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는 도시의 대적점이 아니었다. 이제 교외는 팽창하는 대도시의 구조에 엮여 있었다. 그 점은 범죄와 마약과 실입이 만연한 교외의 상황을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교외는 점차 민족적 구성이 다양해졌고, 전통적인 도시들의 궤도를 답습했다. 도시와 교외 간의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종류의 대도시가 탄생하고 있었다.  - P569

오늘날은 마치 괴물처럼 몸집을 키우는 대규모 도시들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다. 13장에는 로스앤젤레스와 인근 도시권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다중심적인 초거대도시로 변화한 세계 곳곳의 여러 도시들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역사는 교외화의역사가 아니라 교외와 도시 간의 선명한 차이가 희미해지는 과정의역사다. 로스앤젤레스의 역사는 그동안 도시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를갖추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식으로 지속적인 변형의 단계를밟고 있는지를 둘러싼 역사다.
- P585

지금까지 인류사에서 도시와 도시 생활이 그처럼 중대한 변화를겪은 기간은 없었다. 195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명확히 형성된,
다중심적이고 급격히 팽창하는 세계적 거대도시권역이 마침내 세계를 정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에 의해 탄생한 교외대도시, uburban metropolis 때문에 도시의 개념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계의 관계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 P588

우리는 자연을 돈으로 환산해야 그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과정을 겪지 않으면 도시가 도시의 생태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없다. 뉴올리언스는 비극적인 홍수에 휩쓸린 2005년에 습지대가 사라진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같은 해에 홍수를 겪은 몸바이는 홍수가 닥치기 전에 육지와 바다 사이의 장벽 역할을 맡았던40제곱킬로미터의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 점을 아쉬워했다. - P606

스마트 도시‘는 단순히 수많은 센서와 디지털 기반시설을 갖춘 도시가 아니다. 스마트 도시는 복원력 있는 인간의 거주지와 자연 서식지를 제공하도록 설계된 도시다. 도시의 생물다양성을 높이려는 노력의 기본적인 목표는 야생 동식물을 아끼고 돌보는 일이 아니다. 생물다양성 증진은 생존전략이다. 미래 도시를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를 근거로 판단할 때, 미래 도시는 아마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된 로스앤젤레스보다 고층건물의 벽면을 장식한 정원, 도시 숲, 하늘 정원, 농장, 녹색 거리, 생물다양성 회랑지대, 도심의 자연보호구, 각종 동물, 무성한 수목 등을 갖춘 오늘날의 싱가포르에 더 가까울 것이다. - P614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다시 도시로 자연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세계를 더 도시적인 곳으로만드는 작업도 필수적이다.
- P615

중국과 아시아 전역뿐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도시화는 중산층의 급성장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도시 부흥의 열매는 소득의 측면에서도 지리적 요소의 측면에서도 균등하게 공유되지 않고 있다. 도시들의 스카이라인에는 오늘날의 대도시들을 관통하는 분열 상태가 반영되어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전용 거주 구역을 차지하거나 하늘 위의 섬에 은거한다.
- P625

역사를 통틀어, 위로부터의 질서를 강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밑바닥에서부터 도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을 품어왔다. 그들이 보기에 엄격히 통제되지 않는 도시는 붕괴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라고스의 활발한 비공식 경제는 그들의 염려를 불식시키는 사례다. 비공식 경제의 역동성은 대규모 도시화의 시대에 세계곳곳의 거대도시들이 발전할 수 있는 비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대도시들의 발전은 비공식 정착지들과 비공식 부문을 사회 문제적 차원이 아닌, 재능과 독창성의 보고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 P634

은유는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우리가 도시를 계획하고 관리하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도시를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도시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쉼 없는 변화의 상태에 놓이 있있던 도쿄와 같았다. 그 같은 선천적 유연성과 적응성에 힘입어 도시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경제적 조건과 외부 충격에 대응할 수 있다.  - P642

인류라는 생물종의 생존 여부는 우리의 기나긴 도시 방랑기의 다음 장에 달려 있다. 이야기는 번쩍거리는 세계적 도시들에서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문제에 대한 디지털식 해답을 모색하는 기술형 관료들이나 고고한 위치에서 도시를 개조하는 기본계획 입안자들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개발도상국들의 거대도시들과 급성장 중인 대도시들에 거주하는 수십억 명의 직접 체험을 통해 쓰일 것이다. 지난 5,000년에 걸쳐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그랬듯이, 앞으로 인류의 대부분은 비공식 정착지에서 생활하고 자작형경제 부문에서 일할 것이다. 인류는 도시를 건설해 유지하고, 독창성과 임기응변의 재능을 발휘해 살아남고,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사람들이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기온이 더 올라가면서 도시의 환경이 더혹독해질 때, 인류는 즉석에서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만약 역사가 일종의 안내자라면 역시는 그들이 성공을 거두리라고 말할 것이다.
- P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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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의 마음은 거대하고 신비로운 건축환경을통제하고 싶어 한다. 인간의 마음은 혼돈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판독되지 않는 것을 읽어내고 싶어 한다. 도시를 걸어 다니고 도시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도시의 주관적지형을 구축하는 행위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6세기 이전에는 도시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틀에 박혀 있었고, 성경적 이미지를 근거로 삼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도시에 대한 건물들과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조감적 관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감적 관점은 지상에서는 연출할 수 없는 일관성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P432

그동안 도시를 상상 속에서 빚어낸 사람들, 소설, 그림, 사진, 산문 등을 통해 도시의 거리를둘러싼 체험을 전달한 사람들은 주로 남성들, 특히 중산층이나 상류층 남성들이 있다. 보들레르는 내도시의 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밀림이나 평원을 탐험하는 것만큼 위험하다고 썼다. 도시의 사회적 지층과 다채로운 지형을 누비며 도시를 차지하는 것은 남성적 행위였다. 20세기까지, 서양에서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여자들은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로, 혹은 남자들의 성적 구애에 넘어갈 공산이큰 여자로 치부되었다. - P437

그러나 도시의 진면목은 움직일때 드러난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유기체를 지탱하는 힘줄과 결합조직에서 드러난다. 걸어 다니기는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무엇보다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걸어 다니기‘는 현지인이나방문객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 P441

뉴욕에서 가장 가난한그 동네는 거칠고 불쾌한 곳이었지만 실제로는 복원력과 진취적 기상을, 때로는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는, 짜임새가 탄탄한 다민족적 공간이었다.
- P473

도시를 말살하는 방법 1: 점령

폴란드 침공에 나서기 훨씬 전부터 독일은 바르샤바를 13만 명의아리안계 독일인들이 거주하는, 나치 식의 시범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시범 도시에는 넓은 녹지와 중세풍의 목조주택, 좁은 거리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비스와 강vistila 동쪽 기슭의교외에는 주인인 독일인들을 섬겨야 하는 8만 명의 폴란드인 노예들이 살 곳이었다. - P485

도시를 말살하는 방법 2: 폭격

함락 직후, 히틀러는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그는 외국 특파원들과함께 폭격으로 파괴된 폐허를 둘러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이 도시를 지키려고 애쓴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직접 목격했습니다. 유럽 전체를 제2의 바르샤바로 만들고 싶어 하는것처럼 보이는 몇몇 다른 나라 정치가들에게도 여러분처럼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P492

도시를 말살하는 방법 3: 총력전

히틀러는 공중폭격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더끔찍한 도시 말살 수단이 있었다. 대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흔히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점령 이후에 무엇을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파리나 브뤼셀이나 런던 같은 도시들에 대해 히틀러는 완전한 파괴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승자는 패자는 간에 우리는 모두 같은 폐허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총력전과 섬멸전은 다르다. - P502

도시를 말살하는 방법 4: 학살, 추방, 약탈, 해체

원자폭탄이 할퀴고 간 히로시마의 토양은 향후 75년 동안 식물이자랄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살아남은 녹나무와 꽃이 핀 협죽도夾竹桃는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본보기였다. 인간의 삶은 대참사의 외중에도 언제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항복하자마자 주민들이 돌아와 돌 부스러기 밑의 지하실에서 살기시작했다.
- P512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바르샤바 시민들은 주로 폭탄보다는 시민의식과 연대감을 뒤흔드는 공포 장치에 더 시달렸다. 나치는 바르샤바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부건선에 필요한 군수품과물자를 생산하는 바르샤바 사람들에게서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뽑아년 뒤에야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비밀스러운 바르샤바가 나치 치하의 바르샤바와 공존하고 있었다. 나치는 대학교 운영을 금지했지만, 서부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Lands가 비밀리에 설립되어 250명의 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2,000개의 학위를 수여했다. 교사들은 수천 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몰래 가르쳤고, 나치에 발각되어 체포된 어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아이들은 독일의 공장으로 끌려갔다 - P513

집단학살과 대량 추방, 완전한 해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도시 전체를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서진 바르샤바는 정말 숨을거뒀을까?
- P523

바르샤바의 구도심은 우리가 건축환경에 대해 느끼는 경외감과도시의 복원력을 기리는 세계 최고의 기념물 중 하나다. 밀반입한 도면 조각과 인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한, 도시는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법이다.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재건된 여러 도시들의 중심가는 야만 행위와 대학살 이전의 시절을 기리는 기념물로 자리 잡았다.  - P527

세계 경제의 원동력은 이제 더 이상 도시들이 아니라 수많은 대도시 지역이 결합한 29개의 거대도시권역들이다. 이 광역도시권들은 전 세계 부의절반 이상을 창출한다.  - P545

기존의 중산층과 노동자층 공동체가 건강에 더 좋은 교외와위성도시, 신규 계획도시로 집단 이주함에 따라 쇠락해진 도심은 이주자 공동체의 본거지가 되었다.
미국의 다른 도시들처럼 로스엔젤레스에서도 교외에 주택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는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주자들은노후 건물들과 기준 미달의 대규모 주택단지에 둘러싸인 비좁은 도심지역인 사우스 센트럴south Central, 사우스 사이드 South Side, 와츠에 같혀 있있다. 부실한 주거, 실업, 폭력, 범죄 따위가 연상되는 도심의 쇠퇴 현상은 걷잡을 수 없는 듯한 교외화의 물결이 그 한 가지 원인이었고, 반대로 도심의 쇠퇴 현상은 도시의 덫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점점 늘어나며 교외의 무한한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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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4-02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표지 디자인이 웅장하네요.ㅎ
양장본에 660쪽이 넘는 분량도 방대하고요.
그림과 함께 읽는 문명사 흥미로울 것 같아요.^^

4월도 화이팅 하세요~바람돌이님~^^

바람돌이 2021-04-02 10:22   좋아요 1 | URL
표지 디자인이 진짜 좋아요. 책 읽으니까 책 내용하고도 맞아떨어지는.... 저는 역시 표지 성애자입니다. ㅎㅎ
분량도 방대하고 내용도 방대해요. 재밌어요. 이제 마지막 챕터만 남았는데 4월도 역시 힘내겠습니다. ^^ 모나리자님도 힘내서 우리 같이 화이팅해요. ^^
 

유럽의 재도시화는 전쟁과, 특히 레반트, 발트 해,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의 종교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득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제압해 독점을 확보하려는 유럽인들의 성향과 연관되었다. 인도양 도시망의 자유무역 정신은 유럽에서 생소한 것이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흑해에서 무역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연거푸 벌였다. 한자동맹이 발트 해를 지배하며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듯이,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각각 아드리아 해와 리구리아해를 둘러싼 절대적 제해권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도시 모두 유럽에서 가장 고도화된 군사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 P271

유럽의 신흥 대도시들은 다른 곳의 대도시들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그 대도시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주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도시들은 왕국들보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중국과 일본의 도시들보다 정치적 참여도와 사회적 유동성이 더 높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다른 대륙의 도시들보다 문맹률이 낮았다. 작고 취약했어도유럽의 도시들에서는 훗날 전 세계를 휩쓴 군사적 · 상업적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 P276

몇 세기에 걸쳐 평화롭게 성장했던 인도양의 도시들은 참혹한 파멸을 앞두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쳐들어오자 카이로 맘루크 왕조의 술탄은 (베네치아의 은밀한 도움으로) 침략자들에 맞설 함대를 편성했다. 1505년, 코르도바의 모스크와 견줄 만한 모스크를 거느리던, 작지만 매우 부유했던 도시 킬와가 약탈되었다. 그 직후, 크고 아름다운무역 도시 몸바사가 약탈을 당하고 잿더미로 바뀌었다. 유명한 해양도시 오르무즈orma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포르투갈 요새가 설치된 인도의 도시 코친cochin은 중요한 향신료 항구가 되었다.
- P291

다른 세계적 도시들처럼, 리스본은 세계 각지에 산재한 위성도시들인 안트베르펜, 마카오, 고아, 코친, 블라카의 관계망을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리스본은 새로운 형태를 가진 도시들의 첫 번째 주자였다. 시장을 세계적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국의 대도시였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들은 뤼벡과 베네치아 같은 도시국가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렸다. 더 중요한 점은, 그 괴물 같은 위력의 도시들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도시 문명을 표방했던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큰 도시들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 P299

암스테르담은 새로운 유형의 도시, 금융 자본주의뿐 아니라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에 근거한 도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인구가 많은도시들에는 늘 시장이 생겼지만,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가 번영할 수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다수의 시민들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며 사치품과 예술품을 소비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 미래의 도시는 대중문화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대중문화에 배출구를 제공하는 도시, 사람들을위로하고 교화하는 도시였다. 그들은 새로운 도시 대중, 즉 세련되고세상 물정에 밝고 유식하면서 견문이 넓고 여가활동과 참신한 즐거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고 있었고, 암스테르담은 소비사회의 요구에 응한 최초의 도시였다. 훗날 암스테르담의 후계 도시인 런던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 P319

카페는 사적임과 동시에 공적인 도시 공간의 가장 명확한 상징이다. 카페는 모든 방문자에게 열려 있는 곳이지만, 나름의 공동체 형성에 일조하는 개인적 성격도 띠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P323

공손함과 예의는 근대 특유의 도시적인 요소였다. 런던에는 사람들이 세련미를 더 많이 갖출 수 있는 사교의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도시 생활은 예의를 통해 더 원활해졌다. 예의가 혼잡한 도시 환경에둘러싸인 낯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돕는 윤활유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공손한 신사(The Polite Gentleman》라는 책의 저자는 "대화를 나누면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무난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어느 작가는 예의의 참된 목표가 교제와 대화를 원활하고 무난하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P335

런던 사람들은 극장을 좋아했다. 극장은 하인, 날품팔이 장인, 무역업자, 변호사, 갑부, 귀족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장소였기 때문이다.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과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한사람들은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들과 함께 오락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분리 상태를 잊어버릴 요량으로 1실링을 내고 극장과 유원지에 들어갔다. 극장은 런던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듯한기분이 드는 장소였다. 그런 기분 덕분에 극장에는 힘이 생겼다. - P341

궁정에서 대도시로 무게추가 이동하는 현상은 17세기 후반기의 커피점을 통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커피점은 18세기 도시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교적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18세기 도시들은 소비자인 시민들이 문화와 유행을 만드는 곳, 여가와 쇼핑이 도시 체험의 핵심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극장과 오페라 극장, 카페와 식당, 박물관과 미술관 등은 모두 근대적 도시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P352

도시는 물질적 혜택을 누릴 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을 느끼고 개인적 혁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맨체스터와 시카고의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일종의 자유를 의미한다고여겼다. 그것은 도시를 비판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결코 포착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어둠과 지저분함에 매몰된나머지 근대적 산업 대도시에서 공동체가 재구성되는 방식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 P377

도시 거주자들은 농촌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재화와 오락을 누릴 수 있었고, 생활 방식과 숭배의 대상을 둘러싼 선택의 폭도 더 넓었다. 특유의 혐오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도시의 빈민가가 농촌의 행복한 무기력에서 해방된 공간을 의미하며 정치적 각성에 필수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 P377

적대적인 산업 도시의 밀림 속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은 초창기부터 그들의 도시를 만들어 가는 데 일조했다. 윌리엄 앳킨william Ainten은 어릴 적에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일하며 초기 공장제도의 소름 끼치는 잔인함을 목격했다. 그런데 앳킨의 삶에는 단순히 비참함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물론 산업화로 인해 고난이 초래되었지만 동시에 "경탄할 만한 진전" 도 있었다. 특히 산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서로 단합하는 과정이 그랬다. 논의와 협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을찾았다. 그들은 영국에서 하나의 문화적·정치적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 P379

맨체스터에 있는 작업장과 공장의 노동 조건, 주택 · 위생·교육 부문의 상태를 직접 체험한 노동계급 출신의 여성들은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맨체스터는 노동계급이 오래전부터 저항과 파업, 대규모 시위와 집단행동에 몰두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귀족적 특권 체제를 공격하는 진보적 자유무역론자들의 급진주의든자신이 처한 조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급진주의든 간에, 맨체스터는 급진주의의 도시였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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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은, 적어도 유대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바빌론은, 우리가큰 도시들을 바라볼 때 쓰는 렌즈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세의 도시, 지배를 목표로 삼지만 바로 그 지배욕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에 대해 썼다. 달리 말해, 도시는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무시무시한 힘이 되어 그 산물을 집어삼킨다. 바빌론을 극심한 압제의장소이자 죄악의 도시로 바라보는 관념은, 지금까지 내내 설교단에서 강력히 주장된 것이다.  - P112

유럽인과 미국인 들은 도시 생활에 대한 반감을 물려받았다. 반면, 유럽과미국을 제외한 여러 문화권에는 그런 반감이 없고 오히려 도시 생활이 비교적 흔쾌히 수용된다.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는 도시가 신성한 곳으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여겨졌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도시는 하느님에게 적대적인필요악이다. 이 같은 차이는 역사 면면히 이어진 현상이다.
- P113

도시 내에서 불도저들이 주로 활약한 곳은 ‘빈민가 정리‘와 ‘도시 재개발‘의 대상인, 상대적 빈곤 구역이었다. 고층건물과 간선도로 위주의 생활에 관한 르 코르뷔지에 식의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안정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노동자 계급의 공동체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런 공동체들은 난잡하고 흉해 보였다. 도시를거칠고 위험한 장소로 여기는 관념은 종교와 정치와 문화 같은 여러분야를 관통하고 있다. 드 퀸시는 도시를 사악한 곳으로 묘사했고, 디킨스는 도시의 퇴폐성을 표현했고, 할리우드의 누아르 영화에서는 도시가 부패로 충만한 장소로 나오고, 존 B. 갈훈은 쥐의 도시를 실험했다. 바빌론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열망은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었다.
- P116

그러나 위생처리된 도시는 전기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 도시다. 한 도시의모순과 대립적 요소와 상스러움은 그 도시에 강렬한 자극과 맥동하는에너지를 선사한다. 도시에는 위생서리가 필요한 만큼 오물도 필요하다. 도덕적 기준이 낮은 곳, 저열한 퇴폐업소가 있는 곳, 매력과 재력을 갖춘 곳, 이것은 대도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대도시의 상반되고불온한 성격이다.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다.
- P118

도시의 역동성은 주로 관념과 상품, 사람의 지속적 유입에 따른결과다. 역사를 통들어 볼 때, 도시가 번영을 누리려면 언제나 그곳의관문을 두드리는 대규모의 이주자들이 있어야 했다.  - P121

기원전 5세기 전반기 아테네의 역동성은, 대체로 외국 출신 이주자들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 아테네의 시민 인구가 기원전 480년의 3만명에서 기원전 450년의 5만 명으로 증가한 결과이자, 새로운 사상이급속도로 유입된 결과였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이곳저곳을 돌아다.
니며 목격한 국제적 분위기는 아테네에서 공공 공간과 개방적 제도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시민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 P142

아테네라는 도시의 풍경의 불규칙적인 외곽선과 개방적인 문화는 길거리에서 토론과 논쟁이 벌어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는 것이 동료 시민들과 아테네의 공공장소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떤 내용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리가 합리적이고 직선적으로 설계된 알렉산드리아는 엄격하게 관리된 곳으로, 관념이나 사상이 도시 생활과 유리된 채 제도 속에 갇혀있던 곳으로 묘사된다. 아테네가 자발적이고 실험적이었다고 한다면알렉산드리아는 백과사전적이고 순응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테네는 철학과 정치학, 연극 분야에서 개가를올렸고, 알렉산드리아는 과학, 수학, 기하학, 역학, 의학 등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 P153

화려하게 장식된 목욕탕은 무엇보다 권력의 표현 즉, 황제의 권력, 세계에 대한 로마의 패권, 자연에 대한 도시의 지배권에 대한 표현이었다.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로마인들은 모두 목욕탕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로마의장엄함과 관대함을 맛볼 수 있었다. - P163

호화로운 목욕탕은 일상생활의 현실과 대비되었다. 100만 명이 북적대며 사는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단순하고 규모가 작은 도시를 결속시키는 참여와 연대가 불가능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의일원이면서도 군중 속에 매몰되지 않는 로마 시민 고유의 특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의 미천함은 공공의 웅대함으로 상쇄되었다.
- P183

모름지기 대도시란 부를 쌓고 기회를 잡을 수있는 곳이다. 아울러 개인이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원이 될 수있는 가능성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은 화려함 속의 두추함을 감수하거나 몹시 협소한 주거공간을 위해 터무니없는 임대료를 지불하며 살 수 있다. 이 같은 기회와 가능성을 품고 있는 도시를에는 언제나 유능한 인재들과 씀씀이가 큰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마련이었다.
- P184

목욕은 도시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목욕탕과 수로교의 유적은 도시성의 붕괴를 가리켰다. 이슬람권대도시들과 아시아 전역의 도시들에서 살아남은 목욕탕은 만개한 도시 생활을 상징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부분이 예전처럼 다시보잘것없는 곳으로 전락하는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 대부분은맹렬한 에너지와 도시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 P197

길거리 음식의 역사는 도시 자체의 역사다. 그것은 도시 성장의동력인 이주자들의 역사다. 메이휴 시절의 런던 시민들은 로마 시대의 조상들처럼 길거리 행상인들이 파는 굴을 매년 수억 개씩 사 먹었다. - P218

13세기에 몇몇 세계적 도시를, 팔렘방, 메르브, 키예프,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파괴되자 유구한 세계 무역의 양상이 뒤흔들렸다. 그러나 그 거대한 붕괴 현상은 새로운 도시들과 도시 문화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기는 도시화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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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공통점을 더 많이 갖는다. 오늘날의 여러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은, 세대나 인종, 계급, 도농 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와 나머지 지역 즉 세계화된 지식경제에서 뒤처진 촌락, 교외, 소도시들간에 일어난다. - P11

을 한다. 흔히 우리는 세계적 도시들의 중심지에서 성공을 누리는 지식경제 혁신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일하는다른 혁신가들도 있다. 그들 덕분에 도시는 근면함과 독창성을 꾸준히 발휘할 수 있다. - P15

수메르인들 그리고 수메르인들과 종교적 통합을 이룬 여러 민족들은 최초의 도시가 원시적 늪지대에서 탄생했다고 믿었다. 그들의 전설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물의 세계가 등장했다. 그들이남긴 점토판에는 개구리, 물새, 물고기, 갈대 따위가 묘사되어 있었다.
오늘날 그들의 도시들은 바다와 주요 강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하고열악한 사막의 모래 언덕 밑에 파묻혀 있다. 초기의 고고학자들은 사막에 있는 그 도시들이 늪지대에서 탄생했다는 신화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땅이라는 이중적 성격의 도시 기원설은 메소포타미아남부의 생태적 변화에 관한 최근의 발견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 P42

물론 최초의 도시들이 전적으로 습지대에서만 출현한 것은 아니다. 그 도시들이 다른 곳의 다른 사회들과 상당한 규모의 교류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습지대의 매력적인 위치를 차지한 도시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았다. 다른 문화권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건축기술, 신념, 도구, 농법, 각종 기능과 직업,
관념 따위를 지니고 왔다. 기후변화로 인해 메소포타미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 되었다.
- P48

수메르의 신들은 샘이나 숲속의 빈터나 구름 속이 아니라 우루크처럼 실재하고 물리적인 도시들의 심장부에 살고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고도로 발전한 그들의 도시에서 신들과 함께 살도록 선택된 사람들인 반면 나머지 인간들은 짐승의 털가죽을 입은 유목민이나 자급자족하는 농민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 P55

그 막강한 피조물들보다 훨씬 오래 버텼다. 도시 문명은 건물의 복원력보다 이념의 확고함에 더 의존했다. 도시에서의 삶은 고역이고, 무척 부자연스럽다. 길가메시의 전설은 도시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도시의 위력과 세력을 되새기고자 나눈 이야기 중 하나였다. 도시에서의 삶, 대부분의 인간은 누릴 수 없는 생활방식은 저주가 아니라신성한 특권이었다.
- P57

우루크가 이 세상에 선사한 선물은 바로 도시화와 문어 였다.
첫 번째 선물이 두 번째 선물로 이어졌다. 우루크는 기존의 확고한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나 타격을 두려워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표기와 수학은 도시라는 가마솥에서 탄생했다. 표기와 수학은 복잡성을 관리하는 행정 기법이었다.  - P63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다른 주요 문명들과 대조적으로 하라과 문명의 도시들에는 궁전이나 신전도, 경외감을 일으키는 지구라트나 피라미드도 없었다. 사제나 왕의 흔적도 전혀 없다. 대형 공공건물들도위풍당당하기보다 수수한 정도였다. 곡물 창고, 일반 창고, 강당, 목욕탕, 시장, 정원, 선거로 같은 건물들은 기능과 취지의 측면에서 자유민적 성격을 띠었다. - P82

하라파인들은 노예를 소유하지 않은 듯하고,
철저히 구별되는 사회적 서열에 따라 생활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도시의 가옥들은 크기가 다양하지 않았고, 각 가옥이 보유한가공품의 양도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 P83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특히 공적 · 종교적 맥락에서 성적 흥분이 초기 도시 생활의 핵심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도시와 관능성은 불가분의관계에 있었다. 도시는 육체적 친밀성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감정을고양하고 욕구를 자극하는 구경거리와 흥청거림과 다채로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욕구를 정획히 어떻게 채웠는지는 알아내기 어렵다. 고대 우루크와 바빌론 사람들의 성생활을 재구성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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