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최고다. 단편집중 가장 좋았다.

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76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병을 찌르리라는 짓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2

악몽에 무슨 확실한 내용이 있겠어, 그냥 악몽이지. - P73

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 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 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76

나직이 소리 내어 인아가 따라 웃는다.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허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 P93

나는 묵묵히 침대로 다가가 인아에게 입 맞춘다. 인아의 입술에서 쓴 담배 냄새가 난다. 그녀는 아직 나를 비겁자라고 부른 적 없다. 비좁고 높은 평균대 같은, 내가 살고 있는 경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저 이따금 함께 밤거리를 걸어줄 뿐이다. 아무일도 우리 사이에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무정하게, 수차례 으스러지게 서로의 몸을 껴안고 빗장뼈를 어루만지고, 고통에 가까운 애착을 느끼며 따뜻한 살을 비볐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 P102

내가 안 죽였어, 라고 그 여지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자신의 목소리를 흔적없이 삼킨 것이 끔찍한 소음이 아니라 더디게 저무는 여름 햇빛인 것치럼, 두 손으로 운전대를 물든 체 미간을 찌푸린다. - P108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들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그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 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 P117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 P121

그때까지 그여자는 천백년된 생명체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나무-여자의 늙고 깡마른 우듬지를 향해 그 여자는 고개를 꺾어 쳐들었다. 무엇인가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줘봐, 그 여자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가야하는 건지, 당신이 대답해봐.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 떴다. - P123

모든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 P132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 인간적인 한계를 느끼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그날 지하철역까지 선생님이 나를 배웅나온 것이 본래 다정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부끄럽게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 P136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그러니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이지. - P141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기 된 것이 언제 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 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플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 P145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 했는지 몰라. 햇빛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 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밝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 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악돌들이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 P151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 P151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 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때문입 니다. - P154

거진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축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겨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154

혹시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때. - P175

문득 그는 오래전 단과대 극회에서 조명 기구를 불잡고 씨름하던 어느 날을 기억했다. 그는 꼭 한 학기 동안 그 극회에 몸담있는데, 아마도 일생을 통틀어 그가 거의 유일하게 경험한 사치였다. 방금 내리비친 푸른 새벽빛으로 확연히 느낌이 달라진 리허설 무대를 내려다보며 그는 잠시 이 세상을 벗어난 듯한 황홀함을 느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쁨이었다. 무대를 맡은 그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는데, 순간 그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조명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말하는 웃음, 군더더기 없이 마음을 전하는 웃음을 그는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고,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질책하며 후회했었다. - P187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배 밑을 헤엄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 마신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있다. 그게전부다. - P211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원손은 으스러져 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 P213

나와는 닮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나는 그렸다. 어머니는 물론 아니며, 내가 아는 누구와도 닭지 않은 여자. 어떤 영원한 여자. 여성 이상의 여성, 세월의 뒤편에서 낡아가는 사람, 그랬다. 어떤 영원한 사람,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사람, 흔적인 사람, 그림자인 사람, 혹은,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에 스민 누대의 일생들의 자취... - P221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 여자의 어딘가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과거 속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 년 전의 내 갈망이었다.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나, 낡은 마룻바닥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싶었던 나,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었던, 눈비와 들쥐들과 바람 속에 폐가처럼 무너져 내려앉고 싶었던 나. - P221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 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짓고 싶다. 머리를 형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고 동맥을 끊어, 솣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 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 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 P222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다. 잠결에만 보는 형상도 아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두 눈을 멀게 할 듯한 빛의 덩어리가 얼굴을 덮친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회오리처 지나간다. 아침에 눈을 떠, 간밤까지의 내 상황이 고스란히 거기 있어 반복될 것임을 확인할 때, 그래서 굳이 어서 일어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 멍한 눈앞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눈을 휩쓸고, 머리를 휩쓸고, 몸을 휩쓴다. 오래전 여름, 한순간에 보았던 잔멸치 떼가, 믿기지 않는 생생함으로. - P225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 P270

이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노랑무늬영원. - P274

나는 이게 그 말을 이해한다.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흔히 들었던 성경 구절을 이제 이해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가 되고. - P290

결국 나와 아무 관계 없있던 사람이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긴 잠 속에 내 기억도, 설령 형체 뿐이었다 해도,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의 목덜미도, 만져보기 못한 솜털과 따뜻한 살결도. - P292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손을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들 사이로 늦은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없이 몸을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있다. 말없이.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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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왜 하필 오늘그새를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 P9

그 새를 보았던 길모통이에서 걸음을 멈춘다. 진작 새는 치워졌고, 그 평평한 자리에 눈이 쌓여 있다. 눈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며 생긴 미세한 구멍들을, 그 위로 바늘 도막들처럼 흩어져 있는 침엽수 잎들을 본다. 고개를 들어 그 잎들이 전나무들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한다. 높고 반듯하게 솣은 그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에도 눈이 얼어 있다. 하늘은 파랑고 차가운 햇빛이 우듬지의 윤곽을 에워싸고 있다. 한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다가, 내가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는다. 냉혹할 만큼 완전하게 은희 언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14

사람 몸을 태울 때 기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리.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9

시간이 정말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않도록
다음엔 두려워 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안에 있는 가장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32

베란다 바깥의 차가운 어둠을 오래 내다보다가 책상 앞에 않는다. 노트북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천천히 마른세수를 한다.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 P37

정작가! 원,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무해? 아무리 작은 화상도 제때 치료 안 하면 무섭다는 거 몰라요? 손자르고 발 차르는게 남의 일 같아요?
- P47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있는지,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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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는 있는데 유쾌하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그녀에게서 쾌락을 얻고, 그 쾌락이 어김없기에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 그는 얼마간 이것이 상호적이라고 믿는다. 애정은 사랑 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의 사촌쯤은 된다. 별 가망 없이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은 운이 좋은 셈이다.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되어,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되어. - P8

그는 그녀의 근무시간을 피해 만나면 어떨지 물어볼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저녁시간을, 아니 밤새도록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니다. 그는 그녀를 다음날 아침까지 데리고 있기에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안다. 냉랭하고 무뚝뚝해지며 혼자 있고 싶어 안달할 것이 뻔하다. - P9

그러고 싶지는 있지만 그의 생각이 다른 아버지, 아니 진짜 아버지 를 향한다. 그는 자기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까? 아니면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생각할까? - P15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본 적 없는 남편에 대한 질투의 그림자가 그를 훑고 지나간다. - P19

"왜냐고? 여자의 이름다음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건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선물의 일부야. 여자는 그걸 나눌 의무가 있지" - P27

일주일 전만 해도 그녀는 그저 수업을 듣는 예쁜 학생이었다.그런데 이제 그녀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 숨을 불어넣는 존재가 되었다. - P36

나는 사과 속에 든 벌레 같은 인간입니다. 당신에게 고통을 가한 당사자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P57

"우리가 당신들 손에 아이들을 맏기는 건 당신들을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학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딸을 독사의 소굴로 보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어요. 루리 교수님. 당신이 고매하고 권력있고 온갓 학위를 다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하느님 맙소사, 나는 나 자신이 이주 부끄러울 거에요. 민약 내가 상황을 잘못 짚었다면, 이제 당신이 얘기할 차레입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 P58

그렇게 시험의 날이 다기왔다. 그것은 경고도 없이, 나팔소리도 없이 왔다. 그는 그것의 한가운데에 있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는 것을 보면 멍청한 방식이지만 심장도 그것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와 그의 심장은 이 시험을 어떻게 견더낼까? - P134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매일, 매시간, 매분,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순간,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 포로로 잡혀 있거나 머리에 총알이 박혀 협곡 밑에 있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헤라. 루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 P139

"아버지. 사람들이 물으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 지만 애기하시겠어요?"
그는 무슨 말인지 이헤하지 못한다.
그녀는 반복한다. "아비지힌테 일이 있었는지 애기하세요. 저는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애기할 테니까요" - P141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여긴 시골이에요.여긴 이프리카에요." - P175

소년은 놀라는 것 같지도 않다. 반대로, 이 순간을 대비하고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하다. 그가 말한다. "넌 누구나?"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의미다. 넌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와 있냐? 그의 몸 전체가 폭력 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 P185

"루시. 너는 정말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너도 그걸 알고 있다. 페트루스에 관해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데, 만약 네가 이번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이번에 실패한다면, 넌 제대로 살 수 없을 거야. 네게는 네 자신과 네 미래와 네 자존심에 대한 의무가 있어. 내가 경찰에 전화하겠다. 아니면 네가 하든지." - P188

"그건 너무 개인적이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했어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어요. 나머지는.. 에상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중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 P219

"어쩌면 가끔씩 쓰러지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죠.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 P235

"이제는 말씀드려야겠군요, 이게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페트루스는 꽤 오랫동안 그런 암시를 해왔어요. 그의 가정의 일부가 되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거죠. 농담도 아니고 위험도 아니에요.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진지해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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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서를 거의 못했다. 독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인건지 모르겠다. 대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좋아하는 두가지를 병행 하는건 참 힘든것 같다. 그래도 책을 조금은 읽었다. 기왕 이렇게 된거 리뷰는 포기하고 그동안 소량으로 읽은 책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N25064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최진영

내가 전작하는 국내작가 3명은 한강, 김연수 최진영 작가님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안 살 수 없었다. 소설은 아니고 제주도에서 살면서 경험한 내용을 담은 일기 형식의 노트다. 팬심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작가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작품이어서 추천하고 싶은데, 그냥 최진영 작가님의 작품을 찾는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단 한사람>, <오로라>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들이 보인다. 한화팬인 최진영작가님 올해 매우 행복하실거 같다. 이렇게 최진영 작가님 전작 완료~!



N25065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예전에 열린책들 버젼으로 읽고, 이번에 문학동네 버젼으로 다시 읽었다. 역시나 좋았다.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아쉽다. 버지니아 울프 top 2 작품은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보는데, 그중 <댈러웨이 부인>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 다음번에는 <파도>를 읽어봐야 겠다.



N25066 <7번 국도> 김연수

김연수 작가님의 초창기 작품이어서 그런지 청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스무살> 보다는 별로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팬심을 빼고 보자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로드무비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여름에 7번국도 한번 가야할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김연수 작가님(소설) 전작 완료~!  빨리 신작 내주십시요~!



N25067 <검은 사슴> 한강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다. 한강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인데, 분량이 상당해서 읽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리뷰를 꼭 쓰고 싶었는데 아쉽다.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도 높고 대단히 재미있었다. 결말부분(기차사고)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한강작가님 특유의 무거움과 우울함은 초기작에도 여전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와 어둠, 그리고 위로를 잘 그린 작품. 다음번에는 <노랑 무늬 영원>을 읽어야 겠다.



N25068  <궤도> 서맨사 하비

SF를 자주 읽지는 않지만 우주를 다루는 작품을 좋아한다. <궤도>는 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본 단 하루, 열여섯번의 일출과 일몰 동안 여섯명의 우주비행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아름다운 지구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린 작품인데, 책을 읽는동안 마치 내가 우주정거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구가 아름다운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읽는 작품들은 꼭 리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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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작품이다. 역시 한강작가님은 최고다.

그를 가장 자극했던 것은 호기심이었다. 그 여자가 왜 그랬을까. 왜 미쳤을까. 미친 게 아니라면 왜 옷을 벗었을까. - P50

그러나 그보다 더욱 명윤을 괴롭혔던 호기심은 그녀의 불가해한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침묵. 무수한 말과 형상들로 가득찬 듯한 침묵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영의 말대로 아무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일까. - P50

그는 어느 때보다 직접적인 죽음의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약을 먹거나 기스를 늘어놓는 식의 방법을 택할 마음은 없었다. 만일 한 다면 깨끗하게 뛰어내린 생각이었다. 가장 확실하게. 준비과정도. 구조될 염려도 없이 몇 초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초면 끝난다는 바로 그 생각으로 그는 하루하루를 버텨같 수 있었는지 모른다. - P55

그리고 화요일 아침 그 버려진 개 대신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은 의선이었다. 의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그 늙은 개만큼이나 더러웠다. 그녀는 알몸 위로 나은 남자용 트렌치코트만을 허술하게 여며 입고 있있다. - P79

어디까지 가시죠? 나는 여기서 내리는데요. 선반에 울려놓았년 가방을 내리며 내가 물었을 때 의선은 대답 했다...사실은 저는 갈 곳이 없어요...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의선은 다시 한번 예의 어럼풋한 웃음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때 니는 두고두고 스스로 도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을 했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갈레요? 라고 나도 모르게 물은 것이다. - P88

그때 갑작스럽게 아내가 미치도록 그리위진 것은 무슨 까닭이었까. 단 한 장의 필름도 인화지도 남지 않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장이 깨달은 것은 아내를 완전히 잃있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으므로 아내 역시 잃었다는 것을 뒤늦게 시인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무치는 일인가를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아내를 다시 불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일까. - P123

만일 명윤이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남자였다면 의선과 같은 여자에게 빠질 수 없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윤에게는 앞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있다. 현재의 일 분 일 초가 영원과도 같이 끝나지 않는다고 느껴졌을 때 그는 의선을 만났다. - P174

의선의 행방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든가, 이 눈 내리는 낯선 도시에서 곧 의선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현실은 영화 따위외는 다르다. 그렇듯 쉽게, 극적으로 의선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일어날 성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냉정한 판단인지, 아니면 마음 한켠에 숨어 있는 은밀한 희망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명윤의 말대로 나는 지독히 차가운 인간인지도 몰랐다. 어져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 P237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기어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헤아려 보자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사방이 두꺼운 바위에 막혀있는 탓에 한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돌이로 여긴다지요. - P243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면 이사람은 튜브를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쉽게 사람을 환멸하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결코 타인에게 튜브를 던지지 못할 사람도 있었고, 던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경계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도 있었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던져주고 말 사람도 있었다. 튜브를 거머쥔 꿈속의 내 모습이 스스로를 환멸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 P423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바에야, 내 배반을 진작부터 명징하게 점치고 있는 바에야. 누구도 회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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