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의 아버지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다보니,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재미있다. 베르베르의 히트작 <개미>는 못 다 읽었지만, 이 소설은 두 번을 읽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광고 문구적’으로 말하자면, 인류 진화의 수수께끼, 즉 ‘미싱 링크’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의 추리와 모험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소설이다. 작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기원이라는 가장 심원한 역사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동물적인 것, <짐승 같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동물성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인 것을 정확히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냥감과 맺었던 동물적인 관계는 우리 인간들끼리 맺고 있는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인류의 외계 기원설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한 점이다. 이것은 인류 진화론 논쟁의 ‘포인트’를 살짝 꺾으려는 의도 섞인 농담으로 들린다. 그러니까 인류의 ‘미싱 링크’를 찾아 ‘종의 기원’을 밝히려는 게 애초 이 소설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오독한 이들에게 날리는 카운터 펀치다. 베르나르의 기지에 깔깔 웃으며 배꼽을 문지르다 보면, 중요한 사색거리들이 ‘진화론’ 논쟁에는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aru 2007-11-3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구판절판


"돌아와 보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서 웃는 듯 마는 듯하게 내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말야. 벌이나 파리가 한곳에 앉아 있다가 무엇에 놀라면 즉시 날아가지만 조그맣게 한바퀴 돌고 나서는 아까 그 자리로 되돌아와 내려앉는 것을 보고 참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뜻밖에 지금 나 자신도 기껏 조그맣게 한바퀴 돌았을 뿐 제자리로 날아 돌아온 것이야. 게다가 뜻밖에 자네도 돌아왔군. 자네는 좀 더 멀리 날아갈 수 없었나?"
"글쎄, 아마 나 역시 조그맣게 한바퀴 돈 것에 불과할걸." 나도 웃는 듯 마는 듯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넨 무슨 일로 날아 돌아온 건가?"
"역시 시시한 일 때문이지 뭐."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리고 담배를 몇 모금 빨고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시시해.... 하지만 우리 이야기해 보세."
- 단편 <술집에서> 중에서 -16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의 기원 - 세계의사상 9
다윈 지음, 이민재 옮김 / 을유문화사 / 1995년 10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개체의 운명을 시작한다. 아버지로부터 잘 떠나기, 그리고 그 자신 아버지가 되는 것, 거기에 진화론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 찰스 다윈 역시 그 자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라는 빡빡한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근간이 되었던 비글호 항해를 위해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 중에 네게 바다로 가라고 권하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허락해주마." 그것이 아버지가 반대 끝에 붙인 단서였다. 포기 직전까지 갔던 다윈은 마지막 수단으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쓴다.

존경하는 아버지께로 시작되어, 아버지의 사랑하는 찰스 다윈으로 끝나는 이 편지에는 아버지의 반대 이유 8가지에 대한 외삼촌의 의견이 첨부되어 있었고 '된다, 안된다'를 확답해주실 것, 만약 안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제 자식됨이 부족한 탓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립의 팽팽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할 말은 다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강요받은 의사의 길로도, 성직자의 길로도 가지 않았던 다윈이었기에 되도록이면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제갈길로 가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으로 성사된 비글호 항해는 <종의 기원> 탄생을 위한 중요한 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윈 개인으로서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제 길을 가게 된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고 평생동안 '아버지들의 아버지'의 진면목에 대해 연구했으며, 후에 기독교 정통파들로부터 '조물주이신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격렬한 비난을 받았던 다윈의 일생을 살펴볼 때 그의 인생 경로는 (개인적, 신적) 아버지를 떠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나선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오해되는 바이지만, 그의 연구 주제는 결코 종의 기원, 그러니까 '최초의 아버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았다. 최초의, 하나의 아버지란 어디까지나 기독교상의 관념이다. 그의 진화론은 최초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되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다윈이 말하는 '아버지 되기'란 "한 생물이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을 포함하며, 또(이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개체의 생명을 이을 뿐만 아니라 자손을 계속 남긴다는 것" (87p)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조주 아버지란 따로 없고, 생식하는 모든 종이 '아버지'이며 이 '아버지'들로 인해 세상은 서서히 진화해간다는 다윈의 이론이 발표되었을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의 역할을 부정했다'며 거칠게 항의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뇌관을 건드리는 실질적인 위협이기도 했다. '창조주'라는 거대한 은유로서의 '신 아버지'는 '인간 아버지'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후광 역할 또한 함께 해왔으므로 창조주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부권 침해로도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도그마를 배태하고 있었던 '창조론'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진화론'을 만나 크게 휘청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부-자' 관계를 종이 존속하는 중요 고리로 바라보고 있다는점에서 기독교-가부장제와 진화론은 일정한 교집합 면적을 가진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은 세대간 경쟁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직적 가부장제로부터는 한발짝 걸어나가 있다. "자연 선택은 자손의 구조를 그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시키고, 또 부모의 구조를 자손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시킨다." (107p)는 언급이 가부장제와 진화론이 갈라지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제가 수직적 수혜관계를 전제한다면 다윈의 이론은 쌍방향에서 이루어지는 '부-자' 간의 세대 경쟁을 인정한다. 전자가 질서의 호루라기를 부는 가운데 폭력을 예비하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 화살을 주고받는 격렬함이 있되, 공평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윈의 이론에서 그나마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경쟁적 부자관계를 애써 은폐하지 않고, 명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물학적) '아버지 되기'는 인간종에 있어서는 보통 결혼, 그리고 안정적 배우자와의 섹스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아들은 일가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와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아들을 낳으면 또 그 아들이 아버지와 경쟁하는 가운데 동등해지고 싶어한다. 그렇게.....반복.

찰스 다윈은 자연과학자답게 결혼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서 비교한 뒤 "결혼, 결혼, 결혼을 하자. 증명 끝. "그리고 해버렸다. 평생동안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던 카프카는 약혼만 두 번하고 결혼은 망설이다 결국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변이'하지 못했던 그는 대신 '변신'을 꿈꿨다. 퇴행적인 방식으로. 생식에 의해 아버지가 되고 말고는 중요치 않으며 다른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사내들도 있다. 그들은 수직 일렬로 이어지는 고리 대신 다른 패턴의 고리를 만들려 한다. 고리를 이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복제품은 결국, 신선한 은유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저녁밥을 지어먹고 나자 쌀이 딱 떨어지고 말았다. 좀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가까운 슈퍼에서 포장된 봉지 쌀을 사다 두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쌀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어쩐지 서글픈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쌀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쌀이 없어 밥을 굶어야만 했던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쌀.이.떨.어.졌.다'는 상황이 그렇게 궁상맞은 기분을 불러일으킨 걸까. 그것은 분명 샴푸가 떨어졌을 때의 불편함이나 커피가 떨어졌을 때의 초조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쌀을 넉넉하게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오랫동안 '빈곤'의 상징이었다. 쌀이 흔해 빠진 세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쌀에 연연하게 되는 건 조상들이 물려준, (보릿고개 류의) 징글징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쌀은 여전히 소비 목록의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쌀을 넉넉히 마련한 다음에야 고추장아찌를 살까, 젓갈을 살까 하는 부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간식이나 기호품은 그 다음 순서다. 와인 같은 잉여 물품은 언제나 가장 나중으로 미루어야 한다. 돈이란 항상 빠듯하고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언제나 아쉽다. 그러니 우선과 차선, 가격 대비 만족감을 따져야 하는 쇼핑이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까르푸 매장에서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건 오직 어린애들뿐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돈을 벌어 쌀을 사게 된 이후로 생긴 피로감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혹은 직접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서 빈곤을 읽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나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말고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극단적으로 단언해서, 나를 포함해서 빈곤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292p. '작가의 말' 중에서)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식당 주방 아줌마. 교수 부인, 옷수선 집 주인, 프리랜서 기자. 결혼을 앞둔 가난한 연인, 고학력 룸펜, 고액 연봉을 받는 맞벌이 부부, 전당포 주인.....그리고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남들이 버린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들을 먹고 사는 '노용'이라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빈곤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배수아가 드러내고 있는 가난에 대한 인식은 소름끼칠 정도로 냉철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라거나 '빈곤은 상대적인 것' 등의 말들이 얼마나 얄팍한 위로에 지나지 않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가난이 진정 무서운 것은 한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그 운명마저 결정지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전쟁고아 출신이 전당포 노인으로 늙어버리고만 그 운명 앞에서 '역사의 비극'은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인가. 거기에는 '오직 짓밟힌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가난의 치명적인 독성은 구질구질한 일상의 반복에 가리워져 있기 십상이다. 한정된 수입을 쪼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동안 우리 인생의 사이즈도 어느덧 그냥 그렇게 결정되어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타민 F
시게마쯔 키요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그것은 늘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모두가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색 톤의 칙칙한 배경과 바로크 풍의 중후한 의자는 항상 빠지지 않는 배경과 소재다. 아버지는 근엄하게, 어머니는 넉넉하게, 아들은 듬직하게, 딸은 애교스럽게….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가족 구성원 각자는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걸맞는 가장 그럴듯한 표정을 짓는다.

가족사진의 역할은 거실 벽의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위치에 걸려 모든 방문객들을 향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복하고 화목한 가족이랍니다.”손님들은 예의상으로나마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유~ 이 집의 아들딸들 참 잘 키워놨네.”라는 식의,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치켜세우는 그런 칭찬을 말이다. 하지만 365일 ‘즐거운 나의 집’이란 있을 수 없고 어느 집구석이든 이런저런 갈등과 반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가족사진은 쳐다보기도 싫은, 낯선 한 장의 칙칙한 인화지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태희(배두나 역)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찜질방의 사환이다. 매일같이 이런저런 잔심부름에 시달리지만 아버지는 제대로 된 월급을 주지 않는다. 태희는  아버지를 견딜 수 없어 가출을 결심한다. 가출하기 전날 밤 태희는 가족사진 중에서 자신의 모습만을 칼로 오려낸다. 그리고 아버지의 금고에서 자신의 노동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만큼의 돈을 빼내간다. 스무 살이란 어쩌면 그렇게 맹랑하고 쿨하게 집을 뛰쳐나갈 수 있는 나이인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가출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그에게 무책임한 가장이니, 아버지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하며 비난의 화살을 날릴 태세를 취하게 될지도 모른다. 시게마츠 키요시의 <비타민F>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바라본 가족 이야기다. 가족을 소재로 한 일곱 편의 단편에는 가정보다 직장 일을 우선시 하고 자녀교육에 관한 일은 아내에게 맡기는, 핵가족의 전형적인 아버지가 화자로 등장한다.

가족생활에 싫증이 난 한 남자는 ‘다른 인생을 살 가능성도 있었다. 다른 아내를 얻어 다른 아이들을 낳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던가.’ 라고 독백한다. 가족을 지긋지긋해하면서 또 다른 스위트홈을 꿈꾸는 것이 비단 이 남자뿐일까. 가족사진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마다 다른 꿈이 스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