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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서평단 활동 안내

* 서평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적절한 균형>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879쪽이라는 페이지에 압도되어 지레 서평을 포기했다가 황금연휴 1박2일을 이용하여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쪽수에 비해 잘 읽힌다는 것이 중평이더군요. 네, 정말 잘 읽힙니다. 잘 읽힌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렇게 술술 읽어 내려가도 될까? 이 모든 진실을 훑는 게 아니라 뚫어야 되는 것 아닌가(그런 체감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립적인 미망인, 성공에 눈 먼 중산층, 반항하는 불가촉천민… 그들의 삶에 조금씩 감정이입하게 되는 걸 보니 결코 먼 나라의 모진 삶만은 아닌가 봅니다.
 

다만, 관습과 정치를 바꿔내지 못한다 해서 인도인이 지닌 종교성을 너무나 얄팍한 것으로 다룬 면은 좀 불만입니다.(저도 사실 그 두께는 가늠 못합니다만) 작가는 요가, 명상, 사원의식 등을 습관적 행위 내지 위선(僞善)과 맞붙여 놓았더군요. 아마도 그는 유머나 에로스를 더욱 실질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서평에는 구름만 잔뜩 띄워놓고, 여기다 책 얘기를 늘어놓고 있군요. 어쨌든 지금까지 보내주신 책 잘 읽었습니다. 때로는 취향이 아닌 책들을 읽느라 신경질이 날 때도 있었지만 비자발적(非自發的) 독서가 주는 예상 못한 기쁨도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루아’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고, <리틀비>를 통해서는 ‘난민’의 존재와 위선적인 다문화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카멜레온 ‘남 레’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피안 지날 때까지>와 <백석의 맛>은 저의 이십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평단 도서 중 내 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피안 지날 때까지
2. 데샹보 거리
3. 백석의 맛
4. 리틀비
5. 적절한 균형  



* 서평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속에서 한 구절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책을 읽는 아이였고, 이제 나 자신이 소중히 여김 받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다. 익명의 존재, 여자, 아이, 친구의 손에서 넘어가는 몇 장의 삶이 되어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그들을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이에 비길 만한 소유가 있을까? 이보다 우애 넘치는 침묵, 이보다 완벽한 이해가 있을까?” – <데샹보 거리>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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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1-2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네임 바꾸고 처음으로 들렸네요.

리스트 목록이 충실하네요 ^^

잘 보고 가요 ㅎㅎㅎ

자일리 2011-02-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버릭꾸랑님... 맞으시죠?

인사가 늦었지만, 다이조부?

^^
 

 1. 빛의 음악 (린즐리 캐머런, 2007, 이제이북스)

 - 장애 아들을 작곡가로 키운 오에 겐자부로의 이야기  

 : 방점이 '천재형 자폐아' 혹은 '오에 히카리'에 찍히기도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일생과 작품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책. 조만간 읽을 <개인적 체험>에 대한 코멘트를 발췌해둔다.

   

   
 

(...) 그는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입시 학원 강사다. 버드의 아내는 막 아이를 낳으려는 참인데 버드는 부모가 되고 나면 무책임한 젊음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며, 아프리카 모험과 같은 기회들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가 신체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이 어떤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 아이가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란다.

장모와 그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는 알라지 않기로 하지만,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자라는 걸 보면서 깊은 좌절감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그는 아이가 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아이가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이 버드를 압박했으며 심지어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는 직업을 잃었고, 그러다가 여자 친구와 함께 집요하게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를 죽이고 아프리카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결국 버드는 아이를 버리지 못한다. "나는 왜 그 기형아를 냉혹하게 다루지 못했을까?" 버드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게 열심히 방어했던 나 자신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리고 그는 여자 친구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를 구하러 급히 달려간다. 그 아이는 수술을 받고 살아나고 뇌 탈장은 오진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아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고 심각한 지체를 겪을 수도 있다. 어쨌든 버드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다시 직장을 구한다. 

~ 이 소설에는 감상적인 면이 전혀 없다. 버드가 '식물인간 아이'에게 전념하게 되면, 그는 영원히 자유를 빼앗기게 될 것이 분명하며, 그 아이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유를 가치 있게 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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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출간되었던 펭귄북스 70주년 기념 <Pocket Penguins Boxed Set>.

품절되어 살 수 없다. 손에 넣을 수 없는 책.

나 같은 독자를 생각해서인지, 웹페이지를 환상적으로 만들어놓았다.

한 권씩 클릭하면, 70권 모두 프론트&백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다. 클릭하며 대리만족.  

클릭 -> http://www.penguin.co.uk/static/cs/uk/0/minisites/happybirthday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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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1-2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링크는 처음 알았네요. 전 아마존 유케이에서 하나씩 다 이미지 키워서 저장->이미지 올리기 70번했다는;; ^^ 즐겨찾기 하고 갑니다. 화면이 하도 짱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웬지 빛바래보이네요.

자일리 2009-01-2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정성이 대단하세요! 찾으러 가보아야겠어요~

 

 

오에 겐자부로가 만년에 쓴 작품을 읽던 중에, '가스카르'라는 낯선 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다. 가스카르는 오에가 '첫' 작품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스카르의 원서와 번역문을 대조해서 읽는 동안, 어느덧 소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 아래의 내용은 네이버에서 검색한 것이다. 가스카르의 작품은 아직 국내에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다. (나의 언어권역에서는)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책.

 가스카르 [Pierre Gascar, 1916~1997]

+++ 본명은 피에르 푸르니에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남서 프랑스에서 보낸 다음,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친 후에 중후한 장편소설 《가구(家具) Les meubles》(1949) 《닫혀진 얼굴 Le visage clos》(1951)로 데뷔하여, 《짐승들 Les bêtes》(1953) 《사자(死者)의 시간 Les temps des morts》(1953)으로 콩쿠르상을 수상하였다. 《짐승들》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교섭을, 그리고 《사자의 시간》에서는 포로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데, 고뇌로 얼룩진 형상(形象)의 세계에 대한 응시가 조금도 과장된 냄새를 풍기지 않고 시적인 환시(幻視)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점이 그 후 그의 작품에서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여인네들 Les femmes》(1955) 《종자(種子) Le graine》(1955) 《태양 Soleils》(1960) 《도망자 Le fugitif》(1961) 《매혹》(1965) 등의 소설 이외에도 《개방된 중국》(1955) 등의 기행문과 르포르타주가 있으며, 문예평론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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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도, 베르테르도 아닌 사랑


1. ‘팜므파탈’이라는 헛소문 

                        괴테의 나이 25살, 불과 4주 만에 완성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자석산’ 일화가 등장한다. 배가 그 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빨려 날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배는 허물어지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널빤지에 깔려 모조리 죽고 만다는 것. ‘자석산’은 일화는 짧고, 격렬한 정념을 태우다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 사랑의 화신 ‘베르테르’가 내세우는 자기 변명처럼 느껴진다. 베르테르가 자기 정념의 이유를 ‘로테’에게로 돌리고 있기에,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눔과 동시에 로테에게는 팜프파탈의 가면이 씌어진다. 

 18-9세기 명석한 지성들과 교우했던 ‘자석산’, 루 살로메 주변에서도 여러 척의 배가 침몰했다. 무엇이든 파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건설적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난파의 책임을 자석산에게 묻는 모양이다. 루 살로메는 과연 소문대로 강력하게 흡인했다가 매몰차게 뿌리치는 팜므파탈이었던가? 혹시, 루 살로메의 불온한 이미지를 탄생시킨 건 그녀 주변의 성미 급한 ‘베르테르’들 때문은 아니었던가? 

 살로메가 파울 레, 니체와 더불어 시험하려 했던 ‘3각 동거’ 관계는 살로메를 독점하려는 반칙의 각축전이 오가던 끝에 파탄 나고 말았다.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협박’을 연출한 끝에 안드레아스가 살로메의 남편 자리를 차지했고, 후에 만난 릴케는 살로메의 모성을 자극하면서 한없이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졸라대고, 고집부리고, 공갈 협박까지 서슴지 않으며 ‘구애’라는 고전적 책략을 밀어붙였다. 살로메,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고스란히 ‘베르테르’의 후예들이었다. 하지만 로테와 달리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자 했던 살로메는 자기 동력에 따라 멈추지 않는 관계의 실험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완결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길을 따라 수많은 ‘안녕’ (만남/헤어짐)을 이어나갔던 행적, 그것이 루 살로메의 정직한 얼굴이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로메가 ‘팜므파탈/뮤즈’의 무시무시한 자석이라는 소문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팜므파탈’은 어쩌면 (구애에 실패한) 남자들이 지어낸 엄살이요, 헛소문은 아닐까?


2.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

 장미 꽃다발과 각종 선물을 매개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는 순진한 남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는 당신의 노력은 … 결국 가학적 권력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하고 운운한다면? 남자는 벌겋게 화를 내며 자신은 ‘변태’가 아님을, 순정한 남자의 뜻을 훼손치 말라고 강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이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침 튀기며 애인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여자에게 “정말로 행복하십니까? 사랑받는다는 것이 간혹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말한다면? 여자 또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보호자’인 애인한테 모든 걸 일러바치려 할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든, 그들은 가던 길을 그냥 갈 것이다. 기꺼이 구속하고 구속당하면서 자신과 상대를 배신하면서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돌아온 탕아’를, 애완됨을 견딜 수 없어 길을 떠난, 그리하여 소유가 아닌 사랑을 깨우치게 된 ‘성자’의 모습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탕아는, 상처에 민감했기에 적어도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체질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려는 탕아의 노력은 결코 단순한 수동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저토록 힘겹다는 사실은 상처를 주는 행위란 무척 ‘쉬운 일’에 속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 사랑할 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자유를 제약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감정의 빛으로 불태우는 대신, 그 빛으로 속속들이 비추는 법을 그는 서서히 배웠다. (말테의 수기, 267p)

 

 저렇게 예의바른 사랑의 풍경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저처럼 희귀한 사랑은 언제까지고 희소한 것에 머무를 것인가. 함부로 주고 함부로 받는 사디즘 - 마조히즘적 사랑의 유행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도대체 사랑하는데 ‘채찍’이나 ‘촛농’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상처에서 그 무슨 희열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에 비하지면 김영민 선생이 쓴 <사랑, 그 환상의 물매>의 ‘연하디연한’ 사랑론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벌써 굳은살이?

3. ‘내숭’과 ‘새침’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 또한 보여져서는 안 된다.
 (사랑의 단상, 310p)

구애 또는 성적 결합에의 암시를 받은 이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을 있는가? 수락 또는 거부의 의사표현만이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애매모호한,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화가 나게 할 수도 있는 이 말 속에는 두 가지의 공포가 겹쳐져 드러난다. 즉각적인 결합에  대한 공포와 영영 상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자는 이를 두고 (남자들의) ‘구애’와 짝을 이루어온 여자들의 오래된 고전적 책략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내숭’이나 ‘새침’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하지만 결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결합을 연기시키는 이러한 전략은 구애의 폭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무화시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구애를 배제하는, 그리고 독점적 ‘결합’을 상정하지 않는 관계를 지향한다면 이러한 전략을 좀더 세련되게 발전시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트가 말한,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그러나 완전히 감추지는 않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지 않겠는가.

 위의 책들을 읽고 난 후, 그려보게 되는 사랑의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남녀 모두가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바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면서, 또한 비소유의 의지는 숨긴 채로’ 완성 없는 유희의 긴장 속에 머물다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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