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비에 큰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흥청망청 과소비를 했다는 건 아니고 책을 사고 무심코 테이크아웃 커피를 일회용컵에 담아 사먹는 일, 여러 물품들을 사고 추가로 쇼핑봉투를 받는 일, 음식물쓰레기를 새 비닐에 담아 버리는 행위 등을 종종 했다. 그러다 어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점차 이런 행위들에 수반되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죄책감이 불현듯 시작됐다. 무언가 내 일상이 지구에 쓰레기를 보태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강력한 실감이 들며 어떻게든 그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따라왔다. 내가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들로만 일상이 채워진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이 지구에 결론적으로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엇보다 나의 아이들, 후손들이 우리가 당연히 누렸던 자연의 공기, 물, 풀, 나무, 자유를 우리가 단지 존재했던 것만으로 오염되고 훼손되고 심지어 박탈된 채 경험해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로빈 월 키머러는 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의 식물생태학자이다. 향모는 그들의 언어로 윙가슈크라고 부르며 어머니 대지님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을 지닌 식물이다. "향모를 땋으며"라는 제목은 과학과 영성과 이야기가 서로 얽히는 과정의 은유인 셈이다. 그들 사이에 구비전승되는 창조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대지와 자연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아침 제의의 이야기, 이웃 할머니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 키머러의 어머니와 함께 성탄절 파티를 열어줬던 추억, 의대생들을 데리고 떠났던 학술여행에서 나눈 교감, 점박이도룡농 길가 구출 작전 등 자연과 호혜적으로 주고받는 감사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그녀의 "유정성의 문법"은 부족의 언어와 세계관의 렌즈를 통과한 자연이 어떻게 기존의 경직되고 진부한 명명의 틀을 깨고 빛나는 실재에 가닿아 우리의 딱딱한 가슴을 녹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다. 이는 무엇보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심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치되고 조장되는 욕망의 폭주 자체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천착에서 비롯된 혜안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언어는 공허하지 않고 사변적이지 않다. 


옛 가르침들은 모든 사람에게 윈디고적 본성이 있으며-우리가 스스로의 탐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스튜어트 킹 같은 아니시나베 연장자들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이해하려면 늘 두 얼굴-삶의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염두에 두라'라고 상기키신 것은 이 때문이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 힘을 인정하되 양분을 주지 말 것.

-pp.447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우리의 생존이 욕망을 떠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이 항상 적절하게 이성적으로 제어될 수 있을까? 키머러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부족조차 우리 인간에게 어두운 본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전적으로 함몰되고 집착할 때의 그 추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우리가 훼손하고 남용해도 여전히 우리를 맞아주는 대지와 그 대지에 흐르는 물과 공기와 하늘과 생명들을 존중하고 어떤 미안함과 고마움을 잊지 않을 때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독자와 공명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우리 각자의 생존이 배출해내는 그 쓰레기들이 모여 산을 이루는 모습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키머러의 어머니는 늘 "올 때보다 갈 때 더 좋은 곳이 되게 하렴."이라고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영원한 숙제이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숨쉬고 먹고 노래할 수 있게 해 준 대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믿고 싶다. 하나를 더 가지고 싶을 때 무심코 하나를 버리게 될 때 잠시 멈추어서 내 앞과 뒤를 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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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19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쓰레기 문제를 보면 안타깝더라구요. 특히 코로나 때문에 그런지 배달음식에 플라스틱이 너무 많더라구요. 가능하면 재활용품 잘 처리하고 플라스틱은 씻어서 버리려고 하고 장바구니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도 정책적으로 어떻게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ㅜㅜ

blanca 2021-05-20 12: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특히 배달음식.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또 다 해먹을 수도 식당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으니까요. 요새 자꾸 지구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코로나도 그렇고 인간이 무한정 쓰고 한계 없이 누릴 수 있다는 환각이 무참이 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무언가 확 다른 시각, 자세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읽다 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완독한 경우. 몇 년도 전에 나는 이북으로 이 책을 샀지만 초반부를 좀 읽다 덮어버렸다. 재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김금희 작가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좀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초반부에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는 이제는 참고 읽지 않겠다는 좀 묘한 결심을 한 터라 그렇게 되어버렸다. 즐겨 듣던 <서담서담>에서 <경애의 마음>을 다루었고 언젠가 다시 제대로 읽어볼까 고민만 하다 드디어 다시 읽기 시작하여 완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애의 마음>은 참으로 남다른 이야기구나, 다시 읽어 마땅했던 사연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도달하여 작가의 언어로 다시 우리에게 온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건 이야기의 당위성과 보편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이야기다.


반도미싱 팀장대리인 서른일곱살의 남자 공상수에게는 표면적으로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는 든든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친하지 않은 정치인 아버지가 있다. 공상수에게 아버지는 대립하는 가치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다. 이 "융통성 없고 눈치 없는 인간"이 조직에서 그 덕에 쫓겨나지도 않고 호칭도 애매한 팀장대리로 8년 차 총무부 직원 박경애를 유일한 팀원으로 받아들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경애는 공공연히 담배를 폈고 회사에서 농성대에 끼어 삭발을 한 전력이 있다. 그 둘은 한 마디로 조직에서 매우 튀는 세상과 불화하는 존재라는 공통점과 인천호프집화재사건 때 죽은 은총이라는 친구를 매개로 한 접점이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반하는 두 존재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과 자본주의의 효율성의 광기어린 집착이 빚은 참화의 중심에서의 친구의 상실이라는 이야기를 불러와 시종일관 우리가 간직하지만 어쩐지 드러내어 놓지 못했던 가장 우리다운 마음들에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상수가 속해 있는 세계란 터무니없이 복잡하고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측량되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에 열을 올리고 헛수고가 분명할 일에 봉사하는 백일몽에 빠진 인간들이 있는 세계에 불과하겠지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김금희 <경애의 마음>


누구나 이런 세계에 살았던 경험이 있다.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이런 세계에 푹 잠겨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여기지만 그곳으로의 귀환을 꿈꾼다. 비효율적인 곳, 쓸모없음이 판치는 곳, 그럼에도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영토. 공상수가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곳에서 마침내 경애와 포옹할 때 나는 작가의 마음을 짐작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 둘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거대한 세상을 대상으로 싸우기 위해 손을 잡고 그리고 넘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손을 잡는 이야기. 그리고 그러한 상수와 경애를 알아봐주는 주변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위안을 준다.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것, 삶의 모순을 드러내며 그 긍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모든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끝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쓰고 읽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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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5-11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있죠.
그럼 어찌나 안도하게 되는지.
하마터면 안 읽을 뻔했잖아요.
그 책도 되게 기뻤을 거예요.ㅋ

blanca 2021-05-12 10:06   좋아요 1 | URL
이런 경우 왠지 특히 더 뿌듯해지는 것 같아요. 책값도 아끼고요.^^

레삭매냐 2021-05-12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빌려서 읽다가
말았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이...

어쨌든 다 읽지 못한 것으로.

blanca 2021-05-12 10:16   좋아요 0 | URL
그죠. 빌려 읽으면 완독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저도 읽다 말다 그러다 이번에 완독했어요. 지금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태반이 읽다 말다 반납하게 되더라고요.
 

나에게도 그런 입사 동기의 추억이 있다.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데에 가까웠다. 밝고 맑고 친절했다. 그런데 설명하기 힘든 어긋남이 있었다. 그는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여러 번 전화가 왔다. 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고 여러 진행 상황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주었다. 참고로 나는 그의 결혼식에 이미 기꺼이 참석했고 동기 회비에서 갹출한 부조금 외에 개별적으로 추가로 또 부조를 했다. 아, 계속 치사해지는 것 같지만 향후 할 이야기에 이 부조금은 대단히 중요해진다. 그는 반드시 내 결혼식에 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건 내가 먼저 원하거나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연락도 없이 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부조금도 조금 기대했던 선물도 없었다. 아, 이 사람을 어찌할까나. 사실 그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전에 나에게 했던 그 지켜지지도 못할 약속과 마치 자신의 결혼식처럼 기대를 나타내던 그 모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아마, 그는 아마도 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연락해 수다를 떨었지 싶다. 나는 진심으로 황당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인간형인데 또 미워할 수도 없는...  그런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만날 줄이야.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처음 이야기 '잘 살겠습니다'에서 나는 마치 그 동기를 아는 사람이 살짝 비틀어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싱크로율 백퍼센트의 현현인 빛나 언니의 등장에 움찔했다. 아, 이런 인간형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비호감인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마구 미워할 수도 없는, 대단히 계산적인 것 같은데 또 영 어리숙한 결국 내가 지고 마는. 장류진은 회사라는 조직에서 우리가 흔히 사람에게 가졌다 배반당하는 신뢰와 기대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조직 안에서 나누는 교감은 어떤 한계와 의외성을 지닌다. 그것은 시스템이 각자에게 기대하는 몫과 그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가지는 페르소나의 격자와 충돌하는 개인성의 발견이다. 다른 환경, 다른 조직에서의 인간 관계의 역학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내가 빛나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하려 했던 그 사소한 복수의 황당한 결말에서 언니를 결국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방에서 나는 잊었던 그 동기에 대한 나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었다는 것. 여전히 어떤 속수무책의 오지랖들에 어쩐지 넉넉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 잘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 


대부분의 이야기가 어떤 허를 찌르는 기대의 배반의 변곡점을 지나 따스하게 마무리되어 좋았다. 특히나 마지막 <탐페레 공항>은 또 어떤 추억을 환기했다. 다큐멘터리 피디의 꿈을 지닌 화자가 아일랜드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다 들르게 된 경유지인 핀란드의 공항에서 만난 시각장애를 지닌 노인과의 교감. 연락처를 주고 받고 막상 바쁜 일로 답장을 보내지 못하나 가슴 한켠에 남는 그 어떤 부책감, 상대의 안부에 대한 염려. 


그리고 언어, 인종, 국경, 시간을 넘어 여전히 남는 서로에 대한 마음. 


<일의 기쁨과 슬픔> 덕분에 나는 잊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잘 살고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어긋남으로 각자의 인생의 경로는 다시는 교차하지 못할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그럼에도 나누었던 시간들이 가지는 그 가치와 무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어떤 안도감을 얻었다. 어떤 관계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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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5-10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혼식에 참석할 의사가 분명한 사람은 개인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다면서 미리 연락을 합니다. 입사 동기는 애초에 결혼식에 참석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인사치레를 한 것일 수도 있어요

blanca 2021-05-11 12:42   좋아요 0 | URL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튼 결혼식에 얽힌 황당한 일들이 제법 많았어요^^;;

레삭매냐 2021-05-1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결혼식을 치르면서 관계
의 손절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자연
스레 정리가 되는 게 아닌지...
사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출현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요.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것 참.

blanca 2021-05-12 10:17   좋아요 0 | URL
저는 안 그러게 될 줄 알았는데 역시가 참 사람 치사하게 온 사람, 안 온 사람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훌쩍.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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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마론제과에서 일하는 90년대를 전후해 태어난 여성 세 명의 가상화폐인 '이더리움'을 통한 인생 역전기? 작가 장류진 본인도 말미에 "이 이야기를 마지막엔 꼭 설탕에 굴려서 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안 그래도 여러가지로 어두운 시대에 어떤 노골적이고 뻔한 훈수를 위해 허황된 욕망에 추락하는 인간을 그려 내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대신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라는 정보값"이 없는 5평, 9평 원룸에 살고 있는 다해, 은상, 지송이 가상화폐 시장에 진입하여 가격폭등을 바라는 가상화폐 투자자들의 은어인 "달까지" 함께 꿈을 이루어 내는 설탕이 흩뿌려져 있다. 언뜻 단순한 일확천금 스토리로 그칠 수 있는 이야기의 심도와 넓이는 작가 장류진 특유의 감각어린 문장들, 세태와 그 세태의 근저에 있는 시스템적인 오류와 맹점을 예리하게 읽어내는 직관에 의해 확장된다. 


나는 분명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전보다 세개쯤의 나은 점과 한개쯤의 별로인 점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플러스마이너스를 해보면 결국 두개쯤 나은 곳으로 나아가는 셈이었다. 비단 주거 공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인생 자체가 그랬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지날수록, 한살 더 먹을수록 늘 전보다는 조금 나았고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마치 서투른 박음질 같았다. 전진과 뒷걸음질을 반복했지만 그나마 앞으로 나아갈 땐 한땀, 뒤로 돌아갈 땐 반땀이어서 그래도 제자리걸음만은 아닌 그런 느낌으로.

-장류진 <달까지가자>


이 인생의 행보를 박음질로 은유한 대목은 비단 다해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그런 나날들을 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뒷걸음질을 동반함으로써 나의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못하는 그런 자리로의 전진. 그것에서 점프하는 행위가 여기에서는 코인으로 인한 대박신화로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해가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대목에서 자신이 일하는 층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고위간부들이 일하는  8층의 커피머신의 고급 원두와 그들만이 사용하는 숨겨둔 제빙기의 발견은 강고한 한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결국 그 안의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장류진은 땅에서 점프하지만 결국 착지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을 결국 마침표로 찍는다.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고 어떨 수 없는 귀결이기도 하다. 


욕망은 그것이 헛될지라도 반드시 품어보고 때로 실현해보고 좌절당해 봄으로써 삶과 시간은 전진한다. 이 과정을 생략하는 것은 삶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욕망도 사람에 대한 것이든 사물에 대한 것이든 함부로 폄하될 수 없다. 그것의 디테일을 형상화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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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신간이 오늘 아마존에서 출간된다고 해서 두근두근하며 기다렸다. 원서를 직접 받아보고 싶어서 고민하다 킨들로 다운받아 읽기 시작하는데 오잉? 왠지 이것 너무 낯익다. 장소와 관련한 소회, 다리를 건너는 일에 대한 삶의 은유, 친구 남편과의 커피타임. 이상하다. 이젠 점점 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이럴 수가 있나? 직장의 죽은 전임자의 모르는 삶에 대한 상상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킨들을 껐다. 
















2019년 3월 이미 번역되어 나온 책, 이탈리아어로 줌파 라히리가 쓴 첫 소설은 단지 아마존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에 불과하다. 신간이 아니었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이 영어 출간이 안 된. 나는 낚인 것이다. 나의 부주의함에. 

















아, 무르고 싶다. 그러나 이미 펼쳤기에 무를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다시 하루키로 회귀한다.















하루키 신간이 나왔다. 사고 싶다. 참으로 나는 양심도 없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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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4-28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신간 소식만 듣고 깜짝 놀랐는데 아니었군요! 좋은건지 아닌건지 모르겠네요..

blanca 2021-04-28 13:21   좋아요 1 | URL
줌파 라히리는 몇 년 간 신간을 대체 왜 안 내는 거죠? 지금 이탈리아에 있는 것 같은데 왜 단편집이라도 안 내는 거죠? 이게 다 줌파 라히리가 너무 뜸해서 벌어진 일이라고요.--;;;

scott 2021-04-28 14:44   좋아요 1 | URL
블랑카님 줌파가 이딸리아말로 글을 쓰고 부터 미국내 문학계 입지가 확 꺾였어요,
이제야 출간되는 이유가 있음
줌파는 요즘 주로 이딸리아 작품 단편위주 번역하고 있고 대학 문창과 강의에 집중

잡지 뉴요커에 몇몇 단편 실렸는데 독자들 반응이 시쿤둥!
미국 독자들 냉정함 ㅎㅎ

하루키 티셔츠 에세이 작년에 나오자마자 읽었는데
맘 편히 설렁 설렁 읽기 딱 좋아요!

blanca 2021-04-28 15:13   좋아요 1 | URL
아니, 하루키는 왜 이리 요새 들어 다 짧고 설렁설렁... 좀 길고 묵직한 걸 써 주셔야 하는데... 아, 줌파 라히리가 단편을 냈었군요! 한번 찾아봐야 겠어요. 필력이 떨어졌나. 아니면 이탈리라어를 자꾸 고집해서 그런가.

잠자냥 2021-04-28 1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진짜 무르고 싶겠어요....ㅠ_ㅠ

blanca 2021-04-28 15:14   좋아요 1 | URL
일단 몇 장 읽어서 불가능하더라고요. 비싸긴 또 어찌나 비싼지. 이걸 신간인 줄 알고 떨면서 음료까지 대령해서 시작했다는 ㅋㅋㅋ 이상타? 아, 이상하다, 계속 그러면서...

단발머리 2021-04-28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안타깝지만 이미 결제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ㅠㅠ
하루키 신간 읽으며 속상한 마음 달래시기를 바래봅니다.

blanca 2021-04-28 15:30   좋아요 1 | URL
근데 양심이 ㅋㅋ 바로 구입하기는 좀 그래서 참아보려고요. ^^;;;

레삭매냐 2021-05-1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떤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몰라서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