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글목을 돌다 -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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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골목을 돌다>인 줄 알았다.
기성 유명 작가이고 읽히는 재미와 반비례해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는 때로 혹평을 받는 공지영이 대상을 받았다.
아주 힘들 때 밤을 서성이다 인터넷 화면보다 훨씬 못해 실망했던 티테일블에 엎어져 있던 에세이집에서
그녀는 힘든 고백을 하며 울고 있었다.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고 그녀의 아픔을, 이제는 마침표를 찍은
과거형의 고통들은 선뜩하게 나의 가슴으로 배어 들고 있었다.
독자와 작가로서가 아니라 그 순간 만큼은 우리 둘다 어느 지점에서 절절하게 교감하는 여자들이었다. 
지천에 허벅지게 피어난 산수유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고 이제 그만 아파하기로 했다.
산수유를 처음 봤을 때 상상했던 붉은 빛이 아니라 개나리 같은 노란색임을 알고 나는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였다.
글목은 사전에는 없는 공지영만의 어휘였다.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
작가에게는 삶이 선회하는 곳이기도 했다.
작품 속 '나'는 적나라한 '작가 공지영'이었다. 소설의 일본판 출간 기념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 공항에서 처음 만난 H는 북한에 납치되어 이십사 년간을 살고 돌아와 한국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삶 속에서 벌어진 그 무자비한 폭력은 그의 선의에 의해 수긍되고 적절히 체념된다. '나'는 삶을 덮치는 그 가혹한 운명의 파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지난 날들을 갈피 갈피 사이로 끼워 놓으며 '살아가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더듬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는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슴을 좀 웅크리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았는데,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 

 
   

폭력으로 망가진 결혼생활의 회고,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대면, 언어로 하는 일들이 맞닥뜨리는 궁극의 한계, 평범하고 행복하고 무난한 결혼생활로 잔인한 비교우위를 보여주는 친구의 모습, 고통이지만 정확히 과녁을 맞추는 것들이 주는 쾌감,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지만 노년에 자살하고 마는 프리모 레비,  <토니오 크뢰거>... 

이 짧은 소설 안에는 공지영 작가의 무수한 고백들과 좌절들과 그럼에도 밀고 나아가 생을 긍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이 축약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서사 대신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성성 어린 고백들이 서사의 도식을 해체하고 포박해 들어온다. 소설 아닌 소설은 그래서 심사위원들도 독자들도 뭉클하게 만들고 말아 버렸다.  

정지아의 <목욕 가는 날>은 친정 엄마와 함께 목간을 가는 자매의 정감어리고 훈훈한 정경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따사롭게 그려진다. 늙고 무기력해진 어미와 이제 장년의 어미를 복기하는 듯한 두 딸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풍경은 주머니 속에 던져 넣고 오래도록 조물락대고 싶어진다. 

김숨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역시나 놀라웠다. <간과 쓸개>라는 단편에서 노년의 심리의 결을 사무치게 그려냈던 저력은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이중적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고도 여실하게 보여주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연을 꿀꺽 넘겨버리고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능청스러움으로 애닯게 한다. 오랜만에 결말이 궁금해 초조하게 하는 단편이었다. 

김언수의 <금고에 갇히다>는 금고를 열었다고 신나서 뛰어다니다 실수로 버팀목을 발로 차버려 금고 안에 갇혀 버리는 도둑 두 명과 여자의 얘기다. 상황 설정 자체도 극적이고 코믹하지만 유통되고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물질들의 무력함을 일거에 조롱해버리는 작가의 기지가 번뜩였다. 도둑들이 심심하다고 화툿장을 찾아 헤매다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가지고 뱀놀이를 하는 풍경을 보고 빵 터져 버렸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예전의 그 읽는 재미와 여운을 다시 상기시켰다.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도 한동안 멀미를 일으켰다.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이다. 다만 바로 들어와 꽂히는 영상 이미지와 대적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명료한 대안은 여전히 찾기 힘든 것 같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글을 쓰고 읽는 행위는 생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만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어루만지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는 쭈욱 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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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30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공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로 이상문학상을 탔군요. 궁금했어요, 어떤 이야기일까. 그러면서도 뭔가가 마음에 계속 걸려있어 이 책을 사진 않을 거란 생각을 줄곧 했었거든요.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은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도 그랬어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지, 그런게 느껴졌거든요.

blanca 2011-01-30 13:03   좋아요 0 | URL
황순원문학상!도 그렇군요. 저는 이런 돌아옴이 더 좋아요. 전위적, 해체적, 이런 것들이 전 영 낯설고 그렇더라구요. 구수하고 재미있고 진진한 이야기들이 좋아요. 그 예전의 즐거움, 재미. 사실 그 땐 이 정도로 자극적인 재미들이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더 재미있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요.

반딧불이 2011-01-30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공지영의 책은 관심이 안갔어요. 그래서인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는데 이번 책은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 블랑카님 리뷰때문일까요? '글목'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고요.

blanca 2011-01-30 13:02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일단 공작가의 글은 잘 읽힌답니다. 그게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고요. 한번 접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글목! 저는 골목으로 알고 시작해서 더 기억에 남네요^^

순오기 2011-01-3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8월 공지영작가 강연회 가느라고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이상문학상을 받아서 좀 놀랐어요.
리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글목'이라니 신선한 느낌!!
추운날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그곳에서도 편안하고 곧 익숙한 느낌을 갖게 되겠죠.^^

blanca 2011-01-30 13:0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공지영 작가 강연회 가셨었어요? 서재에서 한 번 찾아볼게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정리안되던 저의 살림의 각을 잡아 두시고 가셔서 찬장 문을 열어 볼 때마다 괜히 맘이 뭉클해요. 기억난 김에 아줌마 칭찬글을 올려야 겠어요^^;; 예, 그렇게 되겠죠? 방금 새로운 버스 노선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중이랍니다.

세실 2011-01-3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래도 전 공지영 팬입니다. 그녀의 아픔을 감싸주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할꺼 같아서요.....
그녀의 이야기였군요.

blanca 2011-01-30 12:59   좋아요 0 | URL
세실님, 공지영 팬이셨군요. 저도 잘 몰랐을 때는 그저 잘 읽히고 재미가 있다, 이 정도로 그녀의 글을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아픔들을 알게 되니 또다르게 보이더라구요. 그녀에게는 글이 세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면. 아픔을 뚫고 나온 절절함. 이런 것들. 그리고 트위터에서 가끔씩 날려주는 날것의 말들도 그렇고요.

stella.K 2011-01-3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별 세개군요.
하긴 요즘 작가 재미없더라구요. 고만고만한데 상을 준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너무 심했나...ㅜ)
공지영은 제 취향은 아닌데 그녀가 이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는 게 새삼스럽더라구요.
이건 김연수 보다 늦은거라 더하더라구요.
작가로서 존재감은 공지영이 먼저인 것 같은데, 비교할건 못 되지만
김연수는 이제야 꽃을 피우는 것 같고, 공지영은 그전부터 꽃이 피우긴했는데
잘 몰라본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요.

blanca 2011-01-30 12:5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말씀 잘 해주셨어요. 제가 별점을 잘못 매겼어요--;; 죄송합니다. 네 개를 입력한다는 게 세 개를... 이상문학상은 공지영 작가가 참 늦게 받았죠. 과거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들을 보니 참 흥미롭더라구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보이고. 최근 몇 년간 재미가 좀 덜해진 것 같긴 해요. 다 못 읽은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이번 것은 잘 읽히고 재미도 있었어요. 김연수 작가는 상을 참 많이 받았더라구요. 저번에 한겨레에서 보니가 문학성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1-3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김숨의 소설 '투견'읽어보셨어요? 기분이 참 묘한 소설이에요.식용견 농장 이야긴데...음산하기도 하고...

blanca 2011-01-31 22:23   좋아요 0 | URL
신형철의 평론집에 소개된 걸 보았어요. 그것만 읽어도 정말 음산하던걸요. 김숨이라는 작가 저력이 있는 것 같아요. 나오는 작품마다 놀라워요.

cyrus 2011-01-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번에 처음으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이 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알겠더라구요. 원래 저도 스텔라님처럼
한국소설 잘 안 읽는 편인데,, 제 생각이지만 우수상 작품들도 대상 못지 않게 좋더군요.
왜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많이 읽혀지는지 알게 되었어요.


blanca 2011-01-31 22:24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저도 요 몇 년 간은 식상하다,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올해는 정말 좋은 작품 일색이더라구요. 역시 기성작가들의 힘일까요? 올해는 신인이 한 명 정도밖에 안 보였어요.

무해한모리군 2011-01-3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황순원문학상작품집을 읽고 있어요. 신선했습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공지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사실 그닥 선호하는 작가가 아니라서.. 하긴 제 또래가 공지영을 선호해요 한다면 그 친구가 다소 특이한 거겠지요 ^^;;) 사지말까 생각했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연휴때 한번 도전해봐야겠어요.

blanca 2011-01-31 22:2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황순원문학상작품집 재미있어요? 저는 지금 책 다 떨구고 휘모리님 추천하신 만화책 주문할 생각에^^ 신나 있어요. 공지영 작가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죠. 386세대라는 수식이 예전에는 젊음으로 통했는데 그렇게 되버렸네요.

프레이야 2011-01-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목이 아니라, 글목!
어감이 좋으네요. 예전엔 그저 그랬는데 갈수록 느낌이 좋은 작가에요.
지리산행복학교를 찜해놓고 있어요.

blanca 2011-01-31 22: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지리산행복학교 사인회 하러 나온 공작가를 교보에서 봤답니다. 저는 예전 상사가 '봉순이 언니' 읽어 보라고 해서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나오는 족족 신간을 챙겨 봤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새는 좀 심드렁했었어요.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줄을 많이 긋데 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1-01-3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한동안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증, 우리나라 문학계를 지배하는 듯 했어요.
이번 이상 문학상 작품집 좋은가 보네요. 방금 사이러스님 서재에서도 보고 왔는데.... ^^

블랑카님 이사 잘 했지만, 좀 외로운가 봐여? 곧 내 집처럼 될거예요~
분홍공주님 유치원 잘 알아보셨나요? 어제가 막바지 추위였대요.
즐거운 설 연휴 되세요.

blanca 2011-01-31 22:29   좋아요 0 | URL
그러셨어요? 전 집에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오늘도 지나쳐 오는데 불쑥 들어가 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오시는 분들도 인상도 좋고 그러셔서 행복하게 잘 사시겠지만. 저는 이상한 욕구가 예전에 살던 집들을 어떻게 바꿔서들 사시나 한 번씩 방문해 보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낀답니다. 신혼때 살던 집도 너무 궁금하고.ㅋㅋ 마고님도 잘 보내세요!!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3때 독서실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러 집에 다니러 갔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정말이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나를 달래려고 나를 끌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다. 쓸데없이 코끼리 분식점도 기웃거려 보고 88.89 버스 종점도 찍어 보고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도 곱씹다 보면 꼭 누구 아는 얼굴 한 사람을 만나 구태여 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섞으며 시간을 죽이다 사람 좋은 독서실 아저씨에게 목례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 혼곤한 식곤증에 허덕이다 한 시간도 제대로 책을 못 보고 신 나게 책가방을 싸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무지개 건너편의 허황한 꿈을 향해 나의 별을 쏘아 올렸지만 정작 그 과정의 고단함은 내가 두 발 붙인 우리 동네를 기웃거리며 허덕허덕 살아가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그 파닥거리는 일상을 구경하며 달래곤 했다. 그리고 무언가 아주 대단한 저 편에 살게 될 줄 알았던 삶은 이 편의 동네에서 이럭저럭 타박타박 걸어가는 일상으로 건너와 버렸다. 이제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고 그 와중에 건져 올리는 아기자기한 즐거움만으로도 어떤 순간은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한다. 견디는 것이 삶이라고 얘기하는 음성이 꼭 비애로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삶이 몇 년 째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이 며칠이지"하고 묻는 생활. 또 다른 십구일과 지금까지의 수많은 십구일들을 지나 오면서 그는 매번 십구일 이외의 다른 날만을 꿈꾼다. 오늘이 십구일이고 또 내일이 이십일이라면 그러한 날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십일 혹은 팔일인 줄 알면서도 이십일 혹은 팔일이 아니길 기대하며 눈을 뜨는 아침을 숱하게 지내온 그였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천시 원미구 23통의 원미지물포,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강남부동산, 형제 슈퍼의 그들. 번갈아 가며 때로는 주인공으로 관찰자로 주변 인물로 변주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연작소설집은 환상이나 희망, 기대를 과장하고 꾸역꾸역 들이미는 대신, 삶의 그 적나라한 모순, 추레한 우리들의 속물 근성을 아찔하게 보여준다. 들키니까 아찔하고 날카로운 추억을 끄집어 내니 아프고 별 수 없음을 불쑥 들이미니 아연하다.  

그는 지하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상으로 올라갈 날이 있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지하의 방 한 칸도, 지하의 일자리 하나도 목숨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망은 그저 일하기 위해 먹은 밥이었으므로 응당 자유롭게 배설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지하 생활자> 

자동차 바닥 커버를 재단하는 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공동주택 단 하나의 화장실은 주인집의 안온한 은신처에서 꽉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으니 그는 매일 싸는 일이 전쟁이었다. 이 지하 생활자는 변의를 느끼는 일에서 가장 삶의 비애를 절절히 체감했다. 이리저리 낑낑 거리며 쌀 곳을 찾아 헤매다 거리에 주차해 놓은 자가용, 봉고차의 뒤켠에서 죄인처럼 안도감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아렸다. 먹고 싸는 일차적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도덕과 예의, 염치를 논하는 작태는 때로 몰이해에서 나온 오만이 될 수 있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한계령> 

 

주말 저녁 <아프리카의 눈물> 다큐에서 기근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주하여 일하는 인접국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여긴 본토 노동자들이 그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죽이는 광경이 지나갔다. 그저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던 아버지가 불태워진 아들은 그럼에도 또 그 아버지가 죽은 나라로 일하러 갈 것을 얘기한다. 삶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싶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다 쓰러져 가는 움막 속에서 구식 다리미로 아들의 하얀 교복을 다린다. 그건 실오라기 같은,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별이다. 희망이다. 기만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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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17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자에서 이토록 전혜린이 진하게 느껴지다뇨.
전 다리미로 주름 한점 없이 다리는 것도 좋지만,
탈탈 털어 햇볕에 내어 말리는 것도 좋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1-01-17 22:0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빨래 탈탈 털어 정말 햇볕에 말리고 싶어요. 나무꾼님 댓글 읽으니 봄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네요. 요즘 너무 추워서 아파트에서 빨래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나온다면서요.

후애(厚愛) 2011-01-17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자님 작품은 한 번도 못 읽은 것 같아요.^^;;
<원미동 사람들> 읽고 싶네요.^^

활기차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blanca 2011-01-17 22:03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읽으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아스라한 옛 동네풍경이 정감있게 펼쳐진답니다.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그렇더라구요. 여기는 정말 너무 너무 추워요. 후애님도 즐겁고 활기찬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cyrus 2011-01-1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 때 <원미동 시인>을 감명깊게 읽으면서 배웠던게 생각나네요.
저는 <아프리카의 눈물>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 뉴스로서 접했는데,,
안타깝더라구요,,

blanca 2011-01-17 22:04   좋아요 0 | URL
원미동 시인! 저는 이걸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두 번째인 것 같은데 도무지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프리카의 눈물은 챙겨서 보고 무언가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 보려고 한다고 결심만 한 지 이 주가 되어가네요. 이삿짐을 풀면 꼭 행동으로 옮겨야 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마녀고양이 2011-01-1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 가장 기본적인 기쁨.
춥다고 우울함에 빠져있는 나에게,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블랑카님... 너무 추워요. 그져?

blanca 2011-01-17 22: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이번 주 토요일 이사. 후덜덜입니다. 짐 옮기는 아저씨들한테 미안하고 가족들도 심란하고 이래저래 참 그래요. 버릴 것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고 다독이고 있는데. 그래도 엄동설한의 이사는 무서버요--;;

잘잘라 2011-01-1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89버스 종점. 쌍다리 건너 그 종점이요?

blanca님, 당신은 누구신가요.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코끼리 분식과 88,89번 종점을 얘기하는, blanca님.

blanca 2011-01-17 22:07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쌍다리를 잘 모르겠지만 88,89종점과 코끼리 분식을 아신다면 혹시 같은 동네에서 자란 건 아닐까요?^^;; 긴장되는걸요^^;;;;;

비로그인 2011-01-1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쓰신글 알싸하네요.

알싸하다.. 사이다 한 병이랑 삶은 계란 손에 들고 기차 창문 너머 보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 안은 다들 왁자지껄, 지금의 삶과 저 너머 소리없이 흘러가는 풍경이 묘하게 같이 공존하던 그 기억말이죠..

비좁게만 느껴졌던, 길고 지리하게만 느껴졌던, 너무 많은 사람들로 매케한 냄새가 나던 그 기차안과 기차가 데려다 주는 길. 열차의 무거운 바퀴는 돌고 또 돌지만, 튼튼한 땅 위의 레일이 있어 길을 가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나는 그 땅 위에 다시 섰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덜컹거리는 발 밑 진동을 느끼며 말이지요..

blanca 2011-01-17 22:0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은 댓글도 시 같은걸요. 저는 기차 타는 걸 참 좋아했어요. 할머니집에 항상 타고 갔던 기차. 음악을 들으며 어둑어둑해지는 차창 뒤로 밀려나는 풍경 보며 눈물날 만큼 좋아했었는데. 그 기차를 이제 다시는 탈 수 없는 걸까요? 아니 바람결님 말씀처럼 또다른 기차를 타고 계속 꾸역꾸역 가고 있으니 지나간 풍경은 더듬더듬 추억 속에 묻어 버리고 말아야 하나 봐요.

프레이야 2011-01-1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희망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제겐 슬프게 들려요.
그게 정말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때, 아니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릴 필요가 없을 때가
희망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요.
고3 때의 회고담이 왠지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아, 제게도 고3의 잊지 못할 시간이었지요.
기만일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는 것밖에 달리 뭐가 있겠어요.^^

blanca 2011-01-17 22:1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며칠 전에 김훈이 인터뷰한 거 티비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제 희망과 사랑을 얘기하고 싶다던 그의 모습은 삶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견뎌야 한다고, 별 수 있냐고 반문하는 그의 모습 뒤로 밀려나더라구요. 그 만큼 살고 또 보통 사람들보다 몇 갑절은 더 느끼고 고민했을 사람이 삶은 견디는 거라고 얘기해 버리니 저도 낙망해 버리고 말았어요. 프레이야님 행 간의 의미가 미진하게나마 와닿습니다. 고3.....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찾게 된 모교 근처 육교에 서서 그 지나간 시간들을 눈물 흘리며 추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필 밤이었고 너무 일찍 찾아 버려 그런 것인지 사무치게 그립더라구요. 이제는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2011-01-17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1-18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희망이 기만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가~~~~~
혹한에 이사라뇨? 우째 이런 일이... 조심조심 이사도 잘 하시고 건강관리도 잘 하세요.

blanca 2011-01-19 21:4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래도 다행히 토요일에는 날이 좀 풀린다네요. 감사합니다. 몸살기도 있고 이래저래 지치지만 힘낼게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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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안 풀리는 수학문제의 해답지를 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스무 살에 뜰 무지개를 생각했다. 스무 살에는 도저히 서른 이후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서른까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죽어 버릴 거라던 친구와의 우정은 일 년을 넘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들으며 지금 찾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그 때까지 해답을 품고 있을 리가 없다고 조용히 뇌까렸다.  

서른 하고도 몇 년이 흐르고 이제는 내가 마흔도, 쉰도 심지어 여든도 될 수 있음을 수긍한다. 때로는 저만치 뛰어가버린 내가 지금의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기도 하다. 무지개를 타고 싶다고 얘기하며 미미인형을 안고 잠든 아이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이고 나중에는 한없이 그리워할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잠재태다. 이제 숨쉬고 바라보고 느끼고 때로 분노하는 순간들이 눈물겹게 소중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커피 머그잔을 텅 내려놓는 저 아가씨는 언젠가는 자기 팔에도 검버섯이 피고, 혈압약 때문에 오줌이 자주 마려워져 커피도 조절해서 마시게 되리란 걸, 인생에 갑자기 속도가 붙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어느덧 훌쩍 지나가버려 정말로 숨이 가빠진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p.225~226 

 

<중략> 불현듯 아이스크림 가게의 어린 소녀들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디를 건네는 여종업원의 지루한 눈빛 뒤에 엄청난 열망과, 엄청난 욕망과, 엄청난 낙심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 혼란이, 그리고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분노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오, 그들은 무엇이든 끝나기도 전에 책망하고, 책망하고, 또 책망하곤 또다시 지쳐버릴 것이다.
                                                                                                                                                                               -p.250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마을 크로스비를 배경으로 중학교에서 수학을 삼십이 년 가르친,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는, 또 아무도 감히 눈물 흘릴 거라고 상상할 수 없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역주민들의 삶을 열세 편의 짤막한 연작 형식의 이야기들로 그려내고 있다. 올리브의 남편으로 약사인 헨리 키터리지의 햇살 이른 아침 안온한 그만의 공간인 약국으로의 출근 장면의 아름다운 묘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춘기 외아들 크리스토퍼가 족부전문 의사가 되어 결혼과 이혼, 재혼하는 과정, 헨리의 뇌졸중 투병, 올리브의 황혼의 사랑으로까지 전개된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처럼 펼쳐지는 단편들은 지역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그들의 시점과 각각 올리브의 시점에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인간의 삶을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다루기 쉬운 소설적 허구의 맹점을 입체적이고 종적 횡적으로 섬세하게 터치하게 되는 구성적 장점은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하찮고 반복되는 일상들을 각개격파하는 필력과 조우하여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낳는다. 누구나 경험하는, 하지만 의식의 표면에 언어로 조립하여 감히 떠올릴 수 없는 것들을 마주칠 때는 정말이지 이 작가가 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의구심까지 생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p.403 

올리브 키터리지가 매력적인 것은 그녀가 사랑을 느끼게 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커다란 등이 보일 것을 걱정해 자신이 마치 고래 같다고 느끼거나, 되바라진 며느리가 얄미워 그녀의 속옷과 신발을 몰래 훔쳐내어 던킨도너츠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퉁박을 주는 헨리 앞에서 " 이렇게 지랄맞은 마누라라서 진짜 미안해!"라고 외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구린 인간(부시를 연상시킴)을 뽑았다,고 분노하며 "이젠 끝이야"라고 외쳐댔던 남자에게 '언젠가'는 다른 모든 심장처럼 멎을 심장을, 그 '언젠가'를 지워버리고 다시 느끼고 사랑을 갈구하는 이른넷 할머니의 모습, 지쳤지만 여전히 파도를 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나이들어가고 열정과 생의 의지, 활력을 조금씩 반납하며 존재를 갉아먹어가는 그 허망함에 대한 삶, 생의 작은 승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눈물난다.  

나는 이제 여든의 나를 생각한다.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초월한 척하며 느긋이 젊은 사람들에게 조언이랍시고 잔소리와 우는 손리를 던져 대고 "요즘 젊은 것들이란!"를 외쳐대며 은근히 그들의 젊음과 남은 시간들을 시샘하며 "나를 봐달라."고 애걸하는 대신  

조금은 주책맞아도 들이닥치는 파도를 반갑게 조금 머뭇거리는 척하며 맞아줄 테다.  

사람들은 노년의 시기는 고요와 평온의 시기라고 자주 말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오해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중략> 흥분을 하면 더 크게 흥분하고, 근심이 있으면 더 깊이 근심하게 된다. 상처는 더 아픈 것 같고, 고통은 더 강렬하며, 눈물은 더 쉽게 흐르고, 즐거움은 더욱더 절정에 이른다. -칼 로저스 <사람-중심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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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2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403쪽의 글은 부끄럽지만 저도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제 치과의사의 손은 따스하기까지 하더군요.
전혀 모르던 작가였는데 블랑카님 덕분에 알게되었네요. 남은 한해도 건강하시고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모습 새해에도 여전히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0-12-28 21:37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도 그런 경험이 있군요. 저도 있어요. 잊고 있었던 느낌이었는데 여기에서 만나네요. 반딧불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역사 쪽으로 뻗은 반딧불이님의 독서의 길이 새해에도 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다락방 2010-12-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만 보고 혹시 [일곱번째 파도]의 리뷰인가 싶어 들어와 봤는데 오, 올리브 키터리지 군요! 이 책 드디어 읽으셨군요! 별 다섯을 보고 제 마음이 다 흡족해요. 이 책 정말 좋지요? 포스트잇 붙인 곳을 저는 지금도 가끔 꺼내어 펼쳐보곤 해요. 며칠전에 깐따삐야님이 쓰신 리뷰에서도, 그리고 blanca님의 리뷰에서도,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인용하신 걸 보고, 역시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다르구나 하는걸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도 이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만나네요.

이 책 정말 좋았어요, 저도. 가끔 꺼내어봐도 후회 없는 책이에요. 아, 잠들기전에 이 리뷰를 읽어서 무척 좋아요!

blanca 2010-12-28 21:4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사실 이 책이 좋다는 말에 큰 기대 없이 읽었기에 더 화들짝 놀랐답니다. 정말 와우! 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구요. 퓰리처상을 주는 작품은 이유가 있구나, 싶었구요. 저는 참 이상하게요. 마지막에 올리브와 그의 늙은 남자친구가 아이를 때린 일과 성장한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을 나누는 대화 부분이 참 와닿더라구요.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이처럼 돌아보게 된 경험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들은 다 글을 잘 쓰나 봐요^^;; 저는 이제 다 정리하고 권해주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12-2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너무 괜찮다면서요?
나두 책장에 꽂혀있어서, 지금 때만 노리는 중인데...
아아, 거기다 칼 로저스의 <사람-중심 상담> 이야말로, 읽으려고 벼르고 벼르는 책인데
블랑카 님이 먼저 읽었군요. 아하하. 역시.

blanca 2010-12-28 21:4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있어요? 그럼 당장 읽으셔용!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진부한 추천을 드립니다. 칼 로저스는 아기 낳고 대화법 모임을 엄마들이랑 하다 읽게 되었어요. 전반부는 정말 눈물날 만큼 감동적이었는데 후반부는 졸리더라구요--;;

cyrus 2010-12-2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 눈길만 주고 있었는데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0-12-28 21:43   좋아요 0 | URL
cyrus님 꼭 읽어 보세요. 연말 독서용으로 제격이랍니다. 마음이 훈훈해지고 삶이라는 것에 조금 진지하고 조용한 되새김질을 할 수 있게 한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비로그인 2010-12-2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의 두 문단을 여러 번 반복해 읽느라 리뷰를 제대로 읽지 못했네요.
문체는 비록 다르더라도 문장 안에 전혜린도 있고 오정희도 있는 듯해서 계속 읽게 되는군요^^

blanca 2010-12-28 21:45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전혜린과 오정희는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들이라 움찔하네요. 설마요--;; 전혜린, 하면 저는 고등학교 때 빨간표지로 읽었었는데 독서로 깊어진 눈동자,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오정희는 <유년의 뜰> 단어 정리를 하기도 했었는데. 다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네요. 댓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2-28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홀~
이 책이 이런 책이었군요.^^

여러분들의 리뷰에서 봤는데,
다락방님의 말씀처럼 각자가 다른 것을 보고 읽어낼 수 있구나...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들이닥치는 파도를 조금 머뭇거리는 척 하며 맞아줄 수 있을까요?

blanca 2010-12-28 21:47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도 하도 좋다고 해서 몇 번이나 서점에서 보다가 살까 말까 망설이다 여기에서 주문해 버렸어요.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냥 선전만 요란한 책이 아닌가 했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양철나무꾼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요즘 제가 뭘 할 수 있나, 무엇을 원하나,에 대한 답이 안 나와 참 답답하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저는 회한의 파도를 맞을 것 같아요.....

like 2010-12-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지난 주말에 올리브 키터리지 끝냈어요. 좋은 책이지만 좀 더 나이들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제서야 빨강머리 앤의 마리라 아주머니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올리브 키터리지 부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blanca 2010-12-28 21:49   좋아요 0 | URL
like님 똑같은 책이라도 감상과 느낌이 다를 수 있지요. 지난 주말에 이 책 읽으셨던 거예요? 저랑 같이요^^;; 그런데 <빨간머리 앤> 얘기하시니 갑자기 막 읽고 싶어져서 어쩌요? 잊고 있었어요...저도 어릴 때는 마릴라가 괴팍하고 냉랭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최근에서야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외로운 사람인 줄 알게 되었어요.

깐따삐야 2010-12-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blanca님의 리뷰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되실 것 같아요.

blanca 2010-12-29 21:49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정말 완소였어요. 소설에 대한 열망이 다시 되돌아올 만큼. 눈물나더라구요. 깐따삐야님 리뷰 덕택이지요.

비로그인 2010-12-2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그냥..
책에 관해 쓰신 글을 읽는 느낌은 조금씩 읽어 내려가는 순간 얼른 뛰어가서 책이라도 사와야 할 듯한..
blanca님 멋져요~ ^^


blanca 2010-12-29 21:4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이 추운데 눈 맞으며 사 오세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꿈꾸는섬 2011-01-0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리뷰는 언제나 좋아요.^^
올리브 키터리지, 정말 좋지요.

blanca 2011-01-04 16:08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덕택입니다. 저엉말 좋았어요. 저 이 책 안 읽으려 했는데 님 리뷰 읽고 당장 주문했더랬어요^^
 
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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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섬뜩할 때가 있다. 내 자신이 때로는 타인이.
각자가 모르는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괴물이 서로의 외피를 뚫고 나와
미친듯이 으르렁대는 모습을 환시마냥 볼 때가 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지는 세상. 우리는 악몽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평온한 세상은 일상이고 한켠에 포복해 있는 그 승냥이들은 다시 동면에 들어간다. 

김영하는 우리 안의 괴물을 일으켜 깨운다. 은밀한 욕망, 시기, 질투, 분노, 살의.
이러한 무형의 것들이 젤리처럼 엉켜 있는 그곳을 억지로라도 응시하도록 그는 우리를 돌려 세운다. 

그러니 불편하고 언짢다. 두렵고 거북살스럽다. 

그러나 한번 그곳에 발을 들여 놓으면 어쩐지 쉽게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연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실제하는 실재. 그러나 쉽게 들여다 보지 못하는 그것들을
결국은 보고야 말때는 뒤돌아 보지마! 뒤돌아 보면 석상이 된다고! 하며 경고했음에도 결국은 뒤돌아 보고
그 형벌을 받고야 마는 금기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일탈욕구를 그가 살살 긁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들은 온갖 금기와 두려움과 호기심의 범벅이다. 문장의 미려함보다는 서사의 역동성과 급박한 전개가
영상 세대들의 빠른 안구회전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마력이다. 그의 소설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읽힐 수 있는 지점이다.
 

다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이사를 소재로 포장이사업체 직원들의 거칠고 무례한 언행들을 긴박한 스릴러물을 보는 듯할 정도로 극적 긴박감을 솜씨좋게 부려놓은 <이사>, 삼십 대의 잘나가는 투자전문가들의 먹튀행각을 이순신동상의 폭파 사건과 교차시켜 결국 제꾀에 스스로가 걸려들고 마는 공허한 대목을 형상화한 <보물선>, 수영장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녀, 그녀를 은근히 스토킹하는 수영 강사와 신문지상의 스토킹살해사건을 연결지어 생각해 온갖 망상을 부풀린 약간 맹한 '나'에 대한 이야기인 <너를 사랑하고도>, 변사체가 되어 돌아온 한 여자를 공유했던 세 남자의 저마다의 용의점들과 내면의 상상들을 괴괴하게 그린 <크리스마스 캐럴> 등. 단편 하나하나가 선뜩선뜩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라인으로 단숨에 읽혔고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그 온순하고 음흉한 괴물을 살살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그들은 진숙이 피살되었을 때, 모두 자기 손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칼질을 해댄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밤에 나는 정말로 아무 일 없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사실 그들의 꿈속에서 진숙은 여러 번 살해되었다. 그녀의 피는 끝이 없었다. 속죄는 가능하지 않았다. 짓지 않은 죄를 참회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중 

현대인들은 이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자기를 억지로 부둥켜 안고 숨기고 싶은 과거들과 영원히 포박해 버리고 싶은 은밀한 욕망들을 억지로 눌러가며 자기 안의 괴물을 근근히 사육해 가며 버티고 있다. 죄는 짓지 않는다. 여간한 경우가 아닌한. 꿈속에서 무의식의 세계에서 저지르는 범죄로 참회까지 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미약한 자기 확신으로 버티며. 

하지만 그들의 추악한 과거의 메타포 같은 진숙이 그들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흘러나온 캐롤처럼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우리는 여기게 이르러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욕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심판하는 나.  그 아득한 간극의 중심에서 김영하는 앞으로 더 밀고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파헤치고 깨닫고 절망하고. 그 다음. 그래서 그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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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09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하나도 안 읽어서 몰라요.ㅜㅜ
지역도서관에 최규석 신간 신청하시고, 이벤트에 댓글 남겨주세요.
도서관에 안 가고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되는 건 알죠?^^

blanca 2010-08-09 21:5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안그래도 저도 참여하려고 했었는데요, 아리랑 정보 도서관에 이미 비치되어 있다는 마노아님의 댓글을 읽고^^;; 저랑 마노아님이랑 근처에 있나 봐요.

순오기 2010-08-15 02:17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이랑 같은 도서관이군요.^^

비로그인 2010-08-08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점심, 저녁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 톱니처럼 꽉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안그래도 늘 꽁꽁 숨겨 놓아 저기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를 꺼내 얘기할 시간도 너무 없고요. 남에게 떠밀림,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있을 추함, 수면 아래에서 늘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 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네요.

문학의 가지는 기능 가운데에는 그런것을 꺼내 함께 들여다 보게 하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blanca 2010-08-09 22:0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나이들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더 열심히 읽게 되요^^ 나이값이란 억압과도 비례하는 면이 있어서. 갑자기 이런 댓글 달라니 제 나이가 넘 많게 느껴지네요..어제가 스무 살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ㅋㅋ

후애(厚愛) 2010-08-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꼭! 뵈어요~
더위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blanca 2010-08-09 22:00   좋아요 0 | URL
후애님....1년을 기다려야 하나요? 흑흑. 이래저래 시간이 더 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알라딘 서재에서 항상 함께 해요!

stillyours 2010-08-0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동안 <검은 꽃>을 읽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다시 읽었어요.
그래서인지 블랑카님 리뷰가 확확 더 가깝게 다가오네요.
실제하는 실재.에서 고개를 또 끄덕입니다.

blanca 2010-08-09 22:02   좋아요 0 | URL
moon님 그러셨어요? 우아. 그러셨구나. 신기해요. 저도 지금 한창 김영하를 파고 있는데^^;; 단편집이 더 좋더라구요. 저는 김영하를 <여행자 도쿄>로 첨 만나고 그 담에 아마 <검은 꽃>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의 장편이 기대를 너무 해서 그런지 조금 못 미친다는 느낌이 들었었거든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또 어떤지 넘 궁금해져요.

굿바이 2010-08-0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저리 피했는데, 골목길에서 만난 느낌이예요. 김영하를 아무래도 집으로 모셔와야 할 것 같아요. 궁금해서 도저히 못참겠어요. 블랑카님 글을 읽고나니, 돌아온다는 오빠를 더는 막을 길이 없네요. ㅠ.ㅠ

blanca 2010-08-09 22:02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저도 사람들이 하도 김영하, 김영하해서 과대평가됐다고 속단했었는데 이제 차근차근 알아가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빠부터 맞아들이시는 것이 괜찮을 듯 합니다.^^

아시마 2010-08-0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괜찮지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고 예전에 제가 썼던 리뷰를 찾아서 다시 읽어 봤는데요, 이거 같은 책 읽은건가 싶어요. 이런게 리뷰쓰는 재미.
아마, 저는 김영하의 초기 작품부터 순서대로 따라가서, 작가의 성장(글이 나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쪽으로 초점을 두고 책을 읽었는데, 블랑카님은 아마도, 작품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연대기적 글 읽기는 때로 방해물이 되는듯요.

그래도 확실히 이 책을 기점으로 김영하는 많이 바뀌어요. 나중에 소설집 <호출>한번 읽어보세요.

ps. 이 리뷰 읽으면서 새삼, 난 블랑카님 되게 좋드라~ ㅎㅎㅎ

blanca 2010-08-09 22:05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ㅋㅋㅋ 저는 솔직히 말이에요. 김영하는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혼자 평가 내리고(아무도 내 평가를 궁금해하지는 않겠지만) 검은꽃 이후로 안읽으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단편을 읽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아시마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아시마님의 연대기적 글읽기는 저의 얕은 독서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다음에는 <엘리베이터에 끼인 그 남자> 읽으려고 했는데 <호출>로 급선회하겠습니다. 아시마님의 고견을 듣구요.

꿈꾸는섬 2010-08-10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한 블랑카님, 김영하 다시 읽기 하고 계시군요.
저도 이번 읽고 있는 책 읽고 김영하 책부터 읽으려구요.^^

blanca 2010-08-10 16:45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저는 벌써 작가 만날 맘의 준비 하고 있어요 ㅋㅋㅋ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셈이에요. 꿈꾸는 섬님또 함께 준비하시는 건가요?^^

마녀고양이 2010-08-1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하이. 역시나 좋은 리뷰네요.
그런데, 역시나 모르는 책이네요. ㅋㄷㅋㄷ

blanca 2010-08-10 21:4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무사귀환 완전 축하해요. 폭우 쏟아져서 걱정했었어요.^^;;

비로그인 2010-08-1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안겨주었던 책인데, 읽으셨군요. 저는 김영하의 소설은 어지간해서는 권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읽게 됩니다. 그 무서운 경험을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건가, 싶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것 처럼 그것을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읽게 되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전부를 그렇게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일은 결국 서로의 일부를 자기 손 안에 넣거나, 넣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이 일어나는 사건들이에요. 작가가 되거나 피사체가 되거나,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거대한 차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광복절 사면도, 당장 당면한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도, 따지고 보면 그 차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늙은이 같이 느껴져서, 또 슬퍼집니다.

blanca 2010-08-13 14:55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는 주홍글씨가 김영하 원작이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누군가는 이 작가가 지나치게 개인적 어두움에 집착한다고 비난하긴 하더라구요. 쥬드님 말씀이 맞아요. 특히나 사람 사이에서 그런 권력욕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니까요. 저도 요즘 많이 늙고 있어요. 어감이 이상하지만. 진짜 느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열세 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일관되게 뚫고 지나가는 섬뜩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뱉어 낸 대목에서
멈칫했다. 

노골적이고도 머뭇거리지 않는 그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한 십 초 정지했나 보다.
허리에 실린 <조>라는 이야기의
첫문장이다. 

김연수와 김영하를 무심코 비교하게 된 적이 있다. 두 작가는 동성임에도 성적으로 대척점에 배열되는 것 같다.
김연수는 여성적 섬세함과 뭉클함의 외피를 입었다면 김영하에게는 근원적인 남성성에 대한 희구가 있다.
김연수가 잃어버린 낭만과 서정에 대한 향수에 천착한다면 김영하는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응시한다.
두 작가 아직 완전한 지향에 도달하지 못한 설익은 지점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지점을 돌파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또 점점 그것을 향해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독자로서 분명 즐거운 일이다. 

김연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갈망했던 소통의 화두는 김영하 앞에서 친밀감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변주된다.
그런데 김연수가 그 소통에 희망적이었다면, 김영하는 조금 회의적이고 멈칫하는 것 같다.
<소통>에서 여자 앞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읊어대던 남자가 막상 관계의 진전 앞에서 도망가는 모습이나
<밀회>에서 죽음으로 그 여자를 떠나고 마는 남자의 슬픈 독백, <조>에서는 한층 더해 관계의 형성 자체가 유실되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김영하의 시선은 이제 물질적으로 소외되어 카드회사의 소유가 된 그녀들에게로 향한다.  

황사는 평등했다. 황사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었다. 실로 공평한 재난이었다. 먼지는 일억원이 넘는 고급 승용차의 보닛 위에도, 오십만원짜리 스쿠터 위에도 모두 내려앉았다.<중략>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데에는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경 같은 이에겐 이것만이 사막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봇> 중 

타락한 경찰이 좀도둑들을 얼러 전리품들을 챙기는 <조>에 이러한 그녀들의 거대한 은유가 백화점 판매직으로 나온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그녀들의 신산한 삶과 타락과의 타협을 그의 시선으로 들여다 본 이 작품은 냉소적이면서도 서글프다. 허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대의 보고서 같아 영 불편하고 선뜩하다. 연봉, 남자친구의 차, 들고 다니는 가방들은 이제 그녀들의 장식품이라기 보다는 그녀들 자체로 녹아내리고 있다. 허영이나 자기기만에서 나온 물질에의 집착이 아니라 극도의 궁핍과 소외에서 초래된 자연발생적 투항은 더 비극적이다. 김영하는 그런 모습들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그려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타락은 역설적으로 이유없는 타락인 것처럼 가장되고 있지만 우리는 알아차리게 된다. 타락이 처절한 생에의 투항임을. 

우울한 얘기들, 그러나 실재를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얘기들 속에 김영하 특유의 유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코토>와 <아이스크림>은 낯이 익다. 발표되었었던 작품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읽어도 일본인 유학생에 들이대다 굴욕을 맛보는 씩씩하고 밉지 않은 그녀의 고백과 우연히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아 제과점에 제보한 젊은 부부와 소비자 상담실에서 나온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과의 에피소드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재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성찰을 건져 올리려 오버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이 쿨하다. 김영하는 내도록 쿨한 것 같다. 

가족이 강도에 의해 몰살당하고 유산을 물려 받아 홀로 커다란 아파트에서 아줌마를 부리며 사는 소시적 동네 친구와 퀴즈쇼에서 조우하게 되는 <퀴즈쇼>는 결론이 약간 허무했다. 사실 이런 결론 자체가 타인과의 소통이나 친밀감에 대한 회의적인 작가의 생각과 맞불리는 지점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어쩐지 영 불편한다. 우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는 허망한 기대를 슬쩍 남겨 놓는 것에 더 매료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말미에 실린 <약속>에서처럼 마시는 커피이름으로 대유된다면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가 되고 그나 그녀는 <아메리카노>가 되겠지만 결국 그 둘은 한 탁자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마침내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하나의 희망과 공감, 기대가 떠받치는 삶의 매혹이 있기 때문이다.  착각하고 사는 것도 때로는 괜찮다. 가끔은 이런 참혹한 진실을 대면하게 해 줄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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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7-23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책을 다 읽어보려고 차곡차곡 쌓아만 놓고 아직 제대로 읽어보질 못했어요. 신작도 꽤 괜찮군요. 이 글 읽고나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2010-07-2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07-2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너, 는 스치지만 함께 할 수는 없다,"
아 이 구절, 슬로우 모션의 한 영상과 함께 아련히 흐르네요.

blanca 2010-07-24 21:2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그런 것을 깨달아 가고 수긍해 가는 게 나이들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요즘 들어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stella.K 2010-07-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를 아직 읽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김영하와 비교하시는 브랑카님의 안목이 대단하군요.
퀴즈쇼 나름 재밌게 읽긴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닌지라
이 책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기회되면 한번...!^^

blanca 2010-07-24 21:2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저도 퀴즈쇼는 취향이 좀 안맞더라구요. 제대로 다 읽어 보진 못했고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 드문드문 읽었어요. 뮤지컬로도 아마 만들어진 것 같던데...기회되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분량도 적으니 시간도 많이 안잡아 먹을 것 같아요. 김영하라는 작가가 조금 과대평가되어 있지 않나 싶었는데 이 책 읽고 앞으로 발전할 역량이 많은 작가라 여겨졌어요.

stillyours 2010-07-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
미리 읽는 리뷰도, 너무 좋아요 블랑카 님.
특히,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죠.
헉- 하게 만들었던 이 문장을 나는 그의 목소리로 먼저 들었어요.
http://me2day.net/kimyoungha
17일자 북테일러, 혹시 아직 못 보셨다면!
MOT의 이언 작품인데,
멋지답니다.
목소리도 세련된 그,
어떠한 감동도 없는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blanca 2010-07-24 21:27   좋아요 0 | URL
moon님...댓글 달고 꼭 들어볼게요. 문동까페에 제목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긴 했는데 들어보지 않았거든요. 다 읽고 moon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아시마 2010-07-2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지만요, 전 예전에 김영하와 이만교를 비교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얼마전부터 김연수랑 같은 선에 놔두고 요모조모 생각중이었죠.
그래서 이번엔, 제가 깜짝 놀랄 차례예요.
저 역시,
블랑카님과 제가 비슷한 것들을 느낄때가 많은 것 같아서 놀라워요.
이 책을 배송받으려면 적어도 2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다른 물건들이 줄을 서 있어요. ㅠ.ㅠ)
이 책이 오면, 읽고, 반드시 이 글에 먼댓글로 리뷰를 쓰겠사와요.

ps. 마코토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도쿄편에 실려있는 소설이구요, 아이스크림은 30회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예요. 그해 대상은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 였구요. 아마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읽으시면서 읽으셨을 거예요. 은희경이 <아이스크림>에 대해 평하기를 "새삼 작가의 서사감각과 솜씨를 느끼게 해 준다. 미련없이 끊어내 버리는 산뜻함이 이작가의 매력인데 이 작품 역시 강약 조절과 취사 선택이 매우 노련하다. 사소한 에피소드를 한편의 소설로 빚어내는 역량에서 또 한번 문학적 재능을 엿보게 된다"고 찬탄했죠. 은희경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김영하에 대한 저러한 평가에는 100%의 싱크로율로 동의하는지라, 기억하고 있어요. ^^

blanca 2010-07-24 21:29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속이 다 시원합니다. 맞아요. 분명 어디선과 분명 읽었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그런데 아시마님 기억력 완전 놀랐습니다. 저도 그런 기억력을 좀 지녔으면 좋겠어요. 두 달. 아시마님의 감상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연수와 김영하. 저는 이 두 작가가 참 부러워요...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인지도에 나이들어가며 어떻게 바뀔 지도 참 기대되구요.

아시마 2010-07-25 02:34   좋아요 0 | URL
전 김연수 보다는 김영하 쪽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줘요. 김영하와 김연수를 보면, 김영하는 얄미울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느낌이고(사실 김영하 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바로 이 "타고난 소설적 재능"에 관해 말을 하고 있기도 하구요.) 김연수는 재능도 물론 있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일구는 작가같거든요. 결국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이기는 게 세상 이치라고는 하는데... 음, 예술은 그런 이치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지 않나요? ㅎㅎ

김영하는 아직은 단편쪽이 나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장편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장편도 좋은데 둘 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단편쪽이라는 거죠. 반면에 김훈 선생은 단편보다는 장편에 강하신 것 같고요. 김연수는 장편과 단편이 고루고루 평이한데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장편쪽이요.

전 김연수를 보면 아직은 뭔가가 좀 아슬아슬하거든요. 뭐랄까 재미와 지루함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지루하진 않지만 재미있지도 않은 그런 경지라는 게 아니구요, 되게 재미있기는 한데, 한발만 삐긋하면 지루함으로 풍덩~ 해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요.
근데 또 김영하를 보고있으면, 이 친구가 재능을 낭비해 버릴까봐 두렵기도 해요. 김연수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함을 느끼는 거죠.

결국 , 제게는 둘다 비등비등하지만 그래도 김영하쪽이 포인트가 좀 더 높은데요,
블랑카님은 김연수 쪽이 좀 더 포인트가 높죠? ㅎㅎㅎ 왠지 그럴 것 같아요.

ps. 두 작가의 인지도가 꼭 비슷하진 않아요. 초판 발행 부수가 완전 다르다는... ^^

blanca 2010-07-25 16:31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저는 사실 김영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장편은 검은꽃 한 편 읽어 봤어요. 그러니 90프로 정도 읽은 김연수를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타고난 소설적 재능...김연수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타고난 작가가 아니라고 단정짓더라구요. 김영하가 그런 행운아로군요. 초판 발행 부수. 저는 김연수가 4만부가 젤 많이 팔린 거라고 해서 참 놀랐어요--;;

아시마님에게 많이 배워요.. 참, 그런데 빛의 제국은 어때요? 궁금해서요. 추천해 주시면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