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정말 천재다. 여행기가 이렇게 재미있을수가 있을까?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 P15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어 놓고 이야기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 P16

그러나 예의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적어도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 P16

아일레이 위스키를 좋아하는
열광적인 팬에게 있어서
‘아일레이의 싱글 몰트‘라는
말은 은혜로운 교조님의 신탁과도 같은 것이다.

"Islay and whisky come almost as smoothly off the tongue as Scotch and water" - P27

"블렌디드 위스키-소위 스카치-는 안 마십니까?" 내가 그런 질문을 하자, 상대방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유를 하자면, 결혼을 앞둔 자기 누이동생의 용모나 품성에 대해 남이 험담을 늘어놓을 때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물론 마시지 않아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 P37

"맛 좋은 아일레이 싱글 몰트가 코앞에 있는데, 왜 일부러 블렌디드 위스키 같은 걸 마신단 말이오? 그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려는 순간에 텔레비전 재방송 프로그램을 트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 P37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것이 아일레이 섬이다. - P64

아일랜드
로스크레아의 퍼브에서,
그 노인은 어떻게 튤러모어 듀를 마셨는가?

어디를 가도 풍경은 아름답지만, 이상하게도 그림엽서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내미는 것은 감동이나 경탄보다는 오히려 위안과 진정(鎭)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는 입을 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온화한 어조로 몹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데(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일랜드는 그런 느낌이 드는 나라이다. - P85

아일랜드를 여행하노라면, 그처럼 온화한 아일랜드적인 나날들이 조용히 우리 앞에 하나하나 쌓여간다. 이 나라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나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진다. 하늘을 바라보거나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차츰 길어진다. 하지만 그것이 실로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멋진 나날이었음을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다. - P88

퍼브란 꽤 심오한 곳이다. 말하자면, ‘율리시즈‘적으로 심오하다. 비유적으로, 우화적으로, 단편적으로, 종합적으로, 역설적으로 호응적으로, 상호 참조적으로, 켈트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심오하다. - P108

그는 그 위스키를 마셨다.한 모금 마시고 뭔가를 생각하고, 또 한 모금 마시고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론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코드를 잡는 버드 파웰의 왼손의 리듬이 만년에 들어 간간이 느려지는 것이 의식적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기술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건지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젯밤 마이크 타이슨이 라스베가스의 링 위에서 대전 상대의 귀를 물어뜯은 것은 감량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 P119

그럴 때면, 여행이라는 건 참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는 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것을 여행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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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2-27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음보다 두려움이 더 무섭습니다.

새파랑 2022-12-27 18:48   좋아요 1 | URL
앗 ㅋ 저는 누가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거 같아서 죽는게 더 무섭습니다 😅 요 문장 좋아요~!!

모나리자 2022-12-27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하루키로 넘어가셨군요.ㅎ
하루키와 위스키 성지 여행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며칠 남은 12월 좋은 마무리 하시고 새해에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2-12-28 07:27   좋아요 1 | URL
돌고돌아 하루키 입니다 ㅋ 하루키 에세이 너무 재미있네요~!!
 

미학이란게 이런걸까? 단편들이 특이하면서도 아름답다.

귀공자의 시선으로 보면 일 년 내내 거기서 거기인 유곽 여자에 빠져 천편일률적인 방탕을 구가하는 악우들의 하루하루가 오히려 딱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여자에 빠지기로 하자면 평균치는 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만일 방탕을 구가하자면 늘 새로운 방탕이었으면 좋겠다, 귀공자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욕망이 불타고 있었지만 그것을 만족시키기에 알맞은 대상이 눈에 띄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P9

기분이 우울할수록, 마음이 쓸쓸할수록 향락에 동경을 품고 가슴 뛰는 흥분을 찾고자 하는 마음속 답답함은 점점 더 쌓여 갔습니다. - P16

"이 수레의 가마 안에는 남양의 물속에 사는 진기한 생물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문을 듣고 저 멀리 열대 바닷가에서 인어를 산 채로 잡아 온 사람입니다." - P20

"나는 지금까지 은근히 나 자신의 폭넓은 학식과 견문을 자랑해 왔네. 예로부터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제아무리 귀한 생물이라도, 제아무리 진기한 보물이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었어. 하지만 나는 여태껏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물속에 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구나. 내가 아편에 취해 있을 때 늘 눈앞에 빚어지는 환각의 세계에조차 이 유완 한 인어보다 더 월등한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어. 아마 나는 인어 가격이 지금 지불한 대가의 두 배였어도 분명 그대에게서 이 상품을 사들였을 것이야." - P26

"자네는 인어가 아깝지 않은가. 그런 가격으로 나에게 넘긴 것을 이제 새삼 후회하지는 않는가. 자네 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인어보다 보석을 더 진중하는 것인가. 자네는 어찌하여 이 인어를 자네 나라로 가져가려 하지 않는가?" - P31

그 곁에 다가가는 자는 주인인 귀공자뿐인 것입니다. 유리판 한 장을 두고 서로 떨어져 물속에서 헐떡이는 인어와 물 밖에서 고뇌하는 인간은 온종일 묵묵히 마주한 채, 한 사람은 물 밖에 나가지 못하는 운명을 한탄하고 한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유를 원망하며 헛헛하고 하릴없는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P36

그날 밤 그는 나를 붙잡고 예술과 체육의 관계를 도도하게 논하여 들려주었습니다. 적어도 유럽 예술의 근원인 희랍적 정신의 진수를 터득한 자는 체육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모두 인간의 육체미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육체를 경시하는 국민은 결국 위대한 예술을 낳을 수 없다. - P86

"아니, 그럴 걱정은 없어. 부자가 타락하는 것은 그 재산을 더 불려 보겠다고 사업에 뛰어들 때뿐이지. 돈이 많은 자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항상 행복해." - P86

그렇지만 내가 신체 기관인 눈을 가진 이상 육안의 영역이 심안의 영역도 담당해야 한다면, 이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육안의 상실에 큰 가치를 둘 것 이다. - P94

"내 얘기를 좀 들어 봐. - 나는 눈으로 한 번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면, 즉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색채 혹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니면 그림으로 그리거나 문장으로 써낼 가치가 없다고 믿고 있어.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의 육체야. 사상이란 아무리 훌륭해도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게 아니지. 그래서 사상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할 리 없는 거야." - P97

‘인간의 육체에서 남성미는 여성미보다 열등하다. 이른바 남성미라는 것의 대부분은 여성미를 모방한 것이다.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중성의 미라는 것도 실은 여성미를 가진 남성일 뿐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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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을 쓸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그런데 일흔일곱이 된 오늘날, 이미 그런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고 나서 남장을 한 미인이 아니라 여장을 한 미소년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청년 시절의 와카야마 지도리에 대한 기억이 오늘에 이르러 되살아난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아무래도 불능이 된 노인의 성생활(불능이 되어도 어떤 종류든 성생활은 있는 법이다.)과 관계가 있는것 같다. - P11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이성에게 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리라 생각된다. 90세가 되어서도 보란 듯이 자식을 낳은 구하라 후사노스케와 같은 정력은 없고 이미 완전한 무능력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으로 변형된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현재의 나는 그와 같은 성욕의 즐거움과 식욕의 즐거움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나의 심경을 사쓰코만은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채고 있는 듯하다. 이 집안 식구들 중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사쓰코뿐이다.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모른다. 사쓰코는 조금씩 간접적인 방법으로 시험하며 그 반응을 보는 것 같다. - P25

뜻밖에도 나는 사쓰코의 맨발을 만져 볼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나일론 양말을 벗어서 보여 주었다. 나는 그 발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섯 개의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 P27

"내가 사랑의 모험을 할 수 없게 된 데 대한 분풀이로, 하다못해 다른 사람에게 모험을 시켜서 그것을 보고 즐기자는 거야. 사람이 이렇게 되면 이제 불쌍해지는 거지!"

"자기한테 희망이 없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거네." - P71

내 아내조차 사쓰코와 조키치의 결혼을 그렇게 심하게 반대했으니, 그 무렵까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반대를 했을까? 아마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처음부터 댄서 출신과의 결혼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런 혼사가 성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인 내가 손자며느리의 매력에 빠져 그녀에게 페팅을 허락받는 대가로 300만 엔을 투자하여 묘안석을 사 주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는 아마 놀라서 기절했을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나도, 조키치도 의절당했을 터다. 아니 그보다도 어머니가 사쓰코의 용모와 자태를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 P95

어머니는 1883년에 낳은 당신의 아들 도쿠스케가 아직도 이 세상에 생존하여 이 사쓰코 같은 여자, 더욱이 어머니의 손자며느리, 손자의 정처인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며 한심하게도 그녀에게 괴롭힘당하는 것을 즐기고 내 아내, 내 자식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1928년에서 햇수로 33 년 후에 아들이 이런 미치광이가 되고, 이런 손자며느리가 자신의 집안에 들어오게 되리라고 꿈에라도 생각하셨을까? 아니, 나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P97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부상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다.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초래하더라도 오히려 바라는 바다. 하지만 그녀에게 짓밟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개에게 짓밟혀 죽는다면 그것은 견딜 수가 없다. - P110

가급적이면 사쓰코의 용모와 자태를 이와 같은 보살상으로 새겨서 몰래 관음이나세지로 보이게 하여 그것을 내 묘비로 할 수는 없을까? 어차피 나는 신불을 믿지 않는다. 내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있다면 사쓰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쓰코의 입상 아래 묻히는 것이 내 소원이다. - P165

"자네 발바닥을 뜨게 해 줘. 그렇게 해서 이 백당지 색지 위에 주목으로 발바닥 탁본을 뜰 거야."
"그걸 뭐에 쓰게?"
"그 탁본을 바탕으로 사쓰짱 발을 본뜬 불족석을 만들거야. 내가 죽으면 뼈를 그 돌 아래 묻을 거야. 그게 진정 대왕생이지." - P176

"약속대로 수영장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아버님 머리에는 여러 가지 공상이 떠오를 거야. 애들도 기대하고 있고 말이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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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란...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나의 온 삶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 걸까. 고통을 즉시 멈춰야했다. - P15

지금까지 나는 습관이 우리 지각의 독창성과 의식마저 제거하고 무로 돌리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습관을 우리에게 고정된 무시무시한 신으로 간주했고, 그 무의미한 얼굴이 그토록 우리 마음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만일 우리가 거기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태껏 거의 알아볼 수 없던 그 신은 어느 누구보다 무서운 고통을 야기하고, 그리하여 죽음만큼이나 잔인한 존재가 된다. - P17

나는 그녀가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쁜 짓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권태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종류의 슬픔보다 어쩌면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미 여러 번 깨닫지 않았던가. - P19

알베르틴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내게 오로지 이름의 형태로만 존재했고, 그 이름은 잠에서 깨어날 때의 어떤 드문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머릿속에 계속 새겨지고 또 새겨졌다. - P35

우리는 이름을 말하고 또 마음속에 이름을 쓰는 듯 입 밖에 내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은 머릿속에 흔적을 남기며, 그리하여 머릿속은 마치 낙서하기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채워 놓은 벽처럼 마침내 수천 번이나 다시 써 놓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온통 뒤덮이고 만다. 행복할 때면 우리는 생각 속에 내내 이름을 다시 쓰지만, 불행할 때는 더 많이 쓴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이름을 다시 말하다보면, 지속적으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지만, 결국은 피로해진다. - P36

자신을 사랑하는 남성을 괴롭히는 여인은, 마치 스완에게 그토록 잔인했던 오데트가 나의 작은할아버지에게는 지극히 상냥한 ‘분홍빛 드레스 여인‘이었듯이, 자신에게 관심 없는 남성에게는 언제나 착한 여자로 보일 가능성이 많다. 또는 사랑하는 남성이 마치 숨은 신의 결정을 두려워하듯 그 결정 하나하나를 두려워하며 따지는데도, 여인을 사랑하지 않는 남성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기쁘게 하는 그런 하찮은 여자로 보일 수도 있다. - P47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거 속에잃어버린 시간 속에 있어서, 더 이상 우리는 그녀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 P49

우리 감각 세계의 건물을 떠받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며, 믿음이 없으면 건물은 흔들린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이 사람들의 가치와 무용성을 결정하며 또 그들을 만날 때면 느끼는 열광이나 권태의 감정을 결정하는 걸 보아 왔다.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않아 끝나리라고 확신하는 것 만으로도 슬픔이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또는 슬픔이 돌연 커져서 한 존재를 우리의 목숨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믿음은 슬픔을 견디게 한다. 게다가 내가 처음 느꼈던 고통만큼이나 내 가슴의 통증을 격렬하게 만든 것이 있었다. - P57

한 존재와 우리의 관계는 오로지 우리 사유 속에만 존재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 관계는 느슨해지고, 우리는 환상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또 사랑이나 우정, 예의나 체면, 의무감 때문에 타인을 속이면서도 결국은 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 P65

소설의 여주인공에게 사랑하는 여인의 특징을 투사하지 않고는 소설을 읽을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책의 결말이 아무리 행복하게 끝난다 해도, 우리 사랑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아니며, 그러므로 책을 덮었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여인, 또 소설에서 마침내 우리에게 돌아온 여인이 삶에서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 P68

"가엾은 친구에게, 우리의 사랑하는 알베르틴은 이제 세상에 없답니다. 그토록 그 애를 사랑했던 당신에게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하는 나를 용서하세요. 그 애는 산책하던 중 낙마하여 나무에 부딪쳤답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애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애를 대신해서 왜 내가 죽지 못했을까요!" - P107

한 존재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형태를 갖추고 시간이란 틀에 복종해야 한다. 연속적인 순간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존재는 한 번에 한 모습밖에 보여 주지 않으며, 그 모습에 대해서도 단 하나의 사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간들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에게 그것은 큰 약점이지만, 또한 큰 힘이기도 하다. 존재는 기억의 영역에 속하며, 또 어느 한순간의 기억은 그 후 일어난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 그 기억이 기록한 순간은, 그리고 그 순간과 더불어 드러난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런 파편화는 다만 죽은 이를 살아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무한대로 증식한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망각해야 했던 것은 한 명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무한한 알베르틴이었다. 알베르틴을 잃은 슬픔이 견딜 만한 상태에 이르자, 나는 다른 알베르틴, 다른 수백 명의 알베르틴과 더불어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 P110

우리는 오로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실제로 우리 옆에 있는 것만을 소유한다. 얼마나 많은 추억과 기분과 관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 우리의 시계로부터 멀어지는가!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우리 존재를 이루는 전체 속에 포함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비밀통로를 가지고 있다. - P125

예전에 나는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진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했고, 또 그 미래를 읽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지금 마치 미래의 분신처럼 내 앞에 놓인 것은 ― 불확실하고 판독하기 어렵고 신비롭기 때문에 걱정스럽고, 내가 미래에 대해서처럼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나 환상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잔인하고, 또 내 삶 자체만큼이나 멀리 펼쳐질 테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야기할 고뇌를 위로해 줄 동반자가 없기 때문에 더욱 잔인한 더 이상 알베르틴의 ‘미래‘가 아니라, 그녀의 ‘과거‘였다. 그녀의 ‘과거‘라니?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질투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또 질투가 상상하는 것은 항상 ‘현재‘이기 때문이다. - P129

우리 사랑의 톱니바퀴가 얼마나 팽팽하게조였으며 우리 사랑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던지, 그것은 발자크의 중편 소설이나 슈만의 몇몇 발라드에서처럼 처음에는 지체하고 중단되고 주저하면서 전개되다가 빠른 결말로 끝났다. - P144

우리가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여인은 무한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우리 눈에 그녀는 농밀하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오랫동안 다른 여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이유는 여인이 우리 마음속에 파편화된 상태로 존재하는 수많은 다정한 조각들을 일종의 마술적인 부름으로 솟아오르게 하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균열을 지우고, 그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결합하지만, 이런 그녀에게 윤곽을 부여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온갖 단단한 질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그녀에게 1000명의 인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고, 또 어쩌면 그들 중에서도 가장 최하의 인간이라 해도, 우리에게 그녀는 우리의 온 삶이 지향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 P149

우리가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별의 날은 와야하기 때문이다. - P154

내가 느낀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의 표현은 거짓이나 흐릿한 것으로 보이게 했고, 반대로 지극히 시시한 몇 줄의 글은아무리 멀리 있어도 노르망디나 니스," 물 치료 시설, 라 베르마나 게르망트 공작 부인, 또는 사랑이나 부재, 배신과 관련되기만 하면 얼굴을 돌릴 름도 없이 돌연 알베르틴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고, 그러면 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P180

다른사람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생기는 두 가지 주요 원인은 우리 자신이 착한 마음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미소나 시선, 어깨만으로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희망과 슬픔의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을 만들어 내고 한 성격을 구성한다. 그리고 훗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될 때면, 우리가 어떤 잔인한 현실과 마주쳐도 이런저런 시선이나 어깨를 가진 존재에게서 우리를 사랑하는 여인의 착한 성격이나 본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젊었을 때부터 알아 온 사람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사람에게서 그가 가졌던 젊음을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P195

스카프를 목 앞이 아닌 목 뒤로 매면서, 나는 한 번도 다시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산책을 떠올렸는데, 그때 알베르틴은 차가운 공기가 내 목에 닿지 않도록 나에게 키스한 후 스카프를 그런 식으로 매 주었다. 그토록 사소한 몸짓을 통해 기억 속에 되살아난 이 단순한 산책이 마치 우리가 사랑했던 죽은 여인에게 속하는 내밀한 물건, 우리에게 그토록 가치 있는 물건을 여인의 늙은 하녀가 가져다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주었다. 나의 슬픔은 그로 인해 풍요로워졌으며, 더욱이 스카프 생각은 그 후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 P196

나는 커다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내 곁에서 함께 살 사람을 찾고 싶었으며, 그것이 내게는 더 이상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로보였지만, 실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표시였다. 왜냐하면 커다란 사랑을 하고 싶은 이 욕망은 알베르틴의 통통한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내 그리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녀를 망각했다면, 사랑 없이 사는 삶이 보다 현명하고 보다 행복하다고 느꼈을 테니까. - P197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와 다른 존재와 쾌락을 느끼고, 또 그 존재가 우리가 줄 수 없는 감각을 그녀에게 주고, 또는 적어도 그 외모와 이미지와 태도에 의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그녀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어디 있겠는가! 아! 왜 알베르틴은 생루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훨씬 고통을 덜 느꼈을 텐데! - P219

이는 내가 이제 알베르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최근에 사랑했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것이라면 장소든 사람이든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끌었고 고통보다는 더 많은 매혹이 서려 있었던 예전의 보다 오래된 시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녀를 완전히 망각하기 전에, 처음의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똑같은 길로 자신이 떠난 지점에 돌아가 보는 나그네처럼, 나의 커다란 사랑에 이르기 전에 통과했던 모든 감정들을 반대 방향에서 횡단해야 한다고 느꼈다. - P240

다시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고장에서, 그곳에 갈 때 이미 통과했던 역의 이름과 모습을 모두 알아보게 하는 같은 노선의 기차를 타고 귀갓길에 오를 때면, 그래서 한순간 기차가 그런 역 중 하나에 멈출 때면, 우리가 방금 떠난 장소를 향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기차가 다시 출발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런 환상은 이내 사라지지만,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떠난 장소를 향해 다시 실려 간다고 느꼈으며, 바로 이것이 추억의 잔인함이다. - P241

왜 나는 그녀의 말을 믿었을까? 거짓말은 인류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거짓말은 어쩌면 쾌락의 탐색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게다가 실제로 이런 탐색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쾌락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쾌락의 폭로가 명예에 어긋날 때면 그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내내 거짓말을 하며, 특히 어쩌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존경을 욕망한다. - P328

진실이나 삶은 어려운 문제이며, 결국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내게는 피로가 슬픔을 좌우한다는 인상만이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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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골의 글은 재미있다. 그리고 카자크는 호전적이어도 너무 호전적이네 ㅋ

너희들은 보물처럼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아냐? 너희들의 보물은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는 저 넓은 초원과 좋은 말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보물이란 말이다. 이 칼 보이지? 칼이 진짜 너희들 엄마다! 너희 머릿속에 차 있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들이야. 학교, 온갖 책들, 사전, 철학이고 뭐고 말짱 헛것이지! 난 그런 것들에 다 침을 뱉을 거다. - P10

여러분, 주정뱅이 여러분! 이제 맥주는 충분히 마셨습니다. 또 방바닥에 누워서 충분히 빈둥거렸습니다. 또 파리에게 여러분들의 통통한 살점도 충분히 먹였습니다. 이제는 기사의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농부 여러분, 양치기 여러분! 그리고 호색가 여러분! 쟁기질을 하면서 누런 신발도 충분히 더럽혔습니다. 계집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기사의 힘을 헛되게 쓴 것도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카자크의 명예를 드높일 때입니다. - P18

"성모님! 이 두 아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얘들아! 이 어미를 잊지 말아다오. 한마디라도 좋으니 소식을 보내다오!" - P25

"총대장, 어떻소! 자포로제 친구들도 나설 때가 되지 않았소?"
"갈 데가 있어야지."
총대장은 입에서 담뱃대를 빼고 옆으로 침을 뱉고 나서 대답했다.
"어떻게 갈 데가 없다고 하나요? 터키 지방이나 타타르 지방으로 나갈 수 있지 않소."
"터키도 안 되고 타타르도 안 되오.‘
총대장은 다시 담뱃대를 입에 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왜 안 된단 말이오?"
"그렇지 않소. 우리가 술탄(터키의 왕)에게 평화를 약속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마호메트교도 아니오! 하느님도 성경에서 마호메트교도들을 치라고 명령하잖소." - P53

"참아라, 카자크잖아. 그래야 아타만이 되지! 전투 시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군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할 일이 없을 때에도 지루해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꾹 참고,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자기주장을 꿋꿋하게 내세우는 사람이 훌륭한 군인이다." - P83

"내 조국이 우크라이나라고 누가 말했소? 누가 내게 우크라이나를 조국으로 주었소? 조국이란 우리 영혼이 찾는 것이어야 하오. 그래야 무엇보다도 더 그리운 법이오. 내 조국은 당신이오! 나는 당신을, 내 조국을 가슴에 안고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겠소. 카자크 중 누가 이 조국을 떼어 내려고 하는지 한번 봅시다!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팔거나 내주겠소. 내 그런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소!" - P112

"먼저 손가락으로 저를 부르시더니, ‘얀켈‘ 하고 말하기에 제가 ‘안드리 나리님!‘ 하고 대답하니, ‘얀켈! 아버님께 전해라, 형님께 전해라, 자포로제 사람들에게 전해라, 카자크들에게 전해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라. 이제 나에겐 아버지도 아버지가 아니고, 형도 형이 아니고, 친구도 친구가 아니다. 난 그들과 싸울 것이며, 모든 사람들과 싸울 것이다!" - P124

자기 아들 오스타프를 보았을 때, 늙은 불바가 무엇을 느꼈을까? 그때 그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군중 속에서 그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사형장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오스타프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제일 먼저 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그는 동지들을 돌아본 다음, 한 팔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하느님,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여기 서 있는 이단자들이 보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중 누구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게 해주소서!" - P205

"아버지! 어디 계세요! 이 모든 고통을 아시겠지요?"
"암, 내가 여기서 보고 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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