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책 내용도 좋지만 '옮긴이의 말'이나 '해설'은 더 좋은 경우. 아니면 심지어 그 '해설'과 만나야 그 책의 내용이 완성되는 경우. 여러 번 언급했지만 소설가 김연수와 평론가 신형철의 조합이 그랬고 콜레트의 <여명>과 옮긴이의 말이 그러했고 노로 구니노부의 <사랑에 관한 데생>이 또 그러하다.
















사실 서재분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노로 구니노부는 접하지 못할 뻔 했다. 나가사키 태생의 아쿠타가와상 작가로 이 소설은 그가 심근경색으로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이다. 아버지의 고서점을 물려받은 이십 대의 청년 게이스케가 헌책과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삶의 탐방기 형식을 띠고 있다. 오래된 책, 읽어버린 인연, 망각된 아버지의 삶이 태피스트리처럼 엮여 잔잔하고 여운이 길다. 실제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를 목격한 작가의 경험은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와 경고로 이어지며 일본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평화가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년이 선대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주워담아 재구성하는 그 찬란한 시간들에 대한 절창의 복원으로 빛난다. 


자네는 젊어서 아직 인생의 잔혹함을 몰라. 잘 듣게. 무상이라는 건 산 사람이 죽는 일이 아니야. 아름다운 게 추해지는 일이지.

-노로 구니노부 <사랑에 관한 데생> pp.216


시간의 힘은 놀랍다. 어쩌면 가장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아름다움도 스러지고 불꽃도 사그라든다. 모든 영원과 절대의 추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찰나의 시간들은 더 형형히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진다는 가정하에 향유했던 그 낭비했던 젊음의 시간을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되돌려 받을 수 없다. 그러니 해설자도 번역가도 모두 자신들의 이십 대를 추억한 것은 <사랑에 관한 데생>의 마침표로 유효적절하다. 소설가 사토 쇼고는 대학 시절 노로 구니노부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어쩌면 자신의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다고 시인한다. 옮긴이는 "그토록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던 시대에도 그리운 일들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추억한다. 


아름다운 게 추해지는 일이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뒤돌아 보며 아름다웠던 것을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조차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오니까. 노로 구니노부는 그것을 알고 표현하기 위해 <사랑에 관한 데생>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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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27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벌써 읽으셨어요?! 전 아직! ㅎㅎ 저도 오늘 같은 날 읽어야겠어요.

blanca 2021-03-27 16:25   좋아요 0 | URL
비 오는 오늘과 맞춤한 책인것 같아요. 벌써 읽고 계시려나요.

scott 2021-03-27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번역가중 송태욱님이 최고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번역은 무조건 신뢰!

blanca 2021-03-27 17:40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옮긴이의 말이 너무 좋아서 예사롭지 않더라니...역시나 그랬군요.
 

이방인이 되었던 시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도 하고 한계가 되기도 한다. 영영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타국에서 나이들고 죽는다는 것은 감히 함의를 추측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는 거대하게 느껴졌다. 스리랑카에서 인도에서 러시아에서 이탈리아에서 각자가 떠나온 사연은 각각 달랐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고향의 기억에서 어느 정도는 놓여나지 못했다. 모두가 고향을 등에 업고 왔다. 

















제발트의 소설은 언뜻 소설 같지 않고 르포 같다. 화자는 이야기마다 신뢰가 가는 청자이자 기록자로 동시에 기능한다. 심지어 마치 기록 사진 같은 자료들이 삽화로 수록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그러다 종내는 이 모든 이야기가 절대 허구일 리가 없으며 제발트 자신이 직접 취재한 사람들의 연대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제발트 앞에서 호기롭게 허물어진다. 아니, 이 모든 이야기가 다 허구일지라도 제발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가 가진 그 애조어린 비가의 절창이라면 다 괜찮다는 관용마저 생긴다. 그 정도로 <이민자들>의 그들의 삶은 공명한다. 


화자의 셋집 주인의 남편 헨리 쎌윈 박사, 초등학교 은사 파울 베라이터, 어머니의 외삼촌 아델바르트 할아버지, 맨체스터의 화가 막스 페르버는 모두 어린 시절 전쟁으로 또는 어떤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삶을 꾸리게 된다. 그들은 그런대로 잘 견디지만 어떤 기본적인 비가의 주인공이 되는 데에서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거나 몰락한다. 한때는 눈부시게 빛나던 청년들은 환자를 치료하고 어린 제자들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게 섣부른 극복이나 인생의 결정적인 선회의 계기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몰락하는 자의 정서는 <이민자들>을 관류한다. 폭력과 부정 앞에서 짓이겨진 그들의 추억들은 그러나 반드시 화자에게 채집되어 생생하게 복원되어 미처 끝맺지 못한 평행우주 차원의 삶으로 다시 복기된다. 아름다운 시간들은 환등기를 켜고 다시 상영하는 기록필름처럼 읽는 자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는 제발트의 이야기는 <이민자들>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축약이다. "사그라진 불꽃처럼 희미한 빛들"을 더듬어 가다 보면 우리는 지금도 저마다의 삶을 이야기로서 쓰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이미 죽은 자들의 잊혀진 삶이 결국 우리가 기억함으로써 어떻게 되살아나는지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자아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는 한계를 이야기함으로써 지평을 확장한다. 제발트만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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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26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제발트의 소설들을 접하고
만난 사진들에 깜빡 속은 기억이 나네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아쉬운 그런
작가입니다.

blanca 2021-03-26 20:05   좋아요 1 | URL
아, 저 예전에 <아우스터리츠> 읽고 제발트는 내 과가 아니구나, 그랬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하고 있는데 왜 이리 좋은 거죠? 취향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건지, 아니면 이해도가 더 깊어진 건지...그런데 다 너무 진짜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어요.

scott 2021-03-27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제발트 최고작은 이민자들과 토성의 고리!
라고 감히 ㅎㅎ
추천 합니다.

blanca 2021-03-27 17:41   좋아요 1 | URL
흑, <토성의 고리>가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현기증~> 이건 좀 별론가요? 읽어볼까 했는데...
 

우연히 이제는 하늘나라에 간 서재이웃님 서재에서 이 시를 읽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심상하게 넘어가지 않아 가슴이 저릿했다. 너무 와닿는 시라 시집을 구입했는데 시어 하나하나가 내가 경험했지만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가리키듯 명료한 촌철살인이라 놀라웠다. 시인이 쓰는 시라는 건 이런 거구나, 시를 읽는 일은 이런 거였구나 싶게 만드는 그런 시집이었다.


<언젠가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중략>

               조은

















해외 작가가 쓴 좋은 단편들도 많지만 번역의 체를 거치지 않은 우리 말로 쓴 우리 이야기를 간절히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정영수 작가는 문예지에서 <내일의 연인들>을 읽었고 잘 읽히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분위기 자체가 그의 개성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고 그것 또한 대단한 강점이라는 것도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알았다. 잘 읽히고 편안한데 얕지 않고 어떤 가식이나 위장이나 과장도 없다. 지극히 안온한데 그건 또 그런 대로 참 좋았다. 모두가 자극적이고 현란하고 기발한 것을 찾아 헤매는 세상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살아남다는 건 여전히 안심이 된다. 오랜만에 읽은 신형철의 평론이 다시 빛난다는 느낌을 받아 참 반가웠다. 그는 이야기보다 더 나아가는 평론을 쓸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김연수와 신형철의 청춘의 조합이 나에게는 최고였다.

















김신회의 <심심과 열심>도 담백한 에세이집이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sns로 자신의 일상을 표현하는 시대에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자기 고백의 전시가 아니면서 독자를 끌어들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담담하고 편안한데 읽으며 느끼는 어떤 위로와 따뜻함이 강점인 작가인 것 같다. 전업작가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와닿았고 그럼에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작가의 진심과 성실성이 결국 이 작가의 글이 가지는 무게와 깊이를 만들고 있구나 싶었다.
















여지없이 돌아오는 봄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아직 오지 않은 가을이 벌써 걱정되는 건 나도 이제는 내가 영원히 이 봄을 맞이할 수 없고 가을을 보낼 수 없음을 자각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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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3-21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랜만에 그분을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한번의 댓글로 마치지 못하시던, 마음 여리고 따뜻하셨던 분.
blanca님, 경이로운 봄이라는 말씀에도 울컥합니다.

blanca 2021-03-22 09:53   좋아요 0 | URL
....... 그분이 영원히 그렇게 내 글에 댓글을 달 거라 생각했어요.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아팠어요.
 
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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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적인 기록조차 모두의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한 세계의 절멸처럼 보인다. 끝나지 않는 애도의 곡진함이 인간 존재의 실존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머니를 잃는 일은 애도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근원 자체가 부서지고 그것을 껴안고 나의 필멸로 기어가는 일이다. 예습 같아 괴롭다.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있다. 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 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온다. 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시간의 연장, 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내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 - P60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 그런데 그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 P62

애도: 그건 (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충만’이 막혀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다.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P9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않는다는 것이다. - P165

그렇게 과거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지만, 그일에 서서히 습관이 되면, 당신은 차츰 감지하게 될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 당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그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당신의 곁에, 그 어떤 빈곳도 남기지 않고 다시 존재하게 될 거라는 걸 말이죠. 물론 지금은그런 일이 아직 불가능합니다. 침착하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당신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그러면서 당신을 어느 정도 바로설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수수께끼 같은 힘이 찾아올 때까지. 제가여기서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잃어버린) 좌절감은 전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남아 있게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당신도 이제 알게 될 겁니다, 결코 위안 같은 건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억하지않으면 안 된다는 걸,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이 다름 아닌 위안이라는 걸."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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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도 더 전에 조그만 대리점을 경영하시는 사장님이 그랬다. 예전의 번듯한 직장을 나오니 자신은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변해버렸더라고. 그리고 나도 직장을 나가면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어떤 조직 경계 안과 바깥의 내가 같은 사람인데 단지 그 조직을 나가는 것만으로 내가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어렵고 추상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그것을 다소 섭섭해하는 그 감정은 무엇인지도 뭐라 특정할 수 없었다. 결국 누구도 조직에서 대우 받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지 갑을 관계의 지배구조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리라.


흔히 어떤 사람의 직업은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한다. 그 조직 안에서의 위계는 심지어 평생을 따라다닌다. 상사는 영원한 상사라는 인식, 부하 직원은 회사 바깥에서도 마주친 그와의 위계를 실감한다. 서로가 다 잊어야 함에도 그렇다. 그것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다. 때로는 폭력적이다.


















편혜영의 소설집의 <홀리데이 홈>을 읽으며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이것은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군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나온 이진수는 아내 장소령의 시선으로 묘사된다. 그 둘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모든 것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다. 아내에게 다정한 남편도 바깥에서는 천하의 몹쓸 놈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부하 병사들에게 가혹했다. 권위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그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수준이 아니라 더 큰 역할을 하고 눈을 감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진수에게 돌아온다. 


"그는 권위와 위계를 칭찬으로 여겼다."가 이진수를 묘사하는 말이라면 "나는 부하가 아니잖아요."라고 외친 그들은 대척점에 놓여 있다. 이 사이의 긴장감의 밀도가 높다. 이것은 군이라는 설정으로 극대화되어 있지만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내리누르는 그 위계는 때로는 너무나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어 잘 정비된 조직의 체계로 오인된다. 그것을 자각하는 자는 위험한 존재다. 무비판적으로 순응해야 해야 조직은 쉽게 굴러간다. 불편하고 느리고 곤란한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편혜영은 그것을 기민하게 인식해서 그린다. 특정 상황은 그러나 이질적이지 않고 반드시 그와 유사한 어떤 공통점을 지닌 각자의 경험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분명 큰 힘이다.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거대하지만 허룩한 힘이다. 인간에게는 이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 사람도 상황도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지배욕으로 비틀어진다. 거기에서 적절하게 제대로 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자신의 삶과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는 힘도 그렇다. 그것은 반드시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절망적일지라도 그렇다.


편혜영을 읽으며 그러한 일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잘 읽히고 여전히 긴장감을 잃지 않는 이야기는 삶과 닮아 있어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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