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76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병을 찌르리라는 짓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2
악몽에 무슨 확실한 내용이 있겠어, 그냥 악몽이지. - P73
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 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 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76
나직이 소리 내어 인아가 따라 웃는다.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허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 P93
나는 묵묵히 침대로 다가가 인아에게 입 맞춘다. 인아의 입술에서 쓴 담배 냄새가 난다. 그녀는 아직 나를 비겁자라고 부른 적 없다. 비좁고 높은 평균대 같은, 내가 살고 있는 경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저 이따금 함께 밤거리를 걸어줄 뿐이다. 아무일도 우리 사이에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무정하게, 수차례 으스러지게 서로의 몸을 껴안고 빗장뼈를 어루만지고, 고통에 가까운 애착을 느끼며 따뜻한 살을 비볐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 P102
내가 안 죽였어, 라고 그 여지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자신의 목소리를 흔적없이 삼킨 것이 끔찍한 소음이 아니라 더디게 저무는 여름 햇빛인 것치럼, 두 손으로 운전대를 물든 체 미간을 찌푸린다. - P108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들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그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 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 P117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 P121
그때까지 그여자는 천백년된 생명체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나무-여자의 늙고 깡마른 우듬지를 향해 그 여자는 고개를 꺾어 쳐들었다. 무엇인가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줘봐, 그 여자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가야하는 건지, 당신이 대답해봐.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 떴다. - P123
모든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 P132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 인간적인 한계를 느끼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그날 지하철역까지 선생님이 나를 배웅나온 것이 본래 다정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부끄럽게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 P136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그러니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이지. - P141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기 된 것이 언제 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 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플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 P145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 했는지 몰라. 햇빛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 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밝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 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악돌들이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 P151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 P151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 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때문입 니다. - P154
거진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축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겨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154
혹시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때. - P175
문득 그는 오래전 단과대 극회에서 조명 기구를 불잡고 씨름하던 어느 날을 기억했다. 그는 꼭 한 학기 동안 그 극회에 몸담있는데, 아마도 일생을 통틀어 그가 거의 유일하게 경험한 사치였다. 방금 내리비친 푸른 새벽빛으로 확연히 느낌이 달라진 리허설 무대를 내려다보며 그는 잠시 이 세상을 벗어난 듯한 황홀함을 느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쁨이었다. 무대를 맡은 그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는데, 순간 그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조명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말하는 웃음, 군더더기 없이 마음을 전하는 웃음을 그는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고,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질책하며 후회했었다. - P187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배 밑을 헤엄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 마신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있다. 그게전부다. - P211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원손은 으스러져 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 P213
나와는 닮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나는 그렸다. 어머니는 물론 아니며, 내가 아는 누구와도 닭지 않은 여자. 어떤 영원한 여자. 여성 이상의 여성, 세월의 뒤편에서 낡아가는 사람, 그랬다. 어떤 영원한 사람,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사람, 흔적인 사람, 그림자인 사람, 혹은,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에 스민 누대의 일생들의 자취... - P221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 여자의 어딘가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과거 속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 년 전의 내 갈망이었다.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나, 낡은 마룻바닥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싶었던 나,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었던, 눈비와 들쥐들과 바람 속에 폐가처럼 무너져 내려앉고 싶었던 나. - P221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 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짓고 싶다. 머리를 형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고 동맥을 끊어, 솣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 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 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 P222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다. 잠결에만 보는 형상도 아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두 눈을 멀게 할 듯한 빛의 덩어리가 얼굴을 덮친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회오리처 지나간다. 아침에 눈을 떠, 간밤까지의 내 상황이 고스란히 거기 있어 반복될 것임을 확인할 때, 그래서 굳이 어서 일어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 멍한 눈앞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눈을 휩쓸고, 머리를 휩쓸고, 몸을 휩쓴다. 오래전 여름, 한순간에 보았던 잔멸치 떼가, 믿기지 않는 생생함으로. - P225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 P270
이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노랑무늬영원. - P274
나는 이게 그 말을 이해한다.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흔히 들었던 성경 구절을 이제 이해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가 되고. - P290
결국 나와 아무 관계 없있던 사람이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긴 잠 속에 내 기억도, 설령 형체 뿐이었다 해도,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의 목덜미도, 만져보기 못한 솜털과 따뜻한 살결도. - P292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손을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들 사이로 늦은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없이 몸을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있다. 말없이.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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