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죄와 벌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 스포일러 포함
어린 시절부터 10년도 넘게 『죄와 벌』을 읽어야지, 라고 마음만 먹다 드디어 『죄와 벌』을 읽었다. 막상 읽어보니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책이라는 선입견은 깨졌다. 올해 상반기 내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져 있었는데, 『죄와 벌』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와는 다른, 도스토예프스키의 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아직 이 책 하나만 읽었지만.
작가 최악의 조합 중 일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광설이 그 중 한 요소로 끼어 있을 만큼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은 대단하다. 출처: 디시인사이드 도서 갤러리
이 책을 읽기 전 작가들의 단점들을 모아 놓은 '작가 최악의 조합' 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광설'이 그 중에 끼어있었다. 읽으면서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그에게 맞서는 조사관 포르피리, 그를 유혹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친구 라주미힌, 심지어 단역에 가까운 인물인 레베자트니코프까지 각자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 전개 위주로 소설을 읽는 편이라, 처음에는 엄청난 양의 장광설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읽으면서 각자의 생각과 개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장광설에 빠져들게 되었다.
장광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과 심리 묘사이다. 거기에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기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을 해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
소설 초반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우연히 술집에서 한 대학생과 장교의 대화를 듣는다. 대학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고, 얼마 있지 않으면 저절로 죽을 노파와 그 노파의 돈으로 할 수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선한 일들이 있다. 노파를 죽이고 노파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선한 일들을 한다면, 그 선한 일들로 노파를 죽인 죄가 보상될 수 있지 않을까?"
2002년 BBC 드라마 버전 속 라스콜리니코프(존 심)의 모습. 그는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하고 나서 작품 내내 죄의식을 느끼다, 자기 합리화하기를 되풀이하면서 괴로워한다.
또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전에 썼던 논문에서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그저 인류의 존속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비범한 사람은 자기 신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어떤 장애든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아닌 자신의 양심에 의거해서. 그는 자신이 그런 비범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노파를 죽인다. 하지만 그는 노파를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작품 내내 괴로워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죄의식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도 스스로 멀어져간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 조사관 포르피리에게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도발한다. (얼마나 대놓고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지 그를 철석같이 믿는 친구 라주미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살인을 들킨 것은 아닐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서히 피폐해져 간다. 그가 이렇게 괴로워한 기간이 불과 2주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져 가는 그의 심리는 거의 800여 페이지에 걸쳐 세밀하게 묘사된다. 읽는 사람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좁고 어두컴컴한 하숙방에 갇혀 함께 미쳐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BBC 2002년 드라마 버전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회개하고 자수할 것을 권하는 소냐(라라 벨몬트).
결국 그는 죄의식으로 인한 괴로움과 자수하라는 소냐의 설득으로 인해 자수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시베리아에 유형을 간 뒤, 그곳까지 자신을 따라온 소냐의 무한한 사랑에 감화돼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하지만 이 결말에 대해서는 독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열린책들판 『죄와 벌』 부록에는 번역자와 러시아 학자 콘스탄틴 모출스키가 각각 쓴 해설이 실려 있는데, 두 사람도 결말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모출스키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할 리 없다는 의견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할 때 자신의 손익을 분명히 따진다. 그는 자수하면 정상참작을 해주겠다는 포르피리의 약속을 분명히 고려했다. 또한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평범하고 무력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더 커 보인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반성하지 않고 "나의 양심은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으로서 선과 악이라는 도덕률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다만 운명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모출스키는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 당시 『죄와 벌』이 연재되던 잡지의 온건한 성향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비범한 사람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와의 사랑, 신과의 화해를 통해 갱생할 것을 암시하는 결말은 '경건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나이젤 테리)
반면 번역자는 결말이 보여주는 그대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나는 번역자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출스키는 선과 악이라는 도덕률을 뛰어넘어서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했던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살한 것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일을 찾지 못하고 권태를 느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자신조차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두냐가 자신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두냐와 강제로 관계를 가지고, 꿈 속에서 다섯 살짜리 창녀가 자신을 유혹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냐에게 그럴 수 없었고, 다섯 살짜리 창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자신을 구해준 아내를 독살하고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반면, 소냐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는 거액을 기부하는 등 선과 악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행동하던 그도, 정작 자신이 선과 악의 도덕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간 결과가 어떤 것인지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몽 속에서 나타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유형지에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전염병에 걸리는 꿈을 꾼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신념이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죽이고 세상은 멸망한다. 사람에게는 자기 신념을 가지고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신념과 자유,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 선 안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선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몽 속 세상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아무리 올곧고 강한 신념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는 변질되기 마련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아가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신과 화해할 것을 암시하는 결말이 지나치게 기독교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냐는 신을 믿으라고 그에게 강요한 적이 없고, 그가 머리맡에 성경책을 둔다고 해서 그가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감화되었다기보다는, 어떤 사상보다 인간의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선과 악도 뛰어넘을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였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소냐, 친구 라주미힌, 여동생 두냐)이 그를 놓지 않았고, 그도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 본연의 감정, 사랑과 선의를 버리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연약했다. 그는 자신의 허점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유형지에서 새로운 삶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끼는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
이런 결말이 도덕적인 설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덕률과 기독교 신앙에 얽매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삶과 이론 사이의 모순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죄의식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고민하기를 멈추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나약하다는 것,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제약하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패배함으로써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는 문장은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좁은 골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가뒀던 마음의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이 말은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