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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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 일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고 싶다고 누구나 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일할 자격’이 없으면 일할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시장에서 ‘일할 자격’은 어떤 것들일까. 이 책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일할 자격’은 ‘정상성’이다. 젊고 건강하고 신체나 정신에 이상이 없을 것.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저자는 ‘일할 자격’이 있는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밝히고, ‘정상’ 노동자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야기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며 월급이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삶. 이런 삶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쏟는 노력은 비정상적이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수행할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업무 외 시간에도 자기 계발에 힘쓴다. 순종적이면서 자기 주도적이라는 모순적인 인재상은 사실상 실현하기 불가능하니 그런 인재인 척 처세한다. 이렇게 끝없이 노력해도 눈에 보이고 수치화할 수 있는 성과가 있어야만 노력하고 있다고, 성실하다고 인정받는다. 슬프게도 그렇게 노력해서 이룬 성과는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 사회에서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쉬지 않고 달리는 마음을 자기계발서는 동력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은 불안이고 자본주의는 그런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건강하고 성실하고 정상적인 노동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는 우리 내면에 주입된 환상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그 환상을 동력으로 굴러간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환상 속 모범적인 노동자상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람들,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이 보인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청년들, 미혼모, 정신 질환자, 자신도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인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더 나이 든 노인들을 돌보는 일로 떠밀리는 돌봄 노동자들, 과체중이어서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노동자로 치부되는 사람들, 현역병의 신체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충역이 된 사람들. 이들이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비정상’ 노동자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목소리와 이들이 처한 현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정상이라는 범주 밖으로 밀어내고 삶을 영위할 권리마저 위협하는지 분석한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 자신이 정상적인 노동자, 쓸모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관리, 자기 계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을 소진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심지어 조장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 노쇠해지고, 언제라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어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날 수 있다. 이 경쟁 사회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노동력, 더 젊고 건강한 몸들을 찾는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178개의 기술협약 중 현재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22개뿐이고,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협약들에는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근절을 위한 협약, 업무상 재해 급여에 관한 협약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뒷덜미가 서늘해지지 않을 노동자가 어디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자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일할 자격을 요구하며 삶을 영위할 권리조차 공짜로 내어주지 않는다. 세계 인권 선언에 따르면 그 권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인데. 이 사회가 지닌 노동의 환상에 잡아먹히지 말고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직시하라고 하지만, 그 환상을 채워주지 않는 노동자가 다시 노동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이 다 게으른 노동자의 핑계라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실제로 나 자신도 ‘네가 노동자로서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남 탓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도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도 자신도 성실한 사람,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소진되다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 되었을 때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저자는 절망하기보다는 계속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한다. 일할 자격뿐만 아니라 말할 자격조차 박탈하는 힘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동료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비정상의 범주에 있는 노동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1급 몸, 1등 국민, 정상적인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몸, 국민, 노동자를 나누는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일의 세계 안에서도 나다움을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 세상은 ‘일할 자격’을 요구하면서 그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내치는 사회가 아니라, 단순히 ‘일할 권리’뿐만 아니라 더 행복하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일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나도 절망하기보다는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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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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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기 위해 비정상적일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하는 모두를 위한 책. 나 자신도 그런 노력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페이지마다 공감하게 되는 구절이 하나씩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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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누운 한국사 - 요통부터 번아웃까지 병치레로 읽는
송은호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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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재미있는 역사책을 읽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이 책은 어떨까요. 열한 명의 역사 인물들이 앓았던 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각 인물이 어떤 질병을 겪었는지, 그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살펴보고,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책의 효능과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서 시 효능

이 책의 효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입니다. 글 자체의 재미와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이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과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전자입니다. 서문과 목차만 읽어도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지고, 각 챕터의 도입부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 독자들은 쉽게 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각 챕터 앞에는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인물에게 주는 처방전이 있는데, 챕터의 내용을 명쾌하고 발랄하게 요약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처방전 페이지를 약국에서 주는 약 봉투 모양으로 디자인해서 더 유쾌합니다.


각기 다른 두 분야를 접목시킨 책은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기 쉬운데, 이 책은 역사와 약학의 균형이 좋습니다. 역사가 약학에, 약학이 역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역사 지식도 약학 지식도 함께 쌓을 수 있습니다. 각 챕터의 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았던 세계사 속 인물의 이야기도 챕터 끝마다 부록으로 넣어서 세계사 지식도 덤으로 얻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약학 전공이다 보니 약학 부분이 좀 더 탄탄하긴 합니다. 저처럼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병의 증상과 그 원인, 그 병을 치료하는 약과 치료법의 원리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작년에 나온 책이라 최근의 연구 결과, 신약 개발 현황 같은 최신 정보도 담겨 있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의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겠죠.


또 하나의 효능은 공감입니다. 고름이나 이질, 결핵처럼 현대에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은 역사 인물들도 있지만, 지금의 우리도 쉽게 걸릴 수 있는 병에 시달렸던 역사 인물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생존을 위해 늘 긴장 상태로 살면서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렸던 정조,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던 박지원, 스트레스 때문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렸던 순종 등의 역사 인물과 우리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거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래서 병에 걸리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고 역사를 만들었죠. 그 사실이 의학이 발달한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인이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감, 운동 부족, 업무 과다 등으로 어떤 면에서는 병에 더 취약해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병을 안겨주는 환경과 요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작은 위로로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으니까요.

 

독서 시 주의사항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마다 걱정되는 건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입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가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니죠. 역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옛날이야기처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역사 인물이 겪은 병과 그로 인한 역사의 비극,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성적인 문장으로 풀어나가고요.


다만 기존의 잘못된 역사 상식들이 보이니 이 점은 주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노론이 사도세자의 정적이었기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도세자가 실제로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내관과 궁녀들, 심지어 자기 후궁까지 살해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서는 정조가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탕평책을 고수한 것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 어찰 이야기도 했다면 정조와 노론이 대립 관계이기만 한 것처럼 보일 위험에서 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왕이라는 해당 챕터의 큰 그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비밀 어찰 이야기는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정치의 전체 그림을 미리 짜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도 정조의 수명을 깎아낼 만큼 고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비밀 어찰 이야기를 넣었어도 그 챕터에서 말하려는 바(정조는 살벌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평생 스스로를 채찍질해 불면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렸던 왕이었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거나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의 난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태조를 만나러 간 사자들이 태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함흥차사의 전설이 된 것이죠. ‘방석은 명석한 아들이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 이방석이 남의 집 가축을 쏴 죽이고 궁 안에 기녀를 들이고 공부를 싫어하는 등 세자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고요. 조사 하나로도 맥락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고, 대중 역사서는 더 많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팩트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 팩트가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단순한 문장이라도 신중하게 써야 하고요.


그리고 조선 왕은 제후국 군주의 위치에 있는데 황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부분도 보이고, 문종이 아직 왕이 되지 않은 세자를 시호로, 그것도 수백 년 뒤에 숙종이 추존해서 올린 시호인 단종으로 부르는 부분도 보입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작은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효능과 주의사항을 체크해 보시면 내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이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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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누운 한국사 - 요통부터 번아웃까지 병치레로 읽는
송은호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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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약학의 균형과 조화가 좋은데 아무래도 저자 본인의 전공 분야인 약학 부분이 좀 더 탄탄하다. 역사는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옛날이야기처럼 재밌게 풀어가는데, 노론이 정조의 숙적이기만 했다거나 함흥 차사가 태조의 손에 죽었다는 등 잘못된 역사 상식 몇 가지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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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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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에만 읽겠다고 마음 먹은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설국』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설국』과 그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 여행기의 비중이 꽤 큰 데다 책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걷다가는 (전봇대의) 전깃줄에 목이 걸린다는' 에치고유자와의 폭설. 그 안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자도 일부러 눈이 올 때를 기다려 에치고유자와에 갔다니 이 책을 눈 오는 날에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책을 사고 4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지만. 눈 오는 날에 조금씩 읽다 눈이 많이 오던 지난 달 어느 날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여기에 올린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 지금까지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 여정과 문학 세계, 그 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여행한 감상을 촘촘하게 엮어나가기 때문이다. 바느질한 자국도 보이지 않고 눈이 녹아 스며들 듯이. 책장을 덮고 나니 저자와 함께 눈 내리는 겨울날 일본 곳곳을 여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온 것 같다.

저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세계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 '섬세한 허무'. 가와바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년 시절까지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청년 시절에는 첫사랑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슬픔과 이별이 지배했던 성장기를 보냈기에 그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환희와 분노,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가 닿은 곳은 허무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는 서사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가와바타의 묘사들만 읽어도 그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허무에 압도되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 앞에 선 기분이었다.

적막한 설원의 아름다움에는 매번 매혹될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가 돌아올 곳은 결국 따뜻한 집과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니까. 가와바타의 단편 한 편도 안 읽어보고 말하기에 우습지만, 내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짐작한 가와바타의 문학 속 세계는 그런 설원과 같다. 나는 선문답 같은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보다는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 더 공감한다. 섬세한 허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가와바타의 묘사는 매혹적이지만, 문학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는 신념 아래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쓰고 직접 행동했던 오에의 행보를 지지한다(사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도 한 편 안 읽어봤으면서 이러는 것이 우습지만). 내게도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허무보다는 삶을 지향하니까. 그럼에도 분주하고 복잡한 현실 세계에 지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속 세계에 잠시 머물다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섬세한 허무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가 이 정도면 됐다고 느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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