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내가 에세이를 읽는 이유가 고스란히 담긴 책.


첫 책은 눈 감은 상태에서 쓰여야 한다고 믿는다(‘감은 눈‘이 아니라 ‘눈 감은 상태인 게 중요하다). 내 두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모르고 핀다." 첫 책은 모르고 핀 꽃이다. 처음이란 가속력의 바퀴를 달거나 ‘무지‘라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무지에 속력이 붙으면? 모른 채로 훨훨 모르는 곳에 당도하게 된다. 몇 해는 지나봐야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 P39

사랑이 그런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지. 옅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 P45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고 존 버거가 말했던가. 침묵과 고요함은 ‘진짜‘가 갖고 태어나는 위엄이다. - P52

번아웃은 ‘나 아닌 상태‘로 무언가를 이루려 오랫동안 애쓸 때 일어난다. 누군가 내게 노력을 요구할 때 거부감이 드는 건 외부에서 요구하는 노력이 나를 상하게 할 위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사랑을 받기 위해, 얻고 넘고 오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노력은 나에게 성취감 을 주고(물론 좌절감도 주지만) 삶의 의욕을 갖게 한다. 반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 남들을 따라서 하는 노력은 나를 지운다. 이러한 노력은 인생을 무겁게 만든다. 의무감으로 살게 하고 삶을 버텨야 할 시간으로 느끼게 한다. - P59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 P59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다. 행복은 체험이다. 많이 겪어본 사람이 더 자주, 쉽게 겪을 수 있다. 유년에 저금해둔 행복을 한꺼번에 찾아 즐겁게 누리는 어른을 본 적이 없다. - P61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P63

가장 좋은 건 언제나 우연히 왔다. - P85

어른은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워야 한다. 공부하는 어른은 혼자다. 혼자 다짐하고, 혼자 반복하며, 혼자 나아가야 한다. 홀로 도는 팽이처럼 고독하게 곤두서야 한다. 이때 타자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공부하(려)는 어른은 낡지 않는다. 몸은 늙어도 눈은 빛난다. - P97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뭘 시작하는 데 두려움을 갖는다. 그는 ‘망설이는 인간‘이 된다. 새로 일을 시작할 때마다 늘 망설인다. - P101

모든 게 무너져도 남아 있는 것. - P113

"어떤 침묵은 외면이겠지만, 어떤 침묵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따뜻하다" - P200

타인의 슬픔을 다 알 순 없겠지만 내 슬픔의 방 한쪽에 그의 슬픔을 간직 하고 있다. 다 자라지 못한 그의 아이를 간직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눈물을 흘린 까닭은 내 안에 그의 방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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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22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옅은 사랑은 잠깐 지나가는 사랑일까요?
깊어야 진짜 사랑일까요?

새파랑 2023-06-27 06:18   좋아요 0 | URL
저 문장이 <빌러비드>에 나온 문장이라고 한거 같은데, 저는 깊어야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떻게 단편 하나 하나가 이렇게 다 좋을수가 있는지. 감탄에 감탄이다. 내일은 리뷰를 써야겠딘.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문가의 전등 스위치를 향해 갔다. 메아리와 추억으로 풍성한 이 방은 분명 오늘 오후의 영향도 받게 될 터 였다. 어떻게 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 P13

애니타 라이드는 출판사 원고 검토자가 무엇인지 알기 전인 1970년 대에 파이어플라이스 멤버로 춤을 추었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춤추고 노래하는 삶의 흥을 즐겼다. 매력이 넘치고 나름대로 잘생긴 연상의 남자가 그녀를 흠모했고, 이윽고 그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하는 걸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지 않는 걸 견딜 수 없다고 대답했고 그건 진심이었다. - P48

집을 판다는 표지판은 치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서 산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 P64

그는 기다렸다. 왜 기다리는지, 무얼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기다 렸다. 그가 붓을 씻고 아침을 위해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내는 소리만 이 밤의 정적을 깼다. 물감은 말랐고, 그는 전등을 하나만 남기고 다 끈 후 다시 그림에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천사들의 완전함을 보았다. 그가 침대에 누웠을 때 정적을 깨는 바스락거림은 없었고, 그의 살결을 더듬는 손길도 없었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여전히 기다렸지만 꿈 속에서 오직 천사들만이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준다는 걸 알았다. - P176

"굉장히 히스클리프적인데." 황무지에서 말을 타고 경주를 벌이는 사람들을 보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그가 책을 읽어주었는데, 무슨 책이냐에 따라 그녀가 읽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는 그 여름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기억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P180

그녀는 자신이 과거 속 에 살고 있으며 과거는 늘 거기 그녀 주위에 있고 자신은 과거의 일부로 존재할 것임을 알았다. - P185

아침에 앤서니는 그곳에 다시 가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알았다. - P189

너를 다시 보니 기분이 얼마나 묘한지. 난 과거의 시간은 과거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건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집을 지나쳐갔어. 하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 P189

그 편지는 소중했고, 그녀는 편지를 그가 접은 그대로 다시 접어서 간직해두었다. 그녀가 답장을 할 수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던 것이다. - P190

"이제 다 끝났어." 앤서니가 말했다. "끔찍한 시간은 지나갔어." 끝나지 않았다. 기억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잖게 사라지지 않고 악마들을 풀어놓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그녀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 P202

일꾼들이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선다. 붉은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그들의 장홧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 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 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 P206

그녀는 여느 여행에서는 아버지가 독서에 몰입할 때 가끔 소외감을 느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간간이 떠오르는 즐거운 미소, 책장을 넘기는 섬세한 손, 여행중에도 구겨지지 않은 여름옷이 그가 긴 세월을 두고 서서히 얻게 된 마음의 평안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비통함을 잘 견뎌냈다. 어딘가에서, 오늘 그리고 모든 날에, 그가 끝까지 사랑했던 아내는 그가 주지 못한 만족감을 즐겼다. 그는 잔인한 인내심을 발휘해 그가 없는 그녀의 삶에 대해 곱씹으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비우기를 택했고, 그것이 진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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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6-15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몰랐던 작가인데 읽어보고 싶습니다^^ㅎ

새파랑 2023-06-16 18:30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좋아요 ^^
 

작가님이 비슷한 연령대의 인생선배(?) 여서 그런지 공감했다. 저렇게 사는게 쉽지는 않지만 노력은 해야겠지?








에이지리스 Ageless

에이지리스하게 나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꾸준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을 사는 농도가, 나이가 주는 고정관념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진한 것을 의미한다. - P23

남의 시선에 휘둘리는 것은 마흔 살 즈음에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 P25

‘나이가 들면 감정이 메말라간다‘라는 세간에 떠도는 말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에 부합할 이유는 없다. 마음가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두려울게 뭐가 있을까. - P55

자신에게 껍질 같은 것을 씌워놓고서 감정적으로 안전할 것만 추구하면 인생을 얕게 사는 습관이 생기는 것 같다. - P57

나는… 타인이 나한테 뭘 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의 존재가 매력적이어서 같이 있으면 재미 있는 것. 그게 내가 바라는 바다. 그 호감에는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성별도 관련이 없다. 나는 글을 쓰며 혼자 있는 시간을 참 좋아하는데(내가 나와 지내는 시간이다), 최소한 그 시간보다는 재미가 있어야 타인에게 내 아까운 작업 시간을 할애할 것 같다. - P63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다가가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좋아하는 동시에 이미 다가가버리니까. 사람의 호불호에 대해 까다롭지만 한번 누군가가 좋아지면 좋아하는 티를 많이 내고, 그 사람에겐 바보처럼 자발적 호구가 된다. - P64

불안의 궁극적인 치료는 그냥 직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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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가 쓴 작품도 좋고, 하루키에 쓴 작품도 좋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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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5-3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이 있었군요! 방금 구입했습니다. 감사합니다^^ㅎ 하루키에 대해 쓴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럽더라고요ㅎ

새파랑 2023-05-30 19:34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이시라면 대만족하실겁니다 ㅋ
아~ 퇴근해서 리뷰쓰거나 책읽고 싶은데 일이 안끝나네요 ㅡㅡ

고양이라디오 2023-05-30 20:44   좋아요 1 | URL
저런 얼른 퇴근하시고 식사하시고 즐독하세요!!

책 기대되네요ㅎ
 

좋긴한데, 비교하면 안되겠지만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한편을 읽은 기분이었다. 새삼 트레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 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 P12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 P27

"아주머니랑 아저씨한테 아들이 있었는데 개를 따라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죽었다고, 제가 지난주 일요일 미사에 입고 간 옷이 그 애의 옷이라고 했어요." - P68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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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3-05-30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laire Keegan 의 단편집 읽으면 진짜 William Trevor 더 연상됩니다.
새파랑님 정말 예리하신데요! 뭐, 그 정도로 William Trevor 가 Ireland 에서,
Irish 문학에서 대단한 족적을 남겼으니까요.

아직 한국어로는 출간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단편집 <Antarctica>까지 읽었고
다른 단편집 <Walk the Blue Fields> 은 아직 쟁여두고만 있답니다.

<Small Things Like These>의 호평에 이어 <Foster> 영화 Version 이
Academy Award 에서도 각광 받으니 미국에서도
이 책 다시 Hardcover 로 나왔어요.

새파랑 2023-05-30 16:42   좋아요 1 | URL
국내(한국ㅋ) 번역본은 없는거 같더라구요. 요즘 이 책 잘나가는거 같은데 다른 작품도 더 출판되면 좋겠습니다 ㅋ

그런데 책이 너무 얇고 딱 한편만 실려 있어서 좀 그랬습니다 ㅋ 트레버 다시 읽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ㅋ