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본분 망각·사회적 책임 외면·상업주의 조장 방송 규탄 기자회견

기사인쇄
인권운동사랑방 
광기어린 월드컵 편성을 즉각 중단하고,
이성의 영토로 돌아오라!



점입가경이다. 월드컵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한국사회의 모든 미디어는 월드컵에 마비 증세를 보여 왔다. 지상파 3사는 평가전을 동시중계하며 시청권을 훼손하였고, 뉴스는 ‘대한민국’을 외치며 한미FTA, 평택,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들에 등을 돌렸다. 사회적 공기로서의 방송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시민사회와 민중의 목소리는 방송이 목놓아 외치는 ‘대한민국’에 파묻혔다. 결국 우리나라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오늘, 방송은 더 이상 어떻게 할래야 할 수도 없는 괴기스런 편성으로 우리를 경악하게 하고 말았다.

오늘 새벽 12시부터 오늘 밤 12시까지 각 방송사별 편성의 원칙은 예외없이 ‘월드컵 전면도배’이다. KBS의 경우 1TV의 경우 24시간 가운데 14시간 40분을 월드컵 프로그램으로 편성하였다. KBS 2TV의 경우는 11시간 가량을 월드컵 프로그램으로 할애하고 있다. MBC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물론 18시간 30분으로 SBS보다 편성 비율이 그나마 적지만 아침 8시 30분 <MBC 모닝쇼 ‘최윤영의 오늘 아침’>을 시작으로 하여 오후 12시 50분부터는 월드컵 프로그램이 아닌 것이 없다. 오후 5시 15분부터 한국과 토고 경기가 있기 전까지 특별생방송을 편성하는 등, 월드컵 싹쓸이 편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SBS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오늘 새벽 12시부터 오늘 밤 12시까지 24시간으로 보면 월드컵 관련 편성은 무려 21시간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공영방송의 역할과 책임을 바닥에 내버린 채 과연 월드컵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시청자들의 비판적 눈초리는 보이지 않은 채 돈과 축구공에 혈안이 된 방송사는 월드컵 이후 어찌 미디어의 공공성과 다양성을 확대하려 한다고 과연 떠벌릴 수 있을까? 과연 누가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도저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방송 3사의 광기어린 편성에 참혹함을 넘어 허무함을 느낀다. 방송이 제조하는 광풍 앞에 진지한 표정으로 언론의 책임, 방송의 공공성과 문화 다양성 확대에 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일이 서글프다. 사회적 공기로서의 방송은 오늘 죽었다.

우리는 이미 지난 2002년 월드컵이 어떻게 사회를 마취시켜가는가를 경험한 바 있다. 언론이 사회적 수임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월드컵 싹쓸이 편성까지 서슴지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상업적 이익이라는 자본의 검은 그림자가 공영방송을 시꺼멓게 덮고 있다. 엄청난 편성료를 지불하고, 천문학적인 광고수익을 챙기려는 언론의 수작에서 막대한 판돈이 오가는 도박판이 연상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의제들을 월드컵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기적인 목소리로 치부하며, 오로지 대한민국만을 연호하도록 만드는 것이 지금 언론이 기획하는 월드컵이다. ‘4강신화의 재현’ ‘필승’에 대한 언론의 광적인 집착은 자연스레 국가주의와 비이성적 집단주의에 가속 페달을 달아준다. 이러한 증후는 이미 4년 전부터 예고되었다.

거듭되는 개혁의 실패와 민주주의의 후퇴의 원인은 결코 정치권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상업주의에 팔아먹은 언론에게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 지금 언론이 국가와 민족을 핑계 삼아 월드컵을 판돈으로 내걸고 한국사회를 거대한 투전판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또 거듭하려하는 언론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방송이여, 비이성적 월드컵 편성을 즉각 중단하고, 이성의 영토로 돌아오라!
방송이여, 광풍 제조를 중단하고, 월드컵 넘어 진실을 방송하라!



2006년 6월 13일
다산인권센터/문화연대/민중언론 참세상/ 인권운동사랑방/전쟁없는세상/천주교인권위원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6-06-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춫현 & 펌~ 이요.

balmas 2006-06-1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아워요. ㅋㅋ
 

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언론에서 이 문제는 거의 조명되지 않는 게 놀랍다.

너무 큰 문제라서, 어차피 뾰족한 해결책은 없어서 그런가?

해결책이 없긴 왜 없어, 모른 체하니까 안보이는 거지 ...

하긴 밑에 댓글 보니 aba007 같은 사람도 있기는 하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30068.html

[필진] ‘수학강국’ 대한민국의 진실

필진네트워크
[관련기사]
며칠전 미국교육실태보고서는 한국의 중2학생들이 세계 45개국중 수학수준이 2등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98년에 비해 8점이나 향상되어 기초학문이 취약한 한국이 수학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이런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다른 언론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나 둘러보았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니면 모두 베껴쓰기로 작정한 듯이 ‘수학강국’ 이라는 제목부터 논조까지 모두 똑같은 글들로 도색 되어 있었다.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이런 기사의 경우 사실적인 정보에 대한 자료를 제공받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자료에 대한 아무런 분석이나 비평도 없이 그저 수학강국이 되고 있다는 식의 보도는 눈가리고 아웅하기이다.

나는 단언컨대 현재와 같은 입시 교육제도하에서는 결코 한국이 수학강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나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아주 똑똑하고 국제대회에서 수상할 만큼의 수학적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다른 나라의 청소년들은 그것도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된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갖가지 사교육과 영재교육, 선행학습에 의해 연마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중국에서도 이런 사교육이 열풍이라고는 하나 아직까지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극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하겠다. 이렇게 일찍부터 학교에서, 학습지로, 학원에서, 과외로 다져진 수학실력이 상위가 아니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 일찍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뭐 잘 못이냐고 항변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런 선행학습과 무분별한 사교육이 오히려 그나마 있는 학생들의 수학적 재능을 마비시키고 자기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는 아둔한 계산기계로 만들어버리는데 진짜 문제가 있다. 초등학생들의 때아닌 19단 외우기 열풍과 같은 비정상적인 모습이 과연 수학강국을 만드는 요인이 되는지 묻고 싶다.

게다가 여전히 학생들이 배우는 수학은 결국 입시에서의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진정으로 수학을 즐기거나 본인들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수학은 여전히 공식과 정해진 틀에 끼워맞추어 외우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영어는 그래도 나중에 취직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과목이라고 생각하지만 수학은 대학갈때까지만 쇠빠지게 열심히해서 점수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대부분 아닌가.

그리고 그나마 그렇게 수학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개발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수학을 잘 하는 학생들은 죄다 법대, 의대로 진학하지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고리타분한 분야로 진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국제대회에서 상위의 성적을 받았다고 수학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수학을 싫어하고 있는데 무슨 수학강국인가. 수학뿐만 아니라 이미 인문사회학을 비롯한 기초과학분야에서 한국의 대학은 지극히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 대학역시나 취업이나 돈벌이를 위한 과정으로 전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경향은 개인적 처세술에 불과하지 그 나라의 학문적 성과를 대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휴대폰을 가장 많이 생산한다고, 반도체를 가장 많이 생산한다고,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고 과학강국은 아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원천이요 인간의 사고확장의 커다른 힘이었던 수학 그 본연의 가치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수학강국이라고 치장하기전에 먼저 할 일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천왕
우보천리
http://wnetwork.hani.co.kr/jjugl94/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2006/06/09 11:54:24 신고하기

수학과 학생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는 암기에 강하죠. 수학 조차 공식화해서 암기하려고만 하니까요.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과를 갔는데 많이 힘드네요. 지금까지 수학을 너무 암기 위주로 공부해왔기 때문에 수학적 사고가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학문제를 잘푸는게 수학을 잘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수학적으로 이해하는가가 수학강대국을 판단하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토마 논객페이지 | 필진 글방
2006/06/07 18:52:58 신고하기

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원고료 받을 려고 쓰는지 이해가 안가. 있는 현상대로 발표하고 보도한 것 뿐인데. 그럼 열심히 잠안자고 공부해서 1등했으면 잠 않잤으니까 다시 시험봐야 하는가? 대기업에 1등 들어간 사람도 잠않잤으니까 반칙인가? 의사 사법고시 출신도 달달달 외었으니까 인정할 수 없는가? 필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가?

한토마 논객페이지 | 필진 글방
2006/06/07 15:18:44 신고하기

우리나라가 다른나라에 비해 수학강국인 까닭은 외국에 나와보면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단하나, 우리나라 수학 교과서(다른 과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의 진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앞서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선 고등학교에 배우는 걸 우리나라는 중학교에서 배우는 식입니다. 여기에 사교육이 더해지면 진도는 더 빨라지는 셈이지요. 수학에서 문제풀이는 도구가 많아지면 당연히 더 쉬워지는 법입니다.

한토마 논객페이지 | 필진 글방
2006/06/07 14:24:45 신고하기

지금 중학교 교실 수학시간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거나 딴 짓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수학뿐만은 아니지만.

한토마 논객페이지 | 필진 글방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6-06-1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등학교 때 수학이 최고 싫었습니다. 늘 내신에서 아무리 해도 수학은 70점 대 였고 모의고사도 80점 만점에 50점대를 넘나들고 10월 즈음엔 30점 대도 맞았죠. 그래도 의대 가고 싶다고 줄창 이과를 고집했습니다만...결국 재수로 직행하고 말았죠.(오히려 수학은 괜찮게 나왔는데 수학에 집중하느라 다른 과목이 펑크가 나서..)

balmas 2006-06-1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데도 이과(아니 의대 ... ^^;;)를 고집한, 의지의 한국인이군요. ㅎㅎ

건우와 연우 2006-06-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웠다, 고왔다, 죽이고 싶었다가 포기했지요...^^
정말 수학, 고민입니다.

balmas 2006-06-1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건우와 연우님 ... ^^;;

2006-06-12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6-06-1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백점만점 모의고사에 순수한 찍기로 팔점도 맞아본 저로서는...ㅎㅎ
중간 기말고사때 가비얍게 찍고 일등으로 나가다 문제 고치러 들어오시는 수학샘과 마주치곤 했던 암울한 학창시절이 떠오르네요. 뭐, 자랑은 아니고요...^^;;

balmas 2006-06-1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러셨군요. 파란만장하네요. ㅋ
나어릴때님/ ㅋㅋㅋ 수학 선생님이 수학 천재인 줄 착각하셨겠네요. ^^;
 

나는 지금까지 스타벅스를 두 번 가봤다.

한 번은 나이든 선생님이 약속 장소를 거기로 잡아서 갔고,

다른 한 번은 역시 출판사 직원이 거기를 약속 장소로 잡아서 간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는 셈인데,

가끔 보면 스타벅스 예찬자들이 눈에 띈다.

물론 알다시피 격렬한 비판자들도 많다. 나는 격렬한 비판자는 아니더라도

될 수 있으면 안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학교-집 바깥의 동선으로 나가는 일이

드문 편이니 사실 갈 일도 별로 없긴 하다.

그동안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는데,

마침 경향신문에서 [왜 스타벅스인가?]를 특집으로 다뤄서 퍼왔다.

----------------------------------------------------------------------- 

[경향신문]

매거진X

[커버스토리]나홀로면 어때!한 잔의 허영심
포털사이트 다음의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사람들’(cafe.daum.net/starbucks)은 회원 1만5천여명의 인터넷 카페다. 지난해 12월 이후 가입한 신입회원 500여명에게 20개 항목의 설문 e메일을 보냈다. 30명이 설문에 응했다.

경향신문 설문에 대답한 이들 중 몇명을 빼고는 ‘스타벅스 애호가’이며 적극적으로 설문에 응했다는 점에서 ‘특수표본’이다. 설문 응답자 30명은 많지는 않지만 ‘왜 스타벅스’인가를 이해하는 데 부족하지는 않다.

설문 응답자 나이는 20~24세가 23명(76.7%)으로 가장 많았다. 25~29세가 3명(10.0%), 15~19세 3명(10.0%)이었고, 30세 이상 1명(3.3%)이 설문에 응답했다. 여성이 22명(73.3%), 남성 8명(26.7%)이었다. 대학생이 20명(66.7%), 직장인이 8명(26.7%), 고등학생 2명(6.7%)이었다.

나이, 성별, 대학생 등의 공통분모를 따지면 ‘20대 초·중반의 여대생’이 가장 많다. 스타벅스의 주 마케팅 대상과 일치한다. 한국의 커피 역사·사회사 측면에서 ‘20대 여대생’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지은이 오두진씨의 설명을 빌리자면 ‘스타벅스를 계기로 커피의 소비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40~50대에서 20대로 바뀐 것’이다.

조선말 커피가 들어온 뒤 여성은 커피 소비의 주체라기보다 객체였다. 여성은 집안에서 남편에게 커피를 타주는 존재였다. ‘커피가게’의 대명사격인 다방에서는 남성 손님에게 커피를 타주고 배달하는 존재였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연인들이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커피’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주로 남성 사이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오씨는 “스타벅스가 모든 걸 확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왜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할까. 설문 응답자 50명(중복응답 포함) 중 ‘커피향·맛’을 꼽은 사람은 23명(46.0%), 스타벅스만의 분위기 14명(28.0%), 서비스 5명(10.0%), 음악·브랜드이미지·위치가 각 2명(4.0%)씩이었다.

스타벅스 커피맛은 과연 좋은가? 월간커피 홍성태 편집장은 “취향의 문제라 대답하기 곤란하다”면서도 “단 스타벅스 커피는 많이, 빨리 팔리기 때문에 커피의 회전율이 높다. 즉 신선하다 것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 성공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응답자 47명(중복응답 포함) 중 11명(23.4%)이 ‘새로운 커피문화’를 꼽았다. 다음은 브랜드이미지가 8명(17.0%), 서비스 및 감성·공격마케팅이 각각 6명(12.8%)이었다. 커피맛·향을 꼽은 이는 4명(8.5%)이었다.

‘스타벅스를 왜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서는 커피맛, 분위기라는 답이 가장 많았지만, 한국 성공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는 ‘새로운 커피문화’란 답이 가장 많은 게 눈에 띤다. ‘새로운 커피문화나 브랜드이미지 때문에 스타벅스를 접했다가 커피맛과 분위기를 좋아하게 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스타벅스에서 주로 뭘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중복응답자 48명 중 20명(41.7%)이 약속·데이트라고 답했다.

독서·공부가 16명(33.3%), 나홀로 휴식(18.8%), 커피즐기기 3명(6.3%)이었다. 약속·데이트같이 커피를 매개로 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공간이자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최적의 장소로도 애용되고 있는 셈이다. ‘나홀로 스타벅스에’는 스타벅스가 들여온 새로운 커피문화기도 하다.

한달간 스타벅스를 찾은 횟수와 비용을 물어보았다. 30명 중 18명(60.0%)이 한달 2~5회 간다고 응답했다. 6~10회 5명(16.7%), 10~15회 2명(6.7%), 20회 이상 간다고 응답한 이도 5명(16.7%)이었다. 한달 스타벅스 커피값으로 나가는 돈은 1만~2만원이 9명(30.0%), 3만~5만원 10명(33.3%), 6만~10만원 9명(30.0%), 15만원 이상은 2명(6.7%)이었다.

이밖에 중복응답자 42명 중 17명(40.5%)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로 ‘카라멜 마끼아또’를 꼽았다. 30명 중 22명(73.3%)이 커피 말고 다른 물건을 사봤다고 응답했다. 중복응답자 40명 중 15명(37.5%)이 텀블러, 12명이 다이어리(30.0%), 9명(22.5%)이 머그잔을 샀다고 답했다.

〈글 김종목·김동은|사진 정지윤기자〉

 

[커버스토리]독서·휴식 ‘커피 그 이상’
스타벅스의 국내 첫 상륙지는 ‘이화여대 앞’이다. 1999년 7월 이곳에 1호점(이대점)을 냈다. ‘이대 상권’은 사업 성패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곳. 이대점은 성공했고, 스타벅스 확장 전략의 근거가 되었다.

스타벅스 마니아인 안성원 김종은 신수정씨(사진 왼쪽부터).

스타벅스의 첫 커피 세례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지난달 22일 저녁 이대점에서 개점 당시 이화여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세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요즘도 2~3일에 한번꼴로 스타벅스를 찾는 마니아들이다.

“기숙사 개방행사 때 스타벅스가 판촉하러 왔어요.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줬는데 다들 ‘커피맛이 왜 이래’라는 반응이었어요.” 신수정씨(26)의 말이다. 안성원씨(26)는 “처음 입맛에 안 맞았는데 커피맛이 진화해 나갔다”고 기억했다. ‘테이크아웃’이란 것부터 모든 게 새로웠다. 줄을 서 직접 주문하고 받아야 했다. 자리는 창으로 나 있고, 안과 밖이 서로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신씨는 “미국, 캐나다에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들이 ‘서울에도 스타벅스가 생겼네’라며 반기며 찾기 시작했다”며 “그 친구들 영향을 받아 애호가들이 한둘씩 늘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멋’ ‘이미지’도 ‘라떼 세대’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녹색의 환경 이미지, 재즈 음악이 주는 편안함.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마력도 있었다. 신씨는 “아침을 여는 이미지도 있었다. 학교 가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해 리포트를 들고 가는 기분. 커피로 잠도 깨지만 그때는 나 스스로가 ‘있어 보인다’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종은씨(26)는 “영화 ‘유브갓메일’에서 맥 라이언이 스타벅스를 즐기는 모습이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전했다. 그는 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친구들과 밥을 먹었는데 ‘스타벅스로 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스타벅스 간다’ ‘스타벅스 가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겼다. 커피는 기본이고 대화, 공부, 리포트 쓰기, 독서, 데이트, 사색, 휴식까지.

안씨는 “스타벅스의 가장 큰 의미는 ‘공간’이었던 거 같다. 그 공간에 흐르는 재즈 음악, 분위기도 좋아했지만 5,000원짜리 커피 한잔이면 몇 시간이고 있어도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게’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폼나는 거였다. 웰빙의 시초격이었다”고 말했다.

‘스타벅스 현상’? 신씨는 “아는 영국인이 있는데 ‘서울에 스타벅스가 왜 이리 많으냐’며 놀란다”며 “미국을 추종하는 사회 분위기도 스타벅스 현상에 한몫 거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밥값’을 훌쩍 넘는 커피값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미국, 캐나다, 일본과 비교해 비싸다”며 “서구, 미국 이미지에 대한 값도 치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는 계속 승승장구할까? 안씨는 “서울에서 스타벅스는 대중화 단계인 것 같다. 커피 마니아 중에는 스타벅스보다 조금 더 비싼 커피빈, 파스꾸치 같은 델 가거나 유럽에서 오리지널로 배우고 온 바리스타가 있는 카페에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스타벅스 매장이 늘자 또다른 차별을 시도하는 ‘구별짓기’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김종목기자〉

 

그 이외의 나머지 기사들은 아래로 ...

http://news.khan.co.kr/section/


댓글(29)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annerist 2006-06-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싸서 가는데요. ㅎㅎㅎ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47795

balmas 2006-06-1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그럼요. 퍼가셔도 되고, 자료를 더 보충하셔도 되죠. ^^
매너님/ ㅎㅎㅎ 스타벅스가 싼가요?

스타벅스 현상은 여러 모로 시대의 상징 같더군요.
실재와 기호의 분열,
욕망에 대한 통치,
문화와 젠더,
등등등 ...

마늘빵 2006-06-11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거지로 세번인가 갔습니다. 저도 스타벅스 싫어요.

하이드 2006-06-1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커피마시러 가요. '마시러' 는 안 맞는다. '사러'
앉아서 마시는 시간은 백번에 한번도 안 될꺼에요.

mannerist 2006-06-1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는 스타벅스 가서 삼천원짜리 오늘의 커피 말곤 안마시거든요. 뭐 거기에 우유나 각종 파우더 무한 리필되니까요. 자세한 건 저 링크해놓은 페이퍼를 참고하심이^^

balmas 2006-06-1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음, 그렇군요. 혹시 그래서 애인이 없는 건지도 ... 3=3=3=3=3
하이드님/ 스타벅스 커피가 맛이 있나요? 저는 주로 자판기 커피나
집에서 타먹는 커피만 먹다 보니 잘 모르겠던데 ... -_-a
매너님/ 그렇군요. ㅎㅎ 어쩌다 혹시 가게 되면 '오늘의 커피'를
시켜야겠네요. :-)

비로그인 2006-06-1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상대편이 약속 장소 잡을 때나 아니면 일정이 어긋나서 몇 시간 앉아 있어야 할 때만 가는데요. 솔직히 전 스타벅스 커피 정말 맛 없더군요. 300원 짜리 자판기 커피에 적응이 되어있다보니 쓰기만 해요.

chika 2006-06-1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는 덴 스타벅스가 없습니다.
울 사무실 동네 찻집에선 생과일 듬뿍 넣은 생과일 쥬스가 삼천오백원입니다. 거기서 최고로 비싼거라서... 커피 열잔 마신 쿠폰으로만 사 먹습니다. ㅎㅎㅎ
(딴나라 스타벅스 얘기하는 것 같아서...;;;;;;)
- 아앗, 그러고보니 청도의 스타벅스에서 차 한 잔 마셨었슴다. ㄴ ㅑ ~ ;;;;;;

하이드 2006-06-1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커피를 맛으로 마시는 종이 못되어서, 대부분의 불쌍한 나인투파이브처럼 카페인을 보충하기 위해 마십니다.

balmas 2006-06-1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몇 시간 혼자 있기는 편한 곳이더군요. 혼자서 책보는 사람들도
많고 ...
치카님/ ㅎㅎㅎ 생과일 주스, 오, 좋네요. :-)
ㅋㅋㅋ 하이드님 ... 역시! (-_-)b

싸이런스 2006-06-1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다방 콩다방 유감 ㅠ.ㅠ

이매지 2006-06-1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150원짜리 학교 자판기커피나 뽑아서 벤치에 앉아 마시렵니다.
스타벅스는 그나마 가면 2명이서 하나 시켜서 시간이나 때우는 곳.

balmas 2006-06-1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예전에는 연대앞 독수리다방이 좋았는데 ... 빵 공짜로 주고 소파 편하고
오래 있는다고 눈치 주는 사람 없고 ... ㅋㅋㅋ
이매지님/ ㅎㅎㅎ 사실 학교 다니면 굳이 스타벅스 이런 데 갈 필요가 없죠.
자유롭게 있을 만한 데가 얼마나 많은데 말예요. :-)

balmas 2006-06-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애님/ 난 따우님이 더 좋은데 ... ^^;;;
지난 번에 원두 커피 사다 먹는다는 이야기하신 거 기억나네요. ^^a
맞아요, 그래서 숨은아이님은 안가겠다고 하셨죠. :-)
흐흐흐, 새벽별님이야 가실 일이 별로 없으실 듯 ...

balmas 2006-06-1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러고보니까, 진짜 "다애"가 아니라 "다우"네요,
따우님. ^^a

ceylontea 2006-06-12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로 커피메이커에 내려 마셔요... 에스프레소 기계는 노리고만 있구... 사서 마시기엔 커피 값이 당최 감당이 안되요.. --;
따우님.. 스타벅스 패스포트.. 이젠 더 이상 안해요.. 기존에 있는 사람은 적용될테지만..
전 그보다는 커피빈 원두. 파스쿠치 원두는 양이 너무 많아요..--; 커피빈은 커피빈 마일리지 쌓이고, 12번이면 한봉지 공짜, 그리고 필터도 10장인가 15장인가 줍니다..
전 주로 커피빈 Tiera(유기농 커피) 마시는데.. 요즘은 커피빈 원두 품귀현상...--;
그래서 이번엔 그냥 유기농 매장에서 원두 샀어요...
스타벅스는 유기농 원두가 2종류 있는데.. 좀 연한 느낌.. 그에 비해 커피빈 원두가 더 진해요... 파스쿠치는 원두 종류 안많던데.. 요즘은 좀 많아졌나? 글롤리아 진즈는 무척 비싸더군요.. 왜 비싼지 모르겠어요..--;

딸기 2006-06-12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는 금연이라서 싫어여 -.,-

보르헤스 2006-06-12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는 의자가 안 좋아요. 나무의자로 궁데이 배겨요.좀 푹신한 의자 좀 갖다놓지. 거기서 몇시간씩 책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뽕뽕팬티라도 입은건지...^^

마늘빵 2006-06-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ㅠ-ㅠ

로드무비 2006-06-1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엔 신달자나 유안진의 수필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소녀 취향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고급스러울 것도 없고요.^^;

기인 2006-06-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커피를 안 마시는 저로서는... 담배, 커피를 안 하니, 밥만 먹습니다. ㅡ,.ㅡ; 제 애인은 20대중반 여성인데, 커피 맛을 구별하더라고요. 저는 고기 맛은 구별하는데 애인은 고기 맛은 잘 모릅니다. 회 맛도 잘 모르고요. 우하하, 커피 맛 아는 것 보다 고기 맛과 회 맛을 아는 제가 더 뿌듯합니다. ^^; 고기는 정말 맛있는데서 먹어야 해요!!! (괜히 뻘소리 날림.... )

기인 2006-06-1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 말로는 자하연 에스프레소 최악급이라고 하던데요. 마치 녹두 고기부페의 고기가 영 아닌 것처럼요. (고기부페 고기 중 맛있는 고기를 못 먹어봤습니다. 고기부페 싫어요 -_-;) 스타벅스 커피는 괜찮은 정도고, 어디 커피가 맛있다고 했는데...
예전에 수x 종종 출입할 때, 고기를 먹지 않는 식생활을 계획해 보기도 했지만, 한달 한번 정도 먹지 않으면 슬퍼지던데요... 쩝;

stella.K 2006-06-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 맛 없던데...값만 비싸고. 미국에선 그냥 흔한 커피체인점이라면서요? 뭐든 물건너 오면 그저 좋은 줄 안다니까요. 그래도 보편적인 것에선 성공했죠. 그 이후 글로리아 진스니 스타벅스 보다 조금은 고급 브랜드가 들어오긴 했지만 살아남지 못했어요. 진스가 스타벅스 보다 맛이 훨 난데도 말이죠. 역시 맛 보단 마케팅인가 봐요.

비로그인 2006-06-12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 여대생이라... 이대 앞에 있는 스타벅스가 한국 스타벅스 1호점이라고 그랬던 거 같아요. 저도 몇 번 가보긴 했지만 너무 비싼 나머지 제 돈 내고 뭔가 마셔본 적은 한 번도 없다지요. 실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 사 가지고 들어가서는 스타벅스 3층 구석탱이에서 먹어댔던 경험이 더 많네요;;;

린(隣) 2006-06-1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 댓글이 많으니 어떤 식으로든 스타벅슬 경험하는 게 우리 현실인가 봅니다.
부대 앞에도 있어, 커피 좋아하는 친구 땜에 몇 번 가긴 했죠.
아시다시피 FTA는 무역협정으로만 있지 않고, 이미 우리 안에 너무 많은 미국이 있죠,
글구 미국화는 앞으로 얼마나 더 촘촘하게 이루어질까요.

전 스타벅스커핀 꼭 코카콜라같아요. 고딩 땐 콜라 일부러 안 마시고 그랬는데, 지금은 배달된 치킨에 끼워주는 공짜 콜란 한번씩 마시죠. 절대 안 된단 고집도 우습지만, 싸구려 원가의 피자가 여기선 무슨 고급 요리처럼 대우받듯이-요즘 좀 내렸지만- 미국적 가치라면 먹히는 상술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 거죠.
요번 서울길에 친척동생이 커피빈이 더 맛있다해서 가보긴 했는데, 커피맛이 다 쓴맛 아닌가요?^^;;(낫긴 낫더군요, 4명이서 두 잔 마셨는데, 전 오늘의 커피를..ㅋㅋ)
저역시 나름 까탈스럽긴 합니다만, 대중이 상품으로 만나는 '고급'과 '예술'이란, 그저 주머닐 털기 위한 얄팍한 상술에 지갑 열어주는 것밖에 안 된단 냉손 어쩔 수 없네요.
근데, 저번에 무슨 일로 서울 갔을 때 만난 선생님께서 홍대 앞 스타벅스에서 보재서 좀 의외였는데, 선생님께서도 스타벅스에서 보자는 줄 알고 약간 뜨악했죠.
그래서 다시 보니 그게 '에서'가 아니고 '앞에서' 더군요.ㅎㅎ

BRINY 2006-06-1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학연수경험 있어서 스타벅스가 처음 우리나라 들어왓을 때는 프라푸치노를 다시 맛볼수 있게 되서 무척 기뻐했었는데. 커피는 안마시면서도 푸라프치노의 시원한 단맛에는 중독되어 버렸답니다.

balmas 2006-06-1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ㅎㅎ 그러시군요. 사서 마시기엔 넘 비싸죠.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있는 데 말예요. ^^;; 커피에 대해 잘 아시네요. :-)

딸기님/ 월드컵 시청 잘 하고 계십니까? ㅋㅋ 요즘 살 맛 나시겠어요. 스타벅스를

안가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게 아닐까요? ^^;

보르헤스님/ 흐흐, 스타벅스에서 오래 견디려면 특수 팬티가 필요하군요. 첨 알았습니다.

아프락사스님/ ㅋㅋ 동병상련이랍니다.

로드무비님/ 님이 젊은 아가씨였다면 자주 가셨을 것 같은데 ... 3=3=3=3=3

기인님/ ㅋㅋ 저는 고기맛도, 회맛도, 커피맛도 구별 못하는데 어떡하죠?

님과 님의 애인님은 각각 장점이 있으니 서로 보완하면 되겠네요. ^^

스텔라님/ 오, 그렇게 브랜드가 많은가요? 저는 예전에 들어온 "자댕"이라는 데는

기억나는데 ...

여대생님/ ㅎㅎㅎ 님도 역시 스타벅스를 애용하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이건 칭찬인가 비난인가? ^^;)

카우테님/ 웬만하면 다들 스타벅스에 한번쯤은 가보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스타벅스가 오래 갈지 안갈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못간다 하더라도

그 비슷한 것이 또 대체하게 되겠죠. 젊은이들이 한미 FTA에 대해 그렇게 반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생활의 미국화, 문화의 미국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브라이니님/ 그러시군요. 그런데 프라푸치노는 뭘까요??

(촌스런 발마스 올림 ;;;)

HS님/ 혼자 다닐 경우, 특히 시간 때울 일이 있을 경우 스타벅스는 꽤 괜찮은

장소인 것 같더라구요. 사람들이 찾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겠죠??


비로그인 2006-06-1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배연기가 없어서 좋긴 한데,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카페를 가게 되었어요. 테이블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는 듯 해요.

balmas 2006-06-1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너무 시끄럽던가요? 하긴 좁은 공간에 의지가 좀 많은 편인 것 같더군요. ^^;;
 
 전출처 : 바람구두 > 글로벌(global)화 속에 대두하는 국가주의 - 마쓰이 야요리 선생을 추모하며...

글로벌(global)화 속에 대두하는 국가주의
―포스트 전후국가에의 기로에 선 일본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머리말―전후최대의 기로에 선 일본

  일본의 수도 도쿄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지사(都知事)가 「‘삼국인’의 범죄가 많아서 군대의 치안출동(治安出動)도 고려해야 한다」고 민족차별적 배외주의 발언을 한 것에 이어서 일본정치의 최고책임자인 모리(森) 수상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전전(戰前)국가를 연상케 하는 발언을 해서 일본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둘 다 자민족 중심주의의 위험한 내셔널리즘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경제가 거품경제 붕괴이래 계속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999년, 일미(日美)가이드라인 관련법을 시작으로 국가권력을 강화시키는 도청법(盜聽法)이나 국기국가법(國歌國旗法) 등 열 개 가까운 국가주의적인 법률이 일거에 성립된 일본의 정치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또 전후일본국가의 틀이 되어 온 헌법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불가피한 것이 되어 있다. 헌법9조로 인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되는 국가에서부터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는 형태로 전쟁을 할 수 있는「보통 나라」(오자와<小澤>자유당 당수의 표현)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화 즉 국제화와, 국가주의화 즉 국수화가 뒤얽히면서 진행되고 있으니 일본은 전후최대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 전후국가가 전전국가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원리에 입각한 국가를 지향할 것인지, 현재 일본인 자신이 이 나라의 미래에 관한 선택을 해야 할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본 일국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글로벌한 상황과의 관련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I. 전쟁을 할 수 있는「보통 나라」로―경제대국에서부터 군사대국으로의 길

1. 전후일본국가의 세 개의 흐름

  전후의 일본국가는 세 가지 구성원리로 성립되어 왔다고 분석되고 있다. (武藤一羊『<전후일본국가>라는 문제』). 미국의 반공자유세계원리(일미 안전보장조약), 호헌평화원리(헌법9조), 그리고 대일본제국의 계승원리가 그것이다. 제1의 원리를 추진한 사람들은 일미안보체제하에서 미국과 협력해서 경제발전에 전념하는 자민당이나 재계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인데, 이것이 전후일본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그것에 대해서 호헌평화원리에 선 사회당, 공산당, 무당파(無黨派)의 진보적 세력이 저항해 왔다. 이 두 원리의 그늘에서, 또 하나 전전에 이어지는 국가주의적 우익세력이 전후부터 존재해 왔으며 자민당의 일부는 그것에 속하면서 침략전쟁이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되풀이했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원리에 선 세력 중 주변적인 존재였던 제3의 세력, 즉 국가주의적 세력이 급속히 대두하면서 일본의 정치나 사회가 그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냉전의 종결과 글로벌화라는 국제적인 흐름이 있다. 80년대 말,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붕괴한 결과, 전세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제외한)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함되어 자유시장경제의 글로벌화가 90년대의 경제시스템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이 일국지배하는 세계경제시스템이며 그 밑에서 거품경제 붕괴로 위기에 처한 일본경제의 불황이 오래 계속하게 되었다. 전후의 폐허에서 일본을 급속히 부흥하게 하고 70년대에는 경제대국으로 밀어 올려준 소위 일본식 경영(종신고용, 연공서열제, 노사협조 등)이, 메가경쟁이라 불리는 시장경쟁원리의 글로벌화로 인해 신통력을 잃어버린다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차꼬가 된 것이다. 그런고로 정치의 빈곤과 더불어 ‘잃어진 10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경제는 정체를 계속해 왔다. 그 결과 야마이치(山一)증권을 비롯해 최근의 소고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대기업이 잇달아 도산하고 기업중심사회라는 말을 낳은 기업의 힘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미국과의 동맹협력관계 아래 경제대국화에 주력해 온 제1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고 있다.

  그것에 대항해 온 호헌평화세력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의 실패로 90년대에 약체화되기 시작하고 패전50주년인 1995년에 사회당이 연립내각을 만들어 정권의 일익에 들어간 이래 급속히 제1세력에 대한 대항력을 잃어버렸다.

일미안보체제를 용인하고, 자위대의 합헌성을 인정하는 등 그때까지의 원칙을 연달아 포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55년체제라 불린 제1․제2세력의 대립구도가 95년에 무너지고 제2인 호헌평화세력은 정당차원에서는 분열되고 여당연합을 결성함으로써 야당세력은 정계의 극소수파로 떨어지고 총여당화(總與黨化)한다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사태를 낳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급속히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제3의 전전파 우익세력이다. 이시하라 도지사도 모리 수상도 자민당이기는 하지만 이 세력에 속하는 정치가이며 두 사람의 최근의 망언은 지금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2. 일미군사동맹의 강화―‘전쟁 매뉴얼’로서의 신(新)가이드라인

 일본은 전후 일관되게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라는 틀 속에 놓여 있었다. 특히 냉전하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과 대결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으며 일본측은 군사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건설에 전념한다는 게 정부․재계가 취한 전략이었다. 전후일본은 미국의 점령하에 놓이고 조선전쟁 때는 미군이 일본에 있는 기지에서 출격했다. 미국의 점령을 종결시킨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조인 후에도 미국이 일본에 계속 주류하기 위해 일미안전보장조약을 조인했다. 그것은 1960년 ‘안보투쟁’이라 불린 전후최대규모의 민중적 항의투쟁에도 불구하고 개정(改訂)되었다. 그 새로운 안보조약은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미군은 일본전국에 확보한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군사동맹이었다. 월남전쟁에서는 이들 미군기지가 최대한 이용되었다.

  특히 오키나와(沖繩)는 1972년에 시정권이 일본에 반환될 때까지 미국의 군사통치하에 놓였으며 미군에 있어서는 아시아 태평양의 요지로서 일본의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되는, 세계최대의 미국해외군사거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일본 자신의 군사력에 관해서는 전후의 일본점령 당초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세력 부활을 억제하는 의미도 있어 전쟁포기의 제9조를 포함한 신 헌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조선전쟁 때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으로 경찰예비대가 설치되고 그것이 자위대가 되고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지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기되어 있는 평화헌법하에서 군대라는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는 채 규모를 잇달아 확대하고 미군을 보완하는 능력을 갖추어서 현재 그 예산규모는 세계2위까지 올랐다. 민중의 반대로 헌법개정을 못한 채 헌법위반의 기성사실을 쌓아온 것이다.

 90년의 걸프전쟁에 일본은 구십 억 달러나 되는 전비를 냈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가 「일본은 돈만 내고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겠다. 국제공헌을 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만다」는 협박적인 선전을 해서 92년에는 금지되어 있었던 자위대 해외파병에 길을 여는 PKO법이 국회에서 강행통과되고 소해정까지 페르시아만에 파견되었다. 그 후 자위대는 PKO 명목으로 캄보디아, 고란 고원, 모잠비크, 르완다, 동티모르 등의 분쟁지역에 부대를 보냈다. 헌법위반의 군사력 강화가 기성사실로서 끝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냉전이 끝난 90년 초에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단계적 철퇴, 삭감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95년에는 그것을 철회해서 「동아시아에 십 만 명 규모의 미군의 전방배비를 유지한다」(나이 국방차관보)고 발표했다. 그리고 북조선의 위협이 없어진 경우에도, 「통일조선이 생겨도 조선반도에 계속 있을 것」(코엔 국방장관)이라고 해서 2020년이 되어도 미군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눌러앉아 있겠다는 뜻을 밝혔다. 냉전이 끝나고 적이 없어져도 「지역을 안정된 상황에 놓고 미국의 상품과 사상의 자유로운 유통을 보증하기 위해」(1995년, 페리 국무장관), 즉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군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오 천 억 달러의 무역과 천 오 백 억 달러의 투자라는 방대한 경제권익을 가지는 미국에 있어 사활에 관계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글로벌화라는 미국의 세계경제지배의 질서를, 그것을 위협하는 요소에서 지키기 위해 군사력으로 인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은 경제적 패권과, 그것을 담보로 하는 군사적 패권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96년 하시모토(橋本)․클린톤 회담에서 하시모토 수상이 이 「십 만 명 미군주류전략」을 지지하고 일미안보조약의 재정의(再定義)에 합의했다. 그 결과 97년에 일미방위 신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고 미디어는 그것에 「전쟁 매뉴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평시와, 일본(미군기지도 포함에서)이 공격을 당했을 때와, 「일본주변지역에서의 사태(事態)」의 세 가지 경우의 일미협력체제에 관한 결정사항인데, 문제는 「일본주변지역」이 어딘지, 어떤 「사태」인지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점이다. 60년 안보조약은 재일미군의 행동범위를 「극동」으로 명기했었지만, 가이드라인에 있는 「사태」라는 것은 미국이 군사개입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비록 페르샤만이라 해도 미국이 그 「사태」라고 판단하면「일본주변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즉 미국의 세계적 군사작전에 일본이 협력한다는 뜻이다.

 그 협력의 내용은 미국이 세계의 어디선가에서 전쟁을 한다는 목적을 위해 일본은 수색 구난, 난민 대책, 경제제재를 실시하기 위한 선박 임검, 기뢰 제거 등의 활동을 하도록 요구되고, 또 자원, 서비스, 시설, 지방자치체까지 동원된다. 즉 공항, 항만, 철도, 도로, 해운, 육상교통, 병원 등도 미군의 군사활동을 위해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국의 전쟁에 참전하고 일본사회전체가 군사화된다는, 전적으로 헌법에 어긋나는 가이드라인이다.

3. 1999년 문제―도청법 등 전쟁협력을 위한 국가주의적 법률

  컴퓨터의 2000년 문제의 그늘에 가려서 1999년 문제의 심각성이 충분히 의식되지 않았다고 작가 헨미 요(辺見庸) 씨가 경고한 것처럼(辺見庸․高橋哲哉『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99년의 국회는 전쟁중의 익찬국회를 연상시키는 국회였다. 자민, 자유, 공명이 연합한 「자자공(自自公)」체제 아래, 소수의 야당이나 의장 밖에서 어떤 반대가 있는 법률도 쉽게 통과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 가이드라인을 실시하는 국내법인 주변사태법 등 관련법안이, 전국적인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5월에 성립한 것을 비롯해 그와 같은 전쟁협력체제를 실시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열 개 가까운 법률이 잇따라 성립해 버렸다.

  통신방수법(通信傍受法)은 일반적으로는 「도청법」이라 불리고 조직범죄 대책으로 경찰 등 수사당국이 전화, 팩스, 전자메일 등을 방수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률로, 대상이 일반시민이나 보도관계까지 확대되어 국가의 개입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예상되는 위헌입법이라고 하는 비판이 높아졌지만 8월에 강행채결되었다. 그 후에도 동법의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계속되고 십 오 만 이상의 서명이 모아졌다.

  이어서 가결된 개정주민기본대장법(改正住民基本臺帳法)은「총등번호제법(總등番號制法)」이라고도 불리듯이 모든 국민의 주민표에 열 자리 코드번호를 붙여서 전국적으로 일원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법 개정이다. 이것도 역시 국가의 관리를 강화시키는 「개인번호사회」로의 전환이며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심각한 문제라는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또 지방분권법 개정은 복지 등의 권한을 지방자치체로 옮기고 국가의 권한을 가볍게 만드는 한편 외교나 국방 등에 관한 결정권은 국가가 가진다는 내용이다. 그 목적은 오키나와(沖繩)현지사가 미국기지를 위한 토지수용 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권한을 빼앗고 국가가 결정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도 명확히 가이드라인 체제의 일환이다.

  또, 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입관법)과 외국인등록법 개정은, 불법입국죄를 만들어서 입관위반자의 재상륙 금지기간을 1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등 외국인 단속 강화가 목적이다. 전쟁체제하에서 국가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외국인이며 일본정부는 그들의 인권보다 그들을 치안대책의 대상으로서 어떻게 단속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사는 외국인(특히 아시아에서 온)을 일부러 차별적인 「삼국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범죄자 취급을 해서 「군대」(자위대라는 말을 안 쓰고)를 치안출동시킨다는 이시하라 도지사의 최근의 발언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발언으로 연상되는 것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몇 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4. 히노마루(日の丸)․기미가요(君が代)의 법제화「국기국가법」과 개헌으로의 움직임

  무엇보다도 심각한 불안을 온 일본에 일으킨 것은 역시 8월에 성립한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정하는「국기국가법」이다. 「히노마루․기미가요」법제화에 대해서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천황제를 찬미하고 개인의 내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서 학자, 법률가, 종교가, 여성단체 등 광범위의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성립시키려고 하는「자자공」연합의 강경한 노선으로 불과 13시간의 심의만으로 강행채결되었다. 민주당의 일부도 찬성으로 바뀌고,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채결결과는 찬성403, 반대86, 결석10으로, 압도적 다수가 찬성했다. 이제 반대파는 완전히 소수파가 되었다. 이 숫자는 일본에서 국가주의로 향하는 움직임이 상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 「히노마루․기미가요」문제는 문부성이 교육현장에 도입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점령군이 제한했던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대해서, 냉전이 격화해서 역 코스의 시대가 된 50년, 문부대신(文部大臣)이 「국경일에 학교나 가정에서 히노마루를 게양하고 기미가요 제창(齊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58년 문부성은 소․중학교의 학습지도요령에「국기게양, 기미가요 제창이 바람직하다」고 명기했다. 「제자들을 두 번 다시 전쟁터에 보내지 말자」고 해서 평화헌법을 존중했던 교사들의 대부분은 예전의 군국주의와  연결되는 히노마루․기미가요에 위화감을 가지고 국가권력으로 인한 강제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것은 침략전쟁을 둘러싼 사상의 투쟁이었다. 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히노마루․기미가요」를 법제화할 방침을 표명했기 때문에 일교조(일본 교직원 조합)는 「법제화와 학교교육에 대한 강제에 반대한다」는 통일견해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문부성은 교육현장에 대한 강제를 계속하고 89년의 학습지도요령에서 「입학식․졸업식에서 국기게양, 국가제창을 하도록 지도하기로 한다」고, 「바람직하다」보다 표현을 더욱 강하게 하고. 전국의 소․중․고교에서의 실시율조사까지 실시했다. 이래서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강제에 저항하면 처분을 받게 되고 실제로 거부해서 퇴직에 몰린 교사도 나와, 저항했던 측은 자꾸 후퇴해 갔다. 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이 국회에서 「히노마루가 국기, 기미가요가 국가」라는 답변을 하고 사회당도 강제에만 반대하기로 방침을 전환시켰다. 일교조도 「히노마루․기미가요」반대를 운동방침에서 제외시켰다.
  99년 2월, 히로시마(廣島)현의 현립고등학교 교장이 졸업식에서의 기미가요 제창을 현교위(縣敎委)에서 직무명령으로 강요당하고, 한편으로는 교조가 반대하는 가운데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이용한 정부는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교현장이 혼란스러운 것이다」하고 「국기국가법안」을 바쁘게 제출했다. 당초 망설였던 공명당도 찬성해서 성립할 전망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사이에서는 「히노마루는 침략전쟁의 심볼이었다」「기미가요는 천황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노랫말이 주권재민의 헌법에 맞지 않는다」「히노마루․기미가요의 강제는 내면의 자유를 침범한다」「전쟁책임을 다하지 않았는데 법제화하면 피해국에서 항의를 받을 것이다」 등의 비판에 대해서 정부측은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이미 국민 사이에 정착되어 있다」「기미가요의 기미(君)는 국민통합의 상징인 천황을 뜻함으로 헌법위반이 아니다」「법제화는 강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하고 국가의 존재양식에도 관계되는 중대한 법안임에도 불구하고 논의를 깊게 할 틈도 없이 성급하게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전쟁책임을 피한 채 20세기 중으로 매듭을 짓고 21세기를 맞이하고 싶다는 일본국가의 권력자들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부는 학교만이 아니라 관청이나 국립대학, 자치체 등에도 히노마루를 도입했기 때문에 일부 기자클럽이 이것에 저항해서 분규가 일어났다.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반대하면 「비국민(非國民)」으로 박해 당할지도 모르는 셈인데, 국가권력이 이런 식으로 개인의 내면에 침입해서 사상신조, 언론의 자유를 빼앗는 국가주의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의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이웃 여러 나라들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사태다. 「기미가요․히노마루의 공식부활은 일본이 과거에서의 해방과 과거로의 복귀를 동시로 겨냥하는 것」(동아일보 99년 7월 24일자)이라고 일본의 급속한 보수화․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고 있다.

  99년의 국회에서 또 하나 중대한 법률이 생겼다. 헌법조사회 설치법이다. 헌법개정은 보수파에 있어서는, 특히 전쟁포기의 9조를 삭제할 것을 중심으로, 오랫동안의 비원이었다. 전후의 일본정치는 바로, 개헌이냐 호헌이냐를 둘러싼 공방전이었다. 평화헌법을 지키라는 꿋꿋한 세론 때문에 개헌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못했던 정부는 일미군사동맹에서부터 자위대의 해외파병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헌법위반행위를 하면서도 「헌법위반이 아니다」하고 강변하는 「해석개헌」으로 군사화를 착착 진행해 왔다.

  하지만 걸프전쟁 이후, 일미안보체제는 유지하면서도 해외출동도 할 수 있는 자기 군대를 가지는 「보통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등 보수파와, 반미의 입장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주장하는 우익의 개헌운동이 강해졌다. 특히 일본에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讀賣)신문』이 개헌 캠페인의 선두주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가이드라인 체제로 인해 미국의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체제가 되고 평화헌법과의 괴리가 너무나 넓어져서 「해석개헌」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명문개헌」을 공공연히 주장해도 터부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국회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하기 위한 법률이 가결되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올해 2월, 중․참 양의원 내에서 헌법조사회가 출범했다. 결론은 5년 후를 목표로 해서 내기로 되어 있는데, 정부가 겨냥하는 것은 역시 9조의 삭제다. 개헌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재의 정치세력으로 봐서 개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다. 전후일본의 최량의 요소라 할 수 있는 평화헌법이 포기되고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억제가 없어지는 위기적 상황에까지 몰린 것이다.

  개헌을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되었기 때문에, 9조를 지키기 위해 헌법은 일절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오로지 방전에만 힘을 써 온 호헌평화세력측에서도, 이제부터는 어떤 헌법으로 만들 건지, 9조는 사수한다 하더라도 상징천황제를 폐지해서 공화국으로 만들 건지, 환경이나 지방자치나 젠더(gender)나 프라이버시의 권리 등 새로운 문제를 어떻게 포함시킬 건지 등 민주주의를 더 강화시키는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6월의 총선거에서 절대다수를 확보한 「자자공」연합은 이어서 유사입법이나 교육기본법 개악, 야스쿠니(靖國)신사 국영화 등의 입법에 착수하려고 하고 있으며 국가주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에 정치가 움직이고 있다.


II. 내셔널리즘의 대두

1. 자유주의사관(自由主義史觀)이라는 이름의 침략전쟁․식민지책임부정론

 패전50돌이었던 95년은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둘러싸서 내셔널리즘 세력이 공공연히 등장한 해였다.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일본이 어떤 입장을 밝힐 것이냐가 국내외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자민당이나 신진당의 강경파 의원들은 「전쟁사죄 국회결의」에 반대하는 의원연맹을 결성하고 유족회 등 우익세력과 함께 전국적인 캠페인을 조직했다. 그 세력과 제휴해서 후지오카(藤岡信勝) 동경대학 교수(교육학) 등 우파 지식인들이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같은 해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결성하고 전전에 이어지는 내셔널리즘 추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일찍이 공산주의자였던 후지오카 씨는 걸프전쟁으로 「일국평화주의 환상(幻想)」「사회주의 환상」을 버리고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식민지지배를 문제삼는 역사인식을 「반일사관․자학사관」 등의 말로 비난하고, 일본만을 악당으로 만드는 「동경재판사관」, 좌익적인 역사인식의 「코민테른 사관」을 공격하면서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제창한다.

  특히 역사교과서를 「너무나 무시무시한 암흑사관, 자학사관, 반일사관의 온퍼레이드」「일본의 근현대사를 오욕에 찬 것처럼 묘사하는, 악의적인 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대상으로 삼고, 스스로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를 우익적 논조의 『산케이(産經)신문』에 연재하고 그것이 잇따라 책으로 간행이 되고 있다. 요컨대 그는 일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라인지를 말하고 메이지(明治) 이래의 근현대사를 찬양하고 「공교육은 아이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96년에는 후지오카 씨 이외에도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국민의 역사』의 저자),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만화가) 등 「자유주의사관」파의 중심인물들이나 우파학자, 재계인, 문화인, 연예인 등 약 200명이 참가해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그 목적은 「일본의 근현대사 전체를 범죄의 역사로 단죄하는」현행 교과서를 비판하고 차세대가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인데, 당면의 목적은 특히 「위안부」문제를 표적으로 삼아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위안부」문제는 일본민족의 긍지를 몹시 손상시키는 것이며 「위안부」들의 요구에 따라 97년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여덟 권 모두에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들어가게 된 것에 반발한 것이다.

  「위안부가 강제연행된 증거는 없다」「당시는 공창제도가 있었으며 위안부는 매춘부로서  상행위를 했던 것이다」「중학생에게 위안부문제를 가르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등의  주장을 하는 후지오카 씨 등은 전국의 지방의회에서 삭제결의를 하게 하는 캠페인 등 「위안부」=매춘부 설을 널리 침투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주효해서 다음 검정 때에는  여덟 권의 교과서 중 다섯 권이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삭제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위안부」공격의 선전에 가장 공헌한 「자유주의사관」파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다. 그는 잡지『SAPIO』의 「고마니즘 선언」이라는 연재만화에서 후지오카 씨 등의 주장을 젊은 세대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것을 단행본으로 엮은 『전쟁론』은 예전의 침략전쟁을 서구식민지지배에서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묘사하고 군인의 훌륭함이나 특공대를 찬미해서 공(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호소하고, 「위안부」문제 등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전쟁으로 고생한 할아버지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위안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그렇게 되었거나 아니면 가난한 부모가 돈 때문에 딸을 팔았다 등의 말로 「위안부」=매춘부 설을 주장하는, 역사를 더 이상 심하게 왜곡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형편없는 만화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책이 몇 십 만 부나 팔려서 젊은 세대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 서점에 산처럼 쌓여 있는 역사관계 책은 후지오카 씨를 비롯해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책 등 대부분이 자유주의사관파의 것이다. 요즘 가장 높이 쌓여 있는 것은 이 그룹의 또 하나의 키퍼슨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회장인 니시오 간지 저『국민의 역사』이다. 작년 출판된 800쪽 가까운 이 책은 고금동서의 문명 등에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찬양하고 과거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고금동서 어느 민족이든 하고 있다고 자민족의 악행을 상대화하고 소거하고 왜곡하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으로 일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일한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장은 「일한문제를 생각하면 유쾌한 기분이 든 적은 한번도 없다」는 첫머리 문구로 시작되고, 한국인은 자진해서 군대에 들어간 것이며 일본이 강제로 몰고 갔다는 것은 일방적 기술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큰돈을 투자해서 근대화하고 교육을 보급시키고 철도나 항만이나 공장을 건설해서 공업화했다, 「위안부」에 관해서는 「이 십 만 명의 처녀를 총검을 가지고 강제연행해서 전지에서 매춘부로 만들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밝혀졌다. 이런 안건에 대해서는 단호히 항의하면서 바로잡도록 투쟁하겠다」고 씌어져 있다.

 정면으로 반론할 가치조차 없는 이런 조잡한 내용의 책인데도 벌써 칠 십 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일본인은 훌륭하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구미가 더 나쁘다는 식의 단순한 내셔널리즘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것으로 특히 근현대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 젊은 독자를 매료하는 것이다.

 침략전쟁도 식민지지배도 정당화하는 이런 국가주의자들이 기고하는 『제군(諸君)!』이나 『정론(正論)』 등의 잡지는 총합잡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판매부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이 아니라 일간지도 부수 세계1위인 『요미우리 신문』이 「자유주의사관」을 공공연히 지지해서 헌법개정의 급선봉이 되어 있다. 그것의 영향을 받고, 우익이 눈엣가시로 여겼던 『아사히(朝日) 신문』에까지 「자유주의사관」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쟁긍정의 우익언론이 이미 주류 미디어에 파고 들어가 여론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사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2.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피해 온 전후의 일본

 「자유주의사관」 같은 내셔널리즘의 급속한 대두는 일본이 패전 당시 군국주의 일본과의 단절을 피하고 대일본제국의 전전과 연속된 세력을 존속시킨 채 전후의 출발을 했었던 것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에 대한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몰린 일본의 지배층은, 천황도 각료들도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 유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삼 백 만 명의 국민이 죽음에 몰리고 전국은 초토가 되고 식량도 궁박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허덕이던 국민 같은 것은, 그들은 돌이켜보지도 않았다(吉田裕『쇼와천황의 종전사(終戰史)』). 그리고 점령군이 상륙하고 포츠담 선언에 있는 전범처벌을 실시하기 위한 동경재판의 준비를 시작하자, 천황은 전쟁책임을 지기는커녕, 천황자신이 무죄론을 주장해서 전범이 되기를 피하려고 했다.

  한편 연합국측은 미국 내의 여론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가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해야 된다고 해서 전범리스트에 포함시켰는데도 미국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그를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동서냉전이 이미 시작되었고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생각한 맥어더 점령군 사령관은 천황을 전범으로 하면 일본인의 노여움이 폭발해서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백 만 명의 군대를 일본에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의 국익 때문에 천황을 면책했다. 그리고 동경재판에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을 오로지 도죠(東條) 이하의 군부에 씌우기로 했다(山田朗『대원수(大元帥) 천황』).

 이래서 대일본제국헌법 아래 육해공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고 아시아 태평양전쟁 개전이나 작전에 관여했던 천황의 전쟁책임은 일미 지배층의 결탁 덕택에 동경재판에서 추궁되지 않았고, 천황은 신 헌법 아래의 상징천황제로 인해 그대로의 자리에 눌러 앉았다. 그 결과 구 일본군 장병들은 「천황의 명령을 받고 했다」고 자기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얻었다. 실제로 동경재판 후에 일본정부는 전범을 단 한 명도 재판에 걸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전범 중 몇 명은 각료가 되고 A급 전범의 한 사람은 수상이 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전범을 포함한 구 군인의 사자들을 야스쿠니신사에 군신(軍神)으로 모시고 각료들이 헌법에 위반하면서 공식 참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범을 포함한 구 군인과 유족들은 거액의 군인연금을  받아 왔으며 정치가들이 구 군인유족 관련단체의 간부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민당 정권을 지탱하는 역할을 다해 왔다.
  일본의 전후국가로서는, 패전국으로서의 배상은 지불했지만 침략전쟁이라는 전쟁범죄, 인도적인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법적 또는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전혀 없었다. 80년대에 교과서 검정에서 「침략」이라는 말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고 「진출」로 변경시킨 것도 정부의 그러한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 피해국에서의 항의로 몇 번 되풀이한 사죄도 결국은 립 서비스에 불과했으며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과거를 긍정하고 예찬하기까지 하는 망언을 계속해 온 것이다.

「침략전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수상, 1978년
「후세의 사가의 판단을 기다린다(침략이냐 진출이냐는 질문을 받고)」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수상, 1982년
「일한합방은 양국의 합의, 한국측에도 책임」후지오 마사요키(藤尾正行) 문부대신, 1986년
「후세의 사가의 평가에 맡겨야 할 문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1989년
「일본인은 천황을 중심으로 신도(神道)로 단결」오쿠노 세이료(奧野誠亮) 국토청 장관, 1988년
「식민지를 해방하는 전쟁목적은 정당. 남경사건은 날조」나가노(永野) 법무대신, 1994년
「한국병합조약은 무효하지 않다.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에토 다카미(江藤隆美)총무청 장관, 1995년
「전쟁의 목적․성격을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수상, 1996년
「(위안부는) 나라가 강요한 적은 없었다. 상행위에 참가한 사람들이다」오쿠노 세이료  전 법무대신, 1996년
                            『일본국 정치가 망언사전』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이런 사람들이 정치의 우위를 잡아 온 것이 전후일본국가이며 그것을 허용해 온 일본인도 역시 전후책임을 엄격히 추궁될 것이다.

  침략전쟁이었다고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법적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국가는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예외적으로 대만인 옛 일본병에게 한 사람 당 이 백 만 엔의 조위금을 특별입법으로 지불했을 뿐이다. 그래서 여덟 건의 「위안부」소송을 비롯해 한국․조선BC급 전범, 남경학살사건, 731부대, 강제연행․노동, 포로 등 마흔 건 이상의 전후보상청구소송이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되어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나온 판결은 재판소가 국제법은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나라의 견해에 보조를 맞추어 대부분의 원고의 소송을 각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중전쟁 이래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으로 일본군이 범한 범죄에 대한 전쟁책임도, 그런 범죄에 대해서 일본이 국가로서 져야 할 처벌의무나 보상의무 등 전후책임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스트 전후국가의 방향을 생각하려고 할 때, 국가로서의 이런 책임을 어떻게 다하느냐, 다하게 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을 방해하는 내셔널리즘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 한층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III. 포스트 전후국가로의 대안을 찾아서

1. 호헌평화의 전후민주주의세력의 소장(消長)

  전후일본의 세 가지 원리 중 세 번째인 호헌평화원리는 전후민주주의세력이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의 참화로 일본인 자신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경험 때문에 평화를 찾게 되고, 군국주의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서 민주주의를 찾게 되고, 평화헌법으로 인한 비무장중립의 민주적인 나라 만들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공통목표를 내건 전후민주주의세력은 공산당과 사회당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여러 가지 대중적 사회운동―평화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등이 조직되고 주류인 친미반공일미원리에 저항하는 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60년의 안보반대투쟁을 최대의 고비로 해서 사공(社共)대립이 이들 운동 속에서 첨예화되고 대립과 분열이 심각해졌다. 또 상위하달의 동원형식의 조직중심적 운동스타일이  문제시되게 되고, 또 국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국주의적 발상의 한계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70년대에 접어들어 사공중심의 구 죄익의 운동은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고 베트남 반전운동 등의 운동 속에서 신 좌익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노조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통일의 정치 슬로건으로 대중이 참가한다는 형태의 운동과는 다른, 개별 테마의, 지역에 뿌리를 내린 나름대로의 운동이 전국각지에 태어났다. 특히 경제의 고도성장에 수반해서 심각해진 공해는 최대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미나마타병(水俣病) 등의 유기수은중독이나 욧카이치(四日市, 지명)의 대기오염 등의 예로 알 수 있듯이 환경파괴만이 아니라 주민의 건강피해가 악화된 것이다. 그 결과 공해반대투쟁,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 등 지역주민으로 의한 여러 가지 반 개발투쟁이 전국각지에서 활성화되고 서로 연계를 가졌다. 대부분이 풀뿌리 차원에서의 무당파적이고 자립한 운동이었으며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도 특색이었다. 그것은 지역민주주의을 마들고, 혁신계  수장이 선출되고 혁신 자치체가 잇달아 탄생하는 등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70년대의 또 하나의 특색은 구 좌익의 민주주의세력이 하지 못했던, 국경을 넘은 자주적 연대운동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의 극심한 공해반대운동으로 정부는 기업에 의무적으로 공해방지대책을 세우게 했기 때문에 공해공장을 이웃 아시아 여러 나라로 옮기는 ‘공해수출’이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자기 나라 환경만 지키고 공해를 아시아 사람들에게 넘기면 안된다」면서 아시아 사람들과 협력을 가지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또 저임금노동을 겨냥한 일본기업의 해외진출도 본격화되어서 아시아 각국에서 일계기업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태국 등지에서 반일운동이 퍼졌다. 그것을 이어 받아 일본에서 태국에 관여하는 그룹이 생기는 등 일본의 경제면에서의 가해성을 문제 삼게 되었다.

  일본과 아시아의 문제에 관여하게 된 이런 일본 사람들이 74년에 처음 아시아에서 활동가를 초청해서 아시아인 회의를 열고 일본의 경제침략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아시아의 풀뿌리 민중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의 구 좌익 민주주의세력이 60년대에 이웃나라 한국에서의 4월학생혁명에도 한일조약반대운동에도 관여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나와 70년대에 일본정부가 박 독재정권을 경제협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민주화운동지원이나 정치범 구원운동 등 민중차원의 일한연대의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었다.

 평화운동도 ‘노 모어(No More) 히로시마․나가사키’를 기조로 한 피해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 70년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사람들과의 연계가 생기고 일본의 가해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평화운동이 다양화되었다.

 하지만 경제의 고도성장이 풍요로운 사회를 출현시키고 전체적으로는 현상유지를 하려는 분위기가 일본사회에 퍼졌기 때문에, 노동운동도 학생운동도 그 밖의 사회운동도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급속히 약체화되었다.

2. 여성운동의 역할―여성차별반대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까지

 일본을 비 군국주의화하기 위한 미국 점령군의 정책의 주요한 기둥의 하나가 여성해방이었다. 그들은 헌법에 남녀평등을 명기하고 부인참정권을 보증하는 등의 정책을 취했다. 전후의 여성운동은 그런 배경 속에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회운동과 같이 정당계열별의 여성단체가 생기고 노조 여성부도 그 영향하에서 어머니 운동이나 보육소 만들기 등의 운동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70년대에 미국의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이나 신 좌익의 흐름과도 합치해서 정당의 지배를 받는 전국적 여성조직의 운동과는 다른, 당시  ‘우먼 리브’라 불린 새로운 페미니즘의 작은 그룹이 전국에 생겼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남녀평등 등 제도적 조건 만들기에 중점을 둔 종래의 여성운동을 비판하고 가부장제를 문제삼고 의식혁명을 시도하고 공적인 자리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이나 성 등을 둘러싼 여성차별을 파헤치고 젠더의 역할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했다. 일본의 경제는 여성차별로 인해 남성보다 값싼 임금노동력으로서  여성을 이용하면서 성장해 왔는데, 그 여성차별에 대한 도전은, 남성중심, 기업중심사회라는 일본의 존재양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따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종래의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 등에 깃들어 있는 남성중심사상, 여성멸시도 당연히 날카로운 고발의 대상이 되었다. 구 좌익의 사회운동이 조락된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이런 여성차별적 구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여성차별적 사회구조나 문화총체를 근원적으로 다시 문제삼으려고 한 새로운 여성해방운동도, 80년대에 접어들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여성학이 활발해짐에 따라 오히려 당초의 사회변혁, 의식변혁의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여성의 지위는 경제발전과는 너무나 큰 갭이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도는 다른 여러 선진국과 비교해도 극단적으로 낮고 정치, 경제, 학계, 미디어 등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책결정의 자리에서 여성들이 소외당하고 있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95년의 북경세계여성회의에는 일본에서 무려 오 천 명이나 되는 여성이 참가해서 힘을 얻고 귀국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새로운 과제가 되고 가정내 폭력과 씨름해서 전국각지에 피난처 또는 상담센터를 열거나 직장 또는 대학교 등에서의 성희롱 소송을 제기하거나 하면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또 글로벌화가 여성노동에 타격을 주고 있어 조직개편으로 인한 해고나 파트타임 등 불안정 고용으로의 전환 등의 문제 때문에 일하는 여성들이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대항하고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성을 둘러싼 여성의 인권문제다. 포르노에서 주간지나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제발전과 기업중심의 경쟁사회가, 거기서 관리되고 소외된 남성들의 스트레스 해소 장치로서의 성 산업의 비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필리핀 연예인이나 태국에서 인신매매조직이 보내온 여성들이다. 이런 여성은 십 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폭력, 감금, 협박 아래 매춘을 강요당하는 등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마쯔이 야요리『여자들이 만드는 아시아』)

 일본남자들의 의한 아시아 여성의 성적 착취는 60년대 대만에서 시작하고 70년대에는 한국이나 필리핀, 태국에 퍼졌다. 기생관광에 항의하는 한국여성들에 호응해서 일본여성들이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조직하고 그것이 70년대 중반의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 결성에 이어졌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도 국내지향적이었지만, 이 그룹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가해적 관여를 여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활동을 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여성들과도 연대운동을 계속하고 광주사건 희생자의 추도집회를 매년 열기도 하고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섹스투어 반대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남성이 매춘관광으로 찾는 여러 나라에서 여성들이 일본의 성산업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신매매의 피해자인 태국여성의 구원활동 등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90년대 전반, 너무나 가혹한 성노예의 상태에서 도망치려고 한 태국여성이 업자를 죽이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피고인인 태국여성들을 위한 지원활동도 전개되고 있다.

   현대의 성노예제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옛날의 일본군 성노예제에 관해서도 90년대 초에 피해여성이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하면서 일본각지에서 여성들이 「위안부」문제의 그룹을 만들어 각국의 피해여성들이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재판의 지원활동을 해 왔다. 98년에 결성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VAWW-NET Japan)는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보상만이 아니라 책임자처벌도 필요하다는 피해여성들의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20세기 마지막 달인 2000년 12월에 동경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여섯 개 피해국과 함께 개정(開廷)한다.

  그 목적은 우익측에서의 「위안부」는 「돈벌이하는 매춘부였다」 등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위안부」제도가 여성에 대한 폭력, 전쟁범죄였음을 밝히고 일본정부가 법적 책임을 지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전시성(戰時性) 폭력의 불처벌의 순환을 끊고 재발을 막고 폭력이 없는 21세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전후 반세기 가까운 침묵을 깬 「위안부」들의 용기가 세계각지에서 무력분쟁하에서의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말살하려는 가해자측의 의도를 저지하고, 그야말로 피해여성과 지원여성이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 군사화가 아닌 민주화로의 움직임―안전보장을 다시 묻는다

 최근의 군사화의 움직임에 가장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여성들이다. 거대한 미군기지가 집중되는 오키나와에서는 여성들은 늘 미군에 의한 강간 등의 성폭력 피해를 당해 왔다. 95년에 열 두 살 소녀가 세 명의 미군에 의해 집단강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 여성들은 세계를 향해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기지․군대를 허용하지 않는, 행동하는 여자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기지는 일미안전보장조약에 기반을 둔 것인데 「여성이나 아이들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안전보장이란 무엇인가」하고 안전보장 자체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문제삼은 것이다. 그 후 한국, 필리핀, 미국 등의 여성들과 함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 여성 네트워크」를 결성해서 미국정부에 기지철회를 요구해 왔다.

 7월의 G8정상회담을 앞두고 「안전보장을 재정의(再定義)하는 국제여성서밋」을 오키나와에서 개최해서 한국에서 기지문제와 싸우고 있는 여성 22명, 미국에서 14명, 필리핀 3명을 포함해서 100명 가까운 여성들이 기지가 일으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 환경파괴, 아메라시언 등의 심각한 문제를 서로 보고했다. 그 결과 환경이 보호되고 사람들에게 의식주가 확보되고 각기의 문화가 존중되고 재해나 폭력 등의 위험에서 보호되는 것이 안전보장의 조건이며 그것은 국가에 의거하지 않는 비군사적, 비폭력의 안전보장이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기지철거, 군사비 삭감 등을 강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이것은 바로 일미 가이드라인 체제에서 일본전체가 군사화되는 것에 대한 정면으로서의 저항이며 미국의 세계군사지배에 대한 항의이다.

 그 일주 후 오키나와에서 「민중의 안전보장 오키나와 국제포럼」이 개최되어 아시아 태평양 열 개 나라가 참가했다. 일본과 세계의 대안적 미래를 구상하기 위해 연구자나 활동가가 만든 피플즈 플랜 연구소와 방콕에 본부를 둔 포커스 온 더 글로벌 사우스(Focus on the Global South)라는 NGO의 공동주최로 민중의 안전보장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오키나와 민중의 미군이나 기지와의 싸움이 비 폭력투쟁을 관철한 전통에 배우고, 군대는 자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죽인다는 오키나와전(戰)이나 아시아 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나 군대에 의거하지 않는 비 군사적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이 즉시무조건철퇴하도록 요구했다. 또 민중간의 대립이나 폭력을 일으키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원리주의를 극복하고 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글로벌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국경 기타의 경계를 초월한 민중의 연합, 네트워크 만들기를 호소했다.

  글로벌화와 국가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 속에서 미국에 참전하는 군사대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거기에 사는 자라면, 일본인이든 소수파인 외국인이든, 억압과 폭력이 악화되는 것에 공포심을 느끼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일본이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지지 않았던 만큼 언제 다시 그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한층 더 강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까.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이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확실히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전국각지에서 그것을 위해 날마다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연대하고 민주적인 포스트 전후국가를 구축했으면 한다.

출처 : 계간 황해문화 2000년 가을호(통권 제28호)

-------------------------------------------------------------------

일본 내에서 평화운동, 여성운동을 꾸준히 해오던 마쓰이 야요리 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2000년 여름, 이맘 때였다. 요사이 청탁이란 것이 인터넷 이메일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지만, 보수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문제에 대한 특집을 꾸미던 중 당신의 글을 받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 문제로 글을 쓰는 이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컸다.

들리는 소식에 그 당시에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았는데, 잡지쟁이들이 늘 그렇듯이 일단 원고를 받은 뒤에는 다시 원고 청탁 들어가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한다. 얼마전 시인 박영근의 죽음 역시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런데 마쓰이 야요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너무 늦게 들었다. 그것도 2002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니 이미 4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다. 위에 실린 원고는 처음 번역 상태 그대로 날 것이기는 하지만 원고 본문 중에는 당신이 쓴 책의 제목이 나와 있다.

작년 8월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 책이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늦었다.

 

 

 



여성이 만드는 아시아
마츠이 야요리 지음, 정유진. 미야우치 아키오 옮김 / 알음(들린아침) / 2005년 8월

좋은 사람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다. 이 책은 그녀가 직접 아시아를 몇 년동안 취재하며 발로 쓴 글이자 동시에 그녀 자신의 평화와 차별받지 않는 여성을 생각하는 가슴으로 쓴 글이기도 하다. 마쓰이 야요리 선생은 1934년 4월 12일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2002년12월 27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1961년 동경외국어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복지, 공해, 소비자문제, 여성 문제를 주로 취해했다. 1994년 아사히신문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언론인으로서 살았고, 아사히 신문 퇴직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일본 사회내에서 여성운동, 시민운동의 여러 조직을 설립하고, 대표로 활동했다. 그녀는 2000년 12월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했고, 일본측 주최자의 대표로 일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음사 40주년을 바라보는 문화계의 시각
인문학의 산실 … 지나친 상업화 아쉬워

2006년 06월 07일   신정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 함께 민음사의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종호 연세대 교수는 “어려울 적에 출판업을 시작해 문학출판을 궤도에 올렸고, 40년간 유지시켰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음사에 대한 평가는 90년대 중반 이후 엇갈린다. 인문학적 본령을 지켜왔던 민음사가 90년대 이후 상업화의 길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문열의 ‘삼국지’, ‘드래곤 라자’(1998),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2000)로 많은 매출을 올렸음에도, 비슷한 시기 ‘대우학술총서’를 종간하고 지성인의 담론지였던 ‘현대사상’을 3년만에 폐간 했으며, 이문재나 나희덕의 시집이 절판돼 다른 출판사로 발행하게 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출판평론가 박천홍 씨는 “다각화되는 출판시장의 흐름과 동향을 누구보다 일찍 간파한 것은 인정하지만, 기존의 정체성에 신뢰를 보낸 독자들은 아쉬웠다”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편집위원은 ‘민음사만의 일은 아니겠지만’이라는 칼럼에서 “연간 매출 3백억대에 이르는 대형출판사가 경제적 타산으로 시집을 살해한 것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문학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측면에서 어색하기도 하고 독실한 시장숭배로 키웠을거란 생각에 걸맞아 보이기도 한다”며 이는 “민음사의 부끄러움이자,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부끄러움이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학자발굴이 예전보다 많이 덜해진 느낌이라는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상업과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있는 출판사인만큼 외국이론을 수용·소개하는 차원을 떠나 보다 견고한 인문학적·자생적 이론의 산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다.


출판사는 문화사업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하는데, 그 중심에는 인문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말한 어느 주요 일간지의 한 기자는 “분화되기 전에는 자유주의적 노선에 입각한 인문학적 정신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아예 발벗고 돈벌이에 나선 것 같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같은 비판은 지난해 홈쇼핑 진출과 박상순 대표의 퇴임으로 더해졌다. ‘세계문학전집’을 홈쇼핑에 내놓고 수십억원의 매출을 한꺼번에 올렸지만, 출판시장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 인터넷서점보다 훨씬 높은 할인율과 사은품은 고객에게 도서정가를 불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며, 막강한 자금력으로 중소출판사의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출판협회 회장사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자제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구본준 한겨레신문 기자는 “출판사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문화적 가치와 수익창출 가치의 균형을 갖추기 위한 시행착오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쓴소리들은 ‘그래도 민음사라면’이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도 민음사라면 손해보는 인문학도, 오역·오타를 엄정하게 걸러내야 한다는 게 독자들의 바람이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2006 Kyosu.net
Updated: 2006-06-07 22:50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6-06-0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본 사람이라면, 특히 그가 교수나 사회 저명인사가 아니라 무명인사라면, 민음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아니 어떤 "회사"인지 잘
경험했으리라 본다. 민음사를 신뢰하고 애정을 가지는 독자들도 많더라만 ...

balmas 2006-06-0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렇죠. 민음사라면 당연히 그렇게 얘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뭐,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오래된 인문학 출판사들이 M&A를 당하고
거대 자본에 종속되는 상황인데 ...

헤르베르트 2006-06-08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뭔가 오프 더 레코드가 있음이 암시되는 군요^^;

balmas 2006-06-0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기인 2006-06-08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민음사와 과일 때문에 여러번 부딪친 적이 있는데.. 쩝.. 참 피곤했어요.
박상순 시인이 대표직을 사직하고 퇴사한 이유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국문학 관련하여 강화시키자는 주장이 안 먹혀서라고 하네요.

2006-06-08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09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그랬군요. 음 ...
속삭이신 님/ 예, 그 분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