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에서는 4100원짜리 카페라테가 팔리고, 역 앞 별다방서는 3천원에 하룻밤 잠자리를 판다,(한겨레21호 '방이 아닌 방에 살기')는 기사를 읽으며 며칠 전 라떼를 사들고 백화점 매대 판매 여직원의 뒤에서 마셔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리배치가 공교롭게 그렇게 되어 앉아서 서 있는 그녀의 생업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경험은 어쩐지 미안하고 죄책감이 드는 그것이었다.
머리로 입으로 펜으로 대의를 지껄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척 하기는 비교적 쉽고 폼새 나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회운동가도 정치인들도 종교인들도 정작 그들의 땀과 눈물, 냄새를 여실히 느끼고 손을 잡으라 하면 머뭇거리고 외면할지 모른다. 실제 자발적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조지 오웰도 그것에 익숙해지기는 힘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사랑은 멀리 떨어져 할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에서도 록펠러 평전에서도 업든 싱클레어의 <정글>은 20세기 미국의 정재계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경악,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르포도 기사도 아닌 소설가의 픽션이 대통령이 직접 조사관을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게 하고, 식품의약품위생법, 육류검역법을 제정하게 하고 오늘날의 FDA를 설립하게까지 한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목가적 환경에서 시카고의 가축 수용장 지대로 이민 온 가족이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여 파멸의 나락으로 치닫는 과정을 마치 르포르타쥬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최하층 노동자들의 삶과 절망, 패배감을 마치 끌로 새기듯 문장 하나 하나가 거칠고 예리하게 형상화하고 있어 백 년이나 지난 오늘 읽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이건 소설이다,라고 자기암시를 넣어도 리투아니아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고 와 결혼하여 가정까지 이룬 청년 유르기스가 겪는 그 수많은 부조리들, 빈곤들, 패배들, 억압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며들어 와 독서 자체를 고통스럽고 처절한 것으로 그의 삶에 동화시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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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혼은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때 문명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 세계는 바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가진 자들이 만든 야만적 질서만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그에게는 모든 바깥 세상과 모든 인생이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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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하는 가축 도살장 지대의 생생한 묘사는 지난 광우병 파동 때에도 화제가 되었다. 소위 "다우너"를 몰래 도살대로 올려 보내는 특별 승강기에 대한 언급은 1세기의 시간 차를 무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핵에 걸린 소는 살이 쪄서 오히려 환대 받았고 '불고기 햄'을 각종 고기 찌꺼기와 부패한 부위들을 화학 약품으로 처리하여 만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과연 그 공정이 오늘날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작가는 대중들이 이러한 대목들에 분노하여 먹거리의 위생 문제를 공론화한 것에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라는 말로 정작 얘기하고 싶었던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사실 이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소외 문제라는 접점을 가지고 있다. 도살장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킨 노동자나 그들의 손에서 인간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들을 가공하게 한 것이나 결국 인간, 생명이 가지는 그 본연의 절대적 가치를 경시한 탐욕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인간의 소외는 개선은 커녕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실정이다. 다만 그 방법이 더욱 고도하고 교묘하여 정작 소외되는 인간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스리슬쩍 끼워져 들어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 안위하는 지경에게까지 이른 것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닐까. 인산 비료가 풀풀 날려 온 몸의 땀구멍에 다 스며들어가는 대신 반도체 공장에서 온갖 유독 화학 물질에 서서히 건강한 세포들이 잠식되어 가고, 부패한 잡육이 뒤섞인 소세지나 햄대신(자신할 수는 없지만), 각종 유해 화합 첨가물이 교묘하게 들어간 음식들을 먹는 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유르기스가 아내 오나를 잃고 결국 아이까지 진창 속에 빠져 죽게 되는 비극을 겪은 후 본인이 사기, 타락, 부패한 금권선거운동원의 일원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아니러니하지만 슬픈 필연 같다. 그가 고통과 굴욕에 무뎌졌던 것처럼 다음에는 악덕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가장 나쁜 인생의 드라마를 근거리에서 지켜봐야 하는 친구처럼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해하고 감내하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는 갑자기 사회주의에 투신하게 된다. 이 결말은 도식적이고 나이브하다는 평을 많이 받게 된다. 실제 번역자는 초역에서 이 결말을 생략해 버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작가가 갑자기 자신이 실제 경도됐던 이념을 교조적으로 주입하려고 하려는 대목은 지루하고 생뚱맞은 면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의 사회적 역할론이야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 해결책과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소설의 서사에 첨언처럼 간주한 것이 작품의 완결성을 높였다기 보다 완성도를 떨어뜨린 것같다.
이 책은 1979년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채광석의 번역으로 출간되었으나 곧 판금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채광석은 그 자신이 민중적 민족 문학에 투신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절명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정글로 기어들어간다. 언젠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든 정글에서 그 가시덤불에 뒤얽혀 우리도 절명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