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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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까?

격동의 100년? 대학살극의 시대? 이념의 각축장?

20세기를 진지하게 그린 책이든 영화든 어떤 컨텐츠를 보더라도 그 속에서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느낌은

아! 내가 저기 저 시대에 저 장소에 있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그런데 안도감이라니?

이 안도감이란건 역으로 들춰보면 어쩌면 내가 속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전제하는 감정이다.

1980년에 나는 외가가 모두 광주에 있으니 광주에 있었을 수도 있었다.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연세대 앞 거리는 내가 다니던 대학 앞 거리로 바뀌어질 수도 있었다 같은.....

역사적 격돌과 그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있는 지역에서는 그것의 희화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설사 블랙코미디로 그려진다 하더라도 그 비극성에서 온전히 벗어나기란 어려운법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웰컴 투 동막골>이 코믹스런 상황을 아무리 연출해도 <황산벌>처럼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은

<황산벌>과 달리 <웰컴 투 동막골>은 그 비극성이 현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스웨덴 내지는 그 인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소설이겠다.

20세기 무수하게 저질러진 학살과 대결의 현장에서 자신이 온전히 주인공인적은 없었던 행운을 가진 나라라고나 할까?

 

100세의 생일을 맞은 영감님 알란은 평생을 정치는 싫어! 종교도 싫어! 모든 이념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당위는 모두 싫어를 외치며 맘 가는대로 흘러가는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

이념따윈 없다.

스페인에 친구따라 갔다가 내키진 않지만 공화파를 위해서 다리를 폭파하다가 우연히 적인 프랑코를 구하고,

미국에선 우연히 핵개발의 중심에 서게 되고,

중국에서는 장제스를 도우러 갔다가 오히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을 구하고.....

이런 뒤죽박죽이라니!

20세기 이념의 시대를 탈이념을 부르짖는  21세기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고나 할까?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지금 생각으로 20세기의 삶을 재구성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소설은 재밌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면서 낄낄거리고 보게 된다.

하지만 영감님이 유쾌 상쾌하게 질주하는 그 시간과 공간을 무수한 고통으로 난도질당하면서 헤쳐온 역사를 갖는 또 다른 의미의 변방 한국에서 읽을 때 불편함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저 멀리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나라에서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나라의 사람들을 굳이 배려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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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11-1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볼 생각을 안 했는데~ 리뷰를 보니 한번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안녕하셨지요?
너무 오랜만이라 곁에 있음 부등켜 안고 찐하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예전처럼 알라딘에서 자주 보면 좋겠어요.@@

바람돌이 2014-11-19 00:24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너무 오랫만이죠.
글을 안 쓰니 서재에도 자주 안들어오게 되더라구요.
작년에 글 쓴걸 보니 딱 1년만.... ㅠ.ㅠ
자꾸 게을러져서 일단 시작하면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뭐 이놈의 게으름이....
자주 놀러갈게요. 반가워요. ^^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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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들을 읽어보면 '아! 이 사람이 도(道)에 이르렀구나' 이런 느낌이 들때가 있다.

뭔가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힘든데 무언가 삶의 한 경지를 이뤘다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신영복선생님의 <강의>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느꼈었는데, 이번 쿤데라의 책을 읽으면서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학문의 궁극은 통한다고 한다.

학문뿐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든지, 심지어 육체노동이 중심인 장인에게서도 오랜 세월을 녹여낸 삶의 경지를 느낄 때가 있다.

쿤데라의 이번 책은 딱 그 느낌이다.

 

쿤데라가 살아왔을 시대를 생각하면 거대담론의 한가운데를 헤쳐왔을 것이다.

그 시대를 헤쳐 살아오면서 80세가 넘은 쿤데가 도달한 곳의 결국 무의미한 것들 또는 무의미하다고 치부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가치이다.

거대담론의 시대는 스탈린의 자고새이야기에서 통렬히 비판된다.

자고새의 농다이 뻔뻔스런 거짓말로 이해되어지는 농담 후의 시대...

거대담론에 파묻히면 디테일한 삶의 순간들은 숨어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보여주다니...

 

소설은 마치 중구난방처럼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네 주인공의 일과를 무심하게 따라가고 중간중간에 스탈린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끼어들고....

그런데 읽다보면 아 이것이 모두 삶의 소중한 순간들이구나

무엇도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한 순간 순간들.....

 

밀란 쿤데라는 이제 무엇을 더 얘기할 수 있을까?

내게 이 책은 마치 쿤데라의 마지막 메시지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거장이 도달한 최고의 경지를 내놓고 한 시대의 종언을 이야기 하는...

농담 후의 시대에서 무의미의 의미로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축제의 시간이 오롯이 책속에 담겨있다.

어쩌면 쿤데라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자신의 시대와 문학세계를 이렇게 아름다운 책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니....

더불어 이런 거장의 인사를 받을 수 있게된 나 역시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이 나이든 거장의 다음 책을 기다리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그의 책을 다시 한 권씩 한권씩  찬찬히 보고싶다.

너무 어릴 때 읽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었고,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부터 시작하려 책을 주문했다.

다행히 밀란 쿤데라 전집이 나와있으니 두고 두고 아껴서 거장을 되짚을 행복한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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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11-1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 딸만 읽고 나는 안 읽었어요.ㅜ
못 읽은 책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마는 박웅현님의 말처럼 `도끼`를 만나야겠지요~ ^^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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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사랑하다.

그리고 사랑을 잃고 아프다.

또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또한 누구나 아프다.....

 

고통은 각각이 자신의 무게를 가진다.

누구도 누구보다 덜 아프지 않다.

책을 읽다 문득 드는 생각은 고통은 견디는 것, 또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고통속을 각자의 방법으로 통과할 뿐.....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의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거야"라고 읆조릴 수 밖에 없다.

 

<예스터데이>의 이십대 청춘은 상실을 겁내지 않는척한다.

젊음의 호기로움일까?

하지만 아픈건 누구에게나 아픔이다. 나라고 아프지 않을리가 없는데 젊음은 자주 눈을 가린다.

이별의 예감은 기타루의 오랜 여자친구의 꿈으로 표현되어있다.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동안 잘 봐두는게 좋아."

이렇게'함께'바라볼 수 없는 순간이 언제든 올테니까......

 

<독립기관>의 도카이는 중년의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만난다. 가벼운 만남을 누구보다 즐기던 그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래서 지금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건지 인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면역성 없는 사랑에의 중독은 그를 파괴한다. 상처에 면역성이 전혀 없는 도카이에게 이 한번의 사랑은 치명적이 돼버린다.

"그녀를 만나지 않을 때, 만날 수 없을 때, 내 안에서 그런 분노가 고조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게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스스로도 잘 파악이 안돼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세에라자드>의 그녀는 어떤 이유인지 집에 갇혀있는 나에게 세상으로의 유일한 소통경로이다.

언제 끊어질지 알수 없는 유일한 얇디 얇은 끈.....

빨판으로 돌에 달라붙은 채 수초사이에 숨어 하늘 하늘 흔들리며 지나가는 송어를 노리는 칠성장어의 모습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면 그의 꿈이 보인다. 세에라자드와 함께 칠성장어가 되리....

그러나 송어는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기에 그 꿈이 백일몽임을 안다. 세에라자드는 그와 함께 꿈꾸지 않는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기노>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처받았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쿨하고 싶은 욕망 또는 무너지는 걸 보여주기 싫은 자존심 무엇으로 표현하든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은" 척 자신을 속이는건 결국 회피에 불과하다.

상처는 결국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한바퀴, 두바퀴, 세바퀴 나를 휘감으면서 몸집만 점점 더 불리고 있는 고통은 어느 순간이 되면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겐 이 <기노>의 아픔이 가장 공감이 되었다.

상처를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어느 날 새벽 오래 전 연인의 자살 소식을 그녀의 남편으로 부터 전해듣게 되는 이야기 <여자 없는 남자들>은 앞의 이야기들의 마무리격의 역할을 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빼앗겨버리는 것....."

어떤 이유든지 결국 상실은 고통이고 아픔이다. 후회에서 무기력, 죽음까지 고통이 나타나는 방식은 달라도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인생의 가장 근사한 시절을 잃었다는 것은 같으므로.....

 

하루키의 글은 뭔가 심심한듯하면서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이게 뭐 하면서 보는데 어느덧 하루키가 펼쳐놓은 세상에 덩그러니 올려진 내가 보인다고나 할까....

 

아 그리고 카프카에 대한 오마주 <사랑하는 잠자>

이건 정말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야기.

하루키가 이걸 장편으로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루키식 벌레의 인간되기, 왠지 근사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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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4-11-0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세요? 저는 아직도 경주 여행 정리를 못 했답니다. ㅠㅠ

바람돌이 2014-11-08 13:29   좋아요 0 | URL
네. 조선인님도 잘 지내시죠?
마로랑 해람이 많이 컸겠네요. ^^
뭐 흘러간건 흘러간대로 둬야죠. 저도 정리 못한 것들 이제는 감당도 안됩니다. ^^
 
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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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추리소설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구나.....

 

책의 뒷날개에 줄거리를 요약한 간단한 책소개가 있다.

 

14년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시효 만료 1년을 앞둔 지금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나서지만 유족은 청장의 방문을 거절한다.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 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해버리면 딱 추리소설이다.

어찌된 일일까? 과연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하지만 저 줄거리야말로 정말 독자를 낚기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경찰이 숨기고 있는 사실은 뭔가 엄청난 반전같은 게 아니라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이었고, 모방 유괴사건 역시 허를 찔린 면은 있었으나 절묘하다 말하기에는 심심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허접한 추리소설인가?

만약 이 책이 추리소설이었다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가 풀어가는 이야기는 사건을 쫒아가고 추리를 해보자는데 있지 않다.

 

주인공인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를 통해 작가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망을 관통하고자 한다.

내부자와 외부자의 입장의 차이, 내부에서 외부를 바로보기,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기

복잡한 관계망들의 중첩속에서 차이를 넘은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결국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현대 조직사회 속에서 인간의 소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던지는 사회소설이라고 하는게 나을 듯하다.

아 그러고 보니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했던것 같기도 하다.

 

내부고발자라는 말이 있다.

어느 사회던지 내부고발자는 참으로 어렵다.

실제로 내부고발자는 발생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발생했을 경우에도 이후 상당히 어려운 처지가 되기 십상이다.
(아! 오해 마시라! 그렇다고 이 책이 내부고발자에 대한 책은 아니니까....)

내부고발자의 발생이 어려운 이유는 무조건 제식구 감싸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훨씬 복잡다단하다.

어떤 조직이나 사건의 내부자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아주 사소하고 섬세한 무수한 사건과 상황, 입장들의  연결의 고리망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걸 알고 있으나 그것이 생기게 된 무수히 많은 상황과 힘들과 입장들, 그리고 바꾸고자 할 경우에 감당하거나 피해를 입어야 하는 각자의 사정과 처지들.... 결국 이런 것들이 내부고발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숲 안에 있음으로 해서 숲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외부자의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일까?

외부자의 시선은 훨씬 단호해 질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별하며 대안도 명확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흑백의 시선과 결단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은 절대로 없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일이든 무수히 많은 섬세한 배려와 관계의 망을 통과할때만이 그것은 진정한 객관성과 올바름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명쾌함이 얼핏 멋져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다.

단순명쾌함만으로 해결되는 인간사는 없는 것이다.

 

경찰청 홍보 담당자 미카미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내부자도 아닌 외부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이러한 미카미의 위치는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폭력적으로 주어졌다.

이런 위치는 미카미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뇌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하는 무수히 많은 상황에 부딪히게 한다.

늘 결단을 내려야 하나 내가 생각하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존재 자체가 괴로워지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미카미의 생각을 쫒아가는 것이 거의 소설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다.

이 과정을 함께 하는 건 독자 입장에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미카미의 고민이 지나치게 공감되어버려 그의 괴로움이 마치 나의 고민인것처럼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던 것이다.

"아! 나 사는 것도 괴로워 죽겠는데, 책 읽으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냐고"라고 절규라도 하고싶었달까?

 

그러나 결국 대답은 존재한다.
결국 이 소설은 미카미가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직과 인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결국 그것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경계를 넘은 어떤 한 지점이다.
경찰과 기자단 사이의 대립, 경찰조직 내의 주도권 다툼, 경찰의 부정, 가정에서의 가족간의 위치

이 모든 것들의 해법은 우리가 내부와 외부를 모두 포함한, 그러면서도 그것의 경계를 뛰어넘을때 찾아지게 된다.
14년전 유괴사건의 범인은 경찰이 찾아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숲속에 있다. 트라우마를 안은 채로....

결국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피해자의 집념과 내부에서 외부로 강제퇴출당한 이의 협력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감당할 이 역시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는 미카미의 몫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미카미라는 장년의 인간의 성장기라고 해도 되겠다.

 

모든 사건과 조직의 해법은 역설적이게도 결국은 단순명쾌함에 의해 해결된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자의 시선에 머물때의 단순명쾌함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더 크다.

내부의 섬세한 관계망을 고려하며 외부의 단호함의 형식을 끌어들이는 것에서 새로운 단순명쾌한 원칙이 드러나는 것이다.

미카미는 새롭게 출발하는 자리에서 이제 자신의 자리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까

소설은 희망을 보여주며 맺는다.

 

미카미의 고뇌를 따라가며 내가 있는 숲속을 생각한다.

나는 숲을 보고 있는가?

 

뱀꼬리 - 나이가 드니 손목관절이 안좋다. (어디 손목뿐이랴만은....)
691페이지 책 들고 읽다가 손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이 정도 페이지면 두 권짜리다. 하지만 두권으로 분권해서 내면 당연히 책값이 비싸진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으로 내면서 안에 간지 같은 걸 넣어 두권으로 쭉 찢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요즘 애들 참고서 보면 그런 식으로 많이 내는데.....

하여튼 691페이지 한 권 짜리 책은 나같은 사람에겐 손목 테러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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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9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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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선>으로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만났다.

한 마디로 굉장한 책이었다.
철도역의 기차시간표를 활용한 트릭의 절묘함이라니!

1958년에 나온 책이니 오래 된 책 특유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함께 사건의 전개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정통 추리소설의 재미를 한껏 누렸다고나 할까?

어릴때 셜록홈즈를 처음 읽을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는 행운을 누렸다.

 

한껏 기대감을 고양시킨 상태에서 나에게 선택된 세이초의 두번째 책은 가장 최근에 출판된 <모래그릇> 1961년작이다.

소설의 분위기는 <점과 선>의 분위기와 거의 비슷하다.

세이초라는 작가가 당대 일본 현실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오는 것이니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기본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는게 당연하겠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경찰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도쿄 새벽 기차역에서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전 날 근처 작은 술집에서 죽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와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셨고, 죽은 쪽 사람의 지방사투리가 심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단서도 없다.

죽은 이의 신원도 알 수 없고, 목격자도 없으며 증거가 될만한 그 무엇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할까?
현실에서는 미결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대부분일테고, 이 책에서도 역시 미결사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베테랑 형사인 이마니시는 이 사건에 계속 끌리게 되고 수사본부가 해산하고 난 뒤에도 끝까지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진다.

<점과 선>에서도 그러했고 이 책 <모래그릇>에서도 마찬가지인건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전통 장인정신의 체현자들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에 나오는 경찰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1950년대쯤이 배경이 되는 일본 드라마 같은 걸 보면 흔히 나올 전형적인 가장이자 직장인의 모습이랄까?

다만 이들이 특별한 지점은 아주 끈질기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본끝까지라도 몸을 움직이고 범인의 생각을 짐작하기 위해 범인이 갔을 것으로 예상되는 코스를 직접 체험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에의 체득과 함께 이루어진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겠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생각의 틈사이에는 번뜩이는 한 순간이 준비되어 있다.

그 순간을 대면하는건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지만......

장인의 경지를 보이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다보면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가 평생 쓴 작품의 숫자는 너무 엄청나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평생을 무언가 하나에 자신의 모든 혼을 쏟아넣는 장인의 반열에 작가 자신이 올라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모래그릇>은 결론적으로 <점과 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흥미로웠고 끝까지 독자를 데리고 가는 몰입도도 있었지만 그것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틈사이 번뜩이는 순간을 내놓기에는 조금은 뜬금없거나 너무 많거나....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은 철저하게 논리와 논리를 연결짓고 유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 절묘한 어느 한 지점에 신의 한 순간이 결합함으로써 전체 논리가 완성되어 지는 것이다.

결국 모래그릇이 모자란 부분은 바로 이 지점, 논리의 연결부분이다.

지나치게 자주 그 부분을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메꾸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얘기할 수 밖에 없게된다.

 

이제 내게 마쓰모토 세이초는 양쪽 두 지점을 선보였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뛰어난 작가와 그냥저냥 괜찮은 추리소설 작가

이후 내가 다시 만나게 될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점과 선>이 작가의 최고작이 아니기를 빈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처음 읽은 것보다 더 좋은 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정말 안타까움이다.

특히 나처럼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을 경우 그 작가의 책에 흥미가 떨어질때까지는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독서 스타일을 가진 이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 안타깝다는 표현보다는 예전에 유행하던 안습이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정말 딱이라는 생각이 드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그런 작가가 몇몇있다.

예를 들면 로맹가리의 책을 이것저것 읽었지만 제일 먼저 읽었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필적하는 책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던지, 주제 사라마구의 책 역시 가장 먼저 읽은 <눈먼자들의 도시>가 가장 좋았다던지....

아!  미야베 미유키도 처음 읽었던 <모방범>이 가장 좋았다.

 

이 경우 문제는 가장 훌륭한 책을 요령없이 제일 먼저 읽어버린 내가 문제일수도 있구나.....

아직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점과 선>과 <모래그릇>중간의 어느 지점정도라면 이 작가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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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뵈어요. 두 공주님도 잘 있겠지요?
저도 최근에 이 책을 읽었거든요.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첫 만남이었는데 제가 일본문학 작품을 읽고 푹 빠져본 경험이 없어서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한게 아니었는데 역시 기대만큼이 아니어서 좀 실망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논리적인 추리에 의해서 사건이 하나 하나 해결되어 나간다기 보다 우연히 떠오르는 무엇에 의한 부분이 너무 많고 갑자기 등장하는 실마리가 좀 엉뚱했고요. 모래그릇이라는 제목을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것도 명쾌하게 저에게 와닿지 않아서 읽고나서 뿌듯함이 적었어요.

바람돌이 2013-11-08 10:14   좋아요 0 | URL
hnine님도 잘 지내셨죠? 예전처럼 알라딘에 들어오는게 열심 모드가 되지는 않네요. ㅎㅎ
이렇게 가끔 와도 인사 건네주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 책은 그저 그랬는데 이 작가의 <점과 선>은 정말 좋았어요. 아마 앞으로 한 2권 정도 더 읽어보고 계속 이 작가를 읽든지 그만두든지 하겠죠. ^^
그래도 늘 읽고싶은 작가가 넘쳐나서 행복하기도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