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도, 베르테르도 아닌 사랑
1. ‘팜므파탈’이라는 헛소문
괴테의 나이 25살, 불과 4주 만에 완성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자석산’ 일화가 등장한다. 배가 그 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빨려 날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배는 허물어지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널빤지에 깔려 모조리 죽고 만다는 것. ‘자석산’은 일화는 짧고, 격렬한 정념을 태우다 결국 산화해버리고 만 사랑의 화신 ‘베르테르’가 내세우는 자기 변명처럼 느껴진다. 베르테르가 자기 정념의 이유를 ‘로테’에게로 돌리고 있기에,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눔과 동시에 로테에게는 팜프파탈의 가면이 씌어진다.
18-9세기 명석한 지성들과 교우했던 ‘자석산’, 루 살로메 주변에서도 여러 척의 배가 침몰했다. 무엇이든 파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건설적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난파의 책임을 자석산에게 묻는 모양이다. 루 살로메는 과연 소문대로 강력하게 흡인했다가 매몰차게 뿌리치는 팜므파탈이었던가? 혹시, 루 살로메의 불온한 이미지를 탄생시킨 건 그녀 주변의 성미 급한 ‘베르테르’들 때문은 아니었던가?
살로메가 파울 레, 니체와 더불어 시험하려 했던 ‘3각 동거’ 관계는 살로메를 독점하려는 반칙의 각축전이 오가던 끝에 파탄 나고 말았다.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협박’을 연출한 끝에 안드레아스가 살로메의 남편 자리를 차지했고, 후에 만난 릴케는 살로메의 모성을 자극하면서 한없이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졸라대고, 고집부리고, 공갈 협박까지 서슴지 않으며 ‘구애’라는 고전적 책략을 밀어붙였다. 살로메,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고스란히 ‘베르테르’의 후예들이었다. 하지만 로테와 달리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자 했던 살로메는 자기 동력에 따라 멈추지 않는 관계의 실험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완결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길을 따라 수많은 ‘안녕’ (만남/헤어짐)을 이어나갔던 행적, 그것이 루 살로메의 정직한 얼굴이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로메가 ‘팜므파탈/뮤즈’의 무시무시한 자석이라는 소문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팜므파탈’은 어쩌면 (구애에 실패한) 남자들이 지어낸 엄살이요, 헛소문은 아닐까?
2.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
장미 꽃다발과 각종 선물을 매개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는 순진한 남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는 당신의 노력은 … 결국 가학적 권력 의지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하고 운운한다면? 남자는 벌겋게 화를 내며 자신은 ‘변태’가 아님을, 순정한 남자의 뜻을 훼손치 말라고 강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이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침 튀기며 애인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여자에게 “정말로 행복하십니까? 사랑받는다는 것이 간혹 얼마나 끔찍한 상태인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말한다면? 여자 또한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보호자’인 애인한테 모든 걸 일러바치려 할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든, 그들은 가던 길을 그냥 갈 것이다. 기꺼이 구속하고 구속당하면서 자신과 상대를 배신하면서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돌아온 탕아’를, 애완됨을 견딜 수 없어 길을 떠난, 그리하여 소유가 아닌 사랑을 깨우치게 된 ‘성자’의 모습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탕아는, 상처에 민감했기에 적어도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체질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려는 탕아의 노력은 결코 단순한 수동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저토록 힘겹다는 사실은 상처를 주는 행위란 무척 ‘쉬운 일’에 속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 사랑할 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자유를 제약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감정의 빛으로 불태우는 대신, 그 빛으로 속속들이 비추는 법을 그는 서서히 배웠다. (말테의 수기, 267p)
저렇게 예의바른 사랑의 풍경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저처럼 희귀한 사랑은 언제까지고 희소한 것에 머무를 것인가. 함부로 주고 함부로 받는 사디즘 - 마조히즘적 사랑의 유행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도대체 사랑하는데 ‘채찍’이나 ‘촛농’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상처에서 그 무슨 희열이 느껴진단 말인가? 그에 비하지면 김영민 선생이 쓴 <사랑, 그 환상의 물매>의 ‘연하디연한’ 사랑론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벌써 굳은살이?
3. ‘내숭’과 ‘새침’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 또한 보여져서는 안 된다.
(사랑의 단상, 310p)
구애 또는 성적 결합에의 암시를 받은 이에게는 어떤 선택이 있을 있는가? 수락 또는 거부의 의사표현만이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애매모호한,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화가 나게 할 수도 있는 이 말 속에는 두 가지의 공포가 겹쳐져 드러난다. 즉각적인 결합에 대한 공포와 영영 상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자는 이를 두고 (남자들의) ‘구애’와 짝을 이루어온 여자들의 오래된 고전적 책략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내숭’이나 ‘새침’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하지만 결합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결합을 연기시키는 이러한 전략은 구애의 폭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무화시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구애를 배제하는, 그리고 독점적 ‘결합’을 상정하지 않는 관계를 지향한다면 이러한 전략을 좀더 세련되게 발전시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트가 말한,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그러나 완전히 감추지는 않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지 않겠는가.
위의 책들을 읽고 난 후, 그려보게 되는 사랑의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남녀 모두가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바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면서, 또한 비소유의 의지는 숨긴 채로’ 완성 없는 유희의 긴장 속에 머물다 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