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음식문화사 - 무엇이 독일을 독일답게 만드는가
우어줄라 하인첼만 지음, 김후 옮김 / 니케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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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근대까지 독일이 굶주림에 대처하고 주변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을 누리기까지의 과정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개인과 정부가 기아에 맞서 분투했던 모습을 그린 10장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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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음식문화사 - 프랑스 음식은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었나
마리아 테벤 지음,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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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을 국가의 정체성이자 문화유산, 문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프랑스의 오랜 집념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묘사나 화려하고 낭만적인 요리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프랑스 요리를 둘러싼 경제사와 사회사까지 알고 싶다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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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출판사 리액션 북스Reaktion Books의 '음식과 나라들Food and Nations' 시리즈는 한 권에 한 나라씩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나라의 음식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리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인도, 베트남, 그리스, 스페인, 러시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이렇게 열 권이 나왔는데 이 중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편 세 권만 니케북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위)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위) 『독일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독일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위)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 원서 표지

(아래)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표지

원서를 직접 사 보지는 못하더라도 검색만으로 표지와 본문 미리보기 페이지는 볼 수 있다. 그렇게 원서와 한국판의 표지와 본문 디자인, 편집 스타일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이 시리즈의 경우 원서 표지는 한 나라의 테마 색(그 나라의 국기를 이루는 색 중 하나로 정한 것 같다)으로 인쇄된 음식 무늬 벽지 위에 테마 색으로 가득 채운 단색 띠를 두르고, 그 위에 음식에 관련된 명화와 책 제목, 부제, 저자 이름을 하얀색 글씨로 얹었다. 한국판 표지도 그 나라의 테마 색 하나를 디자인의 기본으로 삼지만, 국기의 색들과 중심이 되는 오브제 하나만으로 간결하게 구성했다(독일 편은 체크무늬를 중심 오브제의 뒤에 깔았지만, 원작의 벽지 무늬보다 간결하고 푸른색과 하얀색의 대비가 강렬해 눈에 더 잘 띈다). 프랑스 편은 프랑스 국기의 푸른색, 하얀색, 붉은색을, 독일 편은 독일 국기의 검은색(실제 표지와 본문 디자인에서는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을 사용했지만)과 노란색, 이탈리아 편은 이탈리아 국기의 초록색, 하얀색, 붉은색을 활용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판의 단순 명쾌한 표지 디자인이 각 나라의 이미지를 더 선명하게 전달해 개인적으로는 한국판 표지를 더 좋아한다.


(위)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원서 본문. 모든 글씨가 검은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한국판 본문. 도판 설명과 각주 텍스트는 푸른색, 각주 표시는 붉은색으로 처리되어 프랑스 삼색기를 연상시킨다.

프랑스 편과 독일 편의 경우 본문에서도 모든 글씨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원서와 달리, 한국판은 도판의 설명과 원어 표기, 각주 텍스트를 그 나라의 테마 색과 같은 색 글씨로 처리했다. 프랑스 편에서는 각주를 나타내는 별 표시까지 삼색기의 붉은색으로 처리해 책 전체가 하나의 삼색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렇게 원서와 한국판의 디자인을 비교해 보는 것도 번역서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다.

프랑스의 음식문화사-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는 보통 '미식'이나 '식도락'으로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과 그것을 만드는 요리법, 요리를 먹고 즐기는 방식과 문화, 그에 대한 담론과 학문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500페이지가 넘도록 이야기한 프랑스의 음식문화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

프랑스도 동물원의 동물들까지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린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굶주리지 않을까'를 고민할 때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만들어 먹을까'를 고민한 것 같다. 토양이 워낙 비옥한 데다, 중세부터 주식인 빵이 제대로 된 품질로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통제해 왔기 때문이다. 음식의 규격과 기준을 구체적이고 명확히 세우는 기준도 그때부터 이어져 와서, 현대에는 원산지 명칭 통제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제도로 와인과 치즈, 버터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들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자국 내에서 자국 음식을 더 세련되고 뛰어나게 개발하고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에서도 선망하는 미식으로 만들기 위해 자국 음식에 온갖 서사를 부여하고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등재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이 장대한 음식문화사를 '가스토로미를 향한 외길'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외길을 가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중심의 가스트로노미라는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버리거나 배척하는 배타적인 면모도 보인다. 저자는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집념과 그것을 이루어낸 저력뿐만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저자는 문화사학자이자 불문학 전공자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프랑스 문학, 역사,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펼쳐나간다. 한 챕터 끝마다 '문학 속 음식'이라는 코너를 두어 거기서 프랑스 음식이 묘사된 프랑스 문학의 한 조각을 소개한다. 별도 코너로 사이사이에 문학 이야기를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한 챕터는 아예 프랑스 문학 속 음식 이야기에 내어주고 있다. 주석에서도 본문만큼이나 할 이야기가 많았던지, 저자 주인 미주도 꼼꼼하게 읽어봐야 된다. 그런 데다 번역자 또한 불문학 전공자라 프랑스 문학과 문화, 역사에 해박해 각주도 꽤 풍성하다. 각주로도 프랑스 역사와 문화, 문학, 요리에 대한 지식을 꽤 많이 얻어 갈 수 있다. 한국판이 원서에 비해 행간도 여백도 더 넓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원서는 344페이지였는데 한국어판은 580페이지로 늘어나지 않았나 싶다.

독일의 음식문화사-개성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음식의 역사를 '가스트로노미를 향한 외길'로 요약한다면, 독일 음식의 역사는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독일인인 저자 자신도 어느 한 가지 뚜렷한 특성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복잡성'이라고 말한다. 독일은 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사방에서 다양한 나라,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왔고 독일 자체도 근대 이전까지는 수많은 지방 소국들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고유의 개성을 지키기보다는 들어오는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개성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그리는 독일의 음식문화사는 독일만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음식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기보다, 독일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식량난에서 벗어나고 다른 나라들의 음식을 받아들여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들을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특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식량난과 그에 대한 대처를 다룬 10장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과 정부가 각각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거기서 전쟁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치 정부를 지지한 것의 대가를 이렇게 혹독하게 겪었는데도, 독일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경제적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했단다. 작가는 이러한 집단적 착각의 위험성을 분명히 밝힌다. 저자 자신의 조국인 독일이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프랑스의 음식문화사』(580페이지)에 비해 분량은 조금 더 많지만(660페이지) 문장은 더 쉽고 경쾌하다. 선사 시대의 식사 장면을 상상하는 1장의 도입부처럼 문학적으로 느껴질 만큼 감성적이고 친근한 부분들도 있다. 프랑스 편과 달리 각주의 대부분은 출처를 표기하는 데 쓰고 있다. 번역자도 프랑스 편에 비해 역자 주석을 많이 달지 않았다. 문학 작품 속 음식 묘사를 별도의 코너로 만든 프랑스 편과 달리, 독일 편에서는 음식 관련 유적이나 지금도 운영되는 역사적인 식당을 소개한다. 프랑스 편에서는 각 챕터 끝에 별도 코너를 놓았는데, 독일 편에서는 본문 중간중간에 넣은 것도 다른 점이다. 저자도 '독일 대표 요리로 내세울 만한 요리는 없다'고 인정해서인지, 프랑스 편이나 이탈리아 편과 달리 해당 국가의 요리 레시피는 하나도 소개하지 않는다.

맛의 제국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사-'이탈리아다움'을 찾아서












한국어판에서는 제목의 이탈리아 앞에 "맛의 제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화려한 음식 문화를 꽃피웠으며 프랑스인들 못지않게 자국 음식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이탈리아인들이고, 서양 요리 중에서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이탈리아 요리다. 그러니 '맛의 제국'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러나 정작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탈리아는 '맛의 제국'보다는 '맛의 연방'에 가깝다.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정부에서 음식의 규격과 기준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음식의 유통 과정을 엄격히 통제했다. 현대에는 국가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들을 원산지 명칭 통제 제도 등 법적 제도로 보호하고, 프랑스 음식 문화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등 자국 음식 문화를 보호하고 홍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천수백 년이 지나서야 이탈리아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 전까지는 수많은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각각의 지역이 각각의 나라인 양 문화도 음식도 달랐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늦어져 숨 가쁘게 발전을 향해 달려왔다가, 1980년대 말에야 과거의 전통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쓰인 시기인 2010년대에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탈리아 요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의문이 자주 제기된다고 저자가 말했으니, 생각보다 '이탈리아다운 음식문화'는 그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것은 아닌 듯하다. 미식이라는 확고한 외길로 가는 프랑스의 음식 문화보다는, 사방에서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점점 발전해 가는 독일의 음식 문화와 더 비슷한 성격이다.

그러나 독일과 다른 점은 경제 발전으로 얻은 부를 음식 문화에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12세기에 들어서 농업이 발전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도시가 번영했다. 그 이후로 전란과 이방 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이탈리아 안의 정치적 분열도 심했지만 도시 국가들은 생산과 교역을 활발히 하면서 부를 쌓았고, 그 부로 예술과 문화에 투자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다. 음식 문화 또한 문화의 한 분야로서 발전했고, 이탈리아는 화려하고 혁신적인 요리의 본거지가 되었다(독일의 경우 남부의 교역을 장악한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세련된 음식 문화를 모방했고, 북부의 교역을 주도한 한자 동맹은 평등주의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식사를 귀족들처럼 화려하고 세련되게 하지는 않았다고, 『독일의 음식문화사』에서는 설명한다).

17세기에 계속되어 온 사회적 갈등, 정치적 분열로 경기가 침체하면서 이탈리아는 음식 문화의 선도자 자리를 잃어버렸고, 그 이후로도 외세의 침입과 지배,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갈등,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격변을 겪어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선 시점에도 이탈리아인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을 따라잡느라 바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198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각 지역의 다양한 전통과 요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역 농가에서 도시 사람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농업 관광(아그리투리스모)가 성장하게 되었고, 기업과 공공기관은 유럽연합이 인증하는 원산지 명칭 보호 마크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뒤늦게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움직임이 정치적인 이득을 노리는 구호나,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의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음식이 얼마나 현실을 물리적으로 강하게 체감할 수 있게 하는 통로인지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음식은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이 이 시리즈 전체의 목적일 것이다.

이 시리즈에 속한 책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그 나라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시대에 음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었는지, 정부는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했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과정과 정책이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개개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폭넓게 살펴본다. 음식 하나만으로도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측면까지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실감할 수 있다. 화질 좋은 컬러 도판도 풍부하게 들어 있어 본문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500~600페이지나 되고 책 무게도 1킬로그램에 가까워 들고 다니기 버거울 정도다. 그만큼 읽을거리는 풍성하다. 이 시리즈의 원서가 출간된 시점과 현재 시점 사이의 시차를 극복해야 하겠지만, 역자 주나 편집자 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일곱 권도 모두 번역 출간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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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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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수필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1년 전부터 1981년까지 53년 동안 오직 여성들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여성 전용 호텔이 있었다. 『호텔 바비즌』은 뉴욕에서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명성이 높았던 ‘호텔 바비즌’과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망라하는 역사책이다.

호텔 바비즌이 문을 열었던 1920년대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호황기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왔다. 도시로 나간 딸이 여성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안심했고, 도시로 온 여성 본인도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안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는 여성 전용 호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호텔 바비즌도 그중 하나였다.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 전용 호텔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호텔 바비즌은 50여 년 동안이나 여성 전용 호텔로 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호텔 바비즌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올라와 바비즌에 머물렀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부터 타이태닉호 사고 생존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몰리 브라운, 작가 실비아 플라스까지 한 시대를 빛낸 유명 여성 인사들이 한때 바비즌에서 살았다. 결국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왔던 수많은 여성들도 바비즌에 머물렀다. 저자는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일상부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바비즌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를 통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자 다른 야망을 품었지만 같은 희망을 품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 머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비서학교의 학생들부터 모델, 배우, 여성 잡지의 객원 편집자들까지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각자의 분야에 자리 잡는 것을 넘어서 더 큰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각자 분투하는 것을 넘어서, 고민을 들어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넘어서서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함께 사업체를 세우며 실질적으로 힘을 더해준다. 부제 그대로 호텔 바비즌에서 일어났던 ‘여성의 독립과 야망, 연대와 해방’의 드라마가 독자들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는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희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들을 둘러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 대공황 시기(1929년~1939년)에는 여성들이 남성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눈총을 받았고, 1950년대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결국 여성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압박했다. 여성들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들 자신도 결혼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바비즌의 투숙객 중에도 바비즌에 머물면서 자기 일을 하는 시기를 단지 결혼생활 전의 과도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야망이 꺾인 투숙객들의 후일담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저자는 그렇게 시대의 구속과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야 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한다. 이 챕터에서 그녀들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책 속의 여성들이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저자는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에 부딪힌다. 호텔 바비즌은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업 시설이었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유명인사들로 호텔을 홍보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중 대부분이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는 젊지 않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가난한 투숙객들의 삶도 적은 분량으로나마 다루고 있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 공모전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고, 선발되고 나서도 미묘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바버라 체이스의 사례를 통해 미국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호텔의 이름을 빛낸 유명 투숙객들과 달리 혼자 쓸쓸히 방 안에서 자살한 투숙객들과,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구석의 작은 객실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호텔 바비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희망도 야망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투숙객들처럼 호텔 바비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여성을 격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성 전용’은 낡은 개념이 되어 1981년부터 남성 투숙객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바비즌은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했지만 바비즌이 상징했던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호텔 바비즌은 지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에도 (주로) 백인 여성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에, 호텔 바비즌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좋은 선례로 기억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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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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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중산층 백인 여성에게 치중해 있지만 그것은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이고, 저자는 젊지 않거나 가난하거나 백인이 아닌 투숙객들의 삶과 역사 또한 짚고 넘어간다. 연대와 해방뿐만 아니라 경쟁하고 질투하고 결혼이라는 굴레에 다시 묶여버린 모습들까지 당시 여성들의 삶을 촘촘하게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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