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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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열네 명의 철학자의 지혜의 기차는 언뜻 가벼워 보일 수 있는 구성이다. 이런 유의 책은 지금까지 충분히 많았고 철학 측면에서도 삶 쪽에서도 그리 깊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 경우는 많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충분히 시간을 내어 탑승할 만한 가치를 지닌 열차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스스로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반향은 우리 모두에게로 향해 있다. 동승인인 그가 입양한 열세 살의 딸 소냐의 지극히 십대다운 발언들은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철학을 현실로 끌어오는 효과와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드디어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의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맨발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지저분한 거리에서 던진 질문들은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를 경험하고 사는 삶의 여정으로 확대된다. 은둔의 성자처럼 미화된 소로가 얼마나 삶에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제대로 모든 것을 경험하고 보는 것에 열중했는지 간디가 겉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정에 집중하여 마침내 이루어 낸 성과가 무엇인지 공자가 실용적인 친절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추구한 바가 무엇이었는지와 더불어 우리가 늙어가며 결국 건설적으로 물어남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지를 거쳐 마침내 몽테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의 종착점으로 향햐는 저자의 여정은 삶 그 자체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저자 자신의 에피소드들과 철학자들의 삶 속의 은근히 숙성된 그것들이 어우러져 지금까지 멀리서 모호하게만 보였던 철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의 답을 찾아나가는데 하나의 안내서이자 지도로 치환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역시 에릭 와이너의 성취는 대미의 몽테뉴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가장 실제로 만나 맥주 한 잔을 나누고 싶은 철학자인 16세기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야기하는 죽음은 결국 우리가 이 열차에 올라탄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의 연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에릭 와이너와 함께 한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추구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무로 돌아갈 것임에도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삶은 여전히 유의미한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딱 떨어지는 답은 있을 수 없다.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거창한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 와이너가 생테밀리옹의 몽테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읽는 이들에게 꽂히는 불의 화살이다.


그에게 죽음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재앙이 아닌 아름답고 불가피한 것"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걱정하지 마라. 때가 되면 자연이 전부 다 제대로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을 것이다. 괜히 걱정하지 마라."

-p.495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로 도착한 순간부터 그것이 비존재로 다시 돌아가는 그날까지 기꺼이 기억해 둘만한 이야기들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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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7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침과 죽음에 대한 철인들과의 성찰 아주 좋았습니다 ㅎㅎ

blanca 2021-06-07 14:07   좋아요 2 | URL
사실 그렇고 그런 책인줄 알아서 책을 차례대로 안 읽고 읽고 싶은 대목만 읽으려 했었거든요. 어느새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읽게 될 정도로 좋았어요. 그리고 사지 않고 빌린 걸 후회했죠. ^^;;;

2021-06-08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문득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연상되는 작품은 어떤 배경이나 분위기일 수도 있고 문체일 수도 있고 이야기 그 자체의 얼개일 수도 있다. 김병운의 <한밤에 두고 온 것>은 연기자이자 퀴어인 '내'가 친구 대신 맡은 희곡 낭독 수업에서 만난 오십대 여성과 소통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다. 그 지점은 세상의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시선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그녀의 과거 얘기를 통해 자신의 현재에서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세대를 가로질러 나눈 우정이 결국 성장을 유도하는 이야기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을 뒤로 밀어놓고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벌이는 사투가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깨닫는 시점이 온다. 그것의 대가는 결국 삶 그 자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주제는 다를지라도 세대와 성별을 가로지르는 소통이 소위 어떤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또 있다. 청년과 노인이고 수업은 도서관의 '시 윤독 모임'이었다. 어쩌면 가장 김연수다운 서정성이 그의 청춘과 만나 가장 만개했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의 화자가 그 모임에서 만나게 된 희선씨와 암으로 요절한 그녀의 제자의 마지막 소원, 가닿지 못했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이야기는 여전히 청량하다. 삼십 대 초반에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의 느낌이 또 사뭇 다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공명하며 작가의 저력을 실감한다. 마흔세살이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기시감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우리가 기꺼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떤 것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는 절대 이해할 수도 그 의미를 포착하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착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세월의 마모를 기꺼이 떨쳐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두 작가의 삶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이 와닿는다. 그 와중에 봄이 가고 초여름이 걸어온다. 이제는 알겠다. 이러한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할머니가 되어 추억할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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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묘한 책이다. 에세이집인데 우연의 빈도나 의미로의 집약도가 너무 높다. 마치 단편소설처럼. 이를테면 어머니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의 우연한 조우, 아버지의 죽은 전처의 오빠집에 가서 며칠 묵는 유년기의 이야기, 어린 시절 바쁜 부모 대신 자신을 돌봐준 고모의 목조 연립주택에서 독거 노인의 사체를 발견한 일과 우연찮게 어느 한 남자의 자살 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 등. 하나하나가 다 극적이고 밀도가 높다. 

















물론 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때로 극적이다. 심지어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누구나 정리되고 잔잔하고 건전한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쉽게 수습하기 어려운 일들이 즐비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경우 또한 잘 없다. 생에서 펼쳐지는 일들의 가장 잔인한 점은 무작위적이고 때로 불합리하고 심지어 무의미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과거의 기억들은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예술적인 경지, 생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것이 소설가의 시선을 통과한 이야기라 그런 것인지 글쓰기를 위한 어떤 첨가나 삭제, 인위적인 의미 부여가 부연되어 일어난 일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좋았는데 너무 좋아서 의심이 갔다고나 할까. 모든 걸 다 실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 의문은 후기에서 풀렸다. 미야모토 테루 자신이 시원하게 고백하고 있다.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의 소재를 쓰자고 마음 먹었다. <중략> 이 이상 쓰면 창작의 영역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찰할 수 있었다.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그의 이야기들 모두를 과장된 자기 추억으로 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공명하는 울림이 있다. 산만하게 흩어지거나 공허하지 않다. 공황장애로 고생하다 소설가가 된 이야기, 어머니가 실패한 결혼으로 남기고 간  아버지가 다른 형을 나이가 훌쩍 들어 몰래 찾아가 이름을 크게 부른 후 도망간 이야기, 미야모토 테루의 아버지가 일하는 중국집 종업원에게 속아 가짜 비취 반지를 사게 된 고모가 한번 더 크게 속게 되는 에피소드, 어린 시절 동네 대학생 형이 데려가 준 강에서 형이 구해준 여학생이 우연히 함꼐 찍힌 사진에 얽힌 이야기 등은 모두 생의 실루엣을 어른어른 비추며 설명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우연의 교차와 직조,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뒤돌아보며 추출해 내는 의미들은 결국 생과 생명의 신비함과 그것의 줄기를 끊어내는 시간과 죽음의 무자비함에 느끼는 어떤 놀라움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것은 헤아리기 힘든 억겁의 시간 "삼천대천세계" 속 찰나에서 명멸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처연한 엘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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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 문지클래식 7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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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기까지 아등바등 걸어가면 이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고 평지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가 있다. 친정 엄마는 나의 그런 믿음을 야멸차게 정정했다. 아니야, 사는 건 산 넘어 산이야. 나는 엄마의 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개별적 삶이고 그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내가 행하는 느끼는 모든 일들이 그 주어를 잃어버리는 풍경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얘기처럼 내심 나는 나의 불멸을 믿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바깥의 풍경이고 모든 무의미는 덜 노력하는 자의 불평처럼 때로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에서 제외하고는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시간 틀 안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때로 안고 걸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두 발이 단단한 대지에 붙박힌 것처럼 때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는 없다.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나의 삶에 실감을 끼워 놓으며 나를 옥죈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죽음이 항존하는 삶은 그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런데 애쓴다. 애닳아 한다. 


박상륭 소설가의 <죽음의 한 연구>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이 안에는 작가가 표방한 제목처럼 엄청난 사변이 녹아 있는 '죽음의 한 연구'가 한 도보 고행자의 행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기독교, 불교, 무교, 민간신앙의 경계를 해체하여 거듭나고 있다. 그것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다. 광대하고 심원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삶과 죽음의 비의는 이야기의 틈새마다 비어져 나온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형식과 틀의 비극에 유형당한 우리의 비극적인 생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종말을 듣고 보는 일이다.





은유의 향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고을의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승려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의 죽음 이후로 수도를 위해 유리라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수도부 여인과 살림을 차렸으나 이마저 그를 그곳에 매이진 못하게 하고 연이어 읍으로 향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샘터의 존자와 염주 스님을 살해하고 스승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하고 그것에 합당한 형을 받기 위해 떠나왔던 유리로 귀환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대략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살인은 실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탐욕과 편견과 아집을 끊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편협한 자아를 과감히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항변하는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풍긴다. 작가는 우리의 해석의 틀마저 해체하려는 기지를 발휘한 것 같다.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비약적이어서 결국 전체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은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개아의 틀을 해체하고 인습과 습속, 종교의 경계도 허물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의 허상까지 부수고 나면 도달할 그곳에 죽음이 당도해 와 있다는 결말은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철학

박상륭은 죽음 앞에서의 삶과 생의 무의미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폄하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쉬운 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상의 덧없음을 결국 살아내며 체험해야 한다는 고행길을 택한다. 한없이 흔들리고 절망하며 걸어가는 노정의 끝의 깨달음을 삶의 책무로 자인한다. 불교에서의 업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서라도 우리는 그 업을 숙명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내야 한다. "필멸의 윤회"는 우리의 "영생의 희원"과 충돌하지만 생이 삶다로우려면 그것은 숙명의 과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그래서 허무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성취적 결말로 자리매김한다. 박상륭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장들은 어떤 예감처럼 그가 받아들이는 죽음을 결정체처럼 형상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이다. 그 안은 공허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 입구는 음험하고 지난해 보여도 그 출구로 나아가는 길이 매끄럽게 확장되는 것은 작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탄탄한 기반을 딛고 선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이야기가 자칫 현학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렀을지 모를 한계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 교감과 세상의 현상에 기꺼이 동참하는 그 기꺼운 역동성으로  극복된다. 죽음의 무게가 신분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 종교적 허위를 입은 탐욕 등의 간파는 예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문장들은 단 하나도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생과 죽음을 채집하는 어휘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라도의 방언들이 가지는 리듬감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의 집단적인 제의 속 구슬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모두 다 정확히 하나하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계나 틀을 넘어 마음으로 건너가는 흐름의 강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운 체험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우리가 걸어간 그 길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심지어 그것이 쇠락으로 향한 것일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나름으로 충만하다. 


마지막 노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나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동참한다.

그래,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났으면 싶다. 왕후며 장상 마님들의 태 속도 말고, 나를 낳았던 그저 그런 어미, 그런 어떤 옌네 태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싶고, 그래서 저 바닷가 모래가 번쩍이는 곳에서 모래집이나 쌓으며, 조수가 밀리고 밀려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지켜보고 앉았으면이나 싶다. 저 무염무애의 그러나 비천한 머슴아이, 학대와 멸시 속으로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사내아이. 바다의 음기로만 굳어진 조개 알을 씹어 비린내를 풍기며, 갈매기의 울음에 얼을 빼앗기던 별로 오래도 흐르지 않은 옛적에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되었으면 싶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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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blanca 2021-06-05 18:43   좋아요 1 | URL
초딩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5 19: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알려드렸듯이 뿌듯합니다
:-) 3만원도 확인하세요 ㅋㅋㅋ
 

김경욱 소설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사실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인터뷰가 너무 좋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가 신세대 소설가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벌써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데 놀라고 그러한 흐름에 뭔가 아주 예민하지만 더불어 담담하게 젖어들어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한 나이들을 앞에 두고 있는 나로서도 참 와닿았다. 나이 드는 일을 예습하는 것이야 어불성설이겠지만 작가의 정제된 언어로 하는 이야기가 어떤 고갱이를 잘 포착해서 표현한 것 같아 두고두고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야기.


우리가 자연을 비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연이 하는 일에는 선악이 없잖아요. 인간적인 관점이지요. 압도적인 힘으로 문명을 위협할 때, 우리 자신이 조그마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일깨울 때 우리는 자연을 악으로 묘사하게 돼요. 그런데 자연에게는 그런 의도 자체가 없죠. 영원불멸한 순환, 그 거대하고 무정한 사이클 위의 한 점으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회적 존재로서 효능이 다하고 밀려나는 신세가 되더라도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그렇기에 더더욱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일 거에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문학이 아닌가 생각해요.

-Axt 036 김경욱 인터뷰 중















시간의 무정함은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해체시킨다. 나는 설사 주변부에 있었을지라도 거기에서 더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으로써 문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가지는 의미,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의 모습이 거인 같았다. 대단한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어떤 숙명적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내가 지향하는 그 무엇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살면 살수록 그것이야말로 진짜임을 실감한다. 














이 책의 저자 함성호는 건축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내면을 통과한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사랑하는 시들, 그의 추억들과 교차하여 잔잔하고 은은한 풍경화를 이룬다. 마포, 왕십리, 종각, 압구정, 대학로, 삼청동, 신촌, 홍대, 필동 등 무심코 지나쳤던 지명들의 연원과 역사가 다채롭다. 특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땅에 가해진 횡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숱한 서사들에 대한 복원이 인상적이었다. 청계천이 옥계라 불리던 시절을 뒤로 하고 뚜껑을 덮어 인공으로 수돗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이야기다. 종로에서 저자의 매형을 기다리다 꼬박 열두 시간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던 이야기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던 노인에 대한 기억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단편 같다. 영추문 옆 사무실에서의 꿈들을 포기하고 나와야 했던 아픈 사연의 마감은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그래, 여기서 살았던 적이 있었지."라는 그의 이야기는 김경욱의 "자기 인생의 벨 에포크에 머물고 싶은 욕망"과도 만난다. 누구나에게 그런 곳이 있다. 내 인생의 벨 에포크는 언제였을까. 


언제나 열네 살일 것 같다. 읽었던 모든 활자가 실시간 영상처럼 떠오르던 시간들. 듣는 모든 음악이 콘서트장 현장에서처럼 생생하게 울리던 날들. 너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웃기고 슬프고 재미있고 무서웠던 시간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시간대를 통과해 온 것은 축복이다. 그 시간은 통과하며 사라졌다.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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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5-20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욱은 장강명이나 김영하에 가려 잘 안 알려진 작가는 아닌가 싶어요.
우리나라 유수한 문학상도 받았는데.
저도 몇년 전 우연한 기회 읽고 글 정말 잘 쓰는구나 해서 저의 졸저에도 실었는데.ㅋㅋ
그래서 저도 조만간 악스트 사 볼까 생각중입니다.
덕분에 빛을 좀 받지 않을까 기대하게도 됩니다.

blanca 2021-05-21 13:05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아마 단편은 읽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기억에 없더라고요. 시대의 각광을 받으며 등장했다 서서히 퇴장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잠시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학생을 통해 배운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syo 2021-05-20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김연수 선생님들보다 김경욱 선생님 작품을 먼저 접했었는데요, 당시 단편집 표지 사진 속에 어마어마한 꽃미남으로 한껏 당당했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blanca 2021-05-21 13:06   좋아요 0 | URL
아, 소요님은 아시는군요. 저는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었고 작품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서... 주목을 받았던 것만 기억이 나요. 인터뷰 얘기 하나하나가 명문장 같더라고요. 글을 쓰는 사람은 모든 언어들이 내면에서 정제되어 나오는 건지...놀라웠어요.

transient-guest 2021-05-27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0대까지 읽은 책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30대부터는 읽고 돌아서면 다 잊는 경우가 많네요.ㅎ
제가 아는 제 고향의 한국모습은 이제 거의 없어졌습니다. 도시에 가보면 산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높은 빌딩으로 가득하고 그나마 워낙 개발이 빗겨간 몇 군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추억속에 젖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21-05-27 13:57   좋아요 1 | URL
그런데 사실 반 정도 산 건데 벌써 저도 자꾸 과거 얘기를 하게 돼서... 노인들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요. 현실과 미래에도 시선을 좀 던져야 하는데...자꾸 학창 시절도 떠오르고요. 잘 나이들고 늙어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최근들어 더 빨라지고 있죠. 아직은 그래도 발 맞추려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는 걸로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