜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고...여하튼 무언가 보통 작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뭔가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한 삶의 비의를 엿본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이드 2021-04-01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등대로 읽으면서, 아, 쉬운 글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지금 읽는 책에 버지니아 울프처럼 길게 글 쓰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깐 한다면서 예시 나와서 공감했습니다. ㅎㅎ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으로‘ 읽으면서 울프가 가족 이야기들 본인과 주변 이야기들 소설에 녹여낸거 생각하면, 그나마 좀 읽혔는데, 파도는 또 벽이 크지 싶습니다. 울프 책 쭉쭉 읽고 있는데, 저는 지금 ‘울프 일기‘ 읽고 있어요.

blanca 2021-04-02 12:13   좋아요 0 | URL
아, 이게 진짜 버지니아 울프는 마성의 매력이 ㅋㅋ 분명 재미가 확 있는 건 아닌데 중독성이 있어요. 저도 아예 전작 시도를 할까 지금 고민중입니다. <세월> 고민 중이에요. 여기에서도 남자 형제들, 여자 형제들의 모습이 녹아 들어간 느낌이랍니다. 자전적인데 자기 복제적이지 않은 게 또 대단한 것 같아요.
 

만나고 보니 연인이, 배우자가 세기의 천재라면....뜬금 없이 이런 생각을... 내가 나의 삶을 포기하고 그를 완성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올랜도>는 이미 시도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읽어보니 몰입이 쉽지 않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가 사랑했던 비타 섹빌웨스트에게 헌정한 책. 남성과 여성의 경계, 시공간의 경계를 모두 해체한 작품이다. 16세기에서 출발하여 이 책이 출판된 1928년까지를 아우르는 이야기는 올랜도라는 신비로운 귀족 소년이 서른여섯 살의 중년의 여인으로 변모하는 지금, 현재에서 끝난다.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데 울프의 현란한 언어는 내적으로 이미 설득력과 구조를 품고 있어 전혀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허황돼도 기꺼이 속아줄 준비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비로운 마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삶의 '시간성'에 대한 심오한 천착을 예술적으로 승화한다. 우리 안의 수많은 자아들, 기억들, 우리 바깥의 죽음들을 아우르는 그 광범위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은 내가 느꼈지만 인식으로 포착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모호한 지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살아가는 기술의 달인들은-그런데 그건 종종 이름 없는 사람들이지만-정상적인 인간의 신체에서 동시에 고동치고 있는 60이나 70개의 서로 다른 시간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어, 시계가 열한시를 치면 나머지 것들도 일제히 종을 치게 해서, 현재가 심한 혼란에 빠지는 일도, 과거 속에 완전히 매몰되는 일도 없게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이 묘비에 새겨진 대로 68년이나 72년을 정확히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비록 우리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는 있지만, 이미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 어떤 이는 여러 형태의 인생을 경험하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 밖에 자기가 36세라고 말해도 실은 몇백 살이 된 사람들도 있다. 

-<올랜도> pp.269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 초개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허무하게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 차곳차곳 쌓여 계속된다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삶은 미래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억으로 추억으로 과거로 기억될 거라고. 우리는 그들의 과거가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 본다. 내가 되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의 현현이 내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절망하고 동시에 꿈을 꾸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생에서 나는 그를 완성시켜야 한다고...그건 지난하고 절망스러운 타협이지만 하나의 성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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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9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랜도 읽으면서 핀타지적 요소가 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웠어요. 다만 시간성 때문에 이해를 못하고 앞부분 다시 읽고 이해하고 넘어갔던 기억이ㅎㅎ
(현현 이란 단어 정말 매력적인 단어 같아요)

blanca 2021-03-29 16:56   좋아요 1 | URL
그게 참, 제가 판타지를 안 좋아하는 게 사실 몰입이 잘 안 되고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을 기저에 깔고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올랜도>는 그냥 다 설득되게 되는 묘한 힘이 있더라고요. 막, 그래, 그럴 수 있어, 이러고.., 울프는 정말 천재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