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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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친일 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설왕설래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 시대에서 친일은 생존의 방편이었다느니, 친일 인명사전을 발간한 단체가
좌경이라느니. 생존의 방편이었다는 어설픈 자기변명은 십분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발간 단체의 색깔논쟁을 들이미는 데는 유구무언이다.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몇 유명인에 대한 이슈는 거론할 생각도 없고 거론할 필요성도 못느낀다.
슬픈 것은. 왜 아직까지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을까, 인 것이다. 이념의 재단에서.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붉은 이념에 대한 논쟁.
일제치하 우리나라의 특수했던 상황과 독립투쟁이 공산주의 이념과 맞물린 지점에 대한
그 어떤 이해나 용인도 다 잘라내 버리고 우리는 그저 그 이념의 구획 안에 편의대로 상대를 몰아넣고
우격다짐으로 따귀를 때려대며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는 그 양태들을 언제까지 용인하고 혹은 방조해야 하는 것인지.
그건 약하기 때문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초반 만주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위 항일투쟁과 공산주의가 만난 그 지점에서 외롭게 배회하던 이들이 결국은 분열로 서로를 죽이고 죽는
비극의 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고 했던
그 진부한 표현이 사실은 이런 처절한 역사를 기반으로 피어난 문장이다. 적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동족끼리, 그것도 한 때 같은 이념을 공유했던 같은 이상을 꿈꾸었던 이들이 각자 자신이 살기 위해, 아니 죽음을 늦추기
위해 미친듯이 서로를 죽이고 만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건의 무게가, 그 심각성이, 그 비극의 점도가 너무 진해서 그러했는지, 작가는 개별적 역사적 사실과
자신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진실의 교차 지점에서 멀미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엄중한 사실 앞에서 지나친 감상과
문학적 세련됨을 드러내려 했던 약간의 욕심은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한계를 주고 만 것 같다.
만철의 조선인 측량기사 김해연이 공산당 활동을 벌인 이정희와 조직의 연락선인 여옥과 사랑에 빠지는 장면 등은
그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고 지나치게 감정의 과잉이 보인 것 같아 몰입이 어려웠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본인 기업에 파견나와 있는 그가 갑자기 공산주의 조직에 투신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소설적 장치로 소화해 내려하다 보니
독자들에게는 약간 불친절해지고 마는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실을, 그것도 너무 처절한 사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다 풀어내려니 그 누가 했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됐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극현대사에 무지몽매한 나에게 외세의 교란 작전에 휘말려 결국은 그 이국 땅에서조차
서로를 미친 듯이 일본인 첩자로 낙인찍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그 비극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김연수 그에게 감사하고 싶다.
인간이 세계에 던져지는 것은 그 이후에 삶의 의지를 발현한다고 해도 결국은 극도의 우연의 응축이다.
내가 하필 용케 이 시대의 나로 태어난 것. 내가 그 시대의 그로 태어나지 않은 것. 그러니, 가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덧없는 것이지만 일제치하의 그 기댈 곳 없는 곳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는 내일을 약속받을 수 없었다면.
나도 결국은 어둠 속에서 그 어둠 속에서 그 모순과 투쟁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잔혹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만다.
산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 잔혹하고 너무 두렵고 너무 불확실하게 느껴져서.
나의 날숨이 흩어지는 공기 입자 하나하나에 나의 생존이 확실하게 들어가 있다고 막 손으로 꽉꽉 눌러 담고 싶어져서.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래도. 사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아름답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비관주의적인 리얼리스트보다는 대책없는 낙관론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나는 원래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준다고 믿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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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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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의 이민 2세대 작가들을 토막으로 다룬 기사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인네 사진을 보고
뚫어져라 관찰했었다. 정말 너무 예뻐서 과장 조금 보태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예쁘니 외모덕으로 주목받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들이밀며 그렇게 잊고 지냈다. 

그녀가 그 이름도 어려운 줌파 라히리였다.
별을 네 개를 주어도 모자랄 지경이라느니, 책장 넘어가는게 아깝다고 하는 리뷰 등 극찬 일색에
게다가 아주 아름다운 여류작가의 이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수순. 

사실 이 책의 원서 제목은 Unaccustomed Earth'그저 좋은 사람'은 다른 단편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출간될 때는 가장 앞에 실린 '길들지 않은 땅'을 표제작으로 내세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제목이 번역으로 인해 너무 평이해져 버려 덜 튀어서 그렇지 가장 좋았던 작품도(물론 나의 기준)
'길들지 않은 땅'이었다. 이 작품을 읽고는 정말 무언가 내 가슴에서 펑 터져 버린 기분이어서 솔직히 나머지 단편들은
다 읽어내겠다는 의지의 일환으로 숙제하듯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공감가는 상황이었고,
결론없이 계속되었던 그렇고 그런 고민들이 들킨 듯이 그녀의 인물들에 의하여 발설되는 느낌은
소설이 어떻게 독자의 삶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출구로 밀어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놀라웠다.
그. 리. 고. 그녀의 삶이 너무 궁금해졌다. 사실 소설이라는 것이 작가들의 삶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작품들의 대부분에 그녀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뱅골 인 2세로 미국으로 뿌리를 옮겨 심은 부모님과
자식들이 어우러져 때로는 불화하며 그네들의 삶을 미국인들의 언저리에서 빙빙 돌려대는 것 같은, 그러나 그 속에
인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의식이 차르르 스며있는 그런 삶. 그리고 사랑. 때로는 이방인들과 때로는 그네들과 같은
혈족과. 
 

'천개의 찬란한 태양'의 호세이니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천연했던 삶과 민족적 색채에 주목한다면,
줌파 라히리는 인도에서의 경험이나 기억은 대체로 지워져 있고 미국에서 그네들이 적응, 부조화하는 이후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미국에서의 삶의 문제들의 답변을 융화 및 화해 모드로 단순하게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등장 인물들은 대체로 실패하고 튕겨져 나간다. 그 튕겨져 나감이 일탈 및 실패라고 판단한다면
더없이 답답한 해석이 되겠지만. 나는 그것이 또다른 출발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누구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
삶을 살고 싶다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에쿠니 가오리와 닮아 있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면. 줌파 라히리는 체호프에 비견되는데 
대체로 말랑말랑한 순정만화형 작가라 생각하는 에쿠니 가오리를 빗댄다면 거부감을 보일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연작 소설 '헤마와 코쉭'은 사실 '냉정과 열정 사이'와 '좌안, 우안'과 아주 흡사한 대목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예견되는
냉정한 남자와 따뜻한 여자의 힘겨루기. 그리고 각자 떠남. 새로운 공간에서의 조우. 그러나 다시 헤어짐. 각자의 시점에서의
듣지 못한 얘기들의 고백. 그리고 무언가 그 담담하고자 하는 서술.  

줌파에게 다가가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낭만적인지 안다는 것이다. 
가장 좋았던 작품인 '길들지 않은 땅'에서 루마의 친정엄마는 "아이는 너의 고기와 뼈로 만들어진 거야'라고 하는 대목.
그러나 결국은 전존재로 받아들였던 부모를 떠나고 말 아이들이 남기고 갈 빈자리로 딸이 힘들어할 것을 걱정하는
친정 아버지. 고학력임에도 전업주부로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딸을 안타까워하며 자꾸 일을 가지라고
넌지시 조언하고 손자를 위해 딸을 위해 예쁜 정원을 만들어 놓고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이제는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떠나는 그. 이 담담하고 평범한 풍경 속에는 과장되지 않은 삶의 진실과 그것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있어 숨을 멈추게 된다. 바쁘게 달리다 한번씩 멈추고 싶을 때, 아니 한번씩 멈추어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나가기 힘들 때 그녀의 '그저 좋은 사람'이라 명명된 일시적인 호칭 아닌 호칭, 어머니의 가슴에
기대어 울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원적인 고픔을 그녀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저 좋은 사람은 그 유아기의 전적으로 기대어 나의 생존을 의탁하고,
나의 우울과 나의 환희의 전적인 이유가 되었던 그 찰나의 어머니이다.
그런 관계를 때로는 친구 관계에서
때로는 연인 관계에서 찾으려 하는 데에서 관계의 붕괴는 시작되는 것 같다. 그저 좋은 사람.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 보고 싶은 환타지 같은 몽환적인 완벽한 의존에 대한 하나의 강한 그리움이 아닐런지.
그래서. 나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정말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욕심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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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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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9-1922=87+1=88
1995-1922=73+1=74
이 연산을 처음 책 날개를 펼쳐 주제 사라마구의 이력을 읽을 때 한 번 했고, 또 중간에 두 번 정도 더하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했다.
그의 나이, 한국나이로 여든 여덟이다. 이 작품을 쓴 나이는 이른 넷이다.
물론, 단순히 수리상의 노화가 창작의욕과 일에 대한 정력을 완전히 소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딱딱한 선입견과 어설픈 관념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의 나이는 상상력이 고갈까지는 아니어도 그 파고가 약해지고,
대중과의 감응도가 약해지는 여정의 끝자락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야 언젠가는 읽어야지, 의 과제를 완결한 것에 대하여 그나마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충격적인 작품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마르께스에게 달라붙어 있던 그 고귀한 어구를
나는 주제씨에게 당장 훈장처럼 달아주고 싶다.  

문장부호를 쳐내고 화법도 마구 섞어 버리는 그의 불친절한 문체는 그저 수사가 아니라
그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들의 본질인 것 같다.
모든 관념, 형식, 사회적 담론들의 철책을 마구 허물어뜨리고
내외적으로 알몸이 된 인간들의 본질에 가 닿는 것. 그 본질에는 단순한 생존의 욕구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기본적 연대에 대한 희망이 아스라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한 것일까.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을 읽다 보면 실명이라는 것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당자들에게 극한의 고통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뇌의 지형도를 변형시켜 시각으로 인지하는 세계 자체를 망각하여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다시 세계를 재구성 인지하여 적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름대로 살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의 실명은 백색 실명으로 특성화되었고, 전염병화되어 실명한 자들을 배척하고 격리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대치되었지만. 그 세계에서의 나름대로 진화되는 생존 방식은 결국 인간은 살아지게 된다는
끈질긴 명제를 증명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 실명의 세계에서는 약탈과 폭력과 속임이 난무하지만, 젊은 매춘부 출신의 아가씨가 노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는 즉, 보이지 않은 것의 가치가 불쑥 디밀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단 한명만 남기고 다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세계를 공간화하고 
또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마치 영화 장면 처럼 기막히게 시각화하는 그의 능력.
담뱃재 털며 마구 참견해 대는 싫지 않은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맥 빠지지 않는
반전이 있는 결론까지 어디 하나 감탄이 안 나올 구석이 없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어느 정도 다운되어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갑자기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맹인들이 어우러져 절규하는 장면들은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일상의 수많은 것들에 뻔뻔하게 집착하는 스스로가 염증스럽게 느껴지고,
박팀장이, 김과장이, 혹은 그 누군가의 목에 난 털 하나까지도 얄미워질 지경이라면,
이 소설을 시작해야 한다. 당장.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423쪽)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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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 2009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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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의 한 해 걸러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사서 읽었더랬다.
이유는 단 하나, 재미가 담보되어 있었고, 그 재미가 가볍지 않아 뿌듯했기 때문이다.
그래도...상받은, 혹은 받으려다 살짝 미끄러진 작품들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때로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도 살포시 끼어 보기도 했다. 별반 차이없이 작품성과 재미가 어우러져 있었다.
김훈의 '화장''언니의 폐경'을 만났던 것도 같다. 단편도 장편처럼 둔중한 울림을 실어 나를 수 있다는 데에
약간 전율하기도 했었다. 

이 작품집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박민규의 '근처'를 수상작으로, '위험한 독서'의 김경욱, 은희경, 김애란, 배수아 등의 최종후보작을 싣고 있다. 전반적인 작품들에 대한 느낌은, 음, 긴장감이 대체로 떨어지고, 결론이 무언가 쓰다 만 느낌이랄까? 내가 감수성이 무뎌져서 그런가, 아님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들에 닳아 있어 그런지, 왜 예전 이런 수상집을 읽을 때의 그 간질간질한 재미와 명치 끝에서 전해 오는 울림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박민규의 작품이 가장 올돌했음을 인정하고, 의외로 김숨의 '간과 쓸개'가 가장 인상깊었음을 고백해야 겠다. 나머지 기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은 현을 팽팽히 당기는 그 맛이 쑤욱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단편에서는 긴장감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함)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이 단편이 처음이기에 감상 및 평가를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이 낫겠지만, 대단히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전개방식과 문체를 사용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대화체를 부호 생략하고(요즘에는 이런 방식이 당연하게 간주되지만), 글자 크기를 확 줄여 버리는 것. 오히려 이런 시도가 역설적으로 대화를, 사람 간의 호흡을 더 돋보이게 한다. 죽음을 앞둔 마흔 살의 미혼 직장인이 타임캡슐을 통해 초등학교 추억들과 맞닥뜨리는 얘기를, 심사위원들은 작위적이라고 조심스런 비판을 날렸지만, 그 세부 전개는 굉장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풀어 나가고 있다. 주인공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어찌나 절제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는지 꼭 인용해 두고 싶다. 

   
 

온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몸부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중략>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박민규의 '근처'>

 
   

김사과의 '정오의 산책'은 초반을 풀어나가던 강력한 에너지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이러한 한계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무언가 아주 대단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매듭짓는 마무리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느낌. 그런 면에서 김숨의 '간과 쓸개'는 빛나는 작품이었다. 역시 죽음을 앞둔 노인이 구십의 누나와 한데 누워 (나란히 간과 쓸개가 고장나) 유년의 왜곡된 추억을 교정하며 같이 흐느끼는  마무리는 결론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로 열려 있을 수 있는 예증 같아 보여 좋았다.   

여간해서는 인터뷰를 사양한다는 박민규의 수상 인터뷰가 아주 좋아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 그것만으로도 아깝지 않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고 치매에 걸린 노모 때문에 둘째를 미루고 goole earth에서 현재 상태의 밤하늘을 보여주는 천문 프로그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의 얘기는 그것 하나만으로 내러티브가 흐르는 느낌이다. 정말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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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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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사지 않는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
가장 먼저 처분하는 장르이다... 

이런 개별적인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논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의 책이 있다면, 끊임없이 줄긋고 메모하고 별표까지 덧붙이게 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대열의 중심에 김훈의 작품들을 지명하고 싶다. 그는,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철저히 풀어 헤친다. 그는 소설가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이며 수많은 현상들을 채집하여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하나하나 닦아내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기자 생활의 30년 내공이 그의 소설 속 언어들과 묘사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연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근거라면, 소설가로 가는 길은 분명 극도로 험준하고 선택받은 소수들만 걸어갈 수 있다는 아주 특별한 노정이다.  

일단 '공무도하' 아주 재미있다. 사실 그간 '칼의 노래', '남한산성', '화장', '언니의 폐경' 등을 읽었는데, 작가가 워낙 관조적이고 치열한 문장들을 뿜어내는 지라 읽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막 읽어낼 수 없는 본연의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문정수와 노목희의 일상적인 대화를 읽어 가다 보면 툭툭 터지는 웃음들이 김훈도 충분히 간질간질하고 살랑살랑한 남녀 간의 분위기를 살려 낼 수 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의 중량감이 진득한 이러한 소설은 분명 그의 치열한 집필 과정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 

주인공? 글쎄, 사회부 기자인 문정수가 1인칭 화자도 아니거니와 그가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를 과연 주인공이라고 지명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는 그 어떤 관조의 중심에 있고 모든 죽음들을 흘려 보내는, 모든 현상과 인간의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개별화할 수 없는 한계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자신 같다. '공무도하'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문득 피안을 응시하는 것 같으면서 피안을 거부하는 약육강식의 현존을 감내하는 조금은 허무하고도 차가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해망'은 작중 인물들이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해망은 작은 어촌마을로 미군의 공습훈련이 이루어져 수많은 고철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곳이고, 매립지 기반공사가 한창으로 급격한 산업화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다. 그 과정에서의 탈인간화는 차라리 하나의 부속품 같다. 이 지명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서는 고도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운동권의 주변부에 있다 선배형사의 권유로 장철수가 삶의 또다른 근거지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인명구조특공조장 소방위였다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훔치고 박옥출이 귀향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의 죽음을 스산함으로 받아들였던 오금자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곳이기도 하며, 문정수가 군복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망은 출발지가 아닌 도착지로서 '에서'가 아니라 '로'가 되었던 곳.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간 백수광부는 어쩌면 또다른 이곳에 정착해 또다른 비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피안도 강건너 이쪽에서 볼 때만 저쪽의 가능성일 뿐, 또다른 이곳이 되면 또다른 남루한 삶이 되버린다. 해망에서처럼.  

그리고 노을에 대한 이야기,
해망의 묘사에서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해망 그 자체의 발붙일 수 없는 떠있는 느낌을 가장 극적으로 집약하여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주 자주 등장한다. 정말 아름답고 엄정한 묘사들로.  

염전에 소금이 내렸고 소금 위에 노을이 내렸다. 바닷물이 말라가는 동안의 시간의 무늬와 그 시간 속을 스쳐간 바람의 무늬가 소금 위에 깔려 있었다. 사내들이 밀고 나가는 삽날 앞에서 소금은 노을에 버무려졌다. 소금은 노을의 알맹이처럼 보였다.  

그. 러. 나. 작가가 냉소적으로 얘기했던 강저편에는 하나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그 지향점에는 노목희가 작업하는 책 '시간 너머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사물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중략>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힐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중략>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이 아름다운 이상화된 사유의 자유스러운 기운을 떨치는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맹목적인 것 같다. 결국 그는 덕적스러운 인간들에게서도 하나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사실 가장 인간들이 가지기 힘든 극복의 과제를 타이웨이 교수에게 던져내어 풀어낸 것은 그 만큼 그런 이상화된 인간형과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큰 탓이 아닐까? 그가 혐오해 마지 않는다는 그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가 기실은 가장 끈끈하게 맺어지고 싶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고독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애정을 갈망하는 이들의 다른 군상이다.   

소설이 단순하게 현실의 상념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몽환적인 세계에서 작중 인물들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욕구불만을 한시적으로 누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허구의 중량감으로 모든 진지한 가치를 내리누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성찰(그것이 아무리 처절하고 비루할지라도) 및 그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시지프스적 희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성취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그런 지점에서 분명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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