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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
한상호.강성용.김대식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이 책은 동명의 EBS 다큐멘터리를 단행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년 전, 이 책의 공저자 세 명,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감독인 한상호 PD와 두 출연자 강성용 교수와 김대식 교수가 진행하는 북토크에 갔었다. 그런데 저자들이 "이 책을 다 읽고 오신 분?"이라고 물었을 때 손을 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나도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이 책의 도입부 몇십 페이지만 읽고 와서 미안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살다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년 전 북토크이지만 책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라기보다는 다큐를 만들면서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에 대한 수다에 가까웠다는 것은 기억난다(하긴 다 읽은 독자가 한 명도 안 왔는데 어떻게 책에 대해 깊이 얘기하겠는가). 그리고 한상호 PD가 두 가지를 자랑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나는 한국 최초로 생성형 AI 기술을 다큐멘터리에 활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투입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단행본에서는 한상호 PD가 기대했던 효과를 이루었을까.
우선 생성형 AI 기술은 종이책에서 눈에 띄는 효과를 내기 어렵기에, 이 책에서도 생성형 AI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책에서는 삽화가가 그린 삽화나 재연 배우들이 찍은 재연극 장면 스틸컷을 대체한 AI 이미지들로 나타나는데, 고증은 당연히 맞을 리 없고 미묘하게 기괴한 부분들이 보인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손가락들이 갈고리 모양이고, 기차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간디의 옷자락과 두 다리는 나무 뿌리처럼 얽혀 있다. 전쟁터에 나온 말들의 얼굴에는 눈이 이상한 방향으로 붙어 있다. 삽화나 사진에 들일 비용은 절약하면서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인도풍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일어난다.
인도학자 강성용 교수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대담이 이 책의 바탕이 되었지만, 단행본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는 화두를 던지는 장면 정도만 나오고 나머지 내용은 줄글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김대식 교수가 강성용 교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뇌과학자, 아니,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책만으로 보자면 과학자로서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단행본으로만 보면 김대식 교수가 참여했다는 것이 그렇게 큰 메리트인 것 같지 않다.
그 두 가지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 책은 꽤 괜찮은 인도사 입문서다. 고대 인더스 문명부터 현대까지 인도를 이뤄온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어,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를 쭉 훑어보기에 좋다. 그 덕분에 인도라는 나라를 만들어온 정신과 본질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아름다운 북 디자인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인도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긴 했지만 나를 홀린 것은 은은한 황금빛의 가네샤 신상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묵직한 적갈색 하드커버 표지였다. 장중하면서도 인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표지에, 본문도 잡지처럼 감각적인 디자인이고 사진 자료도 많아 소장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막상 정독해 보니,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고 지도는 너무 간략했다. 알고 보니 다큐멘터리에 나온 지도를 그대로 쓴 것인데, 지도에 당시의 주요 도시나 하천, 지형의 이름도 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지도나 도표를 좀 더 활용했다면 책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니 영상보다는 책이 낫다고 생각했다. 머리말에서 극장 안에 두 진행자 강성용 교수, 김대식 교수와 함께 인도사를 빛낸 위인들을 불러모아 대담을 진행한다는 야심찬 발상을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인도 위인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객석에 합성했는데, 2차원 이미지의 입과 팔다리만 움직여 마치 종이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인도 위인들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들은 (아마 전문 성우가 아닐 것 같은데) 일반인 같은 발성과 연기를 보여주어 목소리가 위인의 이미지에 붙지 않고 겉돌았다.

게다가 두 진행자가 인도 영화 <RRR>의 주제가 <Naatu Naatu>에서 가져온 듯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중년이고 춤과 연이 없는 두 사람이 추기에는 안무의 난이도가 높았는지 AI로 만든 두 사람의 캐릭터가 춤을 춘다. 그런데 가상 캐릭터에 두 사람의 얼굴만 씌워 놓은 형태인 데다 두 사람이 무한 증식되기까지 하니 기괴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BBC와 HBO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괜히 비싼 돈 들여 실제 배우로 재연극을 찍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그 두 곳도 CG로 영상을 보강하겠지만).

AI 이미지들 속에서 불쾌한 골짜기가 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책은 정제된 글로 정리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 뒷받침해 꽤 괜찮은 교양 역사서가 되었다. 나는 책에서나 다큐에서나 연출자의 의도와 결과 사이 괴리를 느꼈지만, 한상호 PD 본인은 나와 달리 대만족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참신하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다. 지금은 좀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의도와 결과를 좁혀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AI를 점점 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