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절반 읽음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직까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너무도 힘들 게 써나갈 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거요. 삶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삶을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오. - P20

원래 예술은 열정으로 하여금 너무도 아름다운 언어를 말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때의 나보다 훨씬 많은 경험이 필요했던 거요. 그 시절에 내가 조금씩 작곡해 놓은 곡들을 다시 본 적이 있소. 나름 봐줄 만하긴 한데, 당시에 내가 품었던 사념들에 비하면 훨씬 유치하다오. 원래 그런 법이오. 우리의 작품은 우리가 그것을 쓸 때면 이미 지나와버린 삶의 한 기간을 재현하기 때문이지. - P29

책 속엔 삶이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 흔히들 인간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거요. - P39

난 늘 죽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소.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오. 힘이 다 빠진 상태, 아마도 달콤할 패배이리라 생각했지. 그날 이후 사는 내내 그 두 가지 강박적 생각이 번갈아 나타났소 하나에 시달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낫게 해주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어떤 추론도 두 가지 병에서 다 낫게 해주진 못했다오. - P44

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금지된 성향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요. 침묵하든지 아니면 공모자들에게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 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도 연민을 품어주는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진정한 선의가 누릴 자격이 있는 아주 약간의 존중이라도 베풀어줄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 P55

제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 해도 얼마나 덧없는지 이미 절감한 터라,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어디로 가든 죽음에 걸려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영원하다고 할 만한 감정 을 끌어낼 수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타인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우리의 감정을 흔드는 것들 역시 삶이 빌려준 것에 지나지 않지. 지금 나는 영혼도 육신과 똑같이 늙는다는 것을,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영혼은 한 계절 동안만 꽃을 피운다는 것을, 젊음이 그렇듯이 그것은 하루살이 같은 짧은 기적일 뿐임을 절감하오. 그러니, 그대여, 그저 흘러가 버리는 것에 의지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 P64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할 정도가 되었소. 당신을 통해 난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알게 되었고, 나를 통해 당신은 어린 시절의 슬픈 추억을 알게 되었지. 우리는 마치 우리의 과거를 둘로 나누어 살아온 듯 했소, 조심스럽게 오누이의 애정을 나누던 우리 관계에 시간이 흘러갈 때 마다 무언가가 더해졌고, 그때쯤 난 사람들이 우리 결혼할 사이로 본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소. - P89

그리고 꿈꾼다는 건 그대여,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오. 그냥 꿈꾸는 걸로 만족하는거지.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 려 더 감미롭게 언젠가 진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불안이 없으니 말이오. - P91

게다가 두 사람이 하나될 때 무 엇이 솟아오를지, 육체의 호감과 반감 중에서 어느게 나타날지 누가 알겠소 건전하지 못한 생각이었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게 바로 내 생각이었다. - P95

우리는 상대를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잠든 척했소. 아니, 당신은 울었소. 당신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고, 난 못 듣는 척했소. 눈물을 달래줄 수 없을 땐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테니까. - P98

그대여, 우리는 삶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삶은 우리를 마멸시키고, 우리 안에서 마멸되는 것은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오 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단지 나와 나 자신의 타고난 기질 사이에 사건들이 끼어들었을 뿐이오.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고, 어쩌면, 환상과 믿음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되니,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나 그대로였소. 수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성의를 쏟았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나..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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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역시 재미 있었다 ~!!


"체호프는 어디에 있나요?"
"체호프의 어떤 작품을 찾으시나요?"
그러자 여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추천작이 있으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나나에는 그녀를 해외 문학 코너로 안내했다.
"저는 <벚꽃 동산>을 좋아하는데, <바냐 아저씨>도 인기가 있어요. <갈매기>나 <세 자매>도 좋고요, 출판사에 따라 수록된 작품도 달라요." - P95

"생각해봤는데, 난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지도 몰라." 포크를 쥔 손을 내려놓고 유즈키가 말했 다. "나랑 만나지 않는 동안에,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 이 그의 전부라 생각했지." "보통 그렇지. 그걸로 된 거 아냐?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 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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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07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에 체호프 소설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군요 이 시리즈는 안 읽어봤어요 언젠가 볼지...


희선

새파랑 2023-05-07 18:1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 읽었는데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희선님 취향이실거 같아요~!!

페크pek0501 2023-05-0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품 속에서 실제의 작품명이나 작가 이름이 나오면 저는 흥미롭더라고요.ㅋ

새파랑 2023-05-07 18:13   좋아요 1 | URL
ㅋ 체호프 좋아하는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잘알 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5-1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냐 아저씨> 너무 좋아요ㅎ 체호프도 읽고 싶고 히가시노 게이고도 읽고 싶고. 읽고 싶은 게 너무 많네요 요즘ㅎ

새파랑 2023-05-16 17:05   좋아요 1 | URL
저도 읽고싶은 책은 엄청 많은데 시간은 없고, 그런데 책은 계속 사고... 악순환인거 같습니다 ㅋㅋ

고양이라디오 2023-05-16 18:51   좋아요 1 | URL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숙명인 거 같습니다ㅜㅋ
 
 전출처 : 새파랑 > 5월 구매책 프리뷰

2년전 기록이라고 뜨는데

놀랍게도 이때 구매한 9권은 모두 읽었다는 ㅋ

지금은 샀다고 다 읽지는 못하지만..

요즘에는 뜸하신 분들이 보이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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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07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해 전에 산 책은 다 보셨군요 다행이네요 어떤 건 두 해가 지나도 못 볼 때도 있지요 책을 사면 한해 안에 보려고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도 아주 가끔 있네요 사는 책이 별로 없는데도...


희선

새파랑 2023-05-07 18:14   좋아요 0 | URL
저때는 열정이 있어서인지 다 읽었네요ㅋ 지금은...불가합니다 ㅋ

페크pek0501 2023-05-07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북플 기능이 좋더라고요. 모리스, 를 읽고 슬펐했던 기억이 나네요.

새파랑 2023-05-07 18:15   좋아요 0 | URL
가끔 이렇게 알람이 오니까 신기하고 좋더라구요. <모리스> 좋았습니다. <인도로 가는길> 읽어야 하는데 ㅡㅡ
 

어렵게 완독했지만 그만큼 좋았던 책. 인생이라는걸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결혼 전 2년 동안은 무아지경이었다. 둘은 단어와 현재와 상대 방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늘 취해 있었다. 둘은 언어를 바꾸면 지금 함께하는 순간의 음색과 온도도 변한다는 사실을 놀랍게 깨달았다.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머리카락을 훑는 느낌도 달랐다. 언어가 달라지면 감정도 달라지는 듯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 P153

예전에 살던 장소로 돌아가서 뭘 기대하는 걸까? 그가 자문했 다. 추억, 그건 당연하다. 특히 과거의 목소리들과 섞인, 생생하고 장면이 풍부한 추억. 물론이다. 하지만 이 추억에서 뭘 기대하지? 그걸로 뭘 할까? 우리는 마음속으로 과거 먼 곳으로 뻗어 들어가고 넓어지는 것을, 우리 내면의 확장을 느낀다. 이런 건가? 이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미래로 멀리 뻗어나가려 할 때 도움이 될까? - P160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글로 쓴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지. 나는 이제 그 생각들을 그냥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숙고하며 거리를 두고 마주할 수 있어. 생각들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나는 언제나 그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지, 글씨로 표현됨으로써 생각은 예전에 조용하고 일시적인 정신의 일화일 때는 갖지 못했던 확실성을 얻게돼. 이 확실성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생각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배우지. - P162

우리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줘 난 그때까지만 해도 쿠츠민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카를 압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어. - P197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겼어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달라질 테지요. 당신의 미래가 달라지리라는 거야 말할 나위도 없고 말입니다." - P230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순간 시작되 니까." - P235

추억되는 것의 시간이 기니까 추억하는 시간이 길 수도 있지. 또는 지나간 사건의 짧은 순간이 반복하여 다시 나에게 감동을 주고, 한 순간의 감동이 다른 순간의 감동을 부채질해서 추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해. - P241

관이 땅속으로 내려갈 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게 허사라는 허망함이 나를 엄습했어. 런던으로 오다가 굴뚝이 두 개씩인 집들을 지나면서 이 허망함, ‘futility‘-이 영어 단어는 내가 아는 다른 모든 언어보다 더 파괴적으로 느껴졌어-의 반대는 뭘까 생각했지. 대답을 찾지 못했어. 삶이 허 망하지 않은‘ 때는 언제일까? 나는 차를 타고 오면서 또 다른 의문에 휩싸였어. 왜 당신처럼 생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뜯겨버린 경우가 아니라, 나이 들어서 끝난 아버지의 삶에서 이런 허망함을 느낀 걸까. 반대여야 하지 않나? - P253

번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한 친밀함, 연인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네 번역자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것, 그의 상상력에 숨어 있는 알파 벳을 알게 되니까. 그 알파벳이 번역자에게는 지극히 낯설 수도 있네. 그럴때 번역자가 느끼는 낯섦은 평범한 만남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하고 위협적이지. 번역은……… 낯선 내면세계 로 향하는 엄청난 침입일세. 위험하지 번역자는 작가를 그 누구 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또한 그 누구보다도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네. - P301

하지만 이제 몇 주, 어쩌면 며칠만 지나면 다 ‘지나간다‘는 삶이 ‘끝‘이라는 느낌에 담긴 외로움은 누구도 덜어주지 못했지.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격렬하고 필사적이며 혼란한 소원이 있었다. 누군가 와서 나를 이 외 로움에서 건져주기를, 나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품어서 흘러가는 마지막 시간을 나홀로 겪지 않아도 되게 해주기를 바랐지. 누 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 달라야 했지. 누군가 이 마지막 길을 ‘덜어주길 바랐어. 말하자면 내 안에 파고들어와, 나 홀로 무방비상태로 종말에 대면하지 않게 마법처럼 도와주기를. - P318

그런데 난 왜 이 원고를 당신에게 보내는 걸까요? 단 한 사람이 읽는다면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당신에게 보내는 것조차 오랫동안 망설였어요. 그래서 얼마 전 밀라노 갤러리에서 식사를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에서 작별한 뒤에, 당신이 나를 이렇게 알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점점 더 자주 하게 됐어요. 가까운 시일 내에 런던으로 가신다고, 얼마나 머물지 모른다고 하셨지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소포를 어디로 보내는 게 좋겠냐고 묻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묻는 게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언제든 당신이 다시 트리에스테에,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 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시간을 오래 들였으니까요. 이제 당신은 원고를 손에 들고 있어요. 그게 언제든. - P346

질병이 삶이 언제 끝나는지 결정하는 것을 왜 우리가 견디며 받아들여야 할까? 그걸 스스로 결정하는 게 누구나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왜 생각하지 않을까? 누군가 ‘이제 그냥 충분하니까‘라고 말하는 게 왜 훌륭하고 정당한 사유로 간주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당신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함께 듣던 음악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어. 오늘 저녁에 들으면서 내 생각은 당신에게 가 있겠지. 내가 파리로 돌아 가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가는 사람도 당신이 될 테고. - P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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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이어서 이야기가 조금씩은 이어진다.
솔직하고 사라지 않은 문장들이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니. 무슨 지력으로 사랑할 수 있니. 나를 보는 너의 눈을 경유해 나를 보고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잖니. 그러므로 네가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면, 네 눈이 나를 초점화하지 않는다면, 네 눈이 동태 눈깔이면 나는 나를 무어로 상상하고, 내가 무어로 존재할 수 있겠니. 네 시선, 기대, 실망 속에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돼. 아니 그러려고 노력해. 네 바라봄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살 수조차 없어. 지금 나는 생존에 대해 말하고 있어. 네 눈이라는 내 생존의 조건에 대해. - P18

한밤, 나는 초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나를 육박하듯 빠르고 거칠게 공격해오는 내 딸 초롱이 코너에 몰린 나는 기분좋게 당혹 한다. 내가 키운 거한테 내가 먹힌다니. 나는 카이스트에 갈 석형의 딸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초롱이 나의 이상이다. 그런 애들이 있다. 새벽까지 술 먹다 동기 한 놈 집에 쳐들어가 만나게 되는 애들,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야지, 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쾅 닫으며 인사도 없이 들어가는 애들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까며 쾅 하고 후두부를 가격하는 문소리를 내곤 ‘쿨‘하게 사라지는 애들 쾅쾅. 뺨을 갈기듯 문은 내 앞에서 쾅쾅 닫히고 나는 가만히 부러워진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 다는 것이. - P21

"심리학자는 수술 과정에서 알코올로 몸을 닦을 때의 감각이 존슨 씨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수술 상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때로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습니다." - P39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회피하는 사람들. 실눈 뜨고 사는 사람 들, 구지경도 눈꺼풀을 바짝 내리고 사는 거죠. 집에 수북이 쌓인 단수 경고장을 볼 때도, 피임을 안하고 했던 섹스를 떠올릴 때도, 후회할 때도 살기 싫을 때도, 위아래로 떨리는 눈꺼풀 안쪽 어둠 사이로 세상을 흐릿하게 보는 거죠. 그래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를 똑바로 보면 모두를 똑바로 봐야 하니까요. 걔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 P6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남이 나에게 한 잘못 때문에 잠 못 이루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남에게 한 짓 때문에 잠들지 못 한다. - P66

‘악하다‘ 도 그런 말 중 하나였다. ‘되짚다‘보다 ‘복기‘가 ‘잘못 읽다‘보다 ‘독‘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듯, ‘생각이 짧다‘ 정도면 족했을 텐데도 사람들은 기어이 초롱의 소설에 대해 악하다는 표현까지 썼고 거기에는 ‘아‘ 해도 될 것을 ‘악!‘ 하고야 마는 문학의 낯간지러운 과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부당한 환기가 맴돌이치고 있었다. 초롱도 그 점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P75

예전부터 초롱은 궁금했다. 삶에 어떤 위기가 닥쳐야 소극성에서 벗 어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는 사람이 설사가 나온다고 화장실에서 앞사람을 밀칠 수 있을까? 배우자의 불륜 상대에게 물을 끼얹거 나, 의료사고로 가족을 죽게 한 병원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할 수 있 을까? 자의식을 이기는 시련이란 무엇일까? - P83

"우리의 공포는 여기, 이 사무실에 국한돼, 우리는 사무실을 떠 나며 공포도 두고 가. 하지만 여자들은 공포를 간이나 췌장처럼 몸에 지니고 다녀. 떨구고 갈 수 없어. 어디로 갈 수 있겠어? 우린 사 무실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여자들에게 사무실 밖은 사무실 밖 나름의 수천 가지 평대가 피어나는 또다른 사무실인걸. 여자들의 두 려움에는 역사가 있어. 켜켜이 쌓인, 뭐랄까, 지층적 두려움이라 고나 할까? 우리의 얇고 호들갑스러운 두려움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 P135

A군은 자신이 중간에 꽉 끼었음을 알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한번 사랑에 꿰뚫려본 우리가, 다 시는 사랑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A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똥 마려운 개처럼 제자리를 빙빙 돌다 아무 건물에나 올라가 뛰어내려 죽었다. - P184

"너희는 클 거야. 자랄 거야. 그럼 너희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어.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tal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aside childish things. 어릴 적의 일은 뒤로하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의 항상성을 향해 나아간단다." - P233

당신도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하는가? 나는 요새 자주 말의 시간 차공격을 당한다. 오래전에 들은 별것 아닌 말이 멀쩡히 몸을 돌아 다니다 갑자기 내장을 찢는다. 그러면 나는 시간차 공격을 당한 배구 선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상대편 공격수가 뛰어서 나도 뛰었는데, 어느새 공격수는 사라지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음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려넣는 것 같다. 말의 강타, 나는 그저 당할 뿐이다. 도끼날 아래 장작처럼. 게다가 배구와 달리 말의 이차 공격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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