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아프리카 인의 배가 부르게 될 때 그때는 어쩌면 코끼리의 미적 측면에도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일반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분 좋은 명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자연은 그들에게 코끼리 배를 가르고, 거기다 이빨을 박고 물어 뜯으라고, 멍멍해질 때까지 먹고 또 먹으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또 언제쯤 고기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 P443

그는 몸을 숙여 코끼리의 무기력한 코를 만졌고, 주름살 사이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눈을 보고 웃어주었다. 그가 코끼리에게 말했다. ‘걱정 말고 가거라. 모두들 갖게 될 거야. 백인도, 흑인도, 회색인도, 황인도, 홍인도, 모두들 갖게 될 거야. 진흙탕이란 한때뿐이야. 거기서 나오게 될 거야. 넌 보게 될 거야. 마침내 그들에게 폐가 생겨나 숨을 쉬게 되는 것을.‘ - P461

나중에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아프리카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영웅으로 세상에 알릴 겁니다. - P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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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사랑이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아마도 이젠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3

불을 켜자 하늘에 남아 있던 것이 자취를 감췄다. 언덕과 별들을 보려면 불 곁에서 약간 떨어져야만 했다. - P14

사람들은 외쳤죠. 러시아 남자라고?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러시아 남자를 사랑할 수 있지? 그럴 때면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어깨를 으쓱하곤 했죠. 당연히, 사랑을 하면서 국적을 고려했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동포들은 그녀를 무척이나 비난했죠. 이웃들은 길에서 만나도 그녀를 빤히 보며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나쳤지요. 용기 있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그녀를 만나면 큰소리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죠. 이를테면 군대 선봉에 서서 그녀를 짓밟고 지나간 사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 P27

장교에게는 전속을 준비할 시간이 사십팔시간 있었는데, 그는 즉각 준비를 했죠. 탈영해서 그녀와 함께 프랑스 영역으로 달아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그들이 프랑스 영토를 택한 것은, 프랑스 인들이 남달리 사랑 이야기를 잘 이해한다는 평판 때문이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 P30

제가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시죠. 그렇지만 그런 걸 어쩌겠어요. 어떤 막연한 욕구, 여기 있고 싶지 않은 욕구가 생기는 걸요. - P32

- 독일 사람이오?
-네.
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는 가방을 바에다 내려놓았다.그렇다면 우리는 동포나 다름없군요. 나도 조금은 독일인인 셈이오. 말하자면 거기 정착해 살았으니까요. 나는 전쟁 때 끌려가서 이년 동안 여기저기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소. 영원히 그곳에 남을 뻔도 했죠. 그 나라에 정이 들어서. - P53

나는 코끼리를 잡지 않아요. 코끼리들과 함께 살 뿐이오. 코끼리를 좇고 연구하느라 몇 달씩 보내곤 하지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끼리를 보고 감탄하죠. 사실 난 코끼리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건 내놓을 거요. 좀 전에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난 독일 사람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어요. 내가 싫어하는 건 훨씬 광범위한 것입니다. - P54

그래서 개머리판으로 이놈을 쳤죠. 이 못된 놈이 코끼리 떼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걸 다시 보는 날이면 내 이놈을 묵사발 내놓을 거라고, 그리고 코끼리들도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하비브에게 전하시오. 그뿐이오. 안녕히 계시오. - P55

원주민들에게는 적어도 구실이 있다. 그들 식량에 단백질이 모자란다는 구실이다. 그들은 먹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한다. 코끼리가 그들에게는 고기인 것이다. 그러니 코끼리를 보호하려면 먼저 아프리카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이는 자연보호를 위한 모든 캠페인의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백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스포츠‘로 사냥을 한다. 총질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에는 그 어떤 말보다 분명한 비탄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첫마디에 곧 명료하게 이해했다. 이 사람에게도 고독이 문제라는 것을. - P57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어떤 허구, 어떤 신화가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탱하게 해준다는 사실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죠. - P61

그리고 그가 마음 깊이 느끼고 있는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하다 보면 그 의미가 달라져버려 그것을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만으로 충분한지, 생각이 단순히 모색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참된 시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닌지, 인간의 뇌 속에 아직 사용되지 않고있는 신경이 있어서 언젠가 이 생각들을 무한한 비전의 영역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 P80

파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 테러라는 보고를 받고 싶었던 모양일세. 내가 보고서 내용을 견지하니까 그들은 정말 빈정거리는 어조로 내게 대꾸하더군, 만일 이 사건이 조직적인 행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난 용서받을 여지가 없을 거라고 말일세. 정말이지 그들은 내가 단지 차드에서 마우마우 테러 집단을 길러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내 책임을 다 못했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네. 결국 그 사람들은 식민지 정책이 반란 폭동이나 학살에 이르지 않는 한 성공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어떤 의미로는 그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 P86

그러나 신문기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둘러쌌다. 모렐이 반기를 들기 전에 지사님께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늘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이 사건이 세상에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대중의 동정은 모렐 편, 코끼리 편으로 기울지 당국 편으로는 기울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삼만 마리의 코끼리를 죽인다는 것, 그것이 모두 당구공과 페이퍼나이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현재 금렵지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 P101

개인적으로는 물론 그들이 어떤 민족주의자들이건 상관 않소.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인이건 홍인이건, 구세대이건 신세대이건 말입니다. 내 관심을 끄는 건 오직 자연의 보호뿐이오. - P154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코끼리 사냥을 금한다는 선언뿐이오. 그것만 실현되면 나는 곧 항복할 것이오. 그들이 나를 감옥에 넣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를 단죄할 프랑스 법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 - P158

그제야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의 신화에 어울리는 사내를 발견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그를 맞으러 나갔지요. 그리고 그의 단순함과 작은 키, 약간 거친 그의 얼굴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란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천진성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는 모든 민중의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그를 전혀 다르게 보고 있어요. - P161

가엾은 모렐. 그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인간들과 더불어 인간적인 이상을 옹호하려고 하는 그 모순을 해결한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P186

그러면 드 생드니 씨, 왜 그녀가 내 이름 앞에 ‘드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더군요) 어떤 사람이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잔인성에, 당신들 얼굴에, 당신들 목소리에, 당신들 손에 질렸다고 해서 당신은 그 사람이 미쳤다고 보세요? 그 사람이 당신들, 당신네 학자, 당신네 경찰, 당신네 기관총과 더는 조금도 닮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둬야 합니까? 요즈음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할 용기가 없을 뿐이죠.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지쳤거나 너무 냉소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이를 이해합니다. 아주 잘 이해하지요. 그 사람들은 그들의 사무실로, 수용소로, 군대로, 공장으로 가서 복종해야 하는 걸 지긋지긋해하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이를 생각하고 미소 짓지요. 나처럼 말이에요. - P190

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동정 따윈 필요 없어요. 많은 남자가 내 위를 덮치고 지나간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건 체념하고 받아들여야죠. 남자들이 바지를 벗었을 때 하는 것으로 그들을 판단할 순 없어요. 정말 더러운 짓을 할 땐 오히려 옷을 입고 하지요. - P191

- 만약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면 저 개들을 어떻게 하나요?
- 일주일을 놔두었다가 그 후엔 가스실로 보내죠. 가죽은 회수하고 뼈는 젤라틴과 비누를 만들죠………… - P272

-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오.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 같은 고집쟁이들이 청원서며 투쟁위원회, 보호조합 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 욕구, 자유 욕구, 또는 사랑의 욕구에 응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 P273

모렐,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자네가 환상을 품지 말았으면 하네. 자네야 괘념치 않겠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자넨 이길 거야. 그렇지만 내 분명히 말하는데, 자넨 총에 맞아 죽을 거야. - P291

그자에게 그런 괴벽이 생긴 건 나치 수용소에 있을 때였다고 뒤파르크는 주장하더군요. 거기서는 그게 밀실공포증과 철조망에 맞서 싸우는 수단이었던 것 같소. 자기들이 아프리카의 자유스런 공간을 질주하는 큰 코끼리 떼라고 상상한다 말이오! 그게 아직도 그자 마음에 남아 있는 거죠. - P323

알고 있소. 모두들 코끼리를 끌어들이는 걸 교활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코끼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저마다 코끼리를 자기 자신에게 맞는 것과 연결시킨다면, 난 그럼 된 거요. 나머지야 뭐, 그들이 공산주의자건, 티토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아랍인이건, 체코 인이건 상관없소. 그런 건 난 관심없소. 그들이 합의만 한다면 난 된 거요.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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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6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늘의 뿌리>야말로 로맹 가리
에서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책인
데...

정작 사서 읽지 않고 뻐팅기고만
있네요. 그것 참.

새파랑 2023-01-27 23:17   좋아요 2 | URL
완전 벽돌책입니다~!! 나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진도가 안나가네요 ㅋ 제가 완독해 보겠습니다~!!

희선 2023-01-27 0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는 사랑이다 코끼리가 나오는지... 제가 얼마 뒤 볼 그림책에 코끼리 나와요 그게 생각나서... 새파랑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1-27 23:18   좋아요 1 | URL
이 책의 주인공이 코끼리입니다 ㅋ 희선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3-01-28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주말 날씨가 차갑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3-01-29 12: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ㅜㅜ 카페 가려다가 추워서 집콕중입니다 ㅜㅜ

감기조심하시고 주말 잘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희선 2023-01-31 0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일월 마지막 날이에요 어느새 2023년 한달이 가는군요 며칠 추웠는데 좀 풀렸습니다 일월 마지막 날 잘 보내고 이월 잘 맞이하세요 새파랑 님 이월에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2-01 12:26   좋아요 1 | URL
이제 2월이 되버렸네요 ㅋ 희선님에게 2월은 좀 더 즐거운 달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뭔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연휴 첫날을 따뜻하게 해준 작품.








부모님 댁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려 애쓰다 떠오르는 대로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정확한 번호는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 꿈은, 두 분이 스무 해를 사셨던,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 아파트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린 현재의 상황과 일치한다. 하지만 꿈속의 내가 잊고 있는 건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스물다섯 해 전에, 어머니는 그후 십 년이 지났을 때돌아가셨다. - P13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단다. 존 너는 너무 잘 잊어버려. 이걸 알아야 해. 죽은 사람은 몸이 묻힌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 P13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 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 P16

사람들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위험을 통제하려 들지. 그러니까 전에 통제됐었던 위험들을 말이야. 나는 처음부터 너를 그냥 혼자 놔뒀어.

혼자라서 외로웠어요.

그건 정말 의외로구나, 얘야. 너는 자유로웠어.

모든 게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요.

당연하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니? 두려움이 없거나 자유롭거나 둘 중의 하나지, 둘 다일 수는 없어. - P30

미덕만으로 살아가는 건, 세네카가 지혜라고 칭했던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건 위험한 일이야. 어머닌 말을 뭉개듯 씹으며 말했다. 설사 그게 진정한 미덕이라고 해도 그건 위험해. 술처럼 중독이 되거든, 내가 직접 겪은 일이야. - P35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어.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 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 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 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랐어. 그러니까 읽지 않은 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창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 P50

그러니까 모든 게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야. 그리고 탄생이 뒤를 따랐어. 탄생이 일어난 건 그게 탄생이 있는 이유인데ㅡ더도 덜도 아닌 처음에, 그러니까 죽음이 있은 후에, 손상된 것들을 고칠 기회를 제공받았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란다, 존 고치려고. - P59

우리 -우리 말이야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 P59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십오년 동안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면 자식들의 시간은 두 배로 빨라지거나 가속이 붙을 때가 많다. - P62

어머니는 첫번째 석등에서 쏟아지는 빛의 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양쪽 송수관 수면에 반사되는 빛이 그 물에 띄운 초처럼 출렁거렸다. 어머니가 금빛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커튼처럼 어머니의 몸을 가렸고, 빛 밖으로 다시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 때문에 몸은 더 작아졌다. 걸음걸이는 점점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멀어질수록 더 활기차졌다. 어머니는 그 다음 금색 커튼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나왔을 땐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숙여 어머니를 따라 흐르는 물속에 손을 담갔다. - P63

제네바는 살아 숨쉬는 사람만큼이나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도시다. 이 도시의 신분증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국적: 중립. 성별: 여성. 나이: (신중함이 개입되는 항목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임. 혼인 여부: 별거. 직업: 옵서버. 신체적 특징: 근시로 인해 약간 구부정한 자세, 비고: 섹시하고 신비로움. - P65

우리 사이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책을 통해 배운다―또는 배우려 한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 그 과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그림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 P93

책을 돌려줄 때면 그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긴 인생을 살아오며 읽은 것을 그만큼 나도 더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한 책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많았다. - P93

사냥을 하는 쪽이든 사냥을 당하는 쪽이든 생존의 전제조건은 잘 숨는 것이다. 목숨은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달렸다. 모든 것이 숨는다. 사라진 것은 숨어 버린 것이다. 빈자리 - 죽은 이의 부재처럼 - 는 버림받은 느낌이 아닌 상실의 느낌을 안겨 준다. 죽은 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 P141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P161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 P224

왜 제 책을 하나도 안 읽으셨어요?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 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어.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 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 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 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 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랐어. 그러니까 읽지 않은 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문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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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1-21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도, 존 버거의 글도, 까뮈의 글귀도 다 좋네요.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파랑 2023-01-21 23:21   좋아요 1 | URL
이 책 오늘 다 읽었는데 완전 좋네요 ㅋ 꼬마요정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2023-01-22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2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책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자전적인 작품이 확실하다 ㅋ


그거야 그 별난 노인네가 가는 데니 어쩔 수 없잖아. 당신 아버지도 예전엔 활동사진은 좋아하셨는데, 점점 나이를 먹어 가니 취미가 요상해지는군. 얼마 전에 어디서 들은 얘긴데, 젊을 때 여자랑 많이 는 인간일수록 노인이 되면 골동품을 좋아하게 된대. 그림이나 다기(茶器) 같은 걸 만지작대는 건 결국 성욕의 변형이라는 거야?" - P12

이런식으로 슬쩍 눈에 들어온 육체는 서른 가까운 나이에 비해 젊고 탄력 있어서,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였다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으리라. 지금이라도 그는 이 육체를, 예전에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안아 줄 친절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다만 슬픈 점은, 거의 신혼 시절부터 그가 이 육체에는 아무런 성적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젊음과 탄력도, 실은 그녀가 몇 년 동안 과부 같은 세월을 보낸 필연적인 결과임을 생각하면 슬픔보다는 묘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 P15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고, 노인에게는 늙어 가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는 감정. 또 한편으로는 그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늙어 간다는 징조며, 자신들 부부가 헤어지려는 건 그도 미사코도 한 번 더 자유의 몸으로 돌아가 청춘을 즐겨 보기 위해서이니, 지금 자신은 아내를 향한 의지로라도 나이를 먹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는 감정이. - P65

"그렇지만 좋은 상황 같은 게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누구든 한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그런 때는 영원히 안 온다고." - P65

누구에게나 이별은 분명 슬픈 일이다. 그건 상대가 누구든, 이별이라는 것 자체에 슬픔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헤어지기에 좋은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기다린다 한들 그런때 따윈 오지 않는다는 다카나쓰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 P67

그렇지만 슬픔이란 결국 다 그런 거 아닌가, 어차피 주관적인 것이니까. ………우리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 서로 미워하면 편하겠지만, 서로 상대방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서 이 모양인 거지. - P72

그렇지만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질릴 때가 온다네. 영원히 계속해서 똑같은 애정을 품는다는 건 무리니까, 약속할 수 없다는 것도 일리는 있어. - P115

가나메는 아내의 고백을 듣고 나서도, 절대로 아소에게 가라고 그녀를 부추기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아내의 연애를 ‘불륜의 사랑‘이라고 지적할 권리가 없으며, 연애가 어디까지 진전되든 자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태도가 간접적으로 미사코를 부추긴 건 분명하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남편의 빠른 이해력이나 깊은 배려심, 관대함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맸어요. 당신이 그만두라고 말해 주면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고압적이더라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라고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기뻤을까. - P120

"헤어지고 싶은가?" 하고 한쪽이 물어보면, "당신은 어때?" 하고 다른 쪽이 되묻는다. 결국 둘 다 헤어지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만한 용기가 없어서, 그저 자신들의 나약한 성격을 저주하며 당황한 상태였다. - P122

하나. 미사코는 당분간 대외적으로 가나메의 아내로 지낼 것.

하나. 마찬가지로 아소는 당분간 대외적으로 그녀의 친구로 지낼 것.

하나.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녀가 아소를 사랑함에 있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유로울 것.

하나. 이렇게 일이 년 경과를 보다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잘해 나갈 것 같은 전망이 보이면, 가나메의 주도로 그녀 친정의 양해를 얻어 대외적으로도 그녀를 아소에게 양도할 것.

하나. 그런 까닭에서 이 일이 년간을 그녀와 아소의 ‘사랑의 시험‘ 시기로 삼는다. 만약 이 시험에 실패하여 양자 사이에 성격 차이가 발견되고, 결혼해도 도저히 원만할 것 같지 않음이 인정된다면, 그녀는 역시 원래대로 가나메의 집에 머무를 것.

하나. 다행히 시험에 성공하여 두 사람이 결혼한 경우, 가
나메는 두 사람의 친구로서 오랫동안 교제를 계속할 것.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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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정말 예술이다. 기억의 힘은 정말 대단한것 같다.

마틸데 피네다양은 내 태생을 모른다고 맹세한 뒤 사람의 인생이란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멘델의 유전이론을 가르칠 때는 조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당연한 이유들이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내 아버지가 저 어디에선가 여자아이들의 목을 치며 돌아다니는 미치광이라면 어쩔것인가? - P220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아우로라, 나는 네 아빠야. 아름다움은 때로 저주가 될 수도 있단다. 사람에게서 가장 나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그 욕망을 피해 갈 수가 없어." - P267

사진은 한 사람에 대한 증거이자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정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기술이란 현실을 왜곡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습을 본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79

충분한 거리와 편안한 기분으로 그 에피소드를 바라볼 수 있는 지금에야 비로소 그가 나에게 빠진 적이 한 번도 없고 단지 무조건적인 내 사랑에 신이 나 있었고, 그 결혼의 이점을 저울질해 본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마도 나를 원했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젊고 약혼자도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어쩌면 게으름과 편의 때문에 나와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 P310

나는 디에고를 절망적으로 사랑했었고 그래서 수사나가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그녀처럼 행동했을까? 아마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실패의 느낌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증오심을 떨쳐 내고 거리를 둔 채 그 불운의 또 다른 주인공들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 P382

"누가 너를 태어나게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리밍.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세베로는 너에게 성을 주고 너를 책임져 준 사람이다." - P405

"내가 해야 할 바를 했지, 리밍. 그러고는 곧 타오 옆에 누워 길게 입맞춤을 했어. 그의 마지막 호흡은 나에게 남아 있지....." - P429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수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 P430

우리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결국 우리가 엮어 놓은 기억뿐이다.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 나는 백금 사진의 영구적인 선명함을 고르고 싶다. 그러나 내 운명에는 그런 빛나는 구석이 조금도 없다. 나는 모호한 색깔들과 불분명한 미스터리,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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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1-17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추인가요ㅎ!?

새파랑님 닉네임과 어울리네요ㅎ 세피아빛 초상ㅎ

새파랑 2023-01-17 18:23   좋아요 1 | URL
강추! 까지는 아니고 별 네개 반? ㅋ 리뷰 써야 하는데 아직 퇴근을 못했습니다 ㅋ

scott 2023-01-20 12:17   좋아요 1 | URL
동감합니다

새파랑님
세피아 !로 ^^

새파랑 2023-01-21 10:25   좋아요 1 | URL
세피아는 예전에 기아차 아닌가요? ㅋ

고양이라디오 2023-01-21 18:26   좋아요 1 | URL
맞아요ㅎ 세피아란 기이차있었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