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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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기대치를 항상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오고 들을 이야기는 넘쳐서 그랫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그 흡인력, 뭉클함 같은 것이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다 오다 단편 한 두편 정도로 알아 왔던 김애란의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를 펴든 순간 우리 나라 소설계는 여전히 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여타 우수상 수상작들도 꼭 상을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단편만이 가질 수 있는 농축의 미가 돋보였다. 재미있었고 허무하지 않아 좋았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루어진 영이다. 나는 거대한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낱낱의 입자로도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중략>-p.13~14

 

소설 같지 않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자기 정의. 이건 흡사 철학책의 한 장을 할애한 것 같다. 여기에서 화자는 사라져 가는 '말'의 정령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으로  사라져 가는 언어를 구사하는 소수의 화자들이 보존되는 곳. <소수언어박물관>의 정경. 여기에 김애란이 자주 그렸던 활달하고 젊은 88만원 세대의 구체적인 실체는 없다. 이제 김애란은 자신이 어루만지고 구사했던 언어의 본질적 모습에 가 닿는다. 그것은 '말'을 사용하여 인간의 삶을 다루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언어는 삶의 한계이자 철책이면서 해방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도 아니고 우리의 삶도 아니다. 그저 우리의 오해와 바람과 눈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삶은 언어로 축소된다. 언어로 이야기되는 것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고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p.30

 

진지한 이야기가 꼭 지루함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딛고 서는 이 발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의 경계는 확장된다. 이제 김애란에게 서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더이상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된 것 같다.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듣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화자가 되어 답답함을 풀어준다. 그녀는 분명 아주 잘 크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부모님의 소개팅이 이루어졌던 시골의 잡화점 같은 '송방'에서의 이야기는 부록 이상이다. 거기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화투놀이의 일종인 '뽕을 쳤다'고 한다. 소개팅에서 가게 점방 같은 곳에서 놀이를 하고 바로 벌칙으로 엿과 삶은 달걀을 사고 사랑에 빠진 그녀의 부모님의 이야기는 당돌한 이야기꾼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녀의 익살도 재기도 시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러한 부모님의 익살과 재기를 잘 담아내어 조금씩 더 무거워지려 한다. 그녀의 수상소감처럼 그녀의 무게가 길 위에 '방향'을 만들 것이다. 독자들은 그녀가 만든 지도의 발자국에 살짝 자신의 발을 넣어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꿈을 꾼다.

 

 

편혜영 <밤의 마침>

 

오퍼상에서 비밀 사서함을 관리하다 자신의 내밀한 과거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는 중년의 사내. 누구나 실수는 하고 누구나 환한 대낮에 크게 얘기할 수 없는 은밀한 공모를 간직하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몹시 떨리는 이야기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에게 용서를 받을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여자아이'를 추행한 일은 무고로 결론지어지고 그의 아내는 그의 결백함을 깔끔하게 수용해 주지는 않는다. 아내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귀가 하나 빠진 퍼즐로 독자를 유인한다. 바로 속으면 안 된다. 절대.

 

 

그는 자신이 선량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명확한 신념과 원칙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일로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란 신념이 흔들릴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인데, 자신에게는 애당초 흔들릴 신념조차 없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에게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만이 있다. 그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순간적인 위기에 대처 능력이 뛰어나나 그게 가진 능력의 전부이다. 그가 자부하던 건전한 양심과 신념, 사회적 위상과 도덕에의 의지, 원칙이나 선의 같은 것들은 그간 주머니에 비축된 먼지의 양보다 적다. 그는 그저 상황과 위기에 걸맞게 신념과 가치라는 걸 조작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을 착각했고 과신했다.

-p.198

 

이러한 '그'에 대한 설명은 '그'가 누구일 지라도 얼마간은 아니 상당 부분이 맞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불확실하고 가변적이고 모호하고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도 보일 수 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어떠한 상황에서 예외의 모습을 보였을 때 그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대쪽같은 신념과 일관성은 생동하는 삶과 합치되기 어려운 과제다. 물론 지향이 될 수는 있겠지만. 편혜영이라는 작가는 그러한 지점을 비범하게 포착했다. 흘러내리는 단발머리 속에서 예쁘게 미소짓는 그녀의 흑백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

 

손홍규의 <배우가 된 노인>도 김이설의 <흉몽>도 우리의 삶의 이면, 그 비의에 대한 적나라한 고찰이다. <배우가 된 노인>이 딸을 위하여 연기하는 삶도 모텔을 청소하며 남편의 범죄를 방조하는 그녀의 그 비루한 일상도 결국 생존에 끄달리게 되었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그 나락에서의 모습에 대한 성실한 고찰이다.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닿으면 그 골목은 갑자기 그 빈곤한 언어들 앞에서 겸손하게 문을 만든다. 책도 그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사는 삶도 언제까지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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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상 받는 사람은 항상 우수상만 받는군요... 편혜영, 손홍규, 윤성희 등이요.
언젠가 그네들도 이상문학상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더라면 좋겠어요.
김애란의 수상에 영 내키지 않았는데, 블랑카님께서 인용해주신 부분과 글을 읽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요.

blanca 2013-01-26 15:4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사실 김애란 취향은 아닙니다. 몇 몇 단편이 소재나 주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장편은 못 읽어 봤어요.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 작가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어요. 안주하는 작가가 아니라요.

꿈꾸는섬 2013-01-3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애란 팬인데...아직 이상문학상수상집은 못 읽어봤네요.
요새 워낙 책이랑 멀리 지내서, 가깝게 지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blanca 2013-01-30 09:4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그러다가 또 책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세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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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강력한 독신주의자였다. 삶을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었는데 아이들은 아주 좋아했다. 현모양처와는 대체로 멀었고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서툴렀다. 서른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고 씩씩하게 혼자 늙어가는 모습을 그려본 적은 있다. 결론은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결혼했고 적잖은 기다림 끝에 아이를 얻었고 살면 살수록 겁나는 대상들의 목록이 늘어간다. 그리고 이젠 팔십이 된 나도 상상할 수 있다. 죽는 게 무섭고 때로 진저리 나기도 하지만 가을에는 특히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좋다. 살면 살수록 삶에 더 연연하게 되는 것 같다. 죽음과는 더 불화하게 되는 것 같다. 계획과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은 혼자서 흘러간다. 그리고 그러면 그런대로 또 그 풍경은 싫지 않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게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영화를 봤던가? 나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로라 브라운이 어린 아들을 놓아두고 어느 날 탈출을 감행했던 장면을 분명히 기억한다. 분명 세 명의 여자들의 시공간이 펼쳐졌을 터인데 나에게는 중산층의 전업주부 로라가 아들을 떠났던 그 장면만 남아있다. 왜 그랬을까?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연년생의 동생이 태어나고 할머니집에 잠시 맡져졌다 돌아와서는 엄마가 나를 떠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었다. 꿈에서 엄마는 매일 나의 동생을 업고 나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그래서 로라가 결국 아들 곁으로 돌아왔음에도 나는 '떠났다'고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 당시에 세상 그 자체였다. 그 세상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고문이었다. 그래서 로라 브라운이 둘째를 품고 모텔에서 단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 아들 곁으로 돌아왔을 때 놀랍기도 하고 안도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모성애는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작동되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것을 알고 있고 직시한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공유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어느 날 외투에 돌을 가득 집어 넣고 호수로 걸어 들어가던 그 날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20세기 말 뉴욕의 동성애자 예술가에서 사이에서 비교적 성공한 축에 속하는 여인 클래리사는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동료이자 한 때 사랑했던 리차드(그는 클래리사를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부른다)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시간은 1949년 로라 브라운 여사와 1923년 런던 교외의 호가스 하우스에서 신경 발작을 일으키는 버지니아 울프를 끊임없이 왕복한다. 세 여인은 동성애적 성향과 페미니즘적 가치관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인습의 힘은 중력의 힘보다 강하다'는 절망감을 공유한 채. 일상에 때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 마이클 커닝햄은 이 지점을 포박한다. 그 불가사의한 삶에 대한 애착. 버지니아 울프가 결국 호수로 걸어들어가 모든 지각을 멈춘 것도 로라 브라운이 끝내 자살을 포기하고 자식들보다 더 오래 살아 온순한 노부인이 된 것도 그 엄마가 자신을 떠날 것을 예감하고 붙잡는 그 한 마디 "사랑해"를 외쳤지만 끝내 자신은 병마에 서서히 먹혀 들어가는 종말에 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던 리차드도 (로라 부인의 아들이었다) 결국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과 타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마이클 커닝햄의 통찰은 놀랍다. 그리고 그 통찰은 미려한 문장으로 술술 풀려 나온다.

 

몇몇 사람은 창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물에 빠지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어떤 질병에 먹히거나, 아니면 아주 행운아라면 세월에 먹힌다. 위로 삼을 것이라곤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아주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왔던 모든것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아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런 시간 뒤에는 불가피하게 그보다 더 훨씬 암울하고 어려운 다른 시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은 도시를, 그리고 아침을 마음에 품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희망한다.

-p.306

 

 

성장은 희망을 키우고 세월은 희망을 포기하도록 학습시킨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우리는 희망과 작별하지 못한다. 그것은 고문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여인을 읽고 삶을 읽게 하는 책. 마이클 커밍햄이 첫키스보다 강렬했다고 추억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이렇게 그에게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돌아왔다. 그것을 듣는 일은 근사하고도 저릿한 일이었다. 로라 브라운은 '아이는 엄마를 영원히 지켜볼 것이다'라는 작품 속 예언처럼 아들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왔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떠나려고 했던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단죄를 받았다. 저마다의 희망은 고정된 인습의 틀 바깥으로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조종된다. 그 너머로 넘어가는 일은. 삶을 넘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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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12-09-2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테레즈 데케루>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살자,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시체처럼 살자. 저 너머를 보려고 애쓰지 말자.
테레즈가 자살을 결심했던 순간 고모가 죽고 테레즈가 고모의 죽음 앞에서 마음 속으로 말하는 부분. blanca 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문득 떠올랐어요.
저는 그런 생각 들어요. 천상을 아울렀다 바닥을 쳤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라도 그냥 살아야 하는 게 삶 같아요. 쉬워지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서른을 넘겼고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blanca 2012-09-21 10:52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테레즈 데케루> 읽고 계시군요! 저도 예전에 전혜린 책에 언급되어 있어 꼭 읽어야지, 해서 작년인가 읽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 그런 대목이 있었군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렇게 얘기해 주시니 다시금 새롭게 받아들여집니다. 죽기 전에는 삶이라는 것을 다소 이해할 수 있을지 살면 살수록 의문 투성이입니다.

북극곰 2012-09-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
다 읽고나서 블라카님 글 볼게요. ^^
왠지 잘 안들어와서 두 번은 읽어얄 것 같아요.

blanca 2012-09-21 10:52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도 중반부터 잘 안 넘어가서 그만 읽을까도 생각했었답니다. 참고 읽다 보니 마지막에 와서야 참 좋은 작품이구나, 싶었어요.

댈러웨이 2012-09-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어떻게 이렇게 잘 각색할 수 있었는지 창작자의 창작행위가 그저 놀라울 뿐이에요. 저는 영화만 봤어요. 책은 지금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다음 주문까지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감독도 그렇고, 세 명의 주연 배우들도 그렇고, 에드 헤리스, 토니 콜렛... 셉티머스의 리차드화도 그렇고 아무튼 마이클 버닝햄이라는 작가의 이 책을 제가 아직까지 안 읽었다는 게 유감스러울 정도에요.

아, 저는 독신주의자도 아니었는데 친구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더니 결국엔, ㅎㅎㅎ 제가 제일 먼저 결혼했어요, 블랑카님처럼. 저는 모성애가 아이 낳으면 당연히 생기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blanca 2012-09-21 10:54   좋아요 0 | URL
영화를 저도 봤던 것 같아요. 로라 장면만 남아 있지만요. 모성애에 관해서라면 --;; 저는 아이 낳기 전에 모성애로 충만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아이를 낳고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도 공부 중이고 노력 중이지만요. 저는 하도 결혼 안 할거라고 얘기하고 다녀서 무안했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2-09-2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이 책을 읽어보진 못했는데 표지가 아주 산뜻하고 마음에 들어 보관함으로 보셔갑니다.
영화도 있군요. 찾아봐야겠어요.
가을에는 이렇게 살아있는 게 좋다, 이 구절에 동감해요. 가을은 그런 계절인 것 같아요.
이렇게나 눈부시게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는 대개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근데 님은 팔십을 상상하실 수 있어요? 전 못해요.ㅎㅎ 지금의 저도 십년 전에 상상할 수 없었지요.
근사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어요, 우리^^ 블랑카님의 참 좋은 리뷰 고마워요.^^ 마음이 더 좋아져요.

blanca 2012-09-21 10:5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그죠! 가을이 너무 좋아요. 너무 찰나이고 너무 예뻐서 이런 계절에 살아 있는 게 좋아요. 저는 이런 상상도 해요. 죽기 전. 정말 다 너무 허무하고 모든 게 꿈 같을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성숙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싶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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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나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사고 싶은 책 두어 권을 고르면 아쉽고도 또 아쉬운 발걸음으로 근처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만나 주전부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던 기억. 재개장을 하고 얼굴을 바꾼 교보문고에 가도 과거의 그 시간들은 켜켜이 쌓여 발부리에 채인다.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하고도 소중한 느낌들. 오늘 교보문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이 많았다. 정말 너무 너무 많아서 숨이 턱턱 막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필 이 더운 오늘 날을 잡고 교보문고를 다 점령한 듯 했다. 재개장 속에서 건재하여 어떤 사람은 의아해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반가워하기도 한 그 식당에 들어오던 넥타이 부대 중 한 명이 "정말 처음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라는 말에 무조건 동조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정작 책은 한 권도 보지 못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의 지구본들만 보다 지쳐 돌아오고 말았다.

 

거기는 거기 평생 갇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은 곳이었다.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 p.180

 

 

거기가 바로 여기다. 나도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때는 그런 곳을 죽을 때까지 점령하지 못할 것만 같은 그 목마름과 애타는 마음 때문에. 오늘은 정말 너무 덥고 (물론 안은 시원했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 그 수많은 사람들은 교보문고로 향한 것이었을 것이기에) 갑자기 우리 나라의 독서 인구가 급증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편안하고 조용히 책 한 권 볼 여유도 자락도 없는 그 분주함과 그 빽빽한 밀도 때문에.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곳에 끌린다. 김연수의 이 책은 이런 "나도 그랬어! 나도 그래! 맞아!"가 빗발치는 곳들이다. 그의 이 에세이를 읽고 나도 미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일산 호수공원에 이사가고 싶어지고 이 지글지글 뼈와 살이 익을 것같은 무더위 속에서 러너가 되고 싶어지고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당장 주문하고 싶어지고 등등. 수많은 충동과 변화를 종용하는 책. 그러니 무더위 속에서 이러한 책을 읽고 마음이 달뜨는 것이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하는 책.

 

사실 이 책은 달리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이야기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다. 하루키의 소설을 완독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 두 작가의 작법이나 작풍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지적해낼 수는 없지만 매일 매일 꾸준히 달리며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쓰는 그 자세와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 같은 것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둘은 몹시 성실하다. 그리고 그 성실한 자세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상당히 강력한 것이어서 읽는 이에까지 전염시킨다. 왠지 나도 몹시 성실해야 할 것 같고 그러는 것이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 적절할 것 같아서.  달리는 일을 인생의 메타포로 치환하는 것은 김연수도 하루키도 동의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달콤하기만 한 것도 고통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다. 싫은 것도 아니다. 그러한 덤덤하면서도 일견 따뜻하기도 하고 쿨한 시선이 참 좋다. 위안이 된다. 조언이 된다. 지침이 된다. 겁쟁이이자 걱정 투성이인 나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경험에 집중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 p.24

 

나에겐 상당히 유효한 전언이다. 미래의 일들도 그렇고 과거의 추억도 그렇고 고통거리는 산적해 있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삶은 고해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경험으로 자리매김하고 그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할 때 갖게 되는 의미는 우연으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구조적으로 통합하여 안정감을 준다. 할 만한 것이었고 해 볼만한 일들이다. 조금 힘들어도 괜찮다. 이것도 경험이다. 그 때 그 터널을 통과하여 여기에 이른 것의 도정에는 성장이 있었다. 반드시 이기지 않았어도 나의 키는 이 만큼 자랐다. 괜찮다. 비교적.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p.42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이제 자신있게 "나는 여리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고 되도록 마음의 생채기가 다 꾸덕꾸덕 굳어 굉장히 굳건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인 체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그 나약함이 인생 앞에서 패배자임을 인정하게 하는 근거로 폄하되지 않기를 바랐다. 강한 자가 되어 흔들리지 않고 전진만 하는 이들에 대한 환상이 환상으로서만 그치기를 결국 다 살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아니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삶을 더 많이 느끼고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유리했던 하나의 큰 장점이었음을 김연수의 고백으로 더 빨리 깨닫는 셈이 된 것임을. 그러고 보면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 투성이다.

 

교보문고로 가는 길 지하도에는 유행에 뒤떨어진, 그리고 당장 시급하게 쓰일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의 좌판이 한창이었다. 삼십년만 전이었어도 나는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를 졸랐을 지 모른다. 왜 갑자기 그 좌판을 보고 '할머니와 나'의 추억이 돌아왔는 지 알 수는 없다. 문득문득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추억들. 인생은 꼭 뒤돌아 봐야만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지. 그건 그 순간에 충분히 몰두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그렇다면 그 추억은 흘려 보내고 지금은 내 옆의 딸아이의 손을 잡을 일이다. 삼십 년이 지나고 나는 또 지금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에. 왠지 모를 아련함과 서글프고 한없이 아쉬운 느낌으로.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유죄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히 몰두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같은 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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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8-0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블랑카님 이책 읽으셨군요. 저는 포장도 안 뜯어놓고 있어요. 생각보다 하루키 에세이가 안 읽혀서요. 읽을 책도 쌓여있구요. 괜찮을 거 같아요. 당장 집에 가면 뜯어보려구요. 근사하게 하루키와 비교해서 쓰고 싶은데 무리일 것 같기도 하구요.

blanca 2012-08-04 18:20   좋아요 0 | URL
아, 소이진님 이 책 있군요! 저는 교보문고에서 하루키 신간 에세이 보긴 했는데 아직 안 읽어 봤어요. 비교해서 쓰면 아주 흥미있는 글이 될 것 같아요. 아, 오늘은 정말 너무 더워 숨이 턱턱 막히네요. 방학은 즐겁게 보내고 있죠?

꿈꾸는섬 2012-08-04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문고 재단장에 사람들이 많았군요. 안 가본지가 하도 오래됐어요. 전 예전에 종로서적 많이 이용했고, 종로서적 없어지고는 영풍문고에 다녔어요.^^
이 책 찜해두었어요.^^ 마지막 인용글 정말 좋네요.^^

blanca 2012-08-04 18:21   좋아요 0 | URL
꿈섬님, 정말 저엉말 많았어요. 진짜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무언가 하나 보려면 몇 겹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지. 방학이라 그런 건지 정말 놀라웠어요. 이 책 참 좋아요. 김연수나 김영하는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객관적인 평가가 잘 되진 않지만요^^;;

꿈꾸는섬 2012-08-06 14:55   좋아요 0 | URL
김영하나 김연수는 저도 주관적으로 무지 좋아해요.^^

프레이야 2012-08-1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 저는 이책을 서평도서로 읽고있는데 참 운이 좋게도 이책이 내손에 왔구나 그러며 읽어요. 좋더군요. 님의 잊히지 않는 기억의 영상들도 좋으네요. 지금 여기에 몰두할 수 있게 하는 힘도 과거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충만한 기억이 현재의 그림을 더 풍성하게 하겠지요.

blanca 2012-08-19 07: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책 참 좋지요? 서평도서였다니 더 부럽습니다. 아, 이 책 읽는 기분은 나이를 한 팔십은 먹은 느낌이 들어요. 프레이야님 말씀처럼 저도 요새 과거의 기억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환자실 앞 면회 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분투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는 그 시간, 6층의 분만실에서는 진통중이던 산모가 더 이상 자심한 고통은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새 생명은 의도하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밀려 내려 온다.

 

 

오로지 태어나는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테르툴리아누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채 이 어둑시근한 제사를 통하여 김영하의 이 책에 들어갔다. 이 책이 십대 폭주족 아이들에 대한 얘기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랬을까? 때로는 자신이 읽기 시작하게 된 책이 다루는 소재조차 모르는 채 그 책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편견도 단견도 자만심도 허영심도 잠시 내려 놓은 채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도 있는 유일한 시간이 허락될 지도 모르니까.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그것부터가 이상하다. 그러나 시작이니까 아직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다.
-p.7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 시작이 아닌 것처럼 위장한다. 이 마술의 관람자가 되어 마음을 졸이다 보면 1장은 그 다음부터임을 알게 된다. 그 밧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도 실패한 마술로 피범벅이 되어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으로 그를 알아주겠다는 일념으로 밧줄이 흔들거려도 잠시 다리를 꼬아 지지하며 버티어 본다. 참고로 그가 쓴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생채기를 그어대고 이렇게 그 생채기를 따갑게 젖혀 놓는 이야기는 언제나 읽는다는 행위를 거룩하게도 진저리나게도 한다.

 

그리고 귓가에 아직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힘겹게 쇼핑카트를 밀며 고속버스터미널로 들어가 혼자 아이를 낳는 장면을 참아내야 드디어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다. 작가는 아이가 나오는 순간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이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순간 살이 살을 낳는다. 생이 생을 끌고 들어온다. 그렇게 낳은 아이, 제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아니 그 제이와 함께 성장하며 이 이야기의 화자가 되는 동규가 제이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나가게 된다. 십대 미혼모의 몸에서 태어나 룸살롱 주방에서 일하는 돼지엄마에게 키워지고 또 버려지는 제이의 십대는 부모의 불화로 해체되는 가정에서 자라다 결국 집을 나오는 동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둘은 결국 폭주족의 리더와 일원으로 다시 함께 하게 된다.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p.73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p.133

 

제이에게는 타인의, 사물의, 고통을 감지하는 예민한 센서가 있다. 동규가 얘기했듯이 제이는 세상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고통 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처절하게 아파야 하는 고통, 폭력에 유린당하는 고통에 제이는 슬퍼하고 분개한다. 여기에 가난한 십대가 있다. 가스통을 지고 피자를 배달하고 때로는 어른의 성적 유희 대상이 되고 그 돈으로 다시 피자를 사먹고 게임을 하고 같은 십대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세상을 질주한다. 우리가 보는 그들은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이고 불결하고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는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 격리시켜야 한다, 우리의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들로부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아이가, 우리의 동생이 그럴 수 있고, 우리가 그랬을 수도 있다고, 그 아이들도 아픈 아이들이라고 가슴으로 공감해 주지 못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와 분리된 기이한 외계의 침입자들이 아니다. 우리가 차마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가장 아픈 자화상이다. 김영하는 그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독자가 느끼는 감동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 엇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마처 부차적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십대는 외국인 불법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이었다. 최저 시급을 받고 비천한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p.164

 

김영하는 이러한 아이들에 대한 공감과 이 아이들을 막다른 곳으로 내모는 기성세대의 '폭력'에 대하여 통찰한다. 최근 일어난 대구 중학생의 자살 사건도 갑자기 사회가 주목하기 시작한 아이들의 폭력성은 소름끼치게 어른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심지어 아이들의 폭력 서클은 어른들의 폭력 조직의 사주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계속 아이들의 이너 서클에서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꼬마 괴물들을 키워 놓은 것은 정작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외면하려 한다. 작가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폭주족을 단속하는 박승태 경위를 보여 준 것은 그런 우리의 의도적인 외면이 사실은 툭 치면 무너질 허방과 다름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게다. 박승태는 합법적 공권력의 전위 부대다. 그 공권력은 일의 전후 사정과 사람의 삶을 묻지 않는다. 박승태는 소년 시절 캠프 지도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자신을 게이로 규정짓게 된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더 이상 두들겨패거나 죽일 수가 없었다."는 그의 얘기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덮어버린 과거가 어떻게 또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표본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는 동규의 이야기를 받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시키는 소설가의 시선으로 바뀐다. 거리에서 열일곱이 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니까 자꾸 대화를 하자고 한다고 했던 아이들의 눈물. 이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자꾸 아연해지며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다. 모든 상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외면하지 말라는 이야기. 그것도 내것이니까. 충분히 아파하라는 이야기. 외면당했던 고통이 웅크린 몸을 펴고 가만히 걸어 나온다. 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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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아직 글을 묵직하게 잘 쓴 작가라기 보다는
판을 잘 짜는 작가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어요.
좋은 스토리텔러라고나 할까? 대충 제 생각은 그래요.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ㅋㅋ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영하와 김연수의 조합이면 완벽할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 2012-03-0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다섯!

요즘 쏟아져나오는 한국소설들 중에서 궁금했던 책은 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리]뿐이었는데 말입니다(체험판을 다운받아 아이폰에 저장해 두었어요 :-)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소설이라는 것도 잊고 한국 현대 소설에 이렇게 몰입하기는 최근들어 처음이랍니다.

이진 2012-03-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멋져요.
저는 무턱대고 한 작가를 읽기보다는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그 작가의 스토리 개연성을 찾아보는 편인데 그래서 이 책은 피하고 "검은꽃"이라는 책을 선물받았어요. 김영하를 만나기가 두근두근 댑니다 ..후

blanca 2012-03-08 22:34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읽으면 더 많이 공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십대의 이야기니까요. 저는 나와바리가 무언가 했다니까요^^;;

비로그인 2012-03-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좋지 않은 것일까요?
폭력이 되면 그것이 나쁜 것일까.
구원이 되면 그것이 좋은 것일까.
들어주면, 그것이 다행일까.
듣지 않으면, 그것은 다행이 아닐까.
무엇을 듣고 무엇을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블랑카 님의 글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03-08 22:3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그 어떤 대안이나 해답 없이 그냥 가장 아픈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물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닌 것 같아요. 읽고 나니까 삶이란 참 아픈 것이로구나, 어리든, 젊든, 나이 들었든, 이해란 참 먼 것이로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그래서 가슴이 참 스산했어요.
 
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이야기는 작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 이 세상을 덮친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말해 줄 입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런 이야기는 무딘 사람도 차마 발을 뺄 수 없다.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라고 작가는 서문을 연다. 비겁하지 않다. 이건 단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무관하다고 미리 숨어버리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이 작가의 유일한 소설로 남아버린 것도 더이상 중언부언하며 자신을 설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특권인 것같다. 

건너서든 직접적으로든 인도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가 있으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사람은 카스트의 어느 계급에 속해 있을까? 였다. 인도에 대하여 배울 때 그 불합리하고 불가항력적인 계급의 피라미드는 구두점처럼 따라붙었다. 한국에 와 있는 인도 사람을 소개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계급을 왕관처럼 덧붙였다. 저 사람은 브라만이란다. 브라만. 저 머나먼 끝 대척점에는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가촉민들이 다니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우산을 쓸 수도 없고 말할 때 내뿜는 입김까지 통제해야 하는. 그 계급의 틀에 의구심을 갖고 반역을 꾀하는 얘기 대신 다만 사람으로서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의 세상의 통념을 잠시 잊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하고 끝난다.  

라헬이 아예메넴으로 돌아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퍼붓듯 성긴 흙을 파헤치며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은빛 빗줄들.
-p.14 

18분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남매쌍둥이 라헬과 에스타가 '늙지고 젊지도 않고 그러나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나이'인 서른하나에 고향인 아예메넴으로 돌아오면서 슬픈 회고는 시작된다. 작가의 시어 같은 묘사들은 뭉근하게 이야기를 적신다. 그 어떤 덧붙임도 함부로 내다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소중한 이야기. 절로 젖어든다. 

기억이 잔잔한 차 빛깔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잔잔한 차 빛깔 웅덩이들로 쏟아져 내리는 융단 폭격.
-p.23 

이제는 손을 흔들고 달아난 유년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꽂힌다. 쌍둥이들의 어머니 야무는 그들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옥스퍼드 대에서 유학하고 돌아과 공산주의의 베일까지 뒤집어쓴 오빠 차코와 제국주의 곤충학자와 사별한 어머니가 있는 친정 아예메넴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쌍둥이의 외가는 피클 공장을 소유하고 기독교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례까지 맞춤하게 받은 누리는 자들의 집안이다. 자비와 이성으로 변장한 치사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의 구현. 그것은 공고하고 그럴 듯한 껍질로 포박되어 있다.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그들의 어머니 아무는 일종의 침입자로 간주된다. 삼촌 차코가 전처와 그 사이에서 낳은 딸 소피 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인도인으로 옥스퍼드에까지 유학한 차코의 전처는 영국인이다. 그 사이에서 낳은 피부 빛깔이 옅은 딸은 스스로를 반쪽 인도인이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쌍둥이는 소피 몰 앞에서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시제를 혼합한다. 서른하나의 라헬과 그 서른하나였던 엄마 아무의 시간. 달아난 유년은 완강하게 현재로 밀려온다. 이미 사랑을 잃은 엄마. 이미 죽어버린 엄마. 불가촉천민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엄마. 저도 모르게 그 사랑을 방조하고 도와주기까지 하고 심지어 외사촌 소피 몰을 죽게 하고 엄마의 사랑까지 밀려나게 하는 쌍둥이들. 아무도 이것을 이렇게 의도한 이는 없다. 삶은 미리 결론을 안고 미친듯이 달려와 파고든다. 책장에서 시린 바람은 갈피짬마다 숨었다 나오려든다. 차마 한번에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잠시 심호흡을 한다.  

이야기의 끝은 귀향한 라헬로 돌아오지 않는다. 낯선 여관에서 몸이 퉁퉁 불어 서른하나에 죽은 엄마가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맺는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 주고 결국은 남자를 죽게 할 그런 사랑. 엄마가 했던 사랑.  

 

그녀가 다시 그 말을 하려고 돌아섰다. 

'나알리(Naaley).'
 내일.

 

너무나 작은 것밖에 말할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백만 개의 별을 주고 싶은 이야기. 찬란한 패배자에 대한 이야기. 그러기에 신을 원망하고 신에 대하여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작가가 얘기했듯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삶같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하나의 삶을 사는 일처럼 고달프고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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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2011-12-0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작은 것"들에게도 "신"이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나서 제목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blanca 2011-12-08 00:02   좋아요 0 | URL
like님 역시 읽으셨군요! 저는 사실 그다지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 이런 소설이라니요!

비로그인 2011-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숨만 쉬고 있었어요.
블랑카님, 저도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blanca 2011-12-08 00:04   좋아요 0 | URL
강추 또 강추합니다. 수다쟁이님은 어떤 느낌을 가지실까요? 정말 읽고 나면 왜 부커상을 받았는지(사실 이 상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심사위원들 손까지 잡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그랬고 부커상 수상작품은 정말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미있어요. 슬프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읽다가 빵 터져 버릴 정도로 웃긴 대목도 많답니다. 작가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2-0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매번 들었다놨다 했었어요, 블랑카님. 아룬다티 로이의 유일한 소설이랬던 것 같아요. 저는 늘 <9월이여, 오라>가 더 끌리긴 했지만요. 대학 때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를 썼었는데 그때가 막 생각나네요. 논문수준이 아니어서 지극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썼었겠지만 계급으로 나뉘는 삶과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겠어요. 살만 루슈디랑 같이 사서 꼭 읽어봐야겠어요. 그리고 저도 어떤 형태로든 "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blanca 2011-12-08 22:00   좋아요 0 | URL
<9월이여 오라>가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였군요!! 오, 놀라워요. 표지의 사진도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무언가 다른 사람이긴 한것 같아요. 전혀 비겁하지 않은. 살면거 그러기 참 힘들잖아요. 카스트에 대한 레포트도 쓰셨어요? 아, 그렇군요. 아직도 일본은 카스트 간 자유로운 결혼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3세계 작가들은 절망에 대한 통찰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북극곰 2011-12-0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이사가더라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으로 책장 깊숙히에 잘 챙겨두고 있어요.소설이 한 권 뿐인건 아쉽지만 그녀의 행보엔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blanca 2011-12-08 22:0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아, `끝까지 데리고 다닐 녀석`이라는 표현이 참 따뜻하네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는^^;; 아, 그래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욕심과 의무가 있다면 참 고달프겠지요. 그녀의 행보에 저도 박수를 보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을 예정이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듯이, 거꾸로
언젠가 죽을 것을 알기에 한순간 한순간 죽을 듯이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거 같아요, 삶이란게 참 동전의 양면 같아요.

누군가의 유일한 소설이라,,, 어쩐지 짠하네요.

blanca 2011-12-09 21:01   좋아요 0 | URL
이 작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떤 책 읽을까 둘러보다 소설가 한강이 추천하는 책에 있어 무심코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 앞에서는 감히 `소설의 죽음` 같은 얘기를 못하겠더라고요. 온몸에서 자신이 가진 것,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뽑아내어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쓸 수 없나봐요. 아쉽기도 하지만 참 근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1225979 2014-03-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입니다. 저도 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다가 여운이 남아 한 바퀴 돌던 중에 좋은 글을 만났습니다. 기쁜 마음에 덧글 남깁니다. 시간 나시면 제 블로그에 오셔서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한 제 감상도 읽어주세요.

제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anssjaj 입니다.

좋은 책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분을 뵈니 참으로 반갑네요.

blanca 2014-03-24 18:06   좋아요 0 | URL
블로그 방문해서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참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