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 멋진 철학책을 읽은 느낌이다. 이 책은 한번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닌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시선 속에 있을 뿐 바라보이는 사물 속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 P21

그대가 ‘확연한 지식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러 세기 동안 써먹힐 때까지 그대와는 확연히 분리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것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인가? - P21

욕망하는 것은 득이 되고 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도 득이 된다―왜냐하면 욕망은 그렇게 함으로써 증가되니까. 내 진실로 그대에게 말하나니, 나타나엘이여, 욕망의 대상의 늘 거짓될 뿐인 소유보다는 매번 욕망 그 자체가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느니라. - P21

나타나엘이여, 내 그대에게 열정을 가르쳐주리라. 만약 내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을 알았다면 나는 그것들을 그대에게 말해 주었을 것을, 다른 것은 말고, 오직 그것들만을. - P26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 P39

나타나엘이여, 결코 미래 속에서 과거를 다시 찾으려 하지 말라. 각 순간에서 유별난 새로움을 포착하라. 그리고 그대의 기쁨들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말라. 차라리 준비되어 있는 곳에서 어떤 ‘다른‘ 기쁨이 그대 앞에 불쑥 내달게 된다는 것을 알라.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 P45

오, 봄이여! 한 해밖에 살지 못하는 초목들은 그들의 가냘픈 꽃을 더욱 서둘러 피우는구나. 인간에게 봄은 일생동안 한 번밖에 없다. 어떤 기쁨의 추억이 새롭게 찾아오는 행복일 수는 없다. - P59

모든 형태는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같은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각각의 존재를 통하여 형태는 계속되다가 다음에는 그 존재를 포기한다. 나의 영혼이여! 어떠한 사상에도 얽매이지 말라. 어느 사상이든 난바다의 바람에 던져버려라. 바람은 네게서 그것을 걷어내 가리라. 너 자신이 사상을 하늘에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 P74

도대체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밤이 지나가면 새로운 아침이 태어난다는 것을 저 새들은 모른단 말인가? 영영 잠들어 버리게 될까 봐 겁나는 것일까? 하루 저녁에 사랑을 바닥내자는 것인가? 마치 앞으로는 끝없는 밤 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듯이. 늦은 봄의 짧은 밤이여! 아! 여름 새벽이 그들을 깨워줄 때의 그 즐거움. 그래서 다음 날 저녁이 되면 그들은 자다가 영영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조금 덜해질 만큼만 그들의 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 P173

이따금 나는 과거 속에서 한 무리의 추억들을 찾아 그것으로 마침내 이야기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거기서 나는 내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고 나의 삶은 그것을 넘쳐난다. 나는 항상 새로운 순간 속에서만 즉시 살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른바 마음을 가다듬어 명상에 잠긴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구속이다. 나는 이미 ‘고독‘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내면 속에 홀로 있다는 은 아무도 아닌 것이 된다는 뜻이다. 나의 내면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나는 도처(到處)에서가 아니면 내 집에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언제나 욕망이 나를 거기서 몰아낸다. 가장 아름다운 추억도 나에게는 행복의 잔해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주 조그만 물방울이라도, 그것이 눈물 한 방울일지라도, 나의 손을 적셔주면 곧 나에게는 더 귀중한 현실이 된다. - P185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밤들이 있다. 커다란 기대들이 있었다―흔히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기대들이ㅡ사지는 피로하고 마치 사랑으로 인하여 휘어진 듯한데 청해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 침대 위에서. 그리하여 때로는 육체의 쾌락을 초월하여 더욱 깊이 숨겨진 제2의 쾌락 같은 것을 찾으려고도 했다. - P191

그 별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숙명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길이 각각의 별에게는 그가 선호하는 길이지요. 저마다의 길은 완전한 의지에 따른 것이니까요. 어떤 눈부신 사랑이 별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법칙을 확정하게 되니 우리는 그 법칙에 좌우됩니다. 우리는 도망갈 길이 없어요. - P200

내 책을 던져버려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 자신의 자세를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 너 자신의 내면 이외의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라. - P202

인생이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지혜는 이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아! 나는 오늘날까지 너무 조심스럽게 살았다. 새로운 법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법 없이 살아야 한다. 오, 해방이여! 오, 자유여! 나의 욕망이 다다를 수 있는 곳까지 나는 가리라. 오, 내가 사랑하는 그대, 함께 가자꾸나, 그곳까지 그대를 데리고 가리라, 그대가 더욱 멀리 갈 수 있도록. - P214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그날부터. - P216

고통의 끝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왜 기쁨의 끝에 오는 아픔보다 더 크지 못한 것인가? 그 까닭은, 슬플 때는 그 슬픔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생각하지만, 행복에 잠겨 있을 때는 그 행복 덕분에 면하게 되는 고통들을 조금도 머리에 떠올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행복하다는 것이 당연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인 것이다. - P219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끔찍한 거야. 그런 사람에게 종교는 때를 만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 "걱정하지 마라. 진짜는 저쪽 세상에서 시작인거야. 넌 거기 가서 보상을 받게 돼." 그러나 살아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이승’인 것이다. - P286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그대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삶도. 이승의 삶을 위안해 주고 이 삶의 가난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어떤 다른 삶, 미래의 삶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말라. 삶에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깨닫기 시작하는 날부터 그대는 그 고통들의 편을 더 이상 들지 않게 될 것이다.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말라.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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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 피플 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역시 유럽의 문화란~~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몇 번이고 다시 정해야 한다.


프랭크 오하라 - P1

음, 전동성애자예요. 보비가 말했다. 프랜시스는 공산주의자고요. - P15

보비는 내 말에 웃기만 했다. 나는 보통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지만 보비와 있을 때는 분간이 안 됐다. 보비는 항상 완전한 진심도, 완전한 장난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보비가 하는 이상한 말들을 선(禪)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 P21

응, 침묵이 유머러스하더라. - P29

진짜 작가와 화가는 자신이 만든 추한 산물을 영원히 응시해야만 한다.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 너무 추하다는 사실도 싫었지만 얼마나 추한지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도 싫었다. 내가 이 지론을 설명하자 필립은 너 자신을 미워하지 마, 넌 진짜 작가야 하고 말할 뿐이었다.주할 용기가 없는 것도 싫었다. 내가 이 지론을 설명하자 필립은 너 자신을 미워하지 마, 넌 진짜 작가야 하고 말할 뿐이었다. - P39

어차피 테네시 윌리엄스 안 좋아한대, 자연스럽지 않아서. - P50

어떤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뭐든지 유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다면 느낌이 참 이상해. 닉이 말했다. 세상에, 이 사람이 나한테서 뭘 봤을까? 싶지. - P58

나는 닉과 함께하기 위해서 모두에게, 멀리사에게, 심지어는 보비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사실을 털어놓을 사람, 내 행동을 동정해 줄 사람 하나 남겨 두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베개에 얼굴을 꾹 눌렀다. 나는 전날 밤을, 닉이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 말해 주었던 때를,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인정해. 내가 생각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거야. - P185

나는 왜 보비에게는 아빠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는데 닉에게는 할 수 있었는지 자문했다. 닉이 똑똑하고 말을 잘 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때가 많았지만, 그건 보비에게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닉의 공감은 무조건적이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응원하지만 보비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닉이 나를 나쁘게 판단하는 것보다 보비가 나를 나쁘게 판단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닉은 내 생각에 설득력이 없을 때에도, 내 진짜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기꺼이 들어 주었다. - P266

아무도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점차 기다림 같지 않아졌고 그 자체가 인생 같았다. 일어나기를 계속 기다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정신을 딴 데 쏟으려고 다른 일만 하는 것이 인생 같았다. 나는 일자리에 지원하고 세미나에출석했다. 세상은 계속 흘러갔다. - P388

우리가 잘 안 될 걸 알았어야 했어요.
우리 둘 다 항상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닉이 말했다.
내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난 몰랐어요.
음. 하지만 관계가 잘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닉이말했다. 전통적인 관계가 될 수는 없었잖아. - P429

정말로 몸이 움직이질 않았지. 어쨌든, 그때 어떤 기분이
었느냐면, 네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온몸이 완전히 마비된 것 같았어. 지금 통화도 아주 비슷해. 너에게 내 차가 어디 있는지 말하면 난 여길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마음을 바꿀지 모르니까 그냥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있잖아, 난 아직도 당신한테 언제든지 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 있어. 넌 내가 슈퍼마켓에서 아무것도 안 샀다는 걸 눈치챘을 거야. - P432

나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사람과 사물 들이 움직이면서 모호한 계층에 따라 자리를 잡고 내가 지금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었다. 물체와 개념의 복잡한 네트워크, 어떤 것들은 직접 겪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항상 분석적인 입장을 취할 수는 없다. 와서 날 데려가요. 내가 말했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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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10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세번째 작품도 비슷 합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12-11 09:01   좋아요 1 | URL
헛ㄷ ㅋ 노멀피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ㅜㅜ 주말에 금방 읽기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완전 좋다. 골드문트의 기나긴 여행을 함께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건 좋은거라 생각한다. 명작 인정!!






아, 이젠 농부들이 왜 그랬는지도 알겠어. 그들은 어제 우리를 동네에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잖아.맙소사,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어. 흑사병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흑사병이야, 골드문트! 그런데 자네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 안에 있었잖아! 아마도 자넨 죽은 사람들을 건드리기도 했겠지! 물러서!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말아! 자넨 틀림없이 감염되었어. 골드문트, 미안하지만 나는 떠나야겠네. 자네와 함께 있을 수 없다구. - P312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고, 행복은 아름답지만 덧없는 것이며, 젊음 역시 아름답지만 금방 시들고 마는 것이다. - P323

벌써 세상의 모든 현인과 성인들이 그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었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아.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당신한테 흡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바로 지금 이 오두막을 불살라버리고 말겠어. 그리고 우리 모두 자기 길을 가는 거야. 잘 생각해 봐, 레네. 얘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 P326

그렇다. 슬픔도 지나가 버렸고, 기쁨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절망도 지나가 버렸다. 그런 감정들은 흘러가 버렸고, 퇴색해 버렸다. 그 감정들의 깊이와 가치도 상실되었고, 이제 드디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시절이 온 것이다. - P361

일찍이 소년 시절에도 이 준수하고 준엄한 얼굴을 마주 보며,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이 깊은 눈을 마주 보며 속수무책으로 울었던 적이 있는 것이다. 또다시 그럴 수는‘없었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기구한 이 순간에 나르치스가 마치 유령처럼 다시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이제 또다시 그의 앞에서 흐느껴 울어야 한단 말인가?아니면 기절하고 말 것인가? - P400

지나온 인생이 커다란 세 단계로 분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르치스에 의존하고 또 그에게서 벗어났던 시절, 자유를 누리고 방황하던 시절,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성숙과 수확이 시작되는 시절. - P416

더 이상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자유롭고 대등한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 P416

지나온 인생이 이토록 지리멸렬하고 황폐할 수 있단 말인가. 화려한 추억의 잔상은 풍부해도 수많은 조각으로 낱낱이 쪼개져 있으며 아무 가치도 없는 빈곤한 사랑일 뿐인 것이다. - P419

지나온 인생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하고, 달아나고, 잊혀지고, 빈 손에 얼어붙은 가슴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 P420

자네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나쳐 보지 않고 거기에 자신을 바친단 말일세. 그렇게 스스로를 바침으로써 덧없는 것이 최고의 존재로, 영원을 닮은 존재로 숭고해진다네. 우리 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일세. - P445

이 마리아 상은 아주 잘 만들어졌어. 그렇지만 들어보게, 나르치스,이 작품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청춘을 바쳐야만 했네. 청춘의 방황과 사랑, 뭇 여성에 대한 구애가 필요했지. 그 청춘의 추억이야말로 나의 창작의 원천일세. 이제 곧 그 샘물도 말라버릴걸세. 가슴도 메말라가고. 이 작품이 완성되면 한동안은 휴가를 떠날 생각이네. - P452

세상에 등을 돌리고 손을 씻은 채 정결한 삶을 살면서 조화가 넘치는 아름다운 사상의 정원을 꾸며놓고 잘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죄를 모르고 거니는 것보다는 어쩌면 세상의 끔찍스런 흐름과 혼돈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러다가 죄를 짓기도 하고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더 당당하고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 P457

오늘은 내가 자네를 얼마나 좋아하며, 자네가 늘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자네가 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지 털어놓아야겠네. 이런 이야기가 자네한테는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익숙해 있고, 자네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진귀한 게 아닐테니까. 자네는 그토록 많은 여성들한테 귀찮을 정도로 사랑을 받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사랑이 빈곤하고, 나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랑일세. - P469

그런데도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일세. - P470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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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트의 여정 너무 좋다. 타인의 머리속을 여행하고있는 기분이 든다‘






「아니야, 전혀 그런 게 아니야. 인생 자체가 나에게로 다가온 거야. 나는 떠나겠어. 아버지 없이, 누구의 허락도 없이 말이야. 너한테는 부끄러워. 나는 달아나는 셈이지」 - P125

너의 우정과 인내심, 그 모든 것이 고마워. 그리고 힘든 형편인데도 오늘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잖아. 또 나를 제지하지 않은 것도 고마워 - P127

누군가에게 의존해 있던 시절을 돌이켜본다는 것이 사실 그에겐 답답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보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친구가 저 건너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고 아무런 역할도 못 하다니! 그리고 이제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친구와 헤어져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그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며 그의 고결한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 P132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있는 셈이지.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 P132

사랑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느낀 것과 똑같은 깊은 쾌감을 상대방에게도 줄 수 있었다면 그런 느낌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것인가? 그런데도 어째서 온전히 행복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자신의 젊은날의 행운과 나르치스의 미덕과 지혜속에는 어째서 때때로 이 기묘한 고통이 스며드는 것일까? 이 나지막한 불안이, 덧없음에 대한 비탄이 스며드는 것일까? 그 자신이 사색가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때때로 회의하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것일까? - P155

<어째서 아무도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것일까? 분명히 나를 좋아하고 사랑의 밤을 위해 불륜까지‘범하면서 어째서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일까? 대개는 매를 맞을까 겁내면서도 어째서 모두들 금방 남편한테 되돌아가는 것일까? > - P159

긴 하지만 어디에서나 사랑이 그토록 덧없이 사라지는 것은 기이했고 다소 슬프기도 했다. 여자들의 사랑이든 그 자신의 사랑이든 그토록 빨리 충족되었다가 그토록 빨리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옳은 행동이었을까? 언제 어디서나 늘 이런 식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비록 여자들이 그를 원하고 좋아하면서도 짚더미 속이나 이끼 위에서 잠깐 말없는 시간을 보내는것 이상으로는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 자신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그가 방랑 생활을 하기 때문일까? 집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대할 때면 집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여자들이 그를 귀여운 인형처럼 가지고 싶어하고 껴안아주면서도, 그러고 나서는 매맞을 일이 뻔히 예견되는데도 모두들 남편에게로 되돌아간다면 오직 그 자신에게, 그 자신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 P160

이미 한참 전부터 골드문트는 그녀가 말에서 내리기 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사랑에는 말이 필요없지 않은가. 입을 다물고있어야만 햏는데. - P173

당신한테 제 본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니 유감이군요. 대체 제가 어째서 당신을 들뜨게 만들려고 애쓰겠습니까? 당신은 아름답고, 저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꼭 제입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군요. 이런 말보다 백배 천배 더 멋지게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말로는 당신한테 드릴 게 아무것도 없다구요! 말로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배울 게 없고, 또 당신이 저한테 배울 것도 없습니다」 - P179

당신은 너무 사랑스럽고 쾌활해 보여요. 그런데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쾌활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슬픔뿐이에요. 당신의 눈은 마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거든요. 당신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슬퍼 보여요. 당신한테는 고향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은 숲속에서 나타나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당신은 언젠가는 다시 길을 떠나 이끼 위에서 잠을 자면서 방황을 계속할 테죠. 그런데 저의 고향은 대체 어디일까요? 당신이 떠나가더라도 물론 저한테는 아버지도 계시고 여동생도 있죠. 제가 들어앉아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방과 창문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마음의 고향은 사라지고 말거예요. - P182

그래, 이봐, 세상은 죽음으로가득 차 있어. 온통 죽음뿐이야. 울타리마다 죽음이 걸터앉아 있고, 나무마다 그 뒤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 그러니 너희들이 담장을 쌓아올리고, 기숙사와 예배당과 교회를 지어도 아무 소용 없다구. 죽음은 창문 안쪽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웃고 있지. 죽음은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있어. - P219

그런데 죽음에 맞서 저항했던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기묘한 체험이었다. 자기 자신이 왜소하고 비참하며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죽음에 맞서 최후의 각오로 절망적인 싸움을 벌일 때면 생명의 아름답고도 놀라운 힘과 끈질김이 몸 속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그 체험은 여운을 남겼다. 그 체험은 쾌락의 몸짓이나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슴속에 새겨졌다. - P221

선생님께서 만든 마리아 상에 표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저는 그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쁘면서도 놀랐습니다. 제가 찾아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 그 마리아 상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얼굴에는 너무나 많은 고뇌가 서려 있었고, 그와 동시에 모든 고뇌는 순연한 행복과 미소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하자 마리아 상은 마치 불길처럼 제 속을 스쳐갔습니다. 몇 해 동안 품어온 모든 생각과 꿈들이 입증되는 것 같았으며, 갑자기 이제는 더 이상 무용지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니클라우스 선생님, 진심으로 부탁드리오니 선생님 밑에서 배우게 해주십시오. - P238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사랑과 욕망을 인생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다면 무덤과 사멸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골드문트의 어머니는 이브였다. 그녀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죽음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녀는 영원히 낳고 또 영원히 죽이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과 공포는 하나였다. 그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뭔가를 말해 주는 비유가 되었고 신성한 상징이 되었다. - P265

제가 원하는 것은 생생한 삶을 맛보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름과 겨울을 느끼고, 세상을 구경하고, 세상의 름다움과 혐오스러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고 싶고, 이곳 선생님 밑에서 생활하고 배운 모든 것을 다시 잊고 벗어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선생님의 마리아 상처럼 아름답고 가슴 깊이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처럼 되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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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05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역시 재미있다!! 를 알려주는 책이지요? 후훗.

새파랑 2022-12-05 11:20   좋아요 1 | URL
아 ㅋ 재미있는데 책이 좀 두껍네요 ㅋ 아직 절반이 남았습니다~!! ㅜㅜ 제가 방랑하는 기분이 듭니다 ^^

scott 2022-12-07 2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3년 민음이 독서 일력 채워 나가실
새파랑님 새로운 아뒤
골 🌕문트 ^^

새파랑 2022-12-07 23:49   좋아요 2 | URL
저작권에 걸립니다 ㅋ 아 이책 정말 좋네요. 뒷부분은 정말 압권이네요~~!

물감 2022-12-08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쉬운대로 닉네임 골드키위 어떠세요 ㅋㅋㅋㅋㅋㅋ

scott 2022-12-08 18:05   좋아요 3 | URL
물감님 프사 그린 키위색 이네욤 ㅋㅋ 🐸

물감 2022-12-08 18:33   좋아요 3 | URL
오 그린키위... 프사바꾸고서 온갖 별명이 ㅋㅋㅋ

새파랑 2022-12-08 18:36   좋아요 3 | URL
헐 ㅋ 골드키위라니 ㅋ 저 키위 좋아합니다~!! 그러고 보니 물감님 프사가 귀엽습니다~!!

mini74 2022-12-08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골드키위라니요 ㅎㅎㅎ 새파란 골드문트 어떤가요. 아직 젊기에 ㅎㅎㅎ

새파랑 2022-12-08 18:37   좋아요 2 | URL
새파란게 어린놈인 새파랑입니다 ^^ 아직 젊다고 하기에는 좀 ㅋ 저 이제 42라는 ㅜㅜ
 

아 이책 정말 좋네 ㅋ 요건 명작이다.
















나르치스 군, 고백하건대 나는 자네를 두고 한 가지 가혹한 판단을 해왔다네. 나는 곧잘 자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어쩌면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여보게, 자네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존재야. 자네한테는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거든. 제발이지 자네를 꾸짖을 기회라도 왔으면 하고 바랐다네. 하지만 그럴 계기가 있어야 말이지. 자네 또래의 젊은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때로는 자네도 철없이 굴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자네는 절대로 그러지 않거든. 그래서 이따금 자네 때문에 마음을 졸이곤 한다네, 나르치스. - P15

우리 수도원에서 질서와 순종의 미덕이 흐트러진다면 아무리 교육 제도를 개선해도 소용이 없단 말일세.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르치스의 잘못이야. 그리고 자네들 젊은 학자들한테 바라고 싶은게 있다면 자네들보다 우둔한 상급자들이 앞으로도 결코 없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일세. 오만함을 다스리려면 그보다 좋은 약은 없는 법이지. - P21

아름답게 빛나는 이 소년이‘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에겐 이미 태어날 적부터 그 어떤 운명의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는 속죄와 희생의 길을 가야만 하는 남모를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 P30

군계일학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반된 존재인 듯하면서도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나르치스가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또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점이 더 컸다. 둘은 훌륭한 인격자였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재능과 개성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 두드러졌으며, 또 둘은 숙명적으로 그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으며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 P31

골드문트는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재빨리 친구들을 뒤따라갔다. 비틀거리며 화단에 넘어진 골드문트는 촉촉한 내음과 두엄 냄새를 맡았으며, 또 장미 덩굴에 찔려 손에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그는 울타리를 타고 넘어 잰걸음으로 다른 친구들을 뒤쫓아 마을을 벗어나서 숲을 향해 걸어갔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하고 그는 의지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탄식하며 「내일다시올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42

「그래, 사랑하는 친구, 마음껏 울면 금방 나아질 거야. 자, 자리에 앉아.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충분해. 너는 오전 내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 매우 씩씩하게 해냈어. 지금은 우는 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아니라구? 벌써 다 울었어? 그새 괜찮아졌단 말이지? 자 그럼 이제 양호실로 가자꾸나. 거기서 좀 누워 있어, 저녁때쯤이면 훨씬 나아질 거야. 가자구 !」 - P43

그는 이제 서로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졌으며 둘이 서로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자기를 필요로 했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 자신이 나약해져서 골드문트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자신도 이 소년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P46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어린 생명의 비밀을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그 비밀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나르치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당사자에게서 비밀의 베일을 벗겨내고 껍질을 벗게 해주는 것, 친구에게 본연의 천성을 되돌려주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그것은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 P51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둘 사이는 그렇게 멀기만 했고, 둘을 이어주는 마음의 끈은 너무나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마치 눈먼 사람과 멀쩡한 사람이 함께 걸어가듯 둘의 우정은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먼쪽이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수록 멀쩡한 쪽은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식이었다. - P51

그래,골드문트. 난 너와 같은 부류가 아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냐. 물론 나도 말로는 하지 않은 서약을 간직하고 있지. 그건 맞아. 그렇지만 단연코 너와 같은 부류는 아냐. 오늘 너한테 해줄 말이 있는데, 언젠가는 이 말이 생각날 거야.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 P56

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 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P61

나르치스가 말했다. 「바로 그거야. 핵심을 찌르는 말이야. 사실 너한테는 차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오직 차이만이 중요한 것 같아. 나는 본성상 학자이고 내 소명은 학문이야. 그런데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찾아내겠다는 집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학문의 본질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정의하기도 힘들 거야. 나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분류술이라고도할 수 있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면 곧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든. - P68

나르치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어. 마치 해와 달, 바다와 육지가 가까워질 수 없듯이 말이야.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 P70

「물론이지」나르치스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母性)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 P74

이제 생각이 났다.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였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망각의 더께가 걷혔다. 망망대해 같은 망각의 바다가 갈라졌다.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파랗게 빛나는 위엄어린 시선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그 어머니가. - P87

나르치스는 얼마 전에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제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나르치스의 신호나 경고를 시건방지게 잘난 척하는 성가신 행동이라고 곧잘 거부감을 느껴오던 골드문트도 지난번의 커다란 체험 이후로는 이 친구의 지혜로움에 경탄해 마지않는 존경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던가! 또 자기 인생의 비밀을, 숨겨져 있던 상처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아맞혔던가! 그리고 얼마나 지혜롭게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가! - P93

네 마음을 잘 알겠어, 이젠 더 이상 언쟁을 벌일 필요는 없어. 말하자면 너는 이제 깨어난 거야. 이제는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 것이지. 모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과 부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의 차이, 영혼과 정신의 차이말이야. 넌 아마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수도사의 일생을 추구하려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건 네 아버지가 꾸며낸 믿음일 뿐이야. 그런 믿음을 불어넣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속죄하듯이 씻어내려고 하셨던 거야. - P103

그리고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너나 내가 어떤 직책을 맡게 되든 간에, 또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네가 나를 진지하게 불러주고 필요로 하는 그런 순간에 내가 너에게 침묵하지는 않을 거야.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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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1-29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플에도 골드문트님 계시지요 ~

새파랑 2022-11-29 23:14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님이 괜히 골드문트 하신게 아니더라구요. 책 읽으면서 페이지 줄어드는게 아까운 중입니다 ㅋ

scott 2022-12-02 00:22   좋아요 1 | URL
만화에서도 (일본)
골드문트가 쫌 멋진 외모 였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12-03 14:35   좋아요 0 | URL
전 마음은 골드문트지만 외모는...
😅 중요한건 마음 아니겠습니까 ㅋ

꼬마요정 2022-11-30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 책 고등학생 때 읽고 인생책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고 싶은데 그 느낌이 안 날까봐 못 읽고 있어요ㅜㅜ

새파랑 2022-11-30 08:08   좋아요 2 | URL
아 제가 고등학생때 이 책 읽었으면 인생이 바꼈을까요? ㅋ

물감 2022-11-30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그래도 이책 눈독들이고 있었는데 새파랑님 글보니 이거 읽어야 겠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과연 언제............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1-30 12:41   좋아요 2 | URL
아직 3분의 1밖에 못읽긴 했는데 초반은 완전 좋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있는게 좋더라구요 ^^

레삭매냐 2022-11-30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네요.

약간 신화적 느낌이
랄까요.

새파랑 2022-11-30 17:40   좋아요 1 | URL
아마 레삭매냐님은 오래전에 읽으셨을겁니다 ㅋ 어제 이후로 아직 진도를 못빼서 잘 모르겠네요 ㅋ

프레이야 2022-11-30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골드문트 님 소환 ㅎㅎ
중2때 읽고 뭘 제대로 알았을까요. 다시 읽어야… 고전은 생에 주기적으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새파랑 2022-11-30 19:56   좋아요 2 | URL
전 중2때 뭘하고 있었던걸까요 😅 그래서 고전은 고전인가 봅니다 ㅋ

서니데이 2022-11-30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이 제목을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 ˝지와 사랑˝이라고 들어서, 가끔 생각나는 것 같아요. 책의 내용보다도요.
새파랑님, 오늘 날씨가 많이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11-30 20:52   좋아요 2 | URL
전 <지와 사랑> 이 더 어울리는거 같아요. 나르치스라고 하니 나치 생각도 나고 😅 오늘 정말 춥네요 ㅜㅜ

scott 2022-12-01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 작품 읽고
아뒤
골드문트로 바꾸실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12-01 12:08   좋아요 3 | URL
중복아이디 가능 할까요? ㅋ 감기 걸려서 어제 빨리자서 못읽었네요 ㅜㅜ

물감 2022-12-01 13:24   좋아요 3 | URL
골드문트는 뺏겼으니까 아쉬운대로 나르치스 가시죠ㅋ

새파랑 2022-12-01 14:00   좋아요 3 | URL
그런데 제가 나르치스 보다는 골드문트에 더 가까운 성향인거 같아요 ㅋ 그래서 나르치스는 좀 힘들거 같다는 😅

페크pek0501 2022-12-02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6 - 사랑하지 않았다면 상대편에게 불만스럽거나 애석함을 느끼지 않겠죠. 이 문장을 뒤집은 것 같이 느껴졌어요.
젊은 시절의 짐~노년에는~이 문장이 참 좋네요.

새파랑 2022-12-02 16:31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제가 쓴 글이 너무 개판이네요 ㅋ 아 글씨쓰는 연습좀 해야할거 같습니다 ㅜㅜ

Jeremy 2022-12-03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덕분에 제 Kindle 과 대조해가며
한국어로 이 책의 1/3 이상을 오늘 아침 다시 따라 읽은 느낌이에요.
저도 꽤 많은 문장 발췌해 놓았는데 새파랑님께 영감 받아서
겹치는 문장 몇 개만 따로 제 페이퍼로 적고 있는 중입니다.

책 후반부의 더 좋은 문장들도 밑줄긋기 기대해 봅니다.
특히 예술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이 드러나는.

새파랑 2022-12-03 08:53   좋아요 1 | URL
이거 읽다가 갑자기 급한 일ㅇㄱ 생기고 축구본다고 책을 거의 못읽었어요 ㅜㅜ 이번 주말에는 꼭 읽어야 겠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도 기대가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