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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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고향에 내려갔다가 ‘자갈치 축제’에 들러 오랜만에 식구들과 회를 먹었다. ‘세꼬시’ 로 뜬 전어에다 ‘히라스’와 ‘도다리’를 함께 주문했다. 때 만난 가을 전어는 무척 고소했고, ‘쓰케다시’로 나온 음식들도 먹을 만했다. 초장과 쌈장과 와사비 푼 간장에다 번갈아가며 회를 찍어먹다가 문득 생각했다. '세꼬시니 히라스니 쓰케다시라는 말들은 죄다 일본말이지만, 나는 이 말들에 묘하게도 친근감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이국적이면서 또한 지방색 짙은 그 말들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회를 먹으면서 떠올렸던 상념은 <소년의 눈물>을 읽으면서, 내 할아버지들의 족적에 대한 구체적인 실감으로 옮아갔다. 나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두 분 모두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각각 히로시마와 나고야에서 돌아오셨다. 만약 그분들이 어떠한 사정이나 결심 때문에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나의 고향은 여지없이 일본 땅이 되었을 테다. 서경식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서경식은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일 해방 후 내 아버지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더라면, 나는 저 아이들과 똑같은 처지, 똑같은 운명에 놓였을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와 더불어 한 발 앞서 고향으로 돌아간 가족들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장남인 아버지는 일본에 남아 계셨던 것이다. 저 운명의 장난이, 지금 나와 저 아이들을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207)

위의 대목에다 “만일 해방 후 내 할아버지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겹쳐본다. 그러고는 재일교포들의 처지가 결코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새롭게 실감하게 된다.  

<소년의 눈물> 속 저자에 대한 진한 공감은 비단 위와 같은 감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약한 책벌레’였던 어린 서경식의 모습에 내 어릴 적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 나는 피난민들이 채 철수하지 않은 판잣집들로 어수선한 동네에서 살았고, 툭 하면 성금을 걷고, 제식 훈련을 시키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반공 교육이 불러일으킨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마른버짐과 함께 허옇게 펴 가던 시절이었다. 누추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피해 들어간 곳이 책 속이었고, 서경식이 그랬듯이 나 또한 “~아름다운 자연과 유복한 가정, 기품 있고 이지적인 누이, 외국 아이들과의 편지 왕래, 무엇보다도 고전음악을 비롯한 ‘문화’! 나는 그것을 가슴이 아리도록 동경했다.” (23)

나 또한 꼭 그랬었다. 시공간은 달랐지만 ‘어린아이의 눈물’을 함께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재일교포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한국의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역사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에리히 캐스트너의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85) 라는 말은 어느덧 굳은살이 박힌 내게 고스란히 와 박히는 말이다.     

물론, 서경식이 슬픔을 말리기 위해서만 독서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꾀병을 부리며 읽지 않아도 될 책들을 섭렵하기도 하고, 사춘기 시절, 동료 여학생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마의 산>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서경식의 독서 편력은 옥에 갇힌 형이 보낸 편지의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문구 앞에서 흠칫 멈춰서기도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146) 서경식이 자세를 고치며 했을 이러한 말 앞에서는 나 또한 고개를 괴었던 손을 빼고 일어나 앉지 않을 수 없다. 

인생 여정 중에서 독서가 매너리즘이 되어버렸을 때, 어느덧 눈물이 말라버렸다고 생각될 때,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85)라는 문장에는 “타인의 눈물 앞에서 무감각해지고 말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어린 시절 흘렸던 눈물을 떠올려보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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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11-2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람들이 <마의 산>을 가리켜 성장 소설의 모범 같은 거라고 하도들 그러길래, 보려 했으나... 1권까지는 어떻게 읽은 것 같은데, 2권으로 이어지질 않았네요. 주인공이 계속 요양원 생활을 하면서.. 어쩌고저쩌고로 계속 이어지겠죠?

자일리 2007-11-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의 산>은 다 읽지 못했답니다. (그 책 읽을 당시,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요) 번잡한 생활에 지치던 때라, 어디 '마의 산' 같은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의 산' 같은 곳에서라면, <마의 산>도 느긋이 완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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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외한’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 미술관이란, 푸들강아지 같은 유한부인의 이미지로 저장되어 왔다. 그런데 몇 해 전 방문했던 간송 미술관은 좀 달랐다. 입구에는 실사 출력의 화려한 현수막 대신 화선지 위에 쓴 정갈한 붓글씨가 전시를 알리고 있었고, 뜰에는 잡종 강아지가 더없이 천진한 얼굴로 놀고 있었다. 마당에 놓인 가을 국화는 아름다운 장닭의 울음을 들으며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송 미술관은 그렇게 조용한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그날 그림을 완전히 ‘헛봤다.’ 옛 그림은 ‘우상 좌하(右上 左下)’ 의 시선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른 채 전시회장 입구에서 동선을 왼편으로 틀어 그림들을 보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림 크기에 따라 간격을 달리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큰 작품이든 작은 작품이든, 전시 유리장에 코를 대고 그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아나갔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제와 부주제, 페이소스와 유머, 동세와 여백, 붓터치에 실린 작가의 마음, 때로는 작가의 농담과 실수까지도 보아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옛 그림, 하면 ‘고색창연하다’는 편견도 갖고 있었기에 깊은 묘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렇게 1층과 2층을 ‘막막하게’ 둘러보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관람 후 “어떤 그림이 제일 좋았냐?”고 묻는 친구에게, “글쎄, 한국 미술은 잘 몰라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 그 책을 지은 분이 간송 미술관의 연구원이라는 것을 그 친구에게서 들었다. 얼마 후 이 책을 펴든 건 그날의 ‘피로감’을 반복해서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구를 거듭 실감하며 되뇌게 했다. “부지런히 많이 보면 보일 줄”알았던 내 오랜 착각은 이 책을 만나 깨어졌다.

 오주석 선생은 옛 그림 읽기의 ‘기본 상식’으로 작품 크기의 대각선 또는 그 1.5배 만큼 떨어져서 볼 것,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쓰다듬듯이 바라볼 것,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볼 것, 이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한번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책 군데군데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 ‘기본 상식’만 알아도, 관람의 기본 매너는 갖추는 셈이다. 완전히 엉터리로 그림을 보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 “아, 내가 이 책만 읽고 갔었더라도!” 하는 탄식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경구도 떠올랐다. “아는 만큼 화가 난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 서린 기상에 감탄하다, 그림을 망치고 있는 일본식의 화려한 표구를 보자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 이건, 조선 사람들이 기모노를 입은 꼴”이라는 저자의 탄식이 절로 나올 만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 옛 그림 70퍼센트 정도가 이런 식으로 표구되어 있다고 하니, 기가 차고 뼈아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약탈로 인해 국내에 남아 있는 유물이 워낙 적다보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까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국력이 한 나라 국민의 감식안마저 좌지우지 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서늘한 대목이다. 논개와 춘향, 이순신의 초상이 친일 경력이 있는 작가 김은호에 의해 ‘일본식으로’ 예쁘장하게 그려졌다는 대목 또한 어이없게 만든다. 한국혼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초상을, 그런 화가에게 맡긴 담당 공무원은 얼마나 의식 없는 자인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일을 맡은 화가의 양심은 대체 얼마나 무딘지. 우리 미술을 알고 더 나아가 감식안을 길러야 할 필요성은 이처럼 지난한 우리의 현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흥분했던 호흡을 가라앉히며, 다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구로 돌아가본다. 결국 잘 보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저자의 말마따나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결국 ‘옛 나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잘 보려면 도교사상과 토착 신앙을, 고신라 이래 불교 왕국 동안의 문화재는 당시 사람들의 불교적 심성을, 조선시대 그림은 사서삼경 정도는 이해하는 교양이 있어야, 그림의 진정한 뜻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머리로만 안다고 다되는 것은 아니다. 2년 동안 오로지 단원만을 연구한 적이 있었던오주석 선생은 글씨만 봐도 대충 몇 살 무렵에 쓴 것인지, 또 어떤 마음 상태에서 쓴 것인지가 보일 정도라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심취하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송하맹호도>를 연구할 때는 야생 호랑이 전문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모계영자도>를 해석할 때는 오랫동안 양계장을 하셨던 분으로부터 조언을 듣기도 하고, <이재의 초상>과 <이채의 초상>속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해부학을 전공한 의사를 찾아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학구열 이상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려면” 결국 “좋아하고” 또 그것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경지를 향해 든든한 마음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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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슈바 2007-12-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못쓰는 글이나마 서평을 한번 써보려고 하다가 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좋은 책에 걸맞는 좋은 서평에 추천 남기고 갑니다. 저는 이 이상의 서평은 쓸 수가 없겠네요^^

자일리 2007-12-1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시다 보면, 또 다른 고갱이를 발견하실지도 몰라요^^ 한국 미술에 관한 입문서로는 이만한 책이 없는 것 같아요.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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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가 전하는 가출 사고 소식은 언제나 판에 박혀 있다. 청소년들의 가출은 비행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어 위험하고, 부녀자들의 가출은 모정을 저버린 무정한 짓으로 간주된다. 그에 비하면 집안의 가장(주로 아버지)이 가출했다는 사건은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실제 통계 수치가 그런 것인지, 성인 남자의 가출은 사회혼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간주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빠가 돈 많이 벌어올게, 그때까지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합의(?) 가출이 아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선언하고 집을 떠난 아버지를 둔 친구가 있다. 홀어머니와 함께 일찍부터 고생을 겪어온 그 친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복잡했다. 일차적인 정리情理로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네 아버지가 야속하게 여겨졌지만, “도대체 무슨 연유로 처자식들을 버리고 떠났을까?”에서 피어나는 물음표들은 꽤 길게 이어졌다. 역마살이 있었다고도 하고, 못 다 이룬 꿈이 있었다고도 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또 한편, 그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이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돈 잘 벌어다주고, 어머니는 가사를 야무지게 돌보고, 자식들은 공부 잘하고, 말 잘 들으면 보통 그 가정은 건실하다는 평을 받는다. 더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있겠으나, 일단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기본이라고들 여긴다. 만약 이들 어느 한 구성원이라도 위치를 이탈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쑤군거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평판과 시선이야말로 사회의 비공식적 안전책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시선’의 감옥에 갇히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불행과 위선이 생겨나기도 한다. 

런던의 증권 브로커인 윌리엄 스트릭랜드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지금껏 구축해온 궤도를 벗어날 결심을 한다.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그는 17년 동안 가족들을 위해 봉사한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안의 창작 욕구를 누를 수 없어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로 한 순간부터 그는 가장의 책무를 벗어던진 천하의 몹쓸 놈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인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라지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상관없어요」

반면, 그의 부인인 에이미는 사회의 통념을 아군 삼아 자신이 누려왔던 안정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에이미는 남편의 사랑을 잃은 것보다 구설수에 오를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     

「아직도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돌아오길 바래요. (…) 그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를 거예요.」       


이쯤 되면, 과연 가족을 버리고 떠난 자가 철면피인지, 남은 자들이 불행한 자들인지 혼돈스럽게 된다. '가족주의’는 선량한 미풍양속의 ‘탈’을 쓰고 있지만, 때로 그것은 ‘덫’이 된다.  

* 덧 : 이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그 무렵, 주말이면 아버지를 따라 다대포 근처로 낚시를 가곤 했는데, 낚시에는 별로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나는 맛없는 식빵을  씹으며 문고판을 읽곤 했다. <달과 6펜스>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확실히 무리였다. 태양 아래서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싸우듯 읽노라니, 엄마가 땡볕에서 무슨 책을 그렇게 보느냐고 혼을 냈고, 마지못해 바위 틈 그늘로 갔더니, 그곳엔 갯강구들이 득실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던 기억이 난다. 

이십대 중반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여러 군데 줄을 긋고, 위의 서평을 썼다. 몇 해가 흐른 후, 지금 다시 책을 펼쳐보니 “추는 항상 좌우로 흔들리고,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18p, 민음사 판)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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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11-2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확실히 무리죠, 암만요~
전 고3 졸업 앞두고 있었는데... 문고판으로요. (그건 무리는 아니죠 호호)
그림 그리겠다고 집 나간건 이해하는데.. 이 아저씨 사생활(아마 타이티에서 새여자 얻고 그런 과정을 보면서 그랬나??)이 난잡하군! 했던 거 같슴다 ^^

자일리 2007-11-2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쓸 당시엔 에이미의 뻔뻔함이 눈에 크게 들어왔었답니다.
이카루님 댓글을 읽고 보니, 제가 만약 에이미 입장에 놓인다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카루 님, 가정적이신 것 같아요.(호호)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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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다. 공포영화를 보러 갔다가 배 아프게 웃고 돌아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현악기 소리, 화면 여기저기를 물들이는 핏자국, 관객을 째려보는 배우들의 섬뜩한 얼굴, 가빠져 오는 맥박 소리, 뚜벅. 뚜벅. 뚜벅 건조한 발자국 소리… 관객들 모두 악! 소리를 지르려던 찰라…의 바로 직전, “워훠훠허! 음마앗! 나살려!” 어느 겁 많은 관객이 오두방정난리블루스를 추며 비명을 질러댔다. 

클라이맥스 때마다, 꼭 한 박자 앞선 비명이 터져 나왔고, 키들거리는 실소가 뒤를 이었다. 실없이 긴장이 풀리면 그렇게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도저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으허험, 헛기침을 해봐도, 양손으로 입을 여며보아도, 흡, 하고 숨을 멈춰보아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옆구리는 당기는데 속은 어딘지 헛헛했다. 검붉은 색채와 음향, 비명과 놀람, 쫓고 쫓김, 악몽과 환각으로 이어지는 ‘말초적’ 공포물이 이젠 좀 지겹다 싶기도 했다. 뭣 좀 새로운 것 없을까? 실없이 소름 돋게 만드는 그런 것 말고, 내 안의 깊고 깊은 공포샘을 자극할 ‘진짜 공포’. 그 즈음 만난 책이 『렉싱턴의 유령』이다. 물론 이 소설집은 ‘공포’ 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도 않고, 하드코어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읽다보니 어느덧 ‘공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공글리게 되었다.

『렉싱턴의 유령』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은 인간의 어둔 심연을 다루고 있어 꽤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하루키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곤 하던 ‘맛난 요리를 먹고, 감미로운 재즈를 듣는’ 인물들 보다는 ‘식겁’(食怯)한 인물들의 비중이 크다. 한밤중 커다란 저택에 나 홀로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와 웃음소리가 들린다든지(「렉싱턴의 유령」) 정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흉측한 짐승이 튀어나와 사랑 고백을 한다든지(「녹색 짐승」) 복싱도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살원인제공자로 몰린다든지(「침묵」) 얼음사나이와 결혼하여 남극에 유배된다든지 (「얼음 사나이」)하는 식이다. 

  주인공들은 공포의 대상 앞에서 ‘모른 척’ 피해버리거나, 과민반응하거나, 오래도록 상처를 안고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가거나, 또는 속수무책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이처럼 공포 앞에서 나약한 (한편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들 인간이란 공포 앞에서 가장 적나라해지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은 공포영화를 볼 때처럼 소리를 꽥 지르거나 얼른 눈을 가려버릴 수 없다. 옆 사람이 내지르는 타이밍이 맞지 않는 비명에 실소를 날릴 수도 없다. 대신 자신의 어둔 심연을 대면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렉싱턴의 유령』이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루키는「일곱번째 남자」주인공의 입을 빌어 ‘공포의 대면(對面)’보다 더 무서운 ‘공포의 외면(外面)’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렉싱턴의 유령』은 내 안의 공포를 향한 길잡이 노릇을 해주는 소설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 내 영혼을 잠식하고 불안케하는 바로 그 이야기의 그림자를 따라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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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11-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우...훕 리뷰 도입 부분요. 배꼽을 잡았슴다.. 리뷰 읽으며 키득거리도 넘 간만예요.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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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이름은 거의 익명에 가깝다 싶을 만큼 흔하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쳐보면 수많은 ‘동명이인’들이 좌르르 떠오른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은 일간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배우 또는 벤처사업가나 프로그래머로 성공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동명이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감정은 좀 복잡하다. 우선적으로는 동명의 존재에 대한 반가움도 없지 않지만, 내 고유한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느낌 또한 떨쳐버릴 수 없다.

동명의 존재가 ‘아주’ 유명한 인물이라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질 것이다. 가령, 역대 대통령이나 억대 연봉을 받는 톱스타, 또는 신출귀몰한 탈옥범과 이름이 같다면? 그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슬며시 웃거나, 누구랑 이름이 같네요? 라며 기어이 아는 체를 하거나 애매하게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유명한 동명의 존재와 비교당하며 무명의 보통사람인 자신을 자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결국, 동명이인의 존재가 원망스러워지고, 자신의 이름 또한 원망스러워지며,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마저 원망스러워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름 때문에 괴로워하다, 기어이 이름을 바꿔버리고야 만 인물이 있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의 주인공. 그의 이름은 ‘고골리’다. 「외투」란 작품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 바로 그와 동명이인이다. 인도계 미국인이며, 이민 2세대인 주인공은 완벽한 인도인도, 완벽한 미국인도 될 수 없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고, 또 한편 이상한 이름 때문에 고뇌한다. 그는 ‘고골리’라는 이름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해나가기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우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니킬’로 개명하고 세련된 뉴요커의 삶에 편입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하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발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이름이란 없다는 말이야. 나는, 사람은 열여덟 살이 되면 자신의 이름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까지는 모두 대명사로 불러야 해.” (317p)   

하지만 ‘고골리’에서 ‘니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출생에 얽힌 일화들, 문화적 배경들, 출신 성분은 고스란히 남는다.

사실상 이름이란 한 개인을 임의적, 편의적으로 드러내는 표식일 뿐이며,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한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성격 등 중요한 부분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더더구나,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이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마치 거기에 운명을 주관하는 주술성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대체 왜, 우리들은 왜 이토록 이름에 연연해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소설의 제목대로 ‘이름 뒤에 숨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이름에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고민, 애정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것이 비록 착오의 결과일지라도) 그러기에 마음에 안 드는 이름일지라도 선뜻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고골리’라는 이름 또한 괜히 지어진 이름이 아니었다. ‘고골리’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래도 과연 그는 이름을 바꿨을까? 

이름과 정체성의 관계를 뛰어난 솜씨로 풀어낸 작가 줌파 라히리,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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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1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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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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