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준 사람이 있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고 빙그레 웃으면 입 주변의 주름이 동심원처럼 몇 겹의 파문으로 번지던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할머니는 하필 내가 스무 살 오월이 되던 해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당시 한 사람에게 흠뻑 빠져 있었고 그 달뜬 마음이 할머니의 상실을 눌러 버렸다. 가없는 내리사랑의 스러짐은 그런 식으로 폄하되었다. 말기암 치매까지 온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목욕시켜드리던 날 할머니는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시며 고맙다, 고 되뇌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은 그렇게 뒤집힌 고마움의 인사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여 할머니가 고장난 녹음테이프처럼 아쉬워하며 끊임없이 재생하던 그 서너 살 무렵의 사랑스러움을 딸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나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하루 하루가 갈수록 할머니에 대한 절절한 추억의 무게와 애착의 깊이는 더해만 간다. 또 복기하고 또 복기하며 나는 나와 할머니를 다시 읽는다. 때로는 초등학생의 나와 할머니로,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그 모습으로 끊임없이 손녀와 할머니의 해후는 반복된다. 그리고 말줄임표. 그럼에도  할머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의 허망함은 그런 식으로 허리가 동강 잘린다. 할머니는 이제 안 계신다. 내 곁에.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가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을 되돌려 줄 상대는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 떠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존재의 필멸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내'가 '너'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철저하게 죽음의 피동으로 먹인다는 것. 몸부림치며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것이라는 것. 이런 참혹하고 무의미한 결말이 어디 있는가. 이 단순명료한 명제에 맞닥뜨리면 결국 무의미와 화해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얼마나 가혹한 과정인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죽음과 화해하지 못한 작가들의 얘기다. 이 책 두 권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인간이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무방비인지를 저릿하게 응시하게 된다. 유명 작가들은 삶의 비밀을 범인들보다 더 예리하게 해독했다,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허무와 무의미를 더욱 적너라하게 파헤치고 죽음과 화해할 수 있을듯 한데 도리어 역설적으로 더욱더 죽음에 후달린다. '나'는 '특별하다'는 느낌이 '무의미'와 조우할 수 있는 지점은 망상이자 착각인 것 같다. 삶에 관조적인 모습들이 삶에 대한 집착과 반드시 유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유달리 삶에 관조적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의 절실함의 근거로 끌어 와 쓰는 것이 아니라 생의 허무감과 욕망의 충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한 대가는 가혹하다. 그들은 대부분 죽는 순간까지 납득하지 못했다.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자살을 한 방편으로 택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죽음 앞에 영원히 피동적이다,는 예시의 제물로 바쳐지기도 한다.

 

죽음을 통제한 유일한 사례로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콧 니어링이 곡기를 스스로 끊고 죽어가며 마지막에 뱉은 말은 "좋-아."였다. 삶이 아무리 고해라도 그것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거부감이 든다. 우리는 생의 숨결을 받은 이상 사려깊고 소중하게 그것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대우하고 근시안적 욕망의 충족을 절제하며 죽어가는 과정까지 배우려 했던 스콧 니어링의 삶은 우리가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통로를 열어준다. 반드시 비참하게 무기력하게 안끌려가려 발버둥치며 죽음의 손아귀에 우리 목덜미를 쥐어주지 않아도 되는 행운은 바로 그것의 일란성 쌍둥이인 삶을 대접하는 자세를 통해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때늦은 애도는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읽으며 위로 받았다. 마치 나를 향해 돌아앉아 토닥토닥 나의 뒤늦은 애도를 도닥여 주는 느낌이었다. 끝나지 않은 슬픔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라고, 덧붙여가며. 그리고 그의 이 문장은 내 가슴의 생채기에 날아와 박혔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장 충실하게 애도하는 길은 그 죽음 이전으로 더이상 돌아갈 수 없도록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 중 

 
   

나는 바뀔 것이다. 가슴으로 끊임없이 할머니에 대한 회한을 간직한 채로. 사랑한다,는 고맙다, 는 말은 언제나 해도 모자라고 늦다. 서둘러 많이 하고 볼 일이다. 생을 열심히 긍정하며 살아 가련다. 그것이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낸 그 분과 나에게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 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진정한 예우일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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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의지를 더 불태울 수 있져, 아이러니하지만~
ㅎㅎ아이고 아름다워라, 페이퍼가!

blanca 2010-09-28 21:45   좋아요 0 | URL
마기님 그새 퍼스나콘이 또 바뀌었어요. 사랑스러운 소녀...예, 그래서 결국 죽음을 정말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정한 긍정론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비관주의에 이끌렸는데 이제는 해가 갈수록 더 낙천적이 되고 싶어져요. 나잇살이 주는 긍정의 에너지도 있나 봐요^^;;

양철나무꾼 2010-09-2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대접할 건 어쩜 죽음만이 아닐지도 몰라요~
삶도 따박따박 눌러살 듯,꼭꼭 씹어 삼키듯 대접해줘야 할지도 몰라요~

전 친할머니 밑에서,할머니 치마폭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제 걱정하시느라,쉬이 눈을 못 감으셨어요.

어쩜,전 할머니 때문에라도 따박따박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글이 제 마음의 빗장을 툭 하고 벗겨 냈어요.
눈물을 좀 흘리겠지만,
한동안 좀 아프겠지만,
나쁘지 않네요~~~^^

blanca 2010-09-28 21: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할머니 얘기는 언제나 저를 아프게 합니다. 친할머니 아래 계셨다면 양철나무꾼님은 더욱더 그러시겠어요. 그럼요. 결국 오늘의 나를 거슬러 올라가면 또 할머니와 만날 수밖에 없어요.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게 진정한 애도인 것 같아요.

2010-09-28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9-28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예우, 좋은 페이퍼에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에요.
블랑카님, 내리사랑은 참 크고 깊은 것 같아요.
제 첫딸이 생후 2개월될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아이를 낳았다고 참 신기해하며 안쓰러워하셨던 분이에요.
사춘기시절, 대학생 시절, 제 깃털같은 성정이 몸서리치게 힘들 때면 할머니집 아랫목이 기어들어가
뜨근하게 이불 쓰고 한숨 자고 나면 풀리곤 했지요. 그리워라.
된장찌게랑 밥한그릇 차려주시며 무조건 내편이 되어주던 분. 아무 말씀 없이도요.

blanca 2010-09-28 21:4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그리워라. 이 말 콧잔등이 시큰해져요. 워라. 저희 할머니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셨어요. 정말 너무 많이 늙으셨던 할머니라 더 애잔해요. 손녀의 타박을 다 받아주시고 마지막까지 고맙다, 하고 가신 분. 저는 이 생에서 할머니에 대한 빚을 다 갚지 못할듯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0-09-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블랑카님. 언니같은 '나'를 만나러 시간을 빨랑 내란 말이예요! ㅋㅋ

참 좋은 페이퍼예요. 죽음이란 항상 생각을 깊어지게 만들죠.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에 연연하여, 질질 끌려간 삶을 살면 더욱 회한과 분노가 일지도.

스콧 니어링의 이야기를 읽으니, 문득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생각나요.
큰 스님 돌아가시는 장면이.
얼마 전부터 DVD로 사려고 찾는 중인데, 절판이네요. ㅠ

blanca 2010-09-28 21:5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ㅋㅋㅋ 올해 안에는 꼭 뵈요!! 껌딱지를 좀 간수해 달라고 옆지기나 친정엄마를 좀 구워삶아서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저 티비에서 중간부터 봤던 듯해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큰 스님 돌아가시는 장면이 있군요. 다시 제대로 보고 싶어져요. 아마 다시 티비나 케이블에서 상영해 주기를 기다려 봐야 할 듯해요.

마녀고양이 2010-09-29 11:36   좋아요 0 | URL
나는 그 이쁜 '껌딱지' 같이 나와도 괜찮은뎅! ^^

2010-09-2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9-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농사를 지으셨나봐요. 기역자로 구부러지셨다고 하니.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님처럼 그렇게 못 받고 자랐어요. 고부간의 갈등이 말도 못했거든요. 하핫, 고부간의 갈등이야기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앤드리스에요. 저의 할머니가 94세로 돌아가실 때 임종을 저의 손녀들이 했어요. 엄마가 할머니한테 당한 것이 많아 병상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거든요. 돌아가실 무렵에 점차 몸이 차가워 지더라구요. 그래서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기는 했는데....떠나보내면서 어떤 말을 해 드려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저의 할머니는 오기와 고집이 대단해서 저의 엄마한테 절대 안 지려고 했어요. 그래서 딸들인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에게 다정한 말 조차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몸이 서서히 차가워진다는 것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예우를 해 드려야할지.... 그걸 잘 몰랐어요.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차가운 몸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겨 들였는데......전 할머니 차라리 엄마한테 구박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참...이상한게 할머니한테 연민의 정을 느껴 잘 해드리고 싶었지만....아, 지금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그 때 할머니의 차가운 몸을 어루만졌던 생각이 나네요. 그게 저의 최대한의 할머니 죽음에 대한 예우였어요. 꼭 그렇게 해 드리고 싶더라구요.

blanca 2010-09-28 21:54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추석은 잘 쇠셨어요? 안그래도 서재 뜸하셔서 생각했더랬어요. 저희 어머니와 할머니도 풀지 못하고 헤어지셨답니다. 딜레마는...할머니는 날 사랑하는데 엄마와는 그렇지 못하다는 거. 그 사이에서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폄하했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 그 대목에서 저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구요. 지금도 진행중인 집도 봤군요. 한국사회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 같아요.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같은 아이들도 계속 나올지 모르겠어요.

기억의 집님의 댓글을 읽으니 괜시리 마음이 시려요. 잘하셨어요. 저는 못했어요. 임종을 다른 곳에서 하셔서....저는 차마 용기가 안나 그렇게 못해드렸을 것 같아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할머니를 꼬옥 껴안아 드릴텐데......

穀雨(곡우) 2010-09-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섬뜩하다고 이해할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관념입니다. 그 너머의 공간이 무엇인지를 알길이 없기에 매번 죽음의 관념을 떠올리면 섬뜩해지는 보편적 관성에 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심에 존재의 상실이 함께 겹친다면 아픔이 오래도록 퍼질 것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더 이상 시간의 기능을 상실하는 시점. 신형철님의 글과 블랑카님의 반듯한 생각이 겹쳐집니다.

blanca 2010-09-29 22:31   좋아요 0 | URL
곡우님, 죽음은 아주 가끔 그것도 생의 의지와 순간의 무게 정도를 깨닫기 위해 떠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자주 생각하면 자꾸 이 생이 허무하다는 쪽으로 젖어들게 되어서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죽음을 목격하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해 나가는 쪽으로 가야 하는 과정인 것도 같아요....

2010-09-29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 이거 통화음이 너무 안들리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요.

오후 일곱 시 안에 하자가 발견될 경우 대리점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핸드폰을 들고 숨이 턱에 받치게 뛰어 들어갔다. 남편과 바꿔가며 통화하면서 역시 너무 안들린다고 무언가 심히 이상하다고 결론내리고 근처 중국집에서 뛰어 나온 참이었다. 

... 

대리점 안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행여 기스라도 날까 보호비닐을 하나도 안 걷어내고 들고 있는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며 얘기한다. 그걸 띠셔야지요, 당연히 안들리죠. 하하하. 안녕히 가세요. 

참으로 무안하게 다시 그 분을 모시고 나왔다.   

얼리 어답터인 척 하고 싶은 욕망과 때맞춰 꼴딱꼴딱 용케도 사망해 주신 핸드폰 덕에 아이폰4를 맞춤하게 손에 넣게 되었다. 기계를 나의 손가락의 지문으로 흔들어 깨우고 함께 속살거리고 내킬 때는 재워 버리고 하는 이 짓에 심하게 중독되고 있다. 딱딱하고 차가운 액정을 나의 체온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이 모순과 이 부조화가 왜 사람들을 그렇게 열광시키는 지 알것 같다. 터치 입력에 익숙치 않아 교보문고 도서검색대에서 몇 번이나 말도 안되는 오타를 내다 좌절하고 물러섰던 기억들은 저만치 쫓아 보내고 걸핏하면 꺼내 들고 흔들고 터치한다. 물신주의라는 말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아이폰은 마치 욕망의 가장 집적된 현현 같다. 눈 앞에 내 욕망을 꺼내 놓고 만지는 이 기괴하고 음란한 행위라니. 

  

 

 

 

 

 

 

  

탁 트인 거칠 것 없는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는 구름을 마구 휘저허 풀어 헤친 것 같은 성곽이 담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바보처럼 끈질기게 아이폰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슬펐다. 저 하늘을, 저 구름을, 그리고 그것들을 담아 낸 성곽만으로 충분해야 했다. 무엇 하나에 온전하게 몸을 담글 수 없고 어딘가 한 구석에는 꼭 물려 있어야 하는 나의 결핍과 열등감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쉽게 빠져들고 중독된다는 것은 그 만큼 허한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에든 쉽게 젖어들어 버린다. 

손가락으로는 돌을 만지고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낫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에 하염없이 나의 지문을 부비며 뭐라도 되는 냥 착각하고 집착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신기하면서도 조금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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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9-26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구는 기구일뿐이죠. ... 돈은 돈일뿐이지만, 목적과 수단이 헷갈리는 세상이다보니

blanca 2010-09-26 23:2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근데 이게 한시적 현상일 것은 같은데 지금 가치가 완전히 전도되었어요. 구입한 당일 눈이 벌개져서 종일토록 보고 이튿날인 오늘은 좀 낫긴 한데.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몽롱하게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09-2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이폰 장만하셨군요?
어짜피 아이 때문에 바깥 생활이나 컴터 생활도 만만치 않으니,
당분간 손바닥 위안을 갖는 것도 괜찮을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블랑카님이 거기에 폐인이 될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을 뿐더러
한동안 즐길만큼 즐기시면, 다시 하늘 보기로 돌아오실거라 믿어여~ ^^

아이폰 익숙해지면, 나중에 저도 갈켜주세여.

blanca 2010-09-26 23:2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폐인 되었어요.--;; 이게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니 그 중독성이 더 심하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긴 한데. 손바닥 위안 정말 맞아요^^

비로그인 2010-09-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폰..장만하셨군요.

요즘 밖을 나가보면 빠르게 널리 널리 퍼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또 그만큼 뭔가 경계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좀 섧기도 해요. 저는요.


blanca 2010-09-26 23:2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도 섧어서 또 핸드폰이 아주 맞춤하게 고장이 나 주는 바람에 이래저래. 근데 말이에요. 이것을 손에 넣으면 사람 간의 관계는 더욱더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아요. 심지어 두 사람이 마주보고 각자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풍경도 흔하더라구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 서러워 마세요.

비로그인 2010-09-2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슉슉 넘어가는 그 맛이 죽이던데...
블랑카님이 그러기야 하겠어요?
푸히히~~난 부러울 따름~~

blanca 2010-09-26 23:30   좋아요 0 | URL
슉슉 ㅋㅋㅋ 마기님 메텔 모습 넘 잘 어울려요. 아이도 터치 시작하면서 슉슉 자기 사진 넘기더라구요 ㅋㅋㅋ

세실 2010-09-2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이폰에 중독될 수 있는 열정이 부러운걸요.
나도 아이폰에 중독될 수 있을까?
전 그저 문자를 보낼 수 있는것으로 만족하는 슬픈 40대.
잠시 그럴거예요^*^

blanca 2010-09-26 23:31   좋아요 0 | URL
에이. 세실님, 저도 기계치여요. 얼리어답터와 완전 거리 멀구요. 그런데 그런 유형이 더 위험하답니다. 완전 중독되요. 잠시 그래야 할텐데요. 그러리라 믿어요^^

2010-09-26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0-09-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호비닐과 통화불량, 그거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핫 --;; 저는 케이스랑 새로 보호비닐사느라 거금을 지출한 데다가 어플도 몇 개... (학생들이 덥썩 살 것은 못 된다고 봐요)
저는 막 책까지 사서 공부중이랍니다. 실내에서 너무 데이터를 많이 쓰게 되서 아이밸류요금제로 바꿨구요, 아이폰이랑 노는 것은 재미있는데, 생각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군요. 충전도 아주 자주해야 되고, 어플값도 이것저것 하면 꽤 비싸고 통화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재미있는 놀이기계 하나 장만했다고 (돈을 많이 잡아먹는) 생각중이예요.

blanca 2010-09-26 23:33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도 ㅋㅋㅋ 저도 핑크 케이스 주문중입니다.^^;; 어플은 무료로만. 와이파이 안뜨면 절대 안쓰려고 하는데 그게 참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저도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순오기 2010-09-27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이든 열정을 갖는 나이라는 건 좋지요~
그런 열정조차 시들어버리는 나이대도 있으니까요.
고급 장난감 장만을 축하해요!!

blanca 2010-09-27 13:4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감사합니다. 장난감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열정을 갖는 나이. 잠깐 생각하게 되어요.

양철나무꾼 2010-09-27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가을 하늘이 참 좋군요.
아이폰으로 누구나 저정도 담아낼 수 있는 하늘이라면,
저도 아이폰을 함 장만해 볼까요?

blanca 2010-09-27 13:43   좋아요 0 | URL
양청나무꾼님! 저 사진은 제 디카로^^;; 아이폰 사진 찍는 기능은 원래 가지고 있던 폰보다야 훨 낫지만 그래도 아직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함 장만해 보세요. 업무가 당분간은 마비될지도 몰라요^^;;

기억의집 2010-09-2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폰 장만했군요. 좋겠다. 저는 연아폰인데..거의 바보폰 수준이라서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1년 더 가지고 있어야해요. 1년 후에 저도 스~~마트폰 장만할 거에요.손안의 놀이터라고 하던데...님도 그렇군요.

blanca 2010-09-29 22:29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꽤 재미있어요. 또다른 중독의 세계가 열린답니다. 다만 눈이 너무 피로하답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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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게 어떤 것을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무언가 아주 기묘하고 신비로운데 그렇다고 나와 동떨어진 것 같진 않다. 그러니 섣불리 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 책이 그러했다. 굉장히 사변적이고 막연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상상의 도시들에 대한 얘기는 오히려 굉장히 구체적이고 사람들의 기본 정서에 와 닿아 있다. 마르코 폴로가 자신이 사신으로 방문했던 도시들을 타타르 족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하는 것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그래서 고전이 된 것 같다,고 수긍이 가는 책이다. 

   
 

 책장을 넘기듯 시선이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폐하께서 생각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합니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타마라를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저 도시가 자기 자신과 각 부분들을 정의하는 이름을 기록하고 계실 뿐입니다.

 
   

 

'도시와 기호들 1'이라는 표제하의 이 대목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결국 그것을 자신만의 경험과 인식의 기호로 덧씌워 재해석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투사하여 읽는다. 특히 여행지에서 그러하다.  

   
 

 여행자의 과거는 그가 지나온 여정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루가 덧붙여지는 가까운 과거가 아니라 아주 먼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여행자는 그가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혹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의 이질감이, 낯설고 소유해 보지 못한 장소의 입구에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까지 결정하고 만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발을 딛고 좀전까지의 나를 털어 버리려 하지만 결국 이동은 또다른 나의 삶이었을 수도 있을 것들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기시감. 그것은 어떤 막연한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과거의 가능성을 더듬어 보는 경험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서 그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는 잃어버린 가능성은 영원히 오늘의 나를 매혹한다. 

수많은 관념과 상상들이 도시로 체현된다. 여기가 지겨울 때 체스 판을 이동하듯 끊임없이 옮겨 다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도시, 관계들을 나타내는 방식을 흰색과 검은색의 실로 엮어 걸어 놓다 너무 많이 걸려 있어 그 사이로 지나다닐 수 없게 될 때 떠날 수 있는 도시, 위선자 역, 식객 역 등 수많은 역할을 바꾸어 가며 대화 속에 살다 퇴장하게 되는 도시, 산 자들의 도시, 죽은 자들의 도시, 태어날 자들의 도시 등 삶과 죽음과 관계와 이동이 혼재되어 있는 그 공간들의 설정은 마치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구체화한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언어와 욕망을 손 안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언어의 속임수와 욕망의 무분별은 우리를 포박하고 유린하고 있다. 결국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란 우리의 과거, 욕망, 기억이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듣게 되는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깨달음의 은유다. 

   
 

 하지만 제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기대했던 말만을 간직할 것입니다.<중략>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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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1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독특하다면서여?
나두 블랑카님처럼 고전 좀 읽어야 할건데... 맨날 머하는건지. ^^

blanca 2010-09-16 22:2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은 또 다른 분야에 빠삭하시잖아요. 저는 요새 민음사 문고 좌르륵 꽂아놓고 혼자 흐뭇해 하며 웃는 재미로 ㅋㅋㅋ

2010-09-16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0-09-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멋진 책이죠~ㅎ 세계 3대 환상문학가로 꼽히는 이탈로 칼비노의 숨은 명작입니다~ 칼비노 책 중에서 저는 이 작품을 제일로 칩니다~ 워낙 독특해서요~ 소설읽기가 시큰둥할 때 지인이 던져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리뷰를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다시 볼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군요!

리뷰 잘 봤어요~ 저도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려고 했는데, 계속 시간에 쫓겨 아직도 못쓰고 있습니다..ㅎ

혹시 이 작품으로 칼비노의 작품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우주만화>도 강추드립니다

blanca 2010-09-17 19:51   좋아요 0 | URL
세계3대 환상문학가는 누구누구가 있을까요? <우주만화>요? 우아, 이런 소설을 쓴 칼비노가 그런 소설까지. 여기에서도 칼비노의 기가 막힌 상상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는 하지만 더욱 기대되는걸요.

2010-09-19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0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9-20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 때문에 보름달을 보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그래도 즐겁고 여유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blanca 2010-09-22 14: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와님도 즐거운 명절 되세요. 좋은 글 저녁에 찬찬히 읽어 볼게요^^

후애(厚愛) 2010-09-2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놀러왔어요.
즐거운 추석 잘 보내세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blanca 2010-09-22 14:08   좋아요 0 | URL
후애님~ 안그래도 오늘 라디오에서 외국에 사시는 분들이 추석맞아 보낸 사연들으면서 후애님 생각했어요. 후애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 되세요.

2010-09-2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4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09-25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상상의 도시들이라.....궁금해 집니다.
위대한 개츠비 읽고나면 도전해 볼까봐요.
저두 민음사 문고 좌르륵 꽂아두고 싶은 욕심 땡기는 중입니다. 곧 아이들이 읽겠죠.

blanca 2010-09-25 22:3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위대한 개츠비 읽고 계세요? 어느 출판사로 읽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분량이 많지 않아 부담없이 읽기 좋아요. 민음사는 결국 한꺼번에 사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수 있을 지경까지 갈 것 같아요^^;;

세실 2010-09-26 06:48   좋아요 0 | URL
당연히 민음사^*^

[그장소] 2015-01-1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을 보고는 아..지난 시간의 기록이구나..하면서..칼비노...언제 메모했는지..머릿속을 뒤적뒤적..2012년쯤..낭만주의와 판타지의 뿌리 였나..동시에 카뮈 반항하는 인간과 같이 메모한 기억이..나는데..ㅠㅠ 사서 소장하고 싶은 책였다고..기억해요. 아..메모지 찾아내야
겠네ㅛ

blanca 2015-01-16 22:03   좋아요 0 | URL
와, 그장소님, 저도 지금 이 책이 가물가물해요. 벌써 4년도 더 전이에요. 흑, 시간의 흐름이란 게 참 놀랍기도 하고 이런 옛글에 그장소님의 현재 댓글을 보니 표현하기 힘든 뭉클함이 있어요.

[그장소] 2015-01-1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보고 놀란걸요..결국 온.약 봉지를 다 뒤졌는데도..칼비노를 메모해둔것은 못찾고..ㅠㅠ;찾으면..신나게..아는척 하려고 했는데..속상했다는..!^^ 아하핫..요술 키보드예요..분명..글자확인을 해도...번번히 오탈자를 중간에 턱~하니..
심어놔요..꺼진불도 다시봐..그러는 모양..ㅎㅎ

blanca 2015-01-16 22:09   좋아요 0 | URL
와! 신기해요! 실시간 댓글이에요. 그장소님!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메모.

[그장소] 2015-01-1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아까워요..제목만 보고는 ㅋ 음..긴가민가..하는건..봤다고 못하겠더라고요..그래서 첨엔 안본걸로 체크했거든요...그러다..후애님과의 대화내용 시간을 보니..현재형이 아닌거라..아!했죠..예전거구나..!^^
번호 상 거의 안보고 지날순이 아니더라는..
 

한 그릇 더 먹을래?
정말 그래서는 안되는 곳이었는데 나는 육개장에 밥을 말아 훌훌 마시고 있었다.
미안하다, 맛있네. 좀 더 줄래? 

죽마고우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갓집 나와 그녀가 나눈 대화다.
퉁퉁 부은 눈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식욕에 살짝 웃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상갓집에서 육개장 두 그릇을 얼큰하게 잘 먹고 나왔다.  

   
 

"말하자면,"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을 계속했다. "체호프는 죽었지만 웨이터의 고민은 어떻게 바닥에 있는 뚜껑을 줍느냐 하는 거지."  

...중략...

"다시 말해, 인생에는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이 함께 섞여 있어. 허나 우린 항상 사소한 일만 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사소한 일들 중에 뭐가 중요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거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빅토리아의 발레>에서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소위 대도인 베르가라와 말을 훔친 죄로 복역했던 젊은 청년 앙헬이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부정축재를 한 칸테로스의 금고를 터는 장면에서 나눈 대화다. 그들은 뜬금없이 레이먼드 카버가 체호프의 임종을 다룬 최후의 단편 <심부름>을 얘기한다. 도둑들은 체호프를 '위대한 체호프'라고 정정하여 부르기로 한다.

 

독일의 휴양지 호텔에서 체호프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와중에 담당의는 샴페인 세 잔을 한 웨이터에게 주문한다. 새벽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가수면 상태에서 불려온 그는 상황파악을 못한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체호프는 한 잔을 다 마신다. 정말 오랫만이라며. 그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희곡으로 연기를 하기도 했던 아내 올가는 이윽고 의사를 떠나 보내고 의외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 젊은 웨이터였다. 입성이 몰라보게 달라진 그 웨이터는 마치 그 전의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사과라도 하듯 노란 장미 세 송이를 꽂은 화병을 들고 온다. 그리고 저절로 뽑혀 바닥으로 굴러간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를 줍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줍고 싶었고 주워야만 했다. 바로 그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장의사를 불러달라는 올가의 부탁에 그는 성심성의껏 마치 장의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온몸에 심부름의 하중을 실어 걸어간다. 체호프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 웨이터에게는 투숙객이 웨이터에게 부탁한 심부름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듯 행동한다. 실제로도 이 단편에서는 체호프의 죽음보다는 웨이터의 직분 수행에 아웃포커스가 된다. 카버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주려는 듯하다. 체호프를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지만 여기에서 체호프의 임종은 하나의 배경으로 뭉개진다. 사람들은 1년 뒤 죽은 카버가 당시 암투병중이었던 것을 떠올려 이 작품을 죽음에 대한 얘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삶의 그 자잘한 파편들에 대한 얘기로 읽힌다. 그는 삶에 대해 여전히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체호프처럼.

<빅토리아의 발레>에서 금고털이를 하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카버의 웨이터를 얘기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궁극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삶이 하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먹고 싸고 화내고 울고 기뻐한다. 그건 때로 진저리나지만 삶과 생명의 본질일런지도 모른다. 

육개장이 하필 그 슬픈 장소에서 너무 맛있게 먹혔던 변이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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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9-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은, 육개장 두그릇 먹은것에 대해서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군요! 저처럼 아침먹고 몽쉘통통 먹고 우유를 마시고 삼계죽에 치즈를 넣어 먹은 후에 캬라멜 마끼아또를 마신다면, 그때는 대체 어떤 글을 쓰실까요? 제가 먹은 것 모두를 그대로 드리고 싶네요.

blanca 2010-09-16 15:2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ㅋ 삼계죽에 치즈 넣으면 안느끼하나요? 저 카라멜 마끼아또가 위에 한 삼천 잔은 있을 겁니다. 라떼로 선회했어요. 댓글이 너무 귀엽고 이뻐용.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남자는 다락방님 애교에 쓰러질듯 ㅋㅋ

비로그인 2010-09-16 23:25   좋아요 0 | URL
blanca님. blanca님은 저런 자리의 객이 아닌 적이 있으셨을까요? 그냥 궁금해집니다. 제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만일 저라면 어떤 객이 저렇게 육개장을 두 그릇 가볍게 먹어 주고, 이런 글을 쓴 것을 봤다면 마음이 더 편해지고 힘도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 (분위기 파악 쪼금만 더 못하면요.) 그리고,

(다락님..꼭 섞이기 전의 모습 그대로 드려야 할 것 같아요..만약 그러지 않으면 blanca님 피자 만드신거라고..생각함 안되자나요.^^)

blanca 2010-09-17 19:52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제 친구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지금은 그 친구 아주 행복한 일을 앞두고 있답니다. 하늘에 계신 친구 아버님도 더없이 행복해하실 것 같아요. 피자요?ㅋㅋㅋ

하이드 2010-09-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밤을 새고, 배고파서 아침(?) 밥을 먹으려다 귀찮아져 라면을 끓여야지 생각하고 자고 낮에 깨니 더 배가 고파졌어요. 라면을 끓여서 먹고 나니 양이 너무 적은듯하여 국물에 밥을 말았고 ... 많이 ... 라면을 반 개 더 끓여 라면 국물에 만 밥 위에 얹을 때 즈음에는 막 먹은 라면 하나가 드디어 배가 불러져버리고 말았지요.

그래서 두그릇을 해서 한그릇을 버렸다는 일상의 사소한 슬픈 이야기.. 에요. 음..

blanca 2010-09-16 22:30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도 라면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사발면이 간식입니다. ㅋㅋㅋ 하이드님 요새는 그 맛난 스파게티 안 만드세요? 그 때 따라 만들어서 잘 먹었었는데 간단하게 맛있게 만들어 먹는 요리 레시피가 참 요긴했어요.

마녀고양이 2010-09-1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생명력이 워낙 강한 존재니까 말이죠.
그리고 왜 사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고 죽어야지, 그냥 홀랑 죽으면 고생하고 억울해서 승질나여~ ^^

육계장 맛났어여? 나두 먹고 싶다. 단, 친구 아버님 장례식장에서는 말구.

blanca 2010-09-16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억울해서 좀더 많이 알고 죽으려고 하는데 갈수록 미궁입니다. 육개장은 정말 맛있더라구요. 당시 이천에서 서울까지 올라오고 일도 좀 보느라 허기가 져서 너무 많이 들어가더라구요. 친구도 피식 웃어버리더라구요 ㅋㅋ

비로그인 2010-09-1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 따르면 체호프는 독일 바덴바일러의 한 호텔에서 말씀하신 대로 의사가 주문한 샴페인을 마시고 독일어로 "나 죽는다(Ich sterbe)"라고 말하고 나서 "샴페인은 정말 오랜만이군"이란 말을 덧붙이고는 곧바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군요.

죽음을 사소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인이 마지막으로 대접한 육계장(샴페인보다 낫네요)을 맛있게 먹어준 일 또한 사소하다고 할 수는 없지 싶은데요. 허기를 통해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하셨으니까요...

blanca 2010-09-16 22:31   좋아요 0 | URL
예..참 이상한 게 그런 저의 행위가 친구한테 약간의 위로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후와님, 어떤 책인가요? 마리아 슈나이더의 책인가요? 궁금해집니다. 죽는 순간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를 얘기했다는 것도 참 인상적이네요.

비로그인 2010-09-17 13:18   좋아요 0 | URL
어, 그냥 체호프 단편집에 실린 연보에서 본 건데요...
뒤의 말은 러시아어로 했다는 설명도 있고요...
저도 독일어로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 죽는다"라고 말하고 죽는다는 게...

기억의집 2010-09-1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영어로 카버의 그 심부름인가 하는 소설 읽으신 거에요? 와우, 놀라워요. 11월인가 도착한다는 소설은 벌써 도착했네요. 전 요즘 하루키한테 삘 받아서 영어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작심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전 육개장을 초상집에서밖에 안 먹어요. 외식을 할 때도 육개장만은 안 먹거든요. 이게 트라우마 같아요. 전 아빠 장례식이후 육개장이 그렇게 먹기 싫더라구요. 젊은 시절에는 그 알큰한 맛에 반해 어딜가도 육개장만 시켜 먹었거든요. 제목이 육개장이길래 제일 먼저 장례식이 생각났어요. 혹시나 했는데~~~

blanca 2010-09-16 22:34   좋아요 0 | URL
중고로 상 주문했는데 일반우편으로 우편함에 꽂혀 있더라구요. 단편라서 짧았어요^^;; 책 상태 참 맘에 안들더라구요. 형광펜으로 쭈욱쭉. 하루키 얘기에 사실 저도 필 받았어요. 이중언어 ㅋㅋㅋ 찌찌뿡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제 글이 기억의집님의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저는 육개장을 어렸을 때부터 참 좋아했어요. 신혼 때 한 번 시도해 보고 실패한 기억 이후로는 제가 만들 엄두가 사실 잘 안 나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9-17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육개장 좋아해서 몇 번 만들어먹었던 것 같아요. 신혼시절에...기억이 가물가물~~

아, 중고로 구입하셨군요. 책값보다 핸들링비하고배송비가 더 들었죠. 저는 그림책 중고로 몇 번 구입했는데 번번히 배송비(뿔 핸들링비)때문에 열 받은 적 많아요. 얘네는 한군데서 구입해도 책 한권당 배송비와 핸들링비를 다 받더라구요. 무게때문인 것은 이해하는데..핸들링비는 좀 빼 주었으면 좋겠더라구요. 책 상태는 좋았나요? 저는 책도 그지같은 책이 와 가지고...버벅거리는 영어로 상태 굿이라더니 이게 뭐냐? 실망이다, 라고 판매자 등급에 썼더니 미안하다고 다시 보내라는데.... #$%^#$%^ 장난하니? 싶더라구요.

blanca 2010-09-17 20:04   좋아요 0 | URL
상태 완전 구렸어요. 중고는 다시는 안 살라구요. 알라딘에 외서도 많이 들어와 있더라구요. 한 번 주문해 보자,는 경험 차원에서 만족하기로 했어요^^

감은빛 2010-09-1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씀 하신 것처럼 글을 참 기발하게 잘 쓰셨어요!
근데 보통 그런 자리에서는 잘 먹는 사람보면 더 좋아하지 않나요?
잘 먹고, 잘 놀고 왁자지껄 사람들이 떠들어주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몇 달 전 고모 돌아가셨을 때, 아주 오랫만에 사촌들과 육촌들이 모여서
한껏 수다를 떨고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blanca 2010-09-17 19:48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지인들이 같이 밤새어주고 왁자지껄 떠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이제야 좀 알 것도 같아요. 그건 무례의 범주가 아니라 죽음의 절망에서 생의 희망으로 유족들을 이끌어 내 주려는 민족적 저의도 숨어 있다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프레이야 2010-09-1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_()_
상가의 국은 이상하게도 맛있어요. 영정이 지켜보시는 아래 그 먹을거리들이 유난히
입에 붙는 건 왜일까요? 사소한 일들을 오늘아침부터 하면서 아무 소득 없어 보이지만
그중에 중요한 일의 아주 초기 조짐이 숨어있었을까요? 오늘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요.

blanca 2010-09-17 19:50   좋아요 0 | URL
아, 꽤 된 일이에요. 그 친구는 지금 아이 출산을 앞두고 슬픔도 추스렀어요. 저는 솔직히 결혼식 밥보다 상갓집 밥들이 더 맛있습니다.--;; 되도록 장례식을 꼭 참석하려고 하구요. 프레이야님! 마지막 두 줄 넘 의미심장해요. 무언가 아주 좋은 일이 프레이야님한테 있었으면 합니다.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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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영희를 때로 이영희라 불렀다.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아니, 그의 사상의 세례를 받아야 할 만큼  사회와 맞닿아 있는 지점의 자유를 갈구하는 절박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자잘한 현실을 관념의 구역에 밀어넣고 슬쩍 눙치며 방관하기를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비겁했다,고 고백할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침내 '대화'를 펼치게 되었다. 잠들기 전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대화 형식으로 들려주던 그의 말들은 밤이면 나의 머리와 마음을 뛰어다니며 흔들리는 배를 탄 듯 멀미를 일으켰다. 그건 걸핏하면 용공분자로, 빨갱이로,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되었던 그가 회고하는 75년간의 삶이 결국 나의 피를 타고 흐르는 의식의 혈육적 문화역사를 재생하고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일은 결국 '우리'와 '과거'를 두루마리 풀듯 주루룩 펼치지 않으면 막다른 한계에 머리를 박고 돌아서고 또 되돌아서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경계  

기능적인 지식인에서 현실로 포박해 들어가는 지성인이 되는 길에는 아주 얇은 경계막이 있다. 그 막을 찢는 일 그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용기백배해서 그 막을 찢어 발겨 버리고 난 뒤 우리는 우리 삶의 파열을 때로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지성인이 되는 일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일과 다름아니다. 편안하고 그럭저럭 굴러가는 나의 일상들과 그 일상들에 저도 모르게 깊이 몸을 담그고 있는 나의 전존재가 일거에 파도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 하나에 우리는 주춤하고 그 경계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 막을 통하여 고통스럽게 '현실'을 엿보는 일은 비겁한 지식인이 감수해야 할 하나의 천형이다. 종국에는 우리는 아파하지도 않고 스리슬쩍 염탐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타락'의 한 형태다. 알았기에 그리고 그 앎에 멈추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지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앞에 펼쳐진 형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p.7

리영희는 1977년 저서들로 인한 반공법 위반으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기억을 30년이 지나간 뒤에도 잊지 못한다. 대공분실 옛자리인 남영역 앞을 지나가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 형벌은 기억을 통한 감각까지 점령하였다. 진실 앞에서 행동하는 일은 이렇게나 처절한 자기희생적 투신을 요구한다.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러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의 희생이 남긴 열매를 생래적으로 얻은 권리로 여기고 주머니에서 흘러 떨어져도 주워담지 않고 그저 지나가 버리는 그런 무감각을 이제는 흔들어야 겠다. 그것은 산모가 흘린 피가 얼룩진 강보에 싸인 것이다. 시선을 맞추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보듬고 키워야 한다.

 

인간 그 본질로서의 무게  

그의 인간관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유는 '인간' 생명의 원초적 본성이며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 사회적 조건'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떤 식으로 조화 통합하여야 되는지에 대한 암시를 준다. 인간의 하반신적, 동물적, 물직절 조건을 자본주의로, 상반신적, 인간적, 정신적 자율성을 사회주의로 담아내어 그 둘을 조화시켜 나가려는 노력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모습은 여즉까지 그를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철저히 오해하고 그의 사상을 오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공산주의도 반공주의도 사상적 자폐증으로 곧 자살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의 본성에도 또 그 본성이 충족되고 난 다음의 연민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대에도 그의 시선은 머무른다. 인간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일이 때로는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기주의는 결국 자멸로 이르는 길이다. 자본주의를 신념처럼 고수하다 쓰나미처럼 연이어 경험해야 했던 그 비극의 현장에서 그의 얘기는 깊은 울림을 가진다. 완전한 자유는 타인과의 경계 위에 걸처져 있다. 손을 잡지 않고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  

 

우리의 못남을 돌아보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권력에 빌붙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고스란히 미군정의 권력 대리자로 등용되어 분단을 고착화하고 극우 반공주의의 폭압성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갉아 먹고 제국주의에 철저히 유린 당하고 있는 역사적 과거에 대하여 그는 통탄한다.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으로 그들의 것은 그들의 것으로 돌려 주어야 하는 그 기본적 일이 이렇게나 요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질곡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뼈아프게 방증한다. 우리 손으로 찢어야 하는 노비문서, 우리가 우리의 못남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긍정으로 재탄생하는 그 필요불가결한 과정을 망실하고 우리의 상황은 언제나 지극히 가변적이고 의존적이며 불투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자학한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업 같다. 

그는 민중적 공감과 저변의 대중 속 운동의 목표와 방향, 행동양식이 상향적으로 기능했던 모택동식 사회혁명에 감응하는 바가 컸다. 또한 마치 닮은꼴 복제처럼 미국의 분단획책에과 이간질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베트남이 결국 너무나 자명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지도자 호지명의 기치 아래 통일을 이루어 내고 말았던 사례에 경도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그가 국내 정세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는 하나의 등불이 된다. 기본적으로 그는 역사의 전진을 믿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대한 명철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나름의 문제의식, 분석으로 가공한 그의 글은 진실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의 결실로 민주화투쟁의 도화선이자 사상적 지주가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 서문 중

 

고통을 무릅쓰지 않고 다가갈 수 없는 것들을 듣는 일은 힘들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면죄부를 주어야만 견딜 수 있는 우리네 같은 범인들에게 그의 생은 하나의 비수 같다. 그럼에도 가슴을 들이대는 것은 읽는다는 것이 그가 우상에 도전하고 민족적 미신에 도전한 일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의 삶을 들어야 한다. 듣고야 말아야 한다.

 

 p.s.  분량과 내용면에서 얼핏 지루한 첫인상을 줄 수 있는데 막상 읽게 되면 그의 입담과 드라마틱한 삶, 편집의 미덕이 어우러져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잊게 된다. 1929년 금광으로 유명한 평북 운산 북진에서의 출생으로부터 최근까지의 그의 삶이 현대사와 어우러져 펼쳐지는 장대한 드라마는 하나의 대하 소설 같다. 현대사에 대한 갈증도 더불어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말과 글이 일치하는 리영희가 쉽고 체계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의 얼개를 짜 보이는 일은 하나의 감동적인 강의를 듣는 경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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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1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이분의 책들을 읽기는 했었는데...그저 의무감이었지 되돌아오는 울림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이분과의 대담이 있었는데,
뻐꾸기 시계가 찬조출연한 그 대담,의외로 재치발랄 참 좋았어요.
다시 읽어봐야지,불끈~!하고 있어요~^^

blanca 2010-09-15 21:09   좋아요 0 | URL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오셨군요. 저는 처음이에요. <태백산맥> 읽고 현대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또다시 이 책을 읽으며 저의 비겁함을 조금은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굿바이 2010-09-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선생님의 <우상과 이성>은 제게 정말 불벼락같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워낙 여기저기 일명 쎈(?)책들이 많아서 오히려 선생님의 글이 묻히기도 했지만, 저는 잠 못 드는 밤, 참 많았습니다.
이렇게 극진히, 온전히, 뼛속까지 긁어내며 이 시대를 우는 지식인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9-15 21:10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하긴 그때 그 시대에서의 리영희샘의 글과 지금의 감상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겠어요...시대의 등불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이 분을 그 자체로 표현한 얘기 같아요. 베트남 전쟁사 관련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0-09-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적 자폐증 이라는 문구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이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왜이리 안 되는지요.
욕심이 많아서인가봐여.... 역시 좋은 리뷰입니다.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면, 어떻게 저런 짜임새있는 글을 쓰는지 종종 감탄하고 맙니다.

blanca 2010-09-15 21:11   좋아요 0 | URL
마기님이 강추하시는 글 보고 대뜸 집어들게 되었어요. 마녀고양이님, 의외로 책장 완전 팍팍 넘어갑니다. 저는 지루할 줄 알고 각오좀 했는데 그럴 필요 없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9-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비겁한 사람 여기도 있어요.^^
리영희선생님의 작품에 열심히 밑줄 치고 포스트잇 붙이고.... 저의 애아빠의 리영희선생님의 글을 읽는 모습입니다. 저는 남편의 모습에 궁금해서 읽어야지 한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릅니다. 블랑카님의 글을 읽고 또 불근! 해야겠는데요.

blanca 2010-09-16 22:25   좋아요 0 | URL
아아아...옆지기님이 그러시군요. 부부가 다 같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넘 부러워요. 저는 제가 읽은 책의 감동을 나눌 수가 없어 참 아쉬워요. 리영희 선생의 책은 줄을 그으며 읽을 수밖에 없더라구요. 현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시니 넘 좋았어요.

기억의집 2010-09-17 11:22   좋아요 0 | URL
어머, 아니예요. 저의 애아빠는 그 때 이영희 전작을 어쩌다 다 읽겠다고 불을 뿜었을 때였어요. 역사의식이 좀 투철해서...

애아빠의 천국은 집에 와서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 리모콘으로 원격tv 조종하는 거에요. 개인적으로 저 또한 직장 다니면서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지도 않고요.

blanca 2010-09-17 19:53   좋아요 0 | URL
쇼파에 드러누워 티비 원격조정 ㅋㅋㅋ 넘 똑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