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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이 왔다갔구나.

내가 2박 3일간 워크숍 다녀오느라고 답변이 좀 늦었다.

네 질문은 결국 라틴어 접속사인 "ac"의 용법으로 집약되는 것 같은데,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ac"나 "atque"는 비교의 대상이 되는 두 가지 항목을 연결하는 접속사야. 그래서 ac나 atque는 항상 두 항목에 대한 지시를

포함하고 있지. 무슨 말이냐 하면, 문제의 2부 정리 7의 경우 "ac"라는 접속사가 쓰였다면, 이것은 앞에 나오는 항목,

곧 "Ordo & connexio idearum"과 뒤의 항목, 곧 "ordo & connexio rerum"이 "ac"을 통해 서로 비교되고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야. 이 문장에서 비교의 내용은 당연히 "idem est", 곧 "[A는 B와] 같다"는 것이고.

따라서 "ac"라는 접속사에서 앞뒤의 절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여기서 쓰인 "idem est ac"라는 말을 불어로 번역하면 "~ est le meme que ~"이야.

그리고 영어로 번역하면 "~ is the same  as ~"가 되고.

또 독일어로 하면 "~ ist dieselbe wie ~"가 돼.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2부 정리 7의 번역에서 혼란이 생길 염려는 없겠지.

 

논문 열심히 쓰고, 나중에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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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시는지?

 

요즘 형의 학위논문을 잘 읽고 있어요.

번역(나아가 해석의 문제가 되겠지만)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형 논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에티카 2부 정리 7의 번역을 형은 이렇게 제안했는데(논문 97쪽 이하)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Ordo & connexio idearum idem est, ac ordo & connexio rerum.

스피노자 전체 맥락을 모른 채로 질문하는 거여서, 혹시라도 무식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는데, 암튼 용기를 내자면...

문장에서 ",ac" 부분 말야, 이게 도무지 해독이 안 된단말야.

사전을 찾아보니까, 그 단어는 atque와 동의어로 나와 있고, 그 뜻은 아래와 같더라고.

 conj. a copulative particle, and also, and besides, and even, and (indicating a close internal connection between single words or whole clauses; while et designates an external connection of diff. objects with each other, v. et; syn.: et, -que, autem, praeterea, porro, ad hoc, ad haec).

(참고: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4.0059%3Aentry%3D%234276)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는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관념들의] 질서와 관념들의 연관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실재들의] 질서와 실재들의 연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질문의 핵심은 '질서ordo와 연관connexio' 또는 '질서와 관념들의 연관connexio idearum 또는 실재들의 연관connexio rerum'의 동일성에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지.

나아가, 논문 100쪽에서 인용하고 있는 E II P7s에서도 unum eundemque ordinem, sive unam eamdemque causarum connexionem은 "하나의  동일한 질서, 즉[=부연 설명으로서의 sive] 원인들의 하나의 동일한 연쇄"라고 볼 수 있고, E III P2s에서도 ordo, sive rerum concatenatio una sit은 "질서 즉 실재들의 연관은 하나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해서 말이야.

이런 식으로 본다면, 질서ordo에 대한 여러 가지 부연 설명으로서 형이 인용한 세 대목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이런 번역의 차이가 전체 텍스트 해석에 끼치는 영향이 어떨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고, 이런 번역이 그냥 문법적으로 타당한가 여부를 묻는 거야. 혹시 스피노자 철학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내가 제안한 번역이 타당한지 여부만 짤막하게 검토해 줬으면 해.

난, 논문 쓰고 있으니, 무척 바쁜데, 좀 더 여유롭게 형 논문 읽고 싶지만, 바삐 가느라 음미할 시간은 부족하네. 추운데, 건강 조심하고...

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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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5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2-1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니 몸이 안좋으신가봐요. 쩝 ;;; 몸도 않좋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천천히 읽다보면 언젠가 조금씩 이해가 되겠죠. :-)

2008-02-1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2-20 23:45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황종연 씨가 그렇게 번역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틀린 거라기보다는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옮겼겠죠. ㅎㅎㅎ 그 질문은 저보다는 황종연 씨에게 해야 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

2008-02-26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원 형,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양 선생님도 잘 계시고 따님도 무럭무럭 자라는지 궁금합니다. 타향에서 설을 맞아서 좀 쓸쓸할지도 모르겠는데, 새해에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공부에도 많은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최원 형이 좋은 문제제기를 해주셨네요. 질문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라틴어 “intelligendum”, 동사원형으로 하면 “intelligere”의 번역에 관한 문제지요. 제가 이 동사를 “파악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이 동사가 지닌 인지적 의미를 조금 더 부각시켜 보자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동사는 간혹 “이해하다”(영어로는 understand, 불어로는 “entendre”나 “comprendre”)로 번역되곤 하는데, 알다시피 지난 19세기 말 이후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에서 “이해”와 “설명”은 늘 대립되는 개념쌍으로 제시되어왔죠.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해”라는 개념 내지 용어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앎의 양식을 뜻하겠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런 방법론 논쟁의 맥락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논쟁과 상반된 입장에 서 있는 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죠. 따라서 저로서는 intelligere라는 용어를 “이해하다”라고 번역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파악하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이 점에 관해서는 마슈레의 생각을 많이 따른 셈이죠).

그 다음 두 번째 질문은 “percipere/perceive”와 “intelligere/understand” 사이의 관계와 차이에 관한 것이죠. 우선 이런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피노자에서 “percipere/perceive”라는 용어는 상당히 의미가 넓은 편입니다. “의미가 넓은 편”이라는 말은, 이 용어가 반드시 “감각 지각”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 부적합한 인식이나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 스피노자에서 “percipere/perceive”와 “concipere/cenceive”는 거의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몇 군데에서는 “percipere, sive conciper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해서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스피노자 자신이 {윤리학}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perceptio”와 “conceptio”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전자는 “정신이 대상으로부터 수동적인 영향을 받는 반면”, 후자는 “정신의 작용/능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지요. 실제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살펴보면 “percipere”의 경우는 늘 표상적인 측면, 곧 어떤 대상에 대한 표상이나 인식이 명석판명한지 아닌지, 또는 적합한지 아닌지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부 정리 29의 주석에 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percipere”로, “내적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intelligere”로 쓰고 있는데, 이러한 용법은 다음과 같이 부연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항상 신체의 “affectio”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affectio”가 외부 물체의 작용에 대한 영향을 함축하는 한에서 인식은 늘 수동적인 표상/지각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죠. 이것은 2부 정리 29의 주석에 나오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잘 보여주는 경우겠지요. 그런데 두 번째, “내적으로 규정되는” 경우에 정신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지각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수의 표상들을 비교, 고찰한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경우와 같은 단편적이고 고립적인 인식의 상태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대상들, 표상들에 대한 지각에 기초를 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이러한 다면적인 비교, 고찰을 통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적합한 인식, 능동적인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은 이 점을 감안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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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2008-02-0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도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으로부터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으로의 전환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이 상상적 인식이라는 점에는 여전히 선뜻 동의가 안되는군요. 저에게는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이 common notions를 말한다는 것도 아주 명료하진 않습니다. common notions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은 언제나 1종과 2종 사이의 미분으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결정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거나, 또는 오히려 1종과 2종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됩니다. ommon notions를 어느 한 쪽에만 귀속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항상 어떤 곤란을 갖게되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의 눈에는 더욱 더 스피노자가 perceive와 conceive를 혼용하면서 common notions를 묘사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예전에 토론을 하고나서 나름대로 저도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곤 하는데, 아직 가설적이기는 하지만 common notions를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부 정리 38의 corollary에 보면 "there are certain ideas or notions common to all men"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전부터 느껴온 것이지만 이 문제는 참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답변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늘 건강하시고 올해도 많은 좋은 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배님이 쓰신 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해서 글을 남깁니다. 역시 common notion에 관한 것인데요, 선배님 논문 "공통통념 개념 I" 마지막 부분 쯤에 보면 선배님께서는 {윤리학} 2부 정리 29의 주석을 해석하시면서,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과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의 구분을 universal notion과 common notion의 구분에 연결시키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저도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이를테면 일면적 지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다면적 지각"으로 말씀하신 부분에서 조금 망설여집니다. 문제의 주석을 보면,

I say expressly that the mind does not have an adequate knowledge, but only a confused and fragmentary knowedge, of itslf, its own body, and external bodies whenever it perceives things from the common order of natre, that is, whenever it is determined externally--namely, by the fortuitous run of circumstance--to regard this or that, and not when it is determined intrnally, through its regarding several things at the same time, to understand their agreeement, their ifferences, and their opposition. For whenever it is conditioned internally in this or in another way, then it sees things clearly and distinctly, as I shall later show.

여기서 스피노자가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지각(perception)과 연결시킨 것은 맞지만,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은 오히려 이해(understanding)에 연결시킨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는 understand에 해당하는 저 말을 논문에서 계속 '이해하다' 대신 '파악하다'로 옮기셨는데, 어떤 특별한 사유가 있는지요? 전 라틴어를 아직 모르지만, 해당 부분 라틴어본을 봐도 외적 인식은 percipit으로, 내적 인식은 intelligerum으로 적혀있어서 영어본 번역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불어서, 선배님께서는 다면적 지각으로서 공통된 성질을 인식한 결과로서의 common notion은 다면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것이 '지각'인 한에서 상상적 인식에 속한다고 보시는 듯이 여겨졌습니다. 제가 맞게 읽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더욱 더 intelligerum을 어떻게 번역할까가 중요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common notion에 관한 {윤리학} 2부의 두 정리(38과 39)를 보니, 38에서는 '인식하다(conceive)'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38의 증명에서는 'perceive"와 'conceive'가 각각 한 차례 사용되었고, corollary에서는 다시 'perceive'가 사용되었군요. 39와 그것의 증명에서는 두 단어 모두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corollary에서는 'perceive'가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만 놓고 보면, 정확히 common notion이 perception(지각)에 속하는지, 아니면 conception(즉 concept와 관련된 인식/관념) 또는 understanding(이해)에 속하는지가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선배님 생각을 좀 들어보고 싶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질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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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이 좀 늦었지? 다른 일 때문에 이제야 답변을 올리게 됐다. 이해해라.

이번에도 꼼꼼히 읽고 지적해줘서 고맙구나. 푹 쉬고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읽고 지적해주기 바란다.


우선 113쪽은 “시대”라고 해도 좋고 “시간”이라고 해도 좋은데, 데리다가 첫줄부터 “시간temps”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웬만하면 temps이라는 단어는 “시간”이라고 계속 번역하는 게 좋을 듯해서 이렇게 번역했어.


119쪽-120쪽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고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을―이론적ㆍ실천적으로―다루고, 이로써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 도식들과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수정 번역 “오늘날 이 문제들을―이론적ㆍ실천적으로―다루고, 이로써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과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22쪽과 124쪽의 경우는 네가 지적한 대로 고치는 것이 옳을 것 같고,


129쪽의 경우는 원문은 이렇지. “(mais il n'y a plus, il n'y a jamais eu le capital, ni le capitalisme,(A) seulement des capitalismes(B)―d'État ou privés, réels ou symboliques, toujours liés à des forces spectrales ...

그리고 내 번역문은 다음과 같고. “하지만 결코 자본 그 자체le capital, 자본주의 그 자체le capitalisme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했던 적도 없으며, 단지 국가적이거나 사적인, 현실적이거나 상징적인, 하지만 항상 유령적인 힘들과 연결되어 있는 자본주의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

영역본에서 “단수의 자본주의”와 “복수의 자본주의들”이라고 번역했다면, 그건 밑줄 친 (A)와 (B)를 각각 그렇게 번역한 셈인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le”라는 정관사가 “단수”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데리다가 “le”를 일부러 강조한 것은 단수를 나타내기보다는 “본질”이라는 의미 또는 “그 자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 같아. 말하자면 “le capitalisme”이 이데아 내지 형상, 본질이라면, “des capitalisme”은 그것들을 예시하는 개체들, 개별태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데아로서 형상, 본질로서 자본주의라는 것은 없고, 단지 구체적인 개별 자본주의들, 또는 자본화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요점일 텐데, 단수-복수라는 대비로는 이런 논점을 살리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130, 134쪽의 경우도 네가 지적한 것이 옳은 것 같아. :-)


138쪽의 경우는 빠진 내용이 “Longtemps et pourquoi pas toujours?”인데, 이건 “왜 영원히가 아니라 오랫동안인가?”(A)라고 하기보다는 “오랫동안, 하지만 항상이라고 해서 안될 것이 있겠는가?”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다. 만약 (A)의 뜻이라면, 데리다가 바로 다음에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할 텐데, 데리다는 그렇게 하지 않고 끝을 맺지. 따라서 “pourquoi pas toujours?”는 “왜 영원히는 아닌가?”라는 질문을 가리키기보다는 “항상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이 있겠는가?”라는 수사의문문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을 것 같다. “pourquoi pas?”의 관용적인 어법을 고려해봐도 그렇고.


140쪽은, 네가 제안한 것처럼 “만이 아니라tout autant que” 앞 뒤 구절의 순서를 바꾸는 게 좋겠구나. 이렇게 바꿔야겠지.

“항상 지켜질 수 없는 약속. 왜냐하면 적어도 이 약속은 익명적인 독특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셈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주체적인 평등만이 아니라 타자의 독특성 무한한 타자성에 대한 무한한 존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3쪽의 “초역사적인 기준들의 본성”을 “초역사적인 기준들의 자연”으로 번역하는 것은 좀 어색할 듯하다. “nature”라는 말에는 항상 “본성”과 “자연”의 의미가 함께 함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본성”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에 더 좋을 것 같다.

 

343쪽 각주에서 강조된 부분은 “약한schwache”이라는 단어인데, 그게 빠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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